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주현무 씨는 음주를 좋아했고, 음주 후 폭력적인 성향을 보였습니다. 저는 주씨 가문에서 가정 폭력에 시달렸고, 주현무 씨까 폭행을 휘둘러도, 제 아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은 모르는 척 외면했습니다. 하지만 어젯밤…… 도예나 씨가 저를 지켜주었습니다.”서슬기는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저와 도예나 씨가 사촌으로 사이가 안 좋은 걸 알고 계실 거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가 괴롭힘을 당하자, 도예나 씨가 제 앞을 막아서 주었습니다.”“주현무 씨는 여자도 때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저를 때리는 건 몰라도, 도예나 씨한테까지 손을 대려고 했고, 도예나 씨는 자신과 저를 지키기 위해 주현무 씨와 맞섰습니다.”“주현무 씨처럼 건장한 사람이 도예나 씨의 발길질에 도로 끝으로 날아갔 다니, 과장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마도 강씨 그룹을 협박해 이득을 취하려는 속셈인 듯싶습니다.”예나는 눈을 뜨자마자 서슬기 인터뷰 영상을 확인했다.서슬기가 자신을 위해 해명 인터뷰를 하다니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한국으로 돌아와 서씨 가문을 찾을 때마다, 서슬기는 늘 예나를 괴롭히지 못해 안달이었고, 이번에도 모르는 척 구경만 할 줄 알았다.예나는 외투를 꺼내 입고 방을 나섰다. 그런데 옆 방 서재에서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 앞에 서자 제훈이 본인의 기사를 지우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보였다.비록 서슬기가 인터뷰하고 있으나 예나에 대한 악플은 끊이지 않았다.네티즌들은 또 수많은 댓글을 쏟아냈다.[어제 오전에는 장서영, 밤에는 주현무. 폭행을 휘두른 자는 모두 도예나.][폭력적인 성향이 있는 건 맞아. 여러 인격의 소유자라서 자극을 받으면 폭력을 휘두르는 거지.][예성과학기술 회사의 옆 회사 직원입니다. 일주일 전, 회사 회의에서 도예나가 화를 냈었는데 연구팀 팀장이 병원에 실려 갈 뻔했어요.][정말? 그렇게 폭력적인 사람이었어?][무슨 병이라도 있는 거 아니야?][예쁘게 생긴 것과 다르게 무서운 사람이었네.][이런 사람과 같이 사는 강현석이 불쌍해
“저는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요. 엄마가 하나도 무섭지 않아요.”세훈이 얌전하게 말했다.“요즘 일 때문에 너무 피곤하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셔서 그래요. 어제 신혼여행 추천지를 찾아봤는데, 발리가 좋은 것 같아요. 아빠랑 여행이라도 다녀오시는 게 어때요?”예나의 손이 멈칫했다. 이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너희들이 일정을 잡아줄 수 있을까?”“좋아요!”세훈이 깡충 뛰며 말했다.“신혼여행은 일반적으로 한 달은 잡던데, 발리 말고 다른 재밌는 곳도 있는지 찾아볼 게요.”아이는 노트북을 안아 들고 신이 나서 여행지를 찾아보았다. 그리고 열심히 메모하며 계획을 세웠다.예나는 창밖에서 천진하게 눈사람을 만들고 있는 두 아이를 보며 또 한숨을 내쉬었다.‘내 몸에 이상이 없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 여섯 가족이 행복하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사모님, 아침 준비되었습니다.”