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말고 다의 모든 챕터: 챕터 411 - 챕터 420

549 챕터

제411화

서재는 조용했고 서준혁의 싶은 눈동자는 더욱 차가워졌다. 그의 시선은 다시 천천히 검사 보고서 위에 떨어졌고 신유리라는 세 글자는 분명했다.방을 나설 때 하정숙은 컵을 들고 거실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가격이 만만치 않은 실크 잠옷을 몸에 걸친 채 귀부인의 기세가 넘쳤다. 하정숙은 서준혁을 힐끗 보더니 입꼬리를 치켜올리며 가볍게 비웃었다.그녀는 담담하게 서준혁을 부르더니 천천히 컵을 내려놓으며 유유하게 말했다. “어디 가?”서준혁은 발걸음을 멈추고 하정숙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평소 이런 질문을 하지 않았다. 마치 모자 관계는 뼛속에 흐르는 피만 남은 듯했다. 서준혁이 뒤를 돌아보자 하정숙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기분이 꽤 좋은 것 같았다.“검사 결과는 봤어? 너도 많이 놀랐나 보네.”“그녀를 이 집에 들이는 것을 반대한 게 다행이네. 기형아를 임신했다니, 어쩌면 그녀한테 질병이 있을지도 모르잖아.”하정숙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서준혁은 어두운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다. 깊은 바다처럼 어두운 눈빛은 주위 사람을 침몰시킬 것 같았다. 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하정숙을 보더니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뭐가 그렇게 기쁘죠?”하정숙은 얼굴의 웃음이 서서히 굳어졌다....신유리는 입맛이 별로 없었지만 이신이 추천해 준 의사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눈 후 많이 안정되었다. 그녀의 표정이 조금 느슨해진 것을 보고 곡연이 다가와 물었다. “오늘 밤 날씨도 좋은데 산책할래요? 신선한 공기도 마시고.”신유리는 곡연이 자신을 위로하려는 것임을 알아채고 고개를 끄덕이며 함께 나갔다. 바깥의 공기는 여전히 차가웠고 신유리는 외투를 잡아당겼다. “아중이가 돌아오면 함께 절에 가려고 했는데 지금 보니 내일 가는 게 좋겠어요. 자두가 평안하고 건강하기를 기도할게요.”신유리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잠시 멈칫하더니 그제야 곡연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차리고 물었다. “아중이한테 무슨 일 있어?”곡연은 멈칫하더니 이내 화가 난 듯 말했다. “아중이와 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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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12화

신유리는 미간을 찌푸린 채 이상함을 느껴 걸어가던 간호사를 잡고 물었다.“혹시 여기가 검사실로 가는 길인가요?”간호사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고 마스크까지 쓰고 있어서 답답했다. 그녀는 옆의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접수해줄게요. 앉아서 기다리다가 순서가 되면 들어가세요.”그녀는 말을 마치고 곧바로 접수처로 향했다. 신유리는 속으로 이상함을 느꼈지만 젊은 여인들이 몇 명 앉아 있었고 그중 한 명은 임신한 게 분명했다.신유리는 멈칫하더니 가서 앉았다. 순간 누군가 조용히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왔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보니 젊은 여인은 얼굴이 초췌해서 혼자 중얼거렸다.“아가야, 엄마가 미안해...”신유리는 어리둥절했지만 이내 임신한 여인 한숨을 내뱉었다.마치 우울한 분위기를 견디기 힘든 듯 신유리에게 말 걸었다.“젊은 분이 웬일이에요?”신유리는 그녀의 말투에서 아쉬워하는 것을 눈치채고 하려던 말을 되레 삼켜버렸다. 마침 접수처에서 신유리를 호출했다.신유리는 고개를 돌려 탄식하는 그녀와 옆에서 흐느끼는 여인을 번갈아 바라보며 온몸에 기어오르는 공포감을 애써 억누르며 물었다.“여기가 양수천자를 하는 곳인가요?”신유리는 어떻게 나왔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수술실 전체 층은 폐쇄되어 있었고 한 점의 빛도 들어오지 않았다.다른 사람도 없었고 복도 전체에 그녀의 발자국 소리만 울려 퍼졌다.엘리베이터를 지나던 중 마침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여인을 보았다. 그녀는 얼굴에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새하얀 이불을 덮고 있었다.신유리는 갑자기 숨이 막히더니 감히 엘리베이터에 들어가지도 못했다.그 순간 병상에 누워 있는 두 여인을 볼 것만 같았다.신유리는 여기저기 계단을 찾아다니며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마침내 신유리는 병원 밖으로 나왔고 그제야 비로소 자신의 목을 조르던 무형의 손이 풀린 것 같았다.차갑던 몸은 햇빛 아래서 드디어 온도를 되찾았다.신유리는 안색이 어둡다 못해 투명에 가까운 흰색을 띨 정도였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병원 건물을 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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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13화

