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사람들은 그녀의 말을 듣더니 서로를 멀뚱멀뚱 쳐다봤다.그중에서 키가 제일 큰 한 명이 쪼그리고 앉아서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그녀에게 물었다.“방금 뭐라고 했어?”송재이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날 화끈하게 해준다며? 난 이렇게 어두컴컴한 게 싫거든...”그녀는 역겨움을 꾹 참고 제 뜻을 완전히 어긋난 채 그들과 시간을 끌고 있었다.“어쭈, 이거 진짜 XX년이네...”그 남자는 한없이 추악한 말들을 내뱉었다. 이에 송재이는 이를 악물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그녀는 또다시 억지 미소를 쥐여 짜냈다.“그러니까 얼른 안대 좀 풀어!”“형, 안대 푼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어차피 이년 두 손 다 묶여있잖아.”뒤에 있던 부하 두 명이 그에게 말하자마자 앞으로 다가가 송재이의 안대를 풀었다.그녀는 갑작스럽게 비친 눈 부신 빛에 참지 못하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잠시 적응한 후에야 다시 떴다.곧이어 눈앞에 서 있는 세 남자의 얼굴을 똑똑히 지켜봤다.그들에게 이끌려 차에 탈 땐 모든 게 너무 갑작스러웠다.이제야 느끼하고 옹졸한 면상을 보게 되니 실로 역겨울 따름이었다.방금 그들의 대화로 들어볼 때 이 인간들은 전문 납치범으로 이전에도 몇 번 이딴 짓을 한 듯싶다.이는 무심코 송재이에게 지금 처한 상황이 위험 지수가 더 높아졌다는 걸 말해주고 있다.이때 불쑥 카톡 알림 소리가 울렸다.남자는 고개를 숙이고 휴대폰을 들여다보더니 누런 이를 드러내고 환하게 웃었다.“형, 입금됐어!”“오케이. 넌 일단 문 앞에서 망보고 있어. 내가 먼저 맛 좀 봐야지, 우리 예쁜 아가씨...”두목으로 보이는 자가 말하며 벨트를 풀기 시작했다.한편 옆에 있던 부하는 휴대폰을 꺼내서 이 과정을 영상으로 찍어두려는 듯싶었다.송재이는 두목에게 발목이 잡힌 채 그의 몸 아래로 질질 끌려갔다.이때 그녀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변하더니 몸을 홱 돌리고 손에 묶었던 끈도 어느샌가 칼로 잘라버렸다.송재이는 침착한 얼굴로 눈앞의 남자를 쳐다봤다. 그 남자가 감히 한
서유리의 마지막 그 한마디는 팩트이긴 하지만 그녀의 사심을 담고 있기도 했다.송재이가 사고를 당한 후 설영준이 얼마나 애타게 걱정했는지는 지나가는 멍청이도 다 알아볼 지경이었다.그가 이토록 초조하게 송재이를 걱정하는 걸 봐서 서유리는 측은지심이 발동해 몰래 그를 도와줬다.서유리의 말을 들은 송재이는 고개를 돌리고 설영준을 쳐다봤다.이때 경찰이 다가와 현장 상황을 기록하려 했다.송재이가 이제 막 협조하려 하는데 설영준이 덥석 가로챘다.“재이 지금 상처가 심해서 병원부터 가봐야 해요...”“잠시만요.”차 문을 닫으려 할 때 방금 팀을 이끌고 돌진해오던 형사팀 팀장이 앞으로 다가와 납치범한테서 수색한 휴대폰을 꺼내 두 사람에게 보여줬다.“두 분 이 사람 알아요?”“주현아??”“주현아...”설영준과 송재이는 거의 동시에 그녀의 이름을 말했다.송재이는 좀 전에 납치됐을 때 납치범들이 고용주와 연락했던 일이 떠올랐다.그러니까 그들이 연락한 사람이 바로 주현아였단 말인가?송재이는 설영준을 힐긋 쳐다봤다.설영준은 사색이 된 채 이를 악물었다.어쨌거나 그의 전 약혼녀였으니 지금 과연 무슨 느낌일까?‘근데 주현아 씨 해외 나간 거 아니었어?’‘언제 돌아왔대?’‘왜 오자마자 나한테 이런 짓을 벌이는 거냐고?’송재이가 묵묵히 생각했다. 옆에 있던 설영준은 안색이 섬뜩하리만큼 짙어지고 지나가는 파리 새끼도 그가 내뿜는 한기에 얼어 죽일 기세였다.지금 이 순간, 그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송재이는 납치를 당한 피해자로서 경찰에게 자신의 납치 과정을 자세히 설명했다.다른 사람들은 전부 옆에서 기다리며 그녀가 진술하는 섬뜩한 납치 과정을 듣고 있었다.진술을 마치고는 곧장 병원으로 실려 갔다.다행히 전부 외상이라 붕대를 감고 찰과상에 바르는 약과 소염제를 챙겨서 병원을 떠났다.“일단 경주에서 몸 회복해.”돌아가는 길에서 설영준이 갑자기 한 마디 내던졌다.“아니, 괜...”송재이는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그의 따가운
