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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작가: 오렌지보리
last update 최신 업데이트: 2024-12-23 19:05:55
심지현은 왠지 모르게 엄도영 앞에서 아빠 자랑을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엄도영은 키 크고 잘생긴 그 아저씨를 떠올리며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심지현에게 물었다.

“너희 아빠 너 좋아해?”

심지현은 고개를 꼿꼿이 들고 당연하다는 듯 앙증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연하지!”

엄도영은 심지현이 허풍을 떤다고 생각했다.

“너희 아빠가 너 좋아하면 진작에 데리러 왔겠지.”

그 말에 심지현의 작은 얼굴이 시무룩해졌지만, 곧 반박했다.

“아니야, 아빠는 바쁘셔서 그래. 어제도 나 보러 왔었고 오늘 밤에도 온다고 했어. 앞으로 매일매일 온댔어.”

엄도영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

“안 믿어.”

심지현은 엄도영과 말하기 싫어졌다.

“안 믿으면 말고. 나 책 읽을 거니까 너 가.”

엄도영은 심지현에게 메롱을 하고 놀렸다.

“아빠 생겼다고 뭐 달라져? 친구도 없으면서.”

심지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난 친구 필요 없어.”

지난번 소동 후, 엄도영은 더 이상 심지현의 물건을 빼앗으려 하지 않았다. 그는 심지현이 손에 꼭 쥔 로봇을 다시 한번 눈으로 훑어본 후, 아쉬운 발걸음으로 집을 나섰다.

엄도영이 방을 나서고 나서야 심지현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잠시 후, 심서아가 일을 마치고 방에서 나와보니 심지현은 손에 든 로봇을 가지고 신이 나서 조작하고 있었다.

뜻밖에도 로봇은 말도 하고 걷기도 했다. 그 모습이 신기해서 심서아도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았다. 심지현은 얼른 로봇을 집어 들어 심서아에게 자랑스럽게 보여주었다.

“엄마, 이 로봇 건전지도 넣을 수 있어요.”

심서아가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네가 넣었어?”

심지현은 큰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제 그 사람이 안 가르쳐 줬어?”

아들의 말투로 보아 이제야 알게 된 것 같아 심서아는 다시 물었다.

“누가요?”

“네 아빠!”

심서아는 아직 '아빠'라는 단어가 어색한지 말하면서도 조금 불편한 기색이었다.

심지현은 웃으며 말했다.

“아빠가 로봇을 탁자에 놓고 갔을 때 우린 아무도 아빠랑 말 안 했잖아요.”

심서아는 왠지 모르게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럼 건전지는 어디서 났어?”

심지현은 탁자 위에 놓인 작은 라디오를 가리켰다.

“희열 삼촌이 사 온 라디오에서 꺼냈어요.”

그리고는 곧바로 해명하듯 덧붙였다.

“고장 안 냈어요. 다시 조립해 놨으니까, 다 놀고 나서 다시 넣어 둘 거예요.”

심서아는 아들이 워낙 조립하고 분해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따가 다시 넣어 놔. 엄마 라디오 들어야 하니까.”

심지현은 입을 삐죽 내밀며 협상을 시도했다.

“내일 넣으면 안 돼요?”

“왜?”

심서아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심지현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밤에 아빠 오시면, 로봇이 다른 기능도 있는지 물어보고 싶어서요.”

심서아는 웃으며 말했다.

“알았어.”

심서아는 아들이 어제까지만 해도 아빠를 밀어내더니 오늘은 완전히 받아들이고 심지어 기다리기까지 하는 모습이 놀라웠다.

별다른 생각 없이 그녀는 주방으로 가서 점심을 준비했다.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잔 심지현은 혼자 마당으로 나가 포도나무를 구경했다.

심서아는 책 한 권을 들고 마당의 등나무 의자에 앉아 책을 읽으며 아들을 지켜보았다.

그때 엄도영의 어머니 이춘하가 작은 대나무 바구니를 들고 찾아왔다. 전과 달리 이춘하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고 거만한 태도는 온데간데없었다. 그녀의 뒤에는 엄도영이 따라오고 있었다.

“서아야, 지난번 일은 정말 오해였어. 어제 시어머니께서 시골에서 계란을 좀 가져오셨는데 지현이 먹여.”