신유리는 어안이 벙벙한 채로 별장으로 돌아왔고 여전히 병원 특유의 소독수냄새와 환경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가 않았다.[속이 메슥거려서 토하고 싶어...][무서워...]여러 가지 감정들이 뒤섞여지는 바람에 신유리는 가슴이 꽉 막히는 것처럼 호흡조차 제대로 못했다.주치의 밑에서 일하는 간호사가 서준혁에게 등기부를 가져다주었고 서준혁은 무언가 적힌 두 글자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글자를 검은 물감으로 덮어버렸다.이윽고 들려오는 어린 아이의 울음소리와 여자의 울먹이는 소리.신유리는 숨이 막혀오는 와중에 서서히 정신을 차렸고 창밖의 불빛은 여전히 밝았다.그녀의 머릿속은 텅 빈지 오래였고 신유리는 조용히 침대 맡에 앉아 시계를 확인하고는 그제야 오후 4시가 넘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이신이 신유리를 데리고 도착했을 시간은 점심시간쯤이었는데 마음이 복잡하던 신유리는 올라오자마자 바로 잠에 들어버렸다.신유리는 아픈 머리를 꾹꾹 눌러대며 몸을 일으켜 아래로 내려가려고 했다.하지만 예상외로 아래에는 곡연과 다른 사람들이 다 도착해있었고 바쁜 임아중과 연우진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그녀가 내려오는 발걸음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일제히 고개를 들어 신유리를 쳐다보았고 임아중은 그녀를 슥 훑어보더니 안쓰러워 죽겠다는 눈빛으로 말을 꺼냈다.“무슨 일이야? 명절까지 보낸 애가 왜 더 야위었어?”사실 임아중의 몸무게도 전보다 훨씬 줄었고 다크써클도 눈 밑까지 내려와 있었는데 그녀의 컨디션도 그다지 좋은 상태가 아닌 것 같았다.하지만 임아중은 자신의 상태는 잊은 듯 신유리를 더 관심해주고 챙겨주었다.“유리야.”연우진은 자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어디 불편한곳은 없어? 이신 씨가 너 오전에 기분이 좀 안 좋아 보인다고 하더라.”신유리에게 문제가 생긴 일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고 있었지만 오전에 이신이 신유리를 데리고 왔을 때 두 사람의 안색은 전부 다 어두웠기에 누구도 먼저 쉽사리 묻지를 못했다.신유리는 연우진의 말에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도 떠오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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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14화

