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거칠게 몰아붙이다가도 다정하게 그녀를 배려했다.얼마 후, 그녀는 힘없이 침대에 축 늘어졌다. 한 번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가 숨을 쉴 틈도 주지 않고 미친 듯이 그녀를 탐했다. 한번 또 한 번의 절정이 반복되고 결국 그녀가 견딜 수 없을 때까지 몰아치고 나서야 그녀를 안고 욕실로 향했다. 예전에는 이렇게 다정한 남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결혼하고 나서부터는 목욕까지 직접 시켜줬다.세심하게 머리를 감겨주는 그를 바라보며 그녀는 마음이 따뜻해졌다.“아까 하려던 말이 뭐예요? “순간, 손을 멈칫하던 그가 잠시 고민하더니 한마디 내뱉었다.“연석이가 두 가지 소식을 가져왔는데 뭐부터 들을래?”그에 대한 일은 떠나기 전에 그녀한테 말해주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미리 걱정시키는 게 싫었으니까. 그의 따뜻한 손길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아무거나 좋아요.”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이마에 키스를 하던 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가혜 씨랑 화해했대. 그리고 두 사람 혼인신고까지 마쳤대.”그 말에 깜짝 놀란 서유가 눈을 번쩍 떴다.“가혜랑 도련님이 혼인신고를 했다고요? 언제요?”이 중요한 소식을 정가혜는 그녀한테 알리지 않았다. 절친이 맞긴 한 건지?흥분하는 그녀의 모습에 이승하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어제.”어제 방금 혼인신고를 마쳤으니 미처 알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전화해 봐야겠어요.”그가 손을 뻗어 그녀를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아직 하나 더 남았어.”그제야 그녀는 욕조에 누워 기대에 찬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10개월 후면 연석이가 아빠가 된대.”미처 반응하지 못한 서유는 눈을 두 번 깜박였다.“도련님이 아빠가 되는 데 왜 가혜랑 혼인신고를 해요?”말을 하던 그녀는 믿을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혹시 가혜 임신한 거예요?”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있던 그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이 든 그녀는 숨을 크게
한편, 정가혜는 이 소식을 문자나 전화로 서유에게 알리는 것이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연석이 돌아오면 그에게 허락을 받고 서유를 만나러 갈 생각이다. 그 생각을 하고 있는데 마침 창밖에서 불빛이 비치더니 차 한 대가 정원 안으로 들어왔다.얼마 지나지 않아 훤칠하고 잘생긴 그가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려왔다. 남편을 기다리는 게 처음이라 조금 어색했다. 그러나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고 소파에서 일어나 그를 향해 걸어갔다. 그가 외투를 벗고 넥타이를 풀어 하인에게 건네려는데 그녀가 손을 뻗었다.능숙한 모습이 마치 오래된 부부 사이 같았다. 둘째 형 때문에 우울했던 그는 다정한 그녀의 모습에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이런 일은 당신이 안 해도 돼요.”그는 그녀가 들고 있던 외투와 넥타이를 낚아채 옆에 있던 하인에게 던지고는 다시 그녀의 손을 잡고 다이닝룸으로 향했다. 테이블 위에 놓인 음식들을 보고 그녀가 자신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린 것 같아 마음이 따뜻해졌다.“앞으로 내가 늦게 들어오면 기다리지 말고 먼저 먹어요.”뱃속에 아이가 있는데 굶고 있으면 안 되지. 사실 일부러 그를 기다린 것이 아니라 입맛이 별로 없어서였다. 그러나 감동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그녀는 솔직하게 얘기하지 못했다. 식탁에 앉은 뒤, 그녀는 갈비찜 하나를 집어 그의 그릇에 놓아주었다. 비록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행동에 그는 무척 감동받았다.“당신이 있어서 참 좋다.”사실은 하인이 갈비찜을 만들다가 실수로 소금을 많이 넣은 것을 보고 맛이 어떤지 그한테 먼저 맛보라고 한 것이었다. 그걸 전혀 알지 못했던 이연석은 바보같이 기뻐하며 짭짤한 갈비를 뜯어 먹으면서 초롱초롱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짜긴 하지만 당신이 준 거니까 다 먹을게요.” 그 말을 듣고 그녀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떨구고 죽을 마셨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 각자 샤워를 마친 뒤 잠옷을 입고 안방으로 돌아갔다. 불을 끄려는데 그가 막아서더니 서랍을 열
