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사랑 일기

80년대 사랑 일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4-12-23
By:   오렌지보리  Updated just now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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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육민우를 공부만 하다 바보가 됐다고 수군거렸다. 은혜를 갚겠다고, 좋아하는 소꿉친구를 버리고 마음에도 없는 여자와 결혼했으니 말이다. 거기다 그 여자는 결혼 전에 아이까지 가졌으니, 참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도내 수석이었고 연구소 일급 연구원인 그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됐는지. 다들 이번에 육민우가 돌아온 건 이혼하러 온 게 틀림없다고 했다. 심서아는 준수한 얼굴에 학문과 연구에만 몰두하는 남자를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 “지현이를 인정하고 호적에 올려주면 이혼해 줄게요." 육민우: “ 이혼은 절대 안 돼. 당신이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을 만나지 않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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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연구개발부서 육민우 씨 좀 바꿔주시겠어요? 가족인데, 급한 일이 있어서요.”심서아는 정중하면서도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육 연구원님은 지금 바쁘셔서 통화가 어렵습니다.”일 분쯤 지나 대답과 함께 뚝 하고 전화가 끊겼다.심서아는 멍하니 있다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4년 전 그녀는 육민우와 짧은 만남을 가졌다. 그 후 그는 연구소로 갔고, 두 달 뒤 그녀는 아들을 임신했다. 하지만 육민우와 연락이 닿지 않아 그녀는 시댁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쫓겨났고, 결국 아버지가 남겨주신 낡은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4년 동안 뒤따르는 쑥덕거림은 끊이지 않았다.혼자 아이를 낳고 기르며 힘든 시간을 견뎌왔기에 그녀는 남들의 시선은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심지현의 입학만큼은 미룰 수 없었다. 호적 없는 아이는 학교에 갈 수 없기 때문이었다.다시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을 것 같아 심서아는 체념한 듯 돈을 내고 집으로 향했다.두어 걸음 떼자마자 뒤에서 교환원 두 명의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매번 와도 남자가 전화 안 받는다며? 애가 남편 애가 아니라잖아. 쯧쯧, 낯짝도 두껍지.”“그러게 말이야. 교수 딸이라던데, 옷차림은 왜 저렇게 야해? 집에 남자들이 들락날락한다더니, 본인도 누구 앤지 모르는 거 아니야?”심서아는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돌아섰다. 날카로운 눈빛으로 두 여자를 쏘아보자, 교환원들은 흠칫 놀라 입을 다물고 움츠러들었다. 심서아는 매서운 눈초리로 그녀들을 노려본 후 우체국을 나섰다.낡고 허름한 동네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니 아들 심지현은 낮잠에서 깨어 포도나무 아래 얌전히 앉아 있었다. 엄마의 말을 잘 듣는 심지현은 엄마가 없어도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무더운 날씨에 그의 하얀 얼굴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나가기 전에 시원하게 내놓았던 식혜도 다 식어있었다.그녀는 한잔을 따라 마시면서 부드럽게 물었다.“지현아, 식혜 좀 마실래? 시원한데.”