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온 세상이 조용해진 시간이었다. 거리에는 가로등만 켜져 있을 뿐 오가는 차와 행인이 없었다.평화로운 지대였지만 그래도 H 지역과 가깝게 붙은 곳이라 변경 지대는 절대 조용하지 않았으며 자주 강도 사건이 벌어졌다.도예나는 베란다에서 두 남자가 행인의 가방을 순식간에 낚아채는 걸 보았다.너무 혼란스러운 지역이라 뉴스에서도 유람객들의 방문을 추천하지 않는 곳이라 했다.도예나는 창가에서 생각 정리를 하느라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거실이 이미 조용해진 뒤였다.네 아이가 잠에 든 시간이었지만, 그녀는 쉽게 잠에 들 수 없었다.매일 밤 뜬 눈으로 보낸 도예나였지만, 날이 밝으면 또다시 씩씩하게 강현석의 소식을 찾으러 다녔다.“예나야, 우리 아빠가 초대장을 보내주셨어.”설민준이 흥분에 겨워 방 안으로 들어오며 말했다.“일 년에 한 번 있는 비즈니스 모임인데 설씨 그룹이 초대받았어.”도예나가 고개를 돌려 대답했다.“축하해. 드디어 아버지를 위해 일할 수 있게 되어서.”“예나야, 내가 지금 아버지를 도울 수 있게 되어서 이렇게 좋아하는 거로 생각해?”설민준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내가 알아보니까 많은 마피아가 이번 모임에 참가할 거래. 그들의 목표는 옆 마을의 재건 프로젝트고. 이번 투자 규모가 꽤 커서 마피아 윗분들이 오는데 우리는 이 기회에 그 사람들을 만나는 거지.”어두컴컴한 도예나의 눈동자에 생기가 돌았다.오늘 트레이북의 만남을 실패한 뒤로 그녀는 한참이나 속상해했다. 그러나 빠르게 다음 만난을 계획했다.‘그런데 기회가 이렇게 빠르게 찾아올 줄이야.’두 사람은 낮은 목소리로 내일 모임에서 주의할 사항들을 짚었다…….이와 동시에 서재에서.네 아이들은 잠에 들지 않았다. 아이들은 서재 카펫 위에 앉아 대량의 서류들을 보고 있었다.도제훈이 서류를 한장 한장 넘기며 말했다.“이건 이곳 아시아인들의 리스트야. 하나하나 검토하면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강세윤이 조금 목이
도제훈은 입술을 매만졌다.“군 시스템은 해커들도 잠입할 수가 없어. 어쩔 수 없이 트레이북의 도움을 청할 수밖에.”“하지만 그건 모든 조직의 핵심 기밀이라 트레이북도 우릴 돕지 않을 거야.”강세훈이 덤덤하게 말했다.“우리와 만나고 싶어 했잖아. 그냥 한번 만나서 알아보는 게 어때?”도제훈이 고개를 끄덕였다.이렇게 된 이상 그 방법밖에 없었다.이튿날 오후, 도예나와 설민준은 이웃 나라의 비즈니스 연회에 참석하러 떠났다.H 지역은 7~8개의 나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이번 연회에 참석한 나라는 모두 발달 국가이며, 프로젝트 내용은 전란 속에 망가진 도시와 마을, 건물, 도로, 철도, 그리고 기초 시설 등의 재건에 대한 문제였다. 그 속에 얼마나 많은 이익 관계가 생길지는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주변 국가 상인들은 이번 프로젝트에 숟가락 하나 얹으려고 발버둥 쳤다. 그러니 연회 시작 전부터 수백 대의 고급 차가 호텔 문 앞에 줄지어 섰다.도예나는 딱 붙는 원피스와 숄더를 거치고 설민준의 팔에 팔짱을 낀 채로 연회장 입구에 들어섰다.이곳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동방의 여인은 만나기 어려웠다. 더구나 정교한 이목구비와 완벽한 몸매의 소유자인 그녀는 다른 유럽 미녀들의 옆에 서도 손색이 없었다.그녀의 등장에 수많은 이목이 쏠렸다.설민준은 조금 언짢아 보였다.“원피스를 입으면 안 되는 거였는데.”