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의식적으로 어두컴컴한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을 입구는 많이 좁아 보였다.“여기 어디예요? 뭐 하러 온 거예요?”배현수가 말했다.“차에 있어. 잠깐 서 비서와 일 해결하고 올게.”배현수와 서정호는 차에서 내려 마을로 들어갔다.조유진은 차창에 기대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더니 왠지 모르게 불안감이 엄습했다.‘출장이라고 하더니 왜 이런 인적 드문 마을로 온 거지?’이 마을은 가로등마저 어두웠고 불을 밝히고 있는 집이 몇 집 없을 정도로 이곳에서 사는 사람이 적어 보였다.배현수의 핸드폰이 차에 남겨졌다.조유진은 안심되지 않아 그의 핸드폰을 들고 차에서 내려 그들의 뒤를 따랐다....배현수와 서정호는 마을 끝자락에 있는 한 집 앞에 도착했다.“대표님, 바로 여깁니다. 여정민이 사는 곳입니다.”배현수가 문을 두드렸을 때, 안에서는 다투는 소리가 들려왔다.조유진은 헐레벌떡 문 앞까지 쫓아왔다.“대표님, 여기 핸드폰...”문이 열리고, 날카로운 비수가 어둠 속에서 반짝이면서 배현수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조심해요!”조유진은 배현수의 앞을 막아섰다.날카로운 비수가 조유진의 살을 푹 찔렀다.그대로 왼쪽 가슴에 박히고 말았다.고개를 숙여 내려다보았을 때 왼쪽 가슴에서는 피가 철철 넘쳐흐르고 있었다.배현수는 긴 다리를 뻗어 습객을 발로 차버렸다.습객은 반응이 빨라 벌떡 일어나더니 밖을 향해 뛰쳐나갔다.서정호가 뒤쫓으려고 하자 배현수가 말렸다.“여정민도 다쳤어! 사람부터 구해!”집 안, 여정민은 온몸이 피범벅이 된 채 바닥에 쓰려져있었다.서정호는 바로 기절한 여정민을 부축했다.배현수도 품속에 있는 조유진을 번쩍 들어서 안았다.“병원으로 가!”...블랙 마이바흐는 고속도로를 타고 제일 가까운 중구 병원으로 향했다.왼쪽 가슴에 비수가 꽂힌 조유진은 온몸이 피투성이였다.여정민 역시 여러 군데 칼에 찔려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중구 병원은 이런 환자를 살려낼 자신이 없었다.구급차로 바로 시 병원으로 옮겨졌다.배현수는 조유
“사실... 선...”조유진은 조선유가 배현수의 친딸이라고 말하고 싶었다.이때 배현수는 깨끗한 거즈로 피가 흘러나오고 있는 그녀의 상처를 꾹 누르더니 이를 꽉 깨물면서 말했다.“닥쳐! 조유진, 내 말 잘 들어. 곧 병원에 도착하니까 이대로 죽지 않을 거야! 지금 해야 할 것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는 거야!”조유진은 고통에 미간을 찌푸렸다.배현수는 그녀의 손을 꽉 잡더니 귓가에 위협적인 말을 했다.“조유진, 나 아직 너 용서하지 못해. 나한테 빚진 거 다 갚고 죽어! 이대로 죽는 모습으로 속죄하는 거 두고 못 봐! 너무 쉽게 속죄하는 거잖아!”“칼받이 해준 거, 현수 씨가 옥중에서 칼에 찔린 그 일을 갚은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현수 씨, 난 현수 씨처럼 운 좋게 살아남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내가... 죽어도 꼭 알아야 하는 사실이 있어요. 더는 내 탓 하지도 말고 미워하지도 마요. 나는 현수 씨가 다시 새로운...”말을 끝내기도 전에 반지를 쥐고 있던 손이 아래로 축 처지고 말았다.“딸깍.”은목걸이에 걸려있던 반지가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배현수는 그래도 얼어붙고 말았다.온몸이 굳어버린 채 조유진이 정신을 잃어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유진아...”