심지현은 부모의 장점만 물려받아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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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연구개발부서 육민우 씨 좀 바꿔주시겠어요? 가족인데, 급한 일이 있어서요.”심서아는 정중하면서도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육 연구원님은 지금 바쁘셔서 통화가 어렵습니다.”일 분쯤 지나 대답과 함께 뚝 하고 전화가 끊겼다.심서아는 멍하니 있다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4년 전 그녀는 육민우와 짧은 만남을 가졌다. 그 후 그는 연구소로 갔고, 두 달 뒤 그녀는 아들을 임신했다. 하지만 육민우와 연락이 닿지 않아 그녀는 시댁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쫓겨났고, 결국 아버지가 남겨주신 낡은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4년 동안 뒤따르는 쑥덕거림은 끊이지 않았다.혼자 아이를 낳고 기르며 힘든 시간을 견뎌왔기에 그녀는 남들의 시선은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심지현의 입학만큼은 미룰 수 없었다. 호적 없는 아이는 학교에 갈 수 없기 때문이었다.다시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을 것 같아 심서아는 체념한 듯 돈을 내고 집으로 향했다.두어 걸음 떼자마자 뒤에서 교환원 두 명의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매번 와도 남자가 전화 안 받는다며? 애가 남편 애가 아니라잖아. 쯧쯧, 낯짝도 두껍지.”“그러게 말이야. 교수 딸이라던데, 옷차림은 왜 저렇게 야해? 집에 남자들이 들락날락한다더니, 본인도 누구 앤지 모르는 거 아니야?”심서아는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돌아섰다. 날카로운 눈빛으로 두 여자를 쏘아보자, 교환원들은 흠칫 놀라 입을 다물고 움츠러들었다. 심서아는 매서운 눈초리로 그녀들을 노려본 후 우체국을 나섰다.낡고 허름한 동네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니 아들 심지현은 낮잠에서 깨어 포도나무 아래 얌전히 앉아 있었다. 엄마의 말을 잘 듣는 심지현은 엄마가 없어도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무더운 날씨에 그의 하얀 얼굴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나가기 전에 시원하게 내놓았던 식혜도 다 식어있었다.그녀는 한잔을 따라 마시면서 부드럽게 물었다.“지현아, 식혜 좀 마실래? 시원한데.”심지현은 부모의 장점만 물려받아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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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끼익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육민우를 본 남자는 반갑게 소리쳤다.“아빠, 엄마, 둘째 형이 돌아왔어요!”“민우 왔구나! 너무 늦어서 내일 오는 줄 알았잖아.”육민우의 부모님은 옷을 걸치고 방에서 나왔다.어리둥절해 하는 육민우를 보며 어머니는 달려 나와 그의 손을 끌어당겼다.“왜 그렇게 멍하게 서 있어?”그리고는 느릿느릿 나오는 셋째 딸에게 말했다.“오빠가 왔으니 얼른 미숫가루 좀 타다 줘.”잠이 덜 깬 셋째는 하품을 하며 주방으로 들어갔다.육민우는 가방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의자에 앉아 물었다.“언제 오셨어요? 서아는요?”그가 떠나기 전에는 부모님은 시골에 계셨고 이곳에는 심서아가 살고 있었다.아들이 돌아오자마자 그 여자 얘기를 꺼내는 게 마음에 안 들었던 전혜자는 퉁명스럽게 말했다.“아직도 그렇게 정답게 부르니? 그 애는 4년 전에 나가고 없어.”“4년 전이요? 그런데 왜 아무도 말 안 해줬어요?”육민우는 심서아가 자신에게 마음이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스승님과의 약속 때문에 그녀를 평생 돌봐야 했다.전혜자는 못마땅한 듯 말했다.“그 여자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기나 해? 그리고, 네 일이 얼마나 중요한데 누가 감히 진실을 말하겠어? 네 마음이 혼란스러워지면 어떡하라고?”