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의 결혼이 헛된 망상이었을까의 모든 챕터: 챕터 281 - 챕터 290

524 챕터

제281화 앞당기다

남도로 돌아오고 나서 송재이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일상을 보냈다.단지 요즘 들어 야근이 잦아지면서 몸이 조금 피곤한 상태였다.모처럼 일찍 퇴근한 어느 날, 한의원을 지나치다가 간만에 스트레스 풀 겸 한방 마시지를 받으러 무작정 들어갔다.그녀는 흰색 가운을 입은 젊은 여자의 안내를 받아 프런트 데스크에서 접수를 마치고 진료실로 향했다.이내 간단한 상담을 받고 나서 다른 룸으로 옮겼다.한의사가 워낙 프로라서 손놀림이 예사롭지 않았고, 마시지를 이어가면서 그녀에게 불편한 건 없는지 수시로 체크했다.예전에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 송재이는 마사지를 배운 적도 있었다.어설픈 실력을 갖춘 그녀보다 확실히 전문가가 더 믿음직스러웠다.시간이 길어질수록 잠이 솔솔 왔고, 마사지가 끝났을 때는 이미 한 시간이 지난 후였다.침대에서 일어난 그녀는 방금 마사지를 해줬던 한의사와 소소한 담소를 나누었다.하지만 이때, 아무런 예고도 없이 갑자기 아랫배에서 뜨끈한 열기가 느껴졌다.송재이는 잽싸게 배를 끌어안고 벌떡 일어났다.그와 동시에 뜨거운 열기도 점점 아래로 흘러내리는 듯싶었다.이는 너무나도 익숙한 느낌이었다.아직 생리할 때도 아니라서 무방비 상태이지 않은가?한의사는 아직 눈치채지 못하고 여전히 웃는 얼굴로 송재이에게 말을 걸었다.하지만 그녀의 안색은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그리고 치마를 끌어 내리며 발걸음을 옮겼는데...이런!고개를 돌리자마자 카키색 치마에 물든 빨간 핏자국을 발견했다.순간, 그녀는 눈물이 핑 돌았다.맞은편에 있던 한의사도 송재이의 복잡미묘한 표정을 보더니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는 가까이 다가가 나지막이 물었다.“왜요?”송재이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다행히 상대방도 여자니까 충분히 이해할 거로 생각했다.이내 목소리를 낮추고 조심스레 말했다.“치마 뒤에...”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신 선생님, 혹시 제 서랍에 있는 출석부 보셨나요?”문밖에 다정하면서도 나긋나긋한 여자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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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2화 저주를 받다

다른 사람은 어리둥절하겠지만, 송재이는 그가 생리일이 앞당겨졌냐고 물어봤다는 걸 단번에 알아차렸다.아직도 머릿속이 혼란스러운지라 남자의 말투가 그녀를 조롱하는 건지 아니면 단순히 물어보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게다가 자신의 생리일을 설영준이 언제부터 기억하고 있단 말이지?순간 패닉에 빠진 송재이는 그 자리에 꼼짝도 안 하고 서서 초조한 얼굴로 입술만 꽉 깨물었다.“영준아, 아는 사람이야?”방금 문 앞에서 노크를 한 사람은 키가 크고 늘씬한 여의사인데, 20대 후반으로 용모가 단정하고 인상이 친절한 편이다.“응, 둘은 볼일 봐.”설영준은 눈길조차 주지 않고 시종일관 송재이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양은서는 의아하긴 했으나 두 남녀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기류를 눈치챘다.이내 방금 송재이에게 마사지해준 한의사에게 눈짓을 보냈다.“그럼 일단 자리를 피해줄까요? 출석부 찾는 것 좀 도와줘요.”“네.”두 사람은 눈치껏 빠져나갔고, 문까지 살짝 닫아주었다.방 안은 금세 정적이 이어졌다.송재이의 손이 무심코 엉덩이를 가렸고, 이내 설영준이 성큼성큼 다가가서 앞에 멈추어 섰다.마치 치부라도 들킨 듯 고개를 숙인 채 난감해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자 농담을 몇 마디 던지고 싶었지만 발갛게 물든 얼굴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끝내 아무 말도 못 했다.그리고 외투를 벗어 어깨에 살포시 걸쳐주었다.슈트의 길이는 마침 그녀의 엉덩이를 덮을 정도였다.송재이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고,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고마워.”잠시 후, 비록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설영준의 시선이 고스란히 느껴졌다.그윽한 눈빛은 뜨거우면서도 집요했다.한참이 지나서야 송재이는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들었고, 어색한 분위기를 깨기 위해 먼저 입을 열었다.“런던에 있는 거 아니야? 언제 돌아왔어?”“어제.”설영준이 무심하게 대답하고, 뒤집힌 옷깃을 흘긋 쳐다보더니 손을 뻗어 자연스럽게 정리해주려고 했다.하지만 가까이 다가가는 순간 마치 세균이라도 되는 듯 그녀는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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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3화 아직도 화났어?

