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깟 약 몇 통 때문에 그놈 손에 놀아난 거야?”송은호는 화를 내며 지팡이를 짚고 허이서 앞까지 걸어갔지만 허이서는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나 좀 그만 괴롭혀, 넌 집안도 좋고 배경도 좋으니까 나보다 더 좋은 사람 만날 수 있을 거야.”허이서는 말을 마치고 나가려 했지만 송은호는 그녀를 이렇게 보내줄 생각이 없었기에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물었다.“그럼 이거 하나만 말해줘, 나랑 여도준 중에 누구랑 하는 게 더 좋아? 누가 널 더 흥분시켰어?”송은호와 허이서는 자본 적도 없는데 일부러 모욕적인 말을 하는 그에 허이서 화내려던 찰나 송은호가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며 말했다.“나도 너랑 해보고 싶어 지금.”송은호를 힘껏 밀어낸 허이서가 원래 하려던 말도 삼켜내자 송은호가 다시 입을 열었다.“여도준 탐내 봐야 좋을 거 없다고 내가 얘기했잖아, 여도준한테는 조서희가 있어. 근데 네가 눈에 들어오겠어?”한편 옆방에서는 여도준이 연어를 다시 집어 조서희의 앞접시에 올려놨지만 조서희는 눈에 눈물을 가득 매단 채 손을 떨고 있었다.여도준은 그녀를 데리고 나가려 했지만 여기까지 들었는데 그냥 갈 수 없었던 조서희는 여도준의 팔을 눌렀다.송은호가 이만 자신을 놔주길 바랐던 허이서는 자신의 밑바닥까지 보여주면 그도 정을 뗄 것 같아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송은호, 나랑 도련님이 같이 잔 건 맞아, 그리고 1년 전에도 난 내 발로 도련님을 찾아갔었어. 그러니까 더 이상 나 좋아하지 마.”사귈 때는 자기는커녕 몸에 손도 못 대게 했던 허이서였는데 그런 그녀가 1년 전에 여도준과 잤다는 말에 송은호는 어이가 없었다.“허이서!”어차피 들춰낸 상처 그냥 한 번에 터뜨리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 허이서는 자신의 마음이 피투성이가 되는 건 상관없다는 듯 말했다.“도련님 잘하셔, 그분이랑 자는 거 나는 손해 볼 것도 없는 일이었어.”송은호는 허이서를 벽 쪽으로 힘껏 밀쳤는데 그 벽이 하필 두 방 사이를 가른 병풍 같은 거라서 부딪치면서 틈이 생겨버렸다
허이서는 고민도 변명도 하지 않고 바로 신발을 벗어 손에 들었다.그녀와 조서희가 신은 신발은 겉모습은 같았지만 황정아는 그것이 명품을 본뜬 건지도 모르고 그냥 예뻐 보여서 산 것 뿐이었다.그에 조서희는 많이 억울한 듯한 말투로 물었다.“이서 씨는 그거 어디서 샀어요?”“친구가 준 건데 제 건 아가씨 거랑 달라요, 정품은 아니에요.”“보기보다 허영심이 있네요. 그래도 가짜가 싸긴 하죠. 허이서 씨가 받은 1억으로는 그런 신발 몇 켤레 사는 것도 힘들 테니까요.”허이서는 신발을 등 뒤로 숨기며 남들 앞에서 발가벗겨지는 것 같은 수치심에 고개를 떨구었다.허이서의 심장이 얼마나 갈기갈기 찢기고 있는지 그들은 알려 하지도 않았고 관심조차도 없었다.그저 다들 차가운 눈으로 허이서의 자존심을 짓밟으며 그녀의 초라한 모습을 방관할 뿐이었다.송은호가 그렇게 몰아붙이지만 않았어도 하지 않았을 말들인데, 결국 그도 자신을 초라하게 만들려는 사람들 중 하나인 것 같았다.그때 조서희가 갑자기 심장을 부여잡자 여도준이 그녀를 가까이 끌어당기며 물었다.“왜 그래?”“가슴이 너무 답답해.”이 작은 방안에 사람들이 가득 차 있으니 얼굴이 창백해진 조서희가 늘 자신을 힘들게 하는 허이서를 한번 쳐다보고는 여도준의 옷깃을 잡으며 물었다.“허이서 씨 일부러 이런 거지? 이게 어떻게 우연이야. 그냥 나 들으라고 한 말이잖아.”