양 집사가 공손하게 아침밥을 차려주었다.현석이 직접 만든 아침밥에는 소고기 장조림, 계란 후라이, 시금치 무침이 있었다. 색과 향을 모두 갖춘 아침상이었다.예나는 밥 한술을 크게 뜨고 반찬과 함께 먹었다. 현석의 음식 솜씨는 점점 좋아지고 있었다. 간단한 아침상이라고 할지라도 너무 맛있었다.소고기 장조림을 한입에 넣는데, 갑자기 속이 메슥거렸다.예나는 입을 움켜쥐고 화장실로 달려갔다.“사모님…….”양 집사가 그녀의 뒤를 따라가 화장실 앞에서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속이 안 좋으신 가요?”‘어젯밤 그 추운 날씨에 산책했으니, 몸이 추워서 그런 게 아닐까?’예나는 속이 메슥거렸지만, 아무것도 뱉어 내지 못했다. 다시 식탁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식욕이 없어졌다.“사모님, 죽을 새로 만들어 올 게요.”“아니에요, 배 불렀어요. 그리고 방금 있은 일은 현석 씨한테 말하지 마세요. 괜히 걱정할 거예요.”아침부터 인터넷 여론을 처리하고, 아침밥도 차려주었는데, 고작 이런 작은 일로 또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예나는 두꺼운 외투로 갈아입고 세윤과
예나는 방으로 돌아가 베란다 앞으로 자리를 잡고 노트북을 꺼냈다.애써 검색하지 않아도, 메인 화면을 자리 잡고 있는 예나의 기사가 보였다.[장씨 그룹 장서영 전 대표는 현재 취재를 거절하고 있으나, 장씨 그룹 직원들의 증언에 따르면 어제 이사회가 끝난 후, 장서영 씨와 도예나 씨에게 작지 않은 충돌이 있었다고 합니다. 장서영 대표의 부상은 도예나 씨의 소행임을 목격한 직원들도 적지 않습니다.][예성과학기술 회사는 기자들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회사 내부 직원들도 취재를 거부하고 있으며, 근처 타회사 직원의 인터뷰에 따르면, 최근 들어 도예나 씨가 회사에 출근하지 않고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마지막으로 회사로 출근한 시간이 바로, 회의에서 충돌이 생긴 그날이었습니다.][어느 네티즌이 인터넷에 도예나 씨가 성남시 유명 정신과를 찾아간 사진과 진단서를 올려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정신적 이상을 호소하고 있는 게 사실이며, 일반적인 약물로 치료가 불가능한 것으로 보입니다.][주씨 그룹 주식이 강씨 그룹에 넘어가고 있으며, 이는 주현무 씨가 별다른 행동을 보이지 않는 이유라는 의심이 듭니다.]대부분의 기사는 읽자마자 삭제가 되고 있었으나, 새로운 기사들이 계속해서 쏟아져 내렸다.강씨 그룹이 아무리 막강하고, 제훈의 해킹 기술이 아무리 대단해도, 사람들의 관심을 막지는 못했다. 호기심을 참지 못한 사람들은 각종 플랫폼을 넘나들며 글을 남겼고, 열기는 식을 줄 몰랐다.누군가 고의로 기사를 삭제하는 것조차 네티즌들은 분석해 내고 있었다.예나는 노트북을 덮고 쓴웃음을 터뜨렸다.‘나는 트러블 메이커인가봐.’예나는 베란다에 몸을 기대고 날이 점점 어두워지는 걸 지켜보았다. 그런데 또 떠돌이 개들의 짖은 소리가 들렸다.이 추운 겨울에 왜 자꾸 주택 지역으로 찾아오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예나는 화를 내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끓어오르는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창문을 열어젖힌 예나는 두 마리 개가 별장 입구에서 뛰놀고 있는 걸 확인했다. 허리를 숙여
