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가혜는 자신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의사에게 다시 한번 검사를 요청했지만 결과는 여전히 충격적이었다. 병상에 앉아 보고서를 몇 번이고 확인하던 정가혜는 결국 자신이 임신했다는 현실을 천천히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날 밤, 피임 조치를 하지 않았고 다음 날 아침에는 서유에게 들키고 말았다. 그리고 곧바로 유나희에게 불려갔다. 이연석과 배하린을 만나고 홧김에 밤새 M국으로 송사월을 찾아온 뒤 72시간이 지나도록 긴급 피임약을 먹지 않았으니, 임신하지 않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 아이가 찾아온 시기는 너무나도 부적절했다. 정가혜가 불안한 표정으로 침울하게 앉아 있는 모습을 보며 병상 앞에 앉아 있던 송사월도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누나, 이연석 씨의 아이죠?”송사월의 직설적인 질문에 정가혜는 난처해했지만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왜 그렇게 기뻐하지 않는 거예요?” 이연석의 청혼을 받아들일 준비를 다 마친 것처럼 보였는데, 왜 이렇게 불안해 보이는 걸까? 정가혜는 손을 들어 자신의 아랫배를 어루만졌다. 아직은 생명의 기운을 느낄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는 무겁게 느껴졌다. “나도 모르겠어...” 정가혜는 송사월을 바라보며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아마도 임신 때문에 너무 예민해진 것 같아.” 정가혜는 눈물을 닦고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사월아, 너는 먼저 돌아가. 나는 여기서 조금 더 생각을 정리한 후에 갈게, 응?” 송사월은 정가혜를 가만히 응시했다. 임신 때문에 예민해진 것인지, 아니면 감정적으로 너무 힘든 것인지, 정가혜는 무언가 많은 것을 혼자 짊어지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랐고 스스로 감당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송사월은 이런 상황을 많이 겪어봤기에 그녀의 고통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그래서 더 이상 말 없이 그녀의 눈물을 손수건으로 닦아주었다. “그래요. 누나 울지 마요.” 송사월의
정가혜는 서둘러 A시로 돌아왔지만 공항에서 이연석이 화려한 외모와 훤칠한 몸매를 가진 여인에게 꽃다발을 건네는 장면을 목격하고 말았다. 그녀의 발걸음은 천천히 멈춰섰다. 사람들이 북적이는 공항의 도착 게이트가 정가혜의 시야에서는 희미해져 갔고 남은 것은 그들 셋뿐이었다. 그녀는 그 여자가 꽃다발을 받은 후 갑자기 발끝을 세우고 이연석의 뺨에 키스를 한 뒤, 입을 가리며 급히 달아나는 모습을 보았다. 이연석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이내 발길을 돌려 빠르게 떠났다. 그들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정가혜의 세상은 온통 어둠에 잠겼다. 결국 배하린이 없더라도 이연석 곁에는 언제든 다른 여자가 있을 것이었다는 걸 그녀는 깨달았다. 그들이 가로막고 있는 것은 단순히 배하린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가 결코 줄 수 없는 ‘안정감’이었고, 정가혜가 주고 싶어도 번번이 깨져버리는 ‘신뢰감’이었다. 정가혜는 자신이 아이에게 주고 싶은 가정이 아빠는 한결같은 사랑을 주고 엄마는 그를 믿어주는 그런 집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그와 자신 둘 다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집에 도착한 정가혜는 멍하니 앉아 있다가 결국 전화기를 들어 이전에 알게 된 산부인과 의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노현정이 우유를 가져오던 중, 정가혜가 낙태 수술을 예약하려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놀라 손이 떨렸다. 트레이에 올려진 우유가 거의 쏟아질 뻔했다. 전화를 끊은 정가혜는 노현정이 그 사실을 들었다는 걸 알고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주머니,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지 말아 주세요...” 노현정은 혼란스러웠다. “가혜야, 아이를 가졌는데 왜 낙태를 하려고 해?” 정가혜는 대답하지 않고 이불을 들어올리며 침대에 누웠다. 몸과 마음의 피로가 그녀를 지치게 만들었다. 노현정은 많은 의문이 있었지만 지친 그녀를 보고는 입을 다물고 방을 나갔다. 그 시각 이연석은 공항에서 정가혜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정가혜가 나오지 않자 급히 노현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술실 안은 금세 냉랭한 기운을 풍기는 이연석과 수술대에 누운 정가혜, 두 사람만 남았다. “왜?” 옆에 서 있던 남자는 불필요한 말은 하지 않고 그저 단 한 마디만 물었다. 정가혜는 수술실 밖에 서 있는 노현정을 잠시 보다가 다시금 분노로 가득 찬 이연석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냥요.” 이연석이 찾아온 이상, 수술을 할 수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정가혜는 조용히 수술대에서 일어나려고 했지만 그의 강한 손에 손목이 붙잡혔다. 