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가혜가 휴대폰을 꺼내 서유에게 자신이 귀국했다고 알리려는 순간, 문 밖에서 자동차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고 통유리창 너머로 이연석이 조수석 문을 열고 배하린을 끌어내리는 모습을 보았다.이연석이 배하린을 집으로 데려오는 것을 본 정가혜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침의 달콤했던 순간들이 순식간에 연기처럼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의 마음이 조금씩 피를 흘리는 것을 느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저 그 자리에 멍하니 앉아 들어오는 두 사람을 바라볼 뿐이었다.이연석은 배하린의 손을 거칠게 놓아주고는 그녀를 정가혜 앞으로 밀쳤다. 정가혜는 어리둥절한 채로 턱을 들어 냉정한 표정의 이연석을 바라보았다. 그는 정가혜와 눈이 마주치자 안심하라는 눈빛을 보내고는 시선을 돌려 차갑게 배하린을 노려보았다.“테이블 위에 눌러!”뒤따라 들어온 경호원들이 즉시 앞으로 나섰다. 좌우에서 배하린의 어깨를 잡고 그녀를 유리 테이블 위에 눌렀다. 배하린을 제압한 후 이연석은 그녀 앞에 천천히 몸을 숙였다.“내 아내 앞에서 분명히 말해. 우리가 잔 적 있어?”정가혜는 이 일이 혼인 계약서에 서명하면서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이연석에게는 진실을 밝히지 않으면 절대 끝나지 않는 일이었다. 그가 자신에게 안정감을 주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정가혜의 마음속 의혹이 점차 사라졌다. 그의 행동이 이미 그의 결백을 보여주고 있었기에 그녀는 더 이상 개의치 않게 된 것일까?테이블에 얼굴을 강제로 눌린 배하린은 정가혜 쪽을 볼 수 없었고 오직 이연석만 볼 수 있었다. 그의 무정한 모습에 그녀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했다.“이연석, 겁쟁이 자식! 해놓고 책임지지 못하겠어?”“내가 겁쟁이라고?” 이연석이 되물은 후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아주 좋아.”그는 휴대폰을 꺼내 배하린 앞에서 바로 112에 전화를 걸어 배하린을 무고와 모함 죄로 신고했다. 신고를 마친 이연석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배하린을 내려다보며 말했다.“경찰이 오기 전에 진실을 말하는
이연석이 이 일의 진실까지 알게 될 줄은 몰랐다. 이제는 마지막 남은 카드까지 없어진 셈이다. 배하린은 갑자기 몸에 힘이 빠졌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러나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그녀는 이내 등을 곧게 펴고 그의 바짓가랑이를 잡으려고 발버둥 쳤지만 뒤에 있는 경호원들이 그녀를 막아섰다.그녀는 기를 쓰며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한 번만 더 기회를 주면 안 돼? 내가 널 많이 사랑하는 거 너도 알잖아.”그 말에 그는 눈을 흘겼다. “날 사랑한다고? 네가 사랑하는 건 내가 가지고 있는 집안 배경이겠지. 날 이용해서 재벌 집 사모님이 되려고 했던 거잖아.”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를 진심으로 대하지 않았고 오직 자신의 욕심을 이룰 수단으로만 생각했었다. 모든 속셈을 그에게 들켰지만 배하린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손을 뻗어 정가혜를 가리켰다. “그럼 저 여자는? 널 믿지도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널 사랑할 수 있겠어?”그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정가혜는 그를 쳐다보았다. 억울한 눈빛을 하고 있는 그를 보며 그녀는 왠지 모르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아 했다.“당연히 날 사랑하지. 사랑하기 때문에 날 믿을 용기가 없었던 거야. 이 여자 하나만 바라보겠다고 다짐해 놓고는 다른 여자들과 거리를 두지 않았었어. 그래서 날 믿지 못했던 거고.”그가 애틋한 눈빛으로 안절부절못하는 정가혜를 쳐다보았다.“이제부터는 평생 이 여자 하나만 바라보고 살 거야.”바람둥이인 그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자 배하린은 믿을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이연석, 너...”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배하린, 솔직하게 다 털어놔. 그럼 양민혁이랑 결혼할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지. 그렇지 않으면 이 바닥에 발도 못 붙이게 할 거야. 아무것도 못 건지고 물러나길 바라는 건 아니겠지?”양민혁은 이연석의 친구였고 배하린이 꼬리를 치는 바람에 결국 두 사람은 몸을 섞는 사이가 되었다. 누구도 이 일을 알지 못
