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말재주는 정말로 대단했다.“너 이렇게 하는 거, 결국 정가혜를 자극하려는 거잖아.”유나희의 직언에도 배하린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오히려 미간을 찌푸리며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가혜 씨를 자극한다고요? 이게 가혜 씨랑 무슨 관련이 있어요?”유나희는 컵을 내려놓으며 차가운 눈빛으로 배하린을 응시했다.“네가 연석이의 아파트에 들어간 직후에 정가혜도 바로 도착했어. 네가 분명 정가혜가 올 것을 알고 일부러 앞에서 연극을 벌인 거겠지.”배하린은 마치 이해한 듯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고개를 들어 유나희의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어머니, 저는 길에서 연석이를 우연히 만나 집에 데려다 준 것뿐이에요. 그동안 가혜 씨가 올지 몰랐어요. 설마 연석이랑 가혜 씨가 약속을 한 건가요?”그 부분은 이연석도 말한 적이 없으니 아마 약속하지 않았을 것이다.유나희는 그날 밤 정가혜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그녀는 그 후 곧바로 이연석의 아파트로 향했었다. 그녀가 그렇게 빠르게 이연석을 찾아간 것은 자신과의 대화 후 헤어지기 위해 그를 만나러 간 것이었다.이렇게 보니, 정가혜가 배하린과 이연석의 ‘하룻밤’을 목격한 건 결국 자신 때문이었다.이를 깨달은 유나희는 한동안 말문이 막혔고 더 이상 할 말을 찾지 못했다.“어머니 표정을 보니, 약속은 안 한 것 같네요. 만약 두 사람이 약속을 하지 않았다면, 제가 어떻게 미리 가혜 씨가 올 것을 알았겠어요?”“가혜 씨가 올지조차 몰랐는데 제가 왜 가혜 씨를 자극하겠어요?”“설령 그 일로 나중에 가혜 씨를 자극하려 했다 하더라도 제가 찾아갔다는 흔적이 남았겠죠.”“원한다면 가혜 씨에게 직접 물어보세요. 우리 둘이 만난 적 있는지.”“만약 없다면 어머니는 지금 증거도 없이 저를 모함하고 있는 겁니다!”유나희는 이 말을 듣고 얼굴이 어두워졌다.“네 속셈이 무엇이든 간에 연석이를 모욕한 건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유나희가 다시 경호원에게 고개를 까딱이는 것을 보자 배하린은 겁이 나
배하린은 유나희가 자신을 위협하도록 유도해 왔고 결국 그 목적을 달성한 후 조소를 터뜨렸다.“어머니, 이렇게 저를 협박하시면 가혜 씨가 이 사실을 알게 된 후 더더욱 이 집에 들어오려고 하지 않을 텐데, 두렵지 않으세요?”“가혜가 우리 집에 들어오든 말든 난 상관없어. 내가 이 모든 걸 하는 건 내 아들을 돕기 위해서일 뿐이야.”이 말에 배하린의 입가에는 더욱 짙은 미소가 번졌다.“어머니는 제 부모님과 제가 이씨 집안과 같은 가문에 맞설 힘이 없다는 걸 알고 이렇게 협박하는 거겠죠?”“알고 있으면 내 말대로 해.”배하린은 크게 숨을 들이쉰 후 마치 죽음을 각오한 듯 목을 뻣뻣하게 세웠다.“좋아요. 어머니가 그렇게 듣고 싶다면 아무 일도 없었다고 말할게요. 그게 원하는 거잖아요.”결과를 얻은 유나희는 배하린의 턱을 잡고 있던 손을 풀고 그녀의 얼굴을 가볍게 두드렸다.“이 말은 가혜 씨에게 직접 하도록 해.”유나희는 그렇게 말한 뒤 몸을 곧추세우고 경호원이 건네준 손수건을 받아 우아하게 손가락을 닦았다.“먼저 가둬. 얼굴에 난 상처는 깨끗이 치료하고 회복되면 정가혜한테 데려가.”“알겠습니다.”경호원이 배하린을 끌고 나가자마자 정확한 시간을 계산한 듯 이연석이 거실로 돌아왔다.“어머니, 배하린은 어딨어요?”유나희는 아들에게 등을 돌린 채 피가 조금 묻은 손수건을 무심하게 쓰레기통에 던졌다.“다 처리했어. 사흘 뒤에 우리와 함께 정가혜를 만나 진실을 밝힐 거야.”이 말을 듣자 긴장으로 굳어있던 이연석은 비로소 안도했다. 술에 취했어도 자신이 그런 일을 저지를 리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천만다행이었다. 만약 그가 배하린과 하룻밤을 보냈다면 평생 자신을 용서하지 못했을 것이다!사흘 후, 배하린은 전용기를 타고 정가혜 앞에 나타났다. 송사월을 간호하던 정가혜는 눈물로 범벅된 배하린을 보고 얼떨떨했다.“가혜 씨, 그날 밤 난 연석이를 집에 데려다준 후, 가혜 씨가 연석이를 찾으러 온 것을 보고 순간 질투가 나서 일부러 연극을 벌였어
갑작스러운 청혼에 정가혜는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지금 머릿속이 너무 복잡해요. 시간을 좀 주세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요.”급하게 청혼을 한 이연석은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마음이 있었지만, 역시 너무 성급했음을 깨달았다. 그는 정가혜의 손에 끼워진 다이아몬드 반지를 힐끗 보고는 그녀가 반지를 빼지 않고 그대로 두고 있는 것을 보며 마음속의 저울이 자신에게 기울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더 이상 강요하지 않기로 했다.“얼마나 생각해 볼 건데요?”“내일 사월이가 퇴원하니까 사월이랑 귀국하고 정리한 후에 다시 답을 줄게요.”정가혜가 여전히 혼란스러워하는 표정을 보이자 이연석은 그녀가 아직 마음속 생각을 정리하지 못했을 것이라 짐작했다.“좋아요, 가혜 씨 답을 기다릴게요.”정가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연석은 한참 동안 그녀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두 팔을 벌려 그녀를 끌어안았다. 원래 정가혜는 밀어낼 생각이었지만, 그가 온 힘을 다해 자신을 껴안는 것을 느끼고는 멈칫했다.