조유진을 부르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배현수의 두 눈은 마치 피가 흘러내릴 것만 같이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그녀를 다치지도 못하고 그저 옆에서 하염없이 이름을 부르기만 했다.“유진아... 깨어나봐... 유진아... 깨어나라고... 대부도 가고 싶다며? 같이 가줄테니까... 빨리 일어나...”하지만 조유진은 그대로 가만히 누워있었다.배현수는 조유진의 피가 묻어있는 두 손으로 정처 없이 바닥에 떨어진 반지를 찾았다.반지를 다시 주워 조유진의 손에 쥐어주었다.하지만 조유진의 손에는 힘이 없었다.결국 반지가 다시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아무것도 잡을 수가 없었다.숨 막힐 듯한 상실감이 밀물처럼 밀려와 배현수에게 덮쳤다.털썩 무릎을 꿇고 두
서정호는 단 한 번도 이토록 모순적인 배현수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마치 마음속에 자리 잡은 굳건한 신념이 조유진에 의하여 세차게 흔들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오늘 밤 조유진이 배현수를 대신해 맞게 된 칼은 배현수 마음속의 그 단단한 벽을 부숴버리는 데 충분했다.…한편 조유진은 기나긴 꿈을 꾸었다. 꿈속의 그녀는 늪지에 빠져있는 것만 같았다.조유진이 발버둥을 칠수록 더욱 깊이 빠져들기만 할 뿐이었고 가슴에는 둔탁한 통증이 전해져왔는데 실감이 나지는 않았다.이윽고 조유진은 온통 희고 아득한 빛으로 감싸진 곳에 놓였다.그리고 그녀의 뒤편에서 선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가지 마!”조유진이 무의식적으로 뒤를 돌아보자 조선유가 조유진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조유진은 선유를 안아주고 싶었지만, 선유는 그러한 그녀가 보이지 않는지 그대로 조유진의 몸을 관통하여 지나갔다.조유진은 얼떨떨하게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몸은 어느새 점점 투명해져 정체를 잃어가고 있었다…같은 시각, 수술실.“큰일 났습니다! 환자분 혈압이 40까지 떨어졌습니다.”“삐—”…‘나 곧 죽는 건가?’‘하지만, 나 아직 못해본 것들이 너무 많은데.’선유와 남초윤이 조유진의 생일을 축하해주던 날, 조유진은 촛불을 불기 전 케이크에 대고 세 가지 소원을 빌었었다—배현수가 자신에 대한 원망을 내려놓기.돈을 모아 선유와 어머니를 모시고 대제주시를 떠나 아무도 그들을 모르는 곳으로 가 영원히 함께하는 것.그리고, 배현수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랬었다.하지만 죽기 직전까지도 배현수는 그녀를 용서해주지 않았고 또한 조유진이 죽게 된다면 홀로 남겨질 그녀의 어머니와 선유는 또 어떻게 산단 말인가.여러가지 생각이 미치자 조유진은 너무 슬퍼졌다.그 순간 사방이 삽시에 어둠에 휩싸였다.그리고 조유진은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배현수를 보았다. 배현수는 차가운 얼굴로 한 글자 한마디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조유진, 난 영원히 너를 용서하지 않을 거야.”이윽고
수술이 끝난 뒤, 조유진은 온종일 혼수상태에 빠졌었다. 그리고 이튿날 밤이 되어서야 겨우 의식을 회복했다.배현수는 침대 머리맡에 엎드려 그대로 잠이 든 것 같았다.조유진은 순간 자신의 상처를 잊은 채 양팔을 짚고 몸을 일으키려고 애를 쓰다가 왼쪽 가슴에 박힌 상처를 건드려 몰려오는 극심한 고통에 연신 숨을 토해냈다.얕은 잠을 자고 있던 배현수는 곧 조유진의 동정에 잠에서 깨어났다.배현수는 조유진을 눌러 침대에 다시 눕힌 뒤 미간을 찌푸리며 차갑게 말했다. “왜 멋대로 움직여?”“대표님이 제 곁을 쭉 지켜주셨어요?”배현수는 단번에 부정했다. “아니. 전에는 서정호가 계속 지켰어.”‘정말?’