서창범은 비서와 함께 카페를 나섰고 신유리는 여전히 앞에 놓인 두 종이를 보고 있었다.그녀는 한참간이나 멍하니 보고만 있다 눈을 질끈 감았는데 아까보다 호흡이 더 거칠어졌다.얼마나 지났을까, 신유리는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고는 계약서 복사본을 내려다보았다.서창범이 말한 것대로 이 계약서에는 문제와 허점들이 많아 화인에서 고소를 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그녀를 재판장까지 세울 수 있었다.서류에 적힌 글씨도 분명 신유리가 직접 쓴 사인이었다.하지만 이 계약서는 분명-신유리는 가슴에 솜이 가득 찬 것처럼 답답하고 숨이 막혀 불편해졌고 그러는 바람에 몸을 일으키는 것조차 힘들어졌다.그러는 와중 임아중에게서 걸려온 전화 한 통 덕분에 신유리는 정신을 겨우 차렸다.“끝났어? 내가 지금 데리러 갈게, 우리 먼저 밥이나 먹고 검사하러 가자.”임아중은 해맑은 목소리로 말을 했다.신유리는 상위에 놓인 서류들을 보며 어찌 해야 할지를 몰라 임아중의 말에도 고개를 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한참 뒤, 임아중이 자신의 행동을 보지 못한다는 생각이 문득 든 신유리는 잔뜩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아니, 나 별로 가고 싶지 않아졌어.”“왜? 갑자기 왜 가고 싶지 않아? 유리야, 너 무슨 일 있어? 그 서창범인지 뭔지하는 사람이...”임아중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신유리는 바로 말을 잘라버리며 대답하고는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미안, 내가 지금 일이 좀 있어서.”같은 시각, 화인의 어느 한 사무실.이석민은 우서진을 데리고 들어왔고 그는 전에 건방져 보이는 모습과는 달리 사뭇 진지한 모습으로 자료 하나를 손에 들고 있었다.우서진은 그 자료를 바로 서준혁의 앞에 툭 내려놓으며 말을 했다.“네가 알아서 봐, 나는 쓸데없는 말 안할게.”사인을 하던 서준혁의 손이 뚝 멈추더니 고개를 들어 그가 건넨 자료를 보았다.서준혁은 아주 평온하고 담담한 모습이었고 얼굴에도 전혀 파동이 느껴지지 않았다.우서진은 한참간이나 기다렸지만 서준혁이 먼저 말을 하자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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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15화

서창범은 그의 말에 눈빛이 흔들리는가 싶더니 서준혁을 쭉 훑어보았다.서준혁의 하얗고 깨끗한 피부는 머리위에 있는 조명 덕분에 평소보다 더 차갑게 보였다.그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서창범을 쳐다보며 말을 이어갔다.“만족하셨다면 그 더러운 수작 이제 그만 하시죠.”서창범이 서준혁의 말에 대답하려고 입을 움찔거렸을 때, 서준혁은 이미 몸을 돌려 떠나버린 뒤였다.하정숙의 옆을 스쳐지나가던 서준혁은 그녀를 힐끔 쳐다보고는 아무 말 없이 가던 길을 갔고 그 순간, 뒤에서 서창범의 고함소리가 울렸다.“너 지금 이게 무슨 태도냐!”하정숙은 그의 말에 피식 웃음을 터뜨리더니 서창범에게 대답했다.“쟤가 무슨 태도인지는 모르겠지만 당신도 참 못난 어른이네요, 혼자 가서 자기 아들보다 어린 여자애한테 협박이나 하고... 안 쪽팔려요?”그녀의 말에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오른 서창범이 되물었다.“네가 뭘 안다고 지껄여?”“그래요! 나 아무것도 몰라요. 근데 그래도 당신보다는 나은 사람이에요! 준혁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이게 다 당신한테서 배운 거잖아요,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지.”집안에서 두 사람이 다투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고 그 소리가 듣기가 싫었던 서준혁은 밖으로 나와 옆에 세워져있던 차에 기대섰다.담배를 피우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던 서준혁이지만 답답한 마음을 조금 달래고자 오래간만에 담배를 손에 들었다.진한 니코틴의 향기와 자욱한 연기가 피어오르자 서준혁의 마음은 약간 뚫리는 듯 했고 연기는 그의 눈빛에 묻어있던 냉랭함을 조금이나마 덮어주는 것 같았다.신유리는 임아중의 손에 이끌려 병원으로 향해 검사를 받았는데 그녀 또한 신유리가 병원 관계자에 의해 낙태실로 끌려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임아중은 진지한 표정을 하고 신유리에게 조심스레 물었다.“너 그 검사결과가 누군가에 의해 조작된게 아니라는 확신은 있어?”신유리는 그녀의 말에 순간 눈이 동그래지더니 오랫동안 풀리지 않던 답을 얻은 것 마냥 그대로 굳어버렸다.요 며칠 온통 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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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16화