정가혜가 자신을 밀어내지 않은 것을 감지한 이연석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따스한 감정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가혜 씨 답이 더 이상 거절이 아니었으면 좋겠어요.”그는 이렇게 말한 후 정가혜를 놓아주고 웃으며 뒤돌아섰다. 정가혜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깊은 혼란에 빠졌다.정가혜는 손을 들어 그 반지를 바라보았다... ‘배하린이 한 말이 정말 사실일까? 다시 한 번 저 사람을 믿어도 될까?’이연석은 차에 올라탄 후 어머니 유나희를 껴안았다.“어머니 덕분에 제가 솔로 탈출이에요.”아들의 기쁜 모습을 본 유나희는 오해가 풀렸음을 눈치 채고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네가 혼자 살든 말든 상관없어. 난 그저 네가 손자를 남겨주길 바랄 뿐이야.”“손자가 갖고 싶으시다면 나중에 가혜 씨랑 결혼해서 애를 많이 낳을게요.”유나희는 여전히 정가혜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배하린보다는 정가혜가 집에 들어오는 게 더 낫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결혼하고
“나...”정가혜는 사랑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좋아하는 감정은 있다고 말하려다가 입을 닫았다. 사랑하지 않는다면 왜 그가 다른 여자를 만졌다는 것에 그렇게까지 신경이 쓰였을까? 이전에는 전혀 개의치 않았던 일이었는데.정가혜조차 자신이 그를 사랑하는지 아닌지를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송사월은 눈가에 따뜻한 미소를 띠었다.“누나, 때로는 사랑에 대해 너무 두려워하지 마요. 마음에 그 사람이 있다면 다시 한 번 용기를 내봐요.”정가혜는 원래 사랑과 미움을 분명히 하는 성격이었다. 하지만 전남편의 배신을 겪고, 또 신뢰할 수 없는 꽃미남 이연석을 만난 이후로 감정에 대해 확신을 갖지 못하게 된 것이다.하지만 송사월은 양쪽에서 서로를 향해 가는 사랑이라면 언제나 용기를 낼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만약 자신이었다면 망설임 없이 사랑을 택했을 것이다. 설령 실패하더라도 다시 시작하면 되지 않을까? 단, 그는 다시 시작할 기회조차 없을 뿐이었다.송사월의 생각을 읽지 못한 정가혜는 손을 꽉 쥐고 처음으로 다른 사람 앞에서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았다.“한 번은 용기를 내서 다가간 적이 있었어. 하지만 내가 한 걸음 내딛는 순간 그 사람이 나를 배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 그래서 도망쳤고, 두려워졌고, 더 이상 그 사람이랑 엮이지 않겠다고 결심했지. 그런데 오늘 그 사람이 내가 본 게 단순한 오해였다고 말하면서 그 여자를 데려와 설명했어. 내가 과연 믿어도 되는 걸까?”송사월은 이해했다.“그 사람이 과거에 했던 일들이 누나한테 불안감을 준 거예요. 그래서 결국 신뢰할 수 없는 거죠.”사실 사건 자체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중요한 건 이연석이라는 이름표였다. 결혼 생활에서 상처를 받은 정가혜는 이연석에게 모든 걸 걸기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녀가 이런 이유는 이연석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만약 다른 사람, 이를테면 심형진이라면, 정가혜는 그가 다른 여자를 만졌는지 신경조차 쓰지 않았을 것이고 고민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맞아, 그 사람이 했던 일 때문에
정가혜는 엘리베이터를 나와 복도를 지나자마자 배하린과 마주쳤다. 순간 그녀의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멈췄다.배하린은 정가혜를 보자 얼굴에 걸친 선글라스를 벗고는 다시 발걸음을 옮겨 정가혜 앞까지 다가갔다.“가혜 씨, 알아야 할 게 있어요. 시간을 내서 한 번 들어봐요.”막 설명을 끝내고 또다시 진실을 말하겠다는 배하린을 보며 정가혜는 그녀의 말을 전혀 신뢰할 수 없었다.“나 시간 없어요. 그리고 당신이 말하는 진실 따위는 듣고 싶지도 않아요.”정가혜는 배하린을 지나치려 했지만 그녀가 길을 막아섰다.“가혜 씨, 이렇게 아무것도 모른 채 연석이랑 결혼하고 싶다면 맘대로 해요.”그러면서 배하린은 녹음기를 꺼내 들었다.“하지만 가혜 씨를 속이는 꼴을 보고 싶지는 않아요.”그녀는 녹음기를 정가혜의 손에 쥐여 주며 말했다.“이건 연석이 어머니가 연석이를 다른 곳으로 보내고 나서 저한테 연석이 대신 설명하라고 강요한 증거예요.”차가운 녹음기가 손에 닿자 서늘한 기운이 퍼졌다.“그러니까 당신 말은, 방금 했던 설명이 연석 씨 어머니가 시켜서 한 거란 거예요?”“네.”배하린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제가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죽을 거라 협박받았어요. 부모님도 함께 위험에 처하게 될 거라 어쩔 수 없이 시키는 대로 했어요.”배하린은 진실을 보여주기 위해 옷을 걷어 올리더니 정가혜의 손을 잡고 자신의 갈비뼈에 대었다.“만져봐요. 몇 개나 부러졌는지 느껴지죠?”그녀는 이어서 축 늘어진 약지손가락을 정가혜 앞에 들이밀었다.“손가락도 영구적인 골절이 됐어요.”배하린은 말을 끝내고 목을 가린 높은 칼라를 젖혀 목에 난 상처들을 정가혜에게 보여주었다.“이 상처들, 전부 연석이 어머니가 경호원에게 시켜서 때리게 한 거예요.”그녀의 눈에는 억울함이 서려 있었고 입가에는 비웃음이 스쳤다.“겨우 자기 아들과 하룻밤을 가졌다는 이유로 이렇게 잔인하게 굴다니.”“그분이 이렇게까지 한 이유는 오로지 아들을 위해 가혜 씨 마음을 되돌리기 위해서였