이튿날, 설 음식이 푸짐하게 준비되었다.점심을 마치고 서씨 가문으로 인사를 갈 계획이었으나, 강씨 그룹이 화제의 중심인만큼, 별장 주변은 기자들로 둘러싸였다. 그들은 도예나가 나타나기 만을 호시탐탐 기다리고 있었다.이현숙은 일부러 전화를 걸어 며칠 뒤에 인사하러 오라고 당부했다.그래서 한가로운 오후가 찾아오게 되었다.“형, 며칠 뒤 회사를 물려받을 준비 되었어?”제훈이 덤덤하게 세윤에게 물었다. 세윤은 조금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조금은…….”“준비가 되면 되고, 안 되면 안 된 거지. 조금은 뭐야?”세훈이 입을 열었다.“오늘 오후에 위기 대처 시뮬레이션을 해봐야겠어.”“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세윤이 마지못해 말했다.“설 연휴인데 좀 쉬면 안 돼?”“오빠 혼자 놀아. 나도 피아노 연습해야 해.”수아가 눈을 깜빡였다.“아빠가 설 연휴 끝나고 콩쿠르에 참가하라고 했어. 그래서 연습 바짝 해야 해.”세윤의 표정이 축 처졌다.세훈은 늘 굳은 얼굴로 지내고, 제훈은 무뚝뚝했으니, 세윤의 단짝은 수아였다.그러나 수아마저 피아노 연습하러 가야 한다고 했다.‘오빠가 되어서 솔선수범을 보여야 지.’“그래!”세윤은 큰 결심을 내린 듯 말했다.“형이랑 제훈이가 함께 테스트해 줘. 테스트를 못 넘기면 오늘 저녁 안 먹을 거야.”현석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못 넘기고 엄마 찾지 말고.”“안 그럴 거예요!”세윤이 흥-하고 콧방귀를 뀌었다.“이젠 다섯 살이 되었는데 어리광 안 피울 거예요!”예나도 웃음을 터뜨렸다.“그래, 그럼 그렇게 하자.”세훈이 몸을 일으켰다.“위층으로 올라가서 테스트해.”제훈도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인터넷에서 전형적인 테스트를 찾아봐야겠어.”의지가 넘치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세윤은 조금 후회가 되었다.하지만 거실에는 수아의 피아노 연주 소리가 들려오고, 세윤은 마지못해 발걸음을 옮겼다.“나랑 같이 나가서 좀 걸어요.”현석이 예나를 끌어안고 귓가에 말했다. 그러나 예나는 고개를 저었다.“
예나의 짙은 색 머리카락이 베개 위로 흩어져, 그녀의 머리는 손바닥만 해 보였다.하얀 피부의 예나의 눈가 아래에는 짙은 다크써클이 있었다.현석은 예나가 며칠 동안 불면에 시달렸다는 걸 알았다. 계속 뒤척이다가 새벽 3~4시가 되어서야 예나는 잠에 들었다.“말 그대로 잠만 자는 거예요. 옆에 가만히 있을 게요.”현석의 부드러운 목소리는 마치 우아한 첼로 연주 소리 같기도, 봄바람이 나뭇가지를 스치는 소리 같기도 했다.따뜻한 온기가 예나의 마음속에 찾아 들고, 예나의 표정이 순식간에 돌변했다.눈을 치켜 뜨고, 입꼬리를 살짝 올린 그녀는 현석의 목에 손을 감았다.앵두 같은 입술을 살짝 벌린 예나는 바로 현석의 목덜미에 키스했고, 이어 그의 입술을 막았다.현석은 바로 몸을 돌려 예나의 몸 위로 올라탔다.입술부터 쇄골까지, 예나는 점점 정신이 혼미해졌다. 마치 깊은 바닷속에 빠진 것처럼 몸이 나른해지고, 호흡이 거칠어졌다.현석이 몸을 멈추고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예나 씨, 날 유혹하지 마요. 예나 씨가 유혹하면 난 참을 수가 없어요.”“나도 원해요…….”예나는 한 손으로 그의 목을 안고 다른 손으로는 앞섬의 단추를 풀었다.불안하고 공허한 마음을 채워줄 무언가가 필요했다.고즈넉한 오후 하늘에 서서히 노을이 보이고, 따뜻해진 온도에 베란다 창문에 뽀얀 습기가 꼈다. 베란다에 쌓인 눈과 얼음이 스르르 녹아 아래층 정원으로 물이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졌다. 