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가혜는 서둘러 A시로 돌아왔지만 공항에서 이연석이 화려한 외모와 훤칠한 몸매를 가진 여인에게 꽃다발을 건네는 장면을 목격하고 말았다. 그녀의 발걸음은 천천히 멈춰섰다. 사람들이 북적이는 공항의 도착 게이트가 정가혜의 시야에서는 희미해져 갔고 남은 것은 그들 셋뿐이었다. 그녀는 그 여자가 꽃다발을 받은 후 갑자기 발끝을 세우고 이연석의 뺨에 키스를 한 뒤, 입을 가리며 급히 달아나는 모습을 보았다. 이연석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이내 발길을 돌려 빠르게 떠났다. 그들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정가혜의 세상은 온통 어둠에 잠겼다. 결국 배하린이 없더라도 이연석 곁에는 언제든 다른 여자가 있을 것이었다는 걸 그녀는 깨달았다. 그들이 가로막고 있는 것은 단순히 배하린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가 결코 줄 수 없는 ‘안정감’이었고, 정가혜가 주고 싶어도 번번이 깨져버리는 ‘신뢰감’이었다. 정가혜는 자신이 아이에게 주고 싶은 가정이 아빠는 한결같은 사랑을 주고 엄마는 그를 믿어주는 그런 집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그와 자신 둘 다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집에 도착한 정가혜는 멍하니 앉아 있다가 결국 전화기를 들어 이전에 알게 된 산부인과 의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노현정이 우유를 가져오던 중, 정가혜가 낙태 수술을 예약하려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놀라 손이 떨렸다. 트레이에 올려진 우유가 거의 쏟아질 뻔했다. 전화를 끊은 정가혜는 노현정이 그 사실을 들었다는 걸 알고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주머니,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지 말아 주세요...” 노현정은 혼란스러웠다. “가혜야, 아이를 가졌는데 왜 낙태를 하려고 해?” 정가혜는 대답하지 않고 이불을 들어올리며 침대에 누웠다. 몸과 마음의 피로가 그녀를 지치게 만들었다. 노현정은 많은 의문이 있었지만 지친 그녀를 보고는 입을 다물고 방을 나갔다. 그 시각 이연석은 공항에서 정가혜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정가혜가 나오지 않자 급히 노현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술실 안은 금세 냉랭한 기운을 풍기는 이연석과 수술대에 누운 정가혜, 두 사람만 남았다. “왜?” 옆에 서 있던 남자는 불필요한 말은 하지 않고 그저 단 한 마디만 물었다. 정가혜는 수술실 밖에 서 있는 노현정을 잠시 보다가 다시금 분노로 가득 찬 이연석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냥요.” 이연석이 찾아온 이상, 수술을 할 수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정가혜는 조용히 수술대에서 일어나려고 했지만 그의 강한 손에 손목이 붙잡혔다. 그의 힘은 너무나 강해 손가락이 깊숙이 피부에 파고들었고 정가혜는 고통으로 얼굴이 하얗게 질렸지만 이를 악물고 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 그녀가 소리도 없이, 그를 보지도 않는 모습에 이연석은 갑자기 분노가 치밀었다. “이게 나한테 주는 답인가?” 귀국한 후 대답을 주겠다고 약속했으나 그녀의 대답은 그의 아이를 몰래 낙태하려는 것이었다. 노현정에게서 전화를 받은 그 순간, 정가혜와의 결혼을 기대하던 이연석의 마음은 한순간에 차가워졌다. 그는 그토록 노력하며 그녀를 쫓았지만 정가혜의 계속된 거절 앞에서 그의 모든 것이 산처럼 무너져내렸다. “가혜 씨, 이유를 말해줘요. 대답을 듣고 나면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을 거니까.” 그는 지쳤고 충분히 힘들었다. 그러나 죽더라도 그 이유는 분명히 알아야만 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정가혜는 천천히 속눈썹을 들어 절망으로 가득 찬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들 사이에는 분명 끝을 내야 할 무언가가 있었다. 그 끝을 위해서는 말을 분명히 해야 했다. “나는 당신이 배하린 씨과 아무 일도 없었다는 걸 믿을 수가 없어요.” 그녀의 말을 듣고 이연석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이미 충분히 설명했어요. 그건 배하린이 꾸며낸 속임수라고. 그런데도 왜 믿지 않는 거예요? 왜?” “배하린 씨가 나중에 다시 녹음기를 주었어요. 배하린 씨의 설명은 단지 당신 어머니가 거짓말을 강요한 것일 뿐이었어요.” 이연석은 잠시 멍해졌다. 의심이 들었지만 그는