도예나가 화려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미모가 가장 큰 무기가 되는 경우도 있어. 아름다운 미모와 함께 라면 어려운 길도 피해 갈 수 있지.”그러니 굳이 숨길 필요가 없었다.아름다운 미모로 마피아 내부에 소속이 되는 게 그녀의 가장 큰 목표였으니.설민준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그는 도예나에게 강현석의 소식을 알 수 있다면 모든 걸 포기할 수 있는지 묻고 싶었다.그러나 그는 이 물음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이 말을 꺼냈다가는 도예나의 차디찬 눈빛에 베일 수 있었다.두 사람은 만인의 주목하에 입구로 걸어갔다. 그러나 경호원이 그들의 앞을 막아섰다.“입장
루이스는 달러를 꺼내 꼼꼼히 세어 보고 매우 만족한 모습을 드러냈다.조카를 위해 나서 준 이유는 평소에 조카로부터 적지 않게 받아왔기 때문이다.하지만 예나는 단 한 번에 거의 몇 달 동안이나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을 만큼의 돈을 주었다.예나는 루이스의 표정 변화에 주시했다.‘역시나 돈에 욕심이 많은 사람이 맞았어!’예나는 이렇게 생각하면서 설민준의 팔을 툭툭 건드렸다.그러자 설민준은 양복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다시금 두꺼운 달러 한 묶음을 꺼냈는데, 조금 전과 비하면 두 배가 넘는 두께였다.예나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루이스 씨가 트레이북의 경호원이라고 들은 바가 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그분께 저희도 좀 추천해 주셨으면 합니다.”“네, 기회가 된다면 제가 꼭 이어드릴게요.”루이스는 까치발을 하고 설민준의 손에서 돈을 빼앗았다.그리고 검지를 혀에 대고 침을 묻혀 한 장씩 세기 시작했다.설민준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물었다.“인제 들어가도 될까요?”루이스는 돈을 옷 안에 있는 주머니에 숨기고 헛기침했다.“물론입니다! 지금 당장 보스에게 만날 시간이 있는지 확인하고 오겠습니다.”루이스는 뒷짐을 지고 건들거리며 연회장으로 들어갔다.루이스의 이러한 모습을 보면 예전에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대략 짐작할 수 있다.예나는 밝은 미소를 거두고 담담하게 말했다.“우리 먼저 들어가자. 돈만 충분히 주면 조만간 트레이북을 만날 수 있을 거야.”이제 안심하고 기다리면 그만이다루이스는 연회장 뒤의 귀빈 휴게실로 성큼성큼 걸어갔다.보스는 이미 도착해서 이웃 나라의 고위 상무 인원과 프로젝트의 세부 사항에 관한 이야기하고 있었다.루이스는 마냥 기다리기 한가하고 심심해서 연회장 입구를 지키며 돈을 빼낼 수 있는 사람을 물색하고 있던 참에 예나를 보게 된 것이다.‘주머니가 두꺼우니 절로 마음이 든든해지는구나!’한 번 손을 쓰자 거액의 지폐가 주머니로 살그머니 들어와서 기뻐 마지 못했다.루이스는 귀빈실 입구에서 몰래 안을 들여다보았다.마침
“방금 어떤 여자가 트레이북 애인이 되겠다고 너 보고 대신 전하라고 그랬어?”엘리자는 예쁘게 빨간색 매니큐어를 한 손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그 여자가 너한테 돈을 얼마나 줬어?”“뭔가 오해가 있으신 모양인데, 그런 거 아닙니다.”루이스의 이마는 순식간에 또다시 땀이 흥건해졌다.“너무 예쁘게 생겨서 제가 순간 넋이 나가 대신 말을 전해준 것뿐입니다.”그러자 엘리자는 어이가 없다는 듯 차갑게 웃었다.그리고 지갑에서 카드 한 장을 뽑아서 루이스에게 건네주었다.