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이는 경주에 하루만 있고 그날 밤으로 남도에 돌아갈 예정이었다.이때 뜻밖에도 서유리가 또 선뜻 공항까지 배웅하겠다고 했다.송재이는 거절하지 않았다.서유리가 운전하고 송재이는 조수석에 앉았다.공항으로 가는 길 내내 두 사람은 신나게 웃고 떠들었다.그녀들 뒤에서 차 한 대가 말없이 한동안 따라붙은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말이다.차가 공항 입구에 세워졌다.송재이가 먼저 내리고 서유리는 주차하러 가겠다고 했다.서유리는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백미러로 뒤에 있는 승합차를 발견했는데 안에서 건장한 청년 세 명이 내려왔다.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송재이도 그녀의 표정을 보더니 따라서 미간을 구겼다.고개를 돌리자 건장한 체구의 청년 중 한 명이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재이 씨!”서유리가 소리쳤다.“으악!”송재이가 정신을 차렸을 때 이미 그 청년에게 강제로 끌려서 차에 올라탔다.너무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라 서유리는 완전히 넋이 나갔다.멀쩡한 대낮에 바로 그녀의 눈앞에서 송재이가 납치를 당한 것이다.난생처음 겪는 일이라 서유리는 한참 동안 넋이 나갔다.그녀는 겨우 정신을 다잡고 가장 먼저 경찰에 신고했다.하지만...신고하고 나서도 여전히 마음이 안 놓였다.이때 서유리의 머릿속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그녀는 고민 없이 바로 그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여보세요, 윤찬 씨 저에요...”그녀는 휴대폰을 꽉 잡고 울상이 되어 겨우 말을 이었다....설한 그룹.설영준은 사무실에 앉아서 컴퓨터 모니터를 멍하니 쳐다봤다.여 비서가 노크하자 그는 귀찮은 듯 미간을 찌푸렸다.“무슨 일이에요?”여 비서는 초조한 얼굴로 그에게 보고했다.“대표님 휴대폰이 꺼져 있어서 박윤찬 씨가 연락이 안 된다고 하셔서요.”박윤찬은 설영준에게 연락이 안 닿으니 하는 수 없이 여진에게 전화를 걸었다.“왜요? 무슨 일 있어요?”설영준은 여진의 표정을 보더니 미간을 더 세게 찌푸렸다.전화를 받자 박윤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시각 승합차 안에서 송재이는 두 손이 끈에 묶인 채 눈가에 검은 천으로 가려져 아무것도 안 보였다.대충 짐작해보니 이 차가 지금 40분 남짓 달리고 있었다.주변 환경이 점점 더 조용해졌다.분위기가 고요해질수록 더 섬뜩해지는 법이다.드디어 차가 멈춰 섰다.벌컥 하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차 문을 열고 그녀를 안에서 끌어냈다.송재이는 걸음을 휘청거리며 그대로 바닥에 무릎을 박았다.뼈가 부서질 듯한 고통이 온몸에 쫙 퍼져 흘렀다.“이년 몸매 좋네. 이 허리며 다리까지...”“쯧쯧, 벌써 고픈 거야? 이따가 너 실컷 따먹게 해줄 테니까 급할 거 없어!”“어떻게 안 급해! 지금 이미 경찰에 찍혔을지도 모르잖아 우리!”“꺼져! 재수 없게 쯧쯧! 우리 이런 일 한두 번이야? 언제 실패한 적 있어? 그리고 고용주가 돈까지 다 보내왔는데 돈 받고 일을 안 하면 룰에 어긋나는 거야. 앞으로 누가 감히 우릴 찾아주겠어?”몇 사람들의 대화가 송재이의 귓가에 고스란히 들렸다.그녀는 속으로 묵묵히 생각했다.‘거 참 투철한 직업 정신이네. 납치범 짓거리나 하면서도 신용을 지킨다는 거야?’그녀는 참지 못하고 속으로 비아냥거렸다.그와 동시에 몇 가지 정보를 추측해냈다.예를 들어 이 사람들은 어떤 고용주의 위탁을 받고 이런 일을 벌이는 것이니 아마 그녀의 목숨을 앗아가려는 건 아닐 듯싶었다. 단지... 그녀를 망가뜨리고 싶은 거겠지.송재이는 대체 어디서 누구랑 이런 극심한 원한을 맺은 걸까? 도통 납득이 가질 않았다.그녀는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조금만 움직여도 온몸이 찢어질 듯 아팠다.방금 납치돼서 차에 탄 후 그녀는 줄곧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건장한 사내들 중 한 명이 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안 씻었는지도 모를 손수건을 꺼내더니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순간 약 냄새가 그녀의 코를 확 찔렀다.그때부터 머리가 무겁고 붕 뜬 기분이 들면서 온몸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아무래도 이 인간들이 약을 탄 모양이다...“다들 대체 뭐 하는 인간들이야?