배하린을 바라보며 정가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는 길게 드리운 속눈썹을 내려뜨고 손에 들린 녹음기를 멍하니 바라봤다. 사람들은 모두 이연석이 정가혜를 사랑한다고 했다. 배하린조차 그렇게 말하니, 그 말은 사실일 것이다. 정가혜 역시 이연석이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의심이 남아있었다. “그날 밤 두 사람 정말 잤던 거예요?”정가혜에게는 유나희가 아들을 위해 무슨 일을 했든 상관없었다. 그녀가 신경 쓰는 것은 오직 이연석뿐이었다. 배하린은 그 말을 듣자 비웃음을 참지 못했다. “가혜 씨, 아직도 연석이한테 희망을 걸고 있는 거예요?”“네.” 정가혜도 함께 미소를 지었다. 따스한 햇살이 그녀의 얼굴을 비추며 더욱 밝게 빛나고 있었다. “난 이 모든 것이 그저 거짓이었으면 해요. 그러니까...”정가혜는 잠시 말을 멈추고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당신이 방금처럼 다시 한 번 합리적인 설명을 해줄 수 있을까요?”정가혜가 그 말을 할 때 그녀의 눈은 이미 붉어져 있었다. 그녀가 지금 얼마나 힘들어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만약 배하린이 착한 사람이었다면 정가혜를 동정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배하린은 어릴 때부터 부모에게 아첨하며 살았던, 돈만 쫓는 여성이었다. 그녀 같은 사람은 동정심이란 게 없다. 오로지 자신이 얻지 못하는 것은 파괴하려는 욕망만 있을 뿐이다. 무엇이든 대가를 치르더라도 말이다.“가혜 씨, 한번 생각해봐요. 술에 취한 남자와 그를 깊이 사랑하는 여자가 같은 방에 오래 있었다면 무슨 일을 했겠어요?”정가혜의 얼굴은 햇빛을 받고 있었지만 점점 창백해져 갔고 녹음기를 쥐는 힘도 점점 강해졌다. “연석이는 절대 한 여자에게만 충실하지 않을 거예요. 아마...”“앞으로 나에게만 충실하겠다고 했어요.” 정가혜는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배하린은 입 꼬리를 올리며 비웃음을 터뜨렸다. “그래요? 그렇게 믿고 싶은 거죠?”그녀는 마치 우스꽝스러운 농담이라도 들은 것
정가혜는 자신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의사에게 다시 한번 검사를 요청했지만 결과는 여전히 충격적이었다. 병상에 앉아 보고서를 몇 번이고 확인하던 정가혜는 결국 자신이 임신했다는 현실을 천천히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날 밤, 피임 조치를 하지 않았고 다음 날 아침에는 서유에게 들키고 말았다. 그리고 곧바로 유나희에게 불려갔다. 이연석과 배하린을 만나고 홧김에 밤새 M국으로 송사월을 찾아온 뒤 72시간이 지나도록 긴급 피임약을 먹지 않았으니, 임신하지 않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 아이가 찾아온 시기는 너무나도 부적절했다. 정가혜가 불안한 표정으로 침울하게 앉아 있는 모습을 보며 병상 앞에 앉아 있던 송사월도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누나, 이연석 씨의 아이죠?”송사월의 직설적인 질문에 정가혜는 난처해했지만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왜 그렇게 기뻐하지 않는 거예요?” 이연석의 청혼을 받아들일 준비를 다 마친 것처럼 보였는데, 왜 이렇게 불안해 보이는 걸까? 정가혜는 손을 들어 자신의 아랫배를 어루만졌다. 아직은 생명의 기운을 느낄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는 무겁게 느껴졌다. “나도 모르겠어...” 정가혜는 송사월을 바라보며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아마도 임신 때문에 너무 예민해진 것 같아.” 정가혜는 눈물을 닦고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사월아, 너는 먼저 돌아가. 나는 여기서 조금 더 생각을 정리한 후에 갈게, 응?” 송사월은 정가혜를 가만히 응시했다. 임신 때문에 예민해진 것인지, 아니면 감정적으로 너무 힘든 것인지, 정가혜는 무언가 많은 것을 혼자 짊어지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랐고 스스로 감당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송사월은 이런 상황을 많이 겪어봤기에 그녀의 고통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그래서 더 이상 말 없이 그녀의 눈물을 손수건으로 닦아주었다. “그래요. 누나 울지 마요.” 송사월의
