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화

육민우가 주방으로 설거지하러 가자 심지현은 소파에 앉아 TV를 보았고 심서아는 방으로 들어갔다.

설거지를 마치고 나온 육민우는 가방에서 증명서를 꺼내면서 옆에 있던 심지현에게 물었다.

“엄마는 어디 계셔?”

“방에 있어요.”

심지현은 두 손으로 턱을 괴고 TV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육민우는 심서아의 방문 앞에서 노크했다. 방 안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요. 문 안 잠갔어요.”

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육민우가 심서아의 방에 들어온 것은 처음이었다. 방은 아늑하고 깔끔하게 정돈되어 티끌 하나 없었다. 그가 사 온 카세트는 책상 위에 놓여 있었고 옆에는 꽃병이 있었다. 꽃병에는 여전히 옅은 파란색 수국이 꽂혀 있었다.

육민우는 가까이 다가가 심서아에게 증명서를 건넸다. 그러다 고개를 숙여보니 책상 위에는 스케치 몇 장이 놓여 있었다.

그림은 아주 훌륭했다. 간단한 몇 번의 붓질만으로도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었다.

심서아는 스케치북을 덮고 증명서를 받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우리 사이에 뭘 그렇게까지. 그리고 이건 내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야.”

심서아는 고맙다는 말 외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결국 조용히 대답했다.

“네.”

그리고 일어나 증명서를 옷장 속 가방에 넣었다.

그때 육민우는 책상 유리 밑에 끼워진 사진들을 발견했다. 심지현의 백일 사진, 돌 사진, 그리고 그녀와 가족들의 어린 시절부터 현재까지의 사진들이 있었다. 그중에는 그와 심 교수님의 사진도 있었다.

심서아는 육민우가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것을 보고 심지현의 사진을 보고 있겠거니 생각하며 웃었다.

“지현이는 어렸을 때 정말 귀여웠어요.”

육민우는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고생 많았어.”

심서아도 징징대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고생은요. 아이를 낳기로 선택했으니 감당해야죠.”

하지만 그녀가 이렇게 의젓할수록 육민우의 마음은 더욱 아팠다. 결혼 전 그녀는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살던 아가씨였다.

육민우는 삽시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말했다.

“난 지현이랑 놀아줘야겠다.”

심서아는 방을 나서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착각에 빠졌다. 지현이가 그의 마음속 첫사랑을 이긴 걸까?

저녁에 육민우가 돌아간 후, 심서아는 심지현을 씻기며 아이가 말이 많아진 것을 느꼈다.

“엄마, 아빠 진짜 멋있어요!”

“어떻게 멋있는데?”

“이제 알았는데, 그림책 이야기가 하나의 결말만 있는 게 아니더라고요. 아빠가 여러 가지 이야기를 만들어 줬어요. 그러니까 그림책 하나가 여러 권이 되고 마음대로 이야기를 만들 수 있더라고요.”

엄마처럼 이야기의 시작과 끝이 정해져 있고 예상 밖의 전개가 없는 것과는 달랐다.

...

다음 날 아침 일찍, 심서아는 심지현을 데리고 호적 신고를 하러 가려고 했다.

심지현의 손을 잡고 막 집을 나서려는데 빨간 꽃무늬 블라우스를 입은 이춘하가

마주 걸어왔다. 심서아는 못 본 척 지나치려고 했다. 이춘하와는 예전부터 사이가 별로였고 엄도영의 일 이후로는 더 안 좋아졌다.

비록 그녀가 몇 번 아부를 떨었지만 그건 다 다른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춘하는 심서아를 그냥 보내줄 생각이 없는 듯 웃는 얼굴로 그녀를 불러 세웠다.

“서아야, 육 연구원님 요즘 매일 와?”

심서아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네.”

“아이고, 다행이다. 어제 우리 남편이 그러는데, 육민우가 그저께 집안일 때문에 상부에 불려 가서 한참 동안 얘기를 나눴대. 나중에 도영이 아빠가 알아보니까 이유가...”

이춘하는 일부러 말을 끊었다.

예상대로 심서아의 발걸음이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