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장은 그제야 놀란 마음을 추스르고 입을 열었다.“대표님, 송 선생과...”“들어가서 얘기하시죠.”설영준은 교장실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 문까지 닫았다.사실 오늘 다음 시즌 광고 투자 건 때문에 학교를 찾았는데 격식을 갖춰야 하는 자리인 만큼 교장이 고급 레스토랑에서 만나자고 제안했다.하지만 예상외로 설영준이 아무렇지 않게 마침 근처에 있으니 그냥 운전해서 오겠다고 했다.설영준은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 단 몇 마디로 화제를 돌렸다.방금 밖에서 송재이와 있었던 해프닝은 그다지 언급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교장도 잡담을 즐기는 스타일이 아닌지라 설영준이 대충 넘어가려는 의도를 눈치채고는 딱히 캐묻지 않았다.두 사람은 한 시간 가까이 대화를 나누었다.설영준은 때로 무심해 보이지만 일에 관해서는 끊고 맺음이 확실했다.시간이 흐를수록 교장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다행히 전체적인 협상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그만큼 설영준이 교장의 체면을 세워줬다는 것을 보아낼 수 있었다.협상 도중에 교장이 물을 따르러 일어나자 무심코 고개를 돌린 설영준의 시야에 책상 위에 놓인 교환 학생 제안서 더미가 들어왔다.이내 한 장을 집어 들고 대충 훑어보았다.교장이 설영준의 앞에 물컵을 내려놓으며 말했다.“이번에 우리 학교에도 정원이 몇 명 있는데... 참, 송 선생한테도 추천해줬어요.”제안서를 뒤적이던 남자의 손이 우뚝 멈췄다.“누구?”“송재이 선생이요.”교장이 싱글벙글 웃었다.“이미 동의했고, 유학하는데 관심이 많다고 하네요.”설영준의 눈살이 저도 모르게 찌푸려졌고, 이마에 핏줄이 불끈 솟아올랐다.이미 동의했다니?“언제 동의했는데요?”설영준이 싸늘하게 물었다.상대방의 심기가 불편해졌다는 사실을 눈치챈 교장은 조심스러운 말투로 대답했다.“오... 오늘이요.”즉, 방금 그녀를 만났을 때 이미 교장에게 유학 가겠다고 약속했지만 자신한테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언제까지요?”설영준이 다시 물었다.“6개월이요.”이내 교
경주에서 남도, 그리고 M국까지.설영준은 송재이가 조금씩 멀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최근 경주와 남도를 오가는 횟수도 점점 더 잦아졌다.나중에 지사가 설립되면 그녀도 이미 출국했을 것이고, 또다시 홀로 남도에 남아 있을 게 뻔하지 않은가?교장이 말하길 송재이의 출국 수속은 일주일도 채 안 되어 완료되었고, 유학 일정도 곧 정해질 예정이라고 했다.송재이가 교장 선생님께 유학에 필요한 학습 자료를 부탁하자 교장은 사무실로 그녀를 불렀다.별생각 없이 문을 밀고 들어가자 교장실에 앉아 있는 또 다른 사람을 발견했다.비록 등이 그녀를 향했지만, 너무나도 익숙한 뒷모습이었다.남자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고, 다리를 꼬고 마치 남의 일처럼 수수방관하는 태도를 보였다.유유자적한 모습은 느긋하니 그녀가 안중에도 없는 듯싶었다.송재이는 심호흡하고 안으로 들어갔다.교장은 서랍에서 일찌감치 준비한 서류를 꺼내 송재이에게 건네주었다.“송 선생, 이번에 가게 될 컴파운대학교야. 도착하고 나서 피터 교수님을 찾아가면 되는데, 나랑 워낙 오랜 친구 사이니 도움이 필요할 때 편하게 부탁하면 돼.”교장 선생님의 배려에 송재이는 크게 감동했다.“걱정하지 마세요. 6개월 동안 열심히 공부해서 기대에 부응하도록...”“참, 송 선생. 이번 학기가 3개월로 줄었다고 얘기한다는 걸 깜박했네.”송재이는 어리둥절했다.“네?”고작 3개월밖에 안 되다니? 좀처럼 믿을 수가 없는 그녀였다.“왜 갑자기 절반이나 단축된 거죠? 3개월이면 너무 짧지 않나요?”교장은 고지식한 사람이라 거짓말에 능한 편은 아니었다. 결국 저도 모르게 맞은편에 앉은 설영준을 힐끗 쳐다보았다.설영준은 시종일관 다리를 꼰 채 두 사람의 대화 따위 관심이 없는 듯싶었다.단지 손에 든 자료만 뒤적거릴 뿐,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교장은 억지로 미소를 쥐어짜 내더니 더듬거리며 변명을 이어갔다.“단지 교환 학생으로서 어차피 교류 위주인데다가 국비 지원 항목이라서 해외 등록금을 지불할 정도까지 많은 투자를
