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생은 반드시 해피엔딩의 모든 챕터: 챕터 161 - 챕터 170

693 챕터

제161화 민낯이 드러나다

윤선은 딸이 불쌍한지 황급히 달려가서 위로했다. 나는 차가운 눈길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서란아, 어떤 부분은 네가 잘못했다고 하는 게 나을 수도 있어. 아니면 사람들이 널 더 싫어하게 될 거야. 지금 가진 모든 걸 잃을 수도 있다고.”서란이 내 말에 놀란 듯 멈칫했다. 하지만 얼마 안 지나 다시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언니, 난 언니가 무슨 말 하는지 모르겠어요. 인호 씨 때문에 저 싫어하는 거 알고 있어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훗날 돈 생기면 지금까지 썼던 비용은 다 돌려줄 거예요. 그 돈은 제가 빌렸다고 생각해 주세요.”“필요 없어.”배인호가 나보다 한발 빨리 대답했다.서란의 눈빛이 잠깐 기쁨으로 반짝였다가 이내 다시 억울한 표정으로 가려졌다. 배인호가 이깟 돈을 아까워할 리가 없었다. 그러니 서란한테 돌려달라고 할 리도 더더욱 없었다. 하물며 지금 나와 이혼한 상태니 공동 재산이라는 것도 없고 쓰고 싶은 대로 쓰면 되니 어디에 쓰든 어떻게 쓰던 그의 일이었다.“인호 형!”순간 노성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땀범벅이 된 걸 봐서는 이쪽으로 최대한 빨리 달려온 듯싶었다. 같이 서 있는 우리를 보고는 멈칫했다. 그의 뒤에는 정아와 세희, 민정도 있었다.노성민을 본 서란이 웃으며 말했다.“성민 오빠, 저 배웅하러 온 거예요?”전에 서란을 대하는 노성민의 태도가 많이 변했었다. 오늘 독일로 수술하러 떠나는데 노성민이 급히 달려오니 자신을 배웅하러 온 거로 착각하고 있었다.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노성민이 정아를 데리고 서란 배웅을, 정아의 손에 죽고 싶지 않고서는 말이 안 되는 행동이었다.“허허, 인호 형 찾아서 할 얘기가 있어서.”노성민이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이더니 배인호 옆으로 신속하게 걸어가 귓속말로 몇 마디 했다. 뭐라고 말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귓속말이 끝나자 배인호의 표정에 미묘한 변화가 생겼다.“어떻게 된 일이건, 일단 독일에 도착해서 보자.”배인호의 눈빛이 아래로 처졌다.독일 쪽은 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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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2화 인과응보

“라니야, 민설아는 누구야?”서중석이 물었다.“민설아는 지금 갖고 있는 심장의 주인이자 배인호가 좋아한 첫 번째 여자기도 하죠.”내가 그의 궁금증을 풀어줬다.“당신 딸은 이 일에 대해서 이미 다 알고 있었고 민설아 가족까지 만나봤는데, 모르고 있었어요?”윤선이 막연하게 고개만 흔들었다.“아니요. 지금 알았어요. 그냥 수술한 그해에 어떤 사람이 라니를 찾아왔었고 집에서 잠깐 대화를 나누다가 사진 한 장 같이 남기고 갔는데...”“그 사람 아마 민설아 어머니일 거예요.”나는 윤선이 불쌍해지기 시작했다. 하나뿐인 딸이 이렇게 많은 일을 속이고 있으니 말이다.“그만 해요!!”서란이 갑자기 귀를 틀어막으며 소리를 질렀다.“내가 죽기를 바라는 거죠? 좋아요! 지금 죽으면 되잖아요!”이 말을 뒤로 서란은 핸드백에 들어있는 물건을 전부 바닥에 쏟았다. 그러고는 눈썹을 다듬는 칼을 집어 들어 자기 팔목에 갖다 댔다.서란은 눈물을 흘리며 배인호를 바라봤다.“인호 씨, 다들 지영 언니가 당신을 10년이나 일편단심으로 좋아했다고 하는데 설아 언니는요? 당신은 설아 언니를 저버린 거예요! 처음 당신 이름을 안 순간부터 열심히 공부해서 서울대에 합격해 서울에 악착같이 남으려고 애썼어요. 이 모든 건 다 우리 사이의 인연을 믿어서 그런 거라고요!”나는 속으로 서란이 심장 이식을 받았을 때 나이를 계산해 봤다. 열다섯 열여섯쯤 되는 나이니, 사랑에 눈을 뜰 나이었다.그녀가 눈물로 하소연하는 것을 들으며 내 마음속에 풀리지 않던 또 하나의 수수께끼를 풀 수 있었다.민설아 어머니가 그해 서란에게 준 선물은 앨범과 일기장이었다. 안에는 민설아가 기록한 각종 메모와 언니 민예솔과의 사진이 들어있었고 그 사진으로 서란은 민예솔을 한눈에 알아봤을 것이다.민예솔은 넋을 놓고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서란이 애초부터 이 모든 일들을 알고 있었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민예솔은 줄곧 서란이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애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서란은 너무 울어서 탈진하기 일보 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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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3화 의사와 약을 수소문하다

