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하린을 바라보며 정가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는 길게 드리운 속눈썹을 내려뜨고 손에 들린 녹음기를 멍하니 바라봤다. 사람들은 모두 이연석이 정가혜를 사랑한다고 했다. 배하린조차 그렇게 말하니, 그 말은 사실일 것이다. 정가혜 역시 이연석이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의심이 남아있었다. “그날 밤 두 사람 정말 잤던 거예요?”정가혜에게는 유나희가 아들을 위해 무슨 일을 했든 상관없었다. 그녀가 신경 쓰는 것은 오직 이연석뿐이었다. 배하린은 그 말을 듣자 비웃음을 참지 못했다. “가혜 씨, 아직도 연석이한테 희망을 걸고 있는 거예요?”“네.” 정가혜도 함께 미소를 지었다. 따스한 햇살이 그녀의 얼굴을 비추며 더욱 밝게 빛나고 있었다. “난 이 모든 것이 그저 거짓이었으면 해요. 그러니까...”정가혜는 잠시 말을 멈추고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당신이 방금처럼 다시 한 번 합리적인 설명을 해줄 수 있을까요?”정가혜가 그 말을 할 때 그녀의 눈은 이미 붉어져 있었다. 그녀가 지금 얼마나 힘들어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만약 배하린이 착한 사람이었다면 정가혜를 동정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배하린은 어릴 때부터 부모에게 아첨하며 살았던, 돈만 쫓는 여성이었다. 그녀 같은 사람은 동정심이란 게 없다. 오로지 자신이 얻지 못하는 것은 파괴하려는 욕망만 있을 뿐이다. 무엇이든 대가를 치르더라도 말이다.“가혜 씨, 한번 생각해봐요. 술에 취한 남자와 그를 깊이 사랑하는 여자가 같은 방에 오래 있었다면 무슨 일을 했겠어요?”정가혜의 얼굴은 햇빛을 받고 있었지만 점점 창백해져 갔고 녹음기를 쥐는 힘도 점점 강해졌다. “연석이는 절대 한 여자에게만 충실하지 않을 거예요. 아마...”“앞으로 나에게만 충실하겠다고 했어요.” 정가혜는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배하린은 입 꼬리를 올리며 비웃음을 터뜨렸다. “그래요? 그렇게 믿고 싶은 거죠?”그녀는 마치 우스꽝스러운 농담이라도 들은 것
정가혜는 자신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의사에게 다시 한번 검사를 요청했지만 결과는 여전히 충격적이었다. 병상에 앉아 보고서를 몇 번이고 확인하던 정가혜는 결국 자신이 임신했다는 현실을 천천히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날 밤, 피임 조치를 하지 않았고 다음 날 아침에는 서유에게 들키고 말았다. 그리고 곧바로 유나희에게 불려갔다. 이연석과 배하린을 만나고 홧김에 밤새 M국으로 송사월을 찾아온 뒤 72시간이 지나도록 긴급 피임약을 먹지 않았으니, 임신하지 않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 아이가 찾아온 시기는 너무나도 부적절했다. 정가혜가 불안한 표정으로 침울하게 앉아 있는 모습을 보며 병상 앞에 앉아 있던 송사월도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누나, 이연석 씨의 아이죠?”송사월의 직설적인 질문에 정가혜는 난처해했지만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왜 그렇게 기뻐하지 않는 거예요?” 이연석의 청혼을 받아들일 준비를 다 마친 것처럼 보였는데, 왜 이렇게 불안해 보이는 걸까? 정가혜는 손을 들어 자신의 아랫배를 어루만졌다. 아직은 생명의 기운을 느낄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는 무겁게 느껴졌다. “나도 모르겠어...” 정가혜는 송사월을 바라보며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아마도 임신 때문에 너무 예민해진 것 같아.” 정가혜는 눈물을 닦고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사월아, 너는 먼저 돌아가. 나는 여기서 조금 더 생각을 정리한 후에 갈게, 응?” 송사월은 정가혜를 가만히 응시했다. 임신 때문에 예민해진 것인지, 아니면 감정적으로 너무 힘든 것인지, 정가혜는 무언가 많은 것을 혼자 짊어지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랐고 스스로 감당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송사월은 이런 상황을 많이 겪어봤기에 그녀의 고통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그래서 더 이상 말 없이 그녀의 눈물을 손수건으로 닦아주었다. “그래요. 누나 울지 마요.” 송사월의
