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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사랑 일기
80년대 사랑 일기
작가: 오렌지보리

제1화

작가: 오렌지보리
last update 최신 업데이트: 2024-12-23 19:05:55
“연구개발부서 육민우 씨 좀 바꿔주시겠어요? 가족인데, 급한 일이 있어서요.”

심서아는 정중하면서도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육 연구원님은 지금 바쁘셔서 통화가 어렵습니다.”

일 분쯤 지나 대답과 함께 뚝 하고 전화가 끊겼다.

심서아는 멍하니 있다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4년 전 그녀는 육민우와 짧은 만남을 가졌다. 그 후 그는 연구소로 갔고, 두 달 뒤 그녀는 아들을 임신했다. 하지만 육민우와 연락이 닿지 않아 그녀는 시댁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쫓겨났고, 결국 아버지가 남겨주신 낡은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4년 동안 뒤따르는 쑥덕거림은 끊이지 않았다.

혼자 아이를 낳고 기르며 힘든 시간을 견뎌왔기에 그녀는 남들의 시선은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심지현의 입학만큼은 미룰 수 없었다. 호적 없는 아이는 학교에 갈 수 없기 때문이었다.

다시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을 것 같아 심서아는 체념한 듯 돈을 내고 집으로 향했다.

두어 걸음 떼자마자 뒤에서 교환원 두 명의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매번 와도 남자가 전화 안 받는다며? 애가 남편 애가 아니라잖아. 쯧쯧, 낯짝도 두껍지.”

“그러게 말이야. 교수 딸이라던데, 옷차림은 왜 저렇게 야해? 집에 남자들이 들락날락한다더니, 본인도 누구 앤지 모르는 거 아니야?”

심서아는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돌아섰다. 날카로운 눈빛으로 두 여자를 쏘아보자, 교환원들은 흠칫 놀라 입을 다물고 움츠러들었다. 심서아는 매서운 눈초리로 그녀들을 노려본 후 우체국을 나섰다.

낡고 허름한 동네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니 아들 심지현은 낮잠에서 깨어 포도나무 아래 얌전히 앉아 있었다. 엄마의 말을 잘 듣는 심지현은 엄마가 없어도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무더운 날씨에 그의 하얀 얼굴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나가기 전에 시원하게 내놓았던 식혜도 다 식어있었다.

그녀는 한잔을 따라 마시면서 부드럽게 물었다.

“지현아, 식혜 좀 마실래? 시원한데.”

심지현은 부모의 장점만 물려받아 예쁜 아이였다. 그는 긴 속눈썹에 크고 검은 눈으로 포도 넝쿨만 쳐다보고 있을 뿐, 엄마 말에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 심서아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아이가 마시고 싶으면 스스로 말하겠지.

식혜를 마신 뒤, 그녀는 주방에서 수건을 가져와 아들 얼굴의 땀을 닦아주었다.

사랑스러운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는 심서아의 눈빛은 애틋하면서도 단호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빠른 시일 내에 육민우를 만나야 한다.

그때, 송유정이 문을 두드리며 활기찬 목소리로 말했다.

“서아야, 민우 씨가 돌아온대! 방금 회사에서 들었어.”

심서아는 순간 멍해졌다가 씁쓸하게 웃었다. 연락이 닿지 않는 남편의 발령 소식을 남의 입을 통해 알게 되다니.. 차라리 잘됐다. 아들을 데리고 연구소까지 찾아갈 생각이었는데 수고를 덜게 됐으니 말이다.

그녀는 담담하게 말했다.

“알았어. 와서 알려줘서 고마워.”

송유정은 그녀의 반응에 답답한 듯 목소리를 높였다.

“이번에 그자가 돌아오면 확실히 말해줘야 해. 지현이가 그의 자식이라는 걸 밝혀야지.밖에서 말들이 얼마나 많은데. 너희 둘도 이렇게 계속 억울하게 살 순 없잖아. 지현이 좀 봐. 얼마나 숫기가 없는지, 친구도 없잖아.”

아들 이야기가 나오자 심서아의 얼굴에 비로소 미소가 번졌다.

“지현이는 내성적인 게 아니라 생각이 많은 거야.”

사실 심서아는 육민우가 돌아오지 않는 것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의 신분과 직업은 특별했다. 게다가 과거 아버지는 모함을 받아 좌천된 상황에서 그에게 이미 소꿉친구인 정혼자가 있음을 알면서도 사제의 정을 내세워 가장 뛰어나고 장래가 유망한 제자에게 자기 딸과 결혼해달라고 강요했었다.

그녀는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항상 자신에게 최선을 다했으니까.

육민우는 도내 수석으로 아버지의 제자가 된 수재였다. 차갑지만 잘생긴 외모에 188cm의 큰 키를 가진 그는 비록 시골 출신이었지만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겼다. 그를 본 여자들 중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이는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늘 고향에 정혼자가 있다며 모든 여자의 마음을 거절하고 학업에만 몰두했다.

하지만 지현이 만큼은 달랐다. 그녀는 자신이 받는 억울함은 삼킬 수 있었지만 아들이 받는 설움은 견딜 수 없었다. 아직 어리고 순한 아이가 무슨 죄로 밖에 나갈 때마다 주변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아야 한단 말인가.

육민우가 협박에 못 이겨 자신과 결혼한 것은 맞지만, 부부 관계를 맺은 것은 그의 의지였다. 아이를 임신했을 때도 그에게 여러 번 전화를 걸었다. 그의 부모님께 지현이가 그의 아이임을 증명해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매번 돌아오는 것은 차가운 교환원의 목소리였다.