이춘하는 살살 웃으며 바구니를 탁자에 올려놓았다.

심지현은 움직이지 않았다. 심서아는 책을 내려놓고 다가가 바구니를 다시 집어 들고 이춘하에게 내밀었다.

“춘하 언니, 그날 도영이가 사람들 앞에서 잘못했다고 인정했으니 나도 그냥 넘어갈게요. 그러니 이 계란은 가져가세요.”

이춘하는 바구니를 받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

“아직도 화가 안 풀렸어? 아이들끼리 투닥거리는 건 흔한 일인데 같은 동네 이웃끼리 너무 마음에 두지 마.”

심서아도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지금 저희 형편에 남 도와줄 처지는 못 돼서요.”

오랫동안 이웃으로 지내면서 심서아는 이춘하의 성격을 꿰뚫고 있었다.

속셈을 들킨 이춘하는 머쓱한 듯 웃으며 말했다.

“에이, 별것도 아니고 그저 육 연구원님에게 한마디만 말하면 되는 일이잖아.”

엄도영의 아빠는 육민우의 하위부서였다. 그런데 오늘 엄도영이 집에 가서 심지현의 아빠가 얼마나 심지현을 예뻐하고 잘 놀아준다고 말하자 이춘하는 뭔가 꿍꿍이가 생겼던 것이다.

심서아의 예상대로였다. 그녀는 바구니를 이춘하의 손에 쥐여 주며 말했다.

“춘하 언니, 이건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이춘하는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청하야, 며칠 전 일은... 너무 마음에 담아 두지 마. 내가 어떻게 사과하면 네 마음이 풀리겠어?”

심서아는 부드러운 미소를 유지한 채 감정 없는 눈빛으로 대답했다.

“아니에요. 예전처럼 지내면 돼요.”

이춘하는 바구니를 받지 않고 일부러 두 걸음 뒤로 물러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생각보다 살림살이가 꽤 괜찮았다. 이 동네에서 냉장고랑 압력솥이 있는 집이 몇 집이나 되겠는가?

이춘하는 웃으며 덧붙였다.

“도영이도 그냥 애들 따라 헛소리한 거야. 육 연구원님이 정말 지현이를 인정하지 않았다면 그동안 생활비를 왜 꼬박꼬박 보내줬겠어?”

심서아는 이춘하의 눈이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것을 보고 그녀의 속셈을 짐작했다. 그녀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말했다.

“저는 저녁 준비해야 해서요. 계란 다시 갖다 드리기 전에 가져가세요.”

이춘하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럼... 그럼 먼저 갈게. 혹시 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 옆집으로 와.”

말을 마치고 이춘하는 돌아갔다.

심서아는 심지현을 불렀다.

“엄마는 저녁 준비할 건데 와서 도와줄래, 아니면 포도나무 볼래?”

심지현은 대답이 없었다. 심서아는 아들이 포도나무를 계속 보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고 주방으로 돌아가 저녁 준비를 시작했다.

밥을 짓고 채소를 씻고 썰고 나서 시계를 보니 7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곧 그가 올 시간이었다.

심지현도 이미 거실 소파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심서아는 저녁 준비를 마치고 밥상을 차렸다. 심지현이 로봇을 품에 안고 현관문을 자꾸만 내다보고 있는 걸 보자 심서아가 불렀다.

“지현아, 밥 먹자.”

심지현은 실망한 듯 돌아서서 로봇을 소파에 내려놓고 식탁에 앉았다. 기운이 없어 보였다.

“괜찮아, 지현아. 그 사람 무슨 일이 있는가 보지. 우리 밥 먹자.”

심서아는 크게 실망하지는 않았지만, 아들의 표정을 보니 그 남자를 향한 원망이 슬며시 피어올랐다.

심지현은 말없이 젓가락을 들고 천천히 밥을 씹었다.

심서아는 그에게 오리고기를 집어 주며 부드럽게 달랬다.

“자, 많이 먹고 쑥쑥 크자.”

심지현은 심서아를 쳐다보며 물었다.

“엄마는 왜 안 슬퍼요?”

심서아는 웃으며 대답했다.