몇 사람들은 그녀의 말을 듣더니 서로를 멀뚱멀뚱 쳐다봤다.그중에서 키가 제일 큰 한 명이 쪼그리고 앉아서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그녀에게 물었다.“방금 뭐라고 했어?”송재이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날 화끈하게 해준다며? 난 이렇게 어두컴컴한 게 싫거든...”그녀는 역겨움을 꾹 참고 제 뜻을 완전히 어긋난 채 그들과 시간을 끌고 있었다.“어쭈, 이거 진짜 XX년이네...”그 남자는 한없이 추악한 말들을 내뱉었다. 이에 송재이는 이를 악물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그녀는 또다시 억지 미소를 쥐여 짜냈다.“그러니까 얼른 안대 좀 풀어!”“형, 안대 푼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어차피 이년 두 손 다 묶여있잖아.”뒤에 있던 부하 두 명이 그에게 말하자마자 앞으로 다가가 송재이의 안대를 풀었다.그녀는 갑작스럽게 비친 눈 부신 빛에 참지 못하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잠시 적응한 후에야 다시 떴다.곧이어 눈앞에 서 있는 세 남자의 얼굴을 똑똑히 지켜봤다.그들에게 이끌려 차에 탈 땐 모든 게 너무 갑작스러웠다.이제야 느끼하고 옹졸한 면상을 보게 되니 실로 역겨울 따름이었다.방금 그들의 대화로 들어볼 때 이 인간들은 전문 납치범으로 이전에도 몇 번 이딴 짓을 한 듯싶다.이는 무심코 송재이에게 지금 처한 상황이 위험 지수가 더 높아졌다는 걸 말해주고 있다.이때 불쑥 카톡 알림 소리가 울렸다.남자는 고개를 숙이고 휴대폰을 들여다보더니 누런 이를 드러내고 환하게 웃었다.“형, 입금됐어!”“오케이. 넌 일단 문 앞에서 망보고 있어. 내가 먼저 맛 좀 봐야지, 우리 예쁜 아가씨...”두목으로 보이는 자가 말하며 벨트를 풀기 시작했다.한편 옆에 있던 부하는 휴대폰을 꺼내서 이 과정을 영상으로 찍어두려는 듯싶었다.송재이는 두목에게 발목이 잡힌 채 그의 몸 아래로 질질 끌려갔다.이때 그녀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변하더니 몸을 홱 돌리고 손에 묶었던 끈도 어느샌가 칼로 잘라버렸다.송재이는 침착한 얼굴로 눈앞의 남자를 쳐다봤다. 그 남자가 감히 한
서유리의 마지막 그 한마디는 팩트이긴 하지만 그녀의 사심을 담고 있기도 했다.송재이가 사고를 당한 후 설영준이 얼마나 애타게 걱정했는지는 지나가는 멍청이도 다 알아볼 지경이었다.그가 이토록 초조하게 송재이를 걱정하는 걸 봐서 서유리는 측은지심이 발동해 몰래 그를 도와줬다.서유리의 말을 들은 송재이는 고개를 돌리고 설영준을 쳐다봤다.이때 경찰이 다가와 현장 상황을 기록하려 했다.송재이가 이제 막 협조하려 하는데 설영준이 덥석 가로챘다.“재이 지금 상처가 심해서 병원부터 가봐야 해요...”“잠시만요.”차 문을 닫으려 할 때 방금 팀을 이끌고 돌진해오던 형사팀 팀장이 앞으로 다가와 납치범한테서 수색한 휴대폰을 꺼내 두 사람에게 보여줬다.“두 분 이 사람 알아요?”“주현아??”“주현아...”설영준과 송재이는 거의 동시에 그녀의 이름을 말했다.송재이는 좀 전에 납치됐을 때 납치범들이 고용주와 연락했던 일이 떠올랐다.그러니까 그들이 연락한 사람이 바로 주현아였단 말인가?