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도준은 허이서가 이번에는 또 무슨 기막힌 말을 할지 기다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젓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안 먹어요.”“달달한 거야.”“그래도 싫어요.”허이서는 촉촉한 눈동자를 하고 말했다.“사탕 하나로 달랠 수 있는 나이는 이미 지났다고요, 아빠도 이제 나 어린애 취급하지 마요.”그때 입구에 서 있는 강태윤을 본 여도준이 그쪽으로 가려 했지만 허이서에게 팔이 잡혀버렸다.“또 어디 가게요?”말투에는 원망이 다분했다.“금방 올 거야.”여도준이 밖으로 나오자 강태윤이 핸드폰을 그에게 건네주며 말했다.“서희 씨가 아까부터 계속 연락하셨습니다.”“좀 있다 갈 거야.”“아까 오정식한테 들어보니까 뭔가를 알고 있는 눈치였습니다, 적어도 도련님께서 허이서 씨 일에는 신경 안 쓴다는 걸 알고 이런 짓들을 저지른 것 같습니다.”강태윤의 말에 여도준은 차갑게 되물었다.“이 일이 서희와 관련 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야?”조서희 일이라면 한없이 물러지고 그녀가 불을 지른다 해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며 무조건 감싸는 여도준을 알기에 강태윤은 섣불리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여도준은 평온한 눈으로 강태윤을 보며 말했다.“서희 의심하지마, 병원에서 1년 만에 나온 애가 그런데 신경을 쓸 리가 없잖아.”“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죄송합니다.”“아빠.”그때 방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여도준은 차오르던 화를 억누르며 문고리에 손을 얹은 채 강태윤을 향해 말했다.“서희한테 나 내일 아침에 바로 소명시 가야 해서 오늘은 앰버카운티에 안 돌아간다고 전해.”“네?”이 말을 자신더러 전하라고 하는 게 좀 이상한 것 같아 강태윤이 다시 물어보려고 했지만 여도준은 이미 방 안으로 들어가고 없었다.침대에 누워있는 허이서는 박인혁의 말처럼 흥분해있지는 않았고 그냥 정신이 몽롱한 듯 보였다.“왜 자꾸 불러.”여도준이 침대에 걸터앉아 허이서는 반려견마냥 그에게로 다가가 그의 무릎을 베고 누우며 말했다.“아빠, 안 가면 안 돼요?”
“진짜요?”“응.”여도준은 오정식의 일에 허이서의 잘못은 없다고 여기고 있었다.그리고 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에게 도움을 청한 것도 잘못은 아니었다.한편 앰버카운티에서는 강태윤에게 여도준이 오늘 안 들어온다는 연락을 받은 조서희가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핸드폰을 내리치려 하는데 아주머니 하나가 달려오더니 그런 조서희의 팔을 잡았다.“아가씨, 이런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잖아, 일단 진정하세요.”“아주머니, 여도준이 허이서 데리고 갔으면서 나한테는 거짓말을 해요...”“그래도 지금 아가씨가 믿을 건 도련님뿐인데 그런 분과 싸우는 건 아니죠.”아주머니의 말에 조서희가 이를 악문 채 답했다.“그렇다고 그 여우 같은 년이 도준 씨를 채가게 두고 볼 수만은 없잖아요!”“당연하죠, 아가씨와 도련님 사이에 그런 년이 끼어들게 둘 수는 없죠.”김숙희는 조씨 집안에서부터 조서희를 보살펴주던 사람으로서 그녀에게 사고가 있은 뒤에도 계속 옆에서 조서희를 지켜주고 있었다.