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화

육민우의 가슴도 함께 철렁 내려앉았다. 그는 문을 두드리며 무슨 일인지 물어보려고 했다.

그때 방의 불이 꺼졌다.

잠자리에 들려는 걸까?

육민우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버스가 끊겨 육민우는 40분 가까이 걸어서야 소진성의 집 앞에 도착했다.

다행히 소진성의 딸은 밤낮없이 울어대는 통에 이 시간에 찾아가도 부부의 잠을 방해하지 않을 터였다.

소진성은 칭얼거리며 울고 있는 딸을 안고 육민우를 집 안으로 들였다.

“애가 울어서 정신이 없어. 난로 위에 따뜻한 물이 있으니 세수하고 싶으면 직접 물 떠다 씻어.”

육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

다음 날 아침 일찍 육민우는 집으로 가서 육민범을 깨웠다.

“나 출근해야 하는데, 엄마가 병원에 계시거든. 돈이 부족하시니 병원에 좀 갖다 드려.”

그러고는 주머니를 뒤져 2천 원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돈이 모자라면 어떡해?”

육민범은 전혜자가 육민우에게서 돈을 더 뜯어내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2천 원으로 진료비를 내고 나면 얼마나 남겠는가.

육민우는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도 이게 전부야. 어머니는 평소에 잔병치레도 없으시니 돈이 많이 들진 않을 거야.”

그리고 병실 번호를 알려주고는 돌아서서 나가버렸다.

육민범은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니까 둘째 형은 2천 원을 쥐여 주고 뒷일은 자기에게 떠넘긴 셈이었다.

하지만 형이 시킨 일을 안 하면 어머니에게 무슨 꼴을 당할지 뻔했다.

육민범은 2천 원을 들고 병원으로 갔다가 그 돈으로는 어림도 없고 오히려 3천 원을 더 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진료는 전문의에게 받았고 병실은 제일 좋은 1인실이었으며 거기에 보약까지 처방받았기 때문이었다.

전혜자는 돈을 내면서 손을 덜덜 떨었다. 전문의가 육민우를 효자라고 칭찬한 이유를 그제야 알 것 같았다.

진하연은 전혜자의 표정을 살피고는 더 이상 머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줌마, 저는 출근해야 해서 이만 가 볼게요. 민범이가 검사 결과 기다리는 걸 도와드릴 거예요. 다음에 또 찾아뵐게요.”

육민범은 진하연에게 정중하게 말했다.

“수고하셨어요!”

“같은 동네 사람끼리 뭘 그렇게까지 예의를 차려?”

진하연은 속으로는 화가 끓어올랐지만 겉으로는 웃는 얼굴을 유지했다.

육민범은 멍하니 바라보다가 그녀가 멀어지고 나서야 전혜자의 표정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아챘다.

“엄마, 왜 나를 그렇게 노려봐요?”

전혜자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이 엉뚱한 생각은 자기가 낸 것이었기에 육민범에게 욕을 퍼부었다.

“걔가 가라고 했다고 그냥 오냐? 방금 맞았으니 몸이 아프다고 하면 되잖아! 으이구, 멍청아!”

“형도 출근해야 하잖아요. 출근 안 하면 우리한테 돈을 어떻게 줘요? 그리고 형도 도망가는 게 아닌데 뭐가 그렇게 급해요?”

전혜자는 숨을 몰아쉬며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이게 다 뭐야, 혹 떼려다 붙인 격이잖아! 검사 결과 필요 없어. 가자!”

“돈 다 냈는데! 그것도 급진으로!”

육민범의 말에 전혜자는 속에서 천불이 났다.

...

“지현아, 아빠가 로봇 갖고 놀아준다고 하지 않았어? 왜 또 안 오셨어? 너 잊어버린 거 아니야?”

심지현은 TV를 뚫어지라 쳐다보며 얼굴이 빨개졌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엄도영이 다시 말했다.

“나 로봇 갖고 놀게 해 주면 우리 아빠한테 수영 배우게 해 줄게. 어때?”

“나 수영 싫어해.”

“남자애가 어떻게 수영을 싫어할 수 있어? 맨날 엄마만 따라다니지 마. 남자애들은 남자애들끼리 놀아야 재밌지.”

엄도영은 심지현의 로봇이 몹시 놀고 싶었다.