그의 힘은 너무나 강해 손가락이 깊숙이 피부에 파고들었고 정가혜는 고통으로 얼굴이 하얗게 질렸지만 이를 악물고 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 그녀가 소리도 없이, 그를 보지도 않는 모습에 이연석은 갑자기 분노가 치밀었다. “이게 나한테 주는 답인가?” 귀국한 후 대답을 주겠다고 약속했으나 그녀의 대답은 그의 아이를 몰래 낙태하려는 것이었다. 노현정에게서 전화를 받은 그 순간, 정가혜와의 결혼을 기대하던 이연석의 마음은 한순간에 차가워졌다. 그는 그토록 노력하며 그녀를 쫓았지만 정가혜의 계속된 거절 앞에서 그의 모든 것이 산처럼 무너져내렸다. “가혜 씨, 이유를 말해줘요. 대답을 듣고 나면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을 거니까.” 그는 지쳤고 충분히 힘들었다. 그러나 죽더라도 그 이유는 분명히 알아야만 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정가혜는 천천히 속눈썹을 들어 절망으로 가득 찬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들 사이에는 분명 끝을 내야 할 무언가가 있었다. 그 끝을 위해서는 말을 분명히 해야 했다. “나는 당신이 배하린 씨과 아무 일도 없었다는 걸 믿을 수가 없어요.” 그녀의 말을 듣고 이연석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이미 충분히 설명했어요. 그건 배하린이 꾸며낸 속임수라고. 그런데도 왜 믿지 않는 거예요? 왜?” “배하린 씨가 나중에 다시 녹음기를 주었어요. 배하린 씨의 설명은 단지 당신 어머니가 거짓말을 강요한 것일 뿐이었어요.” 이연석은 잠시 멍해졌다. 의심이 들었지만 그는
“믿어줘요. 배하린이든, 안희연이든, 고현서든, 아니면 다른 어떤 여자든, 나는 그 사람들과 완전히 끝났어요. 앞으로는 절대 그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이연석은 앞으로 다른 여자가 자신을 쫓아다니더라도 철저히 피할 거라고 다짐했다. 필요하다면 외출할 때 가면을 쓸 정도로 신경 쓸 각오였다. 하지만 그의 진지한 설명과 확신 가득한 말에도 불구하고 정가혜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난 여전히 당신을 믿지 않아요.” 그녀는 이연석과의 신뢰를 쌓아가는 과정에서 항상 그를 둘러싼 여자들 때문에 좌절했다. 지금의 그녀는 그의 약속만 들었을 뿐, 그 약속이 진정한 안전감을 주지는 못했다. 그를 믿기 어려웠고 또다시 믿음을 선택한 후 반복되는 실망의 고통을 겪고 싶지 않았다. 정가혜의 믿지 않는다는 한 마디에 멍하니 서 있던 이연석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차갑게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 아이를 정말로 지울 거예요?” 정가혜는 눈을 내리깔고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침묵은 이연석의 눈에 동의로 비쳤다. “정가혜, 당신 심장 좀 열어보고 싶어. 도대체 그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확인해 보고 싶어.” 오해가 풀렸음에도 그녀는 여전히 냉정했다. 그건 그녀가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닫자 이연석은 숨을 쉴 때조차 고통스러웠다. 그렇게 심장을 죄어오는 고통에 이연석은 천천히 정가혜를 놓아주었다. “당신이 원한다면 아이를 지워. 하지만 난 죽더라도 다시는 당신을 보러 오지 않을 거야.” 그는 말을 마치고 한 걸음 물러섰다. 붉어진 눈으로 정가혜를 한 번 더 깊이 바라본 후 수술실을 떠났다. 그가 사라지자 정가혜는 수술대 옆을 붙잡고 천천히 주저앉았다. 병실 밖에서 이연석이 분노에 찬 채 떠나는 모습을 본 노현정은 급히 문을 열고 들어왔다. “가혜야.” 노현정은 정가혜의 곁에 무릎을 꿇고 손을 그녀의 어깨에 올렸다. “생명은 소중한 거야. 연석 씨와의 갈등 때문에 아이를
정가혜는 깜짝 놀라 그를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보았다.“이건 강요예요.”“맞아요.”이연석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내가 강요하고 있어요. 뭐 어때서요?”그의 뻔뻔한 태도에 정가혜는 말문이 막혔다.그녀는 이 무례한 인간을 지나쳐 가려 했지만 그에게 붙잡혀 다시 끌려왔다.“내가 당신 방을 뒤지는 걸 보고 싶지 않다면 얌전히 내놔요.”정가혜는 이 말을 듣고 눈살을 찌푸렸다.“저는 고아라 그런 거 없어요.”“거짓말하지 마요. 전에 집에서 본 적 있는데.”성인이 되고 나서 이미 필요한 서류들을 만든 정가혜는 이 말을 듣고 더욱 깊게 눈살을 찌푸렸다.“그 서류들을 줘도 내가 동의하지 않으면 혼인신고를 받아주지 않을 거예요.”“그래서...”이연석은 그녀의 어깨를 잡고 몸을 숙여 그녀를 바라보았다.“부탁이에요.”이 다섯 글자가 정가혜의 마음에 닿자 마치 무언가에 맞은 것처럼 조금 아팠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눈앞의 잘생긴 얼굴과 기억 속의 눈매가 천천히 겹쳐졌다.이 순간, 그녀는 자신이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깊이 느낄 수 있었다. 아마도 50%였던 사랑이 어느새 70%로 올라가 있었을 것이다.사랑이 100%에 도달하면 평생 이연석을 잊기 힘들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렇게 정신이 또렷한 상태에서 그를 다시 한 번 선택해야 할까?“됐어요, 부탁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나.”그녀의 대답이 없자 이연석은 갑자기 그녀의 어깨를 놓고 화장대로 걸어가 서랍을 열고 익숙한 듯이 서류들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정가혜는 필요한 서류들을 찾는 이연석의 큰 뒷모습을 바라보며 복잡한 감정이 밀려왔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그를 선택한다면 그의 주변에 끊임없이 나타나는 여자들 그가 마음이 있는 사람이든 아니든 모두 참아내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그가 정말로 여성들과의 교류를 끊지 않는 한, 하지만 이연석은 이승하와는 달랐다. 그는 여성들과 거리를 두는 것, 이른바 경계선을 유지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것 같