김숙희는 조서희의 어깨를 다독여주며 말했다.“도련님만 아가씨 편이면 그 년은 아무런 위협도 안 돼요.”“하지만 내 사진이 유출될 뻔했는데도 도준 씨는 그 애한테 아무런 책임도 묻지 않았어요.”“물었죠, 사진이 유출 안 됐는데도 그 여자는 아가씨한테 뺨 맞았잖아요, 동료는 다치기까지 하고. 만약 도련님이 정말 그 여자를 아꼈다면 그렇게 당하는 걸 보고만 있었을까요?”김숙희의 말을 듣던 조서희는 일리가 있는 것 같아 다시 마음을 편안하게 먹었다.한편 이튿날 아침, 술에 거나하게 취했던 허이서는 눈을 떴지만 어제에 대한 기억이 온전하진 않았다.그렇게 옆을 더듬어대던 그녀의 손에 사람의 피부가 닿았다.그게 오정식이라고 생각한 허이서는 구역질이 올라와 그 얼굴을 볼 엄두도 못 내고 이불을 들춰보며 자신의 몸부터 확인했다.다행히도 허이서는 옷을 잘 갖춰 입고 있었고 옆에 누워있는 남자는 속옷 차림이었는데 다리가 길고 복근까지 있는 것이 아무리 봐도 오정식 같지는 않아 허이서는 천천히
하지만 허이서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계속 앞으로 걸어 나갔다.“그럼 오정식을 다시 너희 집으로 보내서 네 동생 제대로 놀라게 해줄까? 그래야 내 말을 믿겠어?”여도준의 말에 주먹을 꽉 쥔 탓에 허이서는 손가락이 아닌 손등이 아파왔다.“죄송해요 도련님, 저 대신 제 가족들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침대에서 내려온 여도준은 차가운 밤바람이 창문 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만들어낸 습한 공기를 가로 지나 허이서에게로 다가갔다.“성격은 언제 이렇게 변한 거야? 전에는 나한테 달라붙지 못해서 안달 난 사람처럼 굴더니, 이젠 그런 가식 떨 필요도 없어진 거야?”“사람이면 누구나 존엄이라는 게 있어요. 내가 도련님한테 빌었던 건 살기 위해서였어요. 그런 날 모른 척한 건 도련님이시고요, 날 돕지 않겠다는 사람한테 더 애원할 필요는 없죠.”여도준은 생각보다 현실적인 허이서를 보며 말했다.“양심이란 건 없나 봐? 어제 오정식한테서 널 구해준 게 난데.”여도준의 말에도 허이서는 고개를 숙이고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어차피 도와줄 거면서 왜 그 수모를 다 당한 뒤에야 손을 내민 것인지, 자신이 절망하는 꼴을 보며 즐거웠던 건지 어이가 없어서 고맙다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여도준은 그런 허이서의 어깨를 잡고 돌려세우며 그녀가 완전히 자신을 등지게 한 뒤 팔로 그녀를 목을 끌어안았다.그렇게 여도준의 품에 안긴 허이서는 벗어나려 몸부림쳤지만 그럴수록 여도준은 더욱더 힘을 주어 그녀를 안았다.“녹음만으로는 오정식 벌 받게 할 수 없어. 더 확실한 증거가 있어야 해.”“알아요, 그건 경찰들이 조사할 거예요.”여도준은 엄지손가락으로 도드라진 허이서의 쇄골을 짓누르며 말했다.“오정식이 밖에 있는 한 너와 네 가족들은 항상 위험에 노출되어있는 거나 마찬가지야. 내가 지금 바로 감옥에 보내줄게.”“그 조건은 뭐에요?”“어제 나한테 아빠라고 부른 걸로 값은 이미 다 치렀어.”그 말에 깜짝 놀란 허이서가 고개를 돌리자 워낙 가까웠던 거리 탓에 둘의 입술이 부딪혀버렸고 이
