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영준은 양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느긋하게 교실 밖의 복도를 거닐었다.이때 문득 가까운 곳에 있는 가녀린 실루엣이 보였다.오후 햇살이 그녀를 내리쬐었다. 그녀는 한창 촉촉이 젖은 눈동자로 원수를 쳐다보듯 그를 째려보았다.설영준은 걸음을 멈추고 그녀와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여기는 학교인지라 그녀도 굳이 밖에서 그와 다투며 남들의 웃음거리로 전락하고 싶지 않았다.송재이는 입술을 꼭 깨물고 차오르는 분노를 참으며 성큼성큼 그의 앞에 다가가 작은 얼굴을 번쩍 쳐들었다.“따라와!”말투가 꽤 사납고 살짝 협박하는 투였다.다만 이건 단지 그녀만의 생각이다.설영준이 듣는 입장에서는 전혀 아무렇지 않았다.방금 사무실에서 송재이가 놀란 표정으로 교장에게 이렇게 말했다.“왜 고작 3개월이에요? 3개월은 너무 짧아요...”그 순간 설영준은 하마터면 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라 그녀의 목을 조를 뻔했다.3개월이란 시간이 짧다니?그는 단 3일도 송재이를 내보내고 싶지 않았다.원래도 기분이 언짢았는데 지금 막상 그녀에게 ‘협박’을 당하니 가슴에 꽉 막혔던 돌덩어리가 이상하게 사라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설영준은 가끔 본인이 참 비열해 보였다.두 사람은 앞뒤로 나란히 빌딩을 나섰다.송재이가 머리를 돌리자 설영준이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유유하게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그의 이런 모습을 보니 송재이는 또다시 울화가 치밀었다.“네가 몰래 손 쓴 거지?”그녀가 물었다.설영준은 눈썹을 치키며 대답했다.“아니!”“너!”“몰래가 아니라 대놓고 그랬어.”설영준은 스스럼없이 대답했다.그녀는 이 남자가 바로 승인할 줄은 미처 몰랐던지 두 눈을 부릅떴다.“네가 뭔데 제멋대로 내 유학 시간을 줄여? 분명 6개월이라고 했는데 이젠 고작 3개월이야. 대체 그 시간 동안 뭘 배우라는 건데?”“열심히 공부할 마음만 있다면 3개월도 족해.”설영준이 표정 변화 없이 대답했다.“벌써 몇 번째 묻는 건지 모르겠지만 내가 어딜 가든 얼마나 오래 있든 대체 너랑 뭔 상
송재이는 황급히 구급차를 불러서 허둥지둥 니콜을 병원까지 실어갔다.가는 길에서 니콜이 정신을 차렸다.“나 저혈당이라서 조금만 방심해도 병이 발작하거든. 괜찮아, 별문제 아니야...”비록 이렇게 말했지만 송재이는 여전히 마음이 안 놓여 한사코 그녀를 데리고 병원에 가서 전면 검진을 받았다.니콜이 검사를 받을 때 송재이는 복도에서 그녀를 기다렸다.이때 의사로 보이는 금발의 외국인 두 명이 이쪽으로 걸어오며 나지막이 말했다.“얼마 전까지 시험 압력이 너무 커서 계속 불면증에 시달렸는데 어제 케빈 교수가 추천한 약을 먹고 진짜 단잠을 잔 거야. 눈 떠보니 날이 환히 밝았더라고. 심지어 아무런 부작용도 없이 너무 개운하고 머리가 맑아진 기분이었어...”“너 그 불면증 고질병 아니야? 무슨 약인데? 나도 몇 알 줘봐. 안 그래도 요즘 사람들은 좋은 수면 질량을 유지하기가 너무 어렵더라고...”그들은 말하면서 송재이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한편 송재이는 두 귀를 쫑긋 세우고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다.실은 설영준도 수면 질량이 나쁜 거로 알고 있다.그는 젊은 나이에 홀로 그런 어마어마한 대기업을 운영하고 있다.