정가혜는 서둘러 A시로 돌아왔지만 공항에서 이연석이 화려한 외모와 훤칠한 몸매를 가진 여인에게 꽃다발을 건네는 장면을 목격하고 말았다. 그녀의 발걸음은 천천히 멈춰섰다. 사람들이 북적이는 공항의 도착 게이트가 정가혜의 시야에서는 희미해져 갔고 남은 것은 그들 셋뿐이었다. 그녀는 그 여자가 꽃다발을 받은 후 갑자기 발끝을 세우고 이연석의 뺨에 키스를 한 뒤, 입을 가리며 급히 달아나는 모습을 보았다. 이연석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이내 발길을 돌려 빠르게 떠났다. 그들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정가혜의 세상은 온통 어둠에 잠겼다. 결국 배하린이 없더라도 이연석 곁에는 언제든 다른 여자가 있을 것이었다는 걸 그녀는 깨달았다. 그들이 가로막고 있는 것은 단순히 배하린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가 결코 줄 수 없는 ‘안정감’이었고, 정가혜가 주고 싶어도 번번이 깨져버리는 ‘신뢰감’이었다. 정가혜는 자신이 아이에게 주고 싶은 가정이 아빠는 한결같은 사랑을 주고 엄마는 그를 믿어주는 그런 집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그와 자신 둘 다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집에 도착한 정가혜는 멍하니 앉아 있다가 결국 전화기를 들어 이전에 알게 된 산부인과 의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노현정이 우유를 가져오던 중, 정가혜가 낙태 수술을 예약하려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놀라 손이 떨렸다. 트레이에 올려진 우유가 거의 쏟아질 뻔했다. 전화를 끊은 정가혜는 노현정이 그 사실을 들었다는 걸 알고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주머니,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지 말아 주세요...” 노현정은 혼란스러웠다. “가혜야, 아이를 가졌는데 왜 낙태를 하려고 해?” 정가혜는 대답하지 않고 이불을 들어올리며 침대에 누웠다. 몸과 마음의 피로가 그녀를 지치게 만들었다. 노현정은 많은 의문이 있었지만 지친 그녀를 보고는 입을 다물고 방을 나갔다. 그 시각 이연석은 공항에서 정가혜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정가혜가 나오지 않자 급히 노현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술실 안은 금세 냉랭한 기운을 풍기는 이연석과 수술대에 누운 정가혜, 두 사람만 남았다. “왜?” 옆에 서 있던 남자는 불필요한 말은 하지 않고 그저 단 한 마디만 물었다. 정가혜는 수술실 밖에 서 있는 노현정을 잠시 보다가 다시금 분노로 가득 찬 이연석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냥요.” 이연석이 찾아온 이상, 수술을 할 수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정가혜는 조용히 수술대에서 일어나려고 했지만 그의 강한 손에 손목이 붙잡혔다. 그의 힘은 너무나 강해 손가락이 깊숙이 피부에 파고들었고 정가혜는 고통으로 얼굴이 하얗게 질렸지만 이를 악물고 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 그녀가 소리도 없이, 그를 보지도 않는 모습에 이연석은 갑자기 분노가 치밀었다. “이게 나한테 주는 답인가?” 귀국한 후 대답을 주겠다고 약속했으나 그녀의 대답은 그의 아이를 몰래 낙태하려는 것이었다. 노현정에게서 전화를 받은 그 순간, 정가혜와의 결혼을 기대하던 이연석의 마음은 한순간에 차가워졌다. 그는 그토록 노력하며 그녀를 쫓았지만 정가혜의 계속된 거절 앞에서 그의 모든 것이 산처럼 무너져내렸다. “가혜 씨, 이유를 말해줘요. 대답을 듣고 나면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을 거니까.” 그는 지쳤고 충분히 힘들었다. 그러나 죽더라도 그 이유는 분명히 알아야만 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정가혜는 천천히 속눈썹을 들어 절망으로 가득 찬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들 사이에는 분명 끝을 내야 할 무언가가 있었다. 그 끝을 위해서는 말을 분명히 해야 했다. “나는 당신이 배하린 씨과 아무 일도 없었다는 걸 믿을 수가 없어요.” 그녀의 말을 듣고 이연석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이미 충분히 설명했어요. 그건 배하린이 꾸며낸 속임수라고. 그런데도 왜 믿지 않는 거예요? 왜?” “배하린 씨가 나중에 다시 녹음기를 주었어요. 배하린 씨의 설명은 단지 당신 어머니가 거짓말을 강요한 것일 뿐이었어요.” 이연석은 잠시 멍해졌다. 의심이 들었지만 그는