“믿어줘요. 배하린이든, 안희연이든, 고현서든, 아니면 다른 어떤 여자든, 나는 그 사람들과 완전히 끝났어요. 앞으로는 절대 그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이연석은 앞으로 다른 여자가 자신을 쫓아다니더라도 철저히 피할 거라고 다짐했다. 필요하다면 외출할 때 가면을 쓸 정도로 신경 쓸 각오였다. 하지만 그의 진지한 설명과 확신 가득한 말에도 불구하고 정가혜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난 여전히 당신을 믿지 않아요.” 그녀는 이연석과의 신뢰를 쌓아가는 과정에서 항상 그를 둘러싼 여자들 때문에 좌절했다. 지금의 그녀는 그의 약속만 들었을 뿐, 그 약속이 진정한 안전감을 주지는 못했다. 그를 믿기 어려웠고 또다시 믿음을 선택한 후 반복되는 실망의 고통을 겪고 싶지 않았다. 정가혜의 믿지 않는다는 한 마디에 멍하니 서 있던 이연석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차갑게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 아이를 정말로 지울 거예요?” 정가혜는 눈을 내리깔고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침묵은 이연석의 눈에 동의로 비쳤다. “정가혜, 당신 심장 좀 열어보고 싶어. 도대체 그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확인해 보고 싶어.” 오해가 풀렸음에도 그녀는 여전히 냉정했다. 그건 그녀가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닫자 이연석은 숨을 쉴 때조차 고통스러웠다. 그렇게 심장을 죄어오는 고통에 이연석은 천천히 정가혜를 놓아주었다. “당신이 원한다면 아이를 지워. 하지만 난 죽더라도 다시는 당신을 보러 오지 않을 거야.” 그는 말을 마치고 한 걸음 물러섰다. 붉어진 눈으로 정가혜를 한 번 더 깊이 바라본 후 수술실을 떠났다. 그가 사라지자 정가혜는 수술대 옆을 붙잡고 천천히 주저앉았다. 병실 밖에서 이연석이 분노에 찬 채 떠나는 모습을 본 노현정은 급히 문을 열고 들어왔다. “가혜야.” 노현정은 정가혜의 곁에 무릎을 꿇고 손을 그녀의 어깨에 올렸다. “생명은 소중한 거야. 연석 씨와의 갈등 때문에 아이를
정가혜는 깜짝 놀라 그를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보았다.“이건 강요예요.”“맞아요.”이연석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내가 강요하고 있어요. 뭐 어때서요?”그의 뻔뻔한 태도에 정가혜는 말문이 막혔다.그녀는 이 무례한 인간을 지나쳐 가려 했지만 그에게 붙잡혀 다시 끌려왔다.“내가 당신 방을 뒤지는 걸 보고 싶지 않다면 얌전히 내놔요.”정가혜는 이 말을 듣고 눈살을 찌푸렸다.“저는 고아라 그런 거 없어요.”“거짓말하지 마요. 전에 집에서 본 적 있는데.”성인이 되고 나서 이미 필요한 서류들을 만든 정가혜는 이 말을 듣고 더욱 깊게 눈살을 찌푸렸다.“그 서류들을 줘도 내가 동의하지 않으면 혼인신고를 받아주지 않을 거예요.”“그래서...”이연석은 그녀의 어깨를 잡고 몸을 숙여 그녀를 바라보았다.“부탁이에요.”이 다섯 글자가 정가혜의 마음에 닿자 마치 무언가에 맞은 것처럼 조금 아팠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눈앞의 잘생긴 얼굴과 기억 속의 눈매가 천천히 겹쳐졌다.이 순간, 그녀는 자신이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깊이 느낄 수 있었다. 아마도 50%였던 사랑이 어느새 70%로 올라가 있었을 것이다.사랑이 100%에 도달하면 평생 이연석을 잊기 힘들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렇게 정신이 또렷한 상태에서 그를 다시 한 번 선택해야 할까?“됐어요, 부탁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나.”그녀의 대답이 없자 이연석은 갑자기 그녀의 어깨를 놓고 화장대로 걸어가 서랍을 열고 익숙한 듯이 서류들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정가혜는 필요한 서류들을 찾는 이연석의 큰 뒷모습을 바라보며 복잡한 감정이 밀려왔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그를 선택한다면 그의 주변에 끊임없이 나타나는 여자들 그가 마음이 있는 사람이든 아니든 모두 참아내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그가 정말로 여성들과의 교류를 끊지 않는 한, 하지만 이연석은 이승하와는 달랐다. 그는 여성들과 거리를 두는 것, 이른바 경계선을 유지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것 같