“지현이가 슬퍼할 때만 엄마는 슬퍼.”

심지현은 엄마의 말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엄마를 슬프게 하고 싶지 않아서 허겁지겁 밥을 먹었다.

저녁을 다 먹은 지현이는 로봇을 가지고 놀지 않고 얌전히 소파에 앉아 TV를 보았다. 심서아는 식탁을 정리하고 주방으로 가서 설거지를 시작했다.

그때, 엄도영이 심지현의 집 앞을 지나가다가 두리번거리더니 큰 소리로 물었다.

“지현아, 너희 아빠 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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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0년대 사랑 일기   제18화

    심서아는 약간 놀랐다. 육민우에게서 선물을 받은 건 처음이었던 것이다.그녀는 가져온 반찬을 식탁에 놓고 소파 옆으로 가서 탁자 위의 카세트를 쳐다보았다. 테이프를 집어 들고 살펴보니, 마침 그녀가 좋아하는 노래가 몇 곡 들어 있었다.기분이 묘했다. 그녀는 다시 카세트를 들고 이리저리 살펴보았다.육민우는 그녀의 하얀 손가락이 카세트 버튼을 이리저리 눌러 보는 것을 바라보았다. 살짝 올라간 긴 속눈썹, 아주 미세하게 호를 그리는 입꼬리를 보니 그의 기분도 좋아졌다.“전원을 연결해야 돼.”육민우는 말하고 나서 자신이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그런 것까지 말해줄 필요는 없었는데.심서아는 개의치 않는 듯 카세트를 들고 말했다.“고마워요. 어서 손 씻고 밥 먹어요.”그리고는 카세트와 테이프를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오늘 저녁도 풍성했다. 부드럽고 맛있는 제육볶음,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생선, 아삭하고 싱싱한 콩나물무침, 그리고 상큼한 오이소박이가 있었다.물론 요리 대부분은 육민우의 뱃속으로 들어갔다. 심지현은 작은 생선 한 마리만 먹었고 심서아는 콩나물무침을 조금 먹었다.심지현은 원래 엄마가 해 준 음식이 특별히 맛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육민우가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니 참지 못하고 눈웃음을 지으며 물었다.“그렇게 맛있어요?”육민우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진지하게 대답했다.“응, 맛있어. 네 엄마 요리 실력이 이렇게 좋은 줄 몰랐네.”심지현은 자기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이 말은 확실히 아빠가 한 말이었다. 그래서 호기심 어린 눈으로 물었다.“전에 힘들게 살았어요?”심서아는 아들에게 육민우에 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녀석이 이런 질문을 하는 것에 그녀는 다소 의아했다.육민우는 생각하다가 말했다.“아빠는 어렸을 때 시골에서 좀 힘들게 살았어. 하지만 대학교 가고 나서는 괜찮아졌어.”심지현은 어른처럼 고개를 끄덕였다.“역시 그랬구나!”육민우는 심지현의 이해했다는 표정을 보고 궁금해졌다.“왜 아빠한테 그런 걸 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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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신 챕터