“하고 싶어요.”그녀의 입술에 뜨겁게 입을 맞추면서 큰손으로 그녀의 몸을 거침없이 만졌다. “말했죠. 아이 때문에 안 된다고.”숨 막힐 듯한 그의 키스에 그녀도 몸이 후끈 달아올랐지만 애써 이성의 끈을 놓치 않았다. “알아요. 하지만 예전처럼...”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를 밀어냈다.“계속 이러면 우리 각방 써요.”순식간에 얌전해졌다.“아니요. 다시는 안 그래요. 제발 각방 쓰자는 소리 하지 마요.”그 한마디에 그는 그녀의 몸에서 내려와 옆으로 눕더니 그녀를 다시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아이 태어나고 몸이 회복되면 밤낮 가리지 말고 해요.”그의 품에 안겨 있는 그녀는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아이가 태어나면 1년의 계약도 끝이 나겠죠. 남을지 말지는 내가 결정해요.”허리를 감싸고 있던 그의 손이 약간 경직되었다가 이내 풀어졌다.그가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몸을 옆으로 돌리고 스탠드 조명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쓸쓸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가까이 다가가 뒤에서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약속할게요.”떠나지 않겠다는 뜻이었지만 그는 그녀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약속하면 뭐가 달라져요? 당신은 어차피 떠날 텐데.”바보 같은 남자. 그녀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의 등 뒤로 몸을 밀착시켰다. “내일 출근해야 하잖아요. 얼른 자요...”한참 후, 그가 옆으로 몸을 돌리고는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우리 성대하게 결혼식 올려요.”결혼식에서 이 여자가 내 여자다 라고 이 세상에 알릴 것이다. 평생 그의 여자로 살게 할 것이고 어디도 도망갈 수 없게 만들 것이다. 그를 한참 동안 바라보던 그녀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그래요. 당신 뜻대로 해요.”이제 두 사람 사이에는 그 어떠한 장애물도 없다. 그가 결혼식을 올리고 싶다면 그렇게 해주고 싶었다. 그가 다시 그녀를 세게 끌어안았다.“잘 자요.”익숙한 그의 냄새를 맡으며 그녀는 천천히 눈을 감고 편안하게 잠들었다.다음 날, 그녀는 드
한편, 연이를 데리고 정가혜를 찾아가려던 서유는 마침 집으로 찾아온 정가혜를 발견하게 되었다. 한 달 넘게 만나지 못했던 두 사람은 입구에서 서로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별장 안으로 들어와 그녀는 임산부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준비해달라고 주태현에게 부탁하고는 정가혜를 이리저리 훑어보며 평평한 아랫배를 만져보았다.“전에 나랑 한 약속 안 잊었지?”“당연하지.”정가혜는 다정하게 서유의 머리를 어루만졌다.“아이가 태어나면 제일 먼저 너한테 이모라고 부르라고 할게.”그 말에 서유가 고개를 들고 활짝 웃었다.“기대된다.”정가혜를 생각하면 너무 기뻤다. 그녀는 자신이 아이를 갖지 못한 슬픔을 전혀 내비치지 않았다.서유는 자신의 속마음을 감추는 걸 잘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정가혜는 그녀의 마음을 훤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너도 곧 아이가 생길 거야.”정가혜는 그녀의 손을 잡고 손등을 토닥였다. “나도 네 아이가 나한테 이모라고 부르는 걸 기대하고 있어.”정가혜의 말에 답답했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래. 네 소원이 하루빨리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그녀는 손가락을 뻗어 서유의 코를 살짝 두드렸다.“행운을 전해줄게.”서유가 높은 콧대를 가까이 가져다 댔다.“몇 번 더 두드려줘. 아이 많이 낳게.”서유의 농담에 정가혜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열 번을 두드렸다.“10명 낳을 수 있을지 지켜봐야겠어.”“10명?”아무리 부부 금슬이 좋아도 열 명은 무리였다. 짐승도 아니고...“둘이면 충분해. 남자아이 하나 여자아이 하나.”금슬 좋은 부부라면 가장 바라는 것이었다. 정가혜도 그 욕심이 있었지만 강요할 생각은 없었다. 잠깐 얘기를 나누고 나니 졸음이 몰려왔다. 서유는 급히 그녀를 게스트룸으로 보냈다. 한잠 푹 자게 하려고 했는데 아내를 찾으러 이연석이 블루리도로 찾아올 줄 누가 알았겠는가?“형수님, 저희 집사람 어디 있어요?”안으로 들어와 그녀한테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이리저리 둘러보는 그 모습에 서유는 웃음이 나왔다.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를 향해 입을 맞추려고 다가가자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다른 사람도 있는데 뭐 하는 거예요?”자매 같은 친구에서 이젠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다. 아무리 성격이 좋은 서유라도 그 말을 듣고는 어이가 없어서 눈을 흘겼다. “신경 쓰지 말아요.”이연석의 말이 끝나자마자 우뚝 솟은 그림자가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가 얼른 허리를 굽히며 잘생긴 얼굴을 정가혜의 앞에 들이댔다.“얼른 뽀뽀해 줘요.”이승하가 들어온 줄 모르고 있었던 정가혜는 고개를 들고 황급히 그의 얼굴에 입을 맞추었다.그제야 이연석은 활짝 웃으면서 그녀를 껴안고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는 이승하를 쳐다보았다.“형, 왔어요?”예전에 그 앞에서 시도 때도 없이 애정행각을 벌이던 이승하와 서유의 모습이 괘씸해서 오늘은 아주 작정하고 보여줄 생각이었다. 득의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를 힐끗 쳐다보던 이승하는 서유의 앞으로 걸어갔다.“앞으로 제정신이 아닌 사람은 다시 집에 들이지 마.”멍한 표정을 짓던 서유가 입을 열었다.“가혜는 정상적인 사람이에요.”소파에 앉은 이승하가 그를 흘겨보았다. “가혜 씨를 말한 게 아니야.”“그러니까 지금 나한테 그런 거예요?”