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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01화

결국 이승하의 압박에 못 이겨 유나희는 전용기에 올라탔고 이연석도 그녀와 함께 전용기에 올랐다.도착하기 전에 이연석은 그녀에게 정가혜를 만난 후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끊임없이 당부했다. 그렇지 않으면 집안에서 난리를 피우는 것도 모자라 유씨 가문에서까지 난리를 피우겠다고 협박했다. 사람을 위협하는 수단은 이승하와 많이 닮은 듯했다. 그러나 여전히 이 빠진 호랑이처럼 이승하만큼 큰 위협은 없었다.문득 이승하가 자신의 아들이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을 협박하는 수단이 얼마나 타고난 건지 그녀가 이리 어쩔 수 없이 전용기에 올라타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정작 아들놈은 남을 위협하는 재주가 옹졸한 것 같았다. 집안에서 소란을 피울 줄밖에 모르니...옆에서 자꾸만 재잘재잘 거리는 이연석을 향해 그녀가 불쾌하게 한마디 내뱉었다.“시끄러워.”그제야 입을 다문 그가 승무원에게서 커피를 건네받아 한 모금 마셨다.“엄마, 제발 이번 한 번만 도와줘요. 가혜 씨 마음을 돌려주면 앞으로 제가 효도할게요”이 말은 떠나기 전 이승하가 특별히 그에게 당부한 것이었다. 사실 둘째 형이 왜 이렇게 말하라고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정가혜 때문에 이런 말까지 하는 아들을 보며 유나희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정가혜 씨가 그렇게 좋아?”커피잔을 들고 있던 그가 대답했다.“좋아하는 게 아니라 사랑이요. 그 여자 정말 많이 사랑해요.”허구한 날 날라리 같던 아들이 이렇게 진지한 걸 그녀는 처음 본다. 갑자기 이승하의 말이 떠오른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물었다.“정가혜 씨가 없으면 너 어떡할 거야?”이지민처럼 우울증에 걸려 몇 번이나 자살 시도를 하고 결국은 더 이상 단이수를 사랑하지 않는다며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 할 것인지?그가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유나희를 쳐다보면서 진지하게 말했다.“그 여자 없으면 나 죽을지도 몰라요. 교통사고 났을 때 그 생각 했거든요. 가혜 씨가 날 버리면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유나희는 못마땅한 얼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4-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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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02화

밖에 사람이 있는 걸 눈치채지 못한 정가혜는 고개를 숙인 채 누워있는 남자를 향해 물었다.“사월아,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내가 만들어줄게.”큰 수술을 받은 송사월은 얼굴이 창백하고 수척해진 모습이었다. 말할 힘도 없지만 그는 그녀를 쳐다보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태진이한테 시켜요. 힘들게 만들지 말고.”그동안 그녀는 병원과 숙소를 오가며 고생을 많이 했다. 그녀가 수건을 짜면서 입을 열었다.“여기 음식 네 입맛에 안 맞잖아. 내가 가서 만들어올게.”말리려고 하는데 그녀가 송사월의 말을 끊어버렸다.“밥 한 끼 만드는 게 뭐가 힘들다고 그래? 그리고 어차피 넌 죽 먹어야 하니까 어려운 일 아니야.”밥하는 게 힘들지 않다고?요리를 하는 게 어렵기만 했던 유나희는 정가혜의 모습을 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어렸을 때부터 쭉 요리를 해서 어렵지 않은 건가?그 생각에 유나희의 안색이 다시 어두워졌다. 내가 왜 또 정가혜의 입장에서 생각을 하는 거야? 쓸데없이 정말...한편, 이연석은 바쁜 그녀의 모습을 보고 그녀를 방해하지 않았다. 그녀가 물을 붓고 병실을 나오자 그제야 그녀의 앞으로 다가갔다.“가혜 씨.” 이연석의 모습에 그녀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그녀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 그의 곁을 지나갔다.여전히 자신을 상대하고 싶지 않아 하는 모습에 그가 급히 그녀의 뒤를 쫓아갔다.“가혜 씨, 엄마가 당신을 찾아갔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어요.”그 사실을 서유한테 말한 적이 있으니 이연석이 알고 있는 건 놀랄 일이 아니었다. 다만... 정가혜는 멀리 서 있는 유나희를 힐끔 쳐다보았다. 저 사람이 여긴 어떻게...그녀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그가 몸을 돌려 유나희를 가리켰다.“엄마를 데리고 당신한테 사과하러 왔어요.”“사과요?”도도한 부잣집 사모님이 그녀한테 사과를 한다고?정가혜는 믿을 수가 없었다.“우리 엄마가 먼저 당신을 비난한 거니까 당연히 사과해야죠.”그가 말을 마치고는 유나희를 향해 끊임없이 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4-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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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03화