정가혜는 마치 무언가를 결심한 듯 몸을 돌려 책상으로 걸어갔다. 서랍을 열어 필요한 서류들을 꺼내 이연석에게 건넸다.“한 번 더 당신을 믿겠어요. 하지만 결과적으로 또 실망하게 된다면 우리가 서명한 계약대로 곧바로 떠날 거예요.”이연석은 고개를 숙여 서류를 보고, 다시 단호한 표정의 정가혜를 바라보았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류를 받아들고는 그녀의 손을 잡고 바로 구청으로 향했다.차가 구청 앞에 멈췄을 때, 이연석은 문을 열지 않고 그대로 앉아 앞을 응시했다.“왜요? 후회돼요?”정가혜는 그가 일시적인 충동으로 그랬다가 이제 와서 후회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또 그를 잘못 믿었다고 생각하던 찰나, 그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 진지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앞으로 당신의 믿음을 얻도록 하겠어요.”그가 여성들과 적절한 거리를 두지 않았기에 그녀가 오해한 것이었다.만약 그가 형처럼 불순한 의도를 가진 여자들을 단호하게 잘라낼 수 있었다면 정가혜는 이렇게 불안해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는 예전에 너무 자유분방하게 살아와서 이런 것들을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지만 오늘부터는 정가혜에게 충분한 안정감을 줄 것이다.그가 안정감을 충분히 준다면 정가혜도 그를 신뢰하게 될 것이라고, 그는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었다.이것은 이연석이 약속한 이래 정가혜에게 가장 안정감을 주는 말이었고 불안하게 요동치던 그녀의 마음도 이 말에 서서히 가라앉았다.이연석은 정가혜를 이끌고 구청으로 갔다. 절차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서류 작성, 혼인 검진, 도장 찍기... 얼마 지나지 않아 혼인 증명서를 받아들었다...그걸 손에 쥐자 이연석의 눈이 점점 붉어졌다.과정이 아무리 힘들었어도 그는 마침내 자신이 원하던 여자와 결혼했다.증명서를 받아든 채 멍하니 있는 이연석을 바라보며 정가혜도 눈을 내렸다.5년 동안 얽히고설켰던 관계, 정신을 차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어리둥절한 채로 시집을 갔다.바로 직전까지 다투고 있었는데 다음 순간 증명서를 받았다니, 터무니없
이연석은 집사에게 주 침실 옆 옷방을 정가혜를 위해 비우라고 지시한 후 거실에 서 있는 정가혜의 어색한 모습을 보았다.그녀가 예전에 자신이 여기서 묵지 못하게 했던 일을 떠올리고 있다고 생각한 이연석은 서둘러 계단을 내려와 그녀 앞으로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이제부터 여기가 가혜 씨 집이니까 원하는 대로 해요.”말을 마친 그는 고개를 숙여 정가혜의 배를 바라보았다.“시간이 늦었어요. 쉬어야 해요.”임산부는 늦게까지 깨어 있으면 아이에게 좋지 않다는 뜻이었다.이연석이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는 걸 깨달은 정가혜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다만, 샤워를 마치고 나면 이연석과 같은 방에서 자야 하는 건지 걱정이 되었다.전에 같이 자본 적이 없는 건 아니지만 여전히 어색했고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다.이런 불안한 마음을 안고 샤워를 마치고 머리를 말린 후 나오니 이연석이 이미 침대에 앉아 있었다.그는 비단 잠옷 차림으로 상체를 침대 머리에 기대고 무릎 위에 노트북을 올려놓은 채 긴 손가락으로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그녀가 나오는 걸 보자 이연석은 타자를 치던 손을 멈추고 옆자리를 가볍게 두드렸다.“이리 와요.”정가혜는 말없이 다가가 이불을 들추고 침대 가장자리에 누웠다.아마도 이렇게 갑작스럽게 결혼한 게 어이없고 어색해서였을 것이다...그녀는 누운 후 창가 쪽을 향해 빠르게 옆으로 누워 그를 쳐다볼 용기조차 내지 못했다.이불 속에 웅크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연석은 저도 모르게 입 꼬리를 올렸다.그는 잠시 정가혜를 바라보다가 노트북을 치우고 불을 끄고 누웠다...정가혜는 각자 따로 잘 거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허리에 무게가 느껴지더니 큰 손이 얹혀졌다.이어서 등이 남자의 단단한 가슴에 닿았고 얇은 잠옷 사이로 전해지는 따뜻한 감촉에 정가혜의 피부가 화끈거렸다.더 큰일은 이연석의 턱이 그녀의 뒤통수에 닿았고 익숙한 향기가 귓가에서 천천히 밀려왔다는 것이다.그의 심장이 쿵쾅거렸고 정가혜도 마찬가지였다. 이불을 잡은 손도 어