“저는 그저 여기 선약이 있어서...”허이서 입을 열어 해명하려 했지만 지금은 그딴 말을 듣고 싶지 않았던 여도준이 그녀와 송은호를 보며 말했다.“나가.”송은호가 먼저 나갔고 그 뒤를 따라가던 허이서는 갑자기 발끝에서 전해지는 따끔한 느낌에 걸음을 멈추었지만 그곳에 더 있을 수는 없어 까치발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그리고 여도준은 까치발을 든 허이서의 발밑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그것들이 바닥에 빨간 자국을 남기는 것까지 다 지켜보았다.우여곡절 끝에 방에서 나온 허이서는 문을 닫아주고 제 발에 박혀있던 유리 조각을 빼내고는 아픈 발을 다시 하이힐
하지만 점점 희미해져 가는 발걸음 소리에 김숙희도 그를 부르길 포기했다.그날 밤, 집으로 돌아온 허이서는 씻고 나서 배윤주와 집 앞 마트에 가보기로 했는데 아직도 따끔거리는 발에 간단히 처치를 하고 밴드를 붙여두었다.그때 갑자기 울리는 초인종에 배윤주는 방에서 뛰어나가며 소리쳤다.“누구세요?”문을 열어본 허이서는 아직 불이 켜지지 않은 복도에 커다란 검은 인영 하나가 서 있는 걸 보고 갑자기 숨이 막혀와 바로 문을 닫으려 했지만 여도준은 알아서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왔다.“도련님이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대답하지 않아도 낮에 일에 대해 따지러 온 걸 알기에 문을 세게 밀치는 여도준을 본 허이서는 바로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했다.“낮에 일은 죄송합니다.”여도준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화난 듯 불안정한 그의 호흡이 너무 잘 느껴져서 허이서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의 손에 이끌려 방으로 들어갔다.몇 년 동안 한 잠옷만 입고 있던 탓에 목이 다 늘어나 버린 잠옷은 허이서의 어깨를 한쪽밖에 가리지 못했고 여도준은 드러난 어깨를 잡고 그녀를 침대에 눕혔다.“나랑 잤다는 얘기를 다른 사람들한테 잘만 하고 다니네. 그럼 네가 뭐라도 된 것 같아서 기분이 좋은 거야?”힘겹게 몸을 지탱하며 이런 모욕적인 말을 듣고 있던 허이서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대꾸했다.“저는 그냥 송은호랑 깨끗하게 정리하려고 한 얘기였어요.”“깨끗?”여도준은 허이서를 발가벗겨버릴 듯 노려보며 말했다.“잠까지 잔 사이가 깨끗하다고 할 수 있나?”잠을 잤으니까 송은호가 그런 질문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 여도준은 허이서를 다그쳤다.“조서희 씨가 거지 있는지는 저도 정말 몰랐어요.”여도준은 자매가 같이 자는 건지 이불이 두 개나 깔려있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침대를 보며 말했다.“허이서, 내 앞에서 가식 떨지 마.”“너 전에도 송은호한테 비슷한 말 했었잖아. 아픈 걸 다 잊은 거야 아니면 원래 그렇게 말귀를 못 알아듣는 거야?”지금은 허이서 하는 말마다 모두 계산된 걸로 들리기에