두 남녀 사이에 흐르는 분위기를 보아하니 비록 대화를 많이 하거나 신체적인 스킨십이 있는 건 아니지만 예사롭지 않은 기운을 풍겼다.설영준이라는 남자는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한테 자기 옷을 벗어서 입혀줄 정도로 친절한 타입과 거리가 멀었다.물론 그에게 소중한 존재이면 얘기가 달랐다.양은서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눈치 빠르게 송재이에게 먼저 친한 척했다.송재이도 예의상 그녀와 악수했다.“만나서 반가워요, 전 송재이라고 하며 대표님의... 친구에요.”어쨌거나 산전수전을 겪어본 자로서 양은서는 아무 말 없이 의미심장하게 웃기만 했다....송재이는 데려다주겠다는 설영준의 제안을 거절했고, 설영준도 굳이 강요하지는 않았다.아까 그녀와 마주쳤을 때 찰나의 씁쓸함을 끝으로 나중에는 아무런 감정 변화가 없다시피 무미건조했다.차라리 이런 모습이 송재이에게 더욱 안도감을 주었다.그리고 한의원을 나와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갔다.다음날, 그녀는 설영준에게 카톡을 보내 지금 가서 일정 노트를 챙겨도 되냐고 물었다.곧바로 설영준의 답장이 도착했다.[그래.]설영준이 보낸 주소에 따라 송재이는 그의 지사로 향했고, 차에서 내린 다음 빌딩 입구에 서 있었다.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니 무난하면서도 호화로운 고층 건물이 하늘을 찌를 듯싶었다.회사가 설립한 지 얼마 안 되었기에 직원 관리가 아직 미흡한 편이었다.하지만 이상하게도 프런트 직원은 그녀를 보자 친절하게 안내까지 해주었다.“송재이 씨, 엘리베이터는 이쪽에 있어요.”송재이는 어리둥절했다. 대체 이 사람들이 그녀를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유일하게 납득이 갈만한 이유는 설영준이 미리 언급했다는 건데...하지만 얼굴까지 정확하게 알아보다니? 설마 사진이라도 들고 다니면서 생김새까지 공개한 건가?...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송재이는 문이 열리자마자 여진을 마주쳤고, 역시나 그는 미소 짓는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송 선생님, 대표님의 사무실은 이쪽이에요.”그리고 여진을 따라 한 사무실 문 앞에 도착했고, 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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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4화 끌려다니다