송재이는 설영준을 힐긋 쳐다봤다.설영준은 사색이 된 채 이를 악물었다.어쨌거나 그의 전 약혼녀였으니 지금 과연 무슨 느낌일까?‘근데 주현아 씨 해외 나간 거 아니었어?’‘언제 돌아왔대?’‘왜 오자마자 나한테 이런 짓을 벌이는 거냐고?’송재이가 묵묵히 생각했다. 옆에 있던 설영준은 안색이 섬뜩하리만큼 짙어지고 지나가는 파리 새끼도 그가 내뿜는 한기에 얼어 죽일 기세였다.지금 이 순간, 그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송재이는 납치를 당한 피해자로서 경찰에게 자신의 납치 과정을 자세히 설명했다.다른 사람들은 전부 옆에서 기다리며 그녀가 진술하는 섬뜩한 납치 과정을 듣고 있었다.진술을 마치고는 곧장 병원으로 실려 갔다.다행히 전부 외상이라 붕대를 감고 찰과상에 바르는 약과 소염제를 챙겨서 병원을 떠났다.“일단 경주에서 몸 회복해.”돌아가는 길에서 설영준이 갑자기 한 마디 내던졌다.“아니, 괜...”송재이는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그의 따가운
송재이는 단순히 1층 거실에 더 머물고 싶지 않아서 2층으로 올라갔을 뿐이다.그녀는 지금 기분이 별로였다.좀 전에 납치되고 난 이후로 그녀를 납치범의 손에서 구해준 것도 설영준이고, 교장에게 대신 휴가를 신청받은 것도 설영준이니 한순간 어떻게 그를 마주해야 좋을지 몰랐다.두 사람은 분명 헤어진 사이인데 왜 항상 깔끔하게 끝내지 못한 기분이 들까?생각만 해도 우울할 따름이었다.애초에 이곳에서 이사 나갔을 때 이미 모든 물건을 챙겨가서 지금 방 안에는 설영준의 옷밖에 안 남았을 것이다...적어도 송재이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하지만 옷장을 대충 열어보았는데 뜻밖에도 안에는 설영준의 셔츠와 정장 바지가 가지런히 놓여있을 뿐만 아니라 여자 옷도 꽤 많이 걸려 있었다.전부 이 시즌에 맞는 최신상 옷들과 치마, 심지어... 속옷까지 들어 있었다.그녀는 살짝 못 믿겠다는 듯 제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설영준이 만약 정말 집안에 여자라도 숨겼다면 감히 송재이를 데리고 별장에 들어올까?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는 한 그럴 일은 절대 없다!“뭐해?”이때 뒤에서 불쑥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송재이는 놀라서 몸을 움찔거렸다.그녀는 오늘 설영준이 어떻게 자신이 납치당한 줄 알고 현장까지 찾아왔는지 전혀 모른다. 하지만 그토록 급박한 순간에 사람들을 거느리고 와주니 마음속으론 너무 고맙고 감동스러울 따름이었다.둘은 지금 아무 사이도 아닌데 설영준이 여전히 위험한 순간마다 나타나 주니 어찌 됐든 그에게 고마워해야 할 일이다.생각은 이렇게 하지만 옷장에 가득 찬 여자 옷들을 본 순간 마음이 씁쓸한 건 어쩔 수 없었다.“아니야 아무것도.”그녀는 시선을 아래로 떨구고 옷장 문을 닫은 후 머리를 푹 숙이고 그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설영준은 그녀가 기분 상한 걸 바로 알아챘다.직감이 말해주길 오늘 발생한 일 때문은 아닌 듯싶었다.그는 방금 송재이가 닫았던 옷장 문을 힐긋 보더니 가까이 다가가 다시 열었는데 안에 여자 옷들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설영준은
