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심지현? 육민우는 잠시 멍해졌다.

심서아는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말했다.

“사과해야 할 쪽은 도영이 아닌가요? 걔가 먼저 지현이의 고래밥을 빼앗았거든요.”

엄도영은 울면서 부인했다.

“아니에요. 난 그냥 친구 하자고 과자 하나만 나눠달라고 했어요. 그런데 쟤는 주지도 않고 땅에 던져서 부숴버렸어요.”

아이들은 원래 거짓말을 잘 못 한다. 엄도영은 울면서 집에 가 할머니에게 상황을 말했고 할머니도 자기 손자가 잘못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저녁에 아이 엄마는 이 말을 듣더니 펄쩍 뛰었다. 그녀 생각에 심서아 모자는 죄인처럼 숨죽이고 살면서 주변 사람들 비위나 맞춰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깟 과자 몇 개 때문에 감히 자기 아들에게 손을 대다니.

그래서 그녀는 밤늦도록 아들에게 거짓말하는 법을 가르쳤다. 어차피 심씨 집안이 저지른 일 때문에 분개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자기 아들이 조금이라도 유리한 입장에 서면 그들 모자는 사람들의 비난을 견디지 못할 터였다.

심지현은 그 말을 듣자마자 고개를 돌려 큰 소리로 반박했다.

“거짓말쟁이!”

“내가 뭘 거짓말했는데? 땅에 네가 부순 과자 아직도 있잖아?”

엄도영은 말하면서 땅을 가리켰다.

사람들이 그가 가리키는 쪽을 바라보니 과연 바닥에 과자 부스러기가 흩어져 있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애도 참 버릇없어.”

“저렇게 어린 게 어떻게 저리도 심술이 많아? 어떻게 남 주기 싫다고 부셔버리냐.”

화가 난 심지현은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반박하려고 했다. 하지만 사람이 너무 많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를 안고 있던 남자는 심지현의 몸이 떨리는 것을 느끼고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심서아는 침착하게 제자리에 서서 담담하게 말했다.

“고래밥은 우리 아들 거예요. 그가 버리든 나눠 주든 그건 아들의 권리죠. 왜 우리 애가 도영이에게 과자를 안 줬는지 묻는 사람은 없나요?”

“왜 안 줬는데?”

“도영이가 우리 아들 손에 있던 걸 빼앗았을 뿐만 아니라 잡종이라고 욕까지 했어요.”

심서아는 그 말을 하며 순간 가슴이 꽉 막히는 듯했지만 이내 말을 이었다.

“누가 버릇없는 거죠?”

엄도영의 어머니는 심서아가 그렇게 말대꾸를 할 줄 몰랐는지 비꼬듯이 말했다.

“육 씨 집안에서 인정도 안 하는데 잡종이 아니고 뭐야? 아직 이혼도 안 했으면서 뻔뻔하게 외간 남자를 집에 데려오고 우리한테 버릇을 운운해? 우리 도영이는 제대로 된 집안에서 태어나 엄마 아빠한테 교육도 잘 받았고 뭘 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지 잘 알아.”

그녀는 원래는 심지현을 안고 있는 남자도 욕하려고 했지만 그 남자의 고급스러운 옷차림과 손목시계, 그리고 뒤에 있는 차를 보니 범상치 않아 보여서 심서아에게만 공격을 집중했다. 심지현은 아빠 없이 자란 아이라는 걸 비꼰 것이다.

참으로 악독한 말이었다.

하희열은 눈살을 찌푸리며 심지현을 더 꽉 안고 엄도영의 어머니에게 말했다.

“아줌마, 뚫린 입이라고 말 함부로 하시면 안 됩니다. 외간 남자니 뭐니 하는데, 증거 있어요? 아줌마가 남편 빼고 만나는 남자들은 다 외간 남자예요? 한 번만 더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아줌마 회사에 찾아가서 상사에게 따질 겁니다.”

엄도영의 어머니는 기가 막혀 숨을 들이켰다. 이 남자가 감히 큰소리치다니. 그녀는 욕설을 퍼부었다.