이연석은 깊이 잠든 정가혜를 한참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뒤에서 그녀를 안았다.그는 자신이 얼마나 의지가 약한지 알고 있었다. 한 말은 지키지도 못했고, 금세 후회하곤 했다.하지만 그녀를 안는 순간 분노와 불안, 초조함으로 가득 찼던 그의 마음이 갑자기 안정되는 기분이 들었다.그는 자신이 정가혜를 더 사랑한다는 것을, 그래서 필연적으로 정가혜보다 더 많은 상처를 받게 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는 남자였다. 약간의 상처쯤은 괜찮았다. 평생 이렇게 그녀를 안고 살 수만 있다면 그걸로 충분했다...이연석은 정가혜를 꼭 안은 채 깊고 편안한 잠에 빠졌다. 꿈속에서도 세 식구가 행복하게 사는 모습이 펼쳐졌다.정가혜는 느껴지는 압박감에 눈을 떴다. 이연석은 팔다리로 마치 큰 뱀처럼 그녀를 감고 있었는데 잠자는 자세가 좋지 않았다.그녀는 눈을 뜨고 몇 번 몸부림쳤지만 그가 풀어주지 않자, 참을성 있게 팔꿈치로 뒤에 있는 남자를 살짝 찔렀다.“시끄러워, 졸려...”쉰 목소리에 약간의 어린아이 같은 투로 말하는 소리에 정가혜는 천천히 팔을 내렸다. 그녀는 힘들게 몸을 돌려 눈을 감고 있는 이연석을 바라보았다.통유리창 밖의 햇살이 흰 커튼을 통해 희미하게 들어와 그의 잘생긴 얼굴에 비치니 더욱 멋져 보였다.정가혜는 이런 이연석을 한참 바라보다가 손을 들어 그의 얼굴을 톡톡 쳤다.“이연석 씨, 이러다 배 속의 아이까지 눌러 없어질 거예요.”뺨을 맞고 깬 이연석은 그녀의 손을 붙잡아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그는 턱을 그녀의 정수리에 얹고 목이 쉰 목소리로 말했다.“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요. 우리 아이는 반드시 건강하게 태어날 거니까.”이 말은 마치 따뜻한 온천수처럼 정가혜의 마음속으로 살며시 흘러들어 그녀를 따뜻하게 만들었다...이연석도 늦잠을 자는 타입은 아니었다. 정가혜를 잠시 안고 있다가 점차 정신을 차렸다.그는 고개를 숙여 품 안의 정가혜를 바라보았다. 전에도 그녀와 함께 눈을 뜬 적이 많았지만 지금처럼 기쁜 적은 없었다.“여보.”애정
서유의 사망 소식을 들은 육성재는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결국 그는 그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 서둘러 달려갔고, 모든 이들이 묘지를 떠난 후에도 그녀의 묘비 앞에 남아 머물렀다.“서유 씨...”그는 묘비를 붙잡고 천천히 몸을 낮추어 무릎을 꿇고, 더 이상 젊지 않은 눈으로 그녀의 영정 속 얼굴을 오랫동안 응시했다.“내가 올 줄 몰랐죠?”육성재는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시작했다.“내가 한 사람을 이렇게 오래도록 사랑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어요.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나도 참 정이 깊은 놈이었네요.”영정 사진을 보며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너무 깊이 사랑해서 세상 어떤 여자도 내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됐어요. 그러니 서유 씨, 나도 이승하 못지않게 당신을 사랑했던 거예요, 안 그래요?”그러나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건 묘지의 나뭇가지 사이를 스치는 새들의 울음소리뿐이었다. 새와 짐승들이 떠나고 나니 주변은 그저 고요할 뿐이었다. 마치 지난 수년간 그의 마음속에 묻어둔 사랑처럼, 결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어둠 속에 갇힌 채였다.그토록 짙은 사랑은 세상에 드러낼 수 없었다. 그녀가 떠난 지금에서야 그는 그녀의 묘 앞에 와서 고백했다.그 역시, 깊이 사랑했노라고.모든 사람에게는 후회가 있다. 육성재의 유감은 그녀가 죽기 전까지 자신을 이렇게 바보처럼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었다.하지만 알게 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서유는 이미 떠났는데, 육성재 난 왜 여전히 집착하고 있는 거냐? ’육성재는 그녀의 묘비 앞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그러다 결국 답을 찾지 못한 채 천천히 일어나 발걸음을 돌렸다.그의 삶은 사랑이 아니라 일에 무게를 둔 인생이었다. 그는 생을 바쳐 육씨 집안을 세계 최고의 가문으로 일궈냈다.그는 상업계의 전설 같은 인물로 남았고, 수십 년이 지나도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았던 육성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야기하곤 했다.수도에 있는 송사월은 그녀의 죽음 소식을 제일 마지막으
