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민우의 눈빛이 반짝이더니 물었다.“이 라디오가 그렇게 중요해?”“잘 모르겠어요. 희열 삼촌이 홍콩에서 사다 준 건데, 아마 비싼 거 같아요.”심지현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육민우는 라디오를 받아 들고 분해해서 살펴보더니 심지현에게 말했다.“아빠도 잘 모르겠네. 내일 아빠가 라디오 만드는 법을 가르쳐 줄 테니까 엄마 선물로 드리면 어떨까?”심지현은 자기 귀를 의심했다.“아빠가 라디오를 만들 줄 알아요?”육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물론이지. 내일 아빠 쉬는 날이니까 가르쳐 줄게. 다만 엄마께 깜짝 선물로 드려야 하니까, 완성하기 전까지는 비밀로 하자.”심지현은 감탄을 감추지 못했다.“좋아요!”아빠는 정말 못 하는 게 없었다. 라디오까지 만들 수 있다니 엄도영의 아빠보다 훨씬 멋있었다.주방에서 나온 심서아는 마주 앉아 속닥거리는 부자의 모습을 보았다. 무슨 비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마음 한구석에서 묘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둘이 저렇게 다정했었나?“지현아, 아빠랑 손 씻고 밥 먹자.”부자가 동시에 대답했다.“네!”밥상이 차려지고 모두 식탁에 앉자 심서아는 육민우에게 닭곰탕을 떠 주었다. 국을 받아 들면서 육민우는 순간 가슴속에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아내는 자신을 위해 밥을 짓고 국을 떠주었고 똑똑하고 다정한 아들은 자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예전에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고 느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모든 것을 가진 것 같았다.육민우는 국을 한 모금 마시다가 아내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게 느껴졌다. 여자에게 시선을 받는 일은 매일같이 일어나는 일이었으니 그는 그저 따분하게 여길 뿐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왠지 모르게 긴장되었다.그는 국그릇을 내려놓고 그녀를 쳐다보았다.“왜 그래. 서아야?”심서아가 입을 열었다.“민범이를 때렸어요?”육민우는 입술을 오므리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어!”“왜요?”비록 자신과 관련된 일임을 알면서도 그의 입으로 직접 확인받고 싶
심서아는 이춘하의 말을 떠올렸다.“저랑 지현이는 여기서 잘 지내고 있으니까 너무 서두르지 않아도 돼요. 일이 중요하죠.”육민우가 아버지 일 때문에 자신에게 화를 내지 않자 심서아의 마음을 짓누르던 큰 돌도 드디어 내려앉았다. 게다가 그녀는 그쪽으로 갈 생각도 없었다. 한 달 후면 봉래성으로 떠날 예정이었으니까.육민우는 잠시 말을 멈추고 대답했다.“알았어.”“닭곰탕 더 드세요.”기분이 좋아졌는지 심서아가 한마디 더 덧붙였다.“그래.”육민우가 다시 대답했다.저녁을 먹고 심서아는 방으로 돌아가 음악을 들었고 육민우는 그릇을 들고 주방으로 가 설거지를 하면서 다른 생각에 잠겼다.자신들 팀과 가족 간의 연락을 담당한 건 이지은 씨였다. 그는 그녀와 몇 마디 말을 나눠 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왜 그에게 이런 짓을 한 걸까?이 오해만 아니었다면 지현이와 서아는 이렇게 오랫동안 고생할 필요가 없었다.이 일은 반드시 밝혀낼 것이다.설거지를 마친 그는 주방 구석구석을 깨끗이 닦았다.주방에서 나오니 심지현이 잔뜩 기대에 찬 얼굴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다음 날 육민우는 연구소로 출근했다.하던 일을 마치자마자 그는 이성빈의 사무실로 향했다.“무슨 일이야?”이성빈은 약간 긴장했다. 이 녀석은 볼일 없으면 찾아오는 법이 없으니 직접 사무실까지 찾아온 것은 분명 무슨 일이 있을 터였다.육민우는 고개를 끄덕이고 아주 공손하게 이성빈 앞에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임성 연구 기지가 철수하면서 이지은 씨가 어디로 발령받았는지 알세요?”“갑자기 그 사람은 왜 찾아?”이성빈은 부모님이나 돈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서아가 예전에 내게 여러 번 전화했는데 이지은 씨가 자기 마음대로 전부 막아버렸어요.”육민우는 심각하게 말했다.이성빈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설마. 내가 자네한테 전화할 때마다 그 친구는 아주 공손하고 정중하게 잘 응대했어. 한 번도 빠뜨린 적이 없었는데, 굳이 자네한테만 특별히 그런 태도를 보였을 리는
