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니야, 민설아는 누구야?”서중석이 물었다.“민설아는 지금 갖고 있는 심장의 주인이자 배인호가 좋아한 첫 번째 여자기도 하죠.”내가 그의 궁금증을 풀어줬다.“당신 딸은 이 일에 대해서 이미 다 알고 있었고 민설아 가족까지 만나봤는데, 모르고 있었어요?”윤선이 막연하게 고개만 흔들었다.“아니요. 지금 알았어요. 그냥 수술한 그해에 어떤 사람이 라니를 찾아왔었고 집에서 잠깐 대화를 나누다가 사진 한 장 같이 남기고 갔는데...”“그 사람 아마 민설아 어머니일 거예요.”나는 윤선이 불쌍해지기 시작했다. 하나뿐인 딸이 이렇게 많은 일을 속이고 있으니 말이다.“그만 해요!!”서란이 갑자기 귀를 틀어막으며 소리를 질렀다.“내가 죽기를 바라는 거죠? 좋아요! 지금 죽으면 되잖아요!”이 말을 뒤로 서란은 핸드백에 들어있는 물건을 전부 바닥에 쏟았다. 그러고는 눈썹을 다듬는 칼을 집어 들어 자기 팔목에 갖다 댔다.서란은 눈물을 흘리며 배인호를 바라봤다.“인호 씨, 다들 지영 언니가 당신을 10년이나 일편단심으로 좋아했다고 하는데 설아 언니는요? 당신은 설아 언니를 저버린 거예요! 처음 당신 이름을 안 순간부터 열심히 공부해서 서울대에 합격해 서울에 악착같이 남으려고 애썼어요. 이 모든 건 다 우리 사이의 인연을 믿어서 그런 거라고요!”나는 속으로 서란이 심장 이식을 받았을 때 나이를 계산해 봤다. 열다섯 열여섯쯤 되는 나이니, 사랑에 눈을 뜰 나이었다.그녀가 눈물로 하소연하는 것을 들으며 내 마음속에 풀리지 않던 또 하나의 수수께끼를 풀 수 있었다.민설아 어머니가 그해 서란에게 준 선물은 앨범과 일기장이었다. 안에는 민설아가 기록한 각종 메모와 언니 민예솔과의 사진이 들어있었고 그 사진으로 서란은 민예솔을 한눈에 알아봤을 것이다.민예솔은 넋을 놓고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서란이 애초부터 이 모든 일들을 알고 있었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민예솔은 줄곧 서란이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애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서란은 너무 울어서 탈진하기 일보 직
마음속으로 윤선과 서중석을 동정하긴 했지만 나는 서란이 저지른 일이 부모님에게로 돌아가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하지만 나한테서 돈을 빌리지 못한 서란이 이런 수작을 쓸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자려고 누웠는데 기선우의 전화가 걸려 왔다.“누나, 자요?”그의 말투는 예전처럼 밝고 유쾌하진 않았고 오히려 우물쭈물하고 있었다.나는 자기 전에 언제 네일아트 하러 갈지 고민하다가 잠에 들지 못했던 터라 물었다.“아니, 왜?”“서란이 요 며칠 계속 연락 와서 저도 방법이 없어서 그래요. 그래서 말인데...”기선우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더니 완전히 사라졌다.“연락 와서 뭐라는데?”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하지만 이미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기선우가 서란이 먼저 배인호에게 연락했다는 안 좋은 소식을 터트리긴 했지만, 궁지에 몰린 서란에게 착하고 정직했던 전 남친은 손을 내밀 수 있는 몇 없는 대상 중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기선우가 한숨을 내쉬면서 말을 더듬었다.“그, 그러니까 서란이네 부모님 아직 ICU에 계시잖아요. 그래서 돈이 많이 들어가나 봐요. 근데 빌릴 데가 딱히 없다고 저한테 빌려달라고 하는데, 저, 저는...”