송재이는 단순히 1층 거실에 더 머물고 싶지 않아서 2층으로 올라갔을 뿐이다.그녀는 지금 기분이 별로였다.좀 전에 납치되고 난 이후로 그녀를 납치범의 손에서 구해준 것도 설영준이고, 교장에게 대신 휴가를 신청받은 것도 설영준이니 한순간 어떻게 그를 마주해야 좋을지 몰랐다.두 사람은 분명 헤어진 사이인데 왜 항상 깔끔하게 끝내지 못한 기분이 들까?생각만 해도 우울할 따름이었다.애초에 이곳에서 이사 나갔을 때 이미 모든 물건을 챙겨가서 지금 방 안에는 설영준의 옷밖에 안 남았을 것이다...적어도 송재이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하지만 옷장을 대충 열어보았는데 뜻밖에도 안에는 설영준의 셔츠와 정장 바지가 가지런히 놓여있을 뿐만 아니라 여자 옷도 꽤 많이 걸려 있었다.전부 이 시즌에 맞는 최신상 옷들과 치마, 심지어... 속옷까지 들어 있었다.그녀는 살짝 못 믿겠다는 듯 제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설영준이 만약 정말 집안에 여자라도 숨겼다면 감히 송재이를 데리고 별장에 들어올까?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는 한 그럴 일은 절대 없다!“뭐해?”이때 뒤에서 불쑥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송재이는 놀라서 몸을 움찔거렸다.그녀는 오늘 설영준이 어떻게 자신이 납치당한 줄 알고 현장까지 찾아왔는지 전혀 모른다. 하지만 그토록 급박한 순간에 사람들을 거느리고 와주니 마음속으론 너무 고맙고 감동스러울 따름이었다.둘은 지금 아무 사이도 아닌데 설영준이 여전히 위험한 순간마다 나타나 주니 어찌 됐든 그에게 고마워해야 할 일이다.생각은 이렇게 하지만 옷장에 가득 찬 여자 옷들을 본 순간 마음이 씁쓸한 건 어쩔 수 없었다.“아니야 아무것도.”그녀는 시선을 아래로 떨구고 옷장 문을 닫은 후 머리를 푹 숙이고 그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설영준은 그녀가 기분 상한 걸 바로 알아챘다.직감이 말해주길 오늘 발생한 일 때문은 아닌 듯싶었다.그는 방금 송재이가 닫았던 옷장 문을 힐긋 보더니 가까이 다가가 다시 열었는데 안에 여자 옷들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설영준은
이제 막 그에게 고마운 마음이 되살아나려 했는데 순식간에 수포가 되었다.이 남자는 말 그대로 병 주고 약 주는 타입이다.설영준은 어디서 그 많은 힘이 남아도는지 그녀를 번쩍 들어서 어깨에 둘러업었다.송재이는 머리가 아래로 향해서 그가 드디어 놓아주자 머리카락도 잔뜩 헝클어지고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왜 이래 정말? 나 집에 갈 거라고!”한편 설영준은 그녀를 떼쓰는 어린애처럼 힐긋 쳐다보며 말했다.“꼼짝 마. 약 바르게.”송재이는 흠칫 놀랐다.방금 2층에 올라간 이유가 그녈 위해 약상자를 가지러 간 거라고?송재이는 다시 고개를 들어 이 남자의 한없이 짙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그는 웃을 듯 말 듯 한 표정으로 말했다.“나한테서 벗어나지 못해 안달이네 아주? 옛 감정이 되살아날까 봐 두려운 거야? 네가 원한대도 내 쪽에서 좀 더 고민해봐야 하거든.”설영준은 느긋하게 말했지만 이걸 들어야만 하는 송재이는 울화가 굴뚝 치밀었다.“설영준 씨, 착각하지 마! 스읍...”‘이 남자가 지금 일부러 나한테 복수하는 거야?’그는 면봉으로 그녀의 팔꿈치에 난 상처를 닦아줄 때 힘을 좀 더 가했다.송재이는 너무 아파서 이를 꼭 깨물었다.“진짜 이러기야?”“그래. 아파봐야 정신 차리지.”송재이는 본능적으로 손을 빼내려고 했다.하지만 그가 워낙 세게 잡고 있다 보니 꼼짝달싹할 수 없었다. 설영준은 그녀의 두 눈을 빤히 쳐다보며 잔뜩 정색한 표정을 지었지만 입을 여는 순간 한없이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살살할게.”“...”그의 변덕스러움에 송재이는 입이 쩍 벌어졌다.그녀는 이를 악물고 계속 말했다.“약 다 바르면 진짜 갈 거야. 여기 안 있어.”“위층에 있는 여자 옷 때문에 그래?”설영준이 약을 발라주며 머리도 안 든 채 그녀에게 넌지시 물었다.“아니.”송재이가 고집을 피우며 대답했다.설영준은 또다시 그녀를 힐긋 보더니 은은하게 경멸의 미소를 지으며 야유했다.“고집 피우긴!”“이 손 놔. 너 필요 없어...”“그 옷들 입