  • 80년대 사랑 일기   제40화

    육민우는 심지현에게 먹여주려고 도시락 뚜껑을 열며 대답했다.“네.”그때 간호사도 퇴근해서 저녁을 먹으러 갔고 의무실에는 심서아 일행만 남았다.심서아는 갈비찜을 먹으며 맛이 꽤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육민우가 자신의 요리가 맛있다고 한 것은 진심이었을까? 그녀는 의심스러웠다.심지현은 갈비찜을 한 입 베어 물었다. 부드럽고 짭짤하면서 고소한 맛에 눈이 반달처럼 휘어졌다.“아빠, 식당 아주머니 요리 진짜 잘하시네요!”육민우는 아들이 좋아하는 것을 알아채고 물었다.“맛있어?”“네!”“먹고 싶을 때 엄마랑 같이 오면 되겠다.”육민우는 인내심을 갖고 심지현의 입에 갈비찜을 한 조각 더 넣어주었다.심지현은 양이 많지 않아서 절반 정도밖에 먹지 못했다.그제야 육민우는 일어서서 의자를 가져와 옆에 앉아 남은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송유정은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심서아는 놀라지 않았다. 집에서도 그녀와 아들이 남긴 음식은 항상 육민우가 다 먹었기 때문이다.식사를 마친 육민우는 심서아와 송유정이 식사를 끝내자 자리에서 일어나 빈 도시락을 가져가려고 했다.송유정은 어색하게 말했다.“서아가 씻으면 가져가세요.”말을 하고 나니 좀 이상했다. 심서아는 그의 아내인데 그의 앞에서 자기가 나설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심서아가 송유정의 손에 들린 도시락을 받아 설거지하려고 하자 육민우가 가로채며 말했다.“링거 다 맞으면 차로 데려다줄게.”심서아는 거절하지 않았다. “네. 고마워요.”심서아의 소외감이 느껴지는 인사에 육민우는 나가려던 발걸음을 멈칫했지만, 곧 아무 말 없이 나갔다.약 30분 후, 육민우는 차를 몰고 의무실 앞에 도착했다.간호사가 링거 바늘을 빼주자 심서아는 송유정을 부축하여 차에 태웠고 심지현도 함께 뒷좌석에 앉았다.차가 출발하자 심지현의 눈은 기대로 가득 찼다. 희열 삼촌만 운전하는 줄 알았는데, 아빠도 운전할 수 있다니.뒷좌석에 앉은 심서아는 육민우의 옆모습과 운전대 위에 올려진 뼈마디가 뚜렷한 큰 손만 볼 수 있었다.연구

  • 80년대 사랑 일기   제39화

    육민우는 차를 몰고 사무실로 돌아와 소진성에게 진하연의 휴가를 신청하도록 부탁하고 자신은 의무실로 향했다.송유정은 여전히 병상에 누워 링거를 맞고 있었고 심서아는 옆에서 귤을 까고 있었다. 그리고 심지현은 얌전히 앉아 그림책을 보고 있었다.육민우는 긴 다리로 성큼성큼 심서아의 앞으로 걸어가 손목시계를 보며 말했다.“곧 저녁 시간인데, 식당에서 저녁 가져다줄게.”심서아는 그가 이렇게 빨리 돌아온 것을 보고 자기가 언짢아하는 걸 눈치챘구나 싶었다. 그래도 아내라는 자신의 위치를 신경 쓰는 모양이었다.그녀는 더 이상 토라지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육민우는 속으로 조금 서운했다. 과연 그녀는 정말 신경 쓰지 않았다. 자신이 진하연을 병원에 데려다줬는데 어떻게 조금도 화를 내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인가.송유정은 입을 뻥긋거렸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육민우는 아들 앞에 쪼그려 앉아 부드러운 표정으로 물었다.“지현아, 뭐 먹고 싶어?”심지현은 심서아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엄마가 화가 풀린 것을 확인하고는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아무거나 괜찮아요.”육민우는 일어서서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그래.”그리고는 돌아서 나갔다. 간호사는 육민우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그가 나가자 감탄했다.“육 연구원님께 저런 다정한 면이 있었다니. 아이에게도 정말 다정하네요.”심서아는 간호사의 말투에 의아함을 느꼈다.“평소에 무서운 분이세요?”송유정은 비록 연구소에서 일하지만 창고 관리를 맡고 있어 육민우를 거의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에 대한 모든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들은 것뿐이었다.하지만 간호사는 달랐다. 연구소 사람들은 아프면 모두 의무실로 오기 때문에 소문으로만 듣는 게 아니라 직접 본 적도 두 번이나 있었다.간호사는 고개를 저었다.“무섭다기보다는 고고해서 우리랑은 다른 세상 사람 같은 느낌이에요.”고고해? 심서아는 육민우에 대한 그런 평가를 처음 들었다. 사실 육민우와 많은 시간을 보낸 건 아니지만 말이