송재이는 순간 넋을 잃었고, 대체 언제를 얘기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설영준이 입술을 꽉 깨물었고, 눈빛이 점차 싸늘하게 식어갔다.곧이어 설도영이 화장실에서 돌아왔고, 냉장고에서 방금 꺼낸 아이스크림 2개도 챙겼다.어차피 형은 단 거 안 좋아하기에 일부러 2개만 샀다.하지만 테이블에 내려놓자마자 설영준에게 빼앗겼다.“재이는 못 먹어.”영문을 알 수 없는 설도영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뒤늦게 정신을 차린 송재이는 미소를 쥐어짜 냈다.“응, 차가운 거 먹으면 안 돼.”이내 말을 마치고 몰래 설영준의 눈치를 살폈다.아직도 생리 터진 걸 기억하고 있다니, 어제 일을 떠올리자 그녀의 얼굴이 저도 모르게 화끈 달아올랐다.이때, 설영준의 시선도 그녀를 향했다.그리고 다시 질문을 이어갔다.“그날, 호텔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아직도 나한테 화났냐고.”물을 마시던 송재이는 자칫 뿜을 뻔했고, 무의식중으로 설도영을 바라보았다.지금 애 앞에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비록 16살이 되었지만 어디까지나 미성년자이지 않은가?설도영은 여전히 멀뚱멀뚱한 얼굴로 아이스크림만 열심히 먹고 있었다.두 눈이 마주치는 순간 송재이는 재빨리 시선을 옮겼고, 곧이어 매서운 눈빛으로 남자를 노려보았다.“호텔 뭐? 이미 잊었어.”“그렇다면 화가 풀린 건가?”설영준은 당황한 그녀가 안중에도 없는 듯 말을 이어갔다.“지난번 박윤찬이 남도에 갔을 때 너랑 밥 먹다가 눈이 빨개진 걸 보고 전날에 분명 울었다고 확신하더니 나 때문이라고 생각했나 봐. 그래서 경주에 돌아오자마자 찾아와서 막 따졌다니까?”그는 송재이의 반응이 궁금한 나머지 일부러 한껏 부풀려서 말했다.송재이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비록 말투는 시종일관 무덤덤했고, 감정 기복을 찾아보기 힘들었지만 웃는 둥 마는 둥 하는 표정은 은근히 비꼬는 것 같기도 했다.이내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너한테 따졌다고?”“응. 박윤찬이... 의리가 꽤 있나 봐.”그는 일부러 뜸을 들이며 말했고, 어떤 표현을 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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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5화 출국

송재이가 떠나고 나서 설영준은 굳이 따라가지 않았다.오히려 설도영이 옆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형, 왜 또 선생님이랑 싸운 거예요?”사실 일부러 두 사람을 위해 기회를 마련해줬지만, 매번 설영준이 보기 좋게 망쳐버렸다.이제 자신도 두손 두발을 들었다.형이 워낙 성격이 변덕스러운 건 알고 있지만 송재이에 관한 일이라면 유난히 티가 났다.설도영은 안타까우면서도 어이가 없었다.설영준이 굳은 얼굴로 시종일관 침묵했다.하지만 입을 닫고 있으니 오히려 카리스마가 폭발했고 점점 더 다가가기 힘든 뉘앙스를 풍겼다.룸 안의 분위기는 금세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설도영은 억지로 미소를 쥐어짜 내더니 속으로 구시렁거렸다.‘우리 형 이러다가 평생 혼자 살겠는데?’송재이는 레스토랑에서 나와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택시 안에서 오랜만에 되찾은 일정 노트를 펼쳐 보자 6개월 가까이 되는 스케줄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물론 다른 사람에게 아무것도 아닐 수 있지만 그녀는 마침내 잃어버린 물건을 찾게 된 소중함이 느껴졌다.그리고 생각 없이 마지막 페이지까지 뒤적거렸다.이내 어지럽게 쓰인 ‘0’을 보고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그제야 설영준을 생각하면서 써 내려간 숫자라는 사실을 떠올렸다.0은 시작과 끝을 의미했다.대놓고 이름을 쓰면 행여나 속마음이라도 들킬까 봐 일부러 애매모호하게 숫자만 썼다.여태껏 일정 노트가 설영준한테 있었기에 이 페이지를 발견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그나마 선견지명이 있어 숫자 0만 쓴 게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반면, 혹시라도 설영준이 유추해낸 건 아닌지 싶어 조마조마하기도 했다.설영준처럼 공사다망한 사람이 설령 발견했더라도 찬찬히 연구할 정도로 한가하지는 않겠지...?그녀는 속으로 묵묵히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다음날 송재이는 교장실에 불려갔고, 교장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송 선생, 혹시 출국할 생각은 없나?”무방비 상태의 송재이는 순간 넋을 잃더니 한참이 지나서야 대답했다.“네?”교장은 50이 넘은 중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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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6화 불만