이승하가 짙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눈치가 빠르네.”둘째 형과의 말다툼에서 단 한 번도 이긴 적이 없었다. 참아야지 별 수 있나?잠시 후, 정가혜를 끌고 현관문을 나서던 그가 뭔가 생각이 난 듯 몸을 돌려 이미 서로 껴안고 있는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남자는 여자를 허벅지에 앉힌 채 허리를 꼭 껴안고 있었다. 여러 봤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연석은 여전히 얼굴이 붉어졌다. 섹시한 둘째 형과 달리 연약한 형수의 모습이 대조되어 강하고 힘센 남자의 품에 안겨있는 것을 보면 자꾸만 야한 생각이 들었다. 그가 손을 뻗어 정가혜의 눈을 가렸다. 눈이 가려진 그녀는 힐끗 그를 흘겨보았다.뭘 이런 걸 가지고 그러는지... 볼 만큼 다 본 사람인데 눈을 왜 가리는 거야?그가 이승하와 서유를 향해 턱을 치켜들었
검은 옷차림의 경호원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연지유는 우연히 부두를 지나치던 사람처럼 걸음을 멈추고 유람선 쪽을 바라보다가 이승하의 차를 향해 몸을 돌렸다.두꺼운 차창을 통해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니 얼굴에 있는 십자 모양의 흉터가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선명한 붉은 빛을 발하고 있었다. 연지유는 가리거나 피하지 않고 일부러 그가 잘 보이게끔 얼굴을 쳐들었다. 마치 그 흉터는 그가 남긴 것이라는 것을 일깨워주는 것처럼. 봉태규와 연중서를 데리고 공공연히 그의 앞에 나타난 것은 언젠가 그한테 복수를 할 것이라는 걸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이승하의 그윽한 눈동자가 갑자기 어두워졌다. 그가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연지유는뒤돌아서서 유람선 쪽으로 걸어갔다. 한편, 이승하는 특수한 신분 때문에 서유가 자신의 아내라는 걸 외부에 노출한 적이 없다. 두 사람은 이런 기자들이 있는 자리에 동행을 한 적이 없었다. 지금 서유는 이미 유람선에 올라탄 상황이었다. 연지유가 이렇게 많은 사람을 데리고 유람선에 오르는 것을 보고 이승하는 연지유의 목적이 서유에게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바로 문을 열고 차에서 내리는데 연지유가 발걸음을 돌렸다. 갑자기 걸음을 멈추는데 그녀가 그를 돌아보며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오늘 온 목적은 서유가 아니라 그를 시험하기 위해서라는 뜻이었다. 차가운 눈에 살의가 드러났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뒤에 있는 경호원들을 거느리고 연지유의 뒤를 따라갔다. 지난번에는 연지유를 직접 처리하지 않고 택이에게 맡겼던 것이 화근이 되었다. 택이가 일이 있어서 봉태규에게 맡기지만 않았어도 봉태규가 조직을 배신하고 루드웰로 숨어버린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번에는 반드시 직접 그들을 처리할 것이다. 이때, 유람선 위에 있던 서유도 연지유를 알아봤다. 멀리 떨어져 있어서 얼굴의 흉터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뚜렷한 윤곽에 서유는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동아 그룹이 JS 그룹에 인수된 후, 연지유와 연중서는 사라져 버렸다. 해외로 나간 줄 알았던 사람들이
그가 고개를 숙이고는 애틋하게 그녀를 바라보며 그녀의 머리에 입맞춤을 했다.“미안해. 당신 걱정하게 만들어서.”그녀는 그의 품에서 머리를 빼꼼 내밀고 날카로운 턱선을 가진 남자를 올려다보았다.“방금 연지유를 봤어요. 무슨 일로 찾아간 거예요?”그녀가 봤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건지 그가 순식간에 몸이 굳어졌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S 조직 팀원들의 리스트를 갖고 있어. 그래서 처리하려고 한 거야.”사실 그녀를 죽이러 갔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연지유의 곁을 따라다니는 사람들은 모두 루드웰의 사람들이었다. 만약 이승하의 신분으로 죽인다면 루드웰의 사람들은 그를 의심하게 될 것이다. 의심을 받게 된다면 루드웰로 가서 배후를 찾기는 더욱 어려워질 것이고 목숨까지 위험해질 수 있는 일이었다. 다행히 방금 뒤쫓아가다가 상대방의 신분을 알아차렸기 망정이지 아니면 연지유 하나 때문에 전반적인 계획이 다 틀어질 뻔했다. 하지만 의문이 들었다. 연지유와 봉태규는 그의 신분을 알면서도 왜 루드웰의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았던 건지? 아니면 루드웰의 사람들이 이미 그의 신분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인지? 그를 함정에 빠뜨릴 준비를 하고 있는 건지? 그러나 루드웰이 설립된 건 S 조직의 우두머리를 상대하기 위해 설립된 것이었다. S 조직의 우두머리가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는 상황에서 왜 그를 가만 두는 건지?아무리 생각해 봐도 연지유와 봉태규는 그의 신원을 밝히지 않은 것 같다. 심지어 연중서에게도 그 사실을 알리지 않은 것 같다.그 큰 비밀을 손에 쥐고 도대체 무슨 수작을 부리고 있는 건지? 서유는 처리를 한다는 말이 그냥 혼내준다는 말로만 이해를 했었다. 사람을 죽일 거라고 서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그래서 리스트는 빼앗아 왔어요?”그가 고개를 가볍게 흔들었다.“연지유 곁에 봉태규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 인간 머리에 리스트가 있어. 봉태규가 죽지 않은 한 리스트는 가져올 수 없을 거야.”봉태규가 누구냐고 묻고 싶었는데 얼굴이 굳어