하지만 그는 뭐든지 빨리 배우는 편이었다. 사람을 달래 본 적은 없지만 배울 수는 있었다.그가 아무 말 없자 이성빈은 불안한 듯 말했다.“내 월급이 고작 6만 4천 원이야. 자네보다 적다고. 그중에 4만 4천 원은 생활비로 들어가야 해. 지난번 자네에게 빌려준 2만 원도 내가 겨우 모아둔 돈이었어. 이젠 진짜 빌려줄 돈 없어.”육민우는 고개를 끄덕이고 웃으며 말했다.“그럼, 실험실에 남는 광석 가져도 될까요?”“그건 괜찮지.""“그리고 낡은 축전기와 금속 탐지기도 주셨으면 해요. 임성에서 가져온 건데 이제 우리 실험실에는 필요 없잖아요.”육민우가 다시 말했다.이성빈은 웃으며 대답했다.“그래, 그래, 가져가!”이성빈은 연구에 몰두하는 그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는 가져가도 연구에 쓸 거라고 생각하며 말했다.“알았어. 잠시 후에 신청서를 가져오면 서명해 줄게.”“알겠어요! 감사합니다!”“또 무슨 새로운 생각이 떠오른 거야?”이성빈이 물었다.육민우는 웃으며 대답했다.“아니요. 아내에게 라디오를 만들어 주려고요. 아들도 가르칠 겸.”이성빈은 크게 웃었다. “좋아, 가정의 평화도 중요하지. 밖에서 집 구할 생각 말고 어서 이사 들어가.”육민우는 대답 없이 돌아섰다.퇴근 후 육민우는 물건을 찾았지만 심서아에게 가지 않고 집으로 향했다.아들과 내일 만나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그는 연구소 사택으로 돌아갔다. 전혜자는 육민우를 보고 낯빛을 굳히며 말했다.“저번에 병원비가 모자랐는데 너는 돌아와서 묻지도 않더라. 네 마음에 나라는 엄마가 있기는 한 거니?”육민우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담담하게 말했다.“민범에게 돈을 남겼잖아요.”“2천 원으로 뭘 어쩌라는 거냐? 그 바람에 내 생활비까지 보태서 썼잖아.”육민우는 웃고는 더 이상 그 이야기를 하지 않고 다른 말을 꺼냈다.“내가 서아한테 쓴 편지들, 어머니가 받아두었어요?”전혜자는 육민우가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할 줄 몰랐는지 잠시 멍해졌다.“시간이 얼마나 지났는데. 게다가 식
너나 네 부모님은 안중에도 없고! 듣자 하니 너 상사에게 2만 원을 빌렸다던데, 돈을 다 그 여자에게 갖다 바쳤니?”육민우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늘어놓는 어머니를 바라보며 이미 무감각해져 있었다. 그녀의 말은 이제 그의 마음에 아무런 파장도 일으키지 못했다.“어머니와 아버지께 드리는 생활비로도 매일 좋은 음식을 먹고 가끔 옷도 사 입을 수 있어요. 다 두 분이 형님과 민범을 편애하셔서 도와준 것뿐인데 그게 집사람과 무슨 상관이에요?”게다가 그는 심서아에게 빚진 건 돈뿐만 아니라 무엇이든 줄 수 있었다.이 말에 육민범은 이를 갈았다. 맞은 지 얼마 안 됐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또 심서아를 한바탕 욕했을 것이다.“형, 우리 시골에서는 한 사람이 잘되면 가족 모두가 잘되는 법이잖아. 왜 그렇게 심서아 편만 드는 거야? 밖에서 사람들이 그 여자와 하희열이라는 남자에 대해 뭐라고 수군거리는지 알기나 해?”“닥쳐!”육민우는 낮은 목소리로 육민범의 말을 끊었다.“내가 오늘 온 건, 그 편지들을 너희가 가져갔으면 당장 내놓으라는 경고야. 나중에 가족끼리 얼굴 붉히는 일 없게.”말을 마친 그는 가방을 메고 나가 버렸다.전혜자는 육민우의 뒷모습을 보며 화가 나서 발을 동동 굴렀다.“육종수! 당장 나와요! 방에 숨어서 뭐 하는 거예요? 당신 아들이 하는 짓 좀 보라고!”한참이 지나도 아무 소리가 없자 전혜자는 다시 소리쳤다.“안 나오면 당신 담배 다 던져 버릴 거예요!”끼익하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렸다.육종수는 잔뜩 찡그린 얼굴로 불만스럽게 말했다.“당신은 왜 꼭 쟤랑 싸워야 직성이 풀리나? 당신이 울고불고해도 둘째한테는 안 먹히는 거 몰라? 머리가 나쁜 거야 뭐야?”“무슨 소리예요? 내가 잘못했다는 거예요?”전혜자는 앞으로 두 걸음 다가섰다.그러자 육종수가 말했다.“쟤는 달래야 말을 듣잖아. 게다가 이젠 컸다고 당신 말도 안 듣는데, 왜 쓸데없이 싸워?”전혜자는 초조해하며 말했다.“저 녀석이 돈을 다 그 심서아 그년에게 갖다