주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신유리 뒤에서는 누군가의 무거운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신유리는 원래 몸을 돌려 확인하기가 싫었지만 공기 속에 은은히 섞여있는 익숙한 향기에 임신 중이던 신유리는 후각이 예민해져 반응을 할 수밖에 없었다.그런 그녀의 앞에 누군가의 그림자가 드리워졌고 서준혁은 신유리를 무뚝뚝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아까 금방 신유리 씨에게 제가 오늘 약혼 할 때 필요한 물건을 사러 왔다고 알려줬어요.”주현은 애교를 부리듯이 서준혁에게 말을 했고 그녀의 목소리에 서준혁은 하던 생각을 멈췄다.그는 그제야 고개를 돌려 주현을 바라보며 냉정한 말투로 대답했다.“다 샀으면 이석민 씨보고 데려다 주라고 하겠습니다, 제가 회사에 남은 업무가 좀 있어서...”서준혁의 말에 일제히 그의 뒤를 확인한 사람들은 그의 뒤에 이석민이 업무용 가방을 들고 서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주현은 서준혁의 대답에 표정이 굳어지더니 무언가 참는 것처럼 이빨을 꽉 깨물며 입을 열었다.“필요한 물건들을 어떻게 이렇게 빨리 사겠어요? 그래도 약혼 할 때 쓰일 물건인데 신중하게 사야죠, 평생 단 하나 뿐인 결혼인데... 저랑 같이 구경하지 않으실래요? 우리 둘 일이라 저는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싶어요.”그녀는 서준혁이 대답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으며 고개를 돌려 신유리를 보더니 말을 이어갔다.“아, 맞다. 신유리 씨? 아버지께서 성남에 가서 신유리 씨 찾으러 다니신다던데... 만나셨나요?”주현은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솔직하게 말하자면 우리 엄마가 그쪽 아버지에게 비행기 표도 사줬어요.”빙빙 돌려 말하는 주현이지만 이미 문선경까지 얘기를 꺼낸 그녀의 의도를 신유리가 모를 리가 없었다.신기철이 문선경에게 잘 보이려고 기를 쓴다는 사실을 신유리에게 재차 강요해 그녀를 민망하게 만들려는 속셈이었다.신유리는 고개를 들어 주현을 바라보며 담담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주현에게 물었다.“보아하니 신기철 씨랑 그쪽 엄마 사이가 무척이나 좋은가 보네요, 신기철 씨를 아빠라고 불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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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17화

신유리는 오전 10시 비행기였고 임아중은 데려다주겠다고 말을 했지만 신유리가 거절해버렸다.핸드폰으로 부른 택시가 이미 별장에 도착했다는 전화를 받고 나가려는 때에 이신은 신유리를 대신해 캐리어를 들어주었고 임아중은 기분이 안 좋은 듯 무표정한 얼굴로 서있었다.“이번에 부산에 내려가서 한참 있겠다고 했지? 곡연 씨도 먼데도 공부하러 떠나고... 나 혼자 성남에서 심심해서 어떻게 살아?”신유리가 어린 아이를 달래듯 대답했다.“부산으로 와, 나 찾으러.”임아중은 원망스런 눈빛으로 신유리를 바라보며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한숨을 푹 내쉬더니 말을 했다.“됐어, 난 부산 안 좋아해. 그쪽 사람들 다 너무 열심히 살아, 재미없게.”이신은 트렁크에 신유리의 캐리어를 잘 정리해놓고는 조용하게 신유리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신유리는 이번에 부산으로 돌아가 홍란의 모든 과정들을 따라야 했고 적어도 3개월은 걸릴 듯싶었다.임신을 한 이래로 살이 찌기는커녕 나날이 야위어 가던 신유리를 바라보며 이신이 먼저 입을 열었다.“기다릴게.”그가 손을 내밀자 그의 손바닥 위엔 평안부적 하나가 쥐어져있었고 신유리는 조금 당황해하는 기색이었다.[명절 보낼 때 금방 주지 않았나..?]“그때 절에 갔을 때 되게 용하다고 해서... 내가 사왔어.”이신은 쓸데없는 말 하나 없이 신유리를 보았는데 그의 눈빛엔 다른 감정들이 가득 섞여져있는 것 같았다.“가져, 유리야.”이신의 목소리는 아이를 어르고 달래듯 부드러웠고 신유리는 자상한 그의 목소리에 홀린 듯 평안부적을 건네받았다.사람들과 인사를 다 마친 신유리는 차에 올라 공항으로 출발했고 기사가 코너를 돌 때 신유리는 백미러로 낯선 하얀색 승용차 하나를 발견했다.그 차는 출발할 때부터 신유리가 탄 택시를 따라왔지만 그녀는 별 생각없이 슥 보고는 시선을 돌렸다.하지만 어느 다리에 다다랐을 무렵, 그 차는 여전히 뒤에서 따라오고 있었고 일정한 거리를 항상 유지하고 있었다.“기사님, 조금만 빨리 가주실 수 있으실까요?”신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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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18화