그 말에 살까지 떨려왔지만 허이서는 종이를 받아들고 시선은 앞으로 향한 채 손만 그곳을 향해 뻗었다.“어딜 닦는 거야?”그런 허이서의 행동에 만족을 못 한 여도준이 차갑게 말하자 허이서는 입술을 꾹 다물다가 종이로는 잘 닦이지 않을 것 같아 결국 입을 열었다.“어차피 가서 씻어야 하잖아요.”“그럼 여기서 씻지 뭐.”그 말에 머리가 아파온 허이서가 말했다.“우리 집 화장실 안 좋아요, 뜨거운 물도 잘 안 나오고요.”그에 여도준은 허이서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손으로 닦는 게 싫으면 다른 데로 닦아도 되는데.”어쩔 수 없이 잔여물들을 말끔히 닦아낸 허이서는 여도준이 가기만을 기다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무언가 마찰하는 소리가 들려왔는데 아마도 여도준이 벨트를 매는 중인 것 같았다.그에 고개를 들어본 허이서는 순간적으로 눈빛에 혐오를 드러냈다.그 모습에 여도준은 저도 가만있는데 먼저 더럽다는 듯 저를 바라보는 허이서에 어이가 없어졌다.“도련님, 밑에서 기다리는 사람 없어요?”앞으로 걸어가는 여도준에 허이서는 그가 가는 줄로만 알았는데 여도준이 다시 몸을 돌려버렸다.“여기가 네 방이야?”“네, 그런데 방이 두 개라서 동생이랑 같이 써요.”어릴 때부터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여도준은 이 나이 먹도록 온전한 방 하나도 없고 침대마저 나누어 쓰는 허이서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했다.그는 허이서가 직접 접어 붙인 것 같은 종이학들을 보며 말했다.“저런 거 접으면서 소원 비는 거 쓸모가 있긴 한 거야?”다리도 불편한데 아직도 안가는 여도준이 귀찮아진 허이서는 대충 그의 말에 대꾸해주었다.“소용없어요, 그래서 지금은 안 접어요. 이것도 다 도련님 덕분이네요.”지금의 여도준은 아까처럼 분노에 차 있어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평온한 것도 아니었다.“넌 어느 쪽에서 자?”“밖에서요.”침대를 보며 대답하던 허이서는 곧바로 여도준에 의해 침대에 눌러앉게 됐고 그에게 밀려 침대 안쪽까지 밀려났다.같이 침대에 누워버린 여도준은 허이서를 제 쪽으로
여도준은 뜨거운 손으로 허이서의 허리를 만지며 말했다.“결혼한다 해도 서희는 이런 거 감당 못 해. 그러니까 넌 그때도 내가 부르면 바로 와야 하는 거야.”어이없는 여도준의 말에 머리가 띵해진 허이서는 저도 모르게 그를 차며 주먹까지 쥐고 물었다.“방금 뭐라고 했어요?”“내가 부르면 바로 와야 한다고. 못 알아들은 거야?”허이서는 여도준을 노려보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다른 사람 찾아요.”“아직까지 네 몸을 대신할 사람은 못 찾았어.”허이서는 여도준한테 약을 받아 쓰는 제 처지도 잊어버리고 주먹을 꽉 그러쥔 채 여도준의 가슴팍을 세게 밀쳐냈다.침대 위에서 싸우느라 둘의 몸이 부딪치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려왔다.“난 그럴 생각 없으니까 꿈 깨요.”단칼에 거절하던 허이서는 갑자기 밖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숨을 죽였는데 그때 허승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언니, 우리 왔어.”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허승아의 목소리와 금방이라도 당겨질 것만 같은 문고리에 허이서가 냅다 소리 질렀다.“들어오지마 승아야!”허이서는 긴장을 애써 감추며 말했다.“나 오늘 온라인미팅이 있어서 그러는데 오늘만 엄마라 잘 수 있을까?”늘 언니 말이라면 잘 듣는 허승아는 오늘도 일하느라 고생하는 언니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알겠어.”하지만 아직도 거실에서 돌아다니는 엄마와 허승아에 허이서는 심장이 벌렁거렸다.조서희가 약을 먹는 모습을 보고 이성이 끊겨버린 여도준은 조서희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건 허이서의 탓이라고 생각했기에 그녀가 가장 두려워하는 걸 건드리고 있었다.