예나는 오늘 온 하루 먹은 게 별로 없었다.무력하게 몸을 일으킨 예나가 말했다.“어제 감기에 걸린 건지 먹기만 하면 속이 불편해지네요.”현석은 예나를 안아 거실 소파에 앉혔다.“여기 조금만 앉아 있어요. 죽 해줄 게요.”“그럴 필요 없어요. 입맛이 하나도 없거든요.”예나가 입가를 매만졌다.“현석 씨, 세윤이한테 가봐요. 난 좀 혼자 있고 싶어요.”“옆에 있게 해줘요. 아무 말도 시키지 않을 테니까 내쫓지만 말아 줘요.”현석은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 상처받은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속상한 예나를 바라보는 현석의 속도 말이 아니었다.현석은 너무 많은 걸 겪었다.두 눈을 내리깐 예나가 말했다.“현석 씨, 잠시 밖에 나갔다 올 게요. 집에 있는 게 너무 힘들어요.”“같이 가요.”현석은 몸을 일으켜 외투를 꺼내 입고, 예나의 외투도 챙겨 입혔다.“가요.”“현석 씨, 혼자 있고 싶어요. 제발 요…….”예나가 아랫입술을 깨물며 말했다.“혼자 있고 싶어요. 혼자…….”“그럼 앞에서 걸어요. 난 뒤에서 따라갈 게요. 그 어떤 소리도 내지 않을 게요.”현석이 낮은 소리로 애원했다.카리스마 넘치고 살벌하던 강씨 그룹 대표인 현석은, 지금 이 순간 누구보다도 비굴한 모습을 보였다.“현석 씨 그러지 마요. 현석 씨가 그럴수록 내 마음이 너무 불편해요.”예나는 자기 옷깃을 매만지며 말했다.“생각 정리만 마치면 돌아올 게요. 혼자 걸을 수 있도록 해줘요, 네?”예나는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했다.현석은 상처 가득한 예나의 눈을 마주하며 그 역시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한숨을 내쉰 현석이 목소리를 낮췄다.“예나 씨, 생각 정리하고 와요. 여기에서 기다릴 게요.”예나는 발뒤꿈치를 들어 그의 입술에 입맞춤하고 말했다.“현석 씨, 이런 나를 감싸줘서 고마워요. 정리가 끝나는 대로 돌아올 게요.”예나는 몸을 돌려 천천히 걸어가 문을 열고 나섰다.늦겨울, 초봄의
“같이 자자.”세훈이 말했다. 그리고 캐비닛에서 이불 하나를 더 꺼내 침대 위로 올렸다.네 아이는 세윤 방 침대에서 찰싹 붙어 잠을 청했다.창밖의 하늘은 점점 어두워지다가 희붓한 빛이 보이기 시작했고, 이어 동쪽 하늘이 빨갛게 물들더니, 아침 햇살이 방안으로 비쳐 들었다. 또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었다.세윤이 가장 먼저 잠에서 깨었다.잠에서 깨난 아이가 몸을 벌떡 일으키며 말했다.“엄마가 돌아왔을까?”아이는 문을 박차고 아래층을 내려다보았지만, 양 집사가 테이블을 닦고 있는 광경만 보였다.“양 집사 할아버지, 엄마 일어났어요?”양 집사가 고개를 들었다.“어젯밤 대표님과 사모님이 집을 나서고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어요.”세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엄마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어…….”안방으로 달려가자 깨끗하게 정리된, 전혀 사용 흔적이 없는 침대가 보였다.‘어젯밤 엄마랑 아빠가 돌아오지 않은 게 사실인가 봐.’“너무 급해하지 마.”세훈이 덤덤하게 말했다.“아빠한테 전화 걸어볼 게.”웅웅-현석의 전화가 진동했다.그는 안개가 가득 한 길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멀리 보아도 끝이 없는 그런 길이었다.그곳에 얼마나 서 있었던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현석은 굳은 목을 살짝 움직이며 전화를 받았다.