하지만 배현수의 눈 밑에는 잠을 잘 자지 못한 듯 회청색의 다크써클이 깊이 드리워져 있었고 이는 전의 그의 모습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배현수는 조유진의 핸드폰을 전해주며 입을 열었다. “네가 혼수상태일 때 전화가 울려서 내가 대신 받았어.”‘설마 선유가 전화한 건 아니겠지?’조유진은 가슴이 철렁하여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누…누가 전화한 거예요?”“네 그 베프, 남초윤. 그리고 난 네가 다쳤다는 사실을 알려줬어.”그렇다면 배현수는 아직 전화 건너편에 선유도 있다는 사실을 모를 것이다.조유진은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조유진이 남초윤에게 전화를 하여 안부를 전하려고 하자 배현수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왜 나 대신 칼 맞았어?”왜?조유진도 이유를 알고 싶었다. 하지만 당시 모든 것이 갑작스럽게 발생했고 조유진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무의식 간에 배현수의 앞에 막아섰다…그 순간, 조유진은 그 어떤 결과도 생각하지 않았다.“빚진 거잖아요. 현수 씨가 감옥에서 칼을 맞았으니 이건 제가 돌려드리는 거예요.”조유진은 고개를 떨군 채 핸드폰을 바라보며 마치 칼을 맞은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가벼운 말투로 답했다.“네가 이렇게 한다고 내가 널 용서할 것 같아?”조유진은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은 채 입술을 달싹이며 조용히
배현수는 이제 도대체 어느 것이 진짜 조유진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지경이었다.아마 매 순간이 진실일 수도 있고 모두 그녀의 진심이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조유진의 진심이라고 하여 또 얼마나 가치가 있을까?사랑을 말하면서도 그를 배신했었던 인간인데.조유진이 바로 그런 인간이었다. 뒤를 돌아서면 순식간에 얼굴이 바뀌었다.배현수가 한창 허공을 바라보며 멍을 때리고 있을 때 그의 핸드폰 벨 소리가 자신의 존재감을 알렸다.핸드폰 화면에 뜬 이름은 다름 아닌 육지율이었다.배현수는 망설임 없이 전화를 끊었다. 그는 지금 그 누구의 전화도 받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육지율의 전화는 지치지도 않는지 계속하여 걸려왔다.결국, 전화가 연결되자 육지율은 버럭 화를 내며 물었다. “잘났다. 이 시간에 내 전화도 안 받고. 너 설마 조유진과 벌써 침대까지 올라가서 미래까지 약속한 거 아니야?”전화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화가 가득 담겨 귀가 울릴 지경이었다.배현수는 쩌렁쩌렁 울리는 육지율의 목소리에 핸드폰을 저 멀리 치우고는 미간을 찌푸리며 싸늘하게 답했다. “무슨 소리야? 잤다고 해도 이젠 한두 번도 아니고.”“...”육지율은 너무나도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전에 누가 같은 곳에서 두 번 넘어지지 않는다고 그렇게 당당하게 선언했는데! 현수야 현수야, 이젠 두 번이 아니라 셀 수 없이 여러 번 넘어진 건 아니야? 듣자 하니 조유진이 너 대신 칼을 맞았다는데 너 지금 그것 때문에 또 마음 약해졌지?”“나도 걔가 내 앞에 막아설 줄 몰랐어.”하지만 육지율은 여전히 조유진을 믿지 못했다. “그것도 걔 수법이면 어떡하게? 한번 배신하면 평생 안 본다는 것, 이 말 그 잘난 배현수 네 명언 아니냐? 만약 당시 다른 사람이 법정에서 널 지목해서 감옥에 들어가 3년 동안 갇혀있게 했으면, 네 성격대로라면 진즉에 그 사람 갈기갈기 찢어놨어. 그런데 왜 조유진이 그 짓 하니까 계속해서 봐주는 건데?”배현수는 피식 씁쓸한 비웃음을 터뜨리며 입을 열었다.