“무서워?”낡은 집이라 이런 속삭임도 들릴 정도로 방음이 안 좋았기에 허이서는 서둘러 여도준의 입을 틀어막았다.그러자 여도준은 그 손을 떼어내며 말했다.“무서운 걸 알았으면 됐어. 그럼 앞으로 서희를 자극하는 일은 없겠지.”여도준은 허이서를 밀어내고 침대에서 내려간 뒤 문을 열고 나가려 했다.그에 허이서 다급히 말리려고 했지만 여도준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성큼성큼 걸어 나갔고 여도준을
서늘한 밤공기에 허이서는 다리까지 떨고 있는데 여전히 꿈쩍 않는 여도준에 허이서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가시죠 도련님.”“네가 앞장서.”할 수 없이 먼저 계단을 내려가던 허이서는 섬뜩한 느낌이 들어 여도준을 향해 물었다.“설마 뒤에서 저 밀치려는 건 아니죠? 여기서 밀면 진짜 죽을 수도 있어요.”여도준은 그 말에 대답도 하지 않고 내려가고 있었고 앞장서서 가던 허이서는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계단 코너에 쥐가 한 마리 있었는데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 건지 그 쥐는 허이서와 여도준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그에 허이서도 굳어버리자 여도준이 재촉하듯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도련님이 저거 좀 어떻게 해봐요.”그에 여도준은 헛웃음을 흘리며 말했다.“너희 집에서 나온 건데 왜 나더러 해결하래.”“우리 집엔 이런 쥐 없거든요.”허이서는 말을 하며 손을 흔들어봤지만 그 쥐는 여전히 도망갈 생각을 안 하고 찍찍거리고만 있었다.항상 깨끗하고 정리가 잘 되어있는 곳에서만 살던 여도준은 이런 더러운 것들은 볼일이 없었기에 이마에 땀까지 맺혀있었다.그는 허이서의 어깨를 꽉 잡으며 소리쳤다.“저거 빨리 쫓아내!”“알겠다고요.”허이서는 내려가서 쥐를 쫓아내려 했지만 그녀가 내려가면 그에 놀란 쥐가 혹시라도 위로 올라올까 봐 여도준은 손에 힘을 풀지 않고 있었다.“정 안되면 태윤 씨 부르세요.”이런 상황에서 구경꾼을 또 끌어드리려는 허이서의 말에 여도준은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너랑 쟤랑 같은 부류 아니야? 원래 네가 처리해야 할 일이야.”“말씀 좀 가려서 하시죠? 전 사람이에요.”여도준의 말에 화가 난 허이서는 신발을 벗어 던졌는데 그래도 눈은 정확한지 바로 쥐의 몸을 맞혀버렸다.그에 쥐는 아래층으로 도망쳐버렸고 허이서는 한 발로 뛰어가서 신발을 주우려고 하는데 그때 여도준이 그녀의 팔을 잡으며 물었다.“안 더러워?”“집에 가서 씻으면 돼요.”“나 마저 데려다줘.”하지만 자꾸만 저를 잡아끄는 여도준에 허이서는 결국
바람에 날려갈 듯 야윈 몸이었다.그때 언니가 걱정되어 외투를 들고 뒤를 따라가던 허승아가 들고 온 슬리퍼를 허이서 앞에 놓아주며 말했다.“언니, 얼른 신어.”“승아야, 너 왜 내려왔어?”허승아는 외투로 허이서의 몸을 감싸주며 말했다.“추워, 얼른 올라가자.”날이 갈수록 생기가 도는 허승아를 보며 허이서는 자신이 한 일들에 보람을 느꼈다.허이서는 아무리 힘들어도 가족을 보면 다시 자신을 다독이며 힘을 내는 그런 사람이었다.“언니랑 저분 무슨 사이야? 아까 저분이 왜 언니 방에서 나온 거야?”예민한 허승아를 잠재우기 위해서 허이서는 슬리퍼를 신으며 대충 둘러댔다.“그냥 나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인데 내가 안 받아줘서 그러는 거야.”“왜 안 받아줘? 