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심서아는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봉래성에 가려면 통행증이 필요한데 네 아빠한테 부탁 좀 해보려고.”

당시 봉래성은 통행증 정책을 시행하고 있었는데 통행증을 발급받으려면 동사무소 심사, 파출소 확인, 경찰서 발급 등 세 단계를 거쳐야 했다.

그리고 송유정의 아버지는 마침 이곳 동사무소 동장이었다.

이때 씻어온 포도를 탁자에 내려놓던 송유정의 어머니가 그들의 말을 듣고는 단호하게 반대했다.

“민우가 이제 막 돌아왔잖아. 지금 그의 신분이면 연구소에서 얼마나 인기 있는지 알아? 고생 끝에 낙이 온 건데 봉래성에는 왜 가겠다는 거야? 도대체 무슨 생각 하는 거니?”

하선희는 줄곧 심서아를 딸처럼 아꼈다. 특히 이런 일이 있고 나서는 더 마음이 쓰였다.

심서아의 시무룩한 표정을 보자 그녀는 다시 말했다.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 다 잘될 거야. 민우가 지현이를 인정했으니 곧 소문도 잠잠해질 거고. 지금 제일 중요한 건 민우의 마음을 잡는 거야.”

심서아가 말했다.

“아빠의 억울함을 풀어드려야 해요.”

사실 육민우의 마음을 잡으라는 말에도 심서아는 자신이 없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소꿉친구가 있었으니까. 다만 송유정의 어머니 같은 어른들의 생각에는 육민우의 마음이 누구에게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그가 누구의 남편인지, 가족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인지였다.

심서아의 말에 하선희는 마음이 무거워져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이미 지난 일이야. 우리는 너희 아버지와 오랫동안 알고 지냈는데 그분은 그럴 사람이 아니야. 아마 하늘에서도 너를 이해해 주실 거다.”

심서아는 하선희를 설득하는 것은 어렵다고 판단하고 말을 멈췄다. 차라리 심지현의 호적을 받고 나서 송유정을 설득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하선희는 주방에서 끓이고 있는 국이 생각나 더 이상 얘기하지 않고 말했다.

“이제 밥 다 됐다. 지현이가 좋아하는 생선조림도 했으니 밥 먹자.”

하선희가 나가자 송유정이 심서아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서아야, 우리 엄마 말씀도 일리가 있어. 잘 생각해 봐.”

심서아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송유정의 집에서 저녁을 먹고 심서아는 쇼핑백을 들고 심지현을 데리고 집으로 향했다. 어둑해진 하늘에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낮의 더위가 가시듯 심서아의 답답한 마음도 조금은 풀리는 듯했다.

그녀는 하늘에 희미하게 떠 있는 반달을 바라보았다. 어릴 적 아버지는 이 길을 따라 손을 잡고 걸으며 온갖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심서아의 발걸음이 느려진 것을 느낀 심지현은 고개를 들고 눈을 깜빡이며 그녀를 올려다보더니 잡은 손을 흔들었다.

“엄마, 나한테 이야기해 주려고 그래요?”

심서아는 생각에서 깨어나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맞아. 그럼 엄마가 엄지 공주 이야기해 줄까?”

“좋아요!”

“옛날 옛적에...”

심지현은 이야기를 들으며 궁금한 것을 묻기도 했다...

육민우는 퇴근하고 바로 심서아의 집으로 왔다. 하지만 문은 잠겨있어서 그는 집 앞 돌의자에 앉아 오랫동안 기다렸다.

그가 다시 둘러보니 키가 크고 날씬한 여자가 파란색 원피스를 입고 아이에게 다정하게 이야기를 들려주며 오고 있었다. 아이도 가끔 고개를 들고 엄마와 말하며 웃고 있었다.

달빛은 희미했지만 육민우는 모자 사이에 흐르는 따스하고 평화로운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보아하니 그들은 자신이 없어도 행복해 보였다.

허탈감인지 안도감인지 알 수 없는 심경이었다.