물은 봄이 오면 새로 피어날 꽃과 풀을 촉촉이 적셨다.겨울의 태양은 구름 뒤로 얼굴을 숨겼고, 한가로운 오후 시간은 그렇게 뜨겁게 흘러갔다.다른 한편, 세윤이 풀이 죽은 채로 아래층으로 내려왔고 수아를 폭 안으며 말했다.“수아야, 오빠 너무 힘들어.”수아가 악보를 올려 두며 말했다.“무슨 일 있었어?”“형이 너무 어려운 테스트 문제를 냈는데, 제훈은 불붙은 집에 기름이나 붓고 있었어. 하마터면 서재에서 죽을 뻔했다니까.”“살아서 나왔잖아.”수아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오빠는 사
현석의 청량한 목소리가 예나의 귓가에 울렸다.예나는 부스스한 얼굴로 나른하게 말했다.“현석 씨, 배고 파요.”현석이 풋-하고 웃음을 터뜨렸다.“조금만 더 누워있어요. 내가 밥 차려줄 게요. 30분 정도만 기다려요.”예나는 다시 눈을 감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30분이면 다시 눈을 붙여도 충분한 시간이었다.눈을 감은 예나는 반수면 상태에 들어섰다. 의식이 흐릿해지고, 어렴풋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꿈속의 그녀는 무력하게 산길을 걸고 있었다. 주변은 온통 산이고, 겹겹이 둘러싸인 나무숲에서 예나는 어디로 걸어야 할지 몰랐다.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예나는 무력감으로 바닥에 넘어질 것 같았다.이게 꿈인 걸 알아차린 후로는, 꿈에서 깨기 위해 발버둥 쳤다.꿈속에서 드디어 몸을 일으킨 예나는 천천히 늪을 지나 평탄한 길을 걸기 시작했다. 다시 눈을 뜨려고 시도했으나 이번에도 실패였다.그때, 갑자기 눈앞을 스쳐 지나는 형체가 있었다. 박쥐 여러 마리가 그녀 머리 위를 스치듯 날았다. 예나는 주변에 놓인 아무 물건이나 손에 쥐고 허공을 휘저었다. 박쥐 떼는 쉴 틈 없이 그녀를 덮치고 예나는 겨우 이리저리 몸을 피하다가,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방안의 풍경은 방금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 박쥐 떼가 보이지 않았지만, 구불구불한 산길 위에는 서슬 퍼런 눈의 늑대가 보였다.섬뜩한 눈길로 끈질기게 예나를 바라보고 있는 늑대는 바로 그녀를 덮칠 것만 같았다.늑대의 본성상 예나가 조금의 연약함을 보인다면, 바로 먹잇감으로 정할 것이다.예나는 어느새 이게 꿈속이라는 생각도 잊어버렸다.손에 쥔 칼을 들고 천천히 앞으로 걸어가 손을 번쩍 들었다.“아!!”어린아이의 비명이 들렸다.“예나 씨, 지금 뭘 하는 거예요!”허공을 가로 지나는 긴박한 목소리가 들리고 예나는 두 눈을 번쩍 떴다.그런데 그녀는 안방 침대가 아닌…… 세윤의 방안에 서 있었다.맨발로 세윤의 침대 옆에 선 그녀의 손에는 과일칼이 들려 있었다…….콰당-과일칼이
“며칠 뒤에 신혼여행을 가서 머리도 비우고, 환경도 바꿔보면 나아질 거예요.”예나는 그의 품에 안겨 쓴웃음을 삼켰다.아이를 향해 칼을 들었다면 얼마든지 현석을 다치게 하는 상황이 생길 수 있었다.‘나는 예전의 도예나가 아니야. 더 이상 현석 씨와 아이들과 함께해서는 안 돼.’“현석 씨.”예나가 현석을 밀어냈다.그러나 현석은 예상이라도 한 듯 예나를 더 꽉 끌어안았다.“예나 씨, 아무 말도 하지 마요. 내 품에서 한숨 푹 자고 일어나면 아무것도 아닌 게 될 거예요.”“오후부터 지금까지 잠을 잤는데 또 잠에 들 수 있을 것 같아요?”예나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일단 날 놔줘요.”“그럼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밥이라도 먹을 래요? 내가 만든 음식 좋아하잖아요.”