“아빠, 엄마랑 어디 있어요?”“집에서 엄마랑 아빠랑 돌아올 때까지 얌전히 있어.”현석은 전화를 끊고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였다.어젯밤 현석은 예나의 핸드폰을 받아 쥐고 그녀를 찾아 골목골목을 돌아다녔으나, 그 어디에서도 그녀를 찾을 수가 없었다.아마 아무도 찾지 못하는 곳에 숨었을 거라고 짐작이 되었다.잠시 생각 정리가 필요하다고 했으니, 정리할 시간을 주는 게 맞았다.그래서 현석은 집 앞 거리에 서서 예나가 돌아오기 만을 기다렸다. 새벽 1시부터 아침 7시가 되고, 깜깜한 날이 밝기까지, 우두커니 서 있었지만 예나는 나타나지 않았다.불길한 마음이 점점 커가고, 마음이 텅 비어 겨울 찬바람이 온몸을 덮쳤다.현석은 먼 곳의 지나가는
예나의 뒷모습은 점점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서서히 CCTV의 촬영 범위에서 벗어났다.현석은 빠르게 다음 카메라로 전환하려고 했으나, 비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대표님, 이 길의 끝은 버려진 건물입니다. 한 달 전, 폐건물의 폭파 승인이 떨어져 주변 카메라도 모두 철수한 상태입니다.”현석의 표정이 어두워졌다.“이 길 제외하고는 카메라가 있나요?”“폐 건물 구역을 넘어서면 작은 어촌이 있습니다. 다만 3년 전 주씨 그룹이 인수하여 주민들은 모두 이주해 철거 중이며, 역시 카메라가 없습니다.”현석의 차가운 눈빛에 정재욱은 진땀을 흘렸다.“하지만 주변 어선에 남은 카메라가 있을 수도 있으니 한번 찾아보겠습니다.”현석이 카메라 속 가녀린 몸매를 주시하다가, 손가락을 뻗어 화면 위를 어루만졌다.“예나 씨, 우리를 떠나지 마요.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어요.”하루 종일 영상을 샅샅이 뒤졌지만 예나의 모습은 더 이상 발견되지 않았다.정재욱은 덜덜 떨며 말했다.“대표님, 바다 수사를 시작할까요?”현석의 날카로운 눈빛이 정재욱을 향했다.“그게 무슨 말입니까?”날카로운 눈빛은 한 쌍의 칼날이 되어 정재욱을 찔렀다.정재욱은 바로 고개를 숙였으나, 꾸역꾸역 말을 뱉았다.“사모님은 이 거리에서 종적을 감췄고, 찾을 수 있는 모든 곳과 영상을 찾아봤으나 사모님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모님이…….”“그럴 리가 없어요!”현석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계속 찾으세요! 성남시를 샅샅이 뒤져서라도 사람을 찾아내세요!”현석을 바라보며 정재욱은 한숨을 내쉬었다. 현석과 오랜 세월 함께 일하면서 이렇게 조급함에 몸부림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이에 정재욱은 숨돌릴 새도 없이 어디 론가 전화를 걸며 재수사를 시작했다.그렇게 한 주일이 흘렀다.목숨보다 아끼고 사랑하던 사람이 사라졌으니, 현석은 그 사이에 많이 수척해지고 초췌해졌다.‘생각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을 왜 곧이곧대로 믿었을까? 예나 씨가 불안정하고, 정신적으로도 문제가 있는 걸 알면
연회장의 가장 구석진 자리에 앉아도, 여지연은 장내에서 가장 주목받는 존재였다.여지연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어머니, 저는 아직 결혼 생각이 없어요.”“그게 무슨 말이니?”백소은이 여지연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혼기가 차면 결혼하는 게 이 세상 당연한 이치인 것을. 내 딸인 너에게 좋은 남편을 찾아 짝을 맺어주는 것도 이 어미가 응당 해야 할 일이란다. 권석훈은 정말 괜찮은 아이야…… 한번 만나보는 게 어떻겠느냐?”