설영준은 양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느긋하게 교실 밖의 복도를 거닐었다.이때 문득 가까운 곳에 있는 가녀린 실루엣이 보였다.오후 햇살이 그녀를 내리쬐었다. 그녀는 한창 촉촉이 젖은 눈동자로 원수를 쳐다보듯 그를 째려보았다.설영준은 걸음을 멈추고 그녀와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여기는 학교인지라 그녀도 굳이 밖에서 그와 다투며 남들의 웃음거리로 전락하고 싶지 않았다.송재이는 입술을 꼭 깨물고 차오르는 분노를 참으며 성큼성큼 그의 앞에 다가가 작은 얼굴을 번쩍 쳐들었다.“따라와!”말투가 꽤 사납고 살짝 협박하는 투였다.다만 이건 단지 그녀만의 생각이다.설영준이 듣는 입장에서는 전혀 아무렇지 않았다.방금 사무실에서 송재이가 놀란 표정으로 교장에게 이렇게 말했다.“왜 고작 3개월이에요? 3개월은 너무 짧아요...”그 순간 설영준은 하마터면 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라 그녀의 목을 조를 뻔했다.3개월이란 시간이 짧다니?그는 단 3일도 송재이를 내보내고 싶지 않았다.원래도 기분이 언짢았는데 지금 막상 그녀에게 ‘협박’을 당하니 가슴에 꽉 막혔던 돌덩어리가 이상하게 사라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설영준은 가끔 본인이 참 비열해 보였다.두 사람은 앞뒤로 나란히 빌딩을 나섰다.송재이가 머리를 돌리자 설영준이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유유하게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그의 이런 모습을 보니 송재이는 또다시 울화가 치밀었다.“네가 몰래 손 쓴 거지?”그녀가 물었다.설영준은 눈썹을 치키며 대답했다.“아니!”“너!”“몰래가 아니라 대놓고 그랬어.”설영준은 스스럼없이 대답했다.그녀는 이 남자가 바로 승인할 줄은 미처 몰랐던지 두 눈을 부릅떴다.“네가 뭔데 제멋대로 내 유학 시간을 줄여? 분명 6개월이라고 했는데 이젠 고작 3개월이야. 대체 그 시간 동안 뭘 배우라는 건데?”“열심히 공부할 마음만 있다면 3개월도 족해.”설영준이 표정 변화 없이 대답했다.“벌써 몇 번째 묻는 건지 모르겠지만 내가 어딜 가든 얼마나 오래 있든 대체 너랑 뭔 상
송재이는 황급히 구급차를 불러서 허둥지둥 니콜을 병원까지 실어갔다.가는 길에서 니콜이 정신을 차렸다.“나 저혈당이라서 조금만 방심해도 병이 발작하거든. 괜찮아, 별문제 아니야...”비록 이렇게 말했지만 송재이는 여전히 마음이 안 놓여 한사코 그녀를 데리고 병원에 가서 전면 검진을 받았다.니콜이 검사를 받을 때 송재이는 복도에서 그녀를 기다렸다.이때 의사로 보이는 금발의 외국인 두 명이 이쪽으로 걸어오며 나지막이 말했다.“얼마 전까지 시험 압력이 너무 커서 계속 불면증에 시달렸는데 어제 케빈 교수가 추천한 약을 먹고 진짜 단잠을 잔 거야. 눈 떠보니 날이 환히 밝았더라고. 심지어 아무런 부작용도 없이 너무 개운하고 머리가 맑아진 기분이었어...”“너 그 불면증 고질병 아니야? 무슨 약인데? 나도 몇 알 줘봐. 안 그래도 요즘 사람들은 좋은 수면 질량을 유지하기가 너무 어렵더라고...”그들은 말하면서 송재이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한편 송재이는 두 귀를 쫑긋 세우고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다.실은 설영준도 수면 질량이 나쁜 거로 알고 있다.그는 젊은 나이에 홀로 그런 어마어마한 대기업을 운영하고 있다.다른 사람들이 볼 땐 그가 회사를 이어받고 나서부터 흐트러짐 없이 너무 완벽하게 경영해나가는 모습이었다.설동훈과 비하면 더 잘하면 잘했지 절대 뒤처지진 않았다.하지만 송재이는 잘 안다. 그가 누구보다 압력이 크고 어깨에 짊어진 짐이 한없이 무겁다는 것을.가끔 새벽에 일어날 때 설영준이 옆에 없으면 바로 서재에 가서 그를 찾곤 했다.그때마다 설영준은 통유리창 앞에 서서 담배를 피우며 그토록 고독하고 적적한 뒷모습을 하고 있었다.송재이는 얼른 앞으로 다가가 영어로 두 의사에게 물었다.“실례지만 그 약 이름이 뭐예요? 불면증 치료에 효과가 있나요?”...니콜은 검사를 마친 후 송재이와 함께 병원을 나섰다.송재이는 손에 봉투를 하나 들고 있었다.“재이, 그건 뭐야?”니콜이 의아한 듯 물었다.“친구한테 주려고 샀어.”송재이가 자연스럽게