심지현은 얼른 고개를 들고 하얀 이를 드러내며 기쁘게 대답했다.“알았어요!”“무슨 반찬 해 줄까?”심지현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수박이랑 생선 사 오세요.”심서아는 육민우에게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당신은?”“아무거나 괜찮아.”육민우는 편식하는 사람이 아니었다.심서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주방으로 가서 장바구니를 가져왔다.그녀는 장바구니를 들고 소파를 지나가면서 부자를 슬쩍 훔쳐보았다.소파 위에는 뭔가 이상한 물건들이 놓여 있었다. 전자 제품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그중에서 그녀가 알아볼 수 있는 건 구리선뿐이었다.물어보고 싶었지만, 왠지 쑥스러워서 육민우가 돌아가면 심지현에게 물어보기로 했다.심서아는 장바구니를 들고 송유정의 집으로 향했다. 막 일어난 송유정은 심서아가 같이 장 보러 가자고 하자 재빨리 옷을 갈아입고 장바구니를 들고 어머니께 말씀드린 후 따라나섰다.“지현이는 왜 안 데리고 왔어?”“민우 씨가 보고 있어.”심서아는 무심하게 대답했다.“민우 씨가 네 집으로 들어왔어?”송유정의 눈에 호기심과 놀라움이 가득했다.“아니, 퇴근 후나 주말에 지현이 보러 와.”송유정은 심서아의 어깨를 툭 치며 흥분하며 말했다.“잘됐네! 이 기회에 눌러앉게 해야지. 그렇게 떨어져 지내다가 다른 사람이 틈타면 어떡해?”심서아는 고개를 저었다.“됐어. 마음이 떠난 사람은 아무리 붙잡아도 소용없어.”“무슨 소리야? 왜 그렇게 기운 없어? 민우 씨는 몇 번이나 왔는데 아무런 표현도 없었던 거야?”송유정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그저께 카세트랑 테이프 두 개 줬어. 이것도 표현인가?”송유정은 웃음을 터뜨렸다.“민우 씨, 남자 맞아? 아리따운 아내가 눈앞에 있는데 아무런 생각도 안 든다는 게 말이 돼?”“그러니까. 억지로 맺은 인연은 오래 못 간다니까.”심서아는 한숨을 쉬고 말을 이었다.“그런데 한 가지 오해는 풀었어. 내가 전화했을 때, 그가 일부러 안 받은 게 아니라 교환원이 전화를 안 바꿔 준거래. 게다가
이지은의 일은 일단 기억해둬야지.”송유정은 잠시 말이 없다가 물었다.“결국 하고 싶은 말은 봉래성에 가겠다는 거지?”심서아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역시 너는 못 속이겠어.”송유정은 약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봉래성에 가면 정말 잘 해결할 수 있겠어?”심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희열이가 이미 다 준비해 뒀어.”“알았어. 그럼 내가 아빠한테 부탁해 볼게.”심서아는 그녀의 대답을 듣고 그제야 안심했다. 두 사람은 장을 보고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심서아는 돌아오는 길에 수박 한 통을 샀다.수박을 식탁 위에 올려두었지만 아들과 남편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너무 집중한 나머지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심서아는 그들을 방해하지 않았다. 지현이가 자주 그러는 일이라 익숙했던 것이다.심서아가 주방에서 요리를 마치고 식탁으로 돌아와 심지현을 큰 소리로 두 번 부르고 나서야 부자는 정신을 차렸다.심지현은 소리를 듣고 황급히 무언가를 숨기더니 고개를 돌려 물었다.“엄마, 언제 왔어요?”“밥까지 다했는데 언제 왔을까? 어서 가서 손 씻어.”심지현은 육민우에게 눈짓하며 말했다.“내가 먼저 손 씻고 그다음에 아빠 씻어요.”육민우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어서 가.”심서아는 부자가 뭔가 숨기는 듯한 눈치였지만 육민우가 그 자리에 앉아 있어서 다가가지 못했다.육민우가 손을 씻으러 갈 차례가 되자 심서아는 참지 못하고 가서 확인해보려고 했지만 심지현이 막아섰다.“지금은 안 돼요. 밥 먹고 나서 보여 줄게요.”심서아는 하는 수 없이 몸을 곧게 세우며 말했다.“알았어!”육민우는 손을 씻고 식탁에 앉았고 심서아와 심지현도 자리에 앉았다.세 사람이 식사를 마친 후, 심지현이 심서아에게 말했다.“오늘은 엄마가 설거지해요. 나랑 아빠는 할 일이 좀 있어요.”심서아는 순순히 설거지하러 갔다.설거지를 마치고 나오자 부자는 소파 옆에 나란히 서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심지현은 심서아의 손을 잡고 말했다.“엄마, 나랑 아빠가
하희열은 방에 들어서자마자 육민우를 보고 잠시 멈칫했다. 하지만 곧 그날 사람들 속에서 심지현의 아빠라고 밝혔던 남자임을 기억해냈다.육민우도 일어나 고개를 끄덕였고 두 남자는 서로를 은근히 훑어본 후 시선을 거뒀다.하희열은 흰 셔츠에 검은 슬랙스 차림에 눈에 띄는 손목시계를 차고 있었다. 육민우와 키는 비슷했고 잘생긴 이목구비에서 풍기는 귀티는 좋은 집안에서 자랐음을 짐작하게 했다.나이는 육민우보다 훨씬 어려 보였다. 육민우의 머릿속에 온갖 억측들이 스쳐 지나갔지만 그는 곧 고개를 저었다. 심서아는 교수님께 잘 교육받았으니 그럴 리 없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구석이 불편하고 어지러웠다.하희열은 심지현을 번쩍 안아 소파에 앉히고 가방에서 작고 빨간 네모 상자를 꺼내 테이블 위에 놓았다. 상자에는 영어 제목이 적혀 있었고 몇 권의 책도 함께였다.“삼촌이 너 주려고 가져왔어. 마음에 들어?”