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레이북은 어쩔 줄을 몰라 쩔쩔맸다.여자가 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엘리자도 그의 앞에서 자주 눈물을 흘렸는데, 그는 오히려 반감이 들었었다.그러나 예나의 눈물에는 마치 심장이 찢기고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 기분이 들었다.트레이북의 물음에 예나는 엉엉 소리를 내며 울기 시작했다.성남시에서 강남천과 함께 지내며 매번 위험에 처할 때도 그녀는 울지 않았다.먼 H 지역까지 와서, 반복되는 희망과 실망을 겪으며 오랜 불면증에 시달릴 때도 그녀는 눈물을 삼켰다.그러나 현재, 그녀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내 남편이, 나를 알아보지 못해…….’“내가 누군지 모르겠어요?”예나가 울먹이며 물었다. 떨리는 목소리에 조금의 희망이 담겼다.트레이북은 입을 꾹 다물고 고민했다. 루이스에게서 전해 듣기를, 성이 도 씨인 여성이라고 했는데 이름이 무엇인지는 잘 몰랐다.그는 입술을 매만지다가 말했다.“그만 울어요. 내 얼굴 보고 싶다면서요. 실컷 보게 해 줄게요.”그리고 자기 가면을 벗었다.눈물로 흐려진 시야로 그녀는 익숙한 얼굴을 바라보았다.얼굴 절반을 가로지르는 흉터는 길어야 한 달 전에 다친 상처 같아 보였는데 아직도 아물고 있는 중이었다…….‘대체 얼마나 많은 상처를 받고, 얼마나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이겨내며 여기까지 왔을까…….’예나는 문득 캐서린이 자신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남천이 기억을 지우라고 했는데 계속 반복해도 당신의 이름만 외워 대서 기억을 지우는 데에 실패했어요…… 그러다가 정신을 잃고 쓰러진 현석 씨를 남천이 그곳으로 보냈어요…….”‘캐서린은 기억을 지우는 데에 실패했다고 했는데, 사실은 성공했던 걸까?’‘그래서 자신이 누구였던지, 내가 누구인지, 자기 자식이 누구였던 지도 모두 잊어버린 걸까…….’‘그렇다면 모든 걸 해석할 수 있어.’예나는 손을 들어 얼굴의 긴 흉터를 매만지며 울먹였다.“이 흉터는 어떻게 생긴 거예요?”그녀의 눈물과 부드러운 눈길, 트레이북은 마음이 약해졌다.“기억도 나지
“형님, 큰일 났습니다. 변경에 난입한 반란군이 문제를 일으키고 있습니다!”경호원이 초조한 표정으로 들어와 보고했다.트레이북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그리고 예나를 향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당신은 빨리 이곳을 벗어나요.”그리고 그는 서랍에서 두 자루의 총을 꺼내 허리춤에 끼우고 경호원을 따라 빠르게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차가 떠나는 소리가 들려왔다.예나는 창가에 서서 차가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마음이 점점 불안해졌다.‘강씨 그룹 대표, 강현석. 원래대로면 성남시에서 대표직에 앉아 멀쩡히 비즈니스를 하고 있어야 할 사람이지. 그에게 있어 시련은 비즈니스의 실패거나, 제일 크게는 사업이 망하는 것, 이런 정도의 시련이 다였겠지만.’‘도대체 지금은 무슨 이유로 이런 곳에 남겨져, 어수선한 땅의 우두머리가 되어 위험이 닥치면 맨 앞에 서는 총알받이로 살아야 하는 걸까.’예나는 현석이 안타까웠다.그리고 그녀는 천천히 그의 서재를 둘러보았다. 여긴 아마도 김두철의 서재였던 것 같았다. 곳곳에 김두철 가문의 표식이 남아있었다.한 바퀴 다시 둘러보아도 트레이북이 바로 강현석이라는 증거가 될 만한 물건은 없었다…….핵심 구역에서 나온 예나는 아직도 어리벙벙했다.‘전쟁터에 버려진 아픈 사람이, 짧디짧은 한 달 안에 조직의 우두머리가 된다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인 걸까?’