“이 카드 안에 10만 달러 있어. 한동안 부귀영화 누리면서 살기에는 충분할 거야. 이 돈 가지고 앞으로 다시는 이상한 여자들 트레이북한테 소개해 주지 마. 너희 경호팀 모든 경호원에게도 똑같이 전해. 그 어떤 여자도 도와주지 말라고.”루이스는 멍해져 되물었다.“무슨 뜻인지 자세히 설명해 주기 바랍니다.”“트레이북은 내가 이미 찜해 놓은 남자야. 누가 나랑 맞선다면 그건 곧 우리 아빠랑 맞서는 걸로 간주할 거야.”엘리자는 입꼬리를 올리고 웃으며 말했다.“돈만 받고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면, 난 우리 아빠한테 네 손톱을 하나씩 뽑고 살을 갈기갈기 찢어서 바다로 던져버리라고 부탁할 거야. 그러니 알아서 해!”엘리자는 말을 마치고 엉덩이를 실룩거리며 트레이북의 발걸음을 따라갔다.루이스는 10만 달러가 들어 있는 은행카드를 들고도 전혀 기쁘지 않았다.‘앞으로 다른 경호원이 보스한테 여자를 소개해 주면 엘리자는 나한테 책임을 묻겠지?’‘참,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감당해야만 품을 수 있는 10만 달러구나!’루이스는 크게 한숨을 쉬며 느릿느릿 연회장으로 향했다.예나는 설민준과 구석에 있는 휴게실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곁눈질로 루이스가 뒤에 있는 휴게실에서 걸어 나오는 것을 보게 되었는데, 루이스는 풀이 잔뜩 죽어있었다.“일을 망쳤나 봐.”설민준은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이제 어떡해?”예나는 샴페인을 한 모금 마시고 덤덤하게 말했다.“조급해할 필요 없어. 연회는 이제
루이스의 말에 예나의 발걸음은 순간 멈추게 되었다.예나는 시선을 살짝 돌려 엘리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트레이북 약혼녀였구나, 어제 성을 낼만 했네.’만약 예나가 이때 몸을 돌려 떠난다면 엘리자는 예나의 목적을 더욱 의심하게 될 것이다.하여 예나는 웃으며 손을 흔들어 루이스를 옆으로 밀치며 더없이 담담하게 말했다.“저와 엘리자 씨와 아는 사이입니다. 좀 비켜주세요.”루이스는 단지 거대한 힘이 자신을 밀어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무슨 여자가 힘이 이렇게 세지?’루이스가 한창 예나의 힘을 의심하고 있을 때, 예나는 이미 트레이북과 엘리자 앞에까지 왔다.예나를 보고 엘리자는 마음속에 불안감이 가득했다.어제 예나는 남편이 있다고 했지만, 남편이 있다고 해서 다른 남자를 꼬실 수 없는 것은 아니다.게다가 어제 예나가 가져온 찻잎을 엘리자는 트레이북한테 자기 아빠가 어렵게 구해 온 진 나라의 특산물이라고 거짓말을 했다.만약 이 거짓말이 들통이라도 난다면, 엘리자는 트레이북 앞에서 몹시 난처할 것이다.‘안 돼! 절대 그렇게 둘 수 없어!’어제에 있었던 일들을 생각하니 자기에게 마냥 불리해지자 엘리자는 재빨리 앞으로 나가 앞을 막았다.“누구세요?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그러자 예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엘리자 씨, 저 기억 안 나요? 어제 우리 만났었잖아요.”엘리자는 예나가 찻잎에 대해 언급할까 봐 안절부절못했다.‘제발 찻잎에 대해서는 말하지 마!’어제 예나가 가져온 보이차에 트레이북은 매우 만족하여 엘리자에게 다소 친절을 베풀기도 했다.어렵게 얻은 호감을 예나 때문에 망칠 수 없다는 생각이 가득했다.엘리자는 일부러 더욱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여기는 고급 비즈니스 회동 장소인데, 어떻게 들어온 겁니까?”예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트레이북이 손을 들어 금지했다.트레이북은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가 눈앞의 여자를 지그시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그저께 레스토랑에 있던 그 여자분 아닌가요?”예나는 예쁜 미소를 머금고