마음속으로 윤선과 서중석을 동정하긴 했지만 나는 서란이 저지른 일이 부모님에게로 돌아가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하지만 나한테서 돈을 빌리지 못한 서란이 이런 수작을 쓸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자려고 누웠는데 기선우의 전화가 걸려 왔다.“누나, 자요?”그의 말투는 예전처럼 밝고 유쾌하진 않았고 오히려 우물쭈물하고 있었다.나는 자기 전에 언제 네일아트 하러 갈지 고민하다가 잠에 들지 못했던 터라 물었다.“아니, 왜?”“서란이 요 며칠 계속 연락 와서 저도 방법이 없어서 그래요. 그래서 말인데...”기선우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더니 완전히 사라졌다.“연락 와서 뭐라는데?”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하지만 이미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기선우가 서란이 먼저 배인호에게 연락했다는 안 좋은 소식을 터트리긴 했지만, 궁지에 몰린 서란에게 착하고 정직했던 전 남친은 손을 내밀 수 있는 몇 없는 대상 중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기선우가 한숨을 내쉬면서 말을 더듬었다.“그, 그러니까 서란이네 부모님 아직 ICU에 계시잖아요. 그래서 돈이 많이 들어가나 봐요. 근데 빌릴 데가 딱히 없다고 저한테 빌려달라고 하는데, 저, 저는...”“그냥 네 생각을 얘기해. 괜찮아. 무슨 결정을 하던 널 탓하지 않아.”내가 부드럽게 말했다.“누나, 그래서 돈 빌려주기로 약속했어요. 근데 금액이 모자라서 누나한테 도움 요청하려고 했죠. 안 들어주셔도 돼요. 너무 여자처럼 군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애초에 먼저 헤어지자고 한 것도 나고 전에 사귈 때 행복했던 것도 맞고, 서란이네 부모님이 잘해줬던 것도 있어서...”기선우가 변명을 늘어놓았지만 결국은 마음이 약해졌다는 거였다.나와 서란 사이의 원한은 기선우와 별 관련이 없었다. 그는 단순히 내가 이 난장판에 끌어들인 거라 마음이 약해져도 이해는 갔다.다른 사람이 돈을 빌리면 당연히 거절했겠지만 기선우는 거절할 수가 없었다. 만약 내가 이 돈을 빌려줘서 그가 서란에 대한 죄책감을 최대한 줄일 수만 있다면 내가 그에게 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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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4화 잠깐 스쳐 지나간 옆모습