  • 80년대 사랑 일기   제38화

    육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그 말에 진하연은 가슴이 미어지는 듯 아파 무릎에 얼굴을 묻고 흐느껴 울었다.육민우는 그녀의 감정을 눈치채지 못하고 밖으로 나가 복도에 앉아 있던 소진성에게 말했다.“간병인 알아보러 아래층에 내려가 볼게.”“그래!”소진성은 병실로 들어갔다가 무릎에 얼굴을 묻고 어깨를 들썩이며 우는 진하연을 보고 걱정스럽게 물었다.“왜 그래요?”진하연는 훌쩍이며 고개를 들고 억울한 표정으로 물었다.“민우는 정말 저렇게 바빠요?”소진성은 이 말을 듣고 가슴이 철렁했다.‘설마 이 친구도 민우를 마음에 두고 있는 건 아니겠지...’그는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꽤 바빠요. 자료 준비하고 실험하는 것 외에도 TV 인터뷰도 해야 하거든요.”그리고는 한마디 덧붙였다.“괜한 생각 마세요. 민우는 겉보기만 번지르르하지 속은 꽉 막힌 사람이에요. 연구소에 민우 때문에 상처받은 여자들이 한둘이 아니라고요.”진하연은 다급하게 해명했다.“오해예요. 민우는 이미 결혼했는데 제가 무슨 딴생각을 하겠어요. 그냥 민우가 가끔 너무 냉정하게 굴어서 속상해서 그래요. 지난번에 민우 어머니 아프셨을 때도 내가 병원에서 밤새 간호해 드렸는데.”하지만 속으로는 생각했다.'내가 다른 여자들과 같아? 심서아랑 비교해도 나는 차원이 다른데.'소진성이 잠시 생각해보니 그럴듯했다. 사람 간의 정이란 게 있는데 진하연의 감정을 배려했다면 가족 중 누군가에게 간병을 부탁했어야지, 어떻게 바로 간병인을 고용할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래도 육민우의 편을 들며 웃어 보였다.“걔는 정말 바빠요. 나중에 얘기해서 가족분이 오시게끔 말해볼게요.”진하연은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의사 선생님이 별일 아니라고 하셨어요. 경과를 지켜보다가 내일 괜찮으면 모레 퇴원할 수 있대요.”소진성이 무슨 말을 하려는 순간, 육민우가 간병인을 데리고 와서 진하연에게 말했다.“의사 선생님께 여쭤봤는데 큰 문제는 없대. 돌아가면 네 상사에게

  • 80년대 사랑 일기   제37화

    육민우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다.“알겠어요!”진하연도 다시 그를 불렀다.“민우야!”육민우는 심서아의 앞에 서서 말했다.“혹시 신경 쓰인다면 진성을 보낼게.”“민우야! 나 너무 어지러워!”진하연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간호사도 재촉했다.“육 연구원님, 진하연 씨 상태가 좋지 않으니 빨리 병원에 가야 해요. 더 이상 지체하면 안 돼요.”육민우는 알겠다는 듯 소진성에게 돌아서서 말했다.“미안하지만 네가 하연 씨를 한성병원에 좀 데려다줘. 연구소에 가서 내 이름 대고 차를 가져오면 돼.”소진성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난... 난 운전할 줄 몰라.”진하연은 크게 실망했다. ‘그는 왜 저 여자 눈치를 보는 거지? 오랜 고향 친구이자 동창에 직장 동료로 지낸 정까지 있는데 심서아의 사소한 감정만도 못 하단 건가?’이런 생각에 진하연은 서럽게 눈물을 뚝뚝 흘렸다.“됐어. 이깟 몸뚱이 이제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간호사도 심서아라는 예쁜 여자가 육민우의 아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순간 멋쩍게 입을 열었다.“사람 목숨이 달린 일인데, 남성분 두 분이 같이 데려가면 문제없겠죠?”심서아는 간호사가 진하연과 친하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나한테 죄책감 느끼게 하지 마세요. 민우 씨가 어떻게 하든 그건 그 사람 마음이에요. 나한테 허락받을 필요 없어요.”그 말에 육민우는 내심 실망하며 돌아서서 소진성에게 말했다.“내가 차를 가져올 테니 넌 안고 내려와.”심서아가 싫다고 한마디만 했어도 함께 병원에 데려갔을 것이다. 그리고 병원에 도착하면 다른 사람에게 간호를 부탁할 생각이었다.차를 가져온 후, 소진성이 진하연을 뒷좌석에 태우자 육민우는 한성병원으로 출발했다.진료를 접수하고 병실에 데려다준 후, 육민우는 소진성에게 말했다.“잠시만 좀 봐 줘.”육민우가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본 진하연은 참지 못하고 불렀다.“민우야, 민우야!”육민우는 그녀에게 다가가 물었다.“왜 그래? 어디가 또 불편해?”진하연은 고개를