“괜찮을 거야.”예나는 안심하라는 듯 설민준을 향해 웃었다.그리고 응접실 문은 굳게 닫혀버렸다.화가 치밀어 오른 설민준은 주머니를 더듬으며 담배 한 대를 꺼냈다.“흥!”이때 엘리자가 차가운 웃음소리를 내며 다가왔다.“아내가 다른 남자하고 단둘이 한 방에 있는데, 걱정도 안 되세요?”“그쪽이 상관할 바는 아니잖아요?”설민준은 엘리자를 차갑게 쳐다보았다.“그쪽 약혼자나 똑바로 챙기세요.”왠지 모르게 설민준은 예나를 보는 트레이북의 눈빛이 좀 이상하다고 느껴졌다.트레이북은 이 지역의 보스이다.만약 정말로 예나한테 다른 마음이 생긴다면 설민준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설민준은 라이터를 든 손을 덜덜 떨며 한참 동안 담배에 불을 붙이지 못했다.‘X발!’그러자 엘리자는 또다시 설민준을 비웃었다.“찌질한 남자만이 자기 아내를 내세워 편의를 바꿉니다! 남자로서 부끄럽지 않아요?”설민준은 엘리자의 말을 들을 겨를이 없었다.담배를 한 모금 피우고 곧 숨을 죽였다.그리고 응접실 안의 소리를 들어 보려고 했지만, 방음 효과가 너무 좋아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응접실은 매우 커서 트레이북은 베란다에 가까운 위치에 앉았고 예나는 그 뒤를 따라갔다.두 사람이 지금 있는 이곳은 문에서 10미터 정도 떨어져 있다.예나는 막 입을 열어 자기 의사를 표명하려고 했다.그러나 트레이북이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그윽하고 차가운 칠흑 같은 눈동자로 조용히 예나를 보고 나서 입을 열었다.“진나라 언어 할 줄 알아요?”예나는 트레이북의 이러한 눈빛에 알 수 없는 감정이 불현듯 떠올랐다.이런 정서에 다소 정신이 몽롱해져 겨우 시선을 거두고 진나라 언어로 말했다.“진나라 사람인데, 당연히 할 줄 압니다.”“그럼, 내가 하는 진나라 언어는 어떤 수준인지 한번 들어줄래요?”트레이북은 천천히 입을 열어 또박또박 말했다.예나는 순간 제자리에 굳어졌다.그저께 예나는 이미 트레이북의 목소리가 매우 익숙하다고 느낌이 들었었다.그리고 오늘 진나라 언어로 들으니 그 익숙
트레이북은 환하게 웃고 있는 예나를 바라보면서 약간 넋이 나갔다.예나의 웃는 모습도 말투도 작은 움직임도 왠지 모르게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뭐지? 이 익숙한 느낌은?”그러다가 귀신이 곡할 노릇으로 트레이북은 손을 내밀었다.예나는 경계하며 뒤로 몸을 젖혔으나 트레이북은 예나의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잡았다.트레이북은 정신을 잃고 손바닥의 새까만 머리카락을 보면서 오랜만에 익숙한 향기가 풍겨왔다.“지금 뭐 하는 겁니까!”예나의 차가운 목소리는 단 한 번에 넋을 잃은 트레이북을 현실로 끌어들였다.“죄송합니다.”트레이북은 예나의 머리카락을 풀어주었다.얼굴에는 수많은 감정이 스쳐 지나갔고 얇은 입술도 힘껏 오므리고 있었지만, 금색 가면 뒤에 가려져 있었다.하여 예나의 시점에서 보면 트레이북은 여전히 차갑고 위험하며 신비로워 보인다.“만약 합작을 원하지 않는다면, 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예나는 갑자기 일어서서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무엇이든 바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기 몸을 바칠 수 있는 것은 아니다.