생이 마감하는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간 것은 그 5년 동안 이승하가 숨겼던 사랑이었다.몇 번이나 뒤척이며 잠에서 깼을 때, 자신의 몸이 단단하고 강인한 두 팔에 꽉 안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게 강하게 끌어안는 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또한 주말에 식사할 때, 식탁 건너편에 앉은 이승하가 가끔 그녀를 몰래 훔쳐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오랜 짝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그리고 그가 모든 일을 마친 후 그녀를 안아 자신의 가슴에 엎드리게 하고,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아이를 달래듯 잠들게 했던 모습 또한 마찬가지였다.이승하의 사랑은 작은 순간순간에 담겨 있었다. 그것이 어떤 모습인지 타인에겐 잘 보이지 않았으나, 이승하 본인만은 아주 알고 있었다. 당시 그녀에 대한 사랑을 얼마나 힘들게 숨겨왔는지...서유의 눈은 이미 뜰 수 없었고, 몸은 영혼이 빠져나간 듯 더 이상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다시 한 번 볼 힘조차 없었다.그녀는 주머니 속 휴대폰을 더듬어 무작정 전화를 걸었고, 다행히 그것을 받은 사람은 정가혜였다.세월이 흐르면서 정가혜도 나이가 들었다. 젊었을 때의 맑은 목소리는 사라지고 약간 쉰 소리가 섞여 있었다.“서유야, 조금만 기다려. 우리 며느리가 출산하면 바로 널 보러 갈게...”삶의 마지막 순간에 친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왜인지 이미 메마르고 고갈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고, 이내 오열로 변해 멈출 수 없었다.“가혜야, 난 승하 씨가 너무 보고 싶어. 그 이를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 부탁할게. 하준이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줘. 엄마가 하준이 결혼식을 볼 수 없게 됐다고...”전화기 너머의 정가혜는 이 말을 듣고 함께 눈물을 쏟아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서유가 그동안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어머니로서 아들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그녀는 이미 이승하를 따라갔을 것이다.얼마 전부터 서유의 몸이
서유의 손가락이 이하준의 머리 뒤로 부드럽게 닿았다. 마치 이미 모든 사실을 받아들인 듯 그녀의 표정은 놀랍도록 평온했다. “언제쯤 결혼할 거니?”이하준의 몸이 경직되었다. 안개처럼 흐릿한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서유를 천천히 놓아주며 말했다. “어머니... 아직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지 못했어요.”아들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서유는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봐봐. 네 엄마는 지금 살아있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단다. 제발 네 아빠를 만나러 가게 해줘. “어릴 적엔 부모님이 그를 속박했지만, 커서는 그가 부모님을 속박했다. 오직 그 속박만이 그를 고아로 만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 번만 더 이기적일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그는 서유의 팔을 붙잡으며 간절히 말했다. “어머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날 거예요. 그러면 결혼하겠습니다, 네?”결국 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서유는 평소와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교회에 가서 너를 위해 기도하고, 네가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길 빌어주마...”서유의 소원을 결코 들어주지 말아달라고 하늘의 신들에게 기도하며, 이하준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평생 어머니의 사랑을 얻기 위해 결코 결혼하지 않기로 했다.그는 이승하가 남겨둔 로봇을 다시 가져와 서유에게 아버지가 남긴 유언이 모두 로봇 프로그램에 담겨 있다고 말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유언의 일부를 들려줄 것이며, 만약 그녀가 아버지가 말하고 싶었던 모든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살아야 한다고 전했다.처음에 서유는 이승하와 똑같이 생긴 로봇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봇이 말을 시작하는 순간, 그녀는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는 서재에 앉아 하루하루 이승하가 녹음했던 로맨틱한 말을 돌려서 들었다.마치 예전에 그가 그녀를 찾지 못했을 때 다른 이의 번호로 하루에 십여 통의 문자를 보내 그녀의 부재를 애도했던 것처럼.이제는 그가 먼저 떠났지만
아들을 위해, 결국 서유는 이승하를 따라 죽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하룻밤 사이 머리가 백발이 되어, 마치 열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모습이 되었다. 예전에는 세월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던 얼굴이 순식간에 주름투성이가 되었고,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그녀의 눈동자도 생기를 잃고 텅 빈 채로 아무 빛깔도 담고 있지 않았다.엄마가 되었으니 이제는 예전처럼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녀는 이승하의 무덤 앞에서 약속했다. 자신을 기다려 달라고.아들이 결혼하면 그때 찾아가겠다고. 