  • 80년대 사랑 일기   제36화

    소진성이 갑자기 고개를 들며 말했다.“하연 씨 같은데.”육민우는 그제야 반응을 보이며 손에 들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이때 군중 속에서 누군가가 말했다.“코피까지 흘리며 쓰러졌는데 남자분 중에 누가 좀 의무실에 데려다주세요!”소진성은 육민우를 쿡 찌르며 말했다.“사람이 쓰러졌는데, 가서 봐 봐.”육민우는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나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한 남자 직원이 진하연을 부축하려 하자 그녀는 육민우를 발견하고는 간신히 불렀다.“민우야! 나...”진하연을 부축하려던 남자 직원은 아는 사람이 나타나자 육민우에게 자리를 내주었다.육민우는 그녀 앞에 쭈그리고 앉아 물었다.“왜 그래? 걸을 수 있겠어?”진하연은 힘없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못 걸을 것 같아. 힘없어.”코피가 입가로 흘러내렸지만 육민우는 움직이지 않고 주변 사람들을 둘러보다가 힘이 세 보이는 식당 직원을 가리키며 말했다.“의무실로 좀 데려가 줘요.”진하연은 뚱뚱한 아저씨를 보고 즉시 바닥에서 기어 일어나고 싶었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힘이 없다고 말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특히 육민우가 보고 있는 상황에서 말이다.“민우야...”그녀는 애처로운 목소리로 불렀다.육민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식당 직원에게 말했다.“빨리 가세요.”진하연은 완전히 실망했다. 그녀가 뭐라고 말하려는 순간, 덩치 큰 아저씨가 다가와 그녀를 안아 들었다. 기름 냄새와 땀 냄새가 뒤섞인 퀴퀴한 냄새에 진하연은 정신이 더욱 아득해졌다.잠시 후 식당 직원이 돌아와 육민우에게 말했다.“육 연구원님, 간호사가 그 고향 친구분 상태가 안 좋고 돈도 안 가져왔다고 와보라고 하던데요.”육민우는 잠시 망설이다 소진성을 불러 함께 의무실로 향했다.의무실에 도착하니 심서아와 송유정이 있었다.아내를 본 육민우는 순간 놀라며 물었다.“여기에 왔는데 왜 연락도 안 했어?”심서아는 진하연을 흘끗 보았다. 이 여자는 아까 여기에는 아는 사람이 없어서 병원에 옮기려면 육민우밖에 부를 사람이 없다고

  • 80년대 사랑 일기   제35화

    “응, 오전에 왔다가 물건만 가지고 바로 갔어.”심서아가 대답했다.“그 녀석 참 끈질기네. 온갖 뒷말에도 굴하지 않고. 참 희선 언니 동생답다. 둘 다 천생 장사꾼이야. 돈 앞에서는 체면도 없나 봐. 민우 씨가 있는데도 오는 걸 보면.”송유정이 농담했다.하지만 심서아는 이해할 수 있었다.“떳떳하니까 오는 거지. 근데 이춘하가 그를 외간 남자라고 욕하는 건 엄청 기분 나빠하더라.”“하하!”송유정은 웃음을 터뜨렸다.“겨우 스물한 살짜리가 외간 남자 소리나 듣고.”심서아는 웃을 수 없었다.“얼마 전에 이춘하가 사람들 앞에서 희열이를 보고 외간 남자라고 욕했잖아. 그래서 이번 주에는 다른 사람 시켜서 물건 찾아가게 할 줄 알았거든. 근데 직접 온 거 있지. 다행히 유학파라서 생각이 열려 있으니까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마음에 상처 입었을 거야.”“알았어, 잘 쓸게. 세 식구 오붓한 시간 방해하지 않고 이만 가야겠다. 내가 한 말 잘 생각해 봐.”송유정은 샴푸를 가방에 넣고는 바로 나갔다.심서아가 주방으로 돌아가니 육민우는 이미 설거지를 하고 있었고 심지현은 작은 탁자를 닦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편안하게 등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몸을 편히 기댄 채, 이런 삶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잠시 후 설거지를 마친 육민우가 심서아의 옆으로 오며 나지막이 물었다.“좀 전에 송유정 씨가 통행증 얘기하는 것 같던데 누가 만들려는 거야?”심서아는 놀라 고개를 돌렸다. 육민우가 그녀의 개인적인 일을 묻는 것은 처음이었다.“친구가 봉래성에 가고 싶어 해서 유정이 아빠께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어요.”육민우는 태연한 심서아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다른 질문은 하지 않고 다시 말했다.“무슨 문제 있으면 나한테도 얘기해. 우리 같이 해결해 보자.”“우리?”심서아는 그 말에 마음이 흔들렸고 송유정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네.”육민우는 미소를 지으며 심지현의 손을 잡고 거실로 가서 해 질 때까지 함께 놀아주다가 돌아갔다.다음 날 아침, 출근한 육민우는