그때 방에서 나온 심서아는 테이블 위의 선물들을 보고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또 이렇게 많이 샀어? 그만 사 오라고 했잖아.”하희열은 웃으며 말했다. “별것도 아닌데, 신경 쓰지 마. 네 선물도 있어.”그러면서 하희열은 가방에서 길쭉한 상자 하나를 더 꺼내 놓았다.심서아는 상자를 받지 않으며 말했다.“늘 이렇게 신세 져서 어떡해.”하희열은 상자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설명했다.“내가 산 게 아니고 누나가 홍콩에서 가져온 거야. 이걸로 머리 감으면 좋다고 하더라고.”육민우는 그 말에 저도 모르게 심서아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까맣고 윤기 흐르는 머리카락은 어깨 위로 자연스럽게 흘러내려 고혹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심지현은 빨간 철제 상자를 열고는 기뻐했다.“와, 쿠키다! 백화점 식품 코너에서 산 거예요?”하희열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어. 마음에 들어?”그리고는 육민우와 조금 떨어진 의자에 앉았다. 그는 육민우를 몰래 훔쳐보았다. 뛰어난 외모는 물론이고 재능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문득 그는 심서아가 왜 심지현을 키우면서 그토록 오랫
엄도영의 시선이 탁자 위 빨간 철제 상자에 고정되었다. 그는 달려가서 보고 싶었지만 이춘하의 손에 꽉 잡혀 움직일 수 없었다.심지현은 화가 난 엄도영의 표정을 보더니 눈을 반짝이며 자랑했다.“우리 아빤 나한테 라디오 만드는 법도 가르쳐줬어.”그러고는 엄도영에게 다가가 귓속말로 속삭였다.“우리 아빠가 너희 아빠보다 쉬 더 멀리 싸!”으쓱거리는 심지현의 모습에 엄도영이 발끈하며 따지려 들자 이춘하는 재빨리 잡아끌며 말했다.“얌전히 있어. 엄마가 지현이 아빠랑 할 얘기가 있으니까.”아들이 입을 삐죽 내미는 걸 보니 또 심지현과 싸우려는 게 분명했다. 이춘하는 아들이 또 사고를 칠까 봐 얼른 대나무 바구니를 탁자에 올려놓고는 하희열을 흘끗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고는 심서아에게 말했다.“서아야, 이 계란은 네 남편 몸보신하라고 가져온 거니까, 이번엔 거절하지 마.”말을 마친 그녀는 육민우에게 다가가 아양을 떨며 말했다.“지현이 아빠, 사실 도영이 아빠는 지현이 아빠의 하위 부서에 출근하거든요. 특수 자재를 구매해야 해서 신청서를 제출한 지 며칠 됐는데도 감감무소식이에요. 윗분께서 갖고 계시다는데, 혹시 말씀 좀 잘해주시겠어요? 가능한지 아닌지 답변이라도 듣고 싶어서요.”엄도영의 아빠는 연구개발부서에 몇 번이나 찾아갔지만 담당자 얼굴조차 보지 못했다.그녀는 육민우가 거절할까 봐 한마디 더 덧붙였다.“지난번 도영의 일도 사과했잖아요. 앞으로 도영이가 지현이랑 잘 놀도록 할게요.”심서아가 바구니를 가져오며 거절하려던 찰나, 육민우가 뜻밖에도 답했다.“알겠습니다!”예상치 못한 육민우의 통쾌한 대답에 이춘하가 말했다.“정말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실례할게요.”그녀는 육민우가 마음을 바꿀세라 엄도영을 데리고 황급히 자리를 떴다.심서아는 어쩔 수 없이 바구니를 다시 탁자에 올려놓았다. 그녀의 난처한 모습을 본 하희열은 육민우에게 다가가 말했다.“육 연구원님, 저 아줌마가 전에 서아 누나한테 얼마나 심하게 욕했는지 아세요? 이제 와서 아부하는
육민우는 심지현에게 먹여주려고 도시락 뚜껑을 열며 대답했다.“네.”그때 간호사도 퇴근해서 저녁을 먹으러 갔고 의무실에는 심서아 일행만 남았다.심서아는 갈비찜을 먹으며 맛이 꽤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육민우가 자신의 요리가 맛있다고 한 것은 진심이었을까? 그녀는 의심스러웠다.심지현은 갈비찜을 한 입 베어 물었다. 부드럽고 짭짤하면서 고소한 맛에 눈이 반달처럼 휘어졌다.“아빠, 식당 아주머니 요리 진짜 잘하시네요!”육민우는 아들이 좋아하는 것을 알아채고 물었다.“맛있어?”“네!”“먹고 싶을 때 엄마랑 같이 오면 되겠다.”육민우는 인내심을 갖고 심지현의 입에 갈비찜을 한 조각 더 넣어주었다.심지현은 양이 많지 않아서 절반 정도밖에 먹지 못했다.그제야 육민우는 일어서서 의자를 가져와 옆에 앉아 남은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송유정은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심서아는 놀라지 않았다. 집에서도 그녀와 아들이 남긴 음식은 항상 육민우가 다 먹었기 때문이다.식사를 마친 육민우는 심서아와 송유정이 식사를 끝내자 자리에서 일어나 빈 도시락을 가져가려고 했다.송유정은 어색하게 말했다.“서아가 씻으면 가져가세요.”말을 하고 나니 좀 이상했다. 심서아는 그의 아내인데 그의 앞에서 자기가 나설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심서아가 송유정의 손에 들린 도시락을 받아 설거지하려고 하자 육민우가 가로채며 말했다.“링거 다 맞으면 차로 데려다줄게.”심서아는 거절하지 않았다. “네. 고마워요.”심서아의 소외감이 느껴지는 인사에 육민우는 나가려던 발걸음을 멈칫했지만, 곧 아무 말 없이 나갔다.약 30분 후, 육민우는 차를 몰고 의무실 앞에 도착했다.간호사가 링거 바늘을 빼주자 심서아는 송유정을 부축하여 차에 태웠고 심지현도 함께 뒷좌석에 앉았다.차가 출발하자 심지현의 눈은 기대로 가득 찼다. 희열 삼촌만 운전하는 줄 알았는데, 아빠도 운전할 수 있다니.뒷좌석에 앉은 심서아는 육민우의 옆모습과 운전대 위에 올려진 뼈마디가 뚜렷한 큰 손만 볼 수 있었다.연구