“육민우 씨는 지금 시간이 없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바로 끊겼다.

심서아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전화 몇 분 받을 시간도 없었을까? 아니면 일이 끝난 뒤에 연락해주려고 했던 걸까? 하지만 그는 끝내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았다.

심서아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육민우는 정말로 그녀에게 아무런 애정도 없는 게 분명했다. 게다가 그의 가족과 옛 정혼자였던 진하연이 여전히 가깝게 지낸다는 소문도 들렸다. 이는 결국 육민우 본인도 그러한 상황을 묵인하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그녀는 마음을 접었다. 육민우가 이번에 돌아와서 심지현의 출생신고와 호적만 해결해준다면 그녀는 절대 그를 붙잡지 않고 자유롭게 해줄 생각이었다.

송유정은 안타까워하며 말했다.

“서아야, 민우 씨는 이번에 돌아오면 오랫동안 있을 거래. 이 기회에 그 사람이랑 잘 지내봐. 네 미모면 충분해.”

송유정은 어릴 때부터 친한 친구였다. 심서아는 동네에서 소문난 미인이었고 그녀를 좋아하는 남자들도 줄을 섰지만, 육민우만은 그녀를 외면했다.

심서아는 친구의 진심 어린 걱정을 알고 옅은 미소로 답했다.

“항상 날 생각해줘서 고마워. 하지만 난 지현이의 존재를 인정받고 우리 모자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기만 하면 그를 놓아줄 생각이야.”

송유정은 놀란 눈으로 소리쳤다.

“너 제정신이야?”

심 교수에게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이곳에서 무사히 지낼 수 있었던 건, 명목상의 남편이었던 육민우의 역할이 없지 않았다.

사람들이 쑥덕거리고 손가락질해도 대놓고 괴롭히지는 못했다. 심서아는 여전히 육민우의 아내였으니까.

심서아가 무슨 말을 하려는 순간, 심지현이 뛰어와 그녀의 손을 잡고 까만 눈을 반짝이며 진지하게 물었다.

“엄마, 포도를 아무리 오래 봐도 변하는 게 없어요. 우리가 잠들어야 몰래 자라는 거예요?”

심서아는 심지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웃었다.

“그래. 지현이가 다른 거하고 놀고 있으면 며칠 뒤에 포도가 쑥쑥 클 거야.”

송유정도 심지현을 예뻐했다. 앵두 같은 입술, 새하얀 피부, 크고 진한 눈썹과 눈, 게다가 순한 성격까지. 얼마나 사랑스러운 아이인가. 그녀는 가방에서 차림의 여자가 무릎 꿇고 앉아 부채질을 해주고 있었다. 고래밥 한 봉지를 꺼내 심지현에게 건넸다.

“자, 이거 먹어.”

심지현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이모!”

고래밥을 받은 심지현은 종종걸음으로 문턱에 다가가 앉아 과자 한 조각을 꺼내 조심스럽게 한 입 베어 물었다.

고소하고 바삭한 과자 맛에 심지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하지만 한창 신나게 먹고 있던 심지현의 손에 들고 있던 봉지가 사라졌다. 그는 곧 경계심을 갖고 벌떡 일어섰다.

엄도영은 고래밥 봉지를 들고 심지현을 도발하며 말했다.

“심지현, 이 과자 나 줘. 그럼 너랑 놀아줄게. 그리고 다시는 너 잡종이라고 안 부를게.”

심지현의 얼굴이 분노로 붉게 달아올랐다.

“너랑 안 놀아! 과자 내놔!”

그는 달려들어 과자를 뺏으려 했다.

하지만 엄도영보다 한 살 어리고 힘도 약했던 심지현은 몇 번 밀치다가 넘어지고 말았다.

심지현은 아파서 눈가가 붉어졌지만 이를 악물고 아무 말 없이 다시 일어섰다.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땅에서 작은 돌멩이를 주워 엄도영의 고래밥을 든 손을 향해 던졌다.

고래밥은 땅에 흩어졌고 엄도영도 앵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심지현은 이내 달려가서 떨어진 과자를 발로 밟아 부수고 남은 과자를 주워들고 집으로 뛰어갔다.

심서아는 눈가가 빨개져 옷에 흙이 묻어있는 심지현을 보고 깜짝 놀라며 쪼그리고 앉아 물었다.

“지현아, 무슨 일이야?”

심지현은 고개를 숙인 채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엄도영이 내 과자를 뺏고 나를 밀었어요. 그래서 돌멩이로 때려서 울렸어요.”

그는 엄도영의 어머니가 곧 엄마에게 찾아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도영이가 먼저 그랬어?”

심서아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심지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난 밖에 나가서 안 놀았어요!”

심서아는 아들을 품에 꼭 안아주었다.

“잘했어.”

송유정은 고개를 저으며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그냥 돌아섰다.

“나 먼저 갈게. 오늘 한 말 잘 생각해 봐.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찾아오고.”

송유정이 돌아간 후, 심서아는 더 이상 그 일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심지현을 포도나무 옆 그네에 앉히며 말했다.

“지현아, 혼자 잠깐 놀고 있어. 엄마가 맛있는 저녁 만들어 줄게. 오늘은 생선조림이야!”

말을 마치고 그녀는 심지현의 손에 들린 고래밥을 가져가더니 몇 개를 꺼내 주었다.

“많이 먹으면 안 돼. 이것만 먹어.”

송지현은 과자를 받아들고 그네에 앉아 먹기 시작했다.