정가혜는 마치 무언가를 결심한 듯 몸을 돌려 책상으로 걸어갔다. 서랍을 열어 필요한 서류들을 꺼내 이연석에게 건넸다.“한 번 더 당신을 믿겠어요. 하지만 결과적으로 또 실망하게 된다면 우리가 서명한 계약대로 곧바로 떠날 거예요.”이연석은 고개를 숙여 서류를 보고, 다시 단호한 표정의 정가혜를 바라보았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류를 받아들고는 그녀의 손을 잡고 바로 구청으로 향했다.차가 구청 앞에 멈췄을 때, 이연석은 문을 열지 않고 그대로 앉아 앞을 응시했다.“왜요? 후회돼요?”정가혜는 그가 일시적인 충동으로 그랬다가 이제 와서 후회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또 그를 잘못 믿었다고 생각하던 찰나, 그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 진지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앞으로 당신의 믿음을 얻도록 하겠어요.”그가 여성들과 적절한 거리를 두지 않았기에 그녀가 오해한 것이었다.만약 그가 형처럼 불순한 의도를 가진 여자들을 단호하게 잘라낼 수 있었다면 정가혜는 이렇게 불안해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는 예전에 너무 자유분방하게 살아와서 이런 것들을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지만 오늘부터는 정가혜에게 충분한 안정감을 줄 것이다.그가 안정감을 충분히 준다면 정가혜도 그를 신뢰하게 될 것이라고, 그는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었다.이것은 이연석이 약속한 이래 정가혜에게 가장 안정감을 주는 말이었고 불안하게 요동치던 그녀의 마음도 이 말에 서서히 가라앉았다.이연석은 정가혜를 이끌고 구청으로 갔다. 절차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서류 작성, 혼인 검진, 도장 찍기... 얼마 지나지 않아 혼인 증명서를 받아들었다...그걸 손에 쥐자 이연석의 눈이 점점 붉어졌다.과정이 아무리 힘들었어도 그는 마침내 자신이 원하던 여자와 결혼했다.증명서를 받아든 채 멍하니 있는 이연석을 바라보며 정가혜도 눈을 내렸다.5년 동안 얽히고설켰던 관계, 정신을 차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어리둥절한 채로 시집을 갔다.바로 직전까지 다투고 있었는데 다음 순간 증명서를 받았다니, 터무니없
이연석은 집사에게 주 침실 옆 옷방을 정가혜를 위해 비우라고 지시한 후 거실에 서 있는 정가혜의 어색한 모습을 보았다.그녀가 예전에 자신이 여기서 묵지 못하게 했던 일을 떠올리고 있다고 생각한 이연석은 서둘러 계단을 내려와 그녀 앞으로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이제부터 여기가 가혜 씨 집이니까 원하는 대로 해요.”말을 마친 그는 고개를 숙여 정가혜의 배를 바라보았다.“시간이 늦었어요. 쉬어야 해요.”임산부는 늦게까지 깨어 있으면 아이에게 좋지 않다는 뜻이었다.이연석이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는 걸 깨달은 정가혜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다만, 샤워를 마치고 나면 이연석과 같은 방에서 자야 하는 건지 걱정이 되었다.전에 같이 자본 적이 없는 건 아니지만 여전히 어색했고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다.이런 불안한 마음을 안고 샤워를 마치고 머리를 말린 후 나오니 이연석이 이미 침대에 앉아 있었다.그는 비단 잠옷 차림으로 상체를 침대 머리에 기대고 무릎 위에 노트북을 올려놓은 채 긴 손가락으로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그녀가 나오는 걸 보자 이연석은 타자를 치던 손을 멈추고 옆자리를 가볍게 두드렸다.“이리 와요.”정가혜는 말없이 다가가 이불을 들추고 침대 가장자리에 누웠다.아마도 이렇게 갑작스럽게 결혼한 게 어이없고 어색해서였을 것이다...그녀는 누운 후 창가 쪽을 향해 빠르게 옆으로 누워 그를 쳐다볼 용기조차 내지 못했다.이불 속에 웅크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연석은 저도 모르게 입 꼬리를 올렸다.그는 잠시 정가혜를 바라보다가 노트북을 치우고 불을 끄고 누웠다...정가혜는 각자 따로 잘 거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허리에 무게가 느껴지더니 큰 손이 얹혀졌다.이어서 등이 남자의 단단한 가슴에 닿았고 얇은 잠옷 사이로 전해지는 따뜻한 감촉에 정가혜의 피부가 화끈거렸다.더 큰일은 이연석의 턱이 그녀의 뒤통수에 닿았고 익숙한 향기가 귓가에서 천천히 밀려왔다는 것이다.그의 심장이 쿵쾅거렸고 정가혜도 마찬가지였다. 이불을 잡은 손도 어