육민우는 차를 몰고 사무실로 돌아와 소진성에게 진하연의 휴가를 신청하도록 부탁하고 자신은 의무실로 향했다.송유정은 여전히 병상에 누워 링거를 맞고 있었고 심서아는 옆에서 귤을 까고 있었다. 그리고 심지현은 얌전히 앉아 그림책을 보고 있었다.육민우는 긴 다리로 성큼성큼 심서아의 앞으로 걸어가 손목시계를 보며 말했다.“곧 저녁 시간인데, 식당에서 저녁 가져다줄게.”심서아는 그가 이렇게 빨리 돌아온 것을 보고 자기가 언짢아하는 걸 눈치챘구나 싶었다. 그래도 아내라는 자신의 위치를 신경 쓰는 모양이었다.그녀는 더 이상 토라지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육민우는 속으로 조금 서운했다. 과연 그녀는 정말 신경 쓰지 않았다. 자신이 진하연을 병원에 데려다줬는데 어떻게 조금도 화를 내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인가.송유정은 입을 뻥긋거렸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육민우는 아들 앞에 쪼그려 앉아 부드러운 표정으로 물었다.“지현아, 뭐 먹고 싶어?”심지현은 심서아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엄마가 화가 풀린 것을 확인하고는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아무거나 괜찮아요.”육민우는 일어서서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그래.”그리고는 돌아서 나갔다. 간호사는 육민우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그가 나가자 감탄했다.“육 연구원님께 저런 다정한 면이 있었다니. 아이에게도 정말 다정하네요.”심서아는 간호사의 말투에 의아함을 느꼈다.“평소에 무서운 분이세요?”송유정은 비록 연구소에서 일하지만 창고 관리를 맡고 있어 육민우를 거의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에 대한 모든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들은 것뿐이었다.하지만 간호사는 달랐다. 연구소 사람들은 아프면 모두 의무실로 오기 때문에 소문으로만 듣는 게 아니라 직접 본 적도 두 번이나 있었다.간호사는 고개를 저었다.“무섭다기보다는 고고해서 우리랑은 다른 세상 사람 같은 느낌이에요.”고고해? 심서아는 육민우에 대한 그런 평가를 처음 들었다. 사실 육민우와 많은 시간을 보낸 건 아니지만 말이
육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그 말에 진하연은 가슴이 미어지는 듯 아파 무릎에 얼굴을 묻고 흐느껴 울었다.육민우는 그녀의 감정을 눈치채지 못하고 밖으로 나가 복도에 앉아 있던 소진성에게 말했다.“간병인 알아보러 아래층에 내려가 볼게.”“그래!”소진성은 병실로 들어갔다가 무릎에 얼굴을 묻고 어깨를 들썩이며 우는 진하연을 보고 걱정스럽게 물었다.“왜 그래요?”진하연는 훌쩍이며 고개를 들고 억울한 표정으로 물었다.“민우는 정말 저렇게 바빠요?”소진성은 이 말을 듣고 가슴이 철렁했다.‘설마 이 친구도 민우를 마음에 두고 있는 건 아니겠지...’그는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꽤 바빠요. 자료 준비하고 실험하는 것 외에도 TV 인터뷰도 해야 하거든요.”그리고는 한마디 덧붙였다.“괜한 생각 마세요. 민우는 겉보기만 번지르르하지 속은 꽉 막힌 사람이에요. 연구소에 민우 때문에 상처받은 여자들이 한둘이 아니라고요.”진하연은 다급하게 해명했다.“오해예요. 민우는 이미 결혼했는데 제가 무슨 딴생각을 하겠어요. 그냥 민우가 가끔 너무 냉정하게 굴어서 속상해서 그래요. 지난번에 민우 어머니 아프셨을 때도 내가 병원에서 밤새 간호해 드렸는데.”하지만 속으로는 생각했다.'내가 다른 여자들과 같아? 심서아랑 비교해도 나는 차원이 다른데.'소진성이 잠시 생각해보니 그럴듯했다. 사람 간의 정이란 게 있는데 진하연의 감정을 배려했다면 가족 중 누군가에게 간병을 부탁했어야지, 어떻게 바로 간병인을 고용할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래도 육민우의 편을 들며 웃어 보였다.“걔는 정말 바빠요. 나중에 얘기해서 가족분이 오시게끔 말해볼게요.”진하연은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의사 선생님이 별일 아니라고 하셨어요. 경과를 지켜보다가 내일 괜찮으면 모레 퇴원할 수 있대요.”소진성이 무슨 말을 하려는 순간, 육민우가 간병인을 데리고 와서 진하연에게 말했다.“의사 선생님께 여쭤봤는데 큰 문제는 없대. 돌아가면 네 상사에게