...

임성 연구기지 숙소에서 육민우는 짐을 싸고 있었다. 함께 돌아갈 동료는 그의 조급한 모습을 보고 웃으며 물었다.

“뭐야? 집사람이 보고 싶은 거야?”

“어.”

육민우는 입술을 오므렸다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4년 동안 그녀는 어떻게 지냈을지, 보낸 편지에도 답장은 없었다. 임종 전 스승님의 간곡한 부탁이 떠올라 그의 마음은 죄책감으로 무거워졌다.

“어서 가자! 차가 기다리고 있어!”

동료가 육민우의 어깨를 두드렸다.

10시간의 긴 여정 끝에 밤 9시가 되어서야 육민우는 연구소 사택 단지에 도착했다. 이미 대부분의 사람은 잠자리에 들었는지 길거리에는 인적이 드물었다. 혹시 그녀도 자고 있을까 하는 생각에 그의 마음은 조바심으로 가득했다.

발걸음이 빨라졌다. 집 앞에 도착한 육민우는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문을 두드렸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누구세요?”

집 안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육민우는 문을 두드리던 손을 멈췄다. 잠시 후, 어디서 들어본 듯한 목소리에 그는 그제야 다시 두 번 문을 두드렸다.

집 안의 불이 갑자기 켜지고 누군가 문으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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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서아는 거울 속 자신을 보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점원은 눈빛을 반짝이며 성공을 직감하고 다가와 상냥하게 물었다.“그럼 지금 입고 있는 이 옷으로 하시겠어요?”심서아는 곧바로 결정을 내리지 않고 물었다.“이 세 벌 가격이 얼마죠?”“지금 입고 있는 건 만 오천 원으로 조금 더 비싸고요, 나머지 두 벌은 각각 만 사천 원, 만 삼천 원입니다.”점원은 열정적으로 설명했다.어느 것 하나 저렴하지 않은 가격이었다. 진하연은 심서아가 어떤 옷을 고를지 궁금해하며 한 걸음씩 다가갔다.그런데 심서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다 포장해 주세요.”점원은 그다지 놀라지 않은 듯 재빨리 천 주머니를 찾아 옷을 담았다.진하연은 순간 걸음을 멈췄다. 속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육민우는 옷이 색이 바랠 때까지 새 옷을 사 입지 않는데 이 여자는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이렇게 비싼 옷을 한꺼번에 사다니.육민우는 1급 공무원 월급으로 한 달에 9만 원을 받는데 매월 4천 원만 남기고 나머지는 어김없이 집으로 보냈다.심서아는 옷값을 치르고 점원이 건네준 옷을 받아들었다. 그러고는 얌전히 막대사탕을 먹고 있던 심지현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자, 이제 지현이 걸 살 차례야.”엄마 목소리를 들은 심지현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서 쪼르르 내려와 심서아의 손을 잡았다.두 사람이 막 떠나려는데 누군가 길을 막아섰다.심서아는 진하연을 흘끗 보고 고개를 살짝 끄덕인 후 심지현의 손을 잡고 지나치려 했다.육민우의 소꿉친구인 진하연을 심서아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육민우의 가족들과도 스스럼없이 잘 지내고 고등학교 때부터 육민우와 늘 함께였다고 들었다. 게다가 대학에 가서 육민우는 모두에게 두 사람의 관계를 공식적으로 발표까지 했었다.그런데 정작 자신과 혼인신고를 한 사실은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그랬기에 육 씨 사람들은 심지현이 두 달 일찍 생겼다는 이유로 모두의 앞에서 자신을 미혼모 취급했던 것이다. “심서아 씨, 민우는 기지에 있을 때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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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0년대 사랑 일기   제7화

    육민우는 입술을 오므렸다.“이제 가려고. 말하려고 왔어.”“네, 조심히 가세요.”심서아는 공손하게 말했다.육민우는 심서아의 관심 어린 말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자신을 걱정하는 걸까? 그는 망설이다가 말했다.“내일 지현이 보러 다시 올게.”“네, 사탕은 너무 많이 사 오지 마세요. 이에 안 좋아요.”그러고는 한마디 덧붙였다.“과일을 사 오는 건 괜찮아요. 지현이는 바나나를 좋아해요.”육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내심 심지현이 자신을 빨리 받아들여 주길 바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심서아는 부모님에게 쫓겨난 분풀이를 자신에게 하거나 아이를 이용해 복수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그런 심서아가 너무 고마웠다.육민우는 나가는 길에 소파에 앉아 큐브에 열중하는 아들을 보았다. 발걸음을 멈췄지만, 결국 방해하지 않고 나갔다.육민우는 기분 좋게 집을 나섰다.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가는 길에 집 생각을 하니 갑자기 집에 가기 싫어졌다.그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소진성의 집으로 향했다.소진성은 육민우의 동료였다. 임성에 가기 전부터 두 사람은 죽이 잘 맞았고 이번에 돌아오자 소진성이 먼저 살갑게 대해 줬다.소진성의 집 앞에 도착한 육민우는 문을 두드렸다. 문이 열렸고 소진성은 그를 보고 매우 반가워하며 얼른 집 안으로 안내했다. 그리고는 미안한 듯이 말했다.“미안해. 집이 좀 엉망이지?”소진성은 의자를 잡아당겨 자리를 권했다.육민우는 집 안을 둘러보았다. 길게 늘어뜨린 빨랫줄에는 아이 기저귀가 가득 걸려 있었다.소진성의 집은 육민우의 집보다 작은 15평 남짓이었다. 그래서 원래도 좁은 거실이 기저귀 때문에 더 비좁아 보였다.“괜찮아. 제수씨 출산했어?”소진성은 손으로 잔다는 시늉을 했다.“아이랑 금방 잠들었어.”그리고는 기쁜 얼굴로 말했다.“2주만 일찍 왔어도 우리 애 백일잔치에 왔을 텐데.”소진성은 육민우에게 물을 한 잔 따라 주었다. 육민우는 미안한 듯이 말했다.“축의금은 다음에 줄게.”소진성은 웃으며 말했다.“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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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0년대 사랑 일기   제8화