  • 80년대 사랑 일기   제34화

    심서아는 송유정이 말을 꺼내려 하자 그녀를 한쪽으로 데리고 갔다.“방에 들어가서 얘기해.”심서아가 작게 말했다.송유정은 알겠다는 듯 말했다.“그래, 그럼 네 방에서 기다릴게.”마당을 나서면서 송유정은 육민우를 다시 한번 흘끗 쳐다보았다.육민우는 키가 커서 낮은 의자에 앉으니 무릎이 턱에 닿을 정도였지만 아무렇지 않게 밥을 먹는 모습이 아주 온화해 보였다.돌아서면서 송유정은 속으로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심서아는 다시 식탁으로 돌아왔다. 세 식구는 조용히 식사를 마쳤고 평소처럼 육민우가 설거지했다.심서아는 심지현에게 마당에서 놀고 있으라고 하고 방으로 들어갔다.“서아야, 민우 씨 괜찮은 사람 같던데 이 정도면 살아볼 만하지 않아?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어때?”송유정은 진심으로 그녀를 설득했다.심서아는 책상 위 카세트와 테이프를 바라보며 심지현과 그가 함께 있는 모습을 떠올렸다. 마음이 흔들렸지만 아버지를 생각하면 그렇게 할 수 없었다.“난 여전히 봉래성에 가고 싶어. 우리 아버지 너무 억울하게 돌아가셨어.”송유정은 한참 말이 없다가 입을 열었다.“아빠는 네가 봉래성에 가서 뭐 할 건지 직접 묻고 싶어 하셔. 매일 오후 퇴근하고 집에 계시니까 시간 될 때 와.”“알았어!”말을 마친 송유정은 카세트를 가리키며 물었다.“이게 민우 씨가 사준 카세트야?”심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어. 지현이랑 라디오도 만들었어.”송유정은 웃으며 말했다.“거봐. 민우 씨니까 라디오도 만들어 주지. 보통 남자가 라디오를 만들어 주겠어? 진짜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봐. 나 봐, 시후 씨랑 몇 년이나 사귀었는데 선물 한번 받아본 적 없어. 매번 내가 스웨터 떠 주고 반찬 가져다주고 그러잖아.”심서아는 웃으며 말했다.“시후 씨는 월급도 얼마 안 되고 시골 출신이잖아. 다 네가 그 사람 잘생겼다고 만나는 거 아니었어?”송유정은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잘생긴 걸로 따지면 누가 민우 씨를 따라가겠어? 내가 너라면 여기 남아서 민우 씨랑 잘 살겠다. 네