육민우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다.“알겠어요!”진하연도 다시 그를 불렀다.“민우야!”육민우는 심서아의 앞에 서서 말했다.“혹시 신경 쓰인다면 진성을 보낼게.”“민우야! 나 너무 어지러워!”진하연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간호사도 재촉했다.“육 연구원님, 진하연 씨 상태가 좋지 않으니 빨리 병원에 가야 해요. 더 이상 지체하면 안 돼요.”육민우는 알겠다는 듯 소진성에게 돌아서서 말했다.“미안하지만 네가 하연 씨를 한성병원에 좀 데려다줘. 연구소에 가서 내 이름 대고 차를 가져오면 돼.”소진성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난... 난 운전할 줄 몰라.”진하연은 크게 실망했다. ‘그는 왜 저 여자 눈치를 보는 거지? 오랜 고향 친구이자 동창에 직장 동료로 지낸 정까지 있는데 심서아의 사소한 감정만도 못 하단 건가?’이런 생각에 진하연은 서럽게 눈물을 뚝뚝 흘렸다.“됐어. 이깟 몸뚱이 이제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간호사도 심서아라는 예쁜 여자가 육민우의 아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순간 멋쩍게 입을 열었다.“사람 목숨이 달린 일인데, 남성분 두 분이 같이 데려가면 문제없겠죠?”심서아는 간호사가 진하연과 친하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나한테 죄책감 느끼게 하지 마세요. 민우 씨가 어떻게 하든 그건 그 사람 마음이에요. 나한테 허락받을 필요 없어요.”그 말에 육민우는 내심 실망하며 돌아서서 소진성에게 말했다.“내가 차를 가져올 테니 넌 안고 내려와.”심서아가 싫다고 한마디만 했어도 함께 병원에 데려갔을 것이다. 그리고 병원에 도착하면 다른 사람에게 간호를 부탁할 생각이었다.차를 가져온 후, 소진성이 진하연을 뒷좌석에 태우자 육민우는 한성병원으로 출발했다.진료를 접수하고 병실에 데려다준 후, 육민우는 소진성에게 말했다.“잠시만 좀 봐 줘.”육민우가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본 진하연은 참지 못하고 불렀다.“민우야, 민우야!”육민우는 그녀에게 다가가 물었다.“왜 그래? 어디가 또 불편해?”진하연은 고개를
소진성이 갑자기 고개를 들며 말했다.“하연 씨 같은데.”육민우는 그제야 반응을 보이며 손에 들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이때 군중 속에서 누군가가 말했다.“코피까지 흘리며 쓰러졌는데 남자분 중에 누가 좀 의무실에 데려다주세요!”소진성은 육민우를 쿡 찌르며 말했다.“사람이 쓰러졌는데, 가서 봐 봐.”육민우는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나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한 남자 직원이 진하연을 부축하려 하자 그녀는 육민우를 발견하고는 간신히 불렀다.“민우야! 나...”진하연을 부축하려던 남자 직원은 아는 사람이 나타나자 육민우에게 자리를 내주었다.육민우는 그녀 앞에 쭈그리고 앉아 물었다.“왜 그래? 걸을 수 있겠어?”진하연은 힘없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못 걸을 것 같아. 힘없어.”코피가 입가로 흘러내렸지만 육민우는 움직이지 않고 주변 사람들을 둘러보다가 힘이 세 보이는 식당 직원을 가리키며 말했다.“의무실로 좀 데려가 줘요.”진하연은 뚱뚱한 아저씨를 보고 즉시 바닥에서 기어 일어나고 싶었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힘이 없다고 말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특히 육민우가 보고 있는 상황에서 말이다.“민우야...”그녀는 애처로운 목소리로 불렀다.육민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식당 직원에게 말했다.“빨리 가세요.”진하연은 완전히 실망했다. 그녀가 뭐라고 말하려는 순간, 덩치 큰 아저씨가 다가와 그녀를 안아 들었다. 기름 냄새와 땀 냄새가 뒤섞인 퀴퀴한 냄새에 진하연은 정신이 더욱 아득해졌다.잠시 후 식당 직원이 돌아와 육민우에게 말했다.“육 연구원님, 간호사가 그 고향 친구분 상태가 안 좋고 돈도 안 가져왔다고 와보라고 하던데요.”육민우는 잠시 망설이다 소진성을 불러 함께 의무실로 향했다.의무실에 도착하니 심서아와 송유정이 있었다.아내를 본 육민우는 순간 놀라며 물었다.“여기에 왔는데 왜 연락도 안 했어?”심서아는 진하연을 흘끗 보았다. 이 여자는 아까 여기에는 아는 사람이 없어서 병원에 옮기려면 육민우밖에 부를 사람이 없다고