그 말에 이연석은 물론 유나희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직접 사과까지 하러 왔는데 더 이상 밀당이 필요한가?그러나 정가혜한테는 이게 밀당이 아니라 정말 이연석을 포기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녀는 유나희의 손을 잡고 그 블랙 카드를 손에 집어넣은 뒤, 빠르게 자리를 떴다. 그 모습에 이연석은 미친 듯이 달려와 그녀를 덥석 잡아당겨 품에 안았다.“엄마의 사과가 성의가 부족하다면 말해요. 다시 사과하라고 할게요. 제발 결혼 안 할 거라는 말 하지 말아요.”넝쿨처럼 꼭 달라붙은 그를 밀어내려고 해도 밀어낼 수가 없었고 숨이 막혔다. 배하린도 그의 품에 안겼었고 안희연도 그의 품에 안겼었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여자들이 그의 품에 안겼었다. 예전에는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역겨웠다. 그녀는 그와 말도 섞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고 그녀를 놓으면 사라지기라도 할까 봐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우리 엄마가 잘못했어요. 엄마가 사과를 한 건 앞으로 우리 두 사람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뜻이에요. 그만 화 풀어요. 날 버리겠다는 말 제발 하지 말아요.”그한테서 벗어날 수 없었던 그녀는 그의 향기를 맡고 그날 밤의 지독한 술 냄새가 떠올라 구역질이 나서 미친 듯이 그를 밀쳐냈다.“이거 놔요.” 그가 놓아줄 리가 있겠는가? 그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힘껏 그녀를 안았다.“어렵게 당신을 만났는데 어떻게 놓아줄 수 있겠어요?”그의 포옹은 마치 족쇄처럼 그녀의 몸에 묶여 옴짝달싹을 못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이거 놔요. 나 건드리지 말아요. 건드리지 말라고.”고막을 찢는 듯한 소리에 그도 그녀도 모두 깜짝 놀랐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이연석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에 그녀의 모습이 훤히 비쳐 있었다. 예전의 온유하고 온화한 모습이 아니라 얼굴이 일그러지고 분노에 가득 찬 모습이었다. 이런 사나운 모습으로 변하는 게 두려웠다. 근데 결국 사랑 때문에 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4-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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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04화

그녀는 고개를 젖히고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를 바라보며 코웃음을 쳤다.“결혼하고 싶을 만큼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많이 사랑하지 않는다고? 그래서 결혼하고 싶지 않다고?유나희의 반대보다 더 가슴을 아프게 한 말이었다. “알아요. 당신이 날 얼마나 사랑하든 상관없어요. 그저 당신 마음속에 내 자리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걸로 난 충분해요.”한편, 아들이 이렇게까지 애원하는 모습을 두 눈으로 확인한 유나희는 가슴이 아팠다. 지금껏 정가혜가 아들에게 매달리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정말 이승하의 말대로 아들이 매달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가혜는 그의 애원에도 감동은커녕 무표정한 얼굴로 금방이라도 무릎을 꿇을 것만 같은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내 마음속에 당신 자리는 조금도 없어요.”그 말을 그는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럼 그날 밤은 왜...”“술에 취했으니까요.”그녀가 차갑게 그의 말을 끊어버렸다. “그날 밤 당신이 아니라 다른 남자였어도 난 똑같이 그랬을 거예요.”차갑고 무정한 말은 가슴을 찔렀고 칼에 얻어맞은 것처럼 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이런 말 하면 내 기분이 어떨지 생각해 봤어요?”“당신을 사랑하지도 않는데 그게 뭐가 중요해요?”담담하게 받아치는 그녀의 말에 그는 순식간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당겼지만 그녀가 그의 손길을 뿌리쳤다. 거듭되는 반항에 그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는 그녀를 벽에 몰아붙이며 품 안으로 끌어안았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발버둥을 쳤고 그가 한 손으로 그녀의 손을 잡고 두 다리로 그녀의 다리를 가두었다. 그녀를 꼼짝도 못 하게 한 후 그가 그녀의 턱을 들고는 시선을 피하는 그녀를 노려보았다.“내 눈 똑바로 보고 다시 한번 말해봐요. 정말 나 사랑하지 않아요?”천천히 다가가려고 했지만 이렇게 성질을 부리는 그녀를 보니 마음이 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그와 눈을 마주친 정가혜는 분노에 가득
last updateLast Updated : 2024-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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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05화