‘현석 씨와 똑같은 얼굴 하나로, 내가 또 헛된 생각을 하는 걸까?’‘남천도 현석 씨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 않았던가.’‘똑같게 생긴 사람들이 세상에 왜 이렇게나 많은건지…….’갓 피어오른 희망이 예나의 어지러운 머릿속으로 흩어져, 불안한 기대로 되어버렸다…….“엄마, 왜 그래요?”“엄마, 트레이북이 엄마를 괴롭혔어요?”“엄마 눈이 엄청 빨개요. 울었어요?”“트레이북 나쁜 사람! 내가 대신 혼내줄게요!”예나는 그제야 자신이 별장까지 걸어왔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예나를 바라보는 아이들의 눈 속에 걱정이 가득했다.‘내가 또 아이들을 걱정시
“얼굴에 아주 긴 흉터가 눈가부터 입가 주변까지 절반을 가로지르고 있어도, 현석 씨와 같은 얼굴인 건 틀림없었어.”“뭐라고?”민준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예나야, 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나는 이해가 되지 않는 것 같아.”세윤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그니까 트레이북이 우리 아빠라고요?”“그럴 리가!”옆에 앉아있던 카엘이 무덤덤하게 말했다.“너희 아버지는 사업가였다며? 트레이북은 군인이야. 특전사 출신이고…….”세훈이 입을 매만지며 말했다.“어제 트레이북을 만날 때 음색이 우리 아빠랑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어요. 저도 혹시 아빠가 아닐지 하는 의심을 했는데 나와 제훈이를 전혀 알아보지 못하니 아니라고 단정을 지었죠.”제훈이 입을 열었다.“정말 아빠라면 우릴 알아보지 못했을 리가 없어요. 반드시 저희를 찾아왔을 거라고요.”예나가 이마를 감싸 쥐며 힘없이 말했다.“너희 아빠…… 어쩌면 기억을 잃어버린 걸지도 몰라.”“네?”수아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아빠가 우릴 기억 못 한다는 말이에요?”세훈도 깜짝 놀란 모습이었다.“왜 기억을 잃었는데요?”예나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아마 캐서린의 짓이겠지. 전 세계 세 손가락 안으로 꼽히는 심리 상담사인 캐서린이 제일 잘하는 게 바로 최면술이야. 아마 최면술로 사람의 기억을 지우는 작업을 했을거고…… 그런데 캐서린이 현석 씨 기억을 얼마나 지웠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어.”그녀가 알아본 결과 지운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돌아온다고 했다.하지만 뒤틀려 버린 기억은 다시 되돌리기 아주 힘들다고 했다…….“예나야, 트레이북이 바로 현석 씨라고 확신하는 거야?”민준이 인상을 쓴 채로 물었다.“현석 씨가 실종된 지 한 달이 지났어. 어떻게 한 달 만에 마피아 우두머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 더구나 기억을 잃은 사람이 어떻게 그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겠어? 예나야, 지금 현석 씨를 찾지 못해 조급한 마음을 이해해. 그래도 조금 더 신중하게 그 사람이 맞는지를 확인해야 할 것 같아