이연석의 말이 끝나자마자 밖에서 사이렌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창밖을 내다보니 마침 경비원이 문을 열고 경찰들을 별장 안으로 안내하고 있었다. 그가 경호원에게 눈빛을 보내자 배하린을 붙잡고 있던 경호원이 바로 그녀를 풀어주었다. 이연석의 계략에 빠진 그녀는 여전히 멍해 있었고 그녀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경찰들이 다가와 그녀를 붙잡았다. 이런 결과가 있을 줄 몰랐던 배하린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거짓말을 한번 한 것 가지고 왜 날 잡아가는 거예요?”“이연석 씨가 당신을 성추행범으로 신고했습니다. 경찰서로 가서 조사에 협조해 주시죠.”명예훼손죄로 고소를 한 줄 알았는데 성추행이라니. 그 순간 그녀는 믿을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난 널 건드린 적이 없어.”이연석은 피식 웃었다. 그가 술에 취한 틈을 타서 그의 몸을 이리저리 만졌는데 그게 성추행이 아니면 뭘까?그는 대꾸조차 하지 않고 들고 있던 녹음 펜을 경찰에게 건네주었다.“성추행, 명예훼손 그리고 모함까지 모조리 고소할 겁니다.”경찰은 녹음 펜을 건네받으며 입을 열었다.“일단 경찰서로 데려가 조사해 보겠습니다. 소송을 진행하실 생각이라면 변호사 선임하셔야 할 겁니다.”그는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는 배하린을 쳐다보았다.“너도 알지. 내 변호사가 단이수라는 거.”단이수의 이름을 말한 건 그녀한테 발버둥 치는 건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걸 확실히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었다. 지금까지 법정에서 단이수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안색이 어두워진 배하린은 이연석을 향해 욕설을 퍼부으며 경찰들에게 끌려갔다. 배하린을 처리한 뒤 그는 정가혜가 미안하다는 말을 하기도 전에 핸드폰을 꺼내 고현서에게 전화를 걸어 공항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설명해 달라고 부탁했다.다행히 고현서는 배하린이 아니었고 이연석의 말을 듣고는 피식 웃더니 그 입맞춤에 대해 설명했다. “미안해요, 정가혜 씨. 이 대표님한테 뽀뽀를 한 건 그저 작별 인사 같은 것이었어요. 다른 뜻은 없었으니 오해하지
이승하는 무심하게 그를 힐끗 쳐다보고는 회사 안으로 들어가며 차갑게 입을 열었다.“좋은 소식? 관심 없어.”성격이 차가운 형의 모습에 이미 습관이 되어버린 그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빠르게 형의 뒤를 따라갔다.“형, 나 어제 뭐 하러 갔었는지 알아요?”싸늘한 기운을 뽐내고 있는 남자가 계단을 오르며 말했다.“몰라. 근데 너 가혜 씨 때문에 너무 회사 일을 나 몰라라 하는 거 아니야?”그동안 많이 바쁜 탓에 거의 회사에 나오지 않았었다. “이제부터 그런 일 없어요. 회사에 꼬박꼬박 나올게요.”그가 다짐을 하고는 다시 이승하의 귀에 대고 중얼거렸다.“왜 그런 줄 알아요?”호들갑을 떠는 그를 보며 이승하가 차갑게 물었다.“가혜 씨랑 화해라도 한 거야?”그가 기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화해뿐만이 아니에요. 앞으로 가혜 씨가 날 떠나는 일은 절대 없을 거예요.”좋은 소식이 뭔지 이미 짐작한 이승하는 한마디 더 물었다.“결혼도 안 한 사이인데 충분히 도망갈 수 있는 거 아니야?”그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올랐다.“어제 우리 혼인신고 했어요. 어때요? 깜짝 놀랐죠?”이 엄청난 소식에도 이승하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고 그 모습에 이연석은 어리둥절해졌다. “형, 이상하지 않아요?”“응. 이상해.”“그렇죠?”형이 늘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어서 표정 변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때, 이승하가 갑자기 고개를 돌리고 그를 쳐다보았다.“그런데 가혜 씨는 무슨 생각으로 너랑 혼인신고까지 한 거야?”...“혹시 네가 강제로 끌고 갔어?”...정곡을 찌르는 이승하의 말에 그가 눈을 흘겼다.“강요한 적 없어요. 우리 와이프가 보는 눈이 있어서 나랑 결혼한 거니까.”발걸음은 멈춘 이승하가 위아래로 그를 훑어보았다. 별다른 표정이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자존심이 상했다. “형, 눈빛이 왜 그래요? 지금 나 무시하는 거예요?”이승하는 말없이 시선을 거둬들이며 엘리베이터로 발걸음을 옮겼고 무시당한 이연석은 재빨리 그의 뒤를 따라갔다.