    육민우는 그제야 진정하고 이마의 땀을 닦았다. 그러고는 아무 말 없이 육민범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쾅 닫았다.가방을 열어 신분증을 찾으려다 보니 가방 안은 이미 뒤져져 있었다.남은 돈은 모두 없어졌지만, 다행히 편지와 출금전표는 그대로 있었다.육민우는 침대에 힘없이 앉아 지난날을 떠올리며 깊은 절망에 빠졌다.어릴 적 그는 형과 성적이 비슷했고 오히려 형보다 뛰어난 면도 있었다. 하지만 말주변이 없고 사교성이 부족했던 탓에 집에서 사랑받지 못했고 학교에서 돌아오면 늘 농사일만 해야 했다.중학교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농사일에서 해방되자 그의 성적은 눈에 띄게 올랐고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다. 그런데 부모님은 두 아이 학비를 댈 수 없고 농사일할 사람도 필요하다며 육민우를 학교에서 빼냈다. 중학교 땐 분명 형보다 성적이 좋았는데, 왜 자신이 학교를 그만둬야 했는지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육민우는 어머니께 따져 물었지만 어머니의 대답은 납득하기 어려웠다.“형은 장남이잖니. 나중에 나랑 아빠는 네 형이 먹여 살려야지.”육민우도 자신이 부모님을 모시겠다고 했지만 거절당했다.3학년 개학한 지 며칠이 지났을 때 교장 선생님이 논에서 진흙투성이가 된 육민우를 찾아냈다.교장 선생님은 육민우를 데리고 집으로 가서 전혜자 부부를 설득했다.“이제 중3인데, 1년만 더 다니면 고등학교 시험 볼 수 있어요. 학교에서 학비는 면제해 줄 테니 집에서는 생활비랑 교재비만 부담해 주시면 돼요.”개교 이래 이렇게 뛰어난 학생은 처음이었다.형은 같은 중학교에 다녔지만, 작년에 고등학교 시험에 떨어져 재수하고 있었다.전혜자는 교재비도 없다며 단칼에 거절했다.둘째 아들은 말수는 적었지만 일은 똑 부러지게 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어른들보다도 일을 더 잘했고 시키는 대로도 잘했다.인재를 아끼는 교장 선생님은 밤늦게 군청에 가서 부탁해 신문에 작은 기사를 냈다. 흔치 않은 기회라 다섯 명 학생의 사연을 함께 실었다.그렇게 그해 육민우는 후원과 편지를 받았다.모두 30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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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0년대 사랑 일기   제9화

    심서아는 육민우에게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저녁 드셨어요?”“아니.”심서아는 긴장한 아들을 바라보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가서 아빠랑 놀아.”심지현은 눈치가 빠른 아이여서 처음부터 엄마가 아빠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솔직히 육민우를 너무 좋아하지 않았다면 심지현은 절대 그를 상대하지도 않았을 것이다.육민우는 심지현을 자기 아들로 인정하고 양육비도 지급했으니 자신의 사소한 감정 때문에 아이를 힘들게 할 이유는 없었다.부자는 심서아의 말에 똑같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특히 육민우는 눈가가 붉어지기까지 했다. 심서아는 말을 마치고 주방으로 돌아가 감자를 마저 볶고 고추 잡채도 만들었다.평소 심지현과 둘이 있을 때는 두 가지 반찬으로 식사를 했지만 오늘은 육민우가 왔으니 반찬을 하나 더 추가해야 했다.예전에 육민우가 아버지와 함께 집에 와서 식사할 때면 밥을 많이 먹었던 기억이 났다. 그래서 가지무침도 만들었다.30분쯤 지나자 모든 요리가 완성되었다.심서아가 거실에 음식을 가져다 놓으려고 할 때, 심지현의 감탄사가 들려왔다.“와! 이렇게도 할 수 있구나! 진짜 멋있어요!”아들이 누군가를 이렇게까지 칭찬하는 건 처음 듣는 것 같았다. “진짜 바보 같아요. 걔랑 같이 놀기 싫어요.”평소에 심지현은 이 말을 입에 달고 살았었다.게다가 부자는 큐브에 푹 빠졌는지 심서아가 상을 차리는 동안에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지현아, 밥 먹자!”심서아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불렀다.그제야 육민우는 큐브를 내려놓았고 심지현도 순순히 식탁으로 다가왔다.하얀 식탁은 깨끗하게 닦여 있었고 그 위에는 세 가지 반찬과 세 그릇의 밥, 그리고 세 쌍의 수저가 놓여 있었다.네모난 식탁에 세 사람은 각각 한쪽씩 자리를 잡았다.심서아는 젓가락을 들며 말했다.“먹자!”심지현은 그제야 젓가락을 들고 감자채를 집었다.육민우는 처음으로 심서아가 만든 음식을 먹어보았다. 밥은 부드럽고 윤기가 흘렀고 감자채는 새콤달콤 아삭했으며 가지는 부드럽고 고소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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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신 챕터