“왜, 너도 몰라?”지원이 일부러 놀란 척 연기했다.강씨 가문이 철저히 숨기고 있던 터라 기사 한 줄 나지 않은 소식이었다.정지숙이 개인 탐정에게 하는 말을 엿듣지 않았다면 지원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을 내용이었다.더구나 예나뿐만 아니라 아이들도 함께 사라졌다고 했다.정지숙이 개인 탐정을 풀어 아무리 샅샅이 뒤져도 아무런 단서를 찾지 못했다.지원이 민준에게 전화를 건 이유는, 민준이 좋아했던 그 여자는 결혼하자마자 헤프게 다른 남자와 도망을 갔다는 것을 알려주며 약 올리기 위해서였다.“강 부인이 도예나 하나 찾겠다고 사방을 뒤지고 있는데 아직도 못 찾았대.”지원이 더 약을 올리며 말했다.“너희 둘 사이가 너무 다정해서 난 또 너랑 도망갔다는 줄 알았지, 뭐야.”“이지원, 도예나가 누구랑 도망을 갔든 너랑 무슨 상관인데?”민준이 차가운 미소를 보였다.“강 대표도 나한테 연락하지 않았는데 네까짓 게 뭔데?”“허, 강현석은 이미 한 주일 동안 강씨 그룹으로 출근하지 않았어. 널 찾아가는 건 시간 문제야.”지원이 흥-하고 콧방귀를 꼈다.“설민준, 내가 경고하는데. 그 재수 없는 도예나한테서 멀리 떨어져. 강현석에게 밉보였다가는 설씨 그룹에 불똥이 튈 수 있어. 이게 다 너를 위해서하는 소리니까 아니꼽게 듣지 말고…….”이 말을 끝으로 통화는 종료되었다.민준은 온기 없는 눈길로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강남천이 한 주일 동안이나 출근하지 않았다면 H 지역까지 찾아올 가능성도 있다는 말이네.’‘강남천에게 잘못된 정보를 흘려야겠어…….’예나는 빠르게 식사 준비를 마쳤다. 이윽고 일곱 사람이 식탁에 둘러앉았다. 거실 텔레비전은 여전히 뉴스 프로그램이 틀어져 있었다.“제훈이 어머님 요리 솜씨가 정말 대단하세요. 다들 아시아에 맛있는 음식이 많다고 하던데, 여기에서 지낸 지 이틀 만에 다섯 근은 쪘을 것 같아요…….”카엘이 밥 한 숟가락을 입에 가득 넣으며 우물우물 말했다.예나는 조용히 카엘의 말을 경청하다가 갑자기 어디선가 들려오는 폭격
예나와 아이들, 그리고 현석까지, 그들은 이곳에서 살아갈 운명이 아니었다.‘이 모든 게 강남천 때문이야!’그 사람만 떠올리면 예나는 이를 악물었다.새벽에 도망치듯 나왔으니 강남천이 얼마나 화가 났을지는 예상이 되었다.‘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H 지역에 왔다는 걸 알면 이곳까지 찾아올까?’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잠시, 예나는 일단 트레이북의 신분을 확인하는 게 가장 먼저라는 생각을 했다.조용한 밤이 지나고 날이 밝았다. 어둠과 죄악은 태양 아래서 신분을 감췄다.예나는 일찍 일어나 아침을 준비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 나갈 준비를 했다.집을 나선 그녀는 천천히 H 지역까지 운전했다. 이곳 경비는 며칠 전보다 더 삼엄해졌으며, 순찰을 하고 있는 경호원의 수가 거의 서너 배는 되는 것 같았다.경호원들은 저마다 무기들을 어깨에 메고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주위를 살폈다.예나는 차에서 내렸고 경호원이 자기 몸을 샅샅이 살필 수 있도록 두 팔을 벌렸다.그녀는 이곳을 이미 여러 번 와봤었다. 어떤 경호원들은 핵심 구역에서 전출된 사람들이었는데, 다들 예나가 트레이북과 협력한 사람이라는 알아본 눈치였다.한 경호원이 굽신거리며 그녀를 별장 입구로 데려갔다.안쪽 경호원의 수는 더 많았는데 거의 1미터에 경호원이 하나 있을 정도로 별장을 겹겹이 둘러싼 모습이었다.예나는 손에 쥔 곰탕 도시락을 들고 미소를 지은 채로 말했다.“트레이북 씨를 만나러 왔어요.”경호원이 보고하려는데 루이스가 웃으며 걸어왔다.“예나 씨가 오셨군요.”이번 전란에 많은 군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러다 보니 가장 밑층에 있던 작은 경호원도 별장을 지키는 데에 투입이 되었다.루이스는 어제 트레이북이 예나를 따로 만난 일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 여성이 트레이북의 주의를 끌었다는 것도 눈치를 챘다.트레이북이 우두머리 자리에 앉고 그 짧은 시간 동안 수많은 마피아 장로가 여성을 보내왔다. 그런데 트레이북이 관심을 가지는 여성은 이번이 처음이었다…….루이스가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걸었다.