마침 꼭대기 층에 도착하자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이승하는 사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멍하니 서 있던 이연석은 엘리베이터 밖에서 들려오는 차가운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개명은 절대 안 돼.”이렇게 촌스러운 이름을 지어주고 개명을 하지 말라니?후회가 되었다. 진작 이럴 줄 알았더라면 말조차 꺼내지 않았을 텐데.집에 가서 정가혜한테 매를 맞을까 봐 두려웠던 이연석은 미친 듯이 이승하의 뒤를 쫓아갔다.“형, 이건 너무 하잖아요. 제발 다른 이름으로 바꿔줘요.”이승하는 대답은커녕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사무실로 들어갔다.망했다. 아이의 이름을 정말 이철수, 이철희로 지어야 하는 걸까?...한편, 이승하는 형제들을 회사로 불러 중대한 결정을 발표했다. 그는 이미 모든 주식을 회수하였고 그들의 몫에 따라 다시 주식을 분배했다.그중 30%는 이연석에게 넘어갔고 나머지 4명의 형제들에게는 각각 10%씩 그리고 서유에게 30%의 지분이 넘어갔다. 이태석과 곧 퇴직을 앞둔 삼촌들과 고모들에게는 주식 매매 선택권만 주었다. 이렇게 분배한 건 현재 JS 그룹은 더 이상 이승하 한 사람의 소유가 아니라 형제들이 다 같이 소유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형, 왜 지분을 전부 우리한테 나눠줘요?”아이의 이름에 대해 고민하고 있던 이연석은 스크린에 뜬 주식 배분 내용을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다른 형제들도 마찬가지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이승하를 쳐다보았다.둘째 형이 회사에서 물러날 생각인 건가?맨 가운데 자리에 앉아 있는 이승하는 펜을 천천히 돌리며 입을 열었다.“다들 회사에 기여한 게 있으니까 당연히 그 몫을 챙겨줘야지.”“하지만 형들이 나보다 훨씬 더 많이 애썼는데 왜 나한테 이렇게 많이 나눠줘요?”물론 나머지 형들이 그걸 따지지는 않겠지만 이연석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이제부터 경영 수업 시작할 거야. 네가 내 자리까지 올라올 수 있도록.”이연석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그럼 형은요?”이승하는 그들 앞에서 이
“형, 오늘 너무 이상한 거 알아요? 주식 분배는 뭐고 경영 수업은 또 뭐예요? 형수님 지켜달라는 말은 또 뭐고요?”어렸을 때부터 응석받이로 자란 이연석은 다른 형제들과 달리 늘 제멋대로였다. 궁금한 걸 끝까지 알아내지 못하면 도저히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이승하는 테이블을 지나쳐 의자에 앉더니 고개를 들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연석을 쳐다보았다. “한 달 뒤 갈 데가 있어. 아마 당분간은 연락이 안 될 것 같아. 일단은 이렇게 나눠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그랬어. 그리고 너한테 내 자리를 맡기려고 한 건...”그가 하던 말을 멈추고는 짙은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원래는 아직 두 달이라는 시간이 남았지만 오늘 아침 갑자기 소식 하나를 듣게 되었다.그 때문에 그는 어쩔 수 없이 시간을 앞당기게 되었다.그가 고개를 들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너랑 네 형수가 모두 30%씩 지분을 가지고는 있지만 네 형수는 회사 일에 참여하지 않을 거야. 그래서 너한테 권력을 넘겨주는 거고. 두 사람이 손을 잡고 다른 형들이 도와주면 네가 형수를 도와 이씨 가문의 사람들을 견제하는 데 큰 문제는 없을 거다.”그가 떠난 뒤, 이태석과 이씨 가문의 사람들은 분명 주식 분배의 일로 서유를 난처하게 할 것이다. 서유가 평생 먹고살기에 걱정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는 주식 배당금뿐만 아니라 그녀 앞의 모든 장애물을 제거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를 믿고 충성을 다 바치는 동생들만이 서유를 지켜줄 수 있었고 특히 어릴 때부터 그를 많이 따랐던 이연석이 가장 적합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형은 어디 가는 데요?”그의 뜻을 알아차린 이연석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혹시 또 NASA로 가는 거예요?”매번 이승하가 NASA에 갈 때마다 핸드폰을 제출하는 바람에 그들과 연락이 끊기곤 했었다.“아니야.”이연석의 말을 끊어버리고 그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가기 전에 말해줄게.”그가 당부해야 할 것들은 훨씬 더 많았다. 멍해 있던 이연석이 다시 물으려 하
독특한 발자국 소리에 소파에 누워있던 심이준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저기... 나 머리가 어지러워서 그러는데 이만 돌아갈게요.”자기편을 들어줄 사람이 나타나자 서유는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오늘 설계도 완성 못 하면 우리 집에서 자겠다고 하지 않았어요?”심이준은 연신 손을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멀쩡한 내 집 놔두고 내가 왜 여기서 자요? 내일 다시 올게요. 그럼 이만.”일어나자마자 이승하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더니 이내 가볍게 눌러 그를 제자리로 돌려 놓았다. “누구의 다리를 부러뜨리려고 한 겁니까?”무표정한 얼굴의 이승하를 쳐다보던 그는 이내 얼굴이 굳어지더니 애써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당연히 제 다리죠.”이승하의 차가운 눈동자에 장난기가 가득 차 있었다.“아까 내 다리를 부러뜨리겠다고 한 거 아니었어요?”