신유리의 말이 떨어지자 서준혁은 귀를 한 대 얻어맞은 듯 이명까지 들리기 시작했다.그는 처음엔 당황하고 막연한 얼굴을 하고 있다가 나중에는 알 수 없는 복잡한 감정들이 섞인 얼굴로 그 자리에 서서 신유리의 무감정한 눈빛을 보며 가슴에 총을 맞은 느낌이 들어 아파왔다.아프고 시리고 고통스러웠다.숨이 막혀오는 기분은 서서히 서준혁을 잠식시켰고 심장은 누군가의 거대한 손에 의해 꽉 잡힌 듯 점점 조여 오고 점점 아파와 제대로 서있기조차 바빴다.또렷하게 보이던 눈앞이 점차 흐려져 갔고 신유리의 공허한 눈빛만이 병실 안을 가득 채웠다.신유리의 목소리는 한번, 또 한 번 서준혁의 머릿속에서 맴돌았고 그는 견디기 힘들었다.[서준혁 씨 아이 없어졌어요.][서준혁 씨 아이.]서준혁의 냉랭하던 표정이 산산조각이라도 나는 것처럼 부서졌고 그는 신유리를 보며 어찌해야 할지를 몰라 방황했다.“서준혁 씨.”임아중의 목소리가 둘 사이의 침묵을 깨뜨렸고 그녀는 조롱 섞인 말투로 입을 열었다.“지금 그 표정은 무슨 의미죠? 웃기지 않나요? 서 씨 가문에서 유리 뱃속 아이를 지우려고 검사결과도 조작하고 낙태까지 시키려고 끌고 가고... 이런 악독한 일들도 생각해낸 집안사람이 왜 지금 이런 모습을 하고 있는 거죠?”“정말 토악질 나오네요, 우리 유리가 서준혁 씨를 만난건 인생에서 제일 재수 없고 잘못된 일이었어요!”임아중은 굉장히 큰 목소리로 신유리의 침대 옆에 서서 그녀를 보호해주며 말을 했지만 서준혁은 임아중에게 시선을 옮기기는커녕 뒤에 있는 신유리만 바라보고 있었다.신유리는 그냥 침대에 앉아있기만 했는데도 핏기 하나 없는 입술과 아무런 생기가 돌지 않는 눈빛 때문에 서준혁과는 아예 다른 세상의 사람 같았다.그녀의 눈에서 흐른 모든 눈물들을 가시가 되어 서준혁의 가슴을 찔렀고 이석민이 서준혁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을 때에는 이미 한시간이나 지난 뒤였다.서준혁은 병원 주위에 있는 크나큰 나무 밑에 서있었지만 이석민은 서준혁이 뭔가 예전과는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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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19화