현석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예나를 달랬다.“그래요, 밥 먹으러 가요.”현석은 예나의 실내화를 찾아 발에 신기고, 손을 잡고 아래층으로 향했다.방을 나서자, 옆 방에서 세윤이 숨죽여 우는 소리가 들렸다.잠결에 깨난 세윤이 마주한 건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엄마가 칼을 쥐고 있는 모습이었다. 하마터면 엄마 손에 죽을 뻔했다는 사실이 아이 평생의 트라우마가 될 수 있었다.“예나 씨, 그냥 꿈을 꾼 거예요. 단지 꿈일 뿐이에요. 괜찮아요…….”현석이 예나를 품에 안고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현석의 목소리는 허스키하지만 다정했다.예나는 현석을 꽉 끌어안았지만, 점점 무너져갔다.장서영의 뺨을 때린 후에 현석은 예나한테 모든 게 다 괜찮을 거라고 했다.주현무를 발로 걷어찬 후에도, 현석은 예나가 한 모든 게 옳은 거라고 달랬다.‘정말 괜찮은 게 맞는 걸까? 앞으로도 괜찮은 걸까?’한두 번의 요행으로 자신이 정상이라고 믿었던 예나였지만, 이번에는 자칫하다가 자기 아들을 죽일 뻔했다.‘어떻게 이럴 수가……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된 거지…….’“예나 씨가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아서 그런 꿈을 꾼 거예요.”현석이 그녀의 어깨 위로 머리를 괴고 꽉 끌어안았다.‘앞으로 세윤이 얼굴을 어떻게
예나는 오늘 온 하루 먹은 게 별로 없었다.무력하게 몸을 일으킨 예나가 말했다.“어제 감기에 걸린 건지 먹기만 하면 속이 불편해지네요.”현석은 예나를 안아 거실 소파에 앉혔다.“여기 조금만 앉아 있어요. 죽 해줄 게요.”“그럴 필요 없어요. 입맛이 하나도 없거든요.”예나가 입가를 매만졌다.“현석 씨, 세윤이한테 가봐요. 난 좀 혼자 있고 싶어요.”“옆에 있게 해줘요. 아무 말도 시키지 않을 테니까 내쫓지만 말아 줘요.”현석은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 상처받은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속상한 예나를 바라보는 현석의 속도 말이 아니었다.현석은 너무 많은 걸 겪었다.두 눈을 내리깐 예나가 말했다.“현석 씨, 잠시 밖에 나갔다 올 게요. 집에 있는 게 너무 힘들어요.”“같이 가요.”현석은 몸을 일으켜 외투를 꺼내 입고, 예나의 외투도 챙겨 입혔다.“가요.”“현석 씨, 혼자 있고 싶어요. 제발 요…….”예나가 아랫입술을 깨물며 말했다.“혼자 있고 싶어요. 혼자…….”“그럼 앞에서 걸어요. 난 뒤에서 따라갈 게요. 그 어떤 소리도 내지 않을 게요.”현석이 낮은 소리로 애원했다.카리스마 넘치고 살벌하던 강씨 그룹 대표인 현석은, 지금 이 순간 누구보다도 비굴한 모습을 보였다.“현석 씨 그러지 마요. 현석 씨가 그럴수록 내 마음이 너무 불편해요.”예나는 자기 옷깃을 매만지며 말했다.“생각 정리만 마치면 돌아올 게요. 혼자 걸을 수 있도록 해줘요, 네?”예나는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했다.현석은 상처 가득한 예나의 눈을 마주하며 그 역시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한숨을 내쉰 현석이 목소리를 낮췄다.“예나 씨, 생각 정리하고 와요. 여기에서 기다릴 게요.”예나는 발뒤꿈치를 들어 그의 입술에 입맞춤하고 말했다.“현석 씨, 이런 나를 감싸줘서 고마워요. 정리가 끝나는 대로 돌아올 게요.”예나는 몸을 돌려 천천히 걸어가 문을 열고 나섰다.늦겨울, 초봄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