조유진은 슈크림 빵을 손에 쥐고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러자 빵 속의 강한 크림 향이 입안을 맴돌았고 달콤하지만 느끼하지도 않고 폭신하고 쫄깃한 식감이 더욱 돋보이는 빵이었다.배현수의 말에 조유진은 동문서답으로 갑자기 엉뚱한 말을 늘어놓았다. “이 슈크림 빵 엄청 맛있는데 드셔보실래요?”조유진의 반응은 배현수의 말을 못 들은 듯 너무나도 담담했다. 그녀의 미지근한 반응에 배현수는 미간을 찌푸렸고 검고 깊은 그의 동공은 더욱 깊은 빛을 발했다.배현수는 마지 못하여 자신이 했던 말을 다시 한번 곱씹었다. “조유진, 넌 이제 자유야.”이것이야말로 그녀가 가장 원하던 것 아닌가? 그러니 지금, 조유진이 가장 원하던 것을 이루었으니 그녀는 지금 기뻐해야 마땅한 것이다.조유진은 빵을 목구멍으로 넘기고 꽉 막혀오는 듯한 느낌에 죽을 몇 모금 마셨다. 그러고는 그제야 고개를 들고 배현수의 깊은 눈빛을 바라보며 물었다. “저...사실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어요. 현수 씨의 뜻은 절 이제 원망하지 않는다는 건가요? 아니면 저에게 복수하지 않으시겠다는 건가요?”하지만 조유진은 이것 하나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가 배현수를 대신하여 칼을 한번 맞았다고 하여 배현수가 그녀를 용서했을 리는 없었다.배현수의 올곧고 거대한 몸집이 빛과 그림자의 경계 속에 싸여 다소 적막한 분위기를 풍겼다.“난 너를 원망하지 않을 수는 없어. 하지만 복수라 하면 네가 나를 대신하여 칼을 맞았으니 6년 전의 원한과 함께 퉁치자.”퉁친다고.몇 개월 전의 조유진은 꿈속에서도 배현수와의 모든 빚을 청산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하지만 정작 배현수가 정말 그녀를 놓아주었으니 조유진은 응당 기뻐해야 마땅한 것인데 왜인지 가슴으로부터 둔탁한 통증이 밀려오더니 파도처럼 몰려와 어느새 조유진의 몸을 삼키며 그녀를 괴롭혔다.숨이 턱 막힐 정도로 너무 아팠다.조유진은 애써 고통을 삼키며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물었다. “그럼...저 계속하여 SY 그룹에서 일할 수는 있나요?”배현수는 순간
이 점에서만큼 배현수와 조유진은 서로 합이 정말 잘 맞았다.배현수는 조유진의 오른쪽 가슴에 옅은 갈색 점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그녀의 몸 곳곳의 모든 민감 점을 알고 있다. 하지만 유독 그녀의 번호가 없는 것이다.이것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이의 낯선 사람이 아닐까.배현수는 그저 그렇게 아무 말 없이 차가운 시선으로 조유진을 내려다볼 뿐이었다.조유진은 아려오는 눈가를 애써 참으며 침착하게 말을 이어갔다. “맞다. 배 대표님께서 이제 저를 상관하지 않으시겠다고 한 말씀 정말입니까?”“이제 네가 죽든, 살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야.”“그럼 저도 마음이 놓이네요. 앞으로 제가 결혼을 하든 아이를 낳든 대표님께는 일일이 보고하지 않겠습니다. 전애인은 죽은 듯이 지내야 마땅하니까요.”자유를 허가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다른 사람과 결혼하고 자녀를 낳을 생각을 하다니. 신준우라는 그 사람인가? 아니라면 강이찬인가?