설영준은 웃는 모습이 참 보기 좋다.같은 남자인 여진도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설영준이 감탄스러울 뿐이다. 표정 하나로만 뭇사람을 압도하는 매력을 지녔으니까.설영준은 답장을 다 보낸 후 무심코 머리를 들었다.이때 마침 백미러로 자신을 쳐다보는 여진과 시선이 마주쳤다.여진은 뻘쭘한 듯 얼른 눈길을 피했다.한편 설영준은 화내지 않고 불쑥 이런 질문을 건넸다.“여 비서님은 여자친구 있어요?”여진은 화들짝 놀라며 하마터면 핸들을 쥔 손이 미끄러질 뻔했다. 그는 얼른 자세를 다잡고 설영준에게 대답했다.“아직 없습니다.”“그래요. 그럼 얼른 여자친구 찾아요.”설영준은 처음 부하직원인 여진에게 이런 말을 해본다.평소에 그는 타인의 사생활이나 가십거리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근데 오늘 웬일인지 방금 카톡을 하고 나서부터 이러고 있다.“대표님, 송재이 씨 유학 가신지 한 달 가까이 됐죠?”여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아니나 다를까 설영준의 미소가 그대로 굳었다.그는 마른기침을 두어 번 하고는 창가에 머리를 기댔다.그의 눈가에 송재기를 향한 그리움이 잔뜩 묻어났다.“제외 얘기가 갑자기 왜 나와요? 운전이나 해요 얼른!”성영준은 정색하며 여진에게 쏘아붙였다.질책이긴 하지만 그의 옆에서 수년간 일해오면서 여진은 당연히 알아들을 수 있다. 성영준은 사실 너무 단호한 말투는 아니었다.역시 송재이여야만 했다.여진은 다 알고 있지만 굳이 까발리지 않았다....송재이는 설영준의 답장을 받은 후 기숙사로 돌아와 얼른 택배를 불러서 내일 바로 국내에 물건을 부치기로 했다.택배를 기다리는 동안 그녀는 소파에 앉아 심심한 듯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그러던 중 우연히 문예슬의 인스타에 들어가 보았다.문정 그룹에 들어가기 전까지 그녀의 인스타에는 대부분 여행 다니는 사진이거나 최신상 명품백들을 구매한 사진들이었다.하지만 문정 그룹에서 근무한 이후로 피드를 올리는 횟수도 점차 줄어들었다.간혹 올린다 해도 전부 자사 제품 광고거나 일부 상업적인 사항이었다.그녀
니콜이 그녀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눈물범벅이 된 그녀를 보더니 니콜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대체 왜 그래? 누가 괴롭혔어?”니콜은 바짝 긴장해 하며 물었다.송재이는 흐느끼면서 영어로 니콜에게 물었다.“넌 누군가를 좋아해 본 적 있어?”니콜은 흠칫 놀라더니 머리를 끄덕였다.“당연하지!”“그럼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 널 너무 좋아하지 않거나 또 혹은 말로는 네가 좋다고 하더니 돌아서서 딴사람 좋아하게 된다면 어떻게 단념할 거야?”“그거야 당연히 새로운 연애를 시작해야지!”니콜은 연애 경험이 매우 풍부하다.송재이가 감정 문제로 이토록 처참하게 우는 걸 알고 나니 금세 잠이 확 깼다.그녀는 송재이에게 ‘수업’을 열기 시작했다.“자고로 한 나무에만 매달릴 수 없는 법이야. 여기 앉아서 남자 때문에 울 바엔... 가자, 내가 좋은 곳 데려가 줄게. 너 금방 기분 전환될 거야!”송재이는 얼떨결에 니콜에게 이끌려 소파에서 일어났다.그녀는 눈물을 닦으며 화장실로 끌려가 세수를 했다.니콜이 대체 어디로 데려갈지 그녀는 전혀 몰랐다.한 시간 후, 송재이는 드디어 알게 됐다.니콜이 말한 ‘좋은 곳’은 바로 이 도시에서 가장 큰 바였다.송재이는 M국에 온 지 어언간 한 달이 되어가는데 줄곧 학업에만 전념하다 보니 일반 유학생들처럼 밤에 나가서 놀지 못했다.하지만 니콜은 자주 드나드는 걸 알고 있었다.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금발의 웨이터가 능숙하게 니콜과 인사했다.니콜은 매우 여유 넘치는 모습으로 칵테일 두 잔을 주문했다.“재이 넌 평소에 너무 갇혀있기만 했어. 잘 생각해봐. 바깥세상이 이렇게 큰데 여기저기 잘생긴 남자들 천지잖아...”이날 밤 송재이는 술을 많이 마셨다.설영준이 딴 여자랑 춤을 춘 일로 그녀는 상심이 너무 컸다.하여 니콜이 건네는 술을 거부하지 않고 전부 다 마셨다.옆 테이블에 일여덟 명의 젊은이가 앉아 있었는데 이 근처 의대생인 것 같았다. 그들은 송재이와 니콜에게 함께 놀자고 했다.송재이의 동양적인 외모와 깔끔하고 온화
송재이는 그 스토리를 올릴 때 이미 인사불성이 되어버렸다.아침에 깨나서 어젯밤에 했던 일을 떠올린 후 재빨리 그 스토리를 삭제했다.자극받은 거냐고 묻는다면 부인할 수도 없다.그녀는 확실히 설영준에게 자극받았으니까.그래서 니콜과 함께 바에 가서 실컷 술을 마셨고 몇몇 잘생긴 남자애들이랑 신나게 놀았다.사진을 찍을 때 뒤에 있던 잘생긴 남자가 그녀에게 미리 어깨에 손을 올려도 되냐고 물었었다.그때 송재이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취기에 흐릿해진 눈빛으로 그 남자를 쳐다보며 머리를 끄덕였다.“당연하지!”설영준은 정아현을 안고 춤을 추는데 그녀라고 왜 딴 남자가 어깨에 손도 못 올리게 할까?그녀는 지금 자유의 몸이고 오직 본인만 위해서 살면 그뿐이다.