심이준은 빙그레 웃었다.“실수예요. 말실수.”누가 감히 이승하의 다리를 부러뜨리겠는가? 죽고 싶어 환장한 것도 아니고. 이연석과 마찬가지로 처세에 능한 심이준은 이내 물티슈를 가져와 이승하에게 건네주었다.“손 닦으세요. 절 만졌으니 찝찝하실 것 같은데.”심이준의 이런 모습을 처음 본 서유는 턱을 괴고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이승하는 눈앞의 의미심장한 얼굴을 한참 동안 쳐다보다가 물티슈를 건네받아 손을 닦고 나서야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다시 한번 뒤에서 내 흉을 보면 당신 다리를 부러뜨릴 겁니다.”그 말을 듣고 심이준은 어리둥절해하며 이승하에게 물었다.“저 다리가 세 개인데 어느 것을 부러뜨릴 건가요?”이승하가 눈을 내리깔고 그의 하반신을 쓸어내렸다.그의 눈빛을 따라 시선을 움직이던 심이준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하반신을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재빨리 중요 부위를 가렸다.“안 됩니다. 아직 장가도 안 간 총각이에요.”어이가 없었던 이승하는 손에 든 물티슈를 돌려주고 서유에게로 향했다. 그녀를 한참 동안 쳐다보다가 책상을 지나쳐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렸다.갑자기 몸이 뜬
그는 거칠게 몰아붙이다가도 다정하게 그녀를 배려했다.얼마 후, 그녀는 힘없이 침대에 축 늘어졌다. 한 번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가 숨을 쉴 틈도 주지 않고 미친 듯이 그녀를 탐했다. 한번 또 한 번의 절정이 반복되고 결국 그녀가 견딜 수 없을 때까지 몰아치고 나서야 그녀를 안고 욕실로 향했다. 예전에는 이렇게 다정한 남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결혼하고 나서부터는 목욕까지 직접 시켜줬다.세심하게 머리를 감겨주는 그를 바라보며 그녀는 마음이 따뜻해졌다.“아까 하려던 말이 뭐예요? “순간, 손을 멈칫하던 그가 잠시 고민하더니 한마디 내뱉었다.“연석이가 두 가지 소식을 가져왔는데 뭐부터 들을래?”그에 대한 일은 떠나기 전에 그녀한테 말해주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미리 걱정시키는 게 싫었으니까. 그의 따뜻한 손길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아무거나 좋아요.”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이마에 키스를 하던 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가혜 씨랑 화해했대. 그리고 두 사람 혼인신고까지 마쳤대.”그 말에 깜짝 놀란 서유가 눈을 번쩍 떴다.“가혜랑 도련님이 혼인신고를 했다고요? 언제요?”이 중요한 소식을 정가혜는 그녀한테 알리지 않았다. 절친이 맞긴 한 건지?흥분하는 그녀의 모습에 이승하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어제.”어제 방금 혼인신고를 마쳤으니 미처 알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전화해 봐야겠어요.”그가 손을 뻗어 그녀를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아직 하나 더 남았어.”그제야 그녀는 욕조에 누워 기대에 찬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10개월 후면 연석이가 아빠가 된대.”미처 반응하지 못한 서유는 눈을 두 번 깜박였다.“도련님이 아빠가 되는 데 왜 가혜랑 혼인신고를 해요?”말을 하던 그녀는 믿을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혹시 가혜 임신한 거예요?”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있던 그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이 든 그녀는 숨을 크게
서유의 사망 소식을 들은 육성재는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결국 그는 그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 서둘러 달려갔고, 모든 이들이 묘지를 떠난 후에도 그녀의 묘비 앞에 남아 머물렀다.“서유 씨...”그는 묘비를 붙잡고 천천히 몸을 낮추어 무릎을 꿇고, 더 이상 젊지 않은 눈으로 그녀의 영정 속 얼굴을 오랫동안 응시했다.“내가 올 줄 몰랐죠?”육성재는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시작했다.“내가 한 사람을 이렇게 오래도록 사랑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어요.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나도 참 정이 깊은 놈이었네요.”영정 사진을 보며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너무 깊이 사랑해서 세상 어떤 여자도 내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됐어요. 그러니 서유 씨, 나도 이승하 못지않게 당신을 사랑했던 거예요, 안 그래요?”그러나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건 묘지의 나뭇가지 사이를 스치는 새들의 울음소리뿐이었다. 새와 짐승들이 떠나고 나니 주변은 그저 고요할 뿐이었다. 마치 지난 수년간 그의 마음속에 묻어둔 사랑처럼, 결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어둠 속에 갇힌 채였다.그토록 짙은 사랑은 세상에 드러낼 수 없었다. 그녀가 떠난 지금에서야 그는 그녀의 묘 앞에 와서 고백했다.그 역시, 깊이 사랑했노라고.모든 사람에게는 후회가 있다. 육성재의 유감은 그녀가 죽기 전까지 자신을 이렇게 바보처럼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었다.하지만 알게 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서유는 이미 떠났는데, 육성재 난 왜 여전히 집착하고 있는 거냐? ’육성재는 그녀의 묘비 앞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그러다 결국 답을 찾지 못한 채 천천히 일어나 발걸음을 돌렸다.그의 삶은 사랑이 아니라 일에 무게를 둔 인생이었다. 그는 생을 바쳐 육씨 집안을 세계 최고의 가문으로 일궈냈다.그는 상업계의 전설 같은 인물로 남았고, 수십 년이 지나도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았던 육성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야기하곤 했다.수도에 있는 송사월은 그녀의 죽음 소식을 제일 마지막으