“그냥 네 생각을 얘기해. 괜찮아. 무슨 결정을 하던 널 탓하지 않아.”내가 부드럽게 말했다.“누나, 그래서 돈 빌려주기로 약속했어요. 근데 금액이 모자라서 누나한테 도움 요청하려고 했죠. 안 들어주셔도 돼요. 너무 여자처럼 군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애초에 먼저 헤어지자고 한 것도 나고 전에 사귈 때 행복했던 것도 맞고, 서란이네 부모님이 잘해줬던 것도 있어서...”기선우가 변명을 늘어놓았지만 결국은 마음이 약해졌다는 거였다.나와 서란 사이의 원한은 기선우와 별 관련이 없었다. 그는 단순히 내가 이 난장판에 끌어들인 거라 마음이 약해져도 이해는 갔다.다른 사람이 돈을 빌리면 당연히 거절했겠지만 기선우는 거절할 수가 없었다. 만약 내가 이 돈을 빌려줘서 그가 서란에 대한 죄책감을 최대한 줄일 수만 있다면 내가 그에게 할 수
밥을 먹고 이우범은 집에 가서 쉬려고 했고 나는 차에 타려는데 그가 나를 불러세웠다.“지영 씨, 이 일 인호한테 말할 생각 없어요? 인호한테도 책임이 있는데 혼자 짊어지는 건 힘들잖아요.”“괜찮아요. 아무리 힘들어도 그 10년을 버틴 것만큼 힘들까요?내가 덤덤하게 대답했다.이미 절망과 억울함, 그리고 죽음을 맛본 사람에게 이런 좌절 따윈 그래도 받아들일 수 있는 정도였다.“그래요, 그럼 들어가서 일찍 쉬어요. 좋은 소식 있으면 연락할게요.”이우범이 웃으며 말하더니 자신의 차에 올랐고 나보다 먼저 출발했다. 나도 차를 운전해 집으로 돌아갔고 엄마가 거실에 앉아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내가 돌아온 것을 보고는 울지 않은 척 미소를 지어 보였다.“왜 오늘은 이렇게 늦었어?”“친구랑 잠깐 밖에서 외식했어요. 엄마 무슨 일인데 그래요?나는 엄마 쪽으로 다가가 앉았고 엄마의 팔짱을 꼈다. 엄마의 충혈된 눈이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엄마는 원래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고 하다가 내가 계속 캐묻자, 내 손을 잡으며 마음 아프다는 듯 말했다.“그냥 엄마는 너를 생각하면 마음이 너무 아파서 그래. 그리고 우리 불쌍한 손주, 태어나서 세상 구경 한번 못하고, 생각하면 마음이 너무 아파...”엄마의 말을 듣고 있노라니 내 눈시울도 붉어졌다. 요즘 그 고통을 잊으려고 노력했는데 순간 다시 무너지는 느낌이었다.나도 잃어버린 내 아이가 너무나도 사무쳤다. 특히 정아의 배가 불러오는 걸 보면서 부럽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이렇게 된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건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 몸조리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임신만 할 수 있으면 못 할 게 없었다.“엄마, 너무 슬퍼하지 마요. 그래도 인호 씨와 완전히 끝낸 건 좋은 일이잖아요.”마음속에 북받치는 감정들을 억누르며 엄마를 다독였다.“그래, 지영아. 앞으로 다시는 그놈이랑 만나지 마. 네가 그놈한테 바친 대가가 너무 크다.”엄마가 당부했고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네, 엄