밥을 먹고 이우범은 집에 가서 쉬려고 했고 나는 차에 타려는데 그가 나를 불러세웠다.“지영 씨, 이 일 인호한테 말할 생각 없어요? 인호한테도 책임이 있는데 혼자 짊어지는 건 힘들잖아요.”“괜찮아요. 아무리 힘들어도 그 10년을 버틴 것만큼 힘들까요?내가 덤덤하게 대답했다.이미 절망과 억울함, 그리고 죽음을 맛본 사람에게 이런 좌절 따윈 그래도 받아들일 수 있는 정도였다.“그래요, 그럼 들어가서 일찍 쉬어요. 좋은 소식 있으면 연락할게요.”이우범이 웃으며 말하더니 자신의 차에 올랐고 나보다 먼저 출발했다. 나도 차를 운전해 집으로 돌아갔고 엄마가 거실에 앉아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내가 돌아온 것을 보고는 울지 않은 척 미소를 지어 보였다.“왜 오늘은 이렇게 늦었어?”“친구랑 잠깐 밖에서 외식했어요. 엄마 무슨 일인데 그래요?나는 엄마 쪽으로 다가가 앉았고 엄마의 팔짱을 꼈다. 엄마의 충혈된 눈이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엄마는 원래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고 하다가 내가 계속 캐묻자, 내 손을 잡으며 마음 아프다는 듯 말했다.“그냥 엄마는 너를 생각하면 마음이 너무 아파서 그래. 그리고 우리 불쌍한 손주, 태어나서 세상 구경 한번 못하고, 생각하면 마음이 너무 아파...”엄마의 말을 듣고 있노라니 내 눈시울도 붉어졌다. 요즘 그 고통을 잊으려고 노력했는데 순간 다시 무너지는 느낌이었다.나도 잃어버린 내 아이가 너무나도 사무쳤다. 특히 정아의 배가 불러오는 걸 보면서 부럽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이렇게 된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건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 몸조리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임신만 할 수 있으면 못 할 게 없었다.“엄마, 너무 슬퍼하지 마요. 그래도 인호 씨와 완전히 끝낸 건 좋은 일이잖아요.”마음속에 북받치는 감정들을 억누르며 엄마를 다독였다.“그래, 지영아. 앞으로 다시는 그놈이랑 만나지 마. 네가 그놈한테 바친 대가가 너무 크다.”엄마가 당부했고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네, 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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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5화 그냥 나한테서 멀리 떨어져 줘요

공항에서 그 일이 발생하고 오늘 처음 만났다. 지금까지 배인호는 나에게 연락을 한 적도 그렇다고 찾아온 적도 없었기에 이 시간, 이 장소에서 만날 줄은 몰랐다. 그는 연주회를 들으러 온 사람 같지는 않았다. 전에 내가 첼로를 연주하면 시끄럽다고 생각하던 사람이었다. 배인호가 나타나자 슬금슬금 내 쪽으로 다가오던 두 양아치는 서로 눈을 맞추더니 실망한 표정으로 다시 돌아갔다.우연히 나를 발견하고 희롱하러 온 양아치가 아니라는 예감이 들었다. 타이어에 펑크가 난 것도 저들이 한 짓일 가능성이 컸다.하지만 눈앞에 놓인 위기는 잠시 해제되었다. 나는 배인호와 더 지체하기 싫어 보는 체도 하지 않았다. 이 기사님한테 전화해 데리러 오는 김에 타이어도 처리해 달라고 할 셈이었다.“일부러 못 본척하는 거야?”배인호가 190은 족히 되는 키로 내 앞을 막아서자 나는 더 이상 무시하려고 해도 무시할 수 없었다.“기사님, 드림홀 쪽으로 좀 와주세요. 타이어가 펑크 났어요.”나는 이 기사님과 통화를 하고 나서야 배인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용건 있어요?”서란의 일이 마무리된 후 나는 그와 더 이상 할 얘기가 없다고 생각했다.배인호가 미간을 찌푸리더니 말했다.“그렇게 거리 둘 필요 없어.”“그럼 어떤 태도로 대해야 하는데요? 예전처럼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계속 주인 보면 헤헤거리는 개가 될까요?”많이 흥분한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다 배인호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해서였다.아이도 잃고 서란이 했던 일도 다 알았으니 우리 사이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제일 좋은 방법은 서로에게 방해가 되지 않게 서로 연락하지 않는 것이었다.“보상해 줄게. 네가 뭘 원하든지 다 해줄게.”배인호의 눈빛에서 죄책감이 느껴졌다.“전에는 내가 잘못했어. 사과할게.”“사과가 모든 걸 해결할 수 있으면 경찰은 왜 필요하겠어요?”나는 배인호에게 이런 말을 날리게 될 줄은 몰랐다. 모든 상처가 “미안해” 한마디로 흘려보낼 수 있는 건 아니다. 내가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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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6화 있어서는 안 되는 질투심