하지만 나중에 생각해보니 이 스토리는 전체 공개여서 남도 사립예술학교의 동료들과 교장까지 전부 볼 수 있었다...설영준을 무시할 순 있지만 다른 사람들까지 신경 쓰지 않을 순 없었다.한편 피드를 삭제하자마자 카톡이 울렸다.[정말 그토록 외로운 거라면 그 도시의 관광지나 둘러봐봐. 수요되면 가이드도 소개해줄게.]그건 바로 설영준이 보낸 카톡이었다.송재이는 어리둥절해졌다. 이 남자가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걸까?다만 첫 마디에 그녀에게 ‘외로운 거라면’이라고 말했다.송재이는 추측에 나섰다. 설영준은 아마도 어젯밤에 그녀가 취기에 올린 피드를 보고 허전해서 바에 가 잘생긴 남자들과 놀고 온 줄로 착각하나 보다.그래서 이런 ‘제안’을 하며 선심 쓰듯 가이드까지 소개해주겠다고 한 것이다.‘웃겨 정말!’송재이는 달랑 물음표만 하나 보냈다.‘본인이 뭐라도 된 줄 아나 봐?’‘네가 내 상사야? 선배야? 아니면 인생 멘토라도 돼?’해외까지 나왔는데 아직도 그녀에게 삿대질하고 있다니!설영준이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가이드 필요해?]송재이는 이를 악물고 단답형으로 말했다.[필요 없어!]‘이 여자가! 나한테만 사납게 굴고 그 외국인들 앞에선 배시시 웃으며 신나게 놀아?’‘완전 앞뒤가 다른 여자네
이날 박윤찬은 마침 로펌에 있었다.송재이와 전화한 지 1시간도 채 안 돼 그녀가 로펌으로 찾아왔다.박윤찬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크고 작은 쇼핑백을 한가득 들고 문 앞에 서 있는 그녀를 보며 박윤찬이 물었다.“아니... 뭘 이렇게 많이 사 왔어요?”송재이는 방긋 웃으며 안으로 들어가 그의 책상 위에 물건을 올려놓았다.그리고 하나둘씩 꺼내기 시작했다.“이 셔츠랑 재떨이는 윤찬 씨 거고 가죽 지갑은 도영이 거예요. 나중에 도영이 만나거든 잊지 말고 전해줘요.”박윤찬은 그녀가 머리를 숙이고 물건을 꺼내는 모습을 보더니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왠지 모르게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졌다.그녀를 만나서 반가운 것도 있고 챙겨온 선물 중에 본인 것도 있어서 너무 기뻤다.“설영준 씨 거는요? 직접 전해주게요?”박윤찬이 무심코 물었다.이에 송재이가 손을 움찔거리며 대답했다.“안 샀어요. 그 사람은 뭐가 부족하겠어요?”박윤찬은 멍하니 넋 놓고 말았다.“영준 씨 선물은 아무것도 없다고요?”“필요한 것도 없잖아요 영준 씨는...”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사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설영준이 문 앞에 떡하니 서서 그녀에게 물었다.“내가 필요한 게 있는지 없는지 네가 어떻게 알아?”갑작스러운 목소리에 송재이는 화들짝 놀랐다.‘이 인간이 여길 왜 왔지?’그녀의 놀란 두 눈을 본 설영준은 쓴웃음을 지었다.그는 송재이의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와 책상 위에 놓인 한 무더기 선물을 쭉 둘러보았다.송재이는 이 선물들을 가지런히 배열해놓았다.그도 방금 문밖에서 그녀가 한 말을 다 들었다.설영준을 위해 준비한 선물은 없었다.‘아주 잘났어 송재이!’“내 약은 어디 있어?”설영준이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송재이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정신을 다잡았다.“아 그건 원래 영준 씨한테 부치려다가 나중에 까먹었어. 올 때 함께 챙겨오려고 했는데 룸메가 요즘 불면증에 시달린다고 해서 그냥 줬어.”송재이는 아무렇지 않게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
통화가 종료된 후 설영준은 더 마음이 무거워졌다.그는 다시 한번 송재이 병실로 가 침대 끝에 앉았다. 그리곤 창백한 얼굴로 고요히 잠든 송재이의 얼굴을 보았다.설영준은 마치 송재이에게 자신이 한 말이 들리는 것처럼 나직하게 말했다.“재이야, 내 말 들려? 나 여기 있어. 네 옆에 있어.”그는 조심스럽게 송재이의 손을 잡으며 미약해진 체온을 느꼈다.“어쩌면 지금 내 말이 안 들릴 수도 있다는 걸 알아. 하지만 그것만은 알아줬으면 좋겠어.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이야.”설영준은 이내 심호흡을 하면서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애를 썼다.“우리 아직 함께 해보진 못한 일들이 많아. 혹시 기억해? 우리 그때 그랬었잖아. 