정가혜는 서둘러 A시로 돌아왔지만 공항에서 이연석이 화려한 외모와 훤칠한 몸매를 가진 여인에게 꽃다발을 건네는 장면을 목격하고 말았다. 그녀의 발걸음은 천천히 멈춰섰다. 사람들이 북적이는 공항의 도착 게이트가 정가혜의 시야에서는 희미해져 갔고 남은 것은 그들 셋뿐이었다. 그녀는 그 여자가 꽃다발을 받은 후 갑자기 발끝을 세우고 이연석의 뺨에 키스를 한 뒤, 입을 가리며 급히 달아나는 모습을 보았다. 이연석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이내 발길을 돌려 빠르게 떠났다. 그들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정가혜의 세상은 온통 어둠에 잠겼다. 결국 배하린이 없더라도 이연석 곁에는 언제든 다른 여자가 있을 것이었다는 걸 그녀는 깨달았다. 그들이 가로막고 있는 것은 단순히 배하린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가 결코 줄 수 없는 ‘안정감’이었고, 정가혜가 주고 싶어도 번번이 깨져버리는 ‘신뢰감’이었다. 정가혜는 자신이 아이에게 주고 싶은 가정이 아빠는 한결같은 사랑을 주고 엄마는 그를 믿어주는 그런 집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그와 자신 둘 다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집에 도착한 정가혜는 멍하니 앉아 있다가 결국 전화기를 들어 이전에 알게 된 산부인과 의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노현정이 우유를 가져오던 중, 정가혜가 낙태 수술을 예약하려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놀라 손이 떨렸다. 트레이에 올려진 우유가 거의 쏟아질 뻔했다. 전화를 끊은 정가혜는 노현정이 그 사실을 들었다는 걸 알고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주머니,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지 말아 주세요...” 노현정은 혼란스러웠다. “가혜야, 아이를 가졌는데 왜 낙태를 하려고 해?” 정가혜는 대답하지 않고 이불을 들어올리며 침대에 누웠다. 몸과 마음의 피로가 그녀를 지치게 만들었다. 노현정은 많은 의문이 있었지만 지친 그녀를 보고는 입을 다물고 방을 나갔다. 그 시각 이연석은 공항에서 정가혜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정가혜가 나오지 않자 급히 노현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서유의 사망 소식을 들은 육성재는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결국 그는 그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 서둘러 달려갔고, 모든 이들이 묘지를 떠난 후에도 그녀의 묘비 앞에 남아 머물렀다.“서유 씨...”그는 묘비를 붙잡고 천천히 몸을 낮추어 무릎을 꿇고, 더 이상 젊지 않은 눈으로 그녀의 영정 속 얼굴을 오랫동안 응시했다.“내가 올 줄 몰랐죠?”육성재는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시작했다.“내가 한 사람을 이렇게 오래도록 사랑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어요.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나도 참 정이 깊은 놈이었네요.”영정 사진을 보며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너무 깊이 사랑해서 세상 어떤 여자도 내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됐어요. 그러니 서유 씨, 나도 이승하 못지않게 당신을 사랑했던 거예요, 안 그래요?”그러나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건 묘지의 나뭇가지 사이를 스치는 새들의 울음소리뿐이었다. 새와 짐승들이 떠나고 나니 주변은 그저 고요할 뿐이었다. 마치 지난 수년간 그의 마음속에 묻어둔 사랑처럼, 결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어둠 속에 갇힌 채였다.그토록 짙은 사랑은 세상에 드러낼 수 없었다. 그녀가 떠난 지금에서야 그는 그녀의 묘 앞에 와서 고백했다.그 역시, 깊이 사랑했노라고.모든 사람에게는 후회가 있다. 육성재의 유감은 그녀가 죽기 전까지 자신을 이렇게 바보처럼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었다.하지만 알게 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서유는 이미 떠났는데, 육성재 난 왜 여전히 집착하고 있는 거냐? ’육성재는 그녀의 묘비 앞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그러다 결국 답을 찾지 못한 채 천천히 일어나 발걸음을 돌렸다.그의 삶은 사랑이 아니라 일에 무게를 둔 인생이었다. 그는 생을 바쳐 육씨 집안을 세계 최고의 가문으로 일궈냈다.그는 상업계의 전설 같은 인물로 남았고, 수십 년이 지나도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았던 육성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야기하곤 했다.수도에 있는 송사월은 그녀의 죽음 소식을 제일 마지막으
생이 마감하는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간 것은 그 5년 동안 이승하가 숨겼던 사랑이었다.몇 번이나 뒤척이며 잠에서 깼을 때, 자신의 몸이 단단하고 강인한 두 팔에 꽉 안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게 강하게 끌어안는 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또한 주말에 식사할 때, 식탁 건너편에 앉은 이승하가 가끔 그녀를 몰래 훔쳐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오랜 짝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그리고 그가 모든 일을 마친 후 그녀를 안아 자신의 가슴에 엎드리게 하고,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아이를 달래듯 잠들게 했던 모습 또한 마찬가지였다.이승하의 사랑은 작은 순간순간에 담겨 있었다. 