“뭐가 재밌는데?”

심지현은 궁금해졌다.

“누가 오줌 더 멀리 싸는지 시합할 수 있지!”

엄도영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마침 음식을 들고나오던 심서아가 그 말을 듣고 심지현을 부르려고 했다. 그런데 고개를 들어보니 현관에 육민우가 서 있었다.

심서아는 어제 육민우 때문에 심지현이 밤새도록 기다렸던 것이 생각나 냉담한 눈길로 그를 흘끗 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육민우는 안으로 들어와 가방을 소파에 내려놓고 심지현을 불렀다.

엄도영은 그 소리를 듣고 육민우를 보자마자 황급히 집으로 돌아갔다.

심지현도 육민우를 보자 입을 삐죽 내밀고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는 몸을 홱 돌려 소파에서 내려와 식탁으로 달려가 앉았고 심서아는 심지현과 자신의 밥그릇에 밥을 담았다. 그들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육민우는 의자를 끌어다 식탁에 앉으며 해명했다.

“어제 작은 실수를 해서 상사와 이야기를 하느라 미처 올 수 없었어. 미안해.”

심서아는 잠시 놀란 듯 육민우를 바라보았다. 눈 밑에 옅은 다크서클이 드리워져 있는 걸 보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모양이었다.

머리를 쓰는 고된 업무에, 꼼꼼함과 정확성까지 요구되는 그의 일을 떠올리니 그에 대한 불만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심서아는 심지현을 보더니 말했다.

“아빠 일은 중요하단다. 그리고 아빠가 사과했으니 너도 이제 화 풀어.”

그러고 나서 일어서서 주방에서 수저를 가져오고 육민우의 밥그릇에 밥을 담아 주었다.

육민우는 가슴 한구석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꼈다. 차라리 그녀가 화를 내고 억지를 부리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언제나 이렇게 사리 분별이 분명하고 모든 일을 설명 한 번으로 이해하고 용서했다.

그녀는 잠시 후 다른 접시를 들고 나왔다.

“이 오리 요리는 어제 만든 건데 안 와서 냉장고에 넣어 뒀어요. 나랑 지현은 남은 음식을 안 좋아해서.”

그러고는 오리 요리를 육민우의 앞에 놓았다.

심지현은 엄마가 화를 내지 않자 몰래 육민우를 쳐다보다가 그와 눈이 마주쳤다.

육민우는 심지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밥 먹고 나면 아빠가 같이 놀아줄게.”

심지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밥을 허겁지겁 먹었다.

잠시 후, 심지현이 먼저 밥을 다 먹고는 육민우를 빤히 쳐다보았다.

육민우는 아들의 시선을 느끼고 밥 먹는 것을 멈추고 물었다.

“왜 그래?”

심지현의 검은 눈동자가 반짝였다.

“아빠랑 도영이 아빠랑 누가 오줌 더 멀리 누는지 궁금해요.”

그 말에 심서아는 마시던 국을 뿜을 뻔했다. 하지만 육민우를 보니 그는 태연하게 아들에게 대답하고 있었다.

“당연히 아빠지!”

심서아: !!

심지현의 눈이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그럴 줄 알았어요.”

심서아는 양이 적어 벌써 식사를 마쳤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어색했던 그녀는 뒷마당으로 가서 물 한 잔을 따라 등나무 의자에 앉아 천천히 마셨다.

육민우는 아들한테 못 하는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날 밤을 생각하니 저런 자신감을 가질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서아는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얼굴이 저절로 붉어졌다.

그녀는 자신의 얼굴을 톡톡 두드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아이들끼리 하는 시시한 말을 가지고 진지하게 가능성을 따지고 있다니.’

잠시 후, 육민우는 그릇들을 가지고 주방으로 갔다.

심서아는 심지현이 그를 오래 기다렸던 것이 생각나 주방으로 따라가 육민우에게 말했다.

“지현이랑 놀아주세요. 설거지는 제가 할게요.”

그녀는 육민우의 손에 들린 행주를 받으려고 손을 뻗었다.

육민우는 그녀의 걷어 올린 소매 아래로 드러난 희고 고운 팔을 보고는 시선을 피하며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내가 할게. 금방 끝나. 오늘 저녁에는 좀 늦게 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