그의 눈동자가 움직이더니 이내 나를 발견했다. 잔잔하던 그의 눈빛이 살짝 변하는 게 느껴졌다.나는 시선을 거두고 아무것도 보지 못한 척했다.“배 씨 그룹 대표 배인호 씨 아닌가요? 지영 씨 전남편?”이모건이 물었다.회사 관리에는 참여하지 않는 그가 이런 가십거리는 또 알고 있었다.“네.”나는 머리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이때 배인호 맞은편에 서 있던 여자가 화를 못 이겨 자리를 떠났다. 그는 그제야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티슈 한 장을 뽑아 얼굴에 묻은 와인을 닦아내고는 내 쪽으로 걸어왔다.이모건이 나와 배인호를 번갈아 쳐다봤다.“이모건 씨, 여기서 뭐 하는 거죠?”배인호가 우리 테이블에 다가서며 이모건을 쳐다봤다.재벌들은 서로 친한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누군지는 아는 사이였다.이모건이 예의를 갖추며 답했다.“선보는 중입니다.”배인호의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나를 보며 말했다.“이씨 집안 도련님이 어쩌다 선을 보는 지경까지 된 거죠?”이모건은 맞선 상대가 나는 아니라고 설명하지 않았고 나도 침묵을 지켰다. 배인호처럼 막무가내인 성격에 전처가 다른 남자랑 맞선을 보고 있으니, 그가 어떤 기분일지 예상이 되었다.내가 아무런 대답도 없자 배인호의 표정은 점점 더 차가워졌고 온몸으로 한기를 내뿜고 있었다. 그러다 어두운 표정으로 자리를 떴다.얼마 지나지 않아 세희가 돌아왔다. 세희는 예쁘고 세련되게 화장을 고쳤고 여성스러움 그 자체였다. 이모건은 그런 그녀를 보는 순간 눈빛이 밝아졌다. 잘 될 분위기라 나는 얼른 핑계를 대고 빠져나왔다.엘리베이터를 타고 바로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와 차에 타려는데 배인호가 구석에서 걸어 나왔다.나는 재빨리 차 문을 열고 차에 타려 했으나 배인호가 차 문을 손으로 막았다. 그의 표정은 아주 언짢아 보였다.“맞선에 실패했나 봐? 이렇게 빨리 내려온 걸 보면?”“인호 씨, 자꾸만 내 사생활을 궁금해하는 거 같은데, 그럴 필요 있을까요?”나는 차에 타는 걸 포기하고 담담하게 물었다.“당연하지. 전처가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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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7화 서란이 돌아왔다