눈시울이 살짝 붉어진 유나희를 보며 단이수는 애써 웃음을 지었다.“아니요. 지민이만 잘 살고 있으면 됩니다. 방해하지 않겠습니다.”그녀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기어코 다가가는 것은 그녀한테 부담만 줄 뿐이었다. 이렇게 멀리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애써 참고 있는 그를 보며 유나희는 죄책감이 몰려왔다.“미안하네. 내가 자네랑 지민이를 이렇게 만든 것 같아.”그가 담담하게 미소를 지었다.“연석이의 결혼을 허락하신 걸 저희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하겠습니다.”속이 깊은 단이수의 앞에서 그녀는 고개조차 들 수 없었다.“미안하네.”그가 아무 말도 없이 웨딩홀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곧 결혼식이 시작될 테니 많이 바쁘시죠?”그녀와 말을 섞기가 싫었던 건지 급히 얘기를 마무리 짓는 그의 모습에 그녀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는 단 한 번도 그녀한테 싫은 소리를 한 적이 없었다. 그녀가 아무리 욕을 하고 때리고 난리를 쳐도 그는 늘 예의를 지켰다. 예전의 자신이 얼마나 못된 사람이었는지 다시 한번 느꼈다. 그러나 시간은 그녀에게 후회할 기회를 주지 않았고 이미 생긴 상처는 아무리 용서를 빈다고 해도 지워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더 이상 뭐라 하지 않고 뒤돌아서서 이지민을 향해 걸어갔다.“지민아.” 단이수를 도와 이지민을 더 설득해 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에 이지민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자리를 떴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유나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딸아이가 아직도 그녀를 용서하지 않은 것 같다. 한편, 서유를 안고 유람선에 오른 이승하는 다정하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얘네들한테 당부할 일이 좀 있어. 당신 먼저 들어가.”얘네들이란 S 조직의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경호원으로 위장한 채 그의 뒤에 서 있는 사람들.서유는 그들을 힐끔 쳐다보고는 그를 향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들어가서 기다릴게요.”그녀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던 그가 갑자기 눈빛이 싸늘해지면서 S 조직의 팀원들
서유의 사망 소식을 들은 육성재는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결국 그는 그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 서둘러 달려갔고, 모든 이들이 묘지를 떠난 후에도 그녀의 묘비 앞에 남아 머물렀다.“서유 씨...”그는 묘비를 붙잡고 천천히 몸을 낮추어 무릎을 꿇고, 더 이상 젊지 않은 눈으로 그녀의 영정 속 얼굴을 오랫동안 응시했다.“내가 올 줄 몰랐죠?”육성재는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시작했다.“내가 한 사람을 이렇게 오래도록 사랑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어요.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나도 참 정이 깊은 놈이었네요.”영정 사진을 보며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너무 깊이 사랑해서 세상 어떤 여자도 내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됐어요. 그러니 서유 씨, 나도 이승하 못지않게 당신을 사랑했던 거예요, 안 그래요?”그러나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건 묘지의 나뭇가지 사이를 스치는 새들의 울음소리뿐이었다. 새와 짐승들이 떠나고 나니 주변은 그저 고요할 뿐이었다. 마치 지난 수년간 그의 마음속에 묻어둔 사랑처럼, 결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어둠 속에 갇힌 채였다.그토록 짙은 사랑은 세상에 드러낼 수 없었다. 그녀가 떠난 지금에서야 그는 그녀의 묘 앞에 와서 고백했다.그 역시, 깊이 사랑했노라고.모든 사람에게는 후회가 있다. 육성재의 유감은 그녀가 죽기 전까지 자신을 이렇게 바보처럼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었다.하지만 알게 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서유는 이미 떠났는데, 육성재 난 왜 여전히 집착하고 있는 거냐? ’육성재는 그녀의 묘비 앞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그러다 결국 답을 찾지 못한 채 천천히 일어나 발걸음을 돌렸다.그의 삶은 사랑이 아니라 일에 무게를 둔 인생이었다. 그는 생을 바쳐 육씨 집안을 세계 최고의 가문으로 일궈냈다.그는 상업계의 전설 같은 인물로 남았고, 수십 년이 지나도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았던 육성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야기하곤 했다.수도에 있는 송사월은 그녀의 죽음 소식을 제일 마지막으