다른 사람들이 볼 땐 그가 회사를 이어받고 나서부터 흐트러짐 없이 너무 완벽하게 경영해나가는 모습이었다.설동훈과 비하면 더 잘하면 잘했지 절대 뒤처지진 않았다.하지만 송재이는 잘 안다. 그가 누구보다 압력이 크고 어깨에 짊어진 짐이 한없이 무겁다는 것을.가끔 새벽에 일어날 때 설영준이 옆에 없으면 바로 서재에 가서 그를 찾곤 했다.그때마다 설영준은 통유리창 앞에 서서 담배를 피우며 그토록 고독하고 적적한 뒷모습을 하고 있었다.송재이는 얼른 앞으로 다가가 영어로 두 의사에게 물었다.“실례지만 그 약 이름이 뭐예요? 불면증 치료에 효과가 있나요?”...니콜은 검사를 마친 후 송재이와 함께 병원을 나섰다.송재이는 손에 봉투를 하나 들고 있었다.“재이, 그건 뭐야?”니콜이 의아한 듯 물었다.“친구한테 주려고 샀어.”송재이가 자연스럽게
설영준은 웃는 모습이 참 보기 좋다.같은 남자인 여진도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설영준이 감탄스러울 뿐이다. 표정 하나로만 뭇사람을 압도하는 매력을 지녔으니까.설영준은 답장을 다 보낸 후 무심코 머리를 들었다.이때 마침 백미러로 자신을 쳐다보는 여진과 시선이 마주쳤다.여진은 뻘쭘한 듯 얼른 눈길을 피했다.한편 설영준은 화내지 않고 불쑥 이런 질문을 건넸다.“여 비서님은 여자친구 있어요?”여진은 화들짝 놀라며 하마터면 핸들을 쥔 손이 미끄러질 뻔했다. 그는 얼른 자세를 다잡고 설영준에게 대답했다.“아직 없습니다.”“그래요. 그럼 얼른 여자친구 찾아요.”설영준은 처음 부하직원인 여진에게 이런 말을 해본다.평소에 그는 타인의 사생활이나 가십거리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근데 오늘 웬일인지 방금 카톡을 하고 나서부터 이러고 있다.“대표님, 송재이 씨 유학 가신지 한 달 가까이 됐죠?”여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아니나 다를까 설영준의 미소가 그대로 굳었다.그는 마른기침을 두어 번 하고는 창가에 머리를 기댔다.그의 눈가에 송재기를 향한 그리움이 잔뜩 묻어났다.“제외 얘기가 갑자기 왜 나와요? 운전이나 해요 얼른!”성영준은 정색하며 여진에게 쏘아붙였다.질책이긴 하지만 그의 옆에서 수년간 일해오면서 여진은 당연히 알아들을 수 있다. 성영준은 사실 너무 단호한 말투는 아니었다.역시 송재이여야만 했다.여진은 다 알고 있지만 굳이 까발리지 않았다....송재이는 설영준의 답장을 받은 후 기숙사로 돌아와 얼른 택배를 불러서 내일 바로 국내에 물건을 부치기로 했다.택배를 기다리는 동안 그녀는 소파에 앉아 심심한 듯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그러던 중 우연히 문예슬의 인스타에 들어가 보았다.문정 그룹에 들어가기 전까지 그녀의 인스타에는 대부분 여행 다니는 사진이거나 최신상 명품백들을 구매한 사진들이었다.하지만 문정 그룹에서 근무한 이후로 피드를 올리는 횟수도 점차 줄어들었다.간혹 올린다 해도 전부 자사 제품 광고거나 일부 상업적인 사항이었다.그녀
니콜이 그녀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눈물범벅이 된 그녀를 보더니 니콜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대체 왜 그래? 누가 괴롭혔어?”니콜은 바짝 긴장해 하며 물었다.송재이는 흐느끼면서 영어로 니콜에게 물었다.“넌 누군가를 좋아해 본 적 있어?”니콜은 흠칫 놀라더니 머리를 끄덕였다.“당연하지!”“그럼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 널 너무 좋아하지 않거나 또 혹은 말로는 네가 좋다고 하더니 돌아서서 딴사람 좋아하게 된다면 어떻게 단념할 거야?”