“응, 오전에 왔다가 물건만 가지고 바로 갔어.”심서아가 대답했다.“그 녀석 참 끈질기네. 온갖 뒷말에도 굴하지 않고. 참 희선 언니 동생답다. 둘 다 천생 장사꾼이야. 돈 앞에서는 체면도 없나 봐. 민우 씨가 있는데도 오는 걸 보면.”송유정이 농담했다.하지만 심서아는 이해할 수 있었다.“떳떳하니까 오는 거지. 근데 이춘하가 그를 외간 남자라고 욕하는 건 엄청 기분 나빠하더라.”“하하!”송유정은 웃음을 터뜨렸다.“겨우 스물한 살짜리가 외간 남자 소리나 듣고.”심서아는 웃을 수 없었다.“얼마 전에 이춘하가 사람들 앞에서 희열이를 보고 외간 남자라고 욕했잖아. 그래서 이번 주에는 다른 사람 시켜서 물건 찾아가게 할 줄 알았거든. 근데 직접 온 거 있지. 다행히 유학파라서 생각이 열려 있으니까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마음에 상처 입었을 거야.”“알았어, 잘 쓸게. 세 식구 오붓한 시간 방해하지 않고 이만 가야겠다. 내가 한 말 잘 생각해 봐.”송유정은 샴푸를 가방에 넣고는 바로 나갔다.심서아가 주방으로 돌아가니 육민우는 이미 설거지를 하고 있었고 심지현은 작은 탁자를 닦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편안하게 등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몸을 편히 기댄 채, 이런 삶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잠시 후 설거지를 마친 육민우가 심서아의 옆으로 오며 나지막이 물었다.“좀 전에 송유정 씨가 통행증 얘기하는 것 같던데 누가 만들려는 거야?”심서아는 놀라 고개를 돌렸다. 육민우가 그녀의 개인적인 일을 묻는 것은 처음이었다.“친구가 봉래성에 가고 싶어 해서 유정이 아빠께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어요.”육민우는 태연한 심서아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다른 질문은 하지 않고 다시 말했다.“무슨 문제 있으면 나한테도 얘기해. 우리 같이 해결해 보자.”“우리?”심서아는 그 말에 마음이 흔들렸고 송유정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네.”육민우는 미소를 지으며 심지현의 손을 잡고 거실로 가서 해 질 때까지 함께 놀아주다가 돌아갔다.다음 날 아침, 출근한 육민우는
심서아는 송유정이 말을 꺼내려 하자 그녀를 한쪽으로 데리고 갔다.“방에 들어가서 얘기해.”심서아가 작게 말했다.송유정은 알겠다는 듯 말했다.“그래, 그럼 네 방에서 기다릴게.”마당을 나서면서 송유정은 육민우를 다시 한번 흘끗 쳐다보았다.육민우는 키가 커서 낮은 의자에 앉으니 무릎이 턱에 닿을 정도였지만 아무렇지 않게 밥을 먹는 모습이 아주 온화해 보였다.돌아서면서 송유정은 속으로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심서아는 다시 식탁으로 돌아왔다. 세 식구는 조용히 식사를 마쳤고 평소처럼 육민우가 설거지했다.심서아는 심지현에게 마당에서 놀고 있으라고 하고 방으로 들어갔다.“서아야, 민우 씨 괜찮은 사람 같던데 이 정도면 살아볼 만하지 않아?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어때?”송유정은 진심으로 그녀를 설득했다.심서아는 책상 위 카세트와 테이프를 바라보며 심지현과 그가 함께 있는 모습을 떠올렸다. 마음이 흔들렸지만 아버지를 생각하면 그렇게 할 수 없었다.“난 여전히 봉래성에 가고 싶어. 우리 아버지 너무 억울하게 돌아가셨어.”송유정은 한참 말이 없다가 입을 열었다.“아빠는 네가 봉래성에 가서 뭐 할 건지 직접 묻고 싶어 하셔. 매일 오후 퇴근하고 집에 계시니까 시간 될 때 와.”“알았어!”말을 마친 송유정은 카세트를 가리키며 물었다.“이게 민우 씨가 사준 카세트야?”심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어. 지현이랑 라디오도 만들었어.”송유정은 웃으며 말했다.“거봐. 민우 씨니까 라디오도 만들어 주지. 보통 남자가 라디오를 만들어 주겠어? 진짜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봐. 나 봐, 시후 씨랑 몇 년이나 사귀었는데 선물 한번 받아본 적 없어. 매번 내가 스웨터 떠 주고 반찬 가져다주고 그러잖아.”심서아는 웃으며 말했다.“시후 씨는 월급도 얼마 안 되고 시골 출신이잖아. 다 네가 그 사람 잘생겼다고 만나는 거 아니었어?”송유정은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잘생긴 걸로 따지면 누가 민우 씨를 따라가겠어? 내가 너라면 여기 남아서 민우 씨랑 잘 살겠다. 네
