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구재인의 찌푸려진 미간을 멍하니 바라봤다. 나 때문에 빨리 이혼 절차를 밟지 못해서 짜증이 난 것 같다.우리는 결혼한 지 2년 되었다. 나는 고성병원을 포함한 고성그룹의 영역에 한 번도 들어간 적 없다. 몸이 불편해서 찾아갔다가 임신 사실을 알게 된 것도 다른 병원이다.간호사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한숨을 쉬었다.“그분 온 지 얼마 안 돼서 돌아가셨어요. 원래 교수님을 호출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아무튼 혹시 그분 친구나 가족한테 연락이 가능하면 대신 해주실 수 있나요? 저희는 핸드폰을 찾지 못해서 경찰이 조사하는 중이에요. 그분 시신이 조금 험해서 가족들도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거예요.”“일 이런 식으로 할 거예요?”구재인은 예리한 말투로 간호사의 말을 끊었다.“실습생도 치료할 수 있을 상처 가지고, 환자랑 손잡고 연기까지 하는 거예요? 그 여자 마음이 독한 만큼 몸도 좋아요. 그렇게 쉽게 죽지 않는 거 다 알고 있어요.”코가 시큰거리더니 나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구재인은 항상 내가 몸이 좋다고 비웃었다. 결혼한 2년 동안 약 먹는 꼴을 한 번도 못 봤다면서 말이다.그는 몰랐다. 나는 몸이 약한 탓에 감기를 달고 살았다. 열도 시도 때도 없이 나서 해열제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이다.한 번은 외출 중 목이 너무 심하게 아파서 그에게 전화한 적 있다. 말할 힘도 없는 나에게 그는 꾀병으로 일을 방해한다고 짜증이나 부렸다.의사로서 구재인은 환자에게 무한한 인내심이 있었다. 짜증은 나에게만 부렸다.그날 이후 나는 한 번도 그에게 아프다는 말을 한 적 없다. 일 때문에 새벽이 되어야 돌아오는 그도 내가 아픈 걸 잘 몰랐다. 어쩌면 그냥 관심이 없었을 수도 있다.반대로 나는 구재인이 양채민을 걱정하는 모습을 수도 없이 봐 왔다. 양채민이 해외에서 혼자 아프다면 밤새 고성병원의 약을 들고 찾아갔다. 그리고 자주 전화해서 걱정도 해줬다.구재인은 사람 걱정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그 이유가 모든 걱정을 한 사람에게 퍼부어서일 줄은 누가
구재인의 말은 비수가 되어 나의 심장에 꽂혔다.양채민은 손가락을 흠칫 떨더니 약간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바로 달콤한 미소로 대체 되었다.그녀는 예쁜 얼굴을 들어서 구재인을 바라봤다.“우리 꼭 용감해지자. 이제 누구도 우리를 갈라놓지 못해.”햇살은 창문을 통해 병실을 밝혔다. 양채민은 발끝을 들어 구재인에게 입술을 맞추려고 했다.나는 구재인이 당연히 받아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단호하게 그녀를 밀어냈다. 언제나 양채민이 하자는 대로 해주는 그에게서 참 보기 드문 일이다.양채민은 잠깐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사라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구재인은 다소 당황한 말투로 설명했다.“나 아직 이혼하지 않았잖아. 너를 위해서 이게 맞아.”구재인은 양채민이 내연녀 소리를 들을까 봐서 걱정했던 것이다. 양채민은 유명한 모델이다. 공인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당연히 지킬 건 지켜야 했다.그렇게 무딘 구재인이 양채민을 위해 섬세해졌다. 보는 내가 다 부러울 정도였다. 