한편 송재이는 그날 밤으로 비행기 티켓을 끊고 남도로 돌아갔다.그녀는 설영준에게도 안 알렸고 다른 그 누구에게도 안 알렸다.이번에 경주에 돌아와서 발생한 일들은 마음을 차분하게 식힌 다음 다시 되새겨보면 그리 무서울 일도 아니다.설영준은 낯선 사람 대하듯 그녀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꽤 신경을 많이 써주고 있었다.수년간의 고달픈 짝사랑인 줄 알았는데 결코 그녀만의 원맨쇼가 아니었다. 송재이는 이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다.한편 배후에서 모든 걸 조종하는 사람은 바로 주현아였다.주현하는 늘 위험한 캐릭터였다. 심지어 송재이의 아이를 떼어내려는 잔인하고 섬뜩한 짓도 벌였었다.그런 그녀가 다시 돌아왔는데 송재이는 이 상황이 너무 이상하지만은 않았다.지난번에 주현아를 법의 제재를 받게 하지 못했다.하지만 이번엔 과연 다시 벗어날 수 있을까?경찰 진술 과정에서도 그녀는 이미 말했다시피 무조건 고소하고 법적 절차를 밟을 것이다.별다른 예외가 없다면 주현아는 이번에 썩 그리 행운스럽지는 못할 것이다....경주에서 남도까지 비행기로 고작 두 시간 정도 걸린다.송재이는 좌석에 허리를 기대고 두 눈을 감은 채 편히 잠을 잤다.그녀는 꿈을 하나 꾸었는데 꿈속에서 설영준이 딴 여자랑 꼭 껴안고 있었다.그는 한없이 애틋하고 부드러운 눈길로 그 여자를 바라봤다.두 사람의 실루엣은 송재이와 그리 멀지 않았다.근데 왜 두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는 걸까...송재이가 한참 몸부림친 끝에 그 둘도 마침내 그녀의 외침을 듣고 머리를 돌렸다.설영준의 눈가에 짜증과 증오로 가득 차 있었다.한편 그의 품에 안긴 여자는 몸매가 가녀린 것 말고는 얼굴이 좀처럼 잘 안 보였다.정아현일 수도 있고 또 혹은...송재이는 심장을 후벼 파듯 아프고 괴로웠다.그녀는 드디어 벌떡 눈을 떴다.이때 마침 비행기가 착륙했다.송재이는 숨을 깊게 들이쉬고 나서야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비행기에서 내릴 준비를 했다.다만 머릿속엔 온통 좀전의 꿈으로 차
주말, 두 사람은 카센터를 종일 돌아보다 나중에 송재이는 천만을 주고 산타나 한 대를 사서 오후에 바로 운전해 돌아왔다.기분이 좋은지 송재이는 운전하면서 카 오디오로 음악도 틀었다.경주에 있을 때 복잡하던 기분이 어느새 눈 녹듯 사라져 버렸다.밥 먹으려고 장소를 정하는 도중에 이원희가 윤수아의 전화를 받았다.학교에 일이 있어 이원희보고 학교 “학부모” 역을 해달라고 요청했다.윤수아는 여전히 이원희에게 많이 의지했고 무슨 일만 생기면 맨 처음으로 이원희에게 연락했다.이원희가 송재이에게 말했다.“유턴.”두 사람이 통화할 때 차 안이 조용해 송재이는 통화 내용을 대충 알아들었다.이원희가 말을 꺼내기 전에 송재이는 이미 윤수아 학교 방향으로 차를 운전하고 있었다.이원희를 학교 맞은편 길옆에 내려 주고 송재이는 집으로 출발했다.그때 문뜩 하늘을 보니 언제 생겼는지 먹장구름이 잔뜩 끼어있었고 바람도 불기 시작했다.불현듯 며칠 전에 봤던 최근 폭풍우가 닥칠 것이라는 뉴스가 생각났다.설마...송재이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송재이는 발에 힘을 줘 액셀을 밟으며 속도를 올려 빨리 집으로 돌아가려 했다.그런데 중도에서 도로 정체가 발생했다. 차창을 반 내리고 머리를 내밀어 보니 전방에 차량이 물 샐 틈 없이 꽉 막혀있었다.머리 위에서 번개가 번쩍이던 바로 그때 마침 휴대전화가 울렸다.이럴 때 울려오는 벨 소리는 사람을 초조하게 했다.송재이는 아예 전화벨을 무시해 버리고 온몸의 신경을 집중해 운전했다.바람이 점점 거세지더니 길옆의 나무에서 나뭇잎이 우수수 날리면서 차창으로 떨어졌다.송재이가 코너를 돌려고 할 때 갑자기 쾅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너무 갑작스레 발생한 일이라 송재이는 이 상황이 꿈만 같았다.눈 깜짝할 사이에 송재이의 차가 앞 차에 부딪혔다. 오늘 새로 산 차인데...접촉 사고는 큰일이 아니지만 송재이의 이마가 핸들에 부딪히면서 지끈거렸다.머리가 깨질 듯 아프고 머릿속에서는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손을 내밀어 이마를 만져
박윤찬이 걸어온 전화인 것을 보고 송재이는 바로 수신 버튼을 눌렀다.“재이 씨 혹시 이원희 씨와 연락되나요? 방금 이원희 씨 이혼 사건에 관한 서류를 보다 사인을 안 한 게 있어서요. 전화해도 연락이 안 돼요.”“지금 수아네 학교에 있어요. 애들 때문에 바쁜가 봐요. 나중에 제가 알려줄게요.”송재이가 휴대전화를 들고 통화하는 중 간호사가 링거병을 들고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어디 불편한 데 없으세요?”간호사는 문을 여는 동시에 송재이에게 물으며 들어오다 송재이가 통화 중인 걸 보았다.간호사의 목소리가 높지는 않았지만 박윤찬이 알아듣기에는 충분했다.박윤찬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지금 어디예요? 어디 아파요?”