이상했다. 직감이 말했다. 그 여자는 절대 평범한 여자가 아니라고 말이다.이때 세희가 떠올랐다. 워커홀릭 세희는 거의 매일 접대하면서 기타 회사의 사정을 연구하고 있다. 만약 서울시에 갑자기 신분 있는 여자가 나타난다면 세희가 알고 있을 확률이 높다.나는 바로 세희에게 문자를 보냈다.「맞선은 어떻게 됐어? 시간 나면 문자 줘. 물어볼 거 있어.」1분 뒤, 나는 세희의 전화를 받았다.“쯧쯧, 지영아, 그 이모건 너무 잘생기지 않았어? 나 보고 있는데 침 흘릴 뻔했잖아!”세희는 이모건에 대한 호감을 전혀 감추지 않았다.“그래서 전에 내가 다른 남자한테는 눈길이 안 갔던 거였어. 나 이런 스타일 좋아한다는 걸 알았지, 뭐야. 이 언니 이모건으로 결정했어. 나 이모건이랑 만날 거야!”“봄바람이 살살 불어 들었네! 좋을 때다.”나는 그런 세희를 보며 진심으로 기뻐했다. 관심이 있는 남자가 생겼다는 건 그녀에게 쉽지 않은 일이었다.“나 지금 집으로 돌아가는 길인데, 너는 집에 도착했어?”세희가 물었다.“응, 도착했어. 물어볼 게 있어. 서울시에 요즘 새로 나타난 사람 없어? 성은 하 씨고 한 50대쯤 되는 여자야.”나는 대략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 중년 여성에 대해 아는 게 적었고 드림홀 앞에서 두 번 본 게 전부였다.세희가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떠오르는 사람 없어. 아니면 내가 돌아가서 물어볼까?”“그래. 알아낸 거 있으면 연락해.”내가 대답했다. 그러고는 잠을 청하기 위해 와인을 한 잔 따랐다. 한잔을 거의 비울 때쯤 세희의 전화가 다시 걸려 왔다. 속도가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다.“지영아, 진짜 그런 사람이 있더라? 이름은 하미선. 외국에서 금방 들어왔고 남편은 외국 회사 시에나 그룹 부대표이사야. 이번에 귀국한 건 국내에 투자해서 회사를 설립하기 위해서래. 아는 사람이야?”세희가 물었다.“아는 사람은 아니야. 근데... 전에 정아랑 같이 연주회에 갔을 때 만난 적이 있거든. 근데 그때 아빠 동료분이랑 같이 대화를 나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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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8화 이혼한 거 아니었나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이우범은 전화를 끊었다. 나는 서란이 돌아온 일에 대해 그에게 말해주고 싶었으나 이우범이 출근 중이라 내일 저녁에 만나면 말해주려 했다.집에 돌아가기 싫어 차를 몰고 정처 없이 돌아다녔다. 지나간 일들이 하나씩 떠올라 마음이 씁쓸해졌다. 전생은 유방암에 걸렸고 이번 생은 아직 살아 있지만 영원히 엄마가 되지 못할 수도 있었다.얼떨결에 나는 차를 운전해 세화 프로젝트 근처까지 왔다. 밤이 어두워지고 있었고 원래 서란이 살던 낡은 아파트는 이미 평지가 되어있었다. 밤에 보니 더 한적했고 모든 것이 전과는 달라져 있었다.‘난 왜 여기로 온 거지?’짙은 밤처럼 내 사색도 점점 멀리 가고 있었다.전생대로라면 윤선과 서중석은 아직 죽지 않았을 것이고 훗날 점점 더 잘살 것이었지만 이제 모든 게 늦어버렸다.그들은 성공해도 서란 덕이고 실패해도 서란 탓이었다.나는 유유히 한숨을 쉬고 차에 시동을 걸려는데 한 무리의 사람이 이쪽 공사장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들을 이끄는 남자는 사오십 대쯤 되어 보였고 양아치처럼 알록달록한 외투를 입고 있었고 표정이 엄청 험상궂어 보였다. 그 뒤로 한 무리의 양아치 청년들이 따라오고 있었는데 딱 봐도 좋은 사람들은 아니었다.나는 시간을 확인했다. 10시가 넘은 이 시간에 배 씨 그룹의 세화 프로젝트 공사장에는 무슨 일로 온 것일까.순간 그 무리가 내 차 옆에 멈췄다. 내 차는 시동이 꺼진 상태였고 창문만 조금 열어 환기하고 있었다. 그들이 아직 나를 발견하지 못했을 때 나는 최대한 몸을 수여 그들에게 들키지 않으려 했다.“이따 용이 형님은 들어가자마자 부셔요. 그 망할 놈들이 형님 동생을 다치게 했는데 배상 안 하면 끝장을 봐야죠!”두목으로 보이는 중년 남자가 입을 열었다.“알겠어요. 삼식이 형님, 오스카 주연상 받은 사람처럼 연기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요!”용이 형님이라고 불리는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배 씨 그룹의 프로젝트에 양아치들이 감히 와서 설치다니, 용기가 대단했다.“젠장, 배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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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9화 유치한 과시