심서아는 멀리서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한참 후에야 정신을 차린 그녀는 부자를 방해하지 않고 조용히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 그리고 주방에 있던 작은 네모 탁자를 포도나무 아래로 옮겼다.저녁 메뉴는 고추 잡채, 멸치볶음, 감자채 볶음, 그리고 계란찜이었다.음식을 차려놓고 심지현을 보니 녀석은 쉴 새 없이 질문을 쏟아내고 있었다. 가만히 서서 불러서는 듣지 못할 것 같아 다가가는데 육민우의 어깨에 초록색 벌레가 붙어 있는 게 보였다.아마 포도나무에서 떨어진 모양이었다. 심서아는 손을 뻗어 벌레를 잡았고 인기척을 느낀 육민우는 뒤돌아보다가 심서아의 맑은 눈과 마주쳤다. 그녀는 두 손가락으로 벌레를 집어 그에게 보여주었다.“어깨에 벌레가 떨어졌어요.”마치 잘못한 일을 해명하듯 다급한 심서아의 모습에 육민우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괜찮아. 고마워!”심서아는 벌레를 던져 버리고 말했다.“지현이랑 밥 먹으러 와요. 거실은 더워서 마당에 차렸어요.”육민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심지현을 바로 부르지 않고 아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 손을 잡고 말했다.“밥 먹자!”심지현은 즉시 움직였다.심서아는 놀라 입을 살짝 벌렸다. 평소 심지현이 멍하니 있으면 몇 번씩 불러야 했는데 육민우는 한 번에 그를 움직이게 했으니 말이다.심지현은 마당에 차려진 밥상을 보더니 신나서 말했다.“와, 마당에서 밥 먹는 거 좋아요! 시원해요.”부자가 작은 나무 의자에 앉자 심서아는 담아놓은 밥과 반찬을 그들 앞에 놓았다.심서아는 계란찜을 육민우 앞으로 밀며 말했다.“이춘하가 당신에게 준 계란에서 4개로 계란찜 했어요. 나머지는 가져가세요.”육민우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무슨 뜻인지 알아차리고는 웃으며 말했다.“화났어?”“아니요!”심지현은 커다란 눈을 깜박이며 얼른 일어나더니 육민우에게 다가가 귓속말로 속삭였다.“엄마 화났어요!”심서아는 심지현의 행동을 보며 어이가 없었다. '얘가 정말 내가 힘들게 키운 애가 맞나? 겨우 며칠 만에...'엄마의
심지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하다가 말했다.“딱히 뭘 하는 건 없어요. 엄마 그림을 가져가고 돈을 주고 나랑 엄마한테 뭘 사주기도 하고, 나랑 놀아주기도 해요.”육민우가 물었다.“그럼 지현이는 희열 삼촌 좋아해?”심지현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엄마는 유정 이모랑 희열 삼촌네 식구들은 세상에서 제일 좋은 사람들이라고 했어요. 그분들이 없었으면 나랑 엄마는 여기서 살아갈 수 없었을 거라고 했거든요. 근데 이제 아빠가 있으니까 아무도 나랑 엄마한테 뭐라고 못 할 거예요.”이 말에 육민우는 가슴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자신이 없던 4년 동안 그녀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상상이 갔다. 그러니 그가 무슨 자격으로 그녀와 하희열의 사이를 의심한단 말인가.심지현은 육민우가 갑자기 침묵하자 서둘러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며 말했다.“아빠, 나는 이제 아빠도 세상에서 제일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아빠가 엄마 전화 안 받은 건 누가 방해해서 그런 거지 우릴 버린 건 아니잖아요. 그렇죠?”그 말을 들은 육민우는 놀란 눈으로 아들을 바라보다가 품에 꼭 안고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코끝이 시큰해졌다.심서아는 아들을 아주 잘 키웠다.육민우는 한참 후에야 말했다.“아빠가 책 읽어줄게.”심서아는 방에서 나오다가 육민우가 아들에게 유창한 영어로 책을 읽어주는 모습에 적잖이 놀랐다. 유학 경험도 없는데 하희열 못지않은 발음이었다.하지만 수석 입학자였다는 사실을 떠올리곤 금세 납득했다.그녀는 사 온 수박을 주방으로 가져가 썰어서 거실 탁자에 놓고는 심지현을 불렀다.“지현아, 수박 먹자!”그리고 자신도 한 조각을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심지현은 육민우의 책 읽어주는 소리에 푹 빠져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육민우가 책 읽기를 멈추고 말했다.“가서 수박 먹자.”육민우는 탁자로 가 수박 두 조각을 가져와 심지현에게 한 조각을 주었다. 결국 한 조각으로는 부족했는지 부자는 탁자에 앉아 수박을 계속해서 먹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방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