  • 80년대 사랑 일기   제40화

    육민우는 심지현에게 먹여주려고 도시락 뚜껑을 열며 대답했다.“네.”그때 간호사도 퇴근해서 저녁을 먹으러 갔고 의무실에는 심서아 일행만 남았다.심서아는 갈비찜을 먹으며 맛이 꽤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육민우가 자신의 요리가 맛있다고 한 것은 진심이었을까? 그녀는 의심스러웠다.심지현은 갈비찜을 한 입 베어 물었다. 부드럽고 짭짤하면서 고소한 맛에 눈이 반달처럼 휘어졌다.“아빠, 식당 아주머니 요리 진짜 잘하시네요!”육민우는 아들이 좋아하는 것을 알아채고 물었다.“맛있어?”“네!”“먹고 싶을 때 엄마랑 같이 오면 되겠다.”육민우는 인내심을 갖고 심지현의 입에 갈비찜을 한 조각 더 넣어주었다.심지현은 양이 많지 않아서 절반 정도밖에 먹지 못했다.그제야 육민우는 일어서서 의자를 가져와 옆에 앉아 남은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송유정은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심서아는 놀라지 않았다. 집에서도 그녀와 아들이 남긴 음식은 항상 육민우가 다 먹었기 때문이다.식사를 마친 육민우는 심서아와 송유정이 식사를 끝내자 자리에서 일어나 빈 도시락을 가져가려고 했다.송유정은 어색하게 말했다.“서아가 씻으면 가져가세요.”말을 하고 나니 좀 이상했다. 심서아는 그의 아내인데 그의 앞에서 자기가 나설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심서아가 송유정의 손에 들린 도시락을 받아 설거지하려고 하자 육민우가 가로채며 말했다.“링거 다 맞으면 차로 데려다줄게.”심서아는 거절하지 않았다. “네. 고마워요.”심서아의 소외감이 느껴지는 인사에 육민우는 나가려던 발걸음을 멈칫했지만, 곧 아무 말 없이 나갔다.약 30분 후, 육민우는 차를 몰고 의무실 앞에 도착했다.간호사가 링거 바늘을 빼주자 심서아는 송유정을 부축하여 차에 태웠고 심지현도 함께 뒷좌석에 앉았다.차가 출발하자 심지현의 눈은 기대로 가득 찼다. 희열 삼촌만 운전하는 줄 알았는데, 아빠도 운전할 수 있다니.뒷좌석에 앉은 심서아는 육민우의 옆모습과 운전대 위에 올려진 뼈마디가 뚜렷한 큰 손만 볼 수 있었다.연구

  • 80년대 사랑 일기   제39화

    육민우는 차를 몰고 사무실로 돌아와 소진성에게 진하연의 휴가를 신청하도록 부탁하고 자신은 의무실로 향했다.송유정은 여전히 병상에 누워 링거를 맞고 있었고 심서아는 옆에서 귤을 까고 있었다. 그리고 심지현은 얌전히 앉아 그림책을 보고 있었다.육민우는 긴 다리로 성큼성큼 심서아의 앞으로 걸어가 손목시계를 보며 말했다.“곧 저녁 시간인데, 식당에서 저녁 가져다줄게.”심서아는 그가 이렇게 빨리 돌아온 것을 보고 자기가 언짢아하는 걸 눈치챘구나 싶었다. 그래도 아내라는 자신의 위치를 신경 쓰는 모양이었다.그녀는 더 이상 토라지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육민우는 속으로 조금 서운했다. 과연 그녀는 정말 신경 쓰지 않았다. 자신이 진하연을 병원에 데려다줬는데 어떻게 조금도 화를 내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인가.송유정은 입을 뻥긋거렸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육민우는 아들 앞에 쪼그려 앉아 부드러운 표정으로 물었다.“지현아, 뭐 먹고 싶어?”심지현은 심서아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엄마가 화가 풀린 것을 확인하고는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아무거나 괜찮아요.”육민우는 일어서서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그래.”그리고는 돌아서 나갔다. 간호사는 육민우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그가 나가자 감탄했다.“육 연구원님께 저런 다정한 면이 있었다니. 아이에게도 정말 다정하네요.”심서아는 간호사의 말투에 의아함을 느꼈다.“평소에 무서운 분이세요?”송유정은 비록 연구소에서 일하지만 창고 관리를 맡고 있어 육민우를 거의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에 대한 모든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들은 것뿐이었다.하지만 간호사는 달랐다. 연구소 사람들은 아프면 모두 의무실로 오기 때문에 소문으로만 듣는 게 아니라 직접 본 적도 두 번이나 있었다.간호사는 고개를 저었다.“무섭다기보다는 고고해서 우리랑은 다른 세상 사람 같은 느낌이에요.”고고해? 심서아는 육민우에 대한 그런 평가를 처음 들었다. 사실 육민우와 많은 시간을 보낸 건 아니지만 말이