“지현이가 잡종이 아니면 윤씨 집안에서 얘네 모자를 내쫓았겠어? 이건 이 동네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이야. 무슨 오해가 있었으면 애 아빠가 진작 나서서 해명했겠지, 네놈 같은 게 왜 나서서 설쳐?”

“누가 지현이가 잡종이래요? 지현이는 내 아들입니다.”

낮고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사람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육민우는 심지현을 안고 있는 하희열을 흘끗 보고는 차가운 시선으로 엄도영의 어머니를 쏘아보았다.

“내가 육민우이고 심지현의 아빠입니다!”

심서아는 익숙한 목소리와 그 말에 몸이 굳었다.고개를 들자 남자의 뒷모습만 보였다.

이 동네 사람들은 육민우를 직접 본 적은 없어도 그의 이름은 알고 있었다. 도내 수석에 국가 중점 연구 프로젝트의 일급 연구원인 그가 직접 나서서 인정하자 더 이상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육민우는 사람들이 조용해지자 주머니에서 사탕 한 줌을 꺼내 엄도영 앞으로 다가가 쪼그려 앉아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도영이가 사실대로 말하면 아저씨가 아줌마가 혼내지 못 하게 말려줄게． 그리고 이 사탕도 다 줄게.”

네 살짜리 아이가 그런 유혹을 견딜 수 있을 리 없었다. 엄두영은 앞에 앉아 있는 잘생기고 다정한 아저씨를 보며 말했다.

“내가 지현이의 과자 뺏었어요! 그리고 욕도 했어요.”

그 말이 끝나자마자 사람들은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육민우는 손에 들고 있던 사탕을 엄두영에게 건넸다.

사탕은 버스를 타기 전에 백화점에서 산 것이었다. 그리고 작은 장난감도 하나 샀다. 아이를 처음 만나는 자리라 선물을 준비했던 것이다.

사탕을 받아든 엄두영은 엄마의 매서운 눈초리를 느끼자마자 몸을 돌려 순식간에 사라졌다.

“세상에. 도영이가 몇 살인데 벌써 거짓말을 해.”

“그것도 저렇게 심한 욕을 말이야. 분명 어른이 시켰을 거야!”

“진짜 너무한다.”

“지현이가 정말로 육민우의 아이였구나!”

“육 씨 집안도 너무했어. 아들 없는 틈을 타서 그런 악독한 이유로 며느리를 내쫓다니, 정말 너무해.”

“나는 육민우를 오늘 처음 봤는데, 잘생기긴 했네. 앵두 같은 입술에 하얀 피부, 정말 잘생겼어.”

모든 일이 너무 빨리 일어났다. 엄도영의 어머니가 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엄도영은 이미 그녀를 배신했다.

그녀는 붉으락푸르락해서 심서아에게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미안해. 얘가 날 속일 줄은 몰랐어. 집에 가서 따끔하게 혼낼게.”

그러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치듯 사라졌다.

사람들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육민우를 쳐다보았다.

육민우가 몸을 돌려서야 심서아는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파란색 작업복은 그의 늘씬한 몸매를 더욱 돋보이게 했고 맑고 잘생긴 얼굴은 예전 그대로였다.

심서아는 4년 전의 앳된 모습은 벗어버리고 갸름해진 턱선과 또렷한 이목구비로 더욱 아름다워져 있었다. 육민우를 보자 그녀의 검은 눈동자가 커졌다가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바람에 흩날리는 잔머리가 그녀의 도톰한 입술을 스쳤다. 심서아는 가느다란 손으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육민우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들어와서 얘기해요.”

심지현을 안고 있던 남자의 눈에 감탄이 스치더니 아이를 내려놓고 심서아에게 말했다.

“그럼 두 사람 얘기해. 나 먼저 갈게.”

그러고는 심지현에게도 말했다.

“삼촌이 다음에 또 보러 올게.”