공항에서 그 일이 발생하고 오늘 처음 만났다. 지금까지 배인호는 나에게 연락을 한 적도 그렇다고 찾아온 적도 없었기에 이 시간, 이 장소에서 만날 줄은 몰랐다. 그는 연주회를 들으러 온 사람 같지는 않았다. 전에 내가 첼로를 연주하면 시끄럽다고 생각하던 사람이었다. 배인호가 나타나자 슬금슬금 내 쪽으로 다가오던 두 양아치는 서로 눈을 맞추더니 실망한 표정으로 다시 돌아갔다.우연히 나를 발견하고 희롱하러 온 양아치가 아니라는 예감이 들었다. 타이어에 펑크가 난 것도 저들이 한 짓일 가능성이 컸다.하지만 눈앞에 놓인 위기는 잠시 해제되었다. 나는 배인호와 더 지체하기 싫어 보는 체도 하지 않았다. 이 기사님한테 전화해 데리러 오는 김에 타이어도 처리해 달라고 할 셈이었다.“일부러 못 본척하는 거야?”배인호가 190은 족히 되는 키로 내 앞을 막아서자 나는 더 이상 무시하려고 해도 무시할 수 없었다.“기사님, 드림홀 쪽으로 좀 와주세요. 타이어가 펑크 났어요.”나는 이 기사님과 통화를 하고 나서야 배인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용건 있어요?”서란의 일이 마무리된 후 나는 그와 더 이상 할 얘기가 없다고 생각했다.배인호가 미간을 찌푸리더니 말했다.“그렇게 거리 둘 필요 없어.”“그럼 어떤 태도로 대해야 하는데요? 예전처럼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계속 주인 보면 헤헤거리는 개가 될까요?”많이 흥분한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다 배인호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해서였다.아이도 잃고 서란이 했던 일도 다 알았으니 우리 사이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제일 좋은 방법은 서로에게 방해가 되지 않게 서로 연락하지 않는 것이었다.“보상해 줄게. 네가 뭘 원하든지 다 해줄게.”배인호의 눈빛에서 죄책감이 느껴졌다.“전에는 내가 잘못했어. 사과할게.”“사과가 모든 걸 해결할 수 있으면 경찰은 왜 필요하겠어요?”나는 배인호에게 이런 말을 날리게 될 줄은 몰랐다. 모든 상처가 “미안해” 한마디로 흘려보낼 수 있는 건 아니다. 내가 아
그의 눈동자가 움직이더니 이내 나를 발견했다. 잔잔하던 그의 눈빛이 살짝 변하는 게 느껴졌다.나는 시선을 거두고 아무것도 보지 못한 척했다.“배 씨 그룹 대표 배인호 씨 아닌가요? 지영 씨 전남편?”이모건이 물었다.회사 관리에는 참여하지 않는 그가 이런 가십거리는 또 알고 있었다.“네.”나는 머리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이때 배인호 맞은편에 서 있던 여자가 화를 못 이겨 자리를 떠났다. 그는 그제야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티슈 한 장을 뽑아 얼굴에 묻은 와인을 닦아내고는 내 쪽으로 걸어왔다.이모건이 나와 배인호를 번갈아 쳐다봤다.“이모건 씨, 여기서 뭐 하는 거죠?”배인호가 우리 테이블에 다가서며 이모건을 쳐다봤다.재벌들은 서로 친한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누군지는 아는 사이였다.이모건이 예의를 갖추며 답했다.“선보는 중입니다.”배인호의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나를 보며 말했다.“이씨 집안 도련님이 어쩌다 선을 보는 지경까지 된 거죠?”이모건은 맞선 상대가 나는 아니라고 설명하지 않았고 나도 침묵을 지켰다. 배인호처럼 막무가내인 성격에 전처가 다른 남자랑 맞선을 보고 있으니, 그가 어떤 기분일지 예상이 되었다.내가 아무런 대답도 없자 배인호의 표정은 점점 더 차가워졌고 온몸으로 한기를 내뿜고 있었다. 그러다 어두운 표정으로 자리를 떴다.얼마 지나지 않아 세희가 돌아왔다. 세희는 예쁘고 세련되게 화장을 고쳤고 여성스러움 그 자체였다. 이모건은 그런 그녀를 보는 순간 눈빛이 밝아졌다. 잘 될 분위기라 나는 얼른 핑계를 대고 빠져나왔다.엘리베이터를 타고 바로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와 차에 타려는데 배인호가 구석에서 걸어 나왔다.나는 재빨리 차 문을 열고 차에 타려 했으나 배인호가 차 문을 손으로 막았다. 그의 표정은 아주 언짢아 보였다.“맞선에 실패했나 봐? 이렇게 빨리 내려온 걸 보면?”“인호 씨, 자꾸만 내 사생활을 궁금해하는 거 같은데, 그럴 필요 있을까요?”나는 차에 타는 걸 포기하고 담담하게 물었다.“당연하지. 전처가 어떻게