함께 세계 곳곳에 있는 나라로 여행 가서 우리와 다른 사람들의 문화를 체험해 보고 그곳의 음식을 먹어보자고. 네가 지금 눈만 떠준다면 난 지금 당장 너랑 함께 그 떠날 거야.”이때 누군가 노크하더니 도정원이 들어왔다. 그는 아주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영준 씨, 경찰들이 지금 출동했다고 하네요. 곧 도진욱의 거처로 들이닥칠 거예요.”설영준은 자리에서 일어난 뒤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아쉬움이 가득한 눈길로 송재이를 보았다.“정원 씨,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요?”“말씀하세요. 제가 도울 수 있는 거면 도와드릴게요.”“저 대신 재이 좀 잘 챙겨주세요. 전 누구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서 그래요. 그 사람이 아마 이 사건에 아주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거예요.”“걱정하지 말고 가봐요. 여긴 제가 꼭 붙어 있을 테니까 아무도 재이를 건들지 못할 거예요.”설영준은 고마운 눈빛으로 도정원을 힐끗 보곤 몸을 돌려 병실을 나섰다.떠나기 전 설영준은 나직하게 송재이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재이야, 나 얼른 돌아올게. 그러니까 나 꼭 기다려줘야 해.”송재이의 병실에선 도정원만이 묵묵히 곁을 지키며 그녀가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설영준은 이미 진상을 찾으러 떠났다.그는 오랜 친구를 만나러 갈 생각이다. 그 친구는 의학 부문에서 아
그러자 보안 요원이 말했다.“여긴 병원 CCTV를 관리하는 곳입니다. 외부인에게 함부로 영상을 보여줄 수 없습니다.”설영준은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전 송재이 씨 약혼자입니다. 전 반드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겠으니 협조 부탁드립니다.”보안 요원은 다소 망설이더니 결국 그에게 영상을 보여주었다.영상 속에서 설영준은 세세한 부분까지 발견했다. 송재이가 쓰러지기 전 도진욱은 물잔을 송재이에게 건넸다. 그 순간 설영준은 의심을 하게 되었다.같은 시각 도정원은 병실에서 쪽지 한 장을 발견했다. 쪽지엔 갈겨 쓴 글씨가 있었다. 약물의 이름과 사용량이 적힌 쪽지였다. 그는 발견하자마자 바로 설영준에게도 알렸다.두 사람은 각자 발견한 것을 공유하곤 분석하기 시작했다. 설영준은 도진욱이 송재이에게 건넨 물잔과 쪽지 위에 쓴 약물의 명칭을 보았다. 그는 순간 무언가 깨닫게 되었다.송재이가 검사실로 들어간 뒤 설영준과 도정원은 각자 단서를 찾으러 움직였기에 설영준은 다시 돌아와 송재이를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그러나 도정원은 쪽지에 적힌 약물 이름을 보면서 조사하기 시작했다.설영준은 초조한 얼굴로 검사실 밖에서 송재이를 기다렸다.“재이야, 꼭 버텨야 해. 내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시간이 1분 1초 흘러갔다. 설영준은 마음이 점점 더 무거워졌다. 머릿속에 송재이의 미소와 웃음소리, 그리고 함께 보냈던 즐거운 시간들이 떠올랐다. 그는 속으로 기도했다. 송재이가 무사히 나오길 바라며 말이다.설영준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재이야,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해? 네가 그때 엄청 찬란한 미소를 지었었어. 네 찬란한 웃음이 온통 어둠뿐이던 내 세상을 환하게 빛내주었지. 그때 널 지켜주겠다고 다짐했었는데... 지금은...”바로 이때 문이 스르륵 열리고 의사가 나왔다. 설영준은 바로 다가가 물었다.“선생님, 재이는 어때요?”“저희가 최선을 다해 독이 퍼지는 것을 막고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희귀한 독에 중독된 거라 독 분석하고 해독제를 만드는 데 시간이