만약 자신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다음 생의 약속도 취소할 거라고. 그리고 영원히,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이승하의 장례식에 서유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기운을 내어 비틀거리며 그의 무덤 앞에 섰을 때, 무덤가에서 그녀가 중얼거리던 말들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오직 그녀를 부축하며 아버지의 무덤을 찾은 이하준만이 그 말을 기억했다.눈 덮인 땅에 쓰러져 의식을 잃었던 그날 밤, 서유는 병원으로 옮겨져 일주일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그녀가 없는 동안 이승하의 시신은 얼음관에 안치된 채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일주일을 버텼다. 그녀가 깨어난 후, 그녀는 하얗게 센 머리와 멍한 눈빛으로 그를 단 한 번 보고는 곧바로 돌아섰다.그들이 이승하를 어떻게 묻었는지, 묘지는 어떻게 정했는지, 영정 사진으로 어떤 사진을 선택했는지 서유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차가운 베개를 매만지며 그가 아직 살아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데만 몰두했다.‘만약 당신이 여기 있었다면, 내 하얀 머리를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겠죠.’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당신은 그랬을 거예요.”이승하는 질투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서유가 그 때문에 긴장하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그는 한참 동안 기뻐하며, 그녀 마음에 자신이 있다는 확신을 얻곤 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녀가 그로 인해 속을 끓이고 밤낮으로 잠 못 이루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이
서유는 떨리는 속눈썹을 들어, 삶의 의미를 잃은 듯한 눈으로 멀리 바라보며 말했다.“아니, 난 어디에도 가지 않을 거야. 나와 그 사람, 그냥 여기 있을 거야. 내가 얼어 죽을 때까지, 누구도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어.”그녀가 여기서 얼어 죽겠다는 말을 들은 순간, 주변 사람들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먹먹해졌다. 모두가 그녀를 말리며 무모한 짓을 하지 말라고 설득했지만, 서유는 그 어떤 말도 듣지 않았다. 단호하고도 완강하게, 이승하를 품에 안고 눈 덮인 땅 위에 앉아 그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때 이하준이 서유의 손을 붙잡고, 그녀의 손바닥을 힘껏 눌러 그녀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렸다.“어머니,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알아요. 그래서 지금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드신 것도 이해해요. 하지만 전 이미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어머니까지 잃을 순 없어요. 제발 부탁이에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 주세요...”아들이 귀 옆에서 애절하게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서유는 천천히 시선을 그에게 돌렸다. 아버지와 똑같은 모습으로 빚어진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그녀의 입술 끝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꽃이 피어난 듯한 미소였다.“난 이미 네 아버지가 떠날 준비를 오래전에 마쳤단다. 이제 그이가 정말 떠났으니, 당연히 나도 함께 가야지. 너도 알잖니. 그이가 살면 나도 살고, 그이가 죽으면 나도 죽는 거야. 아무도 이걸 막을 순 없어.”예전에 이하준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는 어머니의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만큼이나 깊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성인식을 맞이한 바로 오늘, 부모님 두 분을 동시에 잃을 수 없었다.눈 덮인 땅 위에서 무릎을 꿇은 채, 그는 천천히 어머니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 서유를 힘껏 끌어안았다.“어머니, 아버지는 제가 결혼하는 것과 자식을 낳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씀하셨어요. 지금 아버지는 그걸 보지 못하고 떠나셨지만, 어머니가 대신 그 순간을 기다려 주시면 안 되나