앰버카운티.밖에서 밤을 보내고 오는 여도준 때문에 심란해서 잠을 설친 조서희가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창밖을 보고 있던 김숙희가 다급히 말했다.“도련님 오십니다.”김숙희는 조서희의 축 처진 얼굴을 보며 말했다.“아가씨, 이런 모습 보고 좋아할 남자 없어요, 얼른 좀 웃으세요.”2층까지 올라오는 소리가 모를 수 없을 정도로 컸지만 조서희는 방안에서 여도준이 문을 열기만을 기다렸다.“벌써 일어났어? 좀 더 잘 줄 알았는데.”하지만 그래도 어제 일을 모른 척 할 수 없었던 조서희는 토라진 얼굴로 물었다.“소명시에 가야 한다며?”“갑자기 취소돼서 너 보러 온 거야.”여도준 휠체어 옆으로 가 앉으며 허리를 숙여 조서희를 보며 물었다.“아침은 뭐 먹을래?”하지만 조서희는 여전히 굳은 표정으로 대꾸했다.“나랑 한 약속 지켰어?”“무슨 약속?”김숙희가 눈짓을 보내고 있었지만 이 말을 하지 않으면 마음이 계속 불편할 것 같아 조서희는 참지 못하고 말해버렸다.“허이서 상관 안 하겠다는 약속.”“또 누구한테서 들은 건데.”“어제 라운지에 간 내 친구가 백마 탄 왕자가 공주님을 구하는 모습을 봤대.”여도준은 셔츠 단추를 살짝 풀어헤치고는 휠체어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어제 내가 안 구했으면 허이서는 거기서 죽을 수도 있었다.”“그래서 뭐 인류애 같은 마음에서 도와준 거야?”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사람은 처음이라 여도준도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오정식은 한 집안을 풍비박산 낸 사람이야, 난 허이서가 하는 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해.”조서희는 손톱을 괴롭히며 계속해서 물었다.“어제 둘이 같이 잔 거야?”“허이서가 약을 잘못 먹어서 의사 불러서 치료해 준 게 다야.”그 말에 분노가 더욱더 치밀어오른 조서희는 마지막 이성이 끊기는 소리와 함께 하고 싶었던 말을 속사포로 뱉어냈다.“무슨 약을 먹었는데? 그래서 둘이 같이 침대에서 뒹굴었니?”조서희의 행동에 여도준이 미간을 찌푸리며 몸을 일으키자 지켜보던 김숙희가 다급히 조서희의
요 며칠 눈에 띄게 기분이 좋아 보이는 허이서에 황정아 참지 못하고 그녀를 놀려댔다.“남자 맛을 봐서 그런가 얼굴도 좋아졌어.”“그런 거 아니거든, 오정식이 잡혀서 기분 좋은 것뿐이야.”허이서는 통장에 들어온 월급을 보며 말했다.이제는 동생도 많이 나아졌으니 병원비로 나가는 돈도 적어서 이 월급으로 가족들을 먹여 살리는 데에는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정아야, 오늘은 내가 살게.”“좋아, 그럼 나도 고맙다는 의미로 선물 하나 줄게.”황정아는 책상 밑에 두었던 신발 박스를 꺼내며 말했다.“인터넷에서 산 건데 너랑 나 커플 신발이야.”신발 박스를 받아든 허이서는 바로 열어봤는데 안에는 굽이 8, 9센티미터쯤은 돼 보이는 하이힐이 들어있었다.“너도 이런 거야?”“응, 난 집에서 신어. 섹시하지 않아?”황정아는 동생을 돌본다고 자기한테는 원체 돈을 쓰지 않는 허이서를 위해 일부러 그녀의 사이즈로 신발을 구매한 것이었다.“고마워, 정아야.”“앞으로 인터뷰할 때는 좀 예쁘게 하고 다녀.”“응.”영원한 흑막은 존재하지 않듯 이제 힘든 날은 다 지나고 웃을 일만 남았다 여긴 허이서는 저를 진심으로 위해주는 친구에게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여도준이 준 동생의 약은 다음 달까지 먹을 양이었는데 그 약만 빨리 시중에 나온다면 이제 걱정이 없을 것 같았다.요즘 들어 빠르게 떨어지는 남회시의 기온에 코트까지 꺼내입은 허이서는 새로운 작가의 인터뷰를 마친 뒤 황정아와 밥을 먹고 기사를 마무리하러 회사로 돌아왔다.밥을 먹고 식당 밖으로 나가려던 허이서는 발을 내디디기도 전에 휠체어 대신 지팡이를 짚고 들어오는 송은호와 부딪힐뻔했다.그에 허이서는 다급히 고개를 숙이며 옆으로 지나가려 했는데 송은호가 그녀의 팔을 잡으며 말을 걸어왔다.“오랜만이야.”“응.”허이서는 송은호의 다리를 보며 물었다.“많이 나았나 봐.”송은호는 허이서의 팔목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밥이라도 같이 먹어.”“난 이미 먹었어.”“헤어졌어도 친구일 수는 있는 거