“그래요. 언니. 권씨 가문은 우리 성수시에서 제일 큰 가문이잖아요. 권씨 가문 도련님과 결혼할 수 있다는 건 너무나 큰 행운 인걸요.”백소은 옆에 앉은 여지수가 미소를 지은 채로 말했다. 비록 웃고 있는 얼굴이었지만, 눈에는 질투심이 가득했다.여지연은 4년 전 여씨 가문에서 들인 양녀로, 4년 동안 여씨 가문에서 갖은 고생을 했지만, 여전히 고상한 자태를 자랑했다.여지수가 가장 질투 나는 건 여지연의 얼굴이었다. 오똑한 이목구비는 물론, 하얀 얼굴에는 잡티 하나 없었다.타고난 카리스마와 여신의 자태로 사람들은 감히 그녀와 시선을 마주하지도 못했으나, 또 참지 못하고 그녀를 힐긋거렸다.여지연이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그녀는 정말 결혼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여지연은 아직 못다 한 숙제가 남은 것처럼, 이번 생에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3년 동안 매일같이 고민해봤지만 답을 얻을 수 없었다.4년 전, 눈을 처음 뜬 순간, 여씨 가문 사람들이 그녀에게 이름을 물었고 여지연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이름이 도예나라고 밝혔다.그 이름은 머릿속에 꼭 박혀 기억을 잃었어도 이름만은 남아있었다.여지연이 눈을 뜬 날, 백소은이 여지연의 손을 잡으며 이렇게 말했다.“우리 여씨 가문 사람이 해안가에서 널 구조해서 데리고 왔단다. 큰 부상을 입은 너를 우리가 고액의 치료비를 지불하고 목숨을 구했어. 왠지 너와의 인연이 심상치 않은 것 같은데 우리 가문의 양녀로 삼고 싶구나. 앞으로 네 이름은 여지연이란다.”예나
“여지연은 네 아버지가 구하지 않았더라도 다른 어부들이 구했을 거야. 어쨌든 목숨을 구할 수 있었던 여지연과는 달리 너는…….”백소은이 의미심장하게 말을 이었다.“마침 너와 혈액형이 딱 맞는 여지연이 나타나, 혈액 교체 수술이 성공할 수 있었어. 여지연이 없었다면 넌 진작 죽을 목숨이었다고…….”“알았어요, 그만 해요!”여지수는 기분이 나빠졌고 몸을 벌떡 일으켰다.“날 살렸다는 건 절대 여지연한테 알려주지 마요. 괜히 더 잘난 척할 거예요!”여지수는 백소은의 손을 뿌리치고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백소은은 여지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여씨 가문은 여지수를 살리기 위해 정말 많은 애를 썼다.10년이 걸려 적합한 혈액을 가진 여지연을 만났고, 여지연의 의지와 상관없이 교체 수술을 진행했다.심지어 그때, 여지연은 배 속에 아이를 배고 있는 상태였다.수술 후 점차 회복한 여지수와는 달리, 여지연은 1년이나 혼수상태에 빠졌고, 깨어난 후에는 모든 걸 잊어버렸다.이에 죄책감이 들기도 했고, 여지연의 아름다운 얼굴이 자신의 가문에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에 그들은 여지연을 양녀로 삼았다.여지수가 권석훈을 향해 걸어가자, 백소은이 바로 얼굴을 굳혔다.‘내가 수백 번 말했지, 권석훈은 여지연의 짝이라고, 지수는 왜 자꾸 말을 듣지 않은 걸까!’“석훈 오빠.”여지수가 배시시 웃으며 걸어갔다.“석훈 오빠 오늘 수트 차림이 너무 멋있어서 못 알아볼 뻔했지, 뭐에요.”권석훈이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물었다.“지수야, 너희 집 양녀에게 남자 친구가 있어?”여지수의 얼굴이 굳어졌다.여씨 가문이 여지연을 양녀로 들이고 나서부터, 성수시 사람들은 여씨 가문 하면 여지연을 먼저 떠올렸다. 여지연, 그 다음으로 여지수를 생각해 냈다.권석훈과 여지수는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죽마고우였지만, 권석훈조차 여지수를 보며 여지연을 떠올렸다.여지수는 분노가 치밀었다.“석훈 오빠, 엄마는 오빠랑 우리 가문 양녀랑 결혼시킬 거래요.”여지수가 손으로 입을