육민우는 심서아의 모습을 떠올렸다. 교수님 밑에서 예의범절을 깍듯하게 배운 그녀는 도시 처녀였지만 조금도 버릇 없게 굴거나 제멋대로인 구석이 없었다.“서아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는 거예요?”전혜자는 아들이 공부만 하다가 바보가 됐다고 생각했다.“그 요망한 얼굴에 속아 넘어간 건 너뿐이야. 내가 너 걱정해서 그 년을 보러 오지 않았으면 두 달이나 된 애를 배고 있는 줄도 까맣게 몰랐을 거다. 분명 너희가 결혼식을 올린 지 보름도 안 됐을 때였고 결혼식 다음 날 넌 바로 기지로 갔는데 어떻게 두 달이나 됐겠어? 그런데도 네 아이라고 우기는 거 있지. 이건 우리가 시골 사람이라고 무시하는 거잖아.”둘째 아들이 어떤 애인지 그녀는 훤히 알고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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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심지현? 육민우는 잠시 멍해졌다.심서아는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말했다.“사과해야 할 쪽은 도영이 아닌가요? 걔가 먼저 지현이의 고래밥을 빼앗았거든요.”엄도영은 울면서 부인했다.“아니에요. 난 그냥 친구 하자고 과자 하나만 나눠달라고 했어요. 그런데 쟤는 주지도 않고 땅에 던져서 부숴버렸어요.”아이들은 원래 거짓말을 잘 못 한다. 엄도영은 울면서 집에 가 할머니에게 상황을 말했고 할머니도 자기 손자가 잘못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저녁에 아이 엄마는 이 말을 듣더니 펄쩍 뛰었다. 그녀 생각에 심서아 모자는 죄인처럼 숨죽이고 살면서 주변 사람들 비위나 맞춰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깟 과자 몇 개 때문에 감히 자기 아들에게 손을 대다니.그래서 그녀는 밤늦도록 아들에게 거짓말하는 법을 가르쳤다. 어차피 심씨 집안이 저지른 일 때문에 분개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자기 아들이 조금이라도 유리한 입장에 서면 그들 모자는 사람들의 비난을 견디지 못할 터였다.심지현은 그 말을 듣자마자 고개를 돌려 큰 소리로 반박했다.“거짓말쟁이!”“내가 뭘 거짓말했는데? 땅에 네가 부순 과자 아직도 있잖아?”엄도영은 말하면서 땅을 가리켰다.사람들이 그가 가리키는 쪽을 바라보니 과연 바닥에 과자 부스러기가 흩어져 있었다.그러자 사람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애도 참 버릇없어.”“저렇게 어린 게 어떻게 저리도 심술이 많아? 어떻게 남 주기 싫다고 부셔버리냐.”화가 난 심지현은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반박하려고 했다. 하지만 사람이 너무 많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를 안고 있던 남자는 심지현의 몸이 떨리는 것을 느끼고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심서아는 침착하게 제자리에 서서 담담하게 말했다.“고래밥은 우리 아들 거예요. 그가 버리든 나눠 주든 그건 아들의 권리죠. 왜 우리 애가 도영이에게 과자를 안 줬는지 묻는 사람은 없나요?”“왜 안 줬는데?”“도영이가 우리 아들 손에 있던 걸 빼앗았을 뿐만 아니라 잡종이라고 욕까지 했어요.”심서아는 그 말을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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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심서아는 잠시 멍해졌다. 곧 그가 말을 이었다.“교수님과 널 잘 돌보겠다고 약속했어.”심서아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예상했던 대답이었다. 그녀는 조금 전 잠시 스치듯 지나갔던 기대감에 허탈한 마음을 감추고 차분하게 말했다.“난 나와 지현이를 잘 돌볼 수 있어요. 우리 사이에는 아무런 감정도 없는데 억지로 그럴 필요 없잖아요.”육민우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는 무릎 위에 놓인 손을 문지르며 말했다.“억지가 아니야. 정말 나와 함께 살기 싫다면, 다른 좋은 사람 만나면 그때 다시 이야기해.”“좋아요.”심서아는 더 이상 실랑이하고 싶지 않았다. 