송재이는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가벼운 찰과상이고 뇌진탕도 그리 엄중하지 않기에 내일이면 퇴원할 수 있었다.“네. 작은 접촉 사고가 났어요.”송재이는 이마를 만지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설한 그룹 사무실.설영준이 컴퓨터 앞에 앉아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이 자세로 앉아 넋을 잃은 지 한 시간이 되었다.전에 설영준은 근무 시간에 땡땡이치는 직원이 제일 보기 싫었지만 요즘 들어 자신도 정신이 분산된다는 것을 자주 느꼈다.손끝에 쥔 담배가 타들어 가면서 손가락이 뜨거워지자 설영준은 화들짝 놀라면서 분산된 정신을 끌어모았다.박윤찬의 전화가 그때 걸려 왔다.“송재이 씨가 접촉 사고가 났어요...”설영준이 눈살을 찌푸리면서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끄더니 물었다.“어쩌다가?”“그렇게 긴장할 건 없고. 오늘 남도에 폭우가 내렸고 그때 마침 도로 위에 있다 사고가 났대요. 말로는 심하지 않다고 하던데...”박윤찬이 잠깐 머뭇거리더니 말했다.“제일병원에 있어요.”박윤찬은 마지막에 특별히 주소를 알려주었다.설영준이 만일 가 볼 생각이 있다면 직접 가면 그만이다....전화를 끊고 설영준은 여진에게 제일 가까운 시간대에 있는 항공권을 예약하라고 지시했다.사람들로 북적북적한 공항에 익숙한 그림자가 있었다.설영준은 시간이 급
좀 지나 설영준이 휠체어를 밀고 들어왔다.설영준과 함께 있는 동안 이런 대우를 받아보긴 처음이다.설영준은 송재이를 밀고 1층으로 내려갔다.두 사람은 병원 마당에 있는 공원에서 천천히 산책했다.햇살이 따스했고 버드나무가지가 늘어져 있었으며 가벼운 바람이 얼굴을 스치며 불어왔다.어제까지만 해도 비바람이 사납게 불어치던 도시 같지 않았다.송재이는 설영준이 와서 갑자기 날씨가 개이고 폭풍우가 사라진 게 아닌가 하는 천진난만한 생각이 들었다.그러더니 이내 고개를 숙이고 키득거리면서 자신의 로맨틱한 생각을 비웃었다.이때 송재이는 휠체어가 멈춘 것을 느꼈다.고개를 들어보니 설영준이 길옆의 벤치에 앉아 얼굴에 웃음기가 아직 남아있는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왜 웃어?”이 말을 하는 설영준의 얼굴에도 미소가 지어져 있었지만 자신은 느끼지 못했다.햇살이 좋아 주변에 산책하는 사람이 많았다.어떤 사람은 송재이처럼 환자복을 입고 병문안을 온 사람들과 낮은 소리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송재이가 시선을 돌리니 어떤 여자아이가 공을 차며 그들이 있는 방향으로 달려오고 있었다.양 갈래 머리를 한 얼굴이 아주 귀여운 아이였다.공이 설영준의 발밑으로 굴러오자 그는 공을 힐끗 보고 달려오는 여자아이를 보더니 공을 주워 아이에게 건네줬다.“아저씨 고마워요.”여자아이는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여자아이의 등 뒤에는 환자복을 입은 여인과 검은색 양복을 입은 남자가 따르고 있었다.“천천히 가.”여인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남자는 여인의 어깨를 감싸안고 있었고 두 사람은 아주 다정해 보였다.세 식구는 평범했지만 행복해 보였다.세 사람이 지나 간 뒤에도 송재이는 세 식구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얼굴을 들고 남자와 이야기하는 여인의 얼굴에는 행복한 웃음이 넘쳐흘렀다.설영준은 송재이의 시선을 느끼고 그 시선을 따라 바라보았다.좀 지나 설영준이 말했다.“민 대표님이 나를 찾아와서 주현아를 봐달라고 했어. 하지만 내가 고소를 취하하지 않을 거라고 말했어
통화가 종료된 후 설영준은 더 마음이 무거워졌다.그는 다시 한번 송재이 병실로 가 침대 끝에 앉았다. 그리곤 창백한 얼굴로 고요히 잠든 송재이의 얼굴을 보았다.설영준은 마치 송재이에게 자신이 한 말이 들리는 것처럼 나직하게 말했다.“재이야, 내 말 들려? 나 여기 있어. 네 옆에 있어.”그는 조심스럽게 송재이의 손을 잡으며 미약해진 체온을 느꼈다.“어쩌면 지금 내 말이 안 들릴 수도 있다는 걸 알아. 하지만 그것만은 알아줬으면 좋겠어.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이야.”설영준은 이내 심호흡을 하면서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애를 썼다.“우리 아직 함께 해보진 못한 일들이 많아. 혹시 기억해? 우리 그때 그랬었잖아. 함께 세계 곳곳에 있는 나라로 여행 가서 우리와 다른 사람들의 문화를 체험해 보고 그곳의 음식을 먹어보자고. 