임아중이 도착했을 때, 서준혁은 이미 떠나버린 뒤였다.그녀는 푹 우려낸 삼계탕을 들고 와 건네주며 신유리에게 말을 걸었다.“이거 나 혼자 레시피 찾아보면서 만든 거니까 많이 먹어야 돼, 너 요즘 살이 너무 많이 빠져서 내가 너무 마음이 아프더라.”신유리는 입맛이 없어 고개를 푹 떨구고는 핸드폰만 쳐다보았다.그녀가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은 빠르게 소문이 퍼졌고 친하게 지내는 친구가 딱히 없던 신유리에게 고객들이 문자를 보내 걱정과 위로를 해줬다.채리연의 문자도 섞여있었고 그녀는 신유리에게 뜬금없이 이런 물음을 물었다.[너 경찰에 신고했다면서?]신유리는 그녀가 보낸 이 문자는 답장을 할 생각이 없어 채리연과 나눈 대화를 지워버리고는 핸드폰을 꺼버렸다.경찰에 신고는 사고가 난 그날, 이신이 직접 신유리를 대신해 해준 것이었다.원래는 흔히 있는 교통사고지만 신유리는 자신의 검사결과와 끌려가 낙태를 당할 뻔 했던 사실까지 모조리 말을 했고 경찰이 서창범에게까지 찾아가 조사를 한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도 신유리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서창범은 너무나 수법이 대담했고 신유리는 그저 작은 먼지와도 같이 보였는지 한치도 숨기지 않았다.하지만 그 또한 믿는 구석이 있어서 그런 행동을 쉽게 한 것 이었고 서씨 가문이 누구와 비해도 꿀리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신유리는 이런 일이 그들에게 있어서는 아주 작은 일이겠다는 예상을 했다.“너무 걱정마세요, 제가 저희 엄마랑 변호사를 통해 알아보라고 했거든요? 이 일 아주 잘 해결될거라고 그랬어요.”서씨 집안에서는 주현이 하정숙을 위로하고 달래주고 있었다.“돈만 많이 쥐어준다면 신유리도 절대 끝까지 쫓아오지는 않을 것 같아요.”하정숙은 잔뜩 썩은 표정을 하고는 피식 웃음을 짓더니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상위에 세게 내려놓으며 대답했다.“돈 가지고 해결할 수 있었으면 좋겠지만 나는 신유리 그 *이 이 기회를 틈 나 우리 준혁이한테 들러붙을까봐 그게 걱정이야.”그녀는 평소와는 다른 진중하고 낮은 목소리로 말을 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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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20화

서준혁의 손이 조금씩 떨리더니 잔뜩 어두워진 안색으로 있었는데 딱 봐도 아픈 사람 같은 모습이었다.그는 신유리의 말에도 굴하지 않고 대답했다.“필요한 물건 있으면 가져다 드리고 나가겠습니다.”신유리는 서준혁을 쳐다보다가 시선을 병실 입구로 돌리더니 더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서준혁은 신유리가 삐쩍 마른 모습과 야윈 얼굴을 보자 가슴이 너무 아파 숨도 잘 쉬어지지 않는 것 같았다.그는 그 책을 신유리에게서 제일 가까운 곳에 놓아주고는 신유리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몸을 돌려 나갔고 문 앞으로 다가가자마자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그러자 보이는 것은 신유리가 서준혁이 놓아준 책을 바로 먼 곳에 던져버리는 모습이었다.그는 신유리의 병실 문을 꾹 닫고는 자신의 방으로 향했고 보통 위출혈이 오면 아주 강한 고통에 시달리지만 서준혁은 그런 고통 따위 없이 우울감과 절망감에 휩싸여있었다.“어디 갔었니?”금방 병실로 돌아온 서준혁의 귀에 쨍한 하정숙의 목소리가 들렸다.서준혁은 고개를 들어 하정숙을 쳐다보며 되물었다.“여기는 왜 오셨습니까”“왜 왔냐고?”하정숙은 그의 물음에 순간 목소리가 높아지더니 차가운 시선으로 서준혁을 쳐다보다가 애써 진정한 뒤 대답했다.“물어볼 일이 좀 있어서 왔어.”“듣자하니 네가 스스로 하 씨 가문 사람들을 찾으러 갔다던데 맞아? 누기 너한테 가라고 했어? 그 사람들이 네가 먼저 찾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는거 몰랐니?”그녀는 날선 눈으로 서준혁을 쳐다보며 피식 웃더니 말을 이어갔다.“신유리 그 애 때문에 그러니? 너 지금 혹시 걔 그런 모습보고 정신을 못 차리는 거야?”하정숙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준혁은 고개를 들어 하정숙을 노려보며 굳게 잠겨있던 입을 열었다.“말 다 하셨습니까”원래 애써 진정했던 하정숙이 또 다시 화가 나기 시작했고 그녀가 뭐라 고함을 지르기 전에 서준혁이 먼저 말을 이어갔다.“다 말하셨으면 이제 그만 나가주시죠.”하정숙은 왔을 때도 화가 나 씩씩 거리면서 왔지만 갈 때는 더욱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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