생이 마감하는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간 것은 그 5년 동안 이승하가 숨겼던 사랑이었다.몇 번이나 뒤척이며 잠에서 깼을 때, 자신의 몸이 단단하고 강인한 두 팔에 꽉 안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게 강하게 끌어안는 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또한 주말에 식사할 때, 식탁 건너편에 앉은 이승하가 가끔 그녀를 몰래 훔쳐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오랜 짝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그리고 그가 모든 일을 마친 후 그녀를 안아 자신의 가슴에 엎드리게 하고,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아이를 달래듯 잠들게 했던 모습 또한 마찬가지였다.이승하의 사랑은 작은 순간순간에 담겨 있었다. 그것이 어떤 모습인지 타인에겐 잘 보이지 않았으나, 이승하 본인만은 아주 알고 있었다. 당시 그녀에 대한 사랑을 얼마나 힘들게 숨겨왔는지...서유의 눈은 이미 뜰 수 없었고, 몸은 영혼이 빠져나간 듯 더 이상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다시 한 번 볼 힘조차 없었다.그녀는 주머니 속 휴대폰을 더듬어 무작정 전화를 걸었고, 다행히 그것을 받은 사람은 정가혜였다.세월이 흐르면서 정가혜도 나이가 들었다. 젊었을 때의 맑은 목소리는 사라지고 약간 쉰 소리가 섞여 있었다.“서유야, 조금만 기다려. 우리 며느리가 출산하면 바로 널 보러 갈게...”삶의 마지막 순간에 친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왜인지 이미 메마르고 고갈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고, 이내 오열로 변해 멈출 수 없었다.“가혜야, 난 승하 씨가 너무 보고 싶어. 그 이를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 부탁할게. 하준이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줘. 엄마가 하준이 결혼식을 볼 수 없게 됐다고...”전화기 너머의 정가혜는 이 말을 듣고 함께 눈물을 쏟아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서유가 그동안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어머니로서 아들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그녀는 이미 이승하를 따라갔을 것이다.얼마 전부터 서유의 몸이
서유의 손가락이 이하준의 머리 뒤로 부드럽게 닿았다. 마치 이미 모든 사실을 받아들인 듯 그녀의 표정은 놀랍도록 평온했다. “언제쯤 결혼할 거니?”이하준의 몸이 경직되었다. 안개처럼 흐릿한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서유를 천천히 놓아주며 말했다. “어머니... 아직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지 못했어요.”아들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서유는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봐봐. 네 엄마는 지금 살아있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단다. 제발 네 아빠를 만나러 가게 해줘. “어릴 적엔 부모님이 그를 속박했지만, 커서는 그가 부모님을 속박했다. 오직 그 속박만이 그를 고아로 만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 번만 더 이기적일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그는 서유의 팔을 붙잡으며 간절히 말했다. “어머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날 거예요. 그러면 결혼하겠습니다, 네?”결국 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서유는 평소와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교회에 가서 너를 위해 기도하고, 네가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길 빌어주마...”서유의 소원을 결코 들어주지 말아달라고 하늘의 신들에게 기도하며, 이하준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평생 어머니의 사랑을 얻기 위해 결코 결혼하지 않기로 했다.그는 이승하가 남겨둔 로봇을 다시 가져와 서유에게 아버지가 남긴 유언이 모두 로봇 프로그램에 담겨 있다고 말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유언의 일부를 들려줄 것이며, 만약 그녀가 아버지가 말하고 싶었던 모든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살아야 한다고 전했다.처음에 서유는 이승하와 똑같이 생긴 로봇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봇이 말을 시작하는 순간, 그녀는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는 서재에 앉아 하루하루 이승하가 녹음했던 로맨틱한 말을 돌려서 들었다.마치 예전에 그가 그녀를 찾지 못했을 때 다른 이의 번호로 하루에 십여 통의 문자를 보내 그녀의 부재를 애도했던 것처럼.이제는 그가 먼저 떠났지만