그것이 어떤 모습인지 타인에겐 잘 보이지 않았으나, 이승하 본인만은 아주 알고 있었다. 당시 그녀에 대한 사랑을 얼마나 힘들게 숨겨왔는지...서유의 눈은 이미 뜰 수 없었고, 몸은 영혼이 빠져나간 듯 더 이상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다시 한 번 볼 힘조차 없었다.그녀는 주머니 속 휴대폰을 더듬어 무작정 전화를 걸었고, 다행히 그것을 받은 사람은 정가혜였다.세월이 흐르면서 정가혜도 나이가 들었다. 젊었을 때의 맑은 목소리는 사라지고 약간 쉰 소리가 섞여 있었다.“서유야, 조금만 기다려. 우리 며느리가 출산하면 바로 널 보러 갈게...”삶의 마지막 순간에 친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왜인지 이미 메마르고 고갈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고, 이내 오열로 변해 멈출 수 없었다.“가혜야, 난 승하 씨가 너무 보고 싶어. 그 이를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 부탁할게. 하준이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줘. 엄마가 하준이 결혼식을 볼 수 없게 됐다고...”전화기 너머의 정가혜는 이 말을 듣고 함께 눈물을 쏟아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서유가 그동안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어머니로서 아들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그녀는 이미 이승하를 따라갔을 것이다.얼마 전부터 서유의 몸이
서유의 손가락이 이하준의 머리 뒤로 부드럽게 닿았다. 마치 이미 모든 사실을 받아들인 듯 그녀의 표정은 놀랍도록 평온했다. “언제쯤 결혼할 거니?”이하준의 몸이 경직되었다. 안개처럼 흐릿한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서유를 천천히 놓아주며 말했다. “어머니... 아직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지 못했어요.”아들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서유는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봐봐. 네 엄마는 지금 살아있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단다. 제발 네 아빠를 만나러 가게 해줘. “어릴 적엔 부모님이 그를 속박했지만, 커서는 그가 부모님을 속박했다. 오직 그 속박만이 그를 고아로 만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 번만 더 이기적일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그는 서유의 팔을 붙잡으며 간절히 말했다. “어머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날 거예요. 그러면 결혼하겠습니다, 네?”결국 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서유는 평소와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교회에 가서 너를 위해 기도하고, 네가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길 빌어주마...”서유의 소원을 결코 들어주지 말아달라고 하늘의 신들에게 기도하며, 이하준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평생 어머니의 사랑을 얻기 위해 결코 결혼하지 않기로 했다.그는 이승하가 남겨둔 로봇을 다시 가져와 서유에게 아버지가 남긴 유언이 모두 로봇 프로그램에 담겨 있다고 말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유언의 일부를 들려줄 것이며, 만약 그녀가 아버지가 말하고 싶었던 모든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살아야 한다고 전했다.처음에 서유는 이승하와 똑같이 생긴 로봇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봇이 말을 시작하는 순간, 그녀는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는 서재에 앉아 하루하루 이승하가 녹음했던 로맨틱한 말을 돌려서 들었다.마치 예전에 그가 그녀를 찾지 못했을 때 다른 이의 번호로 하루에 십여 통의 문자를 보내 그녀의 부재를 애도했던 것처럼.이제는 그가 먼저 떠났지만
아들을 위해, 결국 서유는 이승하를 따라 죽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하룻밤 사이 머리가 백발이 되어, 마치 열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모습이 되었다. 예전에는 세월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던 얼굴이 순식간에 주름투성이가 되었고,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그녀의 눈동자도 생기를 잃고 텅 빈 채로 아무 빛깔도 담고 있지 않았다.엄마가 되었으니 이제는 예전처럼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녀는 이승하의 무덤 앞에서 약속했다. 자신을 기다려 달라고.아들이 결혼하면 그때 찾아가겠다고. 만약 자신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다음 생의 약속도 취소할 거라고. 