휴대폰 너머로 정적이 이어졌다.어쩌면 문예슬은 그동안 혼자만의 착각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송재이가 워낙 성격이 착해서 싫은 소리를 차마 못 한다고 생각했다.따라서 그녀의 이런 ‘착한 성격’을 저도 모르게 이용했던 것이다.결국 지금까지 매번 자기 뜻대로 되지 않았는가?이제 와서 강경한 태도로 자신의 위선적인 이면을 들춰낼 만큼 딱 잘라 말하니 순간 어찌할 바를 몰랐다.송재이가 전화를 끊으려는 순간 휴대폰을 타고 문예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송재이, 네가 이렇게 나쁜 년일 줄은 몰랐네? 그래도 한동안 둘도 없는 친구였는데 그런 모난 생각으로 날 억측하다니...”한껏 누그러진 말투는 억울한 느낌이 역력했지만 정작 상상을 초월하는 멘트를 내뱉었다.송재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감히 그녀에게 모났다고 하는 건가? 자기 잘못을 인정해도 모자랄 판에 되레 남을 비난할 줄이야!더는 말을 섞고 싶지 않은 송재이는 바쁘다고 대충 얼버무리고 전화를 끊었다.이내 연신 심호흡하면서 마음을 가다듬었고, 고개를 돌리는 순간 뒤에 떡하니 서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대체 언제 나타났단 말이지?그녀는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여긴 왜 왔어?”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설영준은 햇빛을 등지고 그녀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하지만 눈동자만큼은 뜨거우면서 그윽했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고, 곧이어 남자는 그녀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송재이는 무의식적으로 연신 뒷걸음질 쳤고, 등 뒤에는 바로 통유리창이 있었다.어쩌면 상대방의 카리스마가 너무 강한 탓인지 몰라도 설영준을 마주할 때면 저도 모르게 기가 죽었다.그녀의 앞에 멈춰선 남자는 곧바로 턱을 살짝 움켜쥐었다.이내 입술을 달싹이며 무심한 말투로 물었다.“방현수랑... 잤어?”방금 문예슬과 통화하고 나서 안 그래도 짜증이 난 상황인데, 뜬금없는 설영준의 질문에 겨우 참았던 화가 다시금 폭발했다.사실은 일부러 그를 열받게 하려고 인정할까 고민도 했었다. 어차피 쉬운 여자라고 생각하는 이상 될 대로 되라는 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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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7화 믿거나 말거나

교장은 그제야 놀란 마음을 추스르고 입을 열었다.“대표님, 송 선생과...”“들어가서 얘기하시죠.”설영준은 교장실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 문까지 닫았다.사실 오늘 다음 시즌 광고 투자 건 때문에 학교를 찾았는데 격식을 갖춰야 하는 자리인 만큼 교장이 고급 레스토랑에서 만나자고 제안했다.하지만 예상외로 설영준이 아무렇지 않게 마침 근처에 있으니 그냥 운전해서 오겠다고 했다.설영준은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 단 몇 마디로 화제를 돌렸다.방금 밖에서 송재이와 있었던 해프닝은 그다지 언급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교장도 잡담을 즐기는 스타일이 아닌지라 설영준이 대충 넘어가려는 의도를 눈치채고는 딱히 캐묻지 않았다.두 사람은 한 시간 가까이 대화를 나누었다.설영준은 때로 무심해 보이지만 일에 관해서는 끊고 맺음이 확실했다.시간이 흐를수록 교장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다행히 전체적인 협상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그만큼 설영준이 교장의 체면을 세워줬다는 것을 보아낼 수 있었다.협상 도중에 교장이 물을 따르러 일어나자 무심코 고개를 돌린 설영준의 시야에 책상 위에 놓인 교환 학생 제안서 더미가 들어왔다.이내 한 장을 집어 들고 대충 훑어보았다.교장이 설영준의 앞에 물컵을 내려놓으며 말했다.“이번에 우리 학교에도 정원이 몇 명 있는데... 참, 송 선생한테도 추천해줬어요.”제안서를 뒤적이던 남자의 손이 우뚝 멈췄다.“누구?”“송재이 선생이요.”교장이 싱글벙글 웃었다.“이미 동의했고, 유학하는데 관심이 많다고 하네요.”설영준의 눈살이 저도 모르게 찌푸려졌고, 이마에 핏줄이 불끈 솟아올랐다.이미 동의했다니?“언제 동의했는데요?”설영준이 싸늘하게 물었다.상대방의 심기가 불편해졌다는 사실을 눈치챈 교장은 조심스러운 말투로 대답했다.“오... 오늘이요.”즉, 방금 그녀를 만났을 때 이미 교장에게 유학 가겠다고 약속했지만 자신한테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언제까지요?”설영준이 다시 물었다.“6개월이요.”이내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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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8화 걸림돌