“그거야 당연히 새로운 연애를 시작해야지!”니콜은 연애 경험이 매우 풍부하다.송재이가 감정 문제로 이토록 처참하게 우는 걸 알고 나니 금세 잠이 확 깼다.그녀는 송재이에게 ‘수업’을 열기 시작했다.“자고로 한 나무에만 매달릴 수 없는 법이야. 여기 앉아서 남자 때문에 울 바엔... 가자, 내가 좋은 곳 데려가 줄게. 너 금방 기분 전환될 거야!”송재이는 얼떨결에 니콜에게 이끌려 소파에서 일어났다.그녀는 눈물을 닦으며 화장실로 끌려가 세수를 했다.니콜이 대체 어디로 데려갈지 그녀는 전혀 몰랐다.한 시간 후, 송재이는 드디어 알게 됐다.니콜이 말한 ‘좋은 곳’은 바로 이 도시에서 가장 큰 바였다.송재이는 M국에 온 지 어언간 한 달이 되어가는데 줄곧 학업에만 전념하다 보니 일반 유학생들처럼 밤에 나가서 놀지 못했다.하지만 니콜은 자주 드나드는 걸 알고 있었다.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금발의 웨이터가 능숙하게 니콜과 인사했다.니콜은 매우 여유 넘치는 모습으로 칵테일 두 잔을 주문했다.“재이 넌 평소에 너무 갇혀있기만 했어. 잘 생각해봐. 바깥세상이 이렇게 큰데 여기저기 잘생긴 남자들 천지잖아...”이날 밤 송재이는 술을 많이 마셨다.설영준이 딴 여자랑 춤을 춘 일로 그녀는 상심이 너무 컸다.하여 니콜이 건네는 술을 거부하지 않고 전부 다 마셨다.옆 테이블에 일여덟 명의 젊은이가 앉아 있었는데 이 근처 의대생인 것 같았다. 그들은 송재이와 니콜에게 함께 놀자고 했다.송재이의 동양적인 외모와 깔끔하고 온화
송재이는 그 스토리를 올릴 때 이미 인사불성이 되어버렸다.아침에 깨나서 어젯밤에 했던 일을 떠올린 후 재빨리 그 스토리를 삭제했다.자극받은 거냐고 묻는다면 부인할 수도 없다.그녀는 확실히 설영준에게 자극받았으니까.그래서 니콜과 함께 바에 가서 실컷 술을 마셨고 몇몇 잘생긴 남자애들이랑 신나게 놀았다.사진을 찍을 때 뒤에 있던 잘생긴 남자가 그녀에게 미리 어깨에 손을 올려도 되냐고 물었었다.그때 송재이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취기에 흐릿해진 눈빛으로 그 남자를 쳐다보며 머리를 끄덕였다.“당연하지!”설영준은 정아현을 안고 춤을 추는데 그녀라고 왜 딴 남자가 어깨에 손도 못 올리게 할까?그녀는 지금 자유의 몸이고 오직 본인만 위해서 살면 그뿐이다.하지만 나중에 생각해보니 이 스토리는 전체 공개여서 남도 사립예술학교의 동료들과 교장까지 전부 볼 수 있었다...설영준을 무시할 순 있지만 다른 사람들까지 신경 쓰지 않을 순 없었다.한편 피드를 삭제하자마자 카톡이 울렸다.[정말 그토록 외로운 거라면 그 도시의 관광지나 둘러봐봐. 수요되면 가이드도 소개해줄게.]그건 바로 설영준이 보낸 카톡이었다.송재이는 어리둥절해졌다. 이 남자가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걸까?다만 첫 마디에 그녀에게 ‘외로운 거라면’이라고 말했다.송재이는 추측에 나섰다. 설영준은 아마도 어젯밤에 그녀가 취기에 올린 피드를 보고 허전해서 바에 가 잘생긴 남자들과 놀고 온 줄로 착각하나 보다.그래서 이런 ‘제안’을 하며 선심 쓰듯 가이드까지 소개해주겠다고 한 것이다.‘웃겨 정말!’송재이는 달랑 물음표만 하나 보냈다.‘본인이 뭐라도 된 줄 아나 봐?’‘네가 내 상사야? 선배야? 아니면 인생 멘토라도 돼?’해외까지 나왔는데 아직도 그녀에게 삿대질하고 있다니!설영준이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가이드 필요해?]송재이는 이를 악물고 단답형으로 말했다.[필요 없어!]‘이 여자가! 나한테만 사납게 굴고 그 외국인들 앞에선 배시시 웃으며 신나게 놀아?’‘완전 앞뒤가 다른 여자네