그리고 영원히,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이승하의 장례식에 서유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기운을 내어 비틀거리며 그의 무덤 앞에 섰을 때, 무덤가에서 그녀가 중얼거리던 말들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오직 그녀를 부축하며 아버지의 무덤을 찾은 이하준만이 그 말을 기억했다.눈 덮인 땅에 쓰러져 의식을 잃었던 그날 밤, 서유는 병원으로 옮겨져 일주일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그녀가 없는 동안 이승하의 시신은 얼음관에 안치된 채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일주일을 버텼다. 그녀가 깨어난 후, 그녀는 하얗게 센 머리와 멍한 눈빛으로 그를 단 한 번 보고는 곧바로 돌아섰다.그들이 이승하를 어떻게 묻었는지, 묘지는 어떻게 정했는지, 영정 사진으로 어떤 사진을 선택했는지 서유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차가운 베개를 매만지며 그가 아직 살아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데만 몰두했다.‘만약 당신이 여기 있었다면, 내 하얀 머리를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겠죠.’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당신은 그랬을 거예요.”이승하는 질투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서유가 그 때문에 긴장하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그는 한참 동안 기뻐하며, 그녀 마음에 자신이 있다는 확신을 얻곤 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녀가 그로 인해 속을 끓이고 밤낮으로 잠 못 이루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이
서유는 떨리는 속눈썹을 들어, 삶의 의미를 잃은 듯한 눈으로 멀리 바라보며 말했다.“아니, 난 어디에도 가지 않을 거야. 나와 그 사람, 그냥 여기 있을 거야. 내가 얼어 죽을 때까지, 누구도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어.”그녀가 여기서 얼어 죽겠다는 말을 들은 순간, 주변 사람들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먹먹해졌다. 모두가 그녀를 말리며 무모한 짓을 하지 말라고 설득했지만, 서유는 그 어떤 말도 듣지 않았다. 단호하고도 완강하게, 이승하를 품에 안고 눈 덮인 땅 위에 앉아 그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때 이하준이 서유의 손을 붙잡고, 그녀의 손바닥을 힘껏 눌러 그녀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렸다.“어머니,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알아요. 그래서 지금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드신 것도 이해해요. 하지만 전 이미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어머니까지 잃을 순 없어요. 제발 부탁이에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 주세요...”아들이 귀 옆에서 애절하게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서유는 천천히 시선을 그에게 돌렸다. 아버지와 똑같은 모습으로 빚어진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그녀의 입술 끝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꽃이 피어난 듯한 미소였다.“난 이미 네 아버지가 떠날 준비를 오래전에 마쳤단다. 이제 그이가 정말 떠났으니, 당연히 나도 함께 가야지. 너도 알잖니. 그이가 살면 나도 살고, 그이가 죽으면 나도 죽는 거야. 아무도 이걸 막을 순 없어.”예전에 이하준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는 어머니의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만큼이나 깊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성인식을 맞이한 바로 오늘, 부모님 두 분을 동시에 잃을 수 없었다.눈 덮인 땅 위에서 무릎을 꿇은 채, 그는 천천히 어머니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 서유를 힘껏 끌어안았다.“어머니, 아버지는 제가 결혼하는 것과 자식을 낳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씀하셨어요. 지금 아버지는 그걸 보지 못하고 떠나셨지만, 어머니가 대신 그 순간을 기다려 주시면 안 되나