경주에서 남도, 그리고 M국까지.설영준은 송재이가 조금씩 멀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최근 경주와 남도를 오가는 횟수도 점점 더 잦아졌다.나중에 지사가 설립되면 그녀도 이미 출국했을 것이고, 또다시 홀로 남도에 남아 있을 게 뻔하지 않은가?교장이 말하길 송재이의 출국 수속은 일주일도 채 안 되어 완료되었고, 유학 일정도 곧 정해질 예정이라고 했다.송재이가 교장 선생님께 유학에 필요한 학습 자료를 부탁하자 교장은 사무실로 그녀를 불렀다.별생각 없이 문을 밀고 들어가자 교장실에 앉아 있는 또 다른 사람을 발견했다.비록 등이 그녀를 향했지만, 너무나도 익숙한 뒷모습이었다.남자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고, 다리를 꼬고 마치 남의 일처럼 수수방관하는 태도를 보였다.유유자적한 모습은 느긋하니 그녀가 안중에도 없는 듯싶었다.송재이는 심호흡하고 안으로 들어갔다.교장은 서랍에서 일찌감치 준비한 서류를 꺼내 송재이에게 건네주었다.“송 선생, 이번에 가게 될 컴파운대학교야. 도착하고 나서 피터 교수님을 찾아가면 되는데, 나랑 워낙 오랜 친구 사이니 도움이 필요할 때 편하게 부탁하면 돼.”교장 선생님의 배려에 송재이는 크게 감동했다.“걱정하지 마세요. 6개월 동안 열심히 공부해서 기대에 부응하도록...”“참, 송 선생. 이번 학기가 3개월로 줄었다고 얘기한다는 걸 깜박했네.”송재이는 어리둥절했다.“네?”고작 3개월밖에 안 되다니? 좀처럼 믿을 수가 없는 그녀였다.“왜 갑자기 절반이나 단축된 거죠? 3개월이면 너무 짧지 않나요?”교장은 고지식한 사람이라 거짓말에 능한 편은 아니었다. 결국 저도 모르게 맞은편에 앉은 설영준을 힐끗 쳐다보았다.설영준은 시종일관 다리를 꼰 채 두 사람의 대화 따위 관심이 없는 듯싶었다.단지 손에 든 자료만 뒤적거릴 뿐,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교장은 억지로 미소를 쥐어짜 내더니 더듬거리며 변명을 이어갔다.“단지 교환 학생으로서 어차피 교류 위주인데다가 국비 지원 항목이라서 해외 등록금을 지불할 정도까지 많은 투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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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9화 평행선