“그깟 약 몇 통 때문에 그놈 손에 놀아난 거야?”송은호는 화를 내며 지팡이를 짚고 허이서 앞까지 걸어갔지만 허이서는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나 좀 그만 괴롭혀, 넌 집안도 좋고 배경도 좋으니까 나보다 더 좋은 사람 만날 수 있을 거야.”허이서는 말을 마치고 나가려 했지만 송은호는 그녀를 이렇게 보내줄 생각이 없었기에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물었다.“그럼 이거 하나만 말해줘, 나랑 여도준 중에 누구랑 하는 게 더 좋아? 누가 널 더 흥분시켰어?”송은호와 허이서는 자본 적도 없는데 일부러 모욕적인 말을 하는 그에 허이서 화내려던 찰나 송은호가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며 말했다.“나도 너랑 해보고 싶어 지금.”송은호를 힘껏 밀어낸 허이서가 원래 하려던 말도 삼켜내자 송은호가 다시 입을 열었다.“여도준 탐내 봐야 좋을 거 없다고 내가 얘기했잖아, 여도준한테는 조서희가 있어. 근데 네가 눈에 들어오겠어?”한편 옆방에서는 여도준이 연어를 다시 집어 조서희의 앞접시에 올려놨지만 조서희는 눈에 눈물을 가득 매단 채 손을 떨고 있었다.여도준은 그녀를 데리고 나가려 했지만 여기까지 들었는데 그냥 갈 수 없었던 조서희는 여도준의 팔을 눌렀다.송은호가 이만 자신을 놔주길 바랐던 허이서는 자신의 밑바닥까지 보여주면 그도 정을 뗄 것 같아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송은호, 나랑 도련님이 같이 잔 건 맞아, 그리고 1년 전에도 난 내 발로 도련님을 찾아갔었어. 그러니까 더 이상 나 좋아하지 마.”사귈 때는 자기는커녕 몸에 손도 못 대게 했던 허이서였는데 그런 그녀가 1년 전에 여도준과 잤다는 말에 송은호는 어이가 없었다.“허이서!”어차피 들춰낸 상처 그냥 한 번에 터뜨리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 허이서는 자신의 마음이 피투성이가 되는 건 상관없다는 듯 말했다.“도련님 잘하셔, 그분이랑 자는 거 나는 손해 볼 것도 없는 일이었어.”송은호는 허이서를 벽 쪽으로 힘껏 밀쳤는데 그 벽이 하필 두 방 사이를 가른 병풍 같은 거라서 부딪치면서 틈이 생겨버렸다
허이서는 고민도 변명도 하지 않고 바로 신발을 벗어 손에 들었다.그녀와 조서희가 신은 신발은 겉모습은 같았지만 황정아는 그것이 명품을 본뜬 건지도 모르고 그냥 예뻐 보여서 산 것 뿐이었다.그에 조서희는 많이 억울한 듯한 말투로 물었다.“이서 씨는 그거 어디서 샀어요?”“친구가 준 건데 제 건 아가씨 거랑 달라요, 정품은 아니에요.”“보기보다 허영심이 있네요. 그래도 가짜가 싸긴 하죠. 허이서 씨가 받은 1억으로는 그런 신발 몇 켤레 사는 것도 힘들 테니까요.”허이서는 신발을 등 뒤로 숨기며 남들 앞에서 발가벗겨지는 것 같은 수치심에 고개를 떨구었다.허이서의 심장이 얼마나 갈기갈기 찢기고 있는지 그들은 알려 하지도 않았고 관심조차도 없었다.그저 다들 차가운 눈으로 허이서의 자존심을 짓밟으며 그녀의 초라한 모습을 방관할 뿐이었다.송은호가 그렇게 몰아붙이지만 않았어도 하지 않았을 말들인데, 결국 그도 자신을 초라하게 만들려는 사람들 중 하나인 것 같았다.그때 조서희가 갑자기 심장을 부여잡자 여도준이 그녀를 가까이 끌어당기며 물었다.“왜 그래?”