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심서아는 잠시 멍해졌다. 곧 그가 말을 이었다.

“교수님과 널 잘 돌보겠다고 약속했어.”

심서아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예상했던 대답이었다. 그녀는 조금 전 잠시 스치듯 지나갔던 기대감에 허탈한 마음을 감추고 차분하게 말했다.

“난 나와 지현이를 잘 돌볼 수 있어요. 우리 사이에는 아무런 감정도 없는데 억지로 그럴 필요 없잖아요.”

육민우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는 무릎 위에 놓인 손을 문지르며 말했다.

“억지가 아니야. 정말 나와 함께 살기 싫다면, 다른 좋은 사람 만나면 그때 다시 이야기해.”

“좋아요.”

심서아는 더 이상 실랑이하고 싶지 않았다. 다른 사람을 만나든 말든 그건 자기 마음이었으니 그녀는 흔쾌히 대답했다.

“시간 날 때 증명서 좀 떼어다 주세요. 지현이 호적에 올리게요.”

육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심지현을 한 번 더 쳐다본 뒤, 찻잔을 식탁에 내려놓고 심지현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가 뭔가 말하려는 순간, 심지현은 그를 노려보고는 심서아의 뒤로 숨었다.

이 사람이 그의 아빠라니. 4년 동안 엄마랑 자기를 버려두고 아무 연락도 없던 나쁜 사람 말이다. 아까 잠깐 좋았던 마음이 순간 싹 사라졌다.

육민우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일어서서 심지현에게 말했다.

“아빠가 다음에 또 보러 올게.”

심지현은 잠시 머뭇거리다 심서아를 쳐다보았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육민우는 가볍게 한숨을 쉬고 심서아에게 말했다.

“나 내일부터 출근하니까 오후에 시간 될 것 같아.”

“네.”

육민우는 주머니에서 작은 로봇 장난감을 꺼내 들고 심지현에게 다가갔다.

“아빠가 너 줄 장난감을 가져왔는데, 한번 볼래?”

심지현은 반짝이는 눈으로 심서아의 손을 꼭 잡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육민우는 개의치 않고 장난감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심지현에게 말했다.

“아빠가 내일 또 보러 올게.”

육민우가 돌아가자 심지현은 심서아의 손을 놓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냥 보고만 있을게요. 갖고 놀진 않을 거예요.”

심서아는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놀고 싶으면 갖고 놀아도 돼.”

육민우는 쓸쓸한 마음으로 연구소 사택으로 돌아왔다.

집 앞에 이르자 집 안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집 안으로 들어서자 모든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육민우는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진하연을 보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했다.

전혜자는 육민우가 아무 반응 없이 서 있는 것을 보고 그를 옆자리에 앉히며 말했다.

“아침부터 어디 갖다 왔어? 하연이가 한참 기다렸잖아. 얼른 앉아.”

진하연은 웃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아줌마. 저는 아줌마와 아저씨 뵈러 온 건데요. 누가 민우를 기다렸대요?”

전혜자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내가 뭐 볼 게 있다고 날 보러 와. 너랑 민우는 같은 동네에서 나고 자랐잖아. 비록 같은 대학에는 못 갔지만 같은 연구소에 다니고 또 같이 여기로 발령받았으니 이게 다 하늘이 맺어준 인연 아니겠니?”

육민우는 남녀 관계에 그리 민감하지 않고 오히려 둔감한 편이었지만 전혜자의 말이 지나치다는 것을 알고 단호하게 말했다.

“엄마, 그런 말 함부로 하시면 안 돼요. 하연이 평판에 안 좋아요.”

진하연은 급히 수습했다.

“민우야, 아줌마는 농담하시는 거잖아. 괜찮아.”

육민우가 아무 말 없이 방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전혜자는 그를 붙잡았다.

“오랜만에 집에 왔으면 엄마랑 좀 앉아서 얘기도 나눠야지. 너 정말 엄마 마음 몰라주는구나.”

육민우는 아무 의자에나 앉으며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으세요?”

그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침 일찍 나가더니 그 계집애 찾았어?”

전혜자의 질문에 진하연도 귀를 기울였다.

육민우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찾았어요.”

전혜자가 다시 물었다.

“그래서 얘기는 잘 됐어?”