설영준은 양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느긋하게 교실 밖의 복도를 거닐었다.이때 문득 가까운 곳에 있는 가녀린 실루엣이 보였다.오후 햇살이 그녀를 내리쬐었다. 그녀는 한창 촉촉이 젖은 눈동자로 원수를 쳐다보듯 그를 째려보았다.설영준은 걸음을 멈추고 그녀와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여기는 학교인지라 그녀도 굳이 밖에서 그와 다투며 남들의 웃음거리로 전락하고 싶지 않았다.송재이는 입술을 꼭 깨물고 차오르는 분노를 참으며 성큼성큼 그의 앞에 다가가 작은 얼굴을 번쩍 쳐들었다.“따라와!”말투가 꽤 사납고 살짝 협박하는 투였다.다만 이건 단지 그녀만의 생각이다.설영준이 듣는 입장에서는 전혀 아무렇지 않았다.방금 사무실에서 송재이가 놀란 표정으로 교장에게 이렇게 말했다.“왜 고작 3개월이에요? 3개월은 너무 짧아요...”그 순간 설영준은 하마터면 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라 그녀의 목을 조를 뻔했다.3개월이란 시간이 짧다니?그는 단 3일도 송재이를 내보내고 싶지 않았다.원래도 기분이 언짢았는데 지금 막상 그녀에게 ‘협박’을 당하니 가슴에 꽉 막혔던 돌덩어리가 이상하게 사라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설영준은 가끔 본인이 참 비열해 보였다.두 사람은 앞뒤로 나란히 빌딩을 나섰다.송재이가 머리를 돌리자 설영준이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유유하게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그의 이런 모습을 보니 송재이는 또다시 울화가 치밀었다.“네가 몰래 손 쓴 거지?”그녀가 물었다.설영준은 눈썹을 치키며 대답했다.“아니!”“너!”“몰래가 아니라 대놓고 그랬어.”설영준은 스스럼없이 대답했다.그녀는 이 남자가 바로 승인할 줄은 미처 몰랐던지 두 눈을 부릅떴다.“네가 뭔데 제멋대로 내 유학 시간을 줄여? 분명 6개월이라고 했는데 이젠 고작 3개월이야. 대체 그 시간 동안 뭘 배우라는 건데?”“열심히 공부할 마음만 있다면 3개월도 족해.”설영준이 표정 변화 없이 대답했다.“벌써 몇 번째 묻는 건지 모르겠지만 내가 어딜 가든 얼마나 오래 있든 대체 너랑 뭔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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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0화 웃고 계시다니?

송재이는 황급히 구급차를 불러서 허둥지둥 니콜을 병원까지 실어갔다.가는 길에서 니콜이 정신을 차렸다.“나 저혈당이라서 조금만 방심해도 병이 발작하거든. 괜찮아, 별문제 아니야...”비록 이렇게 말했지만 송재이는 여전히 마음이 안 놓여 한사코 그녀를 데리고 병원에 가서 전면 검진을 받았다.니콜이 검사를 받을 때 송재이는 복도에서 그녀를 기다렸다.이때 의사로 보이는 금발의 외국인 두 명이 이쪽으로 걸어오며 나지막이 말했다.“얼마 전까지 시험 압력이 너무 커서 계속 불면증에 시달렸는데 어제 케빈 교수가 추천한 약을 먹고 진짜 단잠을 잔 거야. 눈 떠보니 날이 환히 밝았더라고. 심지어 아무런 부작용도 없이 너무 개운하고 머리가 맑아진 기분이었어...”“너 그 불면증 고질병 아니야? 무슨 약인데? 나도 몇 알 줘봐. 안 그래도 요즘 사람들은 좋은 수면 질량을 유지하기가 너무 어렵더라고...”그들은 말하면서 송재이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한편 송재이는 두 귀를 쫑긋 세우고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다.실은 설영준도 수면 질량이 나쁜 거로 알고 있다.그는 젊은 나이에 홀로 그런 어마어마한 대기업을 운영하고 있다.다른 사람들이 볼 땐 그가 회사를 이어받고 나서부터 흐트러짐 없이 너무 완벽하게 경영해나가는 모습이었다.설동훈과 비하면 더 잘하면 잘했지 절대 뒤처지진 않았다.하지만 송재이는 잘 안다. 그가 누구보다 압력이 크고 어깨에 짊어진 짐이 한없이 무겁다는 것을.가끔 새벽에 일어날 때 설영준이 옆에 없으면 바로 서재에 가서 그를 찾곤 했다.그때마다 설영준은 통유리창 앞에 서서 담배를 피우며 그토록 고독하고 적적한 뒷모습을 하고 있었다.송재이는 얼른 앞으로 다가가 영어로 두 의사에게 물었다.“실례지만 그 약 이름이 뭐예요? 불면증 치료에 효과가 있나요?”...니콜은 검사를 마친 후 송재이와 함께 병원을 나섰다.송재이는 손에 봉투를 하나 들고 있었다.“재이, 그건 뭐야?”니콜이 의아한 듯 물었다.“친구한테 주려고 샀어.”송재이가 자연스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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