주제도 모르고 끼어든 내가 참 한스러웠다.나는 어두운 구석에 쭈그려 앉아 힘겹게 호흡했다. 이곳에는 도무지 있을 수 없을 것 같아서 결국 영안실로 돌아갔다.한 남자가 내 시신 곁에서 펑펑 울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상대는 다름 아닌 나의 오빠 양채훈이었다.구재인과 대비되는 모습에 나의 마음은 이제야 약간 따듯해졌다. 양채훈은 집안에서 유일하게 나를 가족 취급해 주는 사람이었다.그는 나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듯 싸늘한 주검이 된 나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는 애써 고통을 참으며 구재인에게 전화를 걸었다.연결음이 한참 들려온 끝에 전화가 통했다. 양채훈은 분을 참지 못하고 외쳤다.“망할 자식아! 네 와이프가 죽었어! 내 동생이 너한테 어떻게 했는데, 죽었다고 쳐다보지도 않는 거야?”다짜고짜 이런 전화를 받은 구재인은 당연히 기분이 나쁠 수밖에 없었다.“간호사에 이어서 너까지 합세해서 연기하네. 다들 심심한가 봐? 양채연한테 전해줘. 날 피해 봤자 소용없다
수능시험이 끝난 날 오후, 나는 구재인과 함께 시험장에서 나왔다. 구재인은 친구들과 모임이 있다면서 집에 돌아가지 않는다고 했다.그렇게 한적한 골목을 지나고 있을 때, 양아치처럼 생긴 사람들이 그를 둘러쌌다. 그리고 다짜고짜 연장을 쳐들고 휘두르기 시작했다.나는 신고할 정신도 없이 몸으로 연장을 막았다. 그들이 휘두른 연장은 나의 등으로 떨어졌다. 그중 한 몽둥이는 나의 머리에 떨어졌다. 귀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린 다음에야 그들은 공격을 멈췄다.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 병원의 천장이 보였다. 구재인의 부모님과 나의 부모님은 함께 앉아서 무언가 얘기하고 있었다. 후에야 나는 머리를 맞은 탓에 오른쪽 귀가 영원히 들리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그 뒤로 구재인이 나를 대하는 태도는 약간 달라졌다. 더 이상 냉정하게 무시하지 않았고 생일이면 선물도 꼬박꼬박 챙겨줬다. 그렇게 우리는 모두의 예상대로 결혼까지 했다.나의 영혼은 부쩍 허약해졌다. 온몸이 아팠다.나는 그때 그 순간 구재인을 구했던 것을 진심으로 후회했다. 만약 그를 구해주지 않았다면 결혼까지 하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양채민의 손에 죽지도 않았을 것이다.이때 병실 문이 활짝 열렸다. 나는 흠칫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상대는 얼굴도 보이지 않을 속도로 휙 지나가더니 구재인의 멱살을 잡고 주먹을 날렸다.구재인은 바닥에 쓰러졌다. 얼굴은 서서히 빨개졌다. 고개를 들고 초점을 맞춘 그는 상대가 양채훈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안색이 무섭도록 어두워졌다.“양채훈 너 미쳤어?”구재인은 가만히 있지 않고 주먹을 휘둘렀다. 그전에 양채훈이 그의 팔을 잡고 복부를 가격했다.“넌 인간도 아니야. 내 동생이 죽었는데 여기서 다른 여자랑 같이 있어? 너 오늘 내 손에 죽을 줄 알아.”구재인은 분이 치밀었다.“우리가 친구였던 걸 생각해서 지금까지 참았어. 너도 작작 해. 이 따위 허접한 연기 하는 거 다 이혼하지 않으려고 그러는 거잖아!”이 말을 들은 나는 마음이 차갑게 식었다.그는 나