생이 마감하는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간 것은 그 5년 동안 이승하가 숨겼던 사랑이었다.몇 번이나 뒤척이며 잠에서 깼을 때, 자신의 몸이 단단하고 강인한 두 팔에 꽉 안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게 강하게 끌어안는 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또한 주말에 식사할 때, 식탁 건너편에 앉은 이승하가 가끔 그녀를 몰래 훔쳐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오랜 짝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그리고 그가 모든 일을 마친 후 그녀를 안아 자신의 가슴에 엎드리게 하고,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아이를 달래듯 잠들게 했던 모습 또한 마찬가지였다.이승하의 사랑은 작은 순간순간에 담겨 있었다. 그것이 어떤 모습인지 타인에겐 잘 보이지 않았으나, 이승하 본인만은 아주 알고 있었다. 당시 그녀에 대한 사랑을 얼마나 힘들게 숨겨왔는지...서유의 눈은 이미 뜰 수 없었고, 몸은 영혼이 빠져나간 듯 더 이상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다시 한 번 볼 힘조차 없었다.그녀는 주머니 속 휴대폰을 더듬어 무작정 전화를 걸었고, 다행히 그것을 받은 사람은 정가혜였다.세월이 흐르면서 정가혜도 나이가 들었다. 젊었을 때의 맑은 목소리는 사라지고 약간 쉰 소리가 섞여 있었다.“서유야, 조금만 기다려. 우리 며느리가 출산하면 바로 널 보러 갈게...”삶의 마지막 순간에 친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왜인지 이미 메마르고 고갈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고, 이내 오열로 변해 멈출 수 없었다.“가혜야, 난 승하 씨가 너무 보고 싶어. 그 이를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 부탁할게. 하준이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줘. 엄마가 하준이 결혼식을 볼 수 없게 됐다고...”전화기 너머의 정가혜는 이 말을 듣고 함께 눈물을 쏟아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서유가 그동안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어머니로서 아들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그녀는 이미 이승하를 따라갔을 것이다.얼마 전부터 서유의 몸이
서유의 손가락이 이하준의 머리 뒤로 부드럽게 닿았다. 마치 이미 모든 사실을 받아들인 듯 그녀의 표정은 놀랍도록 평온했다. “언제쯤 결혼할 거니?”이하준의 몸이 경직되었다. 안개처럼 흐릿한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서유를 천천히 놓아주며 말했다. “어머니... 아직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지 못했어요.”아들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서유는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봐봐. 네 엄마는 지금 살아있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단다. 제발 네 아빠를 만나러 가게 해줘. “어릴 적엔 부모님이 그를 속박했지만, 커서는 그가 부모님을 속박했다. 오직 그 속박만이 그를 고아로 만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 번만 더 이기적일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그는 서유의 팔을 붙잡으며 간절히 말했다. “어머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날 거예요. 그러면 결혼하겠습니다, 네?”결국 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서유는 평소와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교회에 가서 너를 위해 기도하고, 네가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길 빌어주마...”서유의 소원을 결코 들어주지 말아달라고 하늘의 신들에게 기도하며, 이하준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평생 어머니의 사랑을 얻기 위해 결코 결혼하지 않기로 했다.그는 이승하가 남겨둔 로봇을 다시 가져와 서유에게 아버지가 남긴 유언이 모두 로봇 프로그램에 담겨 있다고 말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유언의 일부를 들려줄 것이며, 만약 그녀가 아버지가 말하고 싶었던 모든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살아야 한다고 전했다.처음에 서유는 이승하와 똑같이 생긴 로봇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봇이 말을 시작하는 순간, 그녀는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는 서재에 앉아 하루하루 이승하가 녹음했던 로맨틱한 말을 돌려서 들었다.마치 예전에 그가 그녀를 찾지 못했을 때 다른 이의 번호로 하루에 십여 통의 문자를 보내 그녀의 부재를 애도했던 것처럼.이제는 그가 먼저 떠났지만