다른 사람을 만나든 말든 그건 자기 마음이었으니 그녀는 흔쾌히 대답했다.“시간 날 때 증명서 좀 떼어다 주세요. 지현이 호적에 올리게요.”육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심지현을 한 번 더 쳐다본 뒤, 찻잔을 식탁에 내려놓고 심지현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가 뭔가 말하려는 순간, 심지현은 그를 노려보고는 심서아의 뒤로 숨었다.이 사람이 그의 아빠라니. 4년 동안 엄마랑 자기를 버려두고 아무 연락도 없던 나쁜 사람 말이다. 아까 잠깐 좋았던 마음이 순간 싹 사라졌다.육민우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일어서서 심지현에게 말했다.“아빠가 다음에 또 보러 올게.”심지현은 잠시 머뭇거리다 심서아를 쳐다보았지만 대답하지 않았다.육민우는 가볍게 한숨을 쉬고 심서아에게 말했다.“나 내일부터 출근하니까 오후에 시간 될 것 같아.”“네.”육민우는 주머니에서 작은 로봇 장난감을 꺼내 들고 심지현에게 다가갔다.“아빠가 너 줄 장난감을 가져왔는데, 한번 볼래?”심지현은 반짝이는 눈으로 심서아의 손을 꼭 잡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육민우는 개의치 않고 장난감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심지현에게 말했다.“아빠가 내일 또 보러 올게.”육민우가 돌아가자 심지현은 심서아의 손을 놓고 조심스럽게 말했다.“그냥 보고만 있을게요. 갖고 놀진 않을 거예요.”심서아는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놀고 싶으면 갖고 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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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심서아는 거울 속 자신을 보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점원은 눈빛을 반짝이며 성공을 직감하고 다가와 상냥하게 물었다.“그럼 지금 입고 있는 이 옷으로 하시겠어요?”심서아는 곧바로 결정을 내리지 않고 물었다.“이 세 벌 가격이 얼마죠?”“지금 입고 있는 건 만 오천 원으로 조금 더 비싸고요, 나머지 두 벌은 각각 만 사천 원, 만 삼천 원입니다.”점원은 열정적으로 설명했다.어느 것 하나 저렴하지 않은 가격이었다. 진하연은 심서아가 어떤 옷을 고를지 궁금해하며 한 걸음씩 다가갔다.그런데 심서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다 포장해 주세요.”점원은 그다지 놀라지 않은 듯 재빨리 천 주머니를 찾아 옷을 담았다.진하연은 순간 걸음을 멈췄다. 속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육민우는 옷이 색이 바랠 때까지 새 옷을 사 입지 않는데 이 여자는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이렇게 비싼 옷을 한꺼번에 사다니.육민우는 1급 공무원 월급으로 한 달에 9만 원을 받는데 매월 4천 원만 남기고 나머지는 어김없이 집으로 보냈다.심서아는 옷값을 치르고 점원이 건네준 옷을 받아들었다. 그러고는 얌전히 막대사탕을 먹고 있던 심지현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자, 이제 지현이 걸 살 차례야.”엄마 목소리를 들은 심지현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서 쪼르르 내려와 심서아의 손을 잡았다.두 사람이 막 떠나려는데 누군가 길을 막아섰다.심서아는 진하연을 흘끗 보고 고개를 살짝 끄덕인 후 심지현의 손을 잡고 지나치려 했다.육민우의 소꿉친구인 진하연을 심서아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육민우의 가족들과도 스스럼없이 잘 지내고 고등학교 때부터 육민우와 늘 함께였다고 들었다. 게다가 대학에 가서 육민우는 모두에게 두 사람의 관계를 공식적으로 발표까지 했었다.그런데 정작 자신과 혼인신고를 한 사실은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그랬기에 육 씨 사람들은 심지현이 두 달 일찍 생겼다는 이유로 모두의 앞에서 자신을 미혼모 취급했던 것이다. “심서아 씨, 민우는 기지에 있을 때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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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심서아는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봉래성에 가려면 통행증이 필요한데 네 아빠한테 부탁 좀 해보려고.”