눈물이 눈가에서 갑작스럽게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가슴을 찢는 통곡이 아니었다. 아무 소리 없이 흘러내릴 뿐, 그녀는 벌어진 입술로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이생에서 이승하에게 해야 할 말은 이미 다 끝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눈을 내리깐 채,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창백한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바보, 당신이 아무리 피를 흘린다 해도 당신은 내 남편이에요. 내가 무섭겠어요? 하나도 안 무서우니까, 왜 굳이 혼자 이런 곳에 온 거예요?”마지막 이별의 말조차 건네지 못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러나 그녀의 이승하는 이런 안타까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모든 걸 숨겼다.만약... 그녀가 그 가짜 이승하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평생 그의 몸조차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눈과 함께 얼어붙어 영원히 설산 아래에 묻혔을 것이다.이승하는 이미 스스로 세상에서 사라질 각오를 했던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따라오지 않게 하려고, 그녀를 속이기 위해 가짜 로봇을 만든 것이다.‘하지만 승하 씨...’‘당신이 아무리 똑같이 생긴 로봇을 만든다 해도, 그건 당신이 아니에요. 당신이 평생 날 속일 수 있다면 난 받아들였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지금 그 거짓말은 단 한 순간도 버티지 못했잖아요.’‘당신은 내가 당신을 찾으러 올 것을 허락하지 않았겠죠. 그렇지 않았다면 가짜 로봇을 만들어 내게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을 거고, 피를 흘리는 고통을 혼자 감당하며 이런 깊은 산속에서 눈과 마른나무를 친구 삼아 떠나지도 않았겠죠.’그녀의 이승하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었고, 동시에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비록 마지막 순간에 그의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매우 안타깝지만, 그의 사랑 덕분에 서유는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와 함께 죽는다면 그것은 한평생의 약속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이제 먼저 떠난 이승하가 황천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까?서유는 알 수
마치 무언가 예감이라도 한 듯, 이하준이 떨리는 손으로 이승하의 손을 움켜쥐던 순간, 서유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마치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풀어 헤친 채 네발로 기어 이하준에게 달려갔다.그녀는 여전히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다만 그 단호한 시선은 이승하의 얼어붙고 하얗게 질린 손에 닿자마자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깐 채,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이승하를 덮은 눈을 미친 듯이 파헤쳤다.깊은 산속의 눈은 산 아래보다 훨씬 더 두꺼웠다. 끝없이 쌓인 층층의 눈 속에서 서유는 온 힘을 다해 이승하를 파내던 순간, 그의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흐르는 피가 일곱 군데에서 새어 나와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은 더 이상 어떠한 온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하준은 아버지의 침묵하는 모습을 목격하자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두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은 그는 마음속 어딘가가 찢어지듯 끊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마치 거대한 나무가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듯, 그의 세계는 단숨에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하준아.”서유의 고요한 목소리가 귀를 스쳤다.“도와줘.”이하준은 어머니의 충혈된 눈을 바라보며 그녀의 부탁에 정신을 차렸다. 서유의 눈빛에는 슬픔도, 고통도 없었다. 오직 이승하의 죽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단호함만이 담겨 있었다.그녀는 얼어붙은 이승하의 손과 얼굴을 붙들고 자신의 체온으로 그를 녹이려는 듯 필사적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이하준도 어머니를 따라 아버지의 발을 감싸 쥐었다. 그는 얼어붙은 신발을 벗기고 자신의 배 위로 올린 뒤, 손바닥으로 아버지의 다리를 위아래로 문지르기 시작했다.서유는 이승하의 얼굴에 덮인 얼음을 녹이며, 그가 살아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지친 손으로 그의 얼굴을 계속 문지르며 이렇게 말했다.“여보, 당신이 나더러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나 정말 잘 기다렸는데, 왜 약속을 안 지키고 돌아오지 않은 거예요?”“지금이라도 눈을