이상했다. 직감이 말했다. 그 여자는 절대 평범한 여자가 아니라고 말이다.이때 세희가 떠올랐다. 워커홀릭 세희는 거의 매일 접대하면서 기타 회사의 사정을 연구하고 있다. 만약 서울시에 갑자기 신분 있는 여자가 나타난다면 세희가 알고 있을 확률이 높다.나는 바로 세희에게 문자를 보냈다.「맞선은 어떻게 됐어? 시간 나면 문자 줘. 물어볼 거 있어.」1분 뒤, 나는 세희의 전화를 받았다.“쯧쯧, 지영아, 그 이모건 너무 잘생기지 않았어? 나 보고 있는데 침 흘릴 뻔했잖아!”세희는 이모건에 대한 호감을 전혀 감추지 않았다.“그래서 전에 내가 다른 남자한테는 눈길이 안 갔던 거였어. 나 이런 스타일 좋아한다는 걸 알았지, 뭐야. 이 언니 이모건으로 결정했어. 나 이모건이랑 만날 거야!”“봄바람이 살살 불어 들었네! 좋을 때다.”나는 그런 세희를 보며 진심으로 기뻐했다. 관심이 있는 남자가 생겼다는 건 그녀에게 쉽지 않은 일이었다.“나 지금 집으로 돌아가는 길인데, 너는 집에 도착했어?”세희가 물었다.“응, 도착했어. 물어볼 게 있어. 서울시에 요즘 새로 나타난 사람 없어? 성은 하 씨고 한 50대쯤 되는 여자야.”나는 대략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 중년 여성에 대해 아는 게 적었고 드림홀 앞에서 두 번 본 게 전부였다.세희가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떠오르는 사람 없어. 아니면 내가 돌아가서 물어볼까?”“그래. 알아낸 거 있으면 연락해.”내가 대답했다. 그러고는 잠을 청하기 위해 와인을 한 잔 따랐다. 한잔을 거의 비울 때쯤 세희의 전화가 다시 걸려 왔다. 속도가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다.“지영아, 진짜 그런 사람이 있더라? 이름은 하미선. 외국에서 금방 들어왔고 남편은 외국 회사 시에나 그룹 부대표이사야. 이번에 귀국한 건 국내에 투자해서 회사를 설립하기 위해서래. 아는 사람이야?”세희가 물었다.“아는 사람은 아니야. 근데... 전에 정아랑 같이 연주회에 갔을 때 만난 적이 있거든. 근데 그때 아빠 동료분이랑 같이 대화를 나누고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이우범은 전화를 끊었다. 나는 서란이 돌아온 일에 대해 그에게 말해주고 싶었으나 이우범이 출근 중이라 내일 저녁에 만나면 말해주려 했다.집에 돌아가기 싫어 차를 몰고 정처 없이 돌아다녔다. 지나간 일들이 하나씩 떠올라 마음이 씁쓸해졌다. 전생은 유방암에 걸렸고 이번 생은 아직 살아 있지만 영원히 엄마가 되지 못할 수도 있었다.얼떨결에 나는 차를 운전해 세화 프로젝트 근처까지 왔다. 밤이 어두워지고 있었고 원래 서란이 살던 낡은 아파트는 이미 평지가 되어있었다. 밤에 보니 더 한적했고 모든 것이 전과는 달라져 있었다.‘난 왜 여기로 온 거지?’짙은 밤처럼 내 사색도 점점 멀리 가고 있었다.전생대로라면 윤선과 서중석은 아직 죽지 않았을 것이고 훗날 점점 더 잘살 것이었지만 이제 모든 게 늦어버렸다.그들은 성공해도 서란 덕이고 실패해도 서란 탓이었다.나는 유유히 한숨을 쉬고 차에 시동을 걸려는데 한 무리의 사람이 이쪽 공사장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들을 이끄는 남자는 사오십 대쯤 되어 보였고 양아치처럼 알록달록한 외투를 입고 있었고 표정이 엄청 험상궂어 보였다. 그 뒤로 한 무리의 양아치 청년들이 따라오고 있었는데 딱 봐도 좋은 사람들은 아니었다.나는 시간을 확인했다. 10시가 넘은 이 시간에 배 씨 그룹의 세화 프로젝트 공사장에는 무슨 일로 온 것일까.순간 그 무리가 내 차 옆에 멈췄다. 내 차는 시동이 꺼진 상태였고 창문만 조금 열어 환기하고 있었다. 