이연석은 깊이 잠든 정가혜를 한참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뒤에서 그녀를 안았다.그는 자신이 얼마나 의지가 약한지 알고 있었다. 한 말은 지키지도 못했고, 금세 후회하곤 했다.하지만 그녀를 안는 순간 분노와 불안, 초조함으로 가득 찼던 그의 마음이 갑자기 안정되는 기분이 들었다.그는 자신이 정가혜를 더 사랑한다는 것을, 그래서 필연적으로 정가혜보다 더 많은 상처를 받게 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는 남자였다. 약간의 상처쯤은 괜찮았다. 평생 이렇게 그녀를 안고 살 수만 있다면 그걸로 충분했다...이연석은 정가혜를 꼭 안은 채 깊고 편안한 잠에 빠졌다. 꿈속에서도 세 식구가 행복하게 사는 모습이 펼쳐졌다.정가혜는 느껴지는 압박감에 눈을 떴다. 이연석은 팔다리로 마치 큰 뱀처럼 그녀를 감고 있었는데 잠자는 자세가 좋지 않았다.그녀는 눈을 뜨고 몇 번 몸부림쳤지만 그가 풀어주지 않자, 참을성 있게 팔꿈치로 뒤에 있는 남자를 살짝 찔렀다.“시끄러워, 졸려...”쉰 목소리에 약간의 어린아이 같은 투로 말하는 소리에 정가혜는 천천히 팔을 내렸다. 그녀는 힘들게 몸을 돌려 눈을 감고 있는 이연석을 바라보았다.통유리창 밖의 햇살이 흰 커튼을 통해 희미하게 들어와 그의 잘생긴 얼굴에 비치니 더욱 멋져 보였다.정가혜는 이런 이연석을 한참 바라보다가 손을 들어 그의 얼굴을 톡톡 쳤다.“이연석 씨, 이러다 배 속의 아이까지 눌러 없어질 거예요.”뺨을 맞고 깬 이연석은 그녀의 손을 붙잡아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그는 턱을 그녀의 정수리에 얹고 목이 쉰 목소리로 말했다.“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요. 우리 아이는 반드시 건강하게 태어날 거니까.”이 말은 마치 따뜻한 온천수처럼 정가혜의 마음속으로 살며시 흘러들어 그녀를 따뜻하게 만들었다...이연석도 늦잠을 자는 타입은 아니었다. 정가혜를 잠시 안고 있다가 점차 정신을 차렸다.그는 고개를 숙여 품 안의 정가혜를 바라보았다. 전에도 그녀와 함께 눈을 뜬 적이 많았지만 지금처럼 기쁜 적은 없었다.“여보.”애정
정가혜가 휴대폰을 꺼내 서유에게 자신이 귀국했다고 알리려는 순간, 문 밖에서 자동차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고 통유리창 너머로 이연석이 조수석 문을 열고 배하린을 끌어내리는 모습을 보았다.이연석이 배하린을 집으로 데려오는 것을 본 정가혜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침의 달콤했던 순간들이 순식간에 연기처럼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의 마음이 조금씩 피를 흘리는 것을 느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저 그 자리에 멍하니 앉아 들어오는 두 사람을 바라볼 뿐이었다.이연석은 배하린의 손을 거칠게 놓아주고는 그녀를 정가혜 앞으로 밀쳤다. 정가혜는 어리둥절한 채로 턱을 들어 냉정한 표정의 이연석을 바라보았다. 그는 정가혜와 눈이 마주치자 안심하라는 눈빛을 보내고는 시선을 돌려 차갑게 배하린을 노려보았다.“테이블 위에 눌러!”뒤따라 들어온 경호원들이 즉시 앞으로 나섰다. 좌우에서 배하린의 어깨를 잡고 그녀를 유리 테이블 위에 눌렀다. 배하린을 제압한 후 이연석은 그녀 앞에 천천히 몸을 숙였다.“내 아내 앞에서 분명히 말해. 우리가 잔 적 있어?”정가혜는 이 일이 혼인 계약서에 서명하면서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이연석에게는 진실을 밝히지 않으면 절대 끝나지 않는 일이었다. 그가 자신에게 안정감을 주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정가혜의 마음속 의혹이 점차 사라졌다. 그의 행동이 이미 그의 결백을 보여주고 있었기에 그녀는 더 이상 개의치 않게 된 것일까?테이블에 얼굴을 강제로 눌린 배하린은 정가혜 쪽을 볼 수 없었고 오직 이연석만 볼 수 있었다. 그의 무정한 모습에 그녀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했다.“이연석, 겁쟁이 자식! 해놓고 책임지지 못하겠어?”“내가 겁쟁이라고?” 이연석이 되물은 후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아주 좋아.”그는 휴대폰을 꺼내 배하린 앞에서 바로 112에 전화를 걸어 배하린을 무고와 모함 죄로 신고했다. 신고를 마친 이연석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배하린을 내려다보며 말했다.“경찰이 오기 전에 진실을 말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