눈물이 눈가에서 갑작스럽게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가슴을 찢는 통곡이 아니었다. 아무 소리 없이 흘러내릴 뿐, 그녀는 벌어진 입술로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이생에서 이승하에게 해야 할 말은 이미 다 끝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눈을 내리깐 채,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창백한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바보, 당신이 아무리 피를 흘린다 해도 당신은 내 남편이에요. 내가 무섭겠어요? 하나도 안 무서우니까, 왜 굳이 혼자 이런 곳에 온 거예요?”마지막 이별의 말조차 건네지 못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러나 그녀의 이승하는 이런 안타까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모든 걸 숨겼다.만약... 그녀가 그 가짜 이승하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평생 그의 몸조차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눈과 함께 얼어붙어 영원히 설산 아래에 묻혔을 것이다.이승하는 이미 스스로 세상에서 사라질 각오를 했던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따라오지 않게 하려고, 그녀를 속이기 위해 가짜 로봇을 만든 것이다.‘하지만 승하 씨...’‘당신이 아무리 똑같이 생긴 로봇을 만든다 해도, 그건 당신이 아니에요. 당신이 평생 날 속일 수 있다면 난 받아들였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지금 그 거짓말은 단 한 순간도 버티지 못했잖아요.’‘당신은 내가 당신을 찾으러 올 것을 허락하지 않았겠죠. 그렇지 않았다면 가짜 로봇을 만들어 내게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을 거고, 피를 흘리는 고통을 혼자 감당하며 이런 깊은 산속에서 눈과 마른나무를 친구 삼아 떠나지도 않았겠죠.’그녀의 이승하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었고, 동시에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비록 마지막 순간에 그의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매우 안타깝지만, 그의 사랑 덕분에 서유는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와 함께 죽는다면 그것은 한평생의 약속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이제 먼저 떠난 이승하가 황천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까?서유는 알 수
마치 무언가 예감이라도 한 듯, 이하준이 떨리는 손으로 이승하의 손을 움켜쥐던 순간, 서유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마치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풀어 헤친 채 네발로 기어 이하준에게 달려갔다.그녀는 여전히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다만 그 단호한 시선은 이승하의 얼어붙고 하얗게 질린 손에 닿자마자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깐 채,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이승하를 덮은 눈을 미친 듯이 파헤쳤다.깊은 산속의 눈은 산 아래보다 훨씬 더 두꺼웠다. 끝없이 쌓인 층층의 눈 속에서 서유는 온 힘을 다해 이승하를 파내던 순간, 그의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흐르는 피가 일곱 군데에서 새어 나와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은 더 이상 어떠한 온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하준은 아버지의 침묵하는 모습을 목격하자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두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은 그는 마음속 어딘가가 찢어지듯 끊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마치 거대한 나무가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듯, 그의 세계는 단숨에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하준아.”서유의 고요한 목소리가 귀를 스쳤다.“도와줘.”이하준은 어머니의 충혈된 눈을 바라보며 그녀의 부탁에 정신을 차렸다. 서유의 눈빛에는 슬픔도, 고통도 없었다. 오직 이승하의 죽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단호함만이 담겨 있었다.그녀는 얼어붙은 이승하의 손과 얼굴을 붙들고 자신의 체온으로 그를 녹이려는 듯 필사적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이하준도 어머니를 따라 아버지의 발을 감싸 쥐었다. 그는 얼어붙은 신발을 벗기고 자신의 배 위로 올린 뒤, 손바닥으로 아버지의 다리를 위아래로 문지르기 시작했다.서유는 이승하의 얼굴에 덮인 얼음을 녹이며, 그가 살아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지친 손으로 그의 얼굴을 계속 문지르며 이렇게 말했다.“여보, 당신이 나더러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나 정말 잘 기다렸는데, 왜 약속을 안 지키고 돌아오지 않은 거예요?”“지금이라도 눈을