따라왔다가 이 말을 들은 양채민은 몸을 떨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당황함을 감췄다. 참 이상했다. 양채훈이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그녀를 싫어했으니 말이다.나의 양부모는 자연그룹의 기사와 도우미였다. 내가 친동생이라는 걸 알게 됐을 때 양채훈은 얼마나 좋아했는지 몰랐다.“그래서 채연이 널 볼 때마다 익숙한 느낌이 들었구나. 네가 내 친동생이었어. 앞으로 오빠가 지켜줄게.”내가 집에 돌아온 첫날, 양채훈은 나를 지켜주겠다고 맹세했다. 그리고 그는 정말 그렇게 했다.그는 모든 명절과 기념일에 나의 선물을 준비했다. 그리고 부모님도 안 주는 용돈을 꼬박꼬박 챙겨줬다. 내가 돈 모자랄 일 없도록 말이다.내가 죽은 다음 속상해 해주는 사람도 양채훈 밖에 없을 것이다. 그라면 범인을 찾을 때까지 노력해 줄 것 같았다.양채훈은 문을 열고 사정없이 구재인을 밀었다. 나의 시신을 직면한 구재인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참 기대가 되었다. 기쁨의 눈물을 흘릴까? 아니면 조금이라고 속상해할까?당장이라도 화내려고 했던 구재인의 표정은 내 옆모습을 본 순간 굳어버렸다. 그는 멍하니 영안실에 꼼짝하지 않고 있는 나를 바라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그는 비틀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양채훈은 그를 억지로 끌고 가서 내 시신 앞에 무릎 꿇렸다. 그는 머리를 흔들며 중얼거렸다.“말도 안 돼. 내가 떠날 때만 해도 멀쩡했어. 말까지 했다고! 죽었을 리가 없어...”‘난 죽기 적전 도움을 청했던 거야. 그러게 도와주지 않고 뭐했어?’구재인은 양채민의 찰과상에 정신이 나가 있었다. 그래서 구급차에 그녀만 태웠다. 나는 바닷속에서 죽어가는 몸뚱이를 마냥 느낄 수밖에 없었다.“10분만 일찍 왔어도 살 수 있었대. 채연이는 살 수 있었어. 근데 현장에 도착한 구급차에 양채민만 태웠다더라. 채연이를 죽이는데 너도 한몫했어. 아주 대단해.”너무나도 잔인한 말이었다.말을 마친 양채훈은 구재인의 기분을 신경 쓰지도 않고 몸을 돌려 떠났다.구재인은 넋을 잃은 표정으로 나
“오빠, 다 나 때문이야. 나 대신 언니를 구급차에 태웠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 내가 죄인이야. 차라리 죽은 사람이 나였으면 좋겠어.”구재인은 서서히 손을 내려놓았다. 눈빛은 무섭게 번뜩이고 있었다.“나가 있어. 나 혼자 채연이랑 있고 싶어.”‘채연...? 언제는 양채연, 이름 석 자 다 부르더니.’구재인을 이곳에 남겨두고 싶지 않았던 양채민은 가슴을 움켜쥐며 말했다.“아파!”하지만 구재인은 아무것도 듣지 못한 것처럼 그녀에게 시선 한 번 주지 않았다.양채민은 불만스러운 듯 인상을 썼다. 하지만 그녀가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떠나기 직전 그녀는 나의 시신을 바라보며 세상 환한 미소를 지었다. 괴이하고도 악독했다.안에서 구재인은 용기 내서 나의 손을 잡았다. 표정은 아주 슬퍼 보였다. 그러나 그의 반응이 나는 구역질 나기만 했다.“더러운 손으로 날 건드리지 마!”아쉽게도 그는 들리지 않았다.나의 손목에 걸려 있던 팔찌는 그가 손을 들어 올린 순간 끊어져서 툭 떨어졌다.그는 잠시 멈칫했다. 나에게 준 첫 번째 선물이라는 걸 떠올린 듯했다. 그를 위해 청력을 잃은 후의 첫 번째 생일 선물 말이다.나는 팔찌를 받았었다. 비싼 것은 아니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었다. 씻을 때도 빼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양채훈은 돈도 안 되는 팔찌를 보석 취급할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놀렸다. 그의 말이 맞았다. 나는 실제로 비싼 팔찌들을 두고 이거 하나만 했었다.