“지현이는 제 아들이에요. 지현이의 서류를 준비해서 호적에 올리고 서아와 지현이를 이리로 데려올 거예요.”

그 말은 마치 폭탄처럼 모두의 귀에 꽂혔다.

특히 진하연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전혜자를 쳐다보았다. 이혼하러 간 거 아니었나? 어떻게 이런 결과가 나온 거지?

전혜자도 당황했다.

“민우야, 너 공부만 하다가 바보가 됐니? 심 교수가 너한테 은혜를 베푼 건 알지만, 이제 그만하면 됐잖아. 네 인생까지 망칠 필요는 없어.”

역시 공부만 한 사람들은 융통성이 없다더니, 정말 답답했다.

“내가 뭘 했는데요?”

육민우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어머니가 자신이 없는 사이에 아내를 쫓아냈다는 생각에 화가 치밀었다. 다른 사람이 없었다면 그는 당장이라도 짐을 싸서 가라고 했을 것이다.

전혜자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말했다.

“그 여자가 네 이름 덕을 안 봤으면 여기서 그렇게 편하게 살 수 있었겠어?”

육민우는 어머니가 심서아에게 조금도 미안한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알고 실망한 표정을 지으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진하연은 어색한 표정으로 한참 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육민우의 태도를 보니 심서아에게 마음이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곧 그 생각을 부정했다. 어릴 때부터 함께 자라고 학교도 같이 다녔던 육민우는 공부밖에 모르는 애였고 연애에는 눈곱만큼도 관심 없는 남자였다.

고등학교 때, 자꾸 여자애들이 육민우에게 집적대는 바람에 그가 귀찮아하자 그녀는 육민우에게 여자 친구가 있다고 말하고 다니라고 아이디어를 줬다. 그것도 소꿉친구라고 말이다. 그리고 자신이 기꺼이 그 여자 친구 역할을 해주겠다고 했다. 그때 육민우는 정말로 그렇게 했고 효과가 좋자 그녀에게 고맙다고 인사까지 했다.

진하연은 육민우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착각 따위는 하지 않았다. 자신이 그를 귀찮게 하면 다른 여자애들과 똑같이 귀찮아할 게 뻔했으니까.

대학에 가면 뭔가 달라질까 기대했지만 그는 여전히 같은 핑계를 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참지 못하고 육민우에게 물었다.

“너 나중에 어떤 여자랑 결혼할 거야?”

그의 대답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냥 평범한 사람이면 돼.”

“결혼은 언제쯤 할 생각이야?”

그때 졸업을 앞두고 있던 그는 잠깐 생각하고 대답했다.

“나중에 상황을 봐서.”

그런 육민우였기에, 진하연은 자신이 그를 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그가 다른 여자들보다 자기에게 가장 많은 말을 했으니까.

하지만 졸업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심서아에게 육민우를 빼앗길 줄 누가 알았겠는가.

비록 마음은 아팠지만 그나마 다행인 것은 육민우가 그녀를 사랑해서 결혼한 게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오늘, 육민우가 다른 여자를 감싸는 모습을 처음 보니 마음 한구석이 시큰거렸다.

진하연은 더 이상 앉아 있을 수 없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줌마, 집에 일이 있어서 가봐야겠어요.”

“그래, 잘 가고 다음에 또 오렴.”

진하연이 가자마자 전혜자는 그녀가 가져온 선물들을 살펴보았다. 분유 한 통과 사과 한 봉지였다. 그 물건들을 보니 아까 육민우 때문에 속상했던 마음이 눈 녹듯 사라졌다.

진하연은 집을 나서자마자 얼굴이 굳어졌다. 그래서 답답한 마음에 백화점에 가서 기분 전환을 하기로 했다.

요즘 그녀는 2층 여성복 매장에 새로 나온 옷들이 마음에 들어서 월급 받으면 사려고 눈여겨보고 있었다.

2층에 도착하자마자 익숙한 모습이 눈에 띄었다.

“손님, 보는 눈이 좋으시네요. 방금 입어 보신 세 벌 모두 인기 상품이에요. 올해 유행하는 디자인이죠.”

점원이 친절하게 설명했다.

그녀의 옷차림을 보니 백화점에 자주 오는 단골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