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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어느날 갑자기, 구재인이 정신을 차렸다. 눈빛도 전처럼 혼탁하지 않았다.

그는 길게 자란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검은색 정장도 입었다. 그리고 꽃다발을 사들고 나의 묘지에 찾아갔다.

오늘따라 햇빛이 강렬했다. 나는 눈도 제대로 뜰 수 없었다. 나의 묘지 앞에 서서 그는 참회하기 시작했다.

“내가 왜 빨리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널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도 비인간적인 행동은 하면 안 됐어. 내가 멍청해서 연채민의 수에 넘어갔어. 나만 아니었어도 너랑 아이는 무사히 지냈을 거야. 내가 우리 행복을 파괴했어. 내가 너랑 아이를 죽였어.”

그의 고백이 나에게는 웃음거리로만 느껴졌다. 감동은 하나도 없었다.

“이제 내가 대가를 치를 게.”

‘양채민이 다 죽었는데 무슨 대가를 치른다는 거야?’

나는 구재인 차의 뒷좌석에 앉아 있었다. 차에 오른 그는 갑자기 가속 페달을 밟아 기둥으로 돌진했다.

곧이어 그의 영혼이 스르르 몸에서 빠져나왔다. 나의 영혼도 드디어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는 눈을 떠서 나를 바라봤다. 눈빛에는 기쁨으로 가득했다. 그는 있는 힘껏 나를 향해 날아왔지만 이미 늦었다.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 구재인이 나의 이름을 부르며 무언가 말하는 것이 들렸다. 하지만 나는 듣지 않았다.

사랑 따위 이제는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다음 생에는 절대 나를 사랑하지 않는 남자를 사랑하지도 않을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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