“가슴이 너무 답답해.”이 작은 방안에 사람들이 가득 차 있으니 얼굴이 창백해진 조서희가 늘 자신을 힘들게 하는 허이서를 한번 쳐다보고는 여도준의 옷깃을 잡으며 물었다.“허이서 씨 일부러 이런 거지? 이게 어떻게 우연이야. 그냥 나 들으라고 한 말이잖아.”“저는 그저 여기 선약이 있어서...”허이서 입을 열어 해명하려 했지만 지금은 그딴 말을 듣고 싶지 않았던 여도준이 그녀와 송은호를 보며 말했다.“나가.”송은호가 먼저 나갔고 그 뒤를 따라가던 허이서는 갑자기 발끝에서 전해지는 따끔한 느낌에 걸음을 멈추었지만 그곳에 더 있을 수는 없어 까치발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그리고 여도준은 까치발을 든 허이서의 발밑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그것들이 바닥에 빨간 자국을 남기는 것까지 다 지켜보았다.우여곡절 끝에 방에서 나온 허이서는 문을 닫아주고 제 발에 박혀있던 유리 조각을 빼내고는 아픈 발을 다시 하이힐
하지만 점점 희미해져 가는 발걸음 소리에 김숙희도 그를 부르길 포기했다.그날 밤, 집으로 돌아온 허이서는 씻고 나서 배윤주와 집 앞 마트에 가보기로 했는데 아직도 따끔거리는 발에 간단히 처치를 하고 밴드를 붙여두었다.그때 갑자기 울리는 초인종에 배윤주는 방에서 뛰어나가며 소리쳤다.“누구세요?”문을 열어본 허이서는 아직 불이 켜지지 않은 복도에 커다란 검은 인영 하나가 서 있는 걸 보고 갑자기 숨이 막혀와 바로 문을 닫으려 했지만 여도준은 알아서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왔다.“도련님이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대답하지 않아도 낮에 일에 대해 따지러 온 걸 알기에 문을 세게 밀치는 여도준을 본 허이서는 바로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했다.“낮에 일은 죄송합니다.”여도준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화난 듯 불안정한 그의 호흡이 너무 잘 느껴져서 허이서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의 손에 이끌려 방으로 들어갔다.몇 년 동안 한 잠옷만 입고 있던 탓에 목이 다 늘어나 버린 잠옷은 허이서의 어깨를 한쪽밖에 가리지 못했고 여도준은 드러난 어깨를 잡고 그녀를 침대에 눕혔다.“나랑 잤다는 얘기를 다른 사람들한테 잘만 하고 다니네. 그럼 네가 뭐라도 된 것 같아서 기분이 좋은 거야?”힘겹게 몸을 지탱하며 이런 모욕적인 말을 듣고 있던 허이서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대꾸했다.“저는 그냥 송은호랑 깨끗하게 정리하려고 한 얘기였어요.”“깨끗?”여도준은 허이서를 발가벗겨버릴 듯 노려보며 말했다.“잠까지 잔 사이가 깨끗하다고 할 수 있나?”잠을 잤으니까 송은호가 그런 질문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 여도준은 허이서를 다그쳤다.“조서희 씨가 거지 있는지는 저도 정말 몰랐어요.”여도준은 자매가 같이 자는 건지 이불이 두 개나 깔려있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침대를 보며 말했다.“허이서, 내 앞에서 가식 떨지 마.”“너 전에도 송은호한테 비슷한 말 했었잖아. 아픈 걸 다 잊은 거야 아니면 원래 그렇게 말귀를 못 알아듣는 거야?”지금은 허이서 하는 말마다 모두 계산된 걸로 들리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