송재이의 말은 청천벽력이었다. 도정원과 도진욱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수사관이 빠르게 다가와 상태를 살폈다. 그도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 되어 얼른 입을 열었다.“저희가 바로 의사를 불러오겠습니다.”도정원은 빠르게 긴급 호출 벨을 누르면서 송재이를 부축한 채 옆에 있던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혔다.의자에 앉히자마자 도정원은 초조한 마음으로 송재이를 어깨에 기대게 했다.“재이야, 조금만 버텨줘. 의사가 금방 도착할 거야.”도진욱은 다소 복잡한 감정이 담긴 얼굴로 송재이를 보았다. 속으로 뭔가 갈등하고 있는 듯했다.그러더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독에 중독됐다고? 그럴 리가...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예리한 수사관은 그런 도진욱의 상태를 눈치채고 바로 심문했다.“도진욱 씨, 이 상황에 관해 설명하세요. 송재이 씨가 왜 갑자기 중독된 거죠?”도진욱의 안색은 더 창백해졌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전... 전 정말로 모릅니다. 제가 왜 제 조카를 죽이겠습니까?”바로 이때, 의사와 간호사가 병실로 들어오며 송재이를 살펴보았다.의사가 엄숙하게 말했다.“아무래도 정밀 검사를 해봐야 알 것 같습니다. 어떤 독에 중독되었는지 확인할 수 없습니다.”송재이는 급하게 검사받으러 갔다. 도정원과 도진욱이 그 뒤를 따라갔다. 수사관은 묵묵히 이 상황을 지켜보았다. 머릿속에 이미 사건의 윤곽이 그려지기 시작했다.도정원이 밖에서 초조한 마음으로 송재이를 기다렸다. 그러나 도진욱은 홀로 구석으로 간 뒤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안에 있는 핸드폰만 불안한 마음으로 만지작거렸다.그러더니 낮은 목소리로 누군가와 통화했다.“나야. 일이 복잡하게 됐어. 송재이가 갑자기 독에 중독되어서 경찰이 개입하게 되었어. 나도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 하지만 우린 지금 반드시 움직여야 해.”전화기 너머로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우리 계획을 수정할 필요가 있군요. 일단 절대 증거를 찾게 해서는 안 돼요. 안 그러면 우리 모두 끝장나게 되니까
화가 난 도정원은 이를 빠득 갈았다.“그게 무슨 의미죠? 설마 아버지 병이 당신과 연관이 있다는 건가요?”정체 모를 남자는 웃음을 터뜨렸다.“곧 알게 될 거야. 참, 도진욱. 가문의 이익을 위해 네 동생 행복을 희생했었지? 이젠 네가 희생할 차례야.”전화는 그렇게 끊겼다. 송재이와 도정원은 고개를 돌려 도진욱을 보며 설명을 바랐다.그러자 도진욱이 말했다.“난... 난 정말 몰랐어. 그때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고. 그때 내가 그런 선택을 한 건 인정해. 하지만 전부 가문을 위해서였어. 난 너희들을 해칠 생각한 적 없다고.”송재이는 무력감이 들었다. 거짓과 배신으로 가득한 이 가족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절망에 빠진 송재이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우리 이제 어떻게 해야 해요? 대체 누굴 믿어야 하는 거예요?”도정원도 다소 괴로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애를 썼다.“가문의 이익을 위해서 그러셨다고요. 우리 도씨 가문이 언제부터 이익에만 눈멀어 가족을 버리는 가문이 된 거죠?”도진욱의 얼굴엔 죄책감이 가득했다. 그는 힘이 없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정원아, 그땐 내 잘못이 맞아. 나도 인정해. 난 내 선택으로 우리 가문이 더 힘이 있는 가문이 될 줄 알았고 가족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어. 난... 난 정말 미안하구나.”옆에서 듣고 있던 송재이는 막막하면서도 불안했다.“두 사람은 전부 제 가족이에요. 전 대체 누굴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고요.”송재이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그 순간 문밖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면서 이 숨 막히는 침묵을 깨버렸다.세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보았다. 제복을 입은 남자들이 엄숙한 얼굴로 들어왔다.“안녕하세요. 저희는 경찰서 수사과에서 나왔습니다. 몇 가지 당신들이 조사에 협조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도정원과 도진욱은 서로 마주 보았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이것이 진상을 알아내는 데 중요한 조사라는 것을“네, 협조하겠습니다.