사랑은 베푸는 것이고 주는 것이다.마찬가지로 사랑이란 단어에는 충성과 고수가 따른다.“제가 언제 협조하기 싫다고 그랬나요?”남자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울렸다.“찾고 싶은 사람이 누군지 말씀해 보세요.”예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입술을 오므리며 고개를 돌렸다.“정말로 찾아줄 수 있는 겁니까?”“그 사람이 누군지부터 말씀해 주세요.”“제가 찾으려는 사람은 아시아계 남자입니다. 한 달 전 H 지대에서 실종됐습니다.”예나의 목소리는 다소 젖어 들었다.“마지막으로 목격한 사람의 진술로는 20여 일 전이라고 합니다.”예나의 정서는 갑자기 가라앉았는데, 마치 활짝 핀 꽃이 갑자기 시든 것 같았다.그런 예나를 바라보면서 트레이북은 왠지 모르게 가슴이 미어졌다.이 통증은 서서히 온몸으로 퍼져서 손가락까지 약간 뻣뻣하게 웅츠러들었다. 트레이북은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 사람과 어떤 관계입니까?”“제 남편입니다.”예나는 두
불현듯 서글픈 감정이 밀려올 때도 있었다.그러한 감정이 생겨나는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마냥 괴롭고 한동안 슬픔에 잠기기도 했다.트레이북은 한참 동안 침묵하더니 담담하게 말했다“H 지대에서 사람을 찾는 건 어렵지 않지만, 다른 세력의 반항을 불러일으킬 수 있어 저도 며칠간 고민해 봐야 합니다.”예나의 예상에 이러한 반응도 있었다.하여 예나는 당황하지 않고 입꼬리를 올리고 미소를 지었다.“네, 그럼, 답장 기다릴게요.”예나는 트레이북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돌려 여유롭게 바깥쪽으로 걸어갔다.응접실 문을 열고 한 걸음 나가자마자 화사하게 차려입은 여자에게 길이 막혔다.엘리자의 푸른 눈동자에는 분노가 가득했다.엘리자는 목소리를 낮추어 냉랭하게 말했다.“남편도 있으면서 다른 여자 약혼자한테 꼬리를 치는 게 취미세요? 진나라의 여자들은 모두 이렇게 뻔뻔하나요?”“엘리자 씨, 좀 가리면서 말씀하시죠! 예나는 차갑게 말했다.“전 트레이북 씨와 비즈니스 합작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왔습니다. 부디 그런 추악한 마음으로 추측하지 말아 주시죠."“굳이 문을 닫고 할 필요는 있을까요?”엘리자는 점점 이성을 잃어 가듯 목소리도 다소 불안정했다.“경고하는데 내 약혼자한테서 멀리 떨어져요. 그렇지 않으면 평생 얼굴 들고 다니지 못하게 내가 그쪽 얼굴 망가뜨릴 겁니다.”그러자 예나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굳이 문을 닫은 이유는 엘리자 씨가 들어오지 못하게 막기 위해서입니다.”“근데 약혼자라는 사람이 왜 이토록 자기 약혼녀를 방비하는 지 곰곰이 반성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엘리자는 화가 치밀어 얼굴도 화끈 달아올랐다.예나는 그런 엘리자를 한 번 힐끗 보고는 설민준 곁으로 다가가 담담하게 말했다.“좀 생각해 보겠다고 했어. 우리 그만 가자.”설민준의 눈빛은 예나의 몸 위를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했다.그렇게 여러 번 훑어보더니 한숨을 돌렸다.“그래, 집에 가자.”오는 내내 설민준은 머뭇거리기만 하고 말을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