아들을 위해, 결국 서유는 이승하를 따라 죽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하룻밤 사이 머리가 백발이 되어, 마치 열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모습이 되었다. 예전에는 세월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던 얼굴이 순식간에 주름투성이가 되었고,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그녀의 눈동자도 생기를 잃고 텅 빈 채로 아무 빛깔도 담고 있지 않았다.엄마가 되었으니 이제는 예전처럼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녀는 이승하의 무덤 앞에서 약속했다. 자신을 기다려 달라고.아들이 결혼하면 그때 찾아가겠다고. 만약 자신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다음 생의 약속도 취소할 거라고. 그리고 영원히,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이승하의 장례식에 서유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기운을 내어 비틀거리며 그의 무덤 앞에 섰을 때, 무덤가에서 그녀가 중얼거리던 말들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오직 그녀를 부축하며 아버지의 무덤을 찾은 이하준만이 그 말을 기억했다.눈 덮인 땅에 쓰러져 의식을 잃었던 그날 밤, 서유는 병원으로 옮겨져 일주일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그녀가 없는 동안 이승하의 시신은 얼음관에 안치된 채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일주일을 버텼다. 그녀가 깨어난 후, 그녀는 하얗게 센 머리와 멍한 눈빛으로 그를 단 한 번 보고는 곧바로 돌아섰다.그들이 이승하를 어떻게 묻었는지, 묘지는 어떻게 정했는지, 영정 사진으로 어떤 사진을 선택했는지 서유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차가운 베개를 매만지며 그가 아직 살아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데만 몰두했다.‘만약 당신이 여기 있었다면, 내 하얀 머리를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겠죠.’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당신은 그랬을 거예요.”이승하는 질투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서유가 그 때문에 긴장하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그는 한참 동안 기뻐하며, 그녀 마음에 자신이 있다는 확신을 얻곤 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녀가 그로 인해 속을 끓이고 밤낮으로 잠 못 이루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이
서유는 떨리는 속눈썹을 들어, 삶의 의미를 잃은 듯한 눈으로 멀리 바라보며 말했다.“아니, 난 어디에도 가지 않을 거야. 나와 그 사람, 그냥 여기 있을 거야. 내가 얼어 죽을 때까지, 누구도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어.”그녀가 여기서 얼어 죽겠다는 말을 들은 순간, 주변 사람들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먹먹해졌다. 모두가 그녀를 말리며 무모한 짓을 하지 말라고 설득했지만, 서유는 그 어떤 말도 듣지 않았다. 단호하고도 완강하게, 이승하를 품에 안고 눈 덮인 땅 위에 앉아 그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때 이하준이 서유의 손을 붙잡고, 그녀의 손바닥을 힘껏 눌러 그녀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렸다.“어머니,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알아요. 그래서 지금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드신 것도 이해해요. 하지만 전 이미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어머니까지 잃을 순 없어요. 제발 부탁이에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 주세요...”아들이 귀 옆에서 애절하게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서유는 천천히 시선을 그에게 돌렸다. 아버지와 똑같은 모습으로 빚어진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그녀의 입술 끝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꽃이 피어난 듯한 미소였다.“난 이미 네 아버지가 떠날 준비를 오래전에 마쳤단다. 이제 그이가 정말 떠났으니, 당연히 나도 함께 가야지. 너도 알잖니. 그이가 살면 나도 살고, 그이가 죽으면 나도 죽는 거야. 아무도 이걸 막을 순 없어.”예전에 이하준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는 어머니의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만큼이나 깊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성인식을 맞이한 바로 오늘, 부모님 두 분을 동시에 잃을 수 없었다.눈 덮인 땅 위에서 무릎을 꿇은 채, 그는 천천히 어머니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 서유를 힘껏 끌어안았다.“어머니, 아버지는 제가 결혼하는 것과 자식을 낳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씀하셨어요. 지금 아버지는 그걸 보지 못하고 떠나셨지만, 어머니가 대신 그 순간을 기다려 주시면 안 되나