전화기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이내 짙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도진욱이 입을 열었다.“그래, 알았다. 너희들한테... 해줄 얘기가 있단다. 네 아버지의 과거와 어머니에 관한 얘기란다.”도정원과 송재이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은 의아하면서도 초조했다.“큰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뭔가 알고 계신 거예요?”도진욱은 미간을 찌푸렸다.“곧 도착하니 얼굴을 보면서 얘기하자꾸나. 이 일은 내가 너희들 얼굴을 보면서 직접 말해줘야 할 것 같구나.”전화를 끊은 후 도정원과 송재이는 생각에 잠겼다. 두 사람은 도진욱이 어떤 얘기를 들려줄지 몰랐고 도진욱이 그들에게 해줄 얘기가 그들 가족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몰랐다.얼마 지나지 않아 도진욱이 병원에 도착했다. 그의 얼굴엔 초조함과 죄책감이 담겨 있었다.그는 송재이와 도정원의 얼굴을 보더니 심호흡을 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지금 마음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알고 있단다. 하지만 더는 너희에게 숨길 수 없을 것 같구나. 너희들이 모르는 사실은 더 많단다.”송재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머리가 어질거렸다.“큰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희가 아직도 모르는 비밀이 있는 건가요?”“그래, 그때 당시 나와 네 엄마는 확실히 그런 사이였었지. 하지만 그건 다 지나간 일이란다. 나중에 난 그 삼각관계에 빠지기로 했고 네 엄마랑 네 아빠를 이어주기로 했었지. 그때의 난 그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단다. 지금까지도 말이야.”송재이와 도정원은 충격받은 얼굴로 도진욱을 보았다. 그가 꺼낸 얘기는 도경욱이 꺼낸 얘기보다 더 충격적이었다.“큰아버지, 정말로... 정말로 그러셨어요?”“나도 알고 있단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과거의 일을 없던 일로 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난 아직 살아 있을 때 너희들에게 진실을 말해주고 싶구나.”바로 이때 병실 안에서는 긴급 호출 벨이 울렸다.의사와 간호사들이 급하게 병실로 달려왔고 송재이와 도정원도 얼른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의사는 그들을 보더니 고
송재이는 얼른 도경욱의 손을 꼭 잡았다. 눈물이 그녀의 눈 앞을 가렸다.옆에서 두 사람의 모습을 보던 도정원도 눈시울이 붉어졌다.병실 안에는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저 일정한 의료 기기 소리만 들려오며 시간이 흘렀다.도경욱은 송재이를 빤히 보았다. 그의 두 눈엔 아쉬움과 죄책감만 남아 있었다.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죽기 전 꼭 해야 할 말이 있었다.미약한 목소리지만 그는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재이야, 내 딸. 너에게 꼭 해줄 말이 있단다. 네 출생의 비밀과 네 엄마에 관한 얘기야.”송재이는 고개를 들었다. 눈물 그렁그렁 맺힌 그녀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아빠,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 엄마가 왜요?”도경욱은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마치 온몸의 힘을 모으고 있는 것 같았다. 깊이 숨겨둔 진실을 정확하게 말해주기 위해서 말이다.“그때 네 엄마, 그러니까 서지원의 약혼 상대는 내 형이었단다. 네 큰아버지지. 하지만 운명이 장난을 쳤지. 서지원이... 네 엄마가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은 나였단다.”송재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너무도 충격적인 진실이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출생에 이런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던 거죠?”도정원도 놀란 표정인 것을 보아 처음 알게 된 사실인 것 같았다.도경욱은 다소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네가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는 것을 나도 안다. 그렇지만 전부 사실이란다. 난 지원이를 단 한 번도 강요한 적 없었어. 우리는 서로 진심으로 사랑했어. 하지만 그때는 이런 추문을 받아들이지 않던 시절이었지.”송재이는 마음이 복잡했다. 이렇게까지 혼란스러운 감정은 처음이었다.그녀는 이렇게나 갑작스러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아빠, 그럼 대체 왜 일찍 말씀해 주지 않으신 거예요? 왜 그동안 숨기고 계셨던 거예요?”도경욱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송
박정후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다소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리고 있는 듯한 눈빛으로 박윤찬을 보았다.“그때 내가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어. 아주 똑똑하고 예쁘고 착한 사람이었지. 나한테 아주 특별한 사람이기도 했어. 하지만 어머니가... 어머니가 우리 사이를 반대하셨어.”박윤찬은 미간을 찌푸렸다.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어머니가 왜 반대하셨는데? 어머니는 아무 이유도 없이 그러실 분이 아니잖아.”박정후가 대답했다.“처음엔 나도 이해하지 못했어. 그때의 난 분명 어머니가 그 여자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었지. 또 어쩌면 내가 사랑놀이에 푹 빠져 일을 제대로 하지 않을까 봐 걱정하시는 건 줄 알았어.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전혀 아니었어.”박윤찬은 초조하게 한숨을 내쉬었다.