당시 봉래성은 통행증 정책을 시행하고 있었는데 통행증을 발급받으려면 동사무소 심사, 파출소 확인, 경찰서 발급 등 세 단계를 거쳐야 했다.그리고 송유정의 아버지는 마침 이곳 동사무소 동장이었다.이때 씻어온 포도를 탁자에 내려놓던 송유정의 어머니가 그들의 말을 듣고는 단호하게 반대했다.“민우가 이제 막 돌아왔잖아. 지금 그의 신분이면 연구소에서 얼마나 인기 있는지 알아? 고생 끝에 낙이 온 건데 봉래성에는 왜 가겠다는 거야? 도대체 무슨 생각 하는 거니?”하선희는 줄곧 심서아를 딸처럼 아꼈다. 특히 이런 일이 있고 나서는 더 마음이 쓰였다.심서아의 시무룩한 표정을 보자 그녀는 다시 말했다.“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 다 잘될 거야. 민우가 지현이를 인정했으니 곧 소문도 잠잠해질 거고. 지금 제일 중요한 건 민우의 마음을 잡는 거야.”심서아가 말했다.“아빠의 억울함을 풀어드려야 해요.”사실 육민우의 마음을 잡으라는 말에도 심서아는 자신이 없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소꿉친구가 있었으니까. 다만 송유정의 어머니 같은 어른들의 생각에는 육민우의 마음이 누구에게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그가 누구의 남편인지, 가족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인지였다.심서아의 말에 하선희는 마음이 무거워져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이미 지난 일이야. 우리는 너희 아버지와 오랫동안 알고 지냈는데 그분은 그럴 사람이 아니야. 아마 하늘에서도 너를 이해해 주실 거다.”심서아는 하선희를 설득하는 것은 어렵다고 판단하고 말을 멈췄다. 차라리 심지현의 호적을 받고 나서 송유정을 설득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하선희는 주방에서 끓이고 있는 국이 생각나 더 이상 얘기하지 않고 말했다.“이제 밥 다 됐다. 지현이가 좋아하는 생선조림도 했으니 밥 먹자.”하선희가 나가자 송유정이 심서아를 설득하기 시작했다.“서아야, 우리 엄마 말씀도 일리가 있어. 잘 생각해 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4-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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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육민우는 입술을 오므렸다.“이제 가려고. 말하려고 왔어.”“네, 조심히 가세요.”심서아는 공손하게 말했다.육민우는 심서아의 관심 어린 말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자신을 걱정하는 걸까? 그는 망설이다가 말했다.“내일 지현이 보러 다시 올게.”“네, 사탕은 너무 많이 사 오지 마세요. 이에 안 좋아요.”그러고는 한마디 덧붙였다.“과일을 사 오는 건 괜찮아요. 지현이는 바나나를 좋아해요.”육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내심 심지현이 자신을 빨리 받아들여 주길 바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심서아는 부모님에게 쫓겨난 분풀이를 자신에게 하거나 아이를 이용해 복수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그런 심서아가 너무 고마웠다.육민우는 나가는 길에 소파에 앉아 큐브에 열중하는 아들을 보았다. 발걸음을 멈췄지만, 결국 방해하지 않고 나갔다.육민우는 기분 좋게 집을 나섰다.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가는 길에 집 생각을 하니 갑자기 집에 가기 싫어졌다.그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소진성의 집으로 향했다.소진성은 육민우의 동료였다. 임성에 가기 전부터 두 사람은 죽이 잘 맞았고 이번에 돌아오자 소진성이 먼저 살갑게 대해 줬다.소진성의 집 앞에 도착한 육민우는 문을 두드렸다. 