이날 박윤찬은 마침 로펌에 있었다.송재이와 전화한 지 1시간도 채 안 돼 그녀가 로펌으로 찾아왔다.박윤찬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크고 작은 쇼핑백을 한가득 들고 문 앞에 서 있는 그녀를 보며 박윤찬이 물었다.“아니... 뭘 이렇게 많이 사 왔어요?”송재이는 방긋 웃으며 안으로 들어가 그의 책상 위에 물건을 올려놓았다.그리고 하나둘씩 꺼내기 시작했다.“이 셔츠랑 재떨이는 윤찬 씨 거고 가죽 지갑은 도영이 거예요. 나중에 도영이 만나거든 잊지 말고 전해줘요.”박윤찬은 그녀가 머리를 숙이고 물건을 꺼내는 모습을 보더니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왠지 모르게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졌다.그녀를 만나서 반가운 것도 있고 챙겨온 선물 중에 본인 것도 있어서 너무 기뻤다.“설영준 씨 거는요? 직접 전해주게요?”박윤찬이 무심코 물었다.이에 송재이가 손을 움찔거리며 대답했다.“안 샀어요. 그 사람은 뭐가 부족하겠어요?”박윤찬은 멍하니 넋 놓고 말았다.“영준 씨 선물은 아무것도 없다고요?”“필요한 것도 없잖아요 영준 씨는...”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사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설영준이 문 앞에 떡하니 서서 그녀에게 물었다.“내가 필요한 게 있는지 없는지 네가 어떻게 알아?”갑작스러운 목소리에 송재이는 화들짝 놀랐다.‘이 인간이 여길 왜 왔지?’그녀의 놀란 두 눈을 본 설영준은 쓴웃음을 지었다.그는 송재이의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와 책상 위에 놓인 한 무더기 선물을 쭉 둘러보았다.송재이는 이 선물들을 가지런히 배열해놓았다.그도 방금 문밖에서 그녀가 한 말을 다 들었다.설영준을 위해 준비한 선물은 없었다.‘아주 잘났어 송재이!’“내 약은 어디 있어?”설영준이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송재이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정신을 다잡았다.“아 그건 원래 영준 씨한테 부치려다가 나중에 까먹었어. 올 때 함께 챙겨오려고 했는데 룸메가 요즘 불면증에 시달린다고 해서 그냥 줬어.”송재이는 아무렇지 않게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
송재이는 경주에 하루만 있고 그날 밤으로 남도에 돌아갈 예정이었다.이때 뜻밖에도 서유리가 또 선뜻 공항까지 배웅하겠다고 했다.송재이는 거절하지 않았다.서유리가 운전하고 송재이는 조수석에 앉았다.공항으로 가는 길 내내 두 사람은 신나게 웃고 떠들었다.그녀들 뒤에서 차 한 대가 말없이 한동안 따라붙은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말이다.차가 공항 입구에 세워졌다.송재이가 먼저 내리고 서유리는 주차하러 가겠다고 했다.서유리는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백미러로 뒤에 있는 승합차를 발견했는데 안에서 건장한 청년 세 명이 내려왔다.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송재이도 그녀의 표정을 보더니 따라서 미간을 구겼다.고개를 돌리자 건장한 체구의 청년 중 한 명이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재이 씨!”서유리가 소리쳤다.“으악!”송재이가 정신을 차렸을 때 이미 그 청년에게 강제로 끌려서 차에 올라탔다.