하지만 이 모두 배현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배현수는 인상을 딱딱하게 굳히고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결국 무뚝뚝하게 입을 열었다. “나는 널 보고 싶지도 않고 너의 그 어떤 소식도 전해 듣고 싶지도 않아. 그러니 강이찬한테서도 멀리 떨어지는 게 좋을 거야.”‘강 선배?’조유진은 확실히 강이찬과 사이가 좋았다. 하지만 이는 배현수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전에 조유진과 강이찬이 사이좋게 지낸 것도 전부 배현수 때문이었다.만약 조유진과 배현수가 헤어졌다면 조유진도 강이찬을 찾아갈 리가 없었다.오히려 조유진은 최선을 다해 강이찬의 범위를 벗어날 것이다.“걱정하지 마세요, 대표님. 제가 돈을 충분히 모으면 대제주시를 떠나 이곳과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갈 겁니다.”배현수는 그저 조유진이 그에게 겁주는 것이라 여기고 조유진의 말을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대제주시가 이리도 큰데 특별히 만나려고 약속한 것이 아니라면 만나기 매우 어려울 것이다. 때문에 조유진이 대제주시에 있든 없든 별다른 차이가 있지는 않았다.
병원 아래, 맞은 켠 도로에 검은색 마이바흐 한 대가 서 있었다.이윽고 운전석의 차창이 3분의 2 정도 내려갔다.뼈마디가 뚜렷한 커다란 손이 담배 한 대를 손가락 사이에 끼워두고 아무렇게나 차창밖에 걸치고 있었다.그 차갑고 흰 긴 손가락 사이로 선홍색 불빛 한 점이 유난히 눈부셨다.바람이 반쯤 불어오면 배현수도 담배를 반 모금 피웠다.선홍색의 담배 불빛이 흘러가는 바람 속에서 아슬아슬 빛을 발했다. 마치 배현수의 감정처럼 한순간 파도처럼 일으켜 세워졌다가도 그의 이성에 의해 억눌려지는 반복이었다….배현수의 음울한 안색이 담배 연기 속에 파묻혀졌고 흰 연기가 그의 날카로운 눈빛을 가려 쓸쓸한 적막만이 허공에 머물 뿐이었다.배현수는 마지막으로 남은 한 가닥의 침향목을 꺼내 들어 담배에 끼워 넣어 불을 지폈다.담백하고 은은한 침향목 향이 참으로 조유진을 닮아 있었다.희미하고 담담한 존재감이지만 순식간에 사람을 중독시켰다.어디가 그리도 좋은지 꼭 짚을 수는 없었지만, 결코 잊을 수가 없는 그러한 존재였다.하지만 조유진이 선물해준 것도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이제 배현수는 침향목을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중독된 건 끊으면 그만이었다. 이는 결코 어렵지 않았다.담배가 그러했다. 침향목도 그러했다. 조유진도, 그럴 것이다.손가락 사이에 끼워져 있던 담뱃불이 희미하게 자신의 종말을 고했다.배현수는 손가락으로 담배를 짓이겨 희미하게 빛을 발하는 불빛을 껐다. 담뱃불에 데인 살결이 아려왔고 곧이어 그 통증은 살을 파고들었다. 이윽고 담배꽁초가 하찮게 창밖으로 버려졌다.그리고 배현수는 계속하여 병원 맞은 편에 30분 동안 머물렀다.차에 시동을 걸기 전, 배현수는 병원 정문을 다시 한번 힐끗 바라보았다. 하지만 배현수는 이내 그러한 자신을 비웃듯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조금 전 배현수가 직접 조유진에게 자유를 주기로 했으면서 지금, 어떻게 조유진이 다시 쫓아 나와 그를 붙잡아주길 바란단 말인가.배현수는 항상 알고 있었다. 감정방면에 있어서 그는 줄곧 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