  • 80년대 사랑 일기   제38화

    육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그 말에 진하연은 가슴이 미어지는 듯 아파 무릎에 얼굴을 묻고 흐느껴 울었다.육민우는 그녀의 감정을 눈치채지 못하고 밖으로 나가 복도에 앉아 있던 소진성에게 말했다.“간병인 알아보러 아래층에 내려가 볼게.”“그래!”소진성은 병실로 들어갔다가 무릎에 얼굴을 묻고 어깨를 들썩이며 우는 진하연을 보고 걱정스럽게 물었다.“왜 그래요?”진하연는 훌쩍이며 고개를 들고 억울한 표정으로 물었다.“민우는 정말 저렇게 바빠요?”소진성은 이 말을 듣고 가슴이 철렁했다.‘설마 이 친구도 민우를 마음에 두고 있는 건 아니겠지...’그는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꽤 바빠요. 자료 준비하고 실험하는 것 외에도 TV 인터뷰도 해야 하거든요.”그리고는 한마디 덧붙였다.“괜한 생각 마세요. 민우는 겉보기만 번지르르하지 속은 꽉 막힌 사람이에요. 연구소에 민우 때문에 상처받은 여자들이 한둘이 아니라고요.”진하연은 다급하게 해명했다.“오해예요. 민우는 이미 결혼했는데 제가 무슨 딴생각을 하겠어요. 그냥 민우가 가끔 너무 냉정하게 굴어서 속상해서 그래요. 지난번에 민우 어머니 아프셨을 때도 내가 병원에서 밤새 간호해 드렸는데.”하지만 속으로는 생각했다.'내가 다른 여자들과 같아? 심서아랑 비교해도 나는 차원이 다른데.'소진성이 잠시 생각해보니 그럴듯했다. 사람 간의 정이란 게 있는데 진하연의 감정을 배려했다면 가족 중 누군가에게 간병을 부탁했어야지, 어떻게 바로 간병인을 고용할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래도 육민우의 편을 들며 웃어 보였다.“걔는 정말 바빠요. 나중에 얘기해서 가족분이 오시게끔 말해볼게요.”진하연은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의사 선생님이 별일 아니라고 하셨어요. 경과를 지켜보다가 내일 괜찮으면 모레 퇴원할 수 있대요.”소진성이 무슨 말을 하려는 순간, 육민우가 간병인을 데리고 와서 진하연에게 말했다.“의사 선생님께 여쭤봤는데 큰 문제는 없대. 돌아가면 네 상사에게

  • 80년대 사랑 일기   제37화

    육민우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다.“알겠어요!”진하연도 다시 그를 불렀다.“민우야!”육민우는 심서아의 앞에 서서 말했다.“혹시 신경 쓰인다면 진성을 보낼게.”“민우야! 나 너무 어지러워!”진하연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간호사도 재촉했다.“육 연구원님, 진하연 씨 상태가 좋지 않으니 빨리 병원에 가야 해요. 더 이상 지체하면 안 돼요.”육민우는 알겠다는 듯 소진성에게 돌아서서 말했다.“미안하지만 네가 하연 씨를 한성병원에 좀 데려다줘. 연구소에 가서 내 이름 대고 차를 가져오면 돼.”소진성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난... 난 운전할 줄 몰라.”진하연은 크게 실망했다. ‘그는 왜 저 여자 눈치를 보는 거지? 오랜 고향 친구이자 동창에 직장 동료로 지낸 정까지 있는데 심서아의 사소한 감정만도 못 하단 건가?’이런 생각에 진하연은 서럽게 눈물을 뚝뚝 흘렸다.“됐어. 이깟 몸뚱이 이제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간호사도 심서아라는 예쁜 여자가 육민우의 아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순간 멋쩍게 입을 열었다.“사람 목숨이 달린 일인데, 남성분 두 분이 같이 데려가면 문제없겠죠?”심서아는 간호사가 진하연과 친하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나한테 죄책감 느끼게 하지 마세요. 민우 씨가 어떻게 하든 그건 그 사람 마음이에요. 나한테 허락받을 필요 없어요.”그 말에 육민우는 내심 실망하며 돌아서서 소진성에게 말했다.“내가 차를 가져올 테니 넌 안고 내려와.”심서아가 싫다고 한마디만 했어도 함께 병원에 데려갔을 것이다. 그리고 병원에 도착하면 다른 사람에게 간호를 부탁할 생각이었다.차를 가져온 후, 소진성이 진하연을 뒷좌석에 태우자 육민우는 한성병원으로 출발했다.진료를 접수하고 병실에 데려다준 후, 육민우는 소진성에게 말했다.“잠시만 좀 봐 줘.”육민우가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본 진하연은 참지 못하고 불렀다.“민우야, 민우야!”육민우는 그녀에게 다가가 물었다.“왜 그래? 어디가 또 불편해?”진하연은 고개를