이제 막 그에게 고마운 마음이 되살아나려 했는데 순식간에 수포가 되었다.이 남자는 말 그대로 병 주고 약 주는 타입이다.설영준은 어디서 그 많은 힘이 남아도는지 그녀를 번쩍 들어서 어깨에 둘러업었다.송재이는 머리가 아래로 향해서 그가 드디어 놓아주자 머리카락도 잔뜩 헝클어지고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왜 이래 정말? 나 집에 갈 거라고!”한편 설영준은 그녀를 떼쓰는 어린애처럼 힐긋 쳐다보며 말했다.“꼼짝 마. 약 바르게.”송재이는 흠칫 놀랐다.방금 2층에 올라간 이유가 그녈 위해 약상자를 가지러 간 거라고?송재이는 다시 고개를 들어 이 남자의 한없이 짙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그는 웃을 듯 말 듯 한 표정으로 말했다.“나한테서 벗어나지 못해 안달이네 아주? 옛 감정이 되살아날까 봐 두려운 거야? 네가 원한대도 내 쪽에서 좀 더 고민해봐야 하거든.”설영준은 느긋하게 말했지만 이걸 들어야만 하는 송재이는 울화가 굴뚝 치밀었다.“설영준 씨, 착각하지 마! 스읍...”‘이 남자가 지금 일부러 나한테 복수하는 거야?’그는 면봉으로 그녀의 팔꿈치에 난 상처를 닦아줄 때 힘을 좀 더 가했다.송재이는 너무 아파서 이를 꼭 깨물었다.“진짜 이러기야?”“그래. 아파봐야 정신 차리지.”송재이는 본능적으로 손을 빼내려고 했다.하지만 그가 워낙 세게 잡고 있다 보니 꼼짝달싹할 수 없었다. 설영준은 그녀의 두 눈을 빤히 쳐다보며 잔뜩 정색한 표정을 지었지만 입을 여는 순간 한없이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살살할게.”“...”그의 변덕스러움에 송재이는 입이 쩍 벌어졌다.그녀는 이를 악물고 계속 말했다.“약 다 바르면 진짜 갈 거야. 여기 안 있어.”“위층에 있는 여자 옷 때문에 그래?”설영준이 약을 발라주며 머리도 안 든 채 그녀에게 넌지시 물었다.“아니.”송재이가 고집을 피우며 대답했다.설영준은 또다시 그녀를 힐긋 보더니 은은하게 경멸의 미소를 지으며 야유했다.“고집 피우긴!”“이 손 놔. 너 필요 없어...”“그 옷들 입
한편 송재이는 그날 밤으로 비행기 티켓을 끊고 남도로 돌아갔다.그녀는 설영준에게도 안 알렸고 다른 그 누구에게도 안 알렸다.이번에 경주에 돌아와서 발생한 일들은 마음을 차분하게 식힌 다음 다시 되새겨보면 그리 무서울 일도 아니다.설영준은 낯선 사람 대하듯 그녀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꽤 신경을 많이 써주고 있었다.수년간의 고달픈 짝사랑인 줄 알았는데 결코 그녀만의 원맨쇼가 아니었다. 송재이는 이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다.한편 배후에서 모든 걸 조종하는 사람은 바로 주현아였다.주현하는 늘 위험한 캐릭터였다. 심지어 송재이의 아이를 떼어내려는 잔인하고 섬뜩한 짓도 벌였었다.그런 그녀가 다시 돌아왔는데 송재이는 이 상황이 너무 이상하지만은 않았다.지난번에 주현아를 법의 제재를 받게 하지 못했다.하지만 이번엔 과연 다시 벗어날 수 있을까?경찰 진술 과정에서도 그녀는 이미 말했다시피 무조건 고소하고 법적 절차를 밟을 것이다.