“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어머니가 아무 이유도 없이 반대하실 분은 아니야.”박정후의 낮게 깔린 목소리에선 슬픔이 느껴졌다.“그 여자는 성이 임 씨였어. 임씨 가문은 우리 성씨 가문과 오래전부터 원한이 있었지. 이 원한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던 거라 저주와도 같은 것이었어. 두 가문의 후대에도 아주 큰 영향을 주고 있어.”박윤찬은 놀란 모습이었다.“난 임씨 가문에 대해 들어본 적 단 한 번도 없었어. 어머니도 나한테 한 번도 말씀하신 적 없었다고.”박정후가 말했다.“어머니는 이 원한이 시간이 지나면서 잊히길 바라셨던 거야. 하지만 사실상 잊히지 않았지. 임씨 가문과 성씨 가문은 지난 세대에서도 심각한 충돌이 있었어. 두 가문은 사업 경쟁을 벌이다가 더 틀어지게 되었지.”박윤찬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사업 경쟁이라니? 그게 언제 일인데 아직도 신경 쓰고 있다는 거야?”“그래, 하지만 지난번 경쟁에서 임씨 가문은 파산당하게 되었지. 그 가문 어르신도 결국 그때 세상을 뜨게 되신 거야. 임씨 가문에서는 우리 성씨 가문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을 벌여 그런 비극을 만든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박윤찬은 한참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그러
박정후는 시선을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더니 생각에 잠겨 버렸다.그는 나직하게 말했다.“제가 멀리 떠나기로 결정한 건 저와 윤찬이 사이에... 오해가 있기 때문이에요. 저랑 윤찬이 사이에 갈등이 있었는데 전 제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윤찬이 곁을 떠났죠. 하지만 혈연관계는 영원히 끊을 수 없는 거잖아요.”묵묵히 박정후가 하는 얘기를 듣고 있던 송재이는 박정후의 안타까움과 죄책감을 고스란히 느꼈다.송재이가 말했다.“가족 사이에 확실히 갈등이 생길 수도 있죠.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서로 항상 응원하고 있음을 알고 있는 것이죠.”설영준은 진지한 얼굴로 박정후를 보았다.“정후 씨는 정의를 위해, 동생을 위해 이미 많은 것을 했으니 윤찬 씨도 이해해줄 거예요.”장주영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맞아요. 정후 씨가 한 모든 것을 박윤찬 씨가 알게 된다면 분명 아주 자랑스러워할 거예요.”박정후는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돌려 확고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들을 보았다.“그랬으면 좋겠네요. 이번에 돌아온 것도 윤찬이에게 뭐라도 도움이 되어주고 싶어서였어요. 그리고 윤찬이와 화해할 기회도 있었으면 좋겠네요.”그들을 도와준 정체 모를 인물은 바로 박정후였다.그는 마음이 너무도 복잡했다.이번 일로 동생과 무너진 관계를 회복하고 다시 화목하게 지내고 싶었다.박정후가 말했다.“관계를 회복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전 기다릴 수 있어요. 윤찬이가 저한테 기회만 준다면 형으로서 책임을 다할 거예요.”그는 확고한 눈빛으로 말했다. 박윤찬과의 거리감을 하루아침에 줄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다시 창밖을 보았다. 꼭 사람들 속에서 누군가를 찾는 듯한 모습이었다.“전 반드시 윤찬이한테 찾아가야 해요.”박정후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윤찬이가 저를 만나고 싶어 하든 말든 상관없이 알려주고 싶어요. 전 단 한순간도 윤찬이를 포기한 적 없다고 말이에요.”송재이는 박정후의 손을 잡아
설영준과 송재이는 서도재의 비웃음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빠르게 방 안의 상황을 살펴본 뒤 도망칠 길이나 반격할 기회가 없는지 파악했다.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은 조용히 숨어서 행동을 개시하려고 했다.설영준은 차갑게 피식 웃었다.“서도재, 이러면 네가 정말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네가 저지른 범죄는 이미 전부 드러났어. 밖엔 경찰들이 깔려 있다고.”서도재의 웃음이 사라지고 표정이 굳어졌지만 빠르게 다시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돌아왔다.“경찰이 깔려 있다고? 넌 내가 아무 준비도 하지 않은 거로 보이나 봐? 이 아지트는 아주 단단하게 만들었거든. 너희들은 도망칠 수 없어.”송재이는 설영준이 방 한구석에 있는 창문에 힐끗 본 것을 발견하곤 바로 그의 의도를 눈치챘다.그녀는 일부러 서도재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그럼 우린 여기서 그쪽과 시간을 끌 수밖에 없겠네요. 그쪽 아지트가 먼저 무너질지 아니면 밖에 경찰들이 먼저 쓰러지게 될지 한 번 지켜보자고요.”서도재는 손을 들어 올리며 부하들에게 준비하라는 사인을 보냈다. 하지만 이때 방 안의 불빛이 꺼지더니 어둠이 내려앉았다.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은 확성기로 말했다.“꼼짝 마!”설영준과 송재이는 어둠 속에서 빠르게 창문이 있는 쪽으로 움직였다.설영준은 있는 힘껏 발로 창문을 깨버렸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바깥엔 이미 에어매트가 준비되어 있었다.서도재는 갑자기 어두워진 주위에 당황스러워하면서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불빛이 다시 켜졌을 땐 설영준과 송재이는 이미 사라졌다.그는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쫓아가! 반드시 두 사람 내 앞에 잡아 와!”그러나 서도재의 부하들이 아지트에서 나가자마자 이미 밖을 포위하고 있는 경찰들을 발견하게 되었다.알고 보니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이 미리 익명으로 경찰에 신고한 것이다.경찰은 확성기로 말했다.“안에 있는 사람 모두 들으세요. 당신들은 포위되었습니다. 당장 손에 든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하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