  • 80년대 사랑 일기   제36화

    소진성이 갑자기 고개를 들며 말했다.“하연 씨 같은데.”육민우는 그제야 반응을 보이며 손에 들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이때 군중 속에서 누군가가 말했다.“코피까지 흘리며 쓰러졌는데 남자분 중에 누가 좀 의무실에 데려다주세요!”소진성은 육민우를 쿡 찌르며 말했다.“사람이 쓰러졌는데, 가서 봐 봐.”육민우는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나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한 남자 직원이 진하연을 부축하려 하자 그녀는 육민우를 발견하고는 간신히 불렀다.“민우야! 나...”진하연을 부축하려던 남자 직원은 아는 사람이 나타나자 육민우에게 자리를 내주었다.육민우는 그녀 앞에 쭈그리고 앉아 물었다.“왜 그래? 걸을 수 있겠어?”진하연은 힘없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못 걸을 것 같아. 힘없어.”코피가 입가로 흘러내렸지만 육민우는 움직이지 않고 주변 사람들을 둘러보다가 힘이 세 보이는 식당 직원을 가리키며 말했다.“의무실로 좀 데려가 줘요.”진하연은 뚱뚱한 아저씨를 보고 즉시 바닥에서 기어 일어나고 싶었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힘이 없다고 말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특히 육민우가 보고 있는 상황에서 말이다.“민우야...”그녀는 애처로운 목소리로 불렀다.육민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식당 직원에게 말했다.“빨리 가세요.”진하연은 완전히 실망했다. 그녀가 뭐라고 말하려는 순간, 덩치 큰 아저씨가 다가와 그녀를 안아 들었다. 기름 냄새와 땀 냄새가 뒤섞인 퀴퀴한 냄새에 진하연은 정신이 더욱 아득해졌다.잠시 후 식당 직원이 돌아와 육민우에게 말했다.“육 연구원님, 간호사가 그 고향 친구분 상태가 안 좋고 돈도 안 가져왔다고 와보라고 하던데요.”육민우는 잠시 망설이다 소진성을 불러 함께 의무실로 향했다.의무실에 도착하니 심서아와 송유정이 있었다.아내를 본 육민우는 순간 놀라며 물었다.“여기에 왔는데 왜 연락도 안 했어?”심서아는 진하연을 흘끗 보았다. 이 여자는 아까 여기에는 아는 사람이 없어서 병원에 옮기려면 육민우밖에 부를 사람이 없다고

  • 80년대 사랑 일기   제35화

    “응, 오전에 왔다가 물건만 가지고 바로 갔어.”심서아가 대답했다.“그 녀석 참 끈질기네. 온갖 뒷말에도 굴하지 않고. 참 희선 언니 동생답다. 둘 다 천생 장사꾼이야. 돈 앞에서는 체면도 없나 봐. 민우 씨가 있는데도 오는 걸 보면.”송유정이 농담했다.하지만 심서아는 이해할 수 있었다.“떳떳하니까 오는 거지. 근데 이춘하가 그를 외간 남자라고 욕하는 건 엄청 기분 나빠하더라.”“하하!”송유정은 웃음을 터뜨렸다.“겨우 스물한 살짜리가 외간 남자 소리나 듣고.”심서아는 웃을 수 없었다.“얼마 전에 이춘하가 사람들 앞에서 희열이를 보고 외간 남자라고 욕했잖아. 그래서 이번 주에는 다른 사람 시켜서 물건 찾아가게 할 줄 알았거든. 근데 직접 온 거 있지. 다행히 유학파라서 생각이 열려 있으니까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마음에 상처 입었을 거야.”“알았어, 잘 쓸게. 세 식구 오붓한 시간 방해하지 않고 이만 가야겠다. 내가 한 말 잘 생각해 봐.”송유정은 샴푸를 가방에 넣고는 바로 나갔다.심서아가 주방으로 돌아가니 육민우는 이미 설거지를 하고 있었고 심지현은 작은 탁자를 닦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편안하게 등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몸을 편히 기댄 채, 이런 삶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잠시 후 설거지를 마친 육민우가 심서아의 옆으로 오며 나지막이 물었다.“좀 전에 송유정 씨가 통행증 얘기하는 것 같던데 누가 만들려는 거야?”심서아는 놀라 고개를 돌렸다. 육민우가 그녀의 개인적인 일을 묻는 것은 처음이었다.“친구가 봉래성에 가고 싶어 해서 유정이 아빠께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어요.”육민우는 태연한 심서아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다른 질문은 하지 않고 다시 말했다.“무슨 문제 있으면 나한테도 얘기해. 우리 같이 해결해 보자.”“우리?”심서아는 그 말에 마음이 흔들렸고 송유정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네.”육민우는 미소를 지으며 심지현의 손을 잡고 거실로 가서 해 질 때까지 함께 놀아주다가 돌아갔다.다음 날 아침, 출근한 육민우는

  • 80년대 사랑 일기   제34화

    심서아는 송유정이 말을 꺼내려 하자 그녀를 한쪽으로 데리고 갔다.“방에 들어가서 얘기해.”심서아가 작게 말했다.송유정은 알겠다는 듯 말했다.“그래, 그럼 네 방에서 기다릴게.”마당을 나서면서 송유정은 육민우를 다시 한번 흘끗 쳐다보았다.육민우는 키가 커서 낮은 의자에 앉으니 무릎이 턱에 닿을 정도였지만 아무렇지 않게 밥을 먹는 모습이 아주 온화해 보였다.돌아서면서 송유정은 속으로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심서아는 다시 식탁으로 돌아왔다. 세 식구는 조용히 식사를 마쳤고 평소처럼 육민우가 설거지했다.심서아는 심지현에게 마당에서 놀고 있으라고 하고 방으로 들어갔다.“서아야, 민우 씨 괜찮은 사람 같던데 이 정도면 살아볼 만하지 않아?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어때?”송유정은 진심으로 그녀를 설득했다.심서아는 책상 위 카세트와 테이프를 바라보며 심지현과 그가 함께 있는 모습을 떠올렸다. 마음이 흔들렸지만 아버지를 생각하면 그렇게 할 수 없었다.“난 여전히 봉래성에 가고 싶어. 우리 아버지 너무 억울하게 돌아가셨어.”송유정은 한참 말이 없다가 입을 열었다.“아빠는 네가 봉래성에 가서 뭐 할 건지 직접 묻고 싶어 하셔. 매일 오후 퇴근하고 집에 계시니까 시간 될 때 와.”“알았어!”말을 마친 송유정은 카세트를 가리키며 물었다.“이게 민우 씨가 사준 카세트야?”심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어. 지현이랑 라디오도 만들었어.”송유정은 웃으며 말했다.“거봐. 민우 씨니까 라디오도 만들어 주지. 보통 남자가 라디오를 만들어 주겠어? 진짜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봐. 나 봐, 시후 씨랑 몇 년이나 사귀었는데 선물 한번 받아본 적 없어. 매번 내가 스웨터 떠 주고 반찬 가져다주고 그러잖아.”심서아는 웃으며 말했다.“시후 씨는 월급도 얼마 안 되고 시골 출신이잖아. 다 네가 그 사람 잘생겼다고 만나는 거 아니었어?”송유정은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잘생긴 걸로 따지면 누가 민우 씨를 따라가겠어? 내가 너라면 여기 남아서 민우 씨랑 잘 살겠다. 네