네가 지금 눈만 떠준다면 난 지금 당장 너랑 함께 그 떠날 거야.”이때 누군가 노크하더니 도정원이 들어왔다. 그는 아주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영준 씨, 경찰들이 지금 출동했다고 하네요. 곧 도진욱의 거처로 들이닥칠 거예요.”설영준은 자리에서 일어난 뒤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아쉬움이 가득한 눈길로 송재이를 보았다.“정원 씨,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요?”“말씀하세요. 제가 도울 수 있는 거면 도와드릴게요.”“저 대신 재이 좀 잘 챙겨주세요. 전 누구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서 그래요. 그 사람이 아마 이 사건에 아주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거예요.”“걱정하지 말고 가봐요. 여긴 제가 꼭 붙어 있을 테니까 아무도 재이를 건들지 못할 거예요.”설영준은 고마운 눈빛으로 도정원을 힐끗 보곤 몸을 돌려 병실을 나섰다.떠나기 전 설영준은 나직하게 송재이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재이야, 나 얼른 돌아올게. 그러니까 나 꼭 기다려줘야 해.”송재이의 병실에선 도정원만이 묵묵히 곁을 지키며 그녀가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설영준은 이미 진상을 찾으러 떠났다.그는 오랜 친구를 만나러 갈 생각이다. 그 친구는 의학 부문에서 아
그러자 보안 요원이 말했다.“여긴 병원 CCTV를 관리하는 곳입니다. 외부인에게 함부로 영상을 보여줄 수 없습니다.”설영준은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전 송재이 씨 약혼자입니다. 전 반드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겠으니 협조 부탁드립니다.”보안 요원은 다소 망설이더니 결국 그에게 영상을 보여주었다.영상 속에서 설영준은 세세한 부분까지 발견했다. 송재이가 쓰러지기 전 도진욱은 물잔을 송재이에게 건넸다. 그 순간 설영준은 의심을 하게 되었다.같은 시각 도정원은 병실에서 쪽지 한 장을 발견했다. 쪽지엔 갈겨 쓴 글씨가 있었다. 약물의 이름과 사용량이 적힌 쪽지였다. 그는 발견하자마자 바로 설영준에게도 알렸다.두 사람은 각자 발견한 것을 공유하곤 분석하기 시작했다. 설영준은 도진욱이 송재이에게 건넨 물잔과 쪽지 위에 쓴 약물의 명칭을 보았다. 그는 순간 무언가 깨닫게 되었다.송재이가 검사실로 들어간 뒤 설영준과 도정원은 각자 단서를 찾으러 움직였기에 설영준은 다시 돌아와 송재이를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그러나 도정원은 쪽지에 적힌 약물 이름을 보면서 조사하기 시작했다.설영준은 초조한 얼굴로 검사실 밖에서 송재이를 기다렸다.“재이야, 꼭 버텨야 해. 내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시간이 1분 1초 흘러갔다. 설영준은 마음이 점점 더 무거워졌다. 머릿속에 송재이의 미소와 웃음소리, 그리고 함께 보냈던 즐거운 시간들이 떠올랐다. 그는 속으로 기도했다. 송재이가 무사히 나오길 바라며 말이다.설영준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재이야,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해? 네가 그때 엄청 찬란한 미소를 지었었어. 네 찬란한 웃음이 온통 어둠뿐이던 내 세상을 환하게 빛내주었지. 그때 널 지켜주겠다고 다짐했었는데... 지금은...”바로 이때 문이 스르륵 열리고 의사가 나왔다. 설영준은 바로 다가가 물었다.“선생님, 재이는 어때요?”“저희가 최선을 다해 독이 퍼지는 것을 막고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희귀한 독에 중독된 거라 독 분석하고 해독제를 만드는 데 시간이