눈밭을 헤매며 이승하를 찾고 있던 서유는 갑자기 발길을 멈췄다. 마치 영혼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멍하니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눈앞에는 오직 그녀 자신뿐, 영혼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그녀는 그 자리에 굳어 서서 한참을 있다가 손을 들어 가슴에 얹었다. 심장이 세 번 뛰고 난 뒤, 가슴 깊은 곳에서 찢어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마치 무엇인가를 잃어버릴 것만 같은 아픔이었다. 몸을 굽히며 고통을 참고자 했지만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직감적으로 그녀는 이승하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느꼈다. 이를 악물고 계속 그를 찾으려던 그 순간, 눈 위로 아름다운 자태를 가진 한 사람이 붉은 리치 한 송이를 손에 들고 걸어왔다.“여보, 내가 기다리라고 했잖아. 왜 여기까지 와 있는 거야?”눈앞에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이승하를 보자, 긴장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던 서유는 한순간 안도감을 느꼈다. 역시 그가 곁에 있으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 같았다.서유는 들고 있던 우산을 내던지고 마치 숲속의 토끼처럼 기쁨에 차 달려가 이승하의 품에 안겼다.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익숙한 향기에, 서유는 깊게 숨을 내쉬며 안심했다.“당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정말 당신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얼마나 무서웠는데요!”이승하는 긴 손가락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언제나 그랬듯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손길이었다.“내가 말했잖아. 항상 네 곁에 있을 거라고.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거라고. 나한테 쉽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그의 품 안에 꼭 안긴 서유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더욱 꽉 껴안았다. 하지만 갑자기 무언가가 손에 닿자, 서유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리고는 이승하를 밀쳐내며 소리쳤다.“당신... 당신은 내 승하 씨가 아니야!”이승하는 요즘 들어 많이 수척해졌고, 허리를 감쌀 때 손가락이 다른 손가락에 닿을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이승하는 예전처럼 건장한 체격을 유지하고 있었다.“당신
시린 눈보라 속에 홀로 서 있는 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겨우 남은 힘으로 긴 손가락을 들어 흔드는 그를 보며, 이연석은 애써 마음을 다잡고 이를 악물며 재빨리 눈 덮인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형! 내가 먼저 의사를 부르고, 로봇을 산으로 올려보낼게. 그러고 나서 바로 돌아올 테니까 그 자리에서 꼭 기다려. 금방 올게!”밤길은 험난했지만, 사방으로 쏟아지는 눈은 길을 환히 비춰주어 이연석은 마치 대낮처럼 보이는 길 위를 달렸다. 하지만 급한 걸음은 때때로 방향을 잃고, 몇 차례나 눈밭에 무릎을 꿇으며 휘청거렸다.멀어져가는 이연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승하는 느려지는 심장 박동을 가슴으로 느끼며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생명의 문이 서서히 닫혀가는 고통을 묵묵히 받아들였다.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서유가 그의 흔적을 찾으며 이름을 부르자, 이승하는 무성한 나무 사이에서 고개를 돌려 눈 덮인 길 위에서 우산을 쓰고 걷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단 한 번의 시선, 그로 인해 시간이 멈추고 만 년의 세월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처음 그녀를 만났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 같았지만, 이제는 햇빛도 사라지고 눈보라만이 세상을 덮고 있었다.“승하 씨!”서유는 잠시 기다리다 이상함을 느끼고 별장 맞은편에 있는 집의 문을 열어보았다. 예상대로 이승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아 헤맸다.이승하는 대답하고 싶었다. ‘나 여기 있어.’ 그러나 온몸의 피가 쏟아지는 그는 예전처럼 힘찬 목소리로 외칠 수 없었다.그는 겨우 뜨고 있는 흐려진 눈으로 고개를 돌려 한 걸음씩 깊은 산 속으로 걸어갔다.그곳은 숲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고 하얀 눈이 밤하늘을 밝혔어도 사람의 움직임을 알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그가 누울 만한 최적의 장소였다.이승하는 생각했다. 얼음과 눈이 몸을 얼려버리면 야수가 지나가더라도 그의 썩은 살을 물어뜯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설산 아래에 묻히면 그의 외모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