그들이 아직 나를 발견하지 못했을 때 나는 최대한 몸을 수여 그들에게 들키지 않으려 했다.“이따 용이 형님은 들어가자마자 부셔요. 그 망할 놈들이 형님 동생을 다치게 했는데 배상 안 하면 끝장을 봐야죠!”두목으로 보이는 중년 남자가 입을 열었다.“알겠어요. 삼식이 형님, 오스카 주연상 받은 사람처럼 연기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요!”용이 형님이라고 불리는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배 씨 그룹의 프로젝트에 양아치들이 감히 와서 설치다니, 용기가 대단했다.“젠장, 배 씨
“이우범 씨, 저 때문에 굳이 배인호와 그럴 필요까진 없잖아요?”나는 답답한 마음에 짜증 섞인 말투로 쏘아붙였다.“제 입장은 생각 안 해요? 조금 전 그 상황에서 다른 이유라도 댈 수 있었잖아요!”“우리가 이상한 관계도 아닌데 왜 이유를 만들어 내야 하죠?”이우범이 되물었다. 나는 썩은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이우범은 오히려 평소와 같았고, 우리 둘은 차 옆에 꿈쩍하지 않고 서 있었다.나는 속으로 중얼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사이에 약간의 썸씽도 없었다고? 항상 어딘가 이상했는데?갑자기 이우범이 몸을 숙여 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의 옷에서는 은은한 비누 향이 풍겨 아주 향기로웠다.그는 나를 빤히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아니면, 우리 둘 사이가 떳떳하지 못하다고 생각돼서 찔리는 건가요?”나는 깜짝 놀라 바로 고개를 저으며 부인했지만, 이우범은 참을 수 없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괜찮아요, 저는 가끔 지영씨가 찔리는 게 있었으면 좋겠어요.”나는 찔린다기보다는 약간의 충격을 받았다. 이 말은 대체 어떤 의미일까?“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저 먼저 가볼게요. 다음에 다시 얘기해요.”나는 혼란스러운 마음에, 더는 어떤 얘기를 하면 좋을지 몰라 인사 한마디 건네고 내 차로 신속히 그 자리를 떠났다.이우범은 원래 자리에 덩그러니 서 있었고, 다행히 나를 따라 차에 타지는 않았다. 만약 나 따라 차까지 탔었다면, 더 민망한 상황이 초래됐을 거다. 나는 혼란스러운 마음을 안고 집에 도착했고, 엄마와 아빠는 아직 주무시지 않았다. 두 분은 양아치들이 세화 쪽에 가서 난동을 피웠다는 뉴스를 보고 계셨다. 내가 들어 온 걸 본 엄마는 걱정되는 듯 물었다.“지영아, 어디 갔다 오는 거야?”“또 그 배 씨 녀석 찾으러 간 건 아니지?”아빠는 더 직설적으로 물으셨다.두 분은 매일같이 나에게 배인호와 다시는 연락하지 말라며 신신당부하셨다.나는 바로 부인했다.“그런 거 아니니깐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엄마와 아빠는 서로 마주 보더니 계속 이어서
허지영은 이우범이 진심으로 배인호에게 말하는 것을 들어서야 마음 깊이 있던 궁금증이 드디어 풀렸다.그녀는 이것이 배인호와 이우범이 화해하는 발판이 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역시 배인호의 얼굴은 점점 더 편안해져 갔다. 잠깐의 침묵이 있었던 뒤 배인호도 말했다.“그래, 우리도 영원한 친구야.” 그는 말을 끝낸 후에 허지영을 바라보았다. 허지영은 그의 행동이 맞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배인호는 이 순간이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손에 넣고 우정도 되찾은 진정한 승리자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전화를 끊은 후, 배인호는 두 팔을 벌렸고 허지영은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품에 안겼다. 