송재이의 말은 청천벽력이었다. 도정원과 도진욱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수사관이 빠르게 다가와 상태를 살폈다. 그도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 되어 얼른 입을 열었다.“저희가 바로 의사를 불러오겠습니다.”도정원은 빠르게 긴급 호출 벨을 누르면서 송재이를 부축한 채 옆에 있던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혔다.의자에 앉히자마자 도정원은 초조한 마음으로 송재이를 어깨에 기대게 했다.“재이야, 조금만 버텨줘. 의사가 금방 도착할 거야.”도진욱은 다소 복잡한 감정이 담긴 얼굴로 송재이를 보았다. 속으로 뭔가 갈등하고 있는 듯했다.그러더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독에 중독됐다고? 그럴 리가...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예리한 수사관은 그런 도진욱의 상태를 눈치채고 바로 심문했다.“도진욱 씨, 이 상황에 관해 설명하세요. 송재이 씨가 왜 갑자기 중독된 거죠?”도진욱의 안색은 더 창백해졌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전... 전 정말로 모릅니다. 제가 왜 제 조카를 죽이겠습니까?”바로 이때, 의사와 간호사가 병실로 들어오며 송재이를 살펴보았다.의사가 엄숙하게 말했다.“아무래도 정밀 검사를 해봐야 알 것 같습니다. 어떤 독에 중독되었는지 확인할 수 없습니다.”송재이는 급하게 검사받으러 갔다. 도정원과 도진욱이 그 뒤를 따라갔다. 수사관은 묵묵히 이 상황을 지켜보았다. 머릿속에 이미 사건의 윤곽이 그려지기 시작했다.도정원이 밖에서 초조한 마음으로 송재이를 기다렸다. 그러나 도진욱은 홀로 구석으로 간 뒤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안에 있는 핸드폰만 불안한 마음으로 만지작거렸다.그러더니 낮은 목소리로 누군가와 통화했다.“나야. 일이 복잡하게 됐어. 송재이가 갑자기 독에 중독되어서 경찰이 개입하게 되었어. 나도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 하지만 우린 지금 반드시 움직여야 해.”전화기 너머로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우리 계획을 수정할 필요가 있군요. 일단 절대 증거를 찾게 해서는 안 돼요. 안 그러면 우리 모두 끝장나게 되니까
화가 난 도정원은 이를 빠득 갈았다.“그게 무슨 의미죠? 설마 아버지 병이 당신과 연관이 있다는 건가요?”정체 모를 남자는 웃음을 터뜨렸다.“곧 알게 될 거야. 참, 도진욱. 가문의 이익을 위해 네 동생 행복을 희생했었지? 이젠 네가 희생할 차례야.”전화는 그렇게 끊겼다. 송재이와 도정원은 고개를 돌려 도진욱을 보며 설명을 바랐다.그러자 도진욱이 말했다.“난... 난 정말 몰랐어. 그때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고. 그때 내가 그런 선택을 한 건 인정해. 하지만 전부 가문을 위해서였어. 난 너희들을 해칠 생각한 적 없다고.”송재이는 무력감이 들었다. 거짓과 배신으로 가득한 이 가족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절망에 빠진 송재이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우리 이제 어떻게 해야 해요? 대체 누굴 믿어야 하는 거예요?”도정원도 다소 괴로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애를 썼다.“가문의 이익을 위해서 그러셨다고요. 우리 도씨 가문이 언제부터 이익에만 눈멀어 가족을 버리는 가문이 된 거죠?”도진욱의 얼굴엔 죄책감이 가득했다. 그는 힘이 없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정원아, 그땐 내 잘못이 맞아. 나도 인정해. 난 내 선택으로 우리 가문이 더 힘이 있는 가문이 될 줄 알았고 가족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어. 난... 난 정말 미안하구나.”옆에서 듣고 있던 송재이는 막막하면서도 불안했다.“두 사람은 전부 제 가족이에요. 전 대체 누굴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고요.”송재이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그 순간 문밖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면서 이 숨 막히는 침묵을 깨버렸다.세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보았다. 제복을 입은 남자들이 엄숙한 얼굴로 들어왔다.“안녕하세요. 저희는 경찰서 수사과에서 나왔습니다. 몇 가지 당신들이 조사에 협조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도정원과 도진욱은 서로 마주 보았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이것이 진상을 알아내는 데 중요한 조사라는 것을“네, 협조하겠습니다.