여지연은 화장실에서 화장을 수정했다.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며 무언가 떠오를 듯했지만, 더 자세히 생각해 보려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여러 번 의사를 만나 상담을 했지만 기억 상실의 원인을 알아내지 못했다.기억을 잃고 흐리멍덩한 의식으로 살아가든지, 아니면 어느 날인가 모든 기억이 갑작스레 돌아올 거라고 했다.여지연은 누군가가 자신이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마지막으로 립스틱을 덧바르고 화장실에서 나오자, 샴페인을 들고 있는 권석훈이 보였다.여지연은 백소은과 함께 지내는 3년 동안 성남시의 온갖 호화로운 장소를 찾았었다.바보가 아닌 이상, 백소은이 자신과 함께 약속 자리에 나가는 이유를 모를 리가 없었다. 백소은은 여지연의 뛰어난 외모로 성남시 제일 잘나가는 가문에 시집을 보내, 더 큰 위망을 얻고자 했다.여씨 가문이 본인의 목숨을 구해줬지만, 여지연은 자신을 대가로 보답하고자 하는 마음은 없었다.“여지연 씨.”권석훈이 샴페인 잔을 그러쥐고 걸어왔다.“따로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여지연이 머리카락을 살짝 넘기며 말했다.“하실 말씀 있으시면 여기에서 하시죠.”권석훈은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아이도 낳은 사람이 비싼 척은.’“여씨 가문 사모님이 저와 여지연 씨를 맺어줄 계획이라고 하던데, 여지연 씨 생각은 어떠세요?”권석훈이 입꼬리를 올렸다.그러나 여지연이 덤덤하게 말했다.“어머니가 저한테 물으셨을 때 저는 이미 거절했어요. 유서 깊은 권씨 가문에 저 같은 양녀는 어울리지 않아요.”“여지연 씨는 눈치가 빠른 편인가 봐요.”권석훈이 웃음을 터뜨렸다.“그런데 외모가 너무 뛰어나셔서, 우리 한번 만나보는 건 어때요?”권석훈이 한 발 더 다가가 여지연의 머리카락을 몇 가닥 잡아 코끝에 대고 냄새를 맡았다.“정말 향기롭네요…….”여지연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퍽!여지연은 권석훈의 손을 휙 쳐냈다.고생 한번 하지 않고, 곱게 큰 권씨 가문 도련님 권석훈의 흰 손등은 바로 빨갛게 부어올랐다
퍽!여지연은 발을 올려 권석훈을 날려 버렸다.“이, 이런 빌어먹을!”권석훈은 자기 가슴을 움켜쥐고 믿을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감히 겁도 없이…….”지연은 손을 툭툭 털고 어깨 위의 먼지도 털어내며 말했다.“난 분명히 기회를 줬지만, 당신이 기회를 날린 거예요.”“석훈 오빠! 무슨 일이에요?”지수가 복도 모퉁이에서 당황한 표정으로 달려왔다.“언니 어떻게 석훈 오빠한테 그럴 수 있어요? 석훈 오빠는 권씨 가문 미래 후계자인데, 석훈 오빠 부모님이 아시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지연의 표정은 여전히 덤덤했다.“여씨 가문에 누가 되지 않을 테니 그냥 신고해. 할 말 있으면 법정에서 보자고.”“여씨 가문도 만만찮은 대가문인데 어떻게 이런 일로 신고를 해요!”지수는 석훈을 부축해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언니, 석훈 오빠는 언니랑 얘기 나누고 싶은 마음뿐인데 어떻게 두말없이 주먹을 휘둘러요? 이 일은 언니가 알아서 우리 부모님께 말씀드려요!”