키도 크고 잘 생겼던데.”입을 크게 벌리며 물어오는 허승아에 허이서는 싸가지가 없어서라고 답하고 싶었지만 애써 웃으며 답했다.“돈이 너무 많잖아, 나랑은 안 어울려.”방으로 돌아온 허이서는 메모장에 “피임약 사기”라는 문구를 적어넣었지만 이렇게 큰일을 까먹진 않을 것 같아 다시 그 문구를 지워버렸다.한편 밤을 지새우고 나니 화가 많이 가라앉은 조서희는 여도준이 문을 열고 들어올 때 차분하게 침대 위에 앉아있었다.“밥 먹자.”침대 쪽으로 다가온 여도준이 조서희를 안아 들려 하자 조서희가 그의 목을 감싸 안으며 말했다.“도준 씨, 나랑 약속 하나만 해줄 수 있어?”“응, 말해.”“그렇게 확신하진 말고, 못 지킬 수도 있잖아.”어젯밤 내내 운 건지 빨개진 눈을 하고 말하는 조서희에 여도준은 가슴이 저릿해 왔다.“지킬 수 있으니까 말해봐.”“허이서한테 약 주지 마 이제.”자신만만하게 약속하던 것과 달리 여도준은 조서희의 말에 선뜻 답을 하지 못했다.“허이서 동생이 많이 아파. 보심단을 안 먹으면 죽을 수도 있어.”“도준 씨가 약을 줄 때마다 나는 둘이 잤다는 사실을 떠올릴 수밖에 없어. 허이서도 약 때문에 도준 씨랑 잔 거잖아.”조서희는 금세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아까는 약
거래를 먼저 제안한 것도 여도준이었고 이 관계에서 절대적인 갑인 그가 거래를 끝내겠다면 허이서도 할 말은 없었다.하지만 약은 허승아의 생명과도 같았기에 허이서는 포기할 수도 없었다.“안돼요 도련님!”그러자 여도준이 코웃음을 치며 물어왔다.“왜 안돼?”“약 없으면 제 동생 죽어요, 걔가 죽으면 저는...”여도준이 그런 허이서의 말을 끊으며 되물었다.“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지?”사실 여도준과 허이서는 잠을 몇 번 자본 게 전부였고 조서희가 깨어난 이상 자신이 이렇게 버려질 거라는 건 늘 예상해왔던 일이었다.하지만 그래도 약은 다른 문제였기에 허이서는 여도준이 전화를 끊기라도 할까 봐 다급하게 말했다.“설마 전에 제가 서희 씨 자극한 일 때문에 그러시는 거예요? 그거라면 제가 당장 가서 사과할게요. 서희 씨 화를 풀어줄 수만 있다면 뭐든 다 할게요.”여도준은 떨리는 목소리로 내뱉는 제대로 끝맺지도 못한 허이서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도련님, 제발요... 약은 안돼요...”대답을 듣지 못한 허이서는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점점 더 무거워지는 한숨 소리에 같은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제발 도와주세요 도련님...”누구한테나 똑같이 냉정했던 여도준이기에 허이서의 저런 애원은 그의 마음을 돌리지 못하는 게 정상이었다.하지만 여도준은 어쩐지 그녀가 불쌍하게 느껴졌다.“그만해,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는 법이야.”하지만 보심단의 효과를 제대로 본 허이서는 이렇게 유일한 기회가 눈앞에서 떠나가는 걸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기에 이를 악물며 말했다.“서희 씨 몸 안 좋다고 나중에도 부르면 바로 오라고 하셨잖아요.”허이서는 체면이나 자존심 따위를 제 발로 짓밟는 마음으로 이 말을 내뱉었다.정말 온몸의 가죽이 뜯겨나갈 듯 아파왔지만 이 말을 할 수밖에 없는 저 자신이 너무나도 초라해 보였다.여도준은 담배를 태우며 가소로운 듯 웃고는 말했다.“싫다며?”“약만 주시면...”“난 이제 너한테 관심 없어.”허이서가 가쁜 숨을 몰아쉬자 여도준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