아들을 위해, 결국 서유는 이승하를 따라 죽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하룻밤 사이 머리가 백발이 되어, 마치 열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모습이 되었다. 예전에는 세월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던 얼굴이 순식간에 주름투성이가 되었고,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그녀의 눈동자도 생기를 잃고 텅 빈 채로 아무 빛깔도 담고 있지 않았다.엄마가 되었으니 이제는 예전처럼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녀는 이승하의 무덤 앞에서 약속했다. 자신을 기다려 달라고.아들이 결혼하면 그때 찾아가겠다고. 만약 자신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다음 생의 약속도 취소할 거라고. 그리고 영원히,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이승하의 장례식에 서유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기운을 내어 비틀거리며 그의 무덤 앞에 섰을 때, 무덤가에서 그녀가 중얼거리던 말들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오직 그녀를 부축하며 아버지의 무덤을 찾은 이하준만이 그 말을 기억했다.눈 덮인 땅에 쓰러져 의식을 잃었던 그날 밤, 서유는 병원으로 옮겨져 일주일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그녀가 없는 동안 이승하의 시신은 얼음관에 안치된 채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일주일을 버텼다. 그녀가 깨어난 후, 그녀는 하얗게 센 머리와 멍한 눈빛으로 그를 단 한 번 보고는 곧바로 돌아섰다.그들이 이승하를 어떻게 묻었는지, 묘지는 어떻게 정했는지, 영정 사진으로 어떤 사진을 선택했는지 서유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차가운 베개를 매만지며 그가 아직 살아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데만 몰두했다.‘만약 당신이 여기 있었다면, 내 하얀 머리를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겠죠.’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당신은 그랬을 거예요.”이승하는 질투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서유가 그 때문에 긴장하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그는 한참 동안 기뻐하며, 그녀 마음에 자신이 있다는 확신을 얻곤 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녀가 그로 인해 속을 끓이고 밤낮으로 잠 못 이루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이
서유는 떨리는 속눈썹을 들어, 삶의 의미를 잃은 듯한 눈으로 멀리 바라보며 말했다.“아니, 난 어디에도 가지 않을 거야. 나와 그 사람, 그냥 여기 있을 거야. 내가 얼어 죽을 때까지, 누구도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어.”그녀가 여기서 얼어 죽겠다는 말을 들은 순간, 주변 사람들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먹먹해졌다. 모두가 그녀를 말리며 무모한 짓을 하지 말라고 설득했지만, 서유는 그 어떤 말도 듣지 않았다. 단호하고도 완강하게, 이승하를 품에 안고 눈 덮인 땅 위에 앉아 그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때 이하준이 서유의 손을 붙잡고, 그녀의 손바닥을 힘껏 눌러 그녀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렸다.“어머니,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알아요. 그래서 지금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드신 것도 이해해요. 하지만 전 이미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어머니까지 잃을 순 없어요. 제발 부탁이에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 주세요...”아들이 귀 옆에서 애절하게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서유는 천천히 시선을 그에게 돌렸다. 아버지와 똑같은 모습으로 빚어진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그녀의 입술 끝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꽃이 피어난 듯한 미소였다.“난 이미 네 아버지가 떠날 준비를 오래전에 마쳤단다. 이제 그이가 정말 떠났으니, 당연히 나도 함께 가야지. 너도 알잖니. 그이가 살면 나도 살고, 그이가 죽으면 나도 죽는 거야. 아무도 이걸 막을 순 없어.”예전에 이하준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는 어머니의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만큼이나 깊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성인식을 맞이한 바로 오늘, 부모님 두 분을 동시에 잃을 수 없었다.눈 덮인 땅 위에서 무릎을 꿇은 채, 그는 천천히 어머니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 서유를 힘껏 끌어안았다.“어머니, 아버지는 제가 결혼하는 것과 자식을 낳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씀하셨어요. 지금 아버지는 그걸 보지 못하고 떠나셨지만, 어머니가 대신 그 순간을 기다려 주시면 안 되나