“이우범 씨, 저 때문에 굳이 배인호와 그럴 필요까진 없잖아요?”나는 답답한 마음에 짜증 섞인 말투로 쏘아붙였다.“제 입장은 생각 안 해요? 조금 전 그 상황에서 다른 이유라도 댈 수 있었잖아요!”“우리가 이상한 관계도 아닌데 왜 이유를 만들어 내야 하죠?”이우범이 되물었다. 나는 썩은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이우범은 오히려 평소와 같았고, 우리 둘은 차 옆에 꿈쩍하지 않고 서 있었다.나는 속으로 중얼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사이에 약간의 썸씽도 없었다고? 항상 어딘가 이상했는데?갑자기 이우범이 몸을 숙여 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의 옷에서는 은은한 비누 향이 풍겨 아주 향기로웠다.그는 나를 빤히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아니면, 우리 둘 사이가 떳떳하지 못하다고 생각돼서 찔리는 건가요?”나는 깜짝 놀라 바로 고개를 저으며 부인했지만, 이우범은 참을 수 없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괜찮아요, 저는 가끔 지영씨가 찔리는 게 있었으면 좋겠어요.”나는 찔린다기보다는 약간의 충격을 받았다. 이 말은 대체 어떤 의미일까?“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저 먼저 가볼게요. 다음에 다시 얘기해요.”나는 혼란스러운 마음에, 더는 어떤 얘기를 하면 좋을지 몰라 인사 한마디 건네고 내 차로 신속히 그 자리를 떠났다.이우범은 원래 자리에 덩그러니 서 있었고, 다행히 나를 따라 차에 타지는 않았다. 만약 나 따라 차까지 탔었다면, 더 민망한 상황이 초래됐을 거다. 나는 혼란스러운 마음을 안고 집에 도착했고, 엄마와 아빠는 아직 주무시지 않았다. 두 분은 양아치들이 세화 쪽에 가서 난동을 피웠다는 뉴스를 보고 계셨다. 내가 들어 온 걸 본 엄마는 걱정되는 듯 물었다.“지영아, 어디 갔다 오는 거야?”“또 그 배 씨 녀석 찾으러 간 건 아니지?”아빠는 더 직설적으로 물으셨다.두 분은 매일같이 나에게 배인호와 다시는 연락하지 말라며 신신당부하셨다.나는 바로 부인했다.“그런 거 아니니깐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엄마와 아빠는 서로 마주 보더니 계속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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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0화 이우범과 함께

이 사람은 예전부터 쉽게 넘어가는 법이 없네?내가 못 봤다는데, 굳이 이렇게까지 난처하게 만들다니.“아 그래요? 전 진짜 못 봤어요.”나는 태연하게 웃어 보였다.“아빠와 하기백 아저씨가 오랜 친구라서요. 아저씨한테 급하게 선물 주러 와서 정신이 없었어요.”“그럼 같이하죠? 저도 때마침 아버지 대신 그림 하나 구매하러 왔거든요.”이우범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더는 캐묻진 않았지만, 여전히 나를 난처하게 했다.나는 더는 뭐라 할 수 없었다. 어제 나에게 고백을 한 것도 아니고, 혼자만의 착각으로 그의 제안을 거절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나는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갤러리는 총 두 층으로 되어있었고, 나와 이우범은 그림을 감상하며 이야기를 나눴지만 사실상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도 모르겠다. 예전 같은 경우면, 나는 서란에 관한 이야기도 꺼냈겠지만, 지금은 그런 이야기조차 하기도 어색하고 조심스러웠다.이야기를 나누면서 이우범은 나에게 근대 미술에 관한 다양한 지식을 얘기해 줬고, 나는 그가 근대 미술에 대해 아는 게 많다는 걸 알게 되었다.하기백은 2층에 있었고, 나와 이우범이 2층으로 올라가려던 찰나, 때마침 위에서 내려오는 배인호와 마주쳤다. 그의 뒤에는 전에 몇 번 봤던 그의 비서가 있었고, 비서의 손에는 이미 포장된 그림이 들려 있었다.나는 처음부터 아빠의 부탁을 들어줬으면 안 됐다. 부탁을 들어주기는커녕 오히려 거듭 난감한 상황에 빠졌다.어제 일어난 일을 계기로, 배인호와 이우범의 오래된 우정은 무너지기 시작했다.이 두 사람의 운명은 마치 미리 정해진 것만 같았다. 수년간의 우정이 전생에서부터 같은 여자로 인해 손 뒤집듯 쉽게 뒤집히니 말이다. “우리가 비켜줄게.”이우범은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배인호를 쳐다보더니 시선을 거두면서 내 허리를 팔로 감쌌고, 나를 자기 옆으로 끌어당겼다.배인호는 차가운 눈으로 그의 행동을 지켜보더니 곧 계단을 몇 개 더 내려와서는 내 옆에 멈춰 섰다.그는 섬뜩할 정도로 차갑게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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