전화기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이내 짙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도진욱이 입을 열었다.“그래, 알았다. 너희들한테... 해줄 얘기가 있단다. 네 아버지의 과거와 어머니에 관한 얘기란다.”도정원과 송재이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은 의아하면서도 초조했다.“큰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뭔가 알고 계신 거예요?”도진욱은 미간을 찌푸렸다.“곧 도착하니 얼굴을 보면서 얘기하자꾸나. 이 일은 내가 너희들 얼굴을 보면서 직접 말해줘야 할 것 같구나.”전화를 끊은 후 도정원과 송재이는 생각에 잠겼다. 두 사람은 도진욱이 어떤 얘기를 들려줄지 몰랐고 도진욱이 그들에게 해줄 얘기가 그들 가족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몰랐다.얼마 지나지 않아 도진욱이 병원에 도착했다. 그의 얼굴엔 초조함과 죄책감이 담겨 있었다.그는 송재이와 도정원의 얼굴을 보더니 심호흡을 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지금 마음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알고 있단다. 하지만 더는 너희에게 숨길 수 없을 것 같구나. 너희들이 모르는 사실은 더 많단다.”송재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머리가 어질거렸다.“큰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희가 아직도 모르는 비밀이 있는 건가요?”“그래, 그때 당시 나와 네 엄마는 확실히 그런 사이였었지. 하지만 그건 다 지나간 일이란다. 나중에 난 그 삼각관계에 빠지기로 했고 네 엄마랑 네 아빠를 이어주기로 했었지. 그때의 난 그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단다. 지금까지도 말이야.”송재이와 도정원은 충격받은 얼굴로 도진욱을 보았다. 그가 꺼낸 얘기는 도경욱이 꺼낸 얘기보다 더 충격적이었다.“큰아버지, 정말로... 정말로 그러셨어요?”“나도 알고 있단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과거의 일을 없던 일로 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난 아직 살아 있을 때 너희들에게 진실을 말해주고 싶구나.”바로 이때 병실 안에서는 긴급 호출 벨이 울렸다.의사와 간호사들이 급하게 병실로 달려왔고 송재이와 도정원도 얼른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의사는 그들을 보더니 고
송재이는 얼른 도경욱의 손을 꼭 잡았다. 눈물이 그녀의 눈 앞을 가렸다.옆에서 두 사람의 모습을 보던 도정원도 눈시울이 붉어졌다.병실 안에는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저 일정한 의료 기기 소리만 들려오며 시간이 흘렀다.도경욱은 송재이를 빤히 보았다. 그의 두 눈엔 아쉬움과 죄책감만 남아 있었다.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죽기 전 꼭 해야 할 말이 있었다.미약한 목소리지만 그는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재이야, 내 딸. 너에게 꼭 해줄 말이 있단다. 네 출생의 비밀과 네 엄마에 관한 얘기야.”송재이는 고개를 들었다. 눈물 그렁그렁 맺힌 그녀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아빠,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 엄마가 왜요?”도경욱은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마치 온몸의 힘을 모으고 있는 것 같았다. 깊이 숨겨둔 진실을 정확하게 말해주기 위해서 말이다.“그때 네 엄마, 그러니까 서지원의 약혼 상대는 내 형이었단다. 네 큰아버지지. 하지만 운명이 장난을 쳤지. 서지원이... 네 엄마가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은 나였단다.”송재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너무도 충격적인 진실이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출생에 이런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던 거죠?”도정원도 놀란 표정인 것을 보아 처음 알게 된 사실인 것 같았다.도경욱은 다소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네가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는 것을 나도 안다. 그렇지만 전부 사실이란다. 난 지원이를 단 한 번도 강요한 적 없었어. 우리는 서로 진심으로 사랑했어. 하지만 그때는 이런 추문을 받아들이지 않던 시절이었지.”송재이는 마음이 복잡했다. 이렇게까지 혼란스러운 감정은 처음이었다.그녀는 이렇게나 갑작스러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아빠, 그럼 대체 왜 일찍 말씀해 주지 않으신 거예요? 왜 그동안 숨기고 계셨던 거예요?”도경욱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송
박정후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다소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리고 있는 듯한 눈빛으로 박윤찬을 보았다.“그때 내가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어. 아주 똑똑하고 예쁘고 착한 사람이었지. 나한테 아주 특별한 사람이기도 했어. 하지만 어머니가... 어머니가 우리 사이를 반대하셨어.”박윤찬은 미간을 찌푸렸다.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어머니가 왜 반대하셨는데? 어머니는 아무 이유도 없이 그러실 분이 아니잖아.”박정후가 대답했다.“처음엔 나도 이해하지 못했어. 그때의 난 분명 어머니가 그 여자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었지. 또 어쩌면 내가 사랑놀이에 푹 빠져 일을 제대로 하지 않을까 봐 걱정하시는 건 줄 알았어.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전혀 아니었어.”박윤찬은 초조하게 한숨을 내쉬었다.