그렇게 8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구재인이 준 선물이라는 이유로 애지중지했던 세월이 8년이라는 말이다. 그런 팔찌마저 나의 운명에 한탄하는 듯 끊어지고 말았다.구재인은 떨리는 손으로 팔찌를 주웠다. 더 이상 슬픔을 억누르지 못한 그는 나의 시신을 끌어안고 울기 시작했다.그런데도 나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뒤늦은 후회보다 지독한 것도 없었다.구재인이 집에 돌아갔을 때는 아주 늦은 때다. 불을 켜지 않은 방은 아주 어두웠다.그의 얼굴에는 더 이상 슬픔이 보이지 않았다. 정확히
쪽지 내용을 확인하고 난 구재인은 갑자기 크게 웃기 시작했다. 그의 어깨는 부르르 떨렸다. 눈가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그가 본 것은 산부인과의 검사 보고서였다.나와 구재인 사이에는 별로 달콤한 기류가 오간 적 없다.얼마 전 그는 지진 현장에 봉사하러 갔다가 높은 곳에서 떨어져 다친 적이 있었다. 허벅지가 골절된 그는 침대에 3개월이나 누워 있어야 했다.나는 물론 그의 곁에 꼭 붙어서 간병인 노릇을 자초했다. 구재인은 편식이 심한 타입이었다. 나는 그것까지 고려해서 영양가 높은 음식을 해주며 그의 입맛을 맞췄다.작년 나의 생일날, 구재인은 불꽃놀이를 준비해 줬다. 하늘을 밝히는 불꽃은 우리가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기록했다.나는 조각 같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처음으로 용기 내서 입술을 맞췄다. 나의 몸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나를 밀어내지 않았고 오히려 허리를 감싸며 더 깊이 키스했다.그다음 그는 이렇게 물었다.“생일 소원이 뭐야?”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나 아이 갖고 싶어. 그래야 가정을 꾸린 느낌이 들 것 같아.”그는 나의 볼을 살짝 꼬집으며 웃었다.“그게 무슨 소원이야. 애 정도는 쉽게 만들 수 있잖아.”그러나 남들에게 쉬운 일이 나에게는 결코 쉽지 않았다.임신을 준비한 것만 1년이다. 나는 맛없는 한약도 질리도록 먹었다. 그 끝에 임신한 나는 하루빨리 그에게 알려주고 싶었다.내가 납치당한 날은 우리의 결혼 2주년 기념일이었다. 그날 구재인은 아침 일찍 가방을 챙겨 들고 외출했다.나는 나가려는 구재인을 붙잡고 저녁에 2주년을 축하하자고 했다. 구재인은 누군가와 문자 하면서 머리만 끄덕였다.아무튼 나는 아주 기뻤다. 오후에 그가 사줬던 치마를 차려입고는 일찍 호텔에 갔다. 오늘 아이의 존재를 알릴 생각으로 말이다.호텔에서 나는 전화를 아주 많이 걸었다. 하지만 구재인은 전부 끊어버렸다. 마지막 전화는 양채민이 받았다. 그제야 나는 두 사람이 함께 있었음을 눈치챘다.그날 밤, 나는 혼자 밤길을 걷
구재인은 이틀 연속 외출하지 않았다. 전화가 오는 것도 받지 않았다. 그는 침실에 틀어박혀서 문을 잠갔다. 청소하려는 도우미조차 들이지 않았다.그는 서랍에서 나의 일기장을 찾았다. 나는 중학교 때부터 일기를 쓰는 습관이 있었다. 일기장에는 구재인을 향한 마음도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나는 그 어리석은 과거를 구재인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기를 써서 막고 싶었지만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내가 구재인을 좋아하는 데는 특별한 이유가 없었다. 그냥 잘생기고 공부를 잘해서 좋았다. 모두 자신보다 잘난 사람을 좋아해 본 기억이 있지 않는가? 나도 마찬가지다.