별다른 예외가 없다면 주현아는 이번에 썩 그리 행운스럽지는 못할 것이다....경주에서 남도까지 비행기로 고작 두 시간 정도 걸린다.송재이는 좌석에 허리를 기대고 두 눈을 감은 채 편히 잠을 잤다.그녀는 꿈을 하나 꾸었는데 꿈속에서 설영준이 딴 여자랑 꼭 껴안고 있었다.그는 한없이 애틋하고 부드러운 눈길로 그 여자를 바라봤다.두 사람의 실루엣은 송재이와 그리 멀지 않았다.근데 왜 두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는 걸까...송재이가 한참 몸부림친 끝에 그 둘도 마침내 그녀의 외침을 듣고 머리를 돌렸다.설영준의 눈가에 짜증과 증오로 가득 차 있었다.한편 그의 품에 안긴 여자는 몸매가 가녀린 것 말고는 얼굴이 좀처럼 잘 안 보였다.정아현일 수도 있고 또 혹은...송재이는 심장을 후벼 파듯 아프고 괴로웠다.그녀는 드디어 벌떡 눈을 떴다.이때 마침 비행기가 착륙했다.송재이는 숨을 깊게 들이쉬고 나서야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비행기에서 내릴 준비를 했다.다만 머릿속엔 온통 좀전의 꿈으로 차
주말, 두 사람은 카센터를 종일 돌아보다 나중에 송재이는 천만을 주고 산타나 한 대를 사서 오후에 바로 운전해 돌아왔다.기분이 좋은지 송재이는 운전하면서 카 오디오로 음악도 틀었다.경주에 있을 때 복잡하던 기분이 어느새 눈 녹듯 사라져 버렸다.밥 먹으려고 장소를 정하는 도중에 이원희가 윤수아의 전화를 받았다.학교에 일이 있어 이원희보고 학교 “학부모” 역을 해달라고 요청했다.윤수아는 여전히 이원희에게 많이 의지했고 무슨 일만 생기면 맨 처음으로 이원희에게 연락했다.이원희가 송재이에게 말했다.“유턴.”두 사람이 통화할 때 차 안이 조용해 송재이는 통화 내용을 대충 알아들었다.이원희가 말을 꺼내기 전에 송재이는 이미 윤수아 학교 방향으로 차를 운전하고 있었다.이원희를 학교 맞은편 길옆에 내려 주고 송재이는 집으로 출발했다.그때 문뜩 하늘을 보니 언제 생겼는지 먹장구름이 잔뜩 끼어있었고 바람도 불기 시작했다.불현듯 며칠 전에 봤던 최근 폭풍우가 닥칠 것이라는 뉴스가 생각났다.설마...송재이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송재이는 발에 힘을 줘 액셀을 밟으며 속도를 올려 빨리 집으로 돌아가려 했다.그런데 중도에서 도로 정체가 발생했다. 차창을 반 내리고 머리를 내밀어 보니 전방에 차량이 물 샐 틈 없이 꽉 막혀있었다.머리 위에서 번개가 번쩍이던 바로 그때 마침 휴대전화가 울렸다.이럴 때 울려오는 벨 소리는 사람을 초조하게 했다.송재이는 아예 전화벨을 무시해 버리고 온몸의 신경을 집중해 운전했다.바람이 점점 거세지더니 길옆의 나무에서 나뭇잎이 우수수 날리면서 차창으로 떨어졌다.송재이가 코너를 돌려고 할 때 갑자기 쾅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너무 갑작스레 발생한 일이라 송재이는 이 상황이 꿈만 같았다.눈 깜짝할 사이에 송재이의 차가 앞 차에 부딪혔다. 오늘 새로 산 차인데...접촉 사고는 큰일이 아니지만 송재이의 이마가 핸들에 부딪히면서 지끈거렸다.머리가 깨질 듯 아프고 머릿속에서는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손을 내밀어 이마를 만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