예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2층을 올려다보았다.안방 입구에도 무기를 든 경호원 두 명이 살벌한 모습으로 보초를 서고 있었다.“말씀해 주셔서 고마워요.”예나는 루이스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이고 2층으로 올라갔다.별장 입구 경호원이 예나를 들여보냈고, 루이스가 직접 별장 안까지 모셔온 걸 본 안방 경호원들은 몸수색을 마치고 그녀를 바로 안으로 들여보냈다.방 안은 예상보다도 컸다.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건 작은 응접실이었고, 병풍을 따라 걸자 안방 침대가 보였다.그녀가 한 걸음 다가가자, 병풍 안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마침 잘 왔어. 빨리 주사라도 하나 가져와. 숟가락으로는 약을 먹일 수가 없어.”예나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그렇게 많이 다친 거야? 약도 다른 사람이 먹여줘야 할 정도로?’그녀는 걸음을 재촉하여 침대 쪽으로 걸어갔고, 얼굴빛이 창백한 남자를 확인했다. 그는 흰 거즈를 머리에 감고 있었는데 머리를 다친 게 분명했다.가면을 쓰지 않은 트레이북의 얼굴에 핏기 하나 없어 보였다.“내 말 못 들었어? 당장…….”침대 옆에 앉은 여자가 쌀쌀맞게 말하다가 예나를 확인하고 표정을 굳혔다.엘리자는 손에 쥔 약 그릇을 차갑게 탁자 위로 내려놓더니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감히 누가 당신을 이곳으로 들여보낸 거예요?”예나는 도시락통을 탁자 위로 올려 두며 덤덤한 말투로 말했다.“당신이 이곳에 있을 수 있다면 제가 들어오지 못할 이유도 없죠.”“나가요.”엘리자가 명령하듯 말했다.“밖에 경호원은 귀가 잘못된 거예요? 당장 이 사람 끌어내라고요!”입구에 선 경호원들이 천천히 걸어왔지만, 섣불리 행동하지 못했다.정확히 예나와 트레이북이 어떤 사이인지는 몰라도, 엘리자는 마피아 장로의 딸이었으니 엘리자의 명령에 감히 불복할 수도 없었다…….“트레이북 씨가 저한테 방을 마음대로 들어와도 된다고 했어요.”예나가 침착하게 말했다.“지금 날 내쫓고 트레이북 씨가 일어난 후에 감당할 수 있겠어요?”두 경호원은 서로를 마주 보다가 가볍
예나의 목이 움츠러들었다.‘총이 있을 줄은 몰랐어. 내가 너무 방심했어.’그녀는 빠르게 주위를 살피며 무기가 될 만한 물건을 찾았다…….바로 그때, 침대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두 여자는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반 죽어가던 남자가 기적적으로 몸을 일으켜 세워 앉았다.검은 눈동자에 온기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엘리자 씨. 지금 내 구역에서 사람을 죽이려는 겁니까?”“그, 그게…….”트레이북을 바라보는 엘리자의 눈빛이 흔들렸다.탁-총이 바닥 위로 떨어졌다.“경호원!”트레이북의 호령에 경호원이 빠르게 방 안으로 들어왔다.“지금 당장 엘리자 씨를 내보내세요. 그리고 내 허락 없이는 다시 이 방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세요.”엘리자의 눈이 커다래졌다.그녀가 다시 입을 열기도 전에 그녀는 두 경호원에 의해 방 밖으로 내쫓아졌다.엘리자는 너무 화가 나 얼굴을 구겼고, 온몸에 살기가 넘쳤다.오늘 오전, 그녀는 트레이북을 암살하라는 아버지의 명령을 받고 이곳을 찾아왔었다.그런데 막상 트레이북의 얼굴을 마주하자, 마음이 약해졌다…….