한편, 호텔로 돌아온 유나희는 피투성이가 된 이연석의 양말을 보고는 깜짝 놀라며 급히 의사를 불렀다. 상처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이연석은 아무 반응이 없었고 그저 소파에 웅크린 채 눈을 감고 혼자 씩씩거리고 있었다. 아들의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아팠다. 그녀는 그의 옆으로 다가가 다정한 목소리로 타일렀다. “결혼 안 하겠다는 여자 생각도 하지 마. 그런 여자 하나 때문에 네 몸 해치지 말란 말이야.”잔소리가 듣기 싫었던 그는 소파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유나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널 사랑하지 않는다는데 넌 왜 이러는 거야?”“그 여자는 날 사랑하고 있다고요.”유나희는 눈을 흘겼다.“널 사랑한다면 너한테 상처 주지도 않았겠지.”화가 난 그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엄마가 뭘 알아요?”사랑은 하는데 많이 사랑하지 않을 뿐. 그래서 그녀가 이리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다. “난 몰라. 하지만 내가 만약 너라면 다시는 정가혜 그 여자 찾아가지 않을 거야.”그가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뻗어 쿠션 하나를 품에 꼭 안았다.“나도 그 여자 찾아가고 싶지 않아요. 그런데 죽을 만큼 사랑해서 포기할 수가 없어요.”그녀를 사랑하게 된 것을 깨달은 후부터 더욱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예전에 그가 어떤 잘못을 해도 어떤 말을 해도 잘못했다고 하면 다 용서해 줬던 정가혜가 그리웠다. 예전에 고양이처럼 품에 안겨 자신에게 설렌 적이 있었냐고 물어보던 그녀의 모습이 그리웠다. 그때 그 시절의 그녀가 그리웠고 그녀가 돌아오기만을 원했다. 그러나 2년을 애원했지만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다. 코끝이 찡해진 그는 무의식적으로 눈을 가렸다.“2년 전 헤어지자고 했을 때 받아들이는 게 아니었어요.”만약 그때 그가 놔주지 않았다면 정가혜는 영원히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흐느끼는 목소리에 유나희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얘가 정말 정가혜를 이렇게나 사랑한단 말인가? 이연석은 답을 주지 않았고 그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4-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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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06화

정가혜는 무표정한 얼굴로 유나희를 쳐다보았다. “전 그런 적 없습니다. 그러니까 제 탓 하지 마세요.”말을 마치고 돌아서는데 유나희의 무뚝뚝한 목소리가 뒤에서 울려 퍼졌다.“혹시 우리 아들이 가혜 씨한테 미안한 짓이라도 했나요?”그날 정가혜는 이연석에게 그가 잘 알고 있을 테니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고 했었다. 그 말인즉 이연석이 그녀에게 미안한 일을 했다는 것이었다. 사실 확실치는 않았다. 그저 슬쩍 떠본 것이었는데 정가혜가 발걸음을 멈추었다.“그 일은 아드님께 물어보세요.”한마디 내뱉고는 이내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떴다. 내일이면 송사월은 침대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얼른 가서 기능이 가장 좋은 휠체어를 사와야 했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동안 멍하니 있던 유나희는 이내 몸을 돌려 호텔로 돌아갔다.호텔로 돌아온 유나희는 다짜고짜 침대에 웅크리고 있는 이연석을 향해 가방을 던졌다. “이 자식이, 네가 잘못해 놓고는 나한테 뒤집어씌워?”요 며칠 그녀는 자신의 간섭 때문에 두 사람이 헤어졌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연석이 먼저 정가혜한테 미안한 짓을 했을 줄 누가 알았겠나?침대에 누워있던 이연석은 그 말에 눈살을 살짝 찌푸리면서도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가 자신을 무시하자 그녀는 앞으로 다가가 그의 귀를 덥석 잡았다.“방금 정가혜한테 가서 물어봤어. 네가 미안한 짓이라도 했냐고. 너한테 물어보라고 하던데.”“그 말은 네가 정가혜한테 미안한 짓을 했다는 소리잖아. 너 똑바로 말해봐.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어안이 벙벙해진 그는 애꿎은 눈을 반짝이며 유나희를 쳐다보았다.“내가 뭔 미안한 짓을 했다고 그래요?”그녀와 헤어진 후 다른 여자를 건드린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어떻게 그녀에게 미안한 짓을 할 수가 있겠는가?“잘 생각해 봐. 술 먹고 다른 여자랑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그럴 리 없어요.”손사래를 치며 부인하려다가 손을 드는 순간, 얼마 전 숙취에 빠졌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날 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4-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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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07화