심서아는 고개를 끄덕였고 심지현은 남자에게 손을 흔들며 작별 인사를 했다.

심지현은 육민우를 다시 한번 쳐다보았다. 이 아저씨는 왠지 친근하고 똑똑해 보였다. 단번에 엄도영더러 잘못을 인정하게 했으니까.

하지만 엄마는 이 아저씨가 그다지 반갑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는 육민우에게 살짝 미소를 짓고는 심서아의 옆으로 달려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집 안으로 들어가자 심서아는 그에게 자리를 권한 뒤, 뒷마당으로 갔다.

육민우는 하얀 페인트가 칠해진 깨끗한 나무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그는 고개를 들어 거실을 둘러보았다. 거실의 배치는 예전 교수님이 계실 때와 달랐다. 예전에는 간결하고 소박했던 거실이 이제는 따뜻하고 우아한 분위기였다.

연두색 TV 장식장 위에는 14인치 흑백 TV가 놓여 있었고 탁자에는 파란색과 흰색이 교차된 체크 무늬 식탁보가 깔려 있었다. 식탁보 위에는 투명한 유리 꽃병이 놓여 있었는데 꽃병 안에는 연하늘색 수국이 꽂혀 있었다.

하얀 식탁은 티끌 하나 없이 깨끗했고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은 고요하고 편안한 느낌을 주었다.

육민우는 이런 모습을 보고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다행히 그녀는 지난 몇 년간 잘 지낸 것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심서아가 다시 나왔을 때 손에는 물잔이 들려있었다. 그녀는 육민우에게 잔을 건네주며 말했다.

“집에 커피가 없네요. 그냥 드세요.”

육민우는 물을 받으며 말했다.

“고마워.”

심서아는 그의 방문 목적을 짐작했는지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

“아버지께서 그런 결정을 내리신 것에 대해 사과드려요. 저희가 너무 이기적이었어요. 그리고 오늘 지현이를 인정해줘서 고마워요.”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명확한 거리감과 차가움이 느껴졌다.

육민우는 그날 밤 그녀가 이런 모습이 아니었던 것을 기억했다. 심지어 그녀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서아야. 미안해야 할 사람은 나야. 지현이를 보자마자 난 내 아이라는 걸 알았어. 그동안 많이 힘들었겠다.”

이 말을 하는 육민우의 마음은 떨리고 있었다.

심서아는 눈을 내리깔고 한참 뒤에 입을 열었다.

“다 지난 일이에요.”

그녀와 육민우는 사실 할 말이 별로 없었다. 예전에 육민우가 그녀의 집에 오면 밥을 먹거나 아버지와 학문이나 연구에 관해 이야기했을 뿐, 그녀와는 몇 마디 나누지 않았다.

어색한 침묵이 흐르자 육민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부모님 대신 사과할게. 일이 확정되면 부모님은 시골 집으로 돌아가라고 할 거야. 그럼 너와 지현이는 다시 집에 돌아와.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할게.”

육민우는 심서아의 태도를 충분히 이해했다. 자신이 그녀에게 잘못했으니까.

온갖 수모를 겪으며 심서아의 자존심은 무너졌고 마음은 메말라 버렸다.

“사실 지금 이대로도 좋아요. 우리는 이제 서로에게 아무런 빚도 없으니 이제 그만 서로를 놓아주도록 하죠. 지현이가 곧 유치원에 갈 나이인데 호적 정리되면 우리 이혼해요.”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고 심지어 타협하려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육민우는 그 말을 듣고 가슴이 답답해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는 문 뒤에 숨어 자신을 엿보는 심지현을 보고 마음이 움직여 말했다.

“지현이를 내 호적에 올려. 그럼 연구소 부설 유치원에 무료로 다닐 수 있어.”

심서아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지현이는 심 씨 에요.”

육민우는 침묵했다. 그는 심지현에게 육씨 성을 따르라고 할 자격이 없었다. 그는 아이가 태어난 날조차 몰랐고 하루도 돌봐준 적이 없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하지만 이혼은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