“믿어줘요. 배하린이든, 안희연이든, 고현서든, 아니면 다른 어떤 여자든, 나는 그 사람들과 완전히 끝났어요. 앞으로는 절대 그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이연석은 앞으로 다른 여자가 자신을 쫓아다니더라도 철저히 피할 거라고 다짐했다. 필요하다면 외출할 때 가면을 쓸 정도로 신경 쓸 각오였다. 하지만 그의 진지한 설명과 확신 가득한 말에도 불구하고 정가혜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난 여전히 당신을 믿지 않아요.” 그녀는 이연석과의 신뢰를 쌓아가는 과정에서 항상 그를 둘러싼 여자들 때문에 좌절했다. 지금의 그녀는 그의 약속만 들었을 뿐, 그 약속이 진정한 안전감을 주지는 못했다. 그를 믿기 어려웠고 또다시 믿음을 선택한 후 반복되는 실망의 고통을 겪고 싶지 않았다. 정가혜의 믿지 않는다는 한 마디에 멍하니 서 있던 이연석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차갑게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 아이를 정말로 지울 거예요?” 정가혜는 눈을 내리깔고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침묵은 이연석의 눈에 동의로 비쳤다. “정가혜, 당신 심장 좀 열어보고 싶어. 도대체 그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확인해 보고 싶어.” 오해가 풀렸음에도 그녀는 여전히 냉정했다. 그건 그녀가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닫자 이연석은 숨을 쉴 때조차 고통스러웠다. 그렇게 심장을 죄어오는 고통에 이연석은 천천히 정가혜를 놓아주었다. “당신이 원한다면 아이를 지워. 하지만 난 죽더라도 다시는 당신을 보러 오지 않을 거야.” 그는 말을 마치고 한 걸음 물러섰다. 붉어진 눈으로 정가혜를 한 번 더 깊이 바라본 후 수술실을 떠났다. 그가 사라지자 정가혜는 수술대 옆을 붙잡고 천천히 주저앉았다. 병실 밖에서 이연석이 분노에 찬 채 떠나는 모습을 본 노현정은 급히 문을 열고 들어왔다. “가혜야.” 노현정은 정가혜의 곁에 무릎을 꿇고 손을 그녀의 어깨에 올렸다. “생명은 소중한 거야. 연석 씨와의 갈등 때문에 아이를
정가혜는 깜짝 놀라 그를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보았다.“이건 강요예요.”“맞아요.”이연석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내가 강요하고 있어요. 뭐 어때서요?”그의 뻔뻔한 태도에 정가혜는 말문이 막혔다.그녀는 이 무례한 인간을 지나쳐 가려 했지만 그에게 붙잡혀 다시 끌려왔다.“내가 당신 방을 뒤지는 걸 보고 싶지 않다면 얌전히 내놔요.”정가혜는 이 말을 듣고 눈살을 찌푸렸다.“저는 고아라 그런 거 없어요.”“거짓말하지 마요. 전에 집에서 본 적 있는데.”성인이 되고 나서 이미 필요한 서류들을 만든 정가혜는 이 말을 듣고 더욱 깊게 눈살을 찌푸렸다.“그 서류들을 줘도 내가 동의하지 않으면 혼인신고를 받아주지 않을 거예요.”“그래서...”이연석은 그녀의 어깨를 잡고 몸을 숙여 그녀를 바라보았다.“부탁이에요.”이 다섯 글자가 정가혜의 마음에 닿자 마치 무언가에 맞은 것처럼 조금 아팠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눈앞의 잘생긴 얼굴과 기억 속의 눈매가 천천히 겹쳐졌다.이 순간, 그녀는 자신이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깊이 느낄 수 있었다. 아마도 50%였던 사랑이 어느새 70%로 올라가 있었을 것이다.사랑이 100%에 도달하면 평생 이연석을 잊기 힘들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렇게 정신이 또렷한 상태에서 그를 다시 한 번 선택해야 할까?“됐어요, 부탁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나.”그녀의 대답이 없자 이연석은 갑자기 그녀의 어깨를 놓고 화장대로 걸어가 서랍을 열고 익숙한 듯이 서류들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정가혜는 필요한 서류들을 찾는 이연석의 큰 뒷모습을 바라보며 복잡한 감정이 밀려왔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그를 선택한다면 그의 주변에 끊임없이 나타나는 여자들 그가 마음이 있는 사람이든 아니든 모두 참아내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그가 정말로 여성들과의 교류를 끊지 않는 한, 하지만 이연석은 이승하와는 달랐다. 그는 여성들과 거리를 두는 것, 이른바 경계선을 유지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것 같