눈밭을 헤매며 이승하를 찾고 있던 서유는 갑자기 발길을 멈췄다. 마치 영혼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멍하니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눈앞에는 오직 그녀 자신뿐, 영혼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그녀는 그 자리에 굳어 서서 한참을 있다가 손을 들어 가슴에 얹었다. 심장이 세 번 뛰고 난 뒤, 가슴 깊은 곳에서 찢어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마치 무엇인가를 잃어버릴 것만 같은 아픔이었다. 몸을 굽히며 고통을 참고자 했지만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직감적으로 그녀는 이승하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느꼈다. 이를 악물고 계속 그를 찾으려던 그 순간, 눈 위로 아름다운 자태를 가진 한 사람이 붉은 리치 한 송이를 손에 들고 걸어왔다.“여보, 내가 기다리라고 했잖아. 왜 여기까지 와 있는 거야?”눈앞에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이승하를 보자, 긴장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던 서유는 한순간 안도감을 느꼈다. 역시 그가 곁에 있으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 같았다.서유는 들고 있던 우산을 내던지고 마치 숲속의 토끼처럼 기쁨에 차 달려가 이승하의 품에 안겼다.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익숙한 향기에, 서유는 깊게 숨을 내쉬며 안심했다.“당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정말 당신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얼마나 무서웠는데요!”이승하는 긴 손가락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언제나 그랬듯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손길이었다.“내가 말했잖아. 항상 네 곁에 있을 거라고.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거라고. 나한테 쉽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그의 품 안에 꼭 안긴 서유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더욱 꽉 껴안았다. 하지만 갑자기 무언가가 손에 닿자, 서유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리고는 이승하를 밀쳐내며 소리쳤다.“당신... 당신은 내 승하 씨가 아니야!”이승하는 요즘 들어 많이 수척해졌고, 허리를 감쌀 때 손가락이 다른 손가락에 닿을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이승하는 예전처럼 건장한 체격을 유지하고 있었다.“당신
시린 눈보라 속에 홀로 서 있는 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겨우 남은 힘으로 긴 손가락을 들어 흔드는 그를 보며, 이연석은 애써 마음을 다잡고 이를 악물며 재빨리 눈 덮인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형! 내가 먼저 의사를 부르고, 로봇을 산으로 올려보낼게. 그러고 나서 바로 돌아올 테니까 그 자리에서 꼭 기다려. 금방 올게!”밤길은 험난했지만, 사방으로 쏟아지는 눈은 길을 환히 비춰주어 이연석은 마치 대낮처럼 보이는 길 위를 달렸다. 하지만 급한 걸음은 때때로 방향을 잃고, 몇 차례나 눈밭에 무릎을 꿇으며 휘청거렸다.멀어져가는 이연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승하는 느려지는 심장 박동을 가슴으로 느끼며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생명의 문이 서서히 닫혀가는 고통을 묵묵히 받아들였다.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서유가 그의 흔적을 찾으며 이름을 부르자, 이승하는 무성한 나무 사이에서 고개를 돌려 눈 덮인 길 위에서 우산을 쓰고 걷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단 한 번의 시선, 그로 인해 시간이 멈추고 만 년의 세월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처음 그녀를 만났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 같았지만, 이제는 햇빛도 사라지고 눈보라만이 세상을 덮고 있었다.“승하 씨!”서유는 잠시 기다리다 이상함을 느끼고 별장 맞은편에 있는 집의 문을 열어보았다. 예상대로 이승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아 헤맸다.이승하는 대답하고 싶었다. ‘나 여기 있어.’ 그러나 온몸의 피가 쏟아지는 그는 예전처럼 힘찬 목소리로 외칠 수 없었다.그는 겨우 뜨고 있는 흐려진 눈으로 고개를 돌려 한 걸음씩 깊은 산 속으로 걸어갔다.그곳은 숲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고 하얀 눈이 밤하늘을 밝혔어도 사람의 움직임을 알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그가 누울 만한 최적의 장소였다.이승하는 생각했다. 얼음과 눈이 몸을 얼려버리면 야수가 지나가더라도 그의 썩은 살을 물어뜯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설산 아래에 묻히면 그의 외모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