  • 80년대 사랑 일기   제33화

    심서아는 멀리서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한참 후에야 정신을 차린 그녀는 부자를 방해하지 않고 조용히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 그리고 주방에 있던 작은 네모 탁자를 포도나무 아래로 옮겼다.저녁 메뉴는 고추 잡채, 멸치볶음, 감자채 볶음, 그리고 계란찜이었다.음식을 차려놓고 심지현을 보니 녀석은 쉴 새 없이 질문을 쏟아내고 있었다. 가만히 서서 불러서는 듣지 못할 것 같아 다가가는데 육민우의 어깨에 초록색 벌레가 붙어 있는 게 보였다.아마 포도나무에서 떨어진 모양이었다. 심서아는 손을 뻗어 벌레를 잡았고 인기척을 느낀 육민우는 뒤돌아보다가 심서아의 맑은 눈과 마주쳤다. 그녀는 두 손가락으로 벌레를 집어 그에게 보여주었다.“어깨에 벌레가 떨어졌어요.”마치 잘못한 일을 해명하듯 다급한 심서아의 모습에 육민우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괜찮아. 고마워!”심서아는 벌레를 던져 버리고 말했다.“지현이랑 밥 먹으러 와요. 거실은 더워서 마당에 차렸어요.”육민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심지현을 바로 부르지 않고 아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 손을 잡고 말했다.“밥 먹자!”심지현은 즉시 움직였다.심서아는 놀라 입을 살짝 벌렸다. 평소 심지현이 멍하니 있으면 몇 번씩 불러야 했는데 육민우는 한 번에 그를 움직이게 했으니 말이다.심지현은 마당에 차려진 밥상을 보더니 신나서 말했다.“와, 마당에서 밥 먹는 거 좋아요! 시원해요.”부자가 작은 나무 의자에 앉자 심서아는 담아놓은 밥과 반찬을 그들 앞에 놓았다.심서아는 계란찜을 육민우 앞으로 밀며 말했다.“이춘하가 당신에게 준 계란에서 4개로 계란찜 했어요. 나머지는 가져가세요.”육민우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무슨 뜻인지 알아차리고는 웃으며 말했다.“화났어?”“아니요!”심지현은 커다란 눈을 깜박이며 얼른 일어나더니 육민우에게 다가가 귓속말로 속삭였다.“엄마 화났어요!”심서아는 심지현의 행동을 보며 어이가 없었다. '얘가 정말 내가 힘들게 키운 애가 맞나? 겨우 며칠 만에...'엄마의

  • 80년대 사랑 일기   제32화

    심지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하다가 말했다.“딱히 뭘 하는 건 없어요. 엄마 그림을 가져가고 돈을 주고 나랑 엄마한테 뭘 사주기도 하고, 나랑 놀아주기도 해요.”육민우가 물었다.“그럼 지현이는 희열 삼촌 좋아해?”심지현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엄마는 유정 이모랑 희열 삼촌네 식구들은 세상에서 제일 좋은 사람들이라고 했어요. 그분들이 없었으면 나랑 엄마는 여기서 살아갈 수 없었을 거라고 했거든요. 근데 이제 아빠가 있으니까 아무도 나랑 엄마한테 뭐라고 못 할 거예요.”이 말에 육민우는 가슴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자신이 없던 4년 동안 그녀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상상이 갔다. 그러니 그가 무슨 자격으로 그녀와 하희열의 사이를 의심한단 말인가.심지현은 육민우가 갑자기 침묵하자 서둘러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며 말했다.“아빠, 나는 이제 아빠도 세상에서 제일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아빠가 엄마 전화 안 받은 건 누가 방해해서 그런 거지 우릴 버린 건 아니잖아요. 그렇죠?”그 말을 들은 육민우는 놀란 눈으로 아들을 바라보다가 품에 꼭 안고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코끝이 시큰해졌다.심서아는 아들을 아주 잘 키웠다.육민우는 한참 후에야 말했다.“아빠가 책 읽어줄게.”심서아는 방에서 나오다가 육민우가 아들에게 유창한 영어로 책을 읽어주는 모습에 적잖이 놀랐다. 유학 경험도 없는데 하희열 못지않은 발음이었다.하지만 수석 입학자였다는 사실을 떠올리곤 금세 납득했다.그녀는 사 온 수박을 주방으로 가져가 썰어서 거실 탁자에 놓고는 심지현을 불렀다.“지현아, 수박 먹자!”그리고 자신도 한 조각을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심지현은 육민우의 책 읽어주는 소리에 푹 빠져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육민우가 책 읽기를 멈추고 말했다.“가서 수박 먹자.”육민우는 탁자로 가 수박 두 조각을 가져와 심지현에게 한 조각을 주었다. 결국 한 조각으로는 부족했는지 부자는 탁자에 앉아 수박을 계속해서 먹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방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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