“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어머니가 아무 이유도 없이 반대하실 분은 아니야.”박정후의 낮게 깔린 목소리에선 슬픔이 느껴졌다.“그 여자는 성이 임 씨였어. 임씨 가문은 우리 성씨 가문과 오래전부터 원한이 있었지. 이 원한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던 거라 저주와도 같은 것이었어. 두 가문의 후대에도 아주 큰 영향을 주고 있어.”박윤찬은 놀란 모습이었다.“난 임씨 가문에 대해 들어본 적 단 한 번도 없었어. 어머니도 나한테 한 번도 말씀하신 적 없었다고.”박정후가 말했다.“어머니는 이 원한이 시간이 지나면서 잊히길 바라셨던 거야. 하지만 사실상 잊히지 않았지. 임씨 가문과 성씨 가문은 지난 세대에서도 심각한 충돌이 있었어. 두 가문은 사업 경쟁을 벌이다가 더 틀어지게 되었지.”박윤찬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사업 경쟁이라니? 그게 언제 일인데 아직도 신경 쓰고 있다는 거야?”“그래, 하지만 지난번 경쟁에서 임씨 가문은 파산당하게 되었지. 그 가문 어르신도 결국 그때 세상을 뜨게 되신 거야. 임씨 가문에서는 우리 성씨 가문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을 벌여 그런 비극을 만든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박윤찬은 한참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그러
박정후는 시선을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더니 생각에 잠겨 버렸다.그는 나직하게 말했다.“제가 멀리 떠나기로 결정한 건 저와 윤찬이 사이에... 오해가 있기 때문이에요. 저랑 윤찬이 사이에 갈등이 있었는데 전 제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윤찬이 곁을 떠났죠. 하지만 혈연관계는 영원히 끊을 수 없는 거잖아요.”묵묵히 박정후가 하는 얘기를 듣고 있던 송재이는 박정후의 안타까움과 죄책감을 고스란히 느꼈다.송재이가 말했다.“가족 사이에 확실히 갈등이 생길 수도 있죠.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서로 항상 응원하고 있음을 알고 있는 것이죠.”설영준은 진지한 얼굴로 박정후를 보았다.“정후 씨는 정의를 위해, 동생을 위해 이미 많은 것을 했으니 윤찬 씨도 이해해줄 거예요.”장주영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맞아요. 정후 씨가 한 모든 것을 박윤찬 씨가 알게 된다면 분명 아주 자랑스러워할 거예요.”박정후는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돌려 확고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들을 보았다.“그랬으면 좋겠네요. 이번에 돌아온 것도 윤찬이에게 뭐라도 도움이 되어주고 싶어서였어요. 그리고 윤찬이와 화해할 기회도 있었으면 좋겠네요.”그들을 도와준 정체 모를 인물은 바로 박정후였다.그는 마음이 너무도 복잡했다.이번 일로 동생과 무너진 관계를 회복하고 다시 화목하게 지내고 싶었다.박정후가 말했다.“관계를 회복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전 기다릴 수 있어요. 윤찬이가 저한테 기회만 준다면 형으로서 책임을 다할 거예요.”그는 확고한 눈빛으로 말했다. 박윤찬과의 거리감을 하루아침에 줄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다시 창밖을 보았다. 꼭 사람들 속에서 누군가를 찾는 듯한 모습이었다.“전 반드시 윤찬이한테 찾아가야 해요.”박정후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윤찬이가 저를 만나고 싶어 하든 말든 상관없이 알려주고 싶어요. 전 단 한순간도 윤찬이를 포기한 적 없다고 말이에요.”송재이는 박정후의 손을 잡아
설영준과 송재이는 서도재의 비웃음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빠르게 방 안의 상황을 살펴본 뒤 도망칠 길이나 반격할 기회가 없는지 파악했다.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은 조용히 숨어서 행동을 개시하려고 했다.설영준은 차갑게 피식 웃었다.“서도재, 이러면 네가 정말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네가 저지른 범죄는 이미 전부 드러났어. 밖엔 경찰들이 깔려 있다고.”서도재의 웃음이 사라지고 표정이 굳어졌지만 빠르게 다시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돌아왔다.“경찰이 깔려 있다고? 넌 내가 아무 준비도 하지 않은 거로 보이나 봐? 이 아지트는 아주 단단하게 만들었거든. 너희들은 도망칠 수 없어.”송재이는 설영준이 방 한구석에 있는 창문에 힐끗 본 것을 발견하곤 바로 그의 의도를 눈치챘다.그녀는 일부러 서도재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그럼 우린 여기서 그쪽과 시간을 끌 수밖에 없겠네요. 그쪽 아지트가 먼저 무너질지 아니면 밖에 경찰들이 먼저 쓰러지게 될지 한 번 지켜보자고요.”서도재는 손을 들어 올리며 부하들에게 준비하라는 사인을 보냈다. 하지만 이때 방 안의 불빛이 꺼지더니 어둠이 내려앉았다.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은 확성기로 말했다.“꼼짝 마!”설영준과 송재이는 어둠 속에서 빠르게 창문이 있는 쪽으로 움직였다.설영준은 있는 힘껏 발로 창문을 깨버렸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바깥엔 이미 에어매트가 준비되어 있었다.서도재는 갑자기 어두워진 주위에 당황스러워하면서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불빛이 다시 켜졌을 땐 설영준과 송재이는 이미 사라졌다.그는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쫓아가! 반드시 두 사람 내 앞에 잡아 와!”그러나 서도재의 부하들이 아지트에서 나가자마자 이미 밖을 포위하고 있는 경찰들을 발견하게 되었다.알고 보니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이 미리 익명으로 경찰에 신고한 것이다.경찰은 확성기로 말했다.“안에 있는 사람 모두 들으세요. 당신들은 포위되었습니다. 당장 손에 든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하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