문이 열렸고 소진성은 그를 보고 매우 반가워하며 얼른 집 안으로 안내했다. 그리고는 미안한 듯이 말했다.“미안해. 집이 좀 엉망이지?”소진성은 의자를 잡아당겨 자리를 권했다.육민우는 집 안을 둘러보았다. 길게 늘어뜨린 빨랫줄에는 아이 기저귀가 가득 걸려 있었다.소진성의 집은 육민우의 집보다 작은 15평 남짓이었다. 그래서 원래도 좁은 거실이 기저귀 때문에 더 비좁아 보였다.“괜찮아. 제수씨 출산했어?”소진성은 손으로 잔다는 시늉을 했다.“아이랑 금방 잠들었어.”그리고는 기쁜 얼굴로 말했다.“2주만 일찍 왔어도 우리 애 백일잔치에 왔을 텐데.”소진성은 육민우에게 물을 한 잔 따라 주었다. 육민우는 미안한 듯이 말했다.“축의금은 다음에 줄게.”소진성은 웃으며 말했다.“육
last updateLast Updated : 2024-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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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육민우는 그제야 진정하고 이마의 땀을 닦았다. 그러고는 아무 말 없이 육민범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쾅 닫았다.가방을 열어 신분증을 찾으려다 보니 가방 안은 이미 뒤져져 있었다.남은 돈은 모두 없어졌지만, 다행히 편지와 출금전표는 그대로 있었다.육민우는 침대에 힘없이 앉아 지난날을 떠올리며 깊은 절망에 빠졌다.어릴 적 그는 형과 성적이 비슷했고 오히려 형보다 뛰어난 면도 있었다. 하지만 말주변이 없고 사교성이 부족했던 탓에 집에서 사랑받지 못했고 학교에서 돌아오면 늘 농사일만 해야 했다.중학교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농사일에서 해방되자 그의 성적은 눈에 띄게 올랐고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다. 그런데 부모님은 두 아이 학비를 댈 수 없고 농사일할 사람도 필요하다며 육민우를 학교에서 빼냈다. 중학교 땐 분명 형보다 성적이 좋았는데, 왜 자신이 학교를 그만둬야 했는지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육민우는 어머니께 따져 물었지만 어머니의 대답은 납득하기 어려웠다.“형은 장남이잖니. 나중에 나랑 아빠는 네 형이 먹여 살려야지.”육민우도 자신이 부모님을 모시겠다고 했지만 거절당했다.3학년 개학한 지 며칠이 지났을 때 교장 선생님이 논에서 진흙투성이가 된 육민우를 찾아냈다.교장 선생님은 육민우를 데리고 집으로 가서 전혜자 부부를 설득했다.“이제 중3인데, 1년만 더 다니면 고등학교 시험 볼 수 있어요. 학교에서 학비는 면제해 줄 테니 집에서는 생활비랑 교재비만 부담해 주시면 돼요.”개교 이래 이렇게 뛰어난 학생은 처음이었다.형은 같은 중학교에 다녔지만, 작년에 고등학교 시험에 떨어져 재수하고 있었다.전혜자는 교재비도 없다며 단칼에 거절했다.둘째 아들은 말수는 적었지만 일은 똑 부러지게 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어른들보다도 일을 더 잘했고 시키는 대로도 잘했다.인재를 아끼는 교장 선생님은 밤늦게 군청에 가서 부탁해 신문에 작은 기사를 냈다. 흔치 않은 기회라 다섯 명 학생의 사연을 함께 실었다.그렇게 그해 육민우는 후원과 편지를 받았다.모두 30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4-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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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심서아는 육민우에게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저녁 드셨어요?”“아니.”심서아는 긴장한 아들을 바라보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가서 아빠랑 놀아.”심지현은 눈치가 빠른 아이여서 처음부터 엄마가 아빠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솔직히 육민우를 너무 좋아하지 않았다면 심지현은 절대 그를 상대하지도 않았을 것이다.육민우는 심지현을 자기 아들로 인정하고 양육비도 지급했으니 자신의 사소한 감정 때문에 아이를 힘들게 할 이유는 없었다.부자는 심서아의 말에 똑같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특히 육민우는 눈가가 붉어지기까지 했다. 