어두운 조명 아래, 10대의 나는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나는 구재인이 좋다. 재인이는 잘생기고 공부도 잘하는 데다가 착하기까지 한 것 같다. 가난한 아이를 위해 기부하는 모습이 참 멋지다.][나는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재인이는 재벌가 아들이다. 우리는 영원히 만날 일이 없을 것 같다.]후에 친부모를 찾은 다음에는 이렇게 적었다.[채민이 대신 결혼하게 된 게 참 불편하다. 구재인은 나를 안 좋아하는 것 같다. 이 결혼 안 하고 싶다고 하니 아버지가 내 뺨을 때렸다. 너무 아팠다.][채민이가 양아치 같은 애한테 고백하는 걸 봤다. 채민이는 재인이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재인이가 참 불쌍하다. 차라리 내가 결혼을 해야겠다.][양채민 혼자 계단에서 떨어졌다. 근데 재인이는 내가 밀었다고 한다. 나를 더 미워하게 된 것 같다.][재인이 다리를 다쳤다. 내가 잘 챙겨줘야 한다. 입맛이 까다로우니 학원에 다녀야겠다. 무조건 재인이 입맛에 맞는 음식을 만들고 말겠다.][양채민이 귀국했다. 조용히 나를 불러내서는 재인이한테서 멀어지라고 했다. 나는 거절했다. 양채민은 분명히 재인이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양채민이 전화를 해서 울었다. 전화 한 통으로 재인이를 불러냈다. 내가 진짜 빠져줘야 하는 건 아닐까? 세 사람의 연애는 감당 못 하겠다.]일기장의 마지막 기록은 이랬다.[드디어
구재인에게 연락이 닿지 않자 양채민은 바로 찾아왔다. 문이 열린 순간 그녀는 구재인의 품에 안겼다.“오빠, 요즘 연락이 안 돼서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구재인은 그녀를 딱히 밀어내지 않고 눈물을 흘리도록 내버려뒀다. 한참 후에야 울음을 그친 양채민은 빨개진 눈시울로 말했다.“오빠 지금 언니 때문에 얼마나 힘든지 알아. 근데 이미 일어난 일에 과하게 신경 쓰지 마. 오빠 원래도 언니랑 이혼하고 싶어 했잖아. 앞으로는 내가 오빠를 챙겨줄게.”이렇게 말하며 양채민은 구재인의 옷 단추를 풀려고 했다. 하지만 그가 먼저 그녀의 손을 꽉 틀어잡았다.양채민은 의아한 표정으로 구재인을 바라봤다. 정말 순수한 표정으로 말이다. 그런데도 구재인은 냉정하게 그녀를 밀어냈다.“채연이는 한 번도 너한테 나쁜 마음을 품은 적 없어. 근데 넌 채연이를 모함하려고 계단에서 혼자 굴러떨어지기까지 했더라?”양채민은 당황한 표정으로 변명했다.“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오빠는 날 알잖아. 내가 왜 언니한테 그런 짓을 하겠어? 그리고 이번에도 언니가 날 불러냈기 때문에...”“잠깐, 너 나 안 좋아하지? 좋아하는 척한 건 그냥 사랑받는 기분을 즐겨서지? 맞지?”양채민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구재인이 끼어들었다. 시선에는 증오로 가득했다.양채민은 몸을 굳히더니 안색이 빠르게 변했다. 입술은 파르르 떨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눈물은 안타까울 정도로 뚝뚝 떨어졌다. 그러나 구재인은 면역이라도 된 것처럼 짜증 섞인 표정으로 그녀를 집 밖으로 내쳤다. 밖에서 아무리 울음소리가 들려와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그렇다고 해도 나는 감동하지 않았다. 그가 양채민을 밀어내는 이유도 전부 배신감 때문일 것이다. 양채민이 진심으로 사과한다면 또 받아줄 게 분명했다. 그는 양채민에게 원칙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