정가혜는 마치 무언가를 결심한 듯 몸을 돌려 책상으로 걸어갔다. 서랍을 열어 필요한 서류들을 꺼내 이연석에게 건넸다.“한 번 더 당신을 믿겠어요. 하지만 결과적으로 또 실망하게 된다면 우리가 서명한 계약대로 곧바로 떠날 거예요.”이연석은 고개를 숙여 서류를 보고, 다시 단호한 표정의 정가혜를 바라보았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류를 받아들고는 그녀의 손을 잡고 바로 구청으로 향했다.차가 구청 앞에 멈췄을 때, 이연석은 문을 열지 않고 그대로 앉아 앞을 응시했다.“왜요? 후회돼요?”정가혜는 그가 일시적인 충동으로 그랬다가 이제 와서 후회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또 그를 잘못 믿었다고 생각하던 찰나, 그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 진지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앞으로 당신의 믿음을 얻도록 하겠어요.”그가 여성들과 적절한 거리를 두지 않았기에 그녀가 오해한 것이었다.만약 그가 형처럼 불순한 의도를 가진 여자들을 단호하게 잘라낼 수 있었다면 정가혜는 이렇게 불안해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는 예전에 너무 자유분방하게 살아와서 이런 것들을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지만 오늘부터는 정가혜에게 충분한 안정감을 줄 것이다.그가 안정감을 충분히 준다면 정가혜도 그를 신뢰하게 될 것이라고, 그는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었다.이것은 이연석이 약속한 이래 정가혜에게 가장 안정감을 주는 말이었고 불안하게 요동치던 그녀의 마음도 이 말에 서서히 가라앉았다.이연석은 정가혜를 이끌고 구청으로 갔다. 절차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서류 작성, 혼인 검진, 도장 찍기... 얼마 지나지 않아 혼인 증명서를 받아들었다...그걸 손에 쥐자 이연석의 눈이 점점 붉어졌다.과정이 아무리 힘들었어도 그는 마침내 자신이 원하던 여자와 결혼했다.증명서를 받아든 채 멍하니 있는 이연석을 바라보며 정가혜도 눈을 내렸다.5년 동안 얽히고설켰던 관계, 정신을 차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어리둥절한 채로 시집을 갔다.바로 직전까지 다투고 있었는데 다음 순간 증명서를 받았다니, 터무니없
이연석은 집사에게 주 침실 옆 옷방을 정가혜를 위해 비우라고 지시한 후 거실에 서 있는 정가혜의 어색한 모습을 보았다.그녀가 예전에 자신이 여기서 묵지 못하게 했던 일을 떠올리고 있다고 생각한 이연석은 서둘러 계단을 내려와 그녀 앞으로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이제부터 여기가 가혜 씨 집이니까 원하는 대로 해요.”말을 마친 그는 고개를 숙여 정가혜의 배를 바라보았다.“시간이 늦었어요. 쉬어야 해요.”임산부는 늦게까지 깨어 있으면 아이에게 좋지 않다는 뜻이었다.이연석이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는 걸 깨달은 정가혜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다만, 샤워를 마치고 나면 이연석과 같은 방에서 자야 하는 건지 걱정이 되었다.전에 같이 자본 적이 없는 건 아니지만 여전히 어색했고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다.이런 불안한 마음을 안고 샤워를 마치고 머리를 말린 후 나오니 이연석이 이미 침대에 앉아 있었다.그는 비단 잠옷 차림으로 상체를 침대 머리에 기대고 무릎 위에 노트북을 올려놓은 채 긴 손가락으로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그녀가 나오는 걸 보자 이연석은 타자를 치던 손을 멈추고 옆자리를 가볍게 두드렸다.“이리 와요.”정가혜는 말없이 다가가 이불을 들추고 침대 가장자리에 누웠다.아마도 이렇게 갑작스럽게 결혼한 게 어이없고 어색해서였을 것이다...그녀는 누운 후 창가 쪽을 향해 빠르게 옆으로 누워 그를 쳐다볼 용기조차 내지 못했다.이불 속에 웅크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연석은 저도 모르게 입 꼬리를 올렸다.그는 잠시 정가혜를 바라보다가 노트북을 치우고 불을 끄고 누웠다...정가혜는 각자 따로 잘 거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허리에 무게가 느껴지더니 큰 손이 얹혀졌다.이어서 등이 남자의 단단한 가슴에 닿았고 얇은 잠옷 사이로 전해지는 따뜻한 감촉에 정가혜의 피부가 화끈거렸다.더 큰일은 이연석의 턱이 그녀의 뒤통수에 닿았고 익숙한 향기가 귓가에서 천천히 밀려왔다는 것이다.그의 심장이 쿵쾅거렸고 정가혜도 마찬가지였다. 이불을 잡은 손도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