심서아는 말을 마치고 주방으로 돌아가 감자를 마저 볶고 고추 잡채도 만들었다.평소 심지현과 둘이 있을 때는 두 가지 반찬으로 식사를 했지만 오늘은 육민우가 왔으니 반찬을 하나 더 추가해야 했다.예전에 육민우가 아버지와 함께 집에 와서 식사할 때면 밥을 많이 먹었던 기억이 났다. 그래서 가지무침도 만들었다.30분쯤 지나자 모든 요리가 완성되었다.심서아가 거실에 음식을 가져다 놓으려고 할 때, 심지현의 감탄사가 들려왔다.“와! 이렇게도 할 수 있구나! 진짜 멋있어요!”아들이 누군가를 이렇게까지 칭찬하는 건 처음 듣는 것 같았다. “진짜 바보 같아요. 걔랑 같이 놀기 싫어요.”평소에 심지현은 이 말을 입에 달고 살았었다.게다가 부자는 큐브에 푹 빠졌는지 심서아가 상을 차리는 동안에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지현아, 밥 먹자!”심서아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불렀다.그제야 육민우는 큐브를 내려놓았고 심지현도 순순히 식탁으로 다가왔다.하얀 식탁은 깨끗하게 닦여 있었고 그 위에는 세 가지 반찬과 세 그릇의 밥, 그리고 세 쌍의 수저가 놓여 있었다.네모난 식탁에 세 사람은 각각 한쪽씩 자리를 잡았다.심서아는 젓가락을 들며 말했다.“먹자!”심지현은 그제야 젓가락을 들고 감자채를 집었다.육민우는 처음으로 심서아가 만든 음식을 먹어보았다. 밥은 부드럽고 윤기가 흘렀고 감자채는 새콤달콤 아삭했으며 가지는 부드럽고 고소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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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심지현은 왠지 모르게 엄도영 앞에서 아빠 자랑을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엄도영은 키 크고 잘생긴 그 아저씨를 떠올리며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심지현에게 물었다.“너희 아빠 너 좋아해?”심지현은 고개를 꼿꼿이 들고 당연하다는 듯 앙증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당연하지!”엄도영은 심지현이 허풍을 떤다고 생각했다.“너희 아빠가 너 좋아하면 진작에 데리러 왔겠지.”그 말에 심지현의 작은 얼굴이 시무룩해졌지만, 곧 반박했다.“아니야, 아빠는 바쁘셔서 그래. 어제도 나 보러 왔었고 오늘 밤에도 온다고 했어. 앞으로 매일매일 온댔어.”엄도영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안 믿어.”심지현은 엄도영과 말하기 싫어졌다.“안 믿으면 말고. 나 책 읽을 거니까 너 가.”엄도영은 심지현에게 메롱을 하고 놀렸다.“아빠 생겼다고 뭐 달라져? 친구도 없으면서.”심지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난 친구 필요 없어.”지난번 소동 후, 엄도영은 더 이상 심지현의 물건을 빼앗으려 하지 않았다. 그는 심지현이 손에 꼭 쥔 로봇을 다시 한번 눈으로 훑어본 후, 아쉬운 발걸음으로 집을 나섰다.엄도영이 방을 나서고 나서야 심지현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잠시 후, 심서아가 일을 마치고 방에서 나와보니 심지현은 손에 든 로봇을 가지고 신이 나서 조작하고 있었다.뜻밖에도 로봇은 말도 하고 걷기도 했다. 그 모습이 신기해서 심서아도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았다. 심지현은 얼른 로봇을 집어 들어 심서아에게 자랑스럽게 보여주었다.“엄마, 이 로봇 건전지도 넣을 수 있어요.”심서아가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네가 넣었어?”심지현은 큰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끄덕였다.“네.”“어제 그 사람이 안 가르쳐 줬어?”아들의 말투로 보아 이제야 알게 된 것 같아 심서아는 다시 물었다.“누가요?”“네 아빠!”심서아는 아직 '아빠'라는 단어가 어색한지 말하면서도 조금 불편한 기색이었다.심지현은 웃으며 말했다.“아빠가 로봇을 탁자에 놓고 갔을 때 우린 아무도 아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4-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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