정가혜가 설마 배하린이 그를 집에 데려다주는 것을 보고 그를 거절한 것일까? 그런 줄로만 알았던 이연석은 발이 아픈 것도 신경 쓰지 않은 채 신발을 신고 곧장 병원으로 향했다.막 휠체어를 사서 돌아오던 정가혜를 보고 그가 엘리베이터로 들어가 휠체어 손잡이를 잡았다. “가혜 씨, 그날 밤 내가 술에 취해서 호텔 앞에 쓰러져있었어요. 배하린이 그런 날 보고 집까지 데려다준 거예요.”헐레벌떡 숨을 몰아쉬며 말을 하던 그가 핸드폰을 꺼내 CCTV 영상을 그녀한테 보여주었다. “맹세코 난 아무 짓도 하지 않았으니까 제발 날 거절하지 말아요.”턱수염이 덥수룩하고 수척해진 그의 모습을 바라보던 그녀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아무 짓도 안 했다고요?”그는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그래요. 아무 짓도 안 했어요!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떨구었다.“언제쯤이면 더 이상 날 속이지 않을 거예요?”그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속인 적 없어요.”“좋아요. 그럼 한 가지만 물을게요. 그날 배하린이랑 자면서 기분이 어떠냐고 물어보는 말에 당신은 뭐라고 대답했어요?”그녀의 질문에 이연석은 멍해졌다.말문이 막힌 그의 모습에 그녀는 점점 눈시울이 붉어졌다.“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못 본 줄 알아요? 이런 걸 보여주면서 날 또 속일 작정이었어요?”증거를 보여주는 건 단지 핑계를 대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따져 묻는 그녀를 보며 그는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그녀가 휠체어를 잡은 그의 손을 밀치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난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전혀 기억이 없다고요. 그날 밤 정말 많이 취했었어요. 나...”“그래요. 술에 취한 상태에서 배하린 씨와 잔 거죠. 그날 밤 내가 술에 취해 당신과 잠자리를 가졌던 것처럼요.”그녀는 상처 가득한 눈을 들어 담담하게 그를 쳐다보았다.“하지만 의식이 있든 없든 간에 배하린 씨와 잔 건 사실 아닌가요?”애써 변명하려 했던 그는 변명할 말을 찾지 못해 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4-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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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08화

한편, 누군가와 진한 스킨십을 하고 있던 그녀는 이연석의 전화를 받고 급히 그 남자를 밀쳐냈다. 그녀는 벌거벗은 남자를 향해 조용히 하라는 손짓을 한 후 통화버튼을 눌렀다. “연석아, 이 늦은 시간에 네가 웬일이야? 나 보고 싶어서 전화했어?”간드러진 목소리에 이연석은 참지 못하고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그날 밤, 날 집에 데려다주고 나한테 무슨 짓 한 거 아니지?”그 말에 그녀는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질문이 잘못된 거 같은데? 네가 나한테 무슨 짓을 했냐고 물어야 하는 거 아니야?”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애써 마음을 다잡고 입을 열었다.“내가 정말 너한테 무슨 짓을 했다면 넌 그걸 빌미로 날 협박했겠지. 조용히 떠나는 게 아니라.”다음날 침대에 사람이 없었다는 것은 그녀가 제 발이 저려 먼저 떠났다는 증거 아닌가?“내가 떠난 건 네가 나랑 잤다고 해도 날 선택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야. 네가 결혼하기 전에 너랑 하룻밤을 보낸 것만으로도 난 충분하니까.”이런 말을 다른 여자가 했다면 믿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둘째 형한테까지 꼬리 친 배하린의 말을 믿을 리가 있겠는가?“사실대로 말하는 게 좋을 거야. 그렇지 않으면...”“그날 밤 내가 너한테 기분이 어떠냐고 물어봤었고 넌 대답까지 했었어. 왜 이제 와서 모른 척하는 건데?”그 말에 그는 몸이 굳어졌다. 정가혜도 똑같은 말을 했는데 설마 정말...“아니... 그럴 리 없어.”“왜 말이 안 되는데?”배하린은 소파에 엎드린 채 핸드폰 너머에 있는 그에게 애교를 부렸다.“그날 밤, 넌 많이 취해서 아마 기억이 잘 나지 않을 거야. 정 못 믿겠으면 CCTV 확인해 봐.”이연석의 집은 프라이버시 때문에 CCTV를 설치하지 않았고 이 점은 배하린도 잘 알고 있었다.다만 그녀가 이렇게 말한 건 이연석을 착각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두 사람이 하룻밤을 보낸 게 사실이라고. 어차피 진실은 그녀만이 알고 있으니까. 그녀가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면 이 세상에서 진실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4-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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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09화