눈물이 눈가에서 갑작스럽게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가슴을 찢는 통곡이 아니었다. 아무 소리 없이 흘러내릴 뿐, 그녀는 벌어진 입술로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이생에서 이승하에게 해야 할 말은 이미 다 끝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눈을 내리깐 채,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창백한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바보, 당신이 아무리 피를 흘린다 해도 당신은 내 남편이에요. 내가 무섭겠어요? 하나도 안 무서우니까, 왜 굳이 혼자 이런 곳에 온 거예요?”마지막 이별의 말조차 건네지 못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러나 그녀의 이승하는 이런 안타까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모든 걸 숨겼다.만약... 그녀가 그 가짜 이승하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평생 그의 몸조차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눈과 함께 얼어붙어 영원히 설산 아래에 묻혔을 것이다.이승하는 이미 스스로 세상에서 사라질 각오를 했던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따라오지 않게 하려고, 그녀를 속이기 위해 가짜 로봇을 만든 것이다.‘하지만 승하 씨...’‘당신이 아무리 똑같이 생긴 로봇을 만든다 해도, 그건 당신이 아니에요. 당신이 평생 날 속일 수 있다면 난 받아들였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지금 그 거짓말은 단 한 순간도 버티지 못했잖아요.’‘당신은 내가 당신을 찾으러 올 것을 허락하지 않았겠죠. 그렇지 않았다면 가짜 로봇을 만들어 내게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을 거고, 피를 흘리는 고통을 혼자 감당하며 이런 깊은 산속에서 눈과 마른나무를 친구 삼아 떠나지도 않았겠죠.’그녀의 이승하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었고, 동시에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비록 마지막 순간에 그의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매우 안타깝지만, 그의 사랑 덕분에 서유는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와 함께 죽는다면 그것은 한평생의 약속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이제 먼저 떠난 이승하가 황천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까?서유는 알 수
마치 무언가 예감이라도 한 듯, 이하준이 떨리는 손으로 이승하의 손을 움켜쥐던 순간, 서유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마치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풀어 헤친 채 네발로 기어 이하준에게 달려갔다.그녀는 여전히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다만 그 단호한 시선은 이승하의 얼어붙고 하얗게 질린 손에 닿자마자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깐 채,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이승하를 덮은 눈을 미친 듯이 파헤쳤다.깊은 산속의 눈은 산 아래보다 훨씬 더 두꺼웠다. 끝없이 쌓인 층층의 눈 속에서 서유는 온 힘을 다해 이승하를 파내던 순간, 그의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흐르는 피가 일곱 군데에서 새어 나와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은 더 이상 어떠한 온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하준은 아버지의 침묵하는 모습을 목격하자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두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은 그는 마음속 어딘가가 찢어지듯 끊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마치 거대한 나무가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듯, 그의 세계는 단숨에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하준아.”서유의 고요한 목소리가 귀를 스쳤다.“도와줘.”이하준은 어머니의 충혈된 눈을 바라보며 그녀의 부탁에 정신을 차렸다. 서유의 눈빛에는 슬픔도, 고통도 없었다. 오직 이승하의 죽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단호함만이 담겨 있었다.그녀는 얼어붙은 이승하의 손과 얼굴을 붙들고 자신의 체온으로 그를 녹이려는 듯 필사적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이하준도 어머니를 따라 아버지의 발을 감싸 쥐었다. 그는 얼어붙은 신발을 벗기고 자신의 배 위로 올린 뒤, 손바닥으로 아버지의 다리를 위아래로 문지르기 시작했다.서유는 이승하의 얼굴에 덮인 얼음을 녹이며, 그가 살아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지친 손으로 그의 얼굴을 계속 문지르며 이렇게 말했다.“여보, 당신이 나더러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나 정말 잘 기다렸는데, 왜 약속을 안 지키고 돌아오지 않은 거예요?”“지금이라도 눈을