점점 가까워지는 소리에 육민우는 불안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눈에 그를 알아본 심지현은 심서아의 손을 잡고 멈춰서서 작고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사람이 왔어요.”

심서아는 심지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육민우에게 다가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왔어요?”

육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

심서아는 심지현의 손을 잡고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 육민우는 그녀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갔다.

육민우는 처음 왔을 때처럼 하얀 나무 의자에 앉았다.

“증명서는 썼어. 출생 증명서에 있는 서명은 주민등록증을 가지고 병원에 가서 확인받고 도장을 받아야 한다면서?”

“네, 주말에 가요.”

원래는 육민우가 증명서를 쓰고 상사의 서명을 받아 병원에 보내면 됐었다. 하지만 육 씨네 식구들이 심서아의 배 속 아이를 사생아라고 우기고 또 육민우에게 전화해도 받지 않는 바람에 심지현은 출생신고를 할 수 없었다.

“그래!”

육민우는 대답하고 나서 소파 위에 놓인 쇼핑백에서 흘러나온 옷과 장난감에 시선을 던졌다.

옷에는 가격표가 붙어 있었다. 오늘 산 게 분명한데, 한 벌도 아니었다. 저렇게 많이 샀는데 돈은 남아있을까?

생각하다가 육민우는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심서아에게 건넸다.

“오늘 받은 월급이야. 안에 7만 원이 있어.”

만 육천 원은 부모님께 드리고 4천 원은 그의 용돈으로 남겼다.

심서아는 잠시 놀랐지만, 곧 돈을 받았다.

“알겠어요.”

그가 심지현을 자신의 아이로 인정했으니 양육비를 주는 것은 당연했다.

심서아는 육민우를 쳐다보았다. 여전히 파란색 작업복에 녹색 운동화 차림이었는데 정말 검소했다. 역시 소꿉친구가 그를 잘 아는 것 같았다.

육민우는 다시 심지현을 바라보았다. 아이는 좋은 옷에 좋은 음식을 먹이며 잘 키운 티가 났다. 입고 있는 옷은 그가 처음 보는 디자인이었는데 이 동네 아이들은 이렇게 입지 않았다. 흰 티셔츠에 헐렁한 7부 길이의 흑백 체크 무늬 바지 차림은 꼭 텔레비전에 나오는 아역 배우 같았다.

육민우는 주머니에서 사탕 한 봉지를 꺼내며 심지현에게 말했다.

“아빠한테 오렴.”

심지현은 사탕을 쳐다보며 눈을 반짝였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심서아는 육민우가 방금 준 돈을 떠올리며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심지현은 그의 아들이니까...

그녀는 거실을 나와 주방으로 가서 차를 한 잔 우려냈다.

심지현은 잠시 망설이다가 두 발짝 다가가 뾰로통하게 말했다.

“안 먹어요.”

분명 아빠이면서 이제야 나타나서 그동안 엄마를 힘들게 했으니까.

육민우도 개의치 않고 사탕을 소파에 놓고는 쇼핑백에서 흘러나온 큐브를 꺼내 들었다.

그가 큐브를 몇 번 돌리자 심지현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심지현은 그저 각 면의 색깔을 맞추는 것만 할 줄 알았는데 육민우는 테두리는 같은 색이고 중간은 색깔이 다르게 맞출 수 있었다. 그러고는 네 번 만에 다시 처음 상태로 돌려놓았다.

너무 빨라서 심지현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육민우는 심지현의 표정을 보고 웃으며 물었다.

“아빠가 가르쳐 줄까?”

심지현은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가 곧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엄마는 내가 제일 똑똑하다고 했어요.”

육민우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의 손에 큐브를 쥐여 주었다.

“그럼 오늘 한번 해봐. 아빠는 내일 다시 올게.”

육민우는 뒷마당으로 갔다. 심서아는 포도나무 옆의 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녀는 남자가 오는 것을 보고 일어서서 담담하게 물었다.

“무슨 일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