지연은 클러치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고 재생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석훈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어쨌든 아이도 낳은 적이 있는 여지연 씨는 이런 수작 부리지 말고 저랑 얌전히 호텔로 가실까요?”지연이 입꼬리를 올렸다.“지은 죄가 없다면 법정에서도 떳떳한 것 아니겠어요? 무례하고 선을 넘는 행동을 했으니 굳이 제가 나서지 않아도 될 것 같긴 하네요.”지수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이 일로 여씨 가문에서의 지연의 입지를 떨어뜨리려고 했으나, 양녀 주제에 녹음했을 줄이야!’석훈의 표정도 많이 굳어버렸다.“녹음 따위로 당신이 뭘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막말로 내가 손을 댄 것도 아닌데 나를 다치게 했잖아요.”“그래요, 그럼, 일단 녹음부터 공개할 게요. 성수시 사람들이 권씨 가문 후계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 좋은 기회가 되겠네요.”지연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말했다. 세상 그 어떤 일도 지연에게 타격을 줄 수 없었다.“무슨 일이 있은 거야?”백소은이 총총 달려왔다.“도련님 다치신
백소은이 고개를 들어 자신의 딸 여지수를 바라보았다.“엄마, 날 왜 그렇게 봐요?”지수는 조금 당황해 보였다.“내가 틀린 말이라도 했어요? 다른 집에 얹혀사는 주제에 처음부터 오만하고 거들먹거렸 잖아요.”“권석훈이 여지연에게 그런 말을 한 건, 네가 의도한 거니?”백소은이 소리를 낮춰 물었다.“아까 권석훈이 아이를 낳은 적이 있는 여지연 씨라고 하던데, 그 사실을 설마 네가 알렸어?”지수는 속이 뜨끔했지만, 계속 목을 빳빳이 쳐들고 뜻을 굽히지 않았다.“없는 말한 거 아니에요. 여지연이 아이를 낳은 적이 있다고 엄마가 나한테 그렇게 말했잖아요.”짝!백소은이 손을 들어 지수의 뺨을 날렸다.“엄마, 지금 날 때린 거예요?”지수가 얼굴을 가리고 물었다.“석훈 오빠한테 사실을 알렸을 뿐인데 내가 뭘 잘못했어요? 엄마는 계속 나와 석훈 오빠 사이를 이간질 했잖아요, 그것도 억울해 죽겠는데! 이제는 어디에서 굴러온 양녀를 석훈 오빠와 맺어주려고 하다니! 저는 좋은 마음에서 석훈 오빠에게 알렸던 거예요.”“너 살리겠다고 여지연 배 속의 아이는 7달 만에 조산했어. 선천적으로 발육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아이는 두 달도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지. 여지연이 널 살린 것도 중요하지만, 여지연은 우리 가문 때문에 아이를 잃었어!”백소은이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뱉었다.“우리는 여지연에게 두 목숨을 빚졌어. 그래서 입양해야 했다고! 이 도리도 이해할 수가 없는 거니?”지수는 이를 악물었다.매번 지연과의 다툼이 끝나면, 백소은은 이 이유로 지수를 다그쳤다.“아무리 여지연에게 미안한 일을 했다고 해도, 석훈 오빠한테 그러면 안 되는 거예요.”“권석훈 같은 자식은 여지연에게 가당치 않은 사람이야.”백소은이 덤덤하게 말했다.“하지만 권씨 가문은 성수시에서 제일 큰 가문이기에 그 아이를 권석훈에게 시집을 보내려는 거야.”‘성수시 권력의 정점에 서야 본인의 가족을 찾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길 테니.’ 여씨 가문이 지연에게 빚진 건 한 두 가지가 아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