눈물이 눈가에서 갑작스럽게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가슴을 찢는 통곡이 아니었다. 아무 소리 없이 흘러내릴 뿐, 그녀는 벌어진 입술로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이생에서 이승하에게 해야 할 말은 이미 다 끝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눈을 내리깐 채,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창백한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바보, 당신이 아무리 피를 흘린다 해도 당신은 내 남편이에요. 내가 무섭겠어요? 하나도 안 무서우니까, 왜 굳이 혼자 이런 곳에 온 거예요?”마지막 이별의 말조차 건네지 못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러나 그녀의 이승하는 이런 안타까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모든 걸 숨겼다.만약... 그녀가 그 가짜 이승하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평생 그의 몸조차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눈과 함께 얼어붙어 영원히 설산 아래에 묻혔을 것이다.이승하는 이미 스스로 세상에서 사라질 각오를 했던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따라오지 않게 하려고, 그녀를 속이기 위해 가짜 로봇을 만든 것이다.‘하지만 승하 씨...’‘당신이 아무리 똑같이 생긴 로봇을 만든다 해도, 그건 당신이 아니에요. 당신이 평생 날 속일 수 있다면 난 받아들였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지금 그 거짓말은 단 한 순간도 버티지 못했잖아요.’‘당신은 내가 당신을 찾으러 올 것을 허락하지 않았겠죠. 그렇지 않았다면 가짜 로봇을 만들어 내게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을 거고, 피를 흘리는 고통을 혼자 감당하며 이런 깊은 산속에서 눈과 마른나무를 친구 삼아 떠나지도 않았겠죠.’그녀의 이승하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었고, 동시에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비록 마지막 순간에 그의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매우 안타깝지만, 그의 사랑 덕분에 서유는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와 함께 죽는다면 그것은 한평생의 약속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이제 먼저 떠난 이승하가 황천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까?서유는 알 수
마치 무언가 예감이라도 한 듯, 이하준이 떨리는 손으로 이승하의 손을 움켜쥐던 순간, 서유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마치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풀어 헤친 채 네발로 기어 이하준에게 달려갔다.그녀는 여전히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다만 그 단호한 시선은 이승하의 얼어붙고 하얗게 질린 손에 닿자마자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깐 채,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이승하를 덮은 눈을 미친 듯이 파헤쳤다.깊은 산속의 눈은 산 아래보다 훨씬 더 두꺼웠다. 끝없이 쌓인 층층의 눈 속에서 서유는 온 힘을 다해 이승하를 파내던 순간, 그의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흐르는 피가 일곱 군데에서 새어 나와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은 더 이상 어떠한 온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하준은 아버지의 침묵하는 모습을 목격하자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두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은 그는 마음속 어딘가가 찢어지듯 끊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마치 거대한 나무가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듯, 그의 세계는 단숨에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하준아.”서유의 고요한 목소리가 귀를 스쳤다.“도와줘.”이하준은 어머니의 충혈된 눈을 바라보며 그녀의 부탁에 정신을 차렸다. 서유의 눈빛에는 슬픔도, 고통도 없었다. 오직 이승하의 죽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단호함만이 담겨 있었다.그녀는 얼어붙은 이승하의 손과 얼굴을 붙들고 자신의 체온으로 그를 녹이려는 듯 필사적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이하준도 어머니를 따라 아버지의 발을 감싸 쥐었다. 그는 얼어붙은 신발을 벗기고 자신의 배 위로 올린 뒤, 손바닥으로 아버지의 다리를 위아래로 문지르기 시작했다.서유는 이승하의 얼굴에 덮인 얼음을 녹이며, 그가 살아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지친 손으로 그의 얼굴을 계속 문지르며 이렇게 말했다.“여보, 당신이 나더러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나 정말 잘 기다렸는데, 왜 약속을 안 지키고 돌아오지 않은 거예요?”“지금이라도 눈을