  • 80년대 사랑 일기   제33화

    심서아는 멀리서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한참 후에야 정신을 차린 그녀는 부자를 방해하지 않고 조용히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 그리고 주방에 있던 작은 네모 탁자를 포도나무 아래로 옮겼다.저녁 메뉴는 고추 잡채, 멸치볶음, 감자채 볶음, 그리고 계란찜이었다.음식을 차려놓고 심지현을 보니 녀석은 쉴 새 없이 질문을 쏟아내고 있었다. 가만히 서서 불러서는 듣지 못할 것 같아 다가가는데 육민우의 어깨에 초록색 벌레가 붙어 있는 게 보였다.아마 포도나무에서 떨어진 모양이었다. 심서아는 손을 뻗어 벌레를 잡았고 인기척을 느낀 육민우는 뒤돌아보다가 심서아의 맑은 눈과 마주쳤다. 그녀는 두 손가락으로 벌레를 집어 그에게 보여주었다.“어깨에 벌레가 떨어졌어요.”마치 잘못한 일을 해명하듯 다급한 심서아의 모습에 육민우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괜찮아. 고마워!”심서아는 벌레를 던져 버리고 말했다.“지현이랑 밥 먹으러 와요. 거실은 더워서 마당에 차렸어요.”육민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심지현을 바로 부르지 않고 아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 손을 잡고 말했다.“밥 먹자!”심지현은 즉시 움직였다.심서아는 놀라 입을 살짝 벌렸다. 평소 심지현이 멍하니 있으면 몇 번씩 불러야 했는데 육민우는 한 번에 그를 움직이게 했으니 말이다.심지현은 마당에 차려진 밥상을 보더니 신나서 말했다.“와, 마당에서 밥 먹는 거 좋아요! 시원해요.”부자가 작은 나무 의자에 앉자 심서아는 담아놓은 밥과 반찬을 그들 앞에 놓았다.심서아는 계란찜을 육민우 앞으로 밀며 말했다.“이춘하가 당신에게 준 계란에서 4개로 계란찜 했어요. 나머지는 가져가세요.”육민우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무슨 뜻인지 알아차리고는 웃으며 말했다.“화났어?”“아니요!”심지현은 커다란 눈을 깜박이며 얼른 일어나더니 육민우에게 다가가 귓속말로 속삭였다.“엄마 화났어요!”심서아는 심지현의 행동을 보며 어이가 없었다. '얘가 정말 내가 힘들게 키운 애가 맞나? 겨우 며칠 만에...'엄마의

  • 80년대 사랑 일기   제32화

    심지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하다가 말했다.“딱히 뭘 하는 건 없어요. 엄마 그림을 가져가고 돈을 주고 나랑 엄마한테 뭘 사주기도 하고, 나랑 놀아주기도 해요.”육민우가 물었다.“그럼 지현이는 희열 삼촌 좋아해?”심지현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엄마는 유정 이모랑 희열 삼촌네 식구들은 세상에서 제일 좋은 사람들이라고 했어요. 그분들이 없었으면 나랑 엄마는 여기서 살아갈 수 없었을 거라고 했거든요. 근데 이제 아빠가 있으니까 아무도 나랑 엄마한테 뭐라고 못 할 거예요.”이 말에 육민우는 가슴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자신이 없던 4년 동안 그녀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상상이 갔다. 그러니 그가 무슨 자격으로 그녀와 하희열의 사이를 의심한단 말인가.심지현은 육민우가 갑자기 침묵하자 서둘러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며 말했다.“아빠, 나는 이제 아빠도 세상에서 제일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아빠가 엄마 전화 안 받은 건 누가 방해해서 그런 거지 우릴 버린 건 아니잖아요. 그렇죠?”그 말을 들은 육민우는 놀란 눈으로 아들을 바라보다가 품에 꼭 안고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코끝이 시큰해졌다.심서아는 아들을 아주 잘 키웠다.육민우는 한참 후에야 말했다.“아빠가 책 읽어줄게.”심서아는 방에서 나오다가 육민우가 아들에게 유창한 영어로 책을 읽어주는 모습에 적잖이 놀랐다. 유학 경험도 없는데 하희열 못지않은 발음이었다.하지만 수석 입학자였다는 사실을 떠올리곤 금세 납득했다.그녀는 사 온 수박을 주방으로 가져가 썰어서 거실 탁자에 놓고는 심지현을 불렀다.“지현아, 수박 먹자!”그리고 자신도 한 조각을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심지현은 육민우의 책 읽어주는 소리에 푹 빠져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육민우가 책 읽기를 멈추고 말했다.“가서 수박 먹자.”육민우는 탁자로 가 수박 두 조각을 가져와 심지현에게 한 조각을 주었다. 결국 한 조각으로는 부족했는지 부자는 탁자에 앉아 수박을 계속해서 먹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방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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