눈밭을 헤매며 이승하를 찾고 있던 서유는 갑자기 발길을 멈췄다. 마치 영혼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멍하니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눈앞에는 오직 그녀 자신뿐, 영혼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그녀는 그 자리에 굳어 서서 한참을 있다가 손을 들어 가슴에 얹었다. 심장이 세 번 뛰고 난 뒤, 가슴 깊은 곳에서 찢어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마치 무엇인가를 잃어버릴 것만 같은 아픔이었다. 몸을 굽히며 고통을 참고자 했지만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직감적으로 그녀는 이승하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느꼈다. 이를 악물고 계속 그를 찾으려던 그 순간, 눈 위로 아름다운 자태를 가진 한 사람이 붉은 리치 한 송이를 손에 들고 걸어왔다.“여보, 내가 기다리라고 했잖아. 왜 여기까지 와 있는 거야?”눈앞에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이승하를 보자, 긴장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던 서유는 한순간 안도감을 느꼈다. 역시 그가 곁에 있으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 같았다.서유는 들고 있던 우산을 내던지고 마치 숲속의 토끼처럼 기쁨에 차 달려가 이승하의 품에 안겼다.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익숙한 향기에, 서유는 깊게 숨을 내쉬며 안심했다.“당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정말 당신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얼마나 무서웠는데요!”이승하는 긴 손가락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언제나 그랬듯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손길이었다.“내가 말했잖아. 항상 네 곁에 있을 거라고.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거라고. 나한테 쉽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그의 품 안에 꼭 안긴 서유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더욱 꽉 껴안았다. 하지만 갑자기 무언가가 손에 닿자, 서유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리고는 이승하를 밀쳐내며 소리쳤다.“당신... 당신은 내 승하 씨가 아니야!”이승하는 요즘 들어 많이 수척해졌고, 허리를 감쌀 때 손가락이 다른 손가락에 닿을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이승하는 예전처럼 건장한 체격을 유지하고 있었다.“당신
시린 눈보라 속에 홀로 서 있는 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겨우 남은 힘으로 긴 손가락을 들어 흔드는 그를 보며, 이연석은 애써 마음을 다잡고 이를 악물며 재빨리 눈 덮인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형! 내가 먼저 의사를 부르고, 로봇을 산으로 올려보낼게. 그러고 나서 바로 돌아올 테니까 그 자리에서 꼭 기다려. 금방 올게!”밤길은 험난했지만, 사방으로 쏟아지는 눈은 길을 환히 비춰주어 이연석은 마치 대낮처럼 보이는 길 위를 달렸다. 하지만 급한 걸음은 때때로 방향을 잃고, 몇 차례나 눈밭에 무릎을 꿇으며 휘청거렸다.멀어져가는 이연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승하는 느려지는 심장 박동을 가슴으로 느끼며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생명의 문이 서서히 닫혀가는 고통을 묵묵히 받아들였다.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서유가 그의 흔적을 찾으며 이름을 부르자, 이승하는 무성한 나무 사이에서 고개를 돌려 눈 덮인 길 위에서 우산을 쓰고 걷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단 한 번의 시선, 그로 인해 시간이 멈추고 만 년의 세월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처음 그녀를 만났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 같았지만, 이제는 햇빛도 사라지고 눈보라만이 세상을 덮고 있었다.“승하 씨!”서유는 잠시 기다리다 이상함을 느끼고 별장 맞은편에 있는 집의 문을 열어보았다. 예상대로 이승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아 헤맸다.이승하는 대답하고 싶었다. ‘나 여기 있어.’ 그러나 온몸의 피가 쏟아지는 그는 예전처럼 힘찬 목소리로 외칠 수 없었다.그는 겨우 뜨고 있는 흐려진 눈으로 고개를 돌려 한 걸음씩 깊은 산 속으로 걸어갔다.그곳은 숲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고 하얀 눈이 밤하늘을 밝혔어도 사람의 움직임을 알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그가 누울 만한 최적의 장소였다.이승하는 생각했다. 얼음과 눈이 몸을 얼려버리면 야수가 지나가더라도 그의 썩은 살을 물어뜯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설산 아래에 묻히면 그의 외모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