눈밭을 헤매며 이승하를 찾고 있던 서유는 갑자기 발길을 멈췄다. 마치 영혼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멍하니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눈앞에는 오직 그녀 자신뿐, 영혼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그녀는 그 자리에 굳어 서서 한참을 있다가 손을 들어 가슴에 얹었다. 심장이 세 번 뛰고 난 뒤, 가슴 깊은 곳에서 찢어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마치 무엇인가를 잃어버릴 것만 같은 아픔이었다. 몸을 굽히며 고통을 참고자 했지만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직감적으로 그녀는 이승하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느꼈다. 이를 악물고 계속 그를 찾으려던 그 순간, 눈 위로 아름다운 자태를 가진 한 사람이 붉은 리치 한 송이를 손에 들고 걸어왔다.“여보, 내가 기다리라고 했잖아. 왜 여기까지 와 있는 거야?”눈앞에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이승하를 보자, 긴장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던 서유는 한순간 안도감을 느꼈다. 역시 그가 곁에 있으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 같았다.서유는 들고 있던 우산을 내던지고 마치 숲속의 토끼처럼 기쁨에 차 달려가 이승하의 품에 안겼다.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익숙한 향기에, 서유는 깊게 숨을 내쉬며 안심했다.“당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정말 당신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얼마나 무서웠는데요!”이승하는 긴 손가락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언제나 그랬듯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손길이었다.“내가 말했잖아. 항상 네 곁에 있을 거라고.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거라고. 나한테 쉽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그의 품 안에 꼭 안긴 서유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더욱 꽉 껴안았다. 하지만 갑자기 무언가가 손에 닿자, 서유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리고는 이승하를 밀쳐내며 소리쳤다.“당신... 당신은 내 승하 씨가 아니야!”이승하는 요즘 들어 많이 수척해졌고, 허리를 감쌀 때 손가락이 다른 손가락에 닿을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이승하는 예전처럼 건장한 체격을 유지하고 있었다.“당신
시린 눈보라 속에 홀로 서 있는 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겨우 남은 힘으로 긴 손가락을 들어 흔드는 그를 보며, 이연석은 애써 마음을 다잡고 이를 악물며 재빨리 눈 덮인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형! 내가 먼저 의사를 부르고, 로봇을 산으로 올려보낼게. 그러고 나서 바로 돌아올 테니까 그 자리에서 꼭 기다려. 금방 올게!”밤길은 험난했지만, 사방으로 쏟아지는 눈은 길을 환히 비춰주어 이연석은 마치 대낮처럼 보이는 길 위를 달렸다. 하지만 급한 걸음은 때때로 방향을 잃고, 몇 차례나 눈밭에 무릎을 꿇으며 휘청거렸다.멀어져가는 이연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승하는 느려지는 심장 박동을 가슴으로 느끼며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생명의 문이 서서히 닫혀가는 고통을 묵묵히 받아들였다.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서유가 그의 흔적을 찾으며 이름을 부르자, 이승하는 무성한 나무 사이에서 고개를 돌려 눈 덮인 길 위에서 우산을 쓰고 걷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단 한 번의 시선, 그로 인해 시간이 멈추고 만 년의 세월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처음 그녀를 만났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 같았지만, 이제는 햇빛도 사라지고 눈보라만이 세상을 덮고 있었다.“승하 씨!”서유는 잠시 기다리다 이상함을 느끼고 별장 맞은편에 있는 집의 문을 열어보았다. 예상대로 이승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아 헤맸다.이승하는 대답하고 싶었다. ‘나 여기 있어.’ 그러나 온몸의 피가 쏟아지는 그는 예전처럼 힘찬 목소리로 외칠 수 없었다.그는 겨우 뜨고 있는 흐려진 눈으로 고개를 돌려 한 걸음씩 깊은 산 속으로 걸어갔다.그곳은 숲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고 하얀 눈이 밤하늘을 밝혔어도 사람의 움직임을 알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그가 누울 만한 최적의 장소였다.이승하는 생각했다. 얼음과 눈이 몸을 얼려버리면 야수가 지나가더라도 그의 썩은 살을 물어뜯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설산 아래에 묻히면 그의 외모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