너무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라 서유리는 완전히 넋이 나갔다.멀쩡한 대낮에 바로 그녀의 눈앞에서 송재이가 납치를 당한 것이다.난생처음 겪는 일이라 서유리는 한참 동안 넋이 나갔다.그녀는 겨우 정신을 다잡고 가장 먼저 경찰에 신고했다.하지만...신고하고 나서도 여전히 마음이 안 놓였다.이때 서유리의 머릿속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그녀는 고민 없이 바로 그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여보세요, 윤찬 씨 저에요...”그녀는 휴대폰을 꽉 잡고 울상이 되어 겨우 말을 이었다....설한 그룹.설영준은 사무실에 앉아서 컴퓨터 모니터를 멍하니 쳐다봤다.여 비서가 노크하자 그는 귀찮은 듯 미간을 찌푸렸다.“무슨 일이에요?”여 비서는 초조한 얼굴로 그에게 보고했다.“대표님 휴대폰이 꺼져 있어서 박윤찬 씨가 연락이 안 된다고 하셔서요.”박윤찬은 설영준에게 연락이 안 닿으니 하는 수 없이 여진에게 전화를 걸었다.“왜요? 무슨 일 있어요?”설영준은 여진의 표정을 보더니 미간을 더 세게 찌푸렸다.전화를 받자 박윤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시각 승합차 안에서 송재이는 두 손이 끈에 묶인 채 눈가에 검은 천으로 가려져 아무것도 안 보였다.대충 짐작해보니 이 차가 지금 40분 남짓 달리고 있었다.주변 환경이 점점 더 조용해졌다.분위기가 고요해질수록 더 섬뜩해지는 법이다.드디어 차가 멈춰 섰다.벌컥 하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차 문을 열고 그녀를 안에서 끌어냈다.송재이는 걸음을 휘청거리며 그대로 바닥에 무릎을 박았다.뼈가 부서질 듯한 고통이 온몸에 쫙 퍼져 흘렀다.“이년 몸매 좋네. 이 허리며 다리까지...”“쯧쯧, 벌써 고픈 거야? 이따가 너 실컷 따먹게 해줄 테니까 급할 거 없어!”“어떻게 안 급해! 지금 이미 경찰에 찍혔을지도 모르잖아 우리!”“꺼져! 재수 없게 쯧쯧! 우리 이런 일 한두 번이야? 언제 실패한 적 있어? 그리고 고용주가 돈까지 다 보내왔는데 돈 받고 일을 안 하면 룰에 어긋나는 거야. 앞으로 누가 감히 우릴 찾아주겠어?”몇 사람들의 대화가 송재이의 귓가에 고스란히 들렸다.그녀는 속으로 묵묵히 생각했다.‘거 참 투철한 직업 정신이네. 납치범 짓거리나 하면서도 신용을 지킨다는 거야?’그녀는 참지 못하고 속으로 비아냥거렸다.그와 동시에 몇 가지 정보를 추측해냈다.예를 들어 이 사람들은 어떤 고용주의 위탁을 받고 이런 일을 벌이는 것이니 아마 그녀의 목숨을 앗아가려는 건 아닐 듯싶었다. 단지... 그녀를 망가뜨리고 싶은 거겠지.송재이는 대체 어디서 누구랑 이런 극심한 원한을 맺은 걸까? 도통 납득이 가질 않았다.그녀는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조금만 움직여도 온몸이 찢어질 듯 아팠다.방금 납치돼서 차에 탄 후 그녀는 줄곧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건장한 사내들 중 한 명이 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안 씻었는지도 모를 손수건을 꺼내더니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순간 약 냄새가 그녀의 코를 확 찔렀다.그때부터 머리가 무겁고 붕 뜬 기분이 들면서 온몸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아무래도 이 인간들이 약을 탄 모양이다...“다들 대체 뭐 하는 인간들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