‘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이 비수를 망설임 없이 가슴에 꽂아버릴 거야!’두 경호원은 방을 나서면서 가볍게 문을 닫았다.큰 안방에 두 사람만 남겨졌다.예나의 얼굴에는 그의 상처에 마음 아파하는 감정과 또 자신을 선택했다는 기쁜 마음이 동시에 담겨 있었다.‘엘리자와 나 사이에서, 트레이북은 망설임 없이 나를 선택했어!’그녀는 눈앞의 사람이 자신이 여태껏 찾은 사람이 맞다는 확신이 들었다.예나는 도시락통을 손에 준 채로 천천히 그의 앞으로 걸어갔다.“다쳤다고 해서 보러 왔어요. 지금 음식 먹어도 돼요?”트레이북이 까만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아까, 내가 당신 남자라고 하던데.”그의 목소리는 힘이 없었지만, 남자라는 단어에 힘을 주었다.예나의 얼굴이 붉어졌다.사이가 좋던 예전에도, 그녀는 이런 말을 입 밖으로 낸 적이 없었다.그녀는 침대 끝에 앉으며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그럼, 당신은 어
남자의 말에 예나의 안색이 갑자기 어두워졌다.마피아 내부 싸움에 대해 예나도 들어본 적이 있었다. 엘리자는 마피아 장로의 딸로서 약에 독을 탈 가능성이 있었다.그녀는 벌떡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먼저 누워있어요. 제가 의사 불러올 게요.”“도망갈 생각하지 마요.”남자가 힘껏 여자를 침대 위로 당겼다.“말해요. 당신은 도대체 누구고, 무슨 의도로 나한테 접근했는지!”예나는 강한 힘에 어쩔 수 없이 침대 위로 앉아버렸지만, 화를 참지 못하고 말했다.“이 약은 엘리자가 가져온 거예요. 독을 타도 엘리자가 탄 거라고요! 이것 놔요, 당장 의사 불러올 테니까!”두 사람의 거리는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였다. 예나가 잡힌 팔을 빼려 몸부림치자 헐렁한 옷깃에서 하얀 목선이 드러났다.그제야 남자의 이상을 발견한 예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트레이북 씨, 침착해요. 지금 상처가 이렇게 많은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예나는 자기 피부에 닿는 그의 온도가 점점 더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다.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예나는 침을 꿀떡 삼키며 말했다.“설마, 엘리자가 탄 약이……?”트레이북의 눈길이 차가워졌다.‘어쩐지 약에서 이상한 향이 나더니.’‘엘리자가 감히 이런 약을 풀다니, 정말 살고 싶지 않은가 봐.’그는 팔을 뻗어 링거를 뽑으려는데 예나가 막았다.“이건 항염제예요. 이 링거를 맞아야 염증이 가라앉을 거예요…….”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트레이북이 점점 숨을 거세게 쉬기 시작했다.‘다행히 내가 왔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엘리자의 뜻대로 될뻔했어…….’‘만약 관계를 맺었다면 트레이북에게 책임을 물을 수도 있었잖아…….’“찬물로 샤워하고 올게요.”트레이북이 차갑게 말했다.“아니면 당신이 해독제라도 되어줄래요?”예나는 하려던 말을 꿀꺽 삼켰다.남자가 침대에서 일어나자, 예나는 그의 온몸에 난 상처를 발견했다. 다친 건 머리뿐만이 아니었다. 팔, 가슴 쪽에도 붕대가 칭칭 둘려 있었는데 거즈에서 붉은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