핸드폰을 쥔 채 손을 약간 떨고 있는 그는 자신이 이런 일을 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눈썹을 찡그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CCTV를 켜고 반복해서 살펴보았다. 그러던 중 의식을 잃을 정도로 취한 자신을 발견했는데 이는 정가혜가 의식을 잃은 모습과는 살짝 달랐다. 호텔 입구에 쓰러진 모습으로 보면 그는 완전히 자주적인 행동 의식을 잃은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그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었을까?게다가 배하린과 정가혜는 거의 동시에 집 안으로 들어왔고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무의식적인 사람이 응답하는 건 너무 수상쩍었다.술에 취했기 때문에 자신이 그런 일을 했는지 하지 않았는지는 솔직히 잘 느끼지 못하였다. 아침에 일어난 반응으로는 그 일의 사실 여부를 판단할 수 없었고 위의 두 가지 상황으로만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정가혜가 직접 보았다는 걸 그는 결코 믿을 수 없다. 배하린을 찾아가 그녀가 진실을 말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오해는 영원히 풀리지 않을 것이다. 생각이 점점 뚜렷해진 이연석은 유나희에게 전화를 걸어 귀국 전용기를 준비하라고 했다.유나희는 그가 잘못을 저질러 정가혜의 용서를 받지 못하고 포기한 줄 알았는데 귀국 후 그가 배하린을 집으로 묶어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이유를 정확히 알고 있는 그녀는 협박과 회유에 능수능란한 이연석의 모습에 문득 그에게서 이승하의 그림자가 조금 보이기 시작했다. 왠지 모를 뿌듯함이 생겼고 드디어 아들이 조금씩 닮아가고 있다는 생각에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핍박해도 배하린은 한사코 인정하지 않았다.“그날 밤, 네가 많이 취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혀 의식이 없었던 것은 아니야.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집에 들어서자마자 날 바닥에 눕혔겠어?”이연석은 순식간에 얼굴을 붉혔지만 증거가 없어서 변명할 말을 찾지 못하였다. “그곳에는 CCTV가 없으니까 네가 마음대로 뒤집어씌우는 거겠지.”배하린도 그 점을 알고 있었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4-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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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10화

이연석이 자리를 뜬 후, 유나희는 소파에 기대어 앉아 가슴을 두 손으로 감싼 채 롱스커트 아래로 곧게 뻗은 하얀 다리를 들어 올려 나른하게 포개고는 다시 차가운 눈빛으로 배하린을 노려보았다.“일단 뺨부터 때려.”경호원은 재빨리 손을 뻗어 배하린의 얼굴을 세게 때렸다. 뺨을 세 대 맞은 배하린은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뿌리치고는 이를 악물고 유나희를 노려보았다.“왜 절 때리시는 거예요?”“네가 내 아들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는데 내가 널 때리지 못할 이유가 뭐야?”사건의 자초지종을 듣고 CCTV 영상까지 본 유나희는 이 모든 게 배하린이 정가혜를 쫓아내려고 스스로 벌인 자작극이라는 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뒤집어씌운 적 없어요. 연석이가 술에 취해서 절 건드린 거예요.”“갈비뼈를 부러뜨리고 손가락을 부러뜨려.”유나희는 배하린의 반항을 무시한 채 계속해서 경호원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네.”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던 경호원이 작은 망치를 꺼내 들더니 유나희의 갈비뼈를 향해 세게 내리쳤다.배하린은 너무 아파서 차마 말을 하지 못하였고 바닥에 엎드린 채 새빨간 눈을 뜨고 유나희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소파에 앉아 있는 온화하고 점잖은 사모님은 침착하게 옆에 있는 커피를 들어 가볍게 한 모금 마셨다.“배하린, 솔직하게 진실을 말한다면 더 이상 이런 고통은 받지 않을 거야. 그렇지 않으면 난 계속 널 괴롭힐 생각이야.”녹음 펜을 주머니에 넣은 배하린은 아랑곳하지 않고 입꼬리를 잡아당기며 미친 듯이 웃었다.“그 당시 저와 연석이를 갈라놓을 때도 이런 방법을 쓰셨죠. 이렇게 오랜 세월이 지났어도 여전하시네요. 다른 방법은 없나요?”커피를 손에 들고 있던 유나희는 흠칫했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배하린을 차갑게 노려보았다. “네가 감히 그 당시의 일을 들먹거려?”“제가 말 못 할 게 뭐가 있겠어요?”배하린은 아픔을 참으며 바닥을 짚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사모님께서 연석이와 헤어지라고 강요하지 않았더라면 진작에 그와 결혼했을 거예요. 이렇게 오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4-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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