그들은 서로를 꽉 껴안았다. 빈이가 로아와 승현을 데리고 이런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빠, 아빠한테 책 좀 읽어달라고 해줘요~”로아가 낮은 목소리로 빈이를 재촉하였다.세 사람은 잠을 오지 않아서 내려가 배인호더러 그들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하려고 했다.그런데 세 사람은 내려오자마자 아빠와 엄마가 행복하게 안고 있는 것을 보자 조금은 부끄러워졌다.로아와 승현 두 아이는 너무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을 감출 수 없었고 빈이는 어른이 다 되였기 때문에 괜찮았다.“유니콘, 유니콘!”승현는 유니콘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계속 떠오르고 있었다. 배인호가 유니콘의 이야기를 승현에게 들려준 후부터 승현은 노래를 들을 때도《유니콘》만 듣고 싶어 했다.두 어린이는 빈이를 양쪽에서 감쌌고 포동포동한 손으로 그의 소매를 잡으며 기대로 가득 찬 큰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로아와 승현은 나이는 어리지만 똑똑해서 아빠와 엄마가 포옹하고 있을 때는 방해하면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이가 그들보다 많은 빈이는 방해해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빈이가 주저하고 있을 때 로아의 간절한 눈빛에 빈이는 말했다.“내가 너희들에게 책을 읽어주면 어때?”“형은 못 해! 못 해!”승현이가 거절했다. 왜냐하면 형한테 유니콘을 불러달라 했을 때 음정이 하나도 맞지 않아서였다.로아도 그렇
허지영은 자기 앞에 무릎을 꿇은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이것은 그녀가 오랫동안 사치하게 그리던 장면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일을 겪은 후에야 이룰 수 있었다.그녀의 눈시울도 붉어졌고 마침내 그녀는 머리를 끄덕였다. “좋아요.”사람들은 열렬한 박수를 터뜨렸다. 모두 이 부부의 재결합을 기뻐했지만 아무도 인파 뒤에서 한 남자가 조용히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그는 모자와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 얼굴을 알아보기 어려웠다. 그는 배인호가 반지를 허지영의 손가락에 끼우는 것을 보고 나서야 묵묵히 자리를 떠났다.그는 저택을 떠나 차에 올랐고 모자와 선글라스를 벗으며 차갑고 마른 얼굴을 드러냈다.이우범은 원래 해외에 있어야 했지만 참지 못하고 결국 배인호와 허지영의 결혼식에 참석했고 오늘의 입장권도 박준이 그를 위해 비밀리로 얻어 주었다.이제 허지영이 행복을 찾았음을 직접 보았으니 이우범은 안심하고 떠날 수 있었다.이우범이 막 차를 몰고 떠나려고 할 때, 박준이 어느새 따라 나와 차 앞에 막아 섰다.“이우범, 왜 벌써 가려고?”다른 사람들은 이우범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박준은 그가 올때부터 알아 보았다.박준은 이우범이 아직 허지영을 놓지 못했고 분명히 그녀의 결혼식에 몰래 참석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넌 왜 나왔어?”이우범은 박준을 보고 조금 놀랐다.“내가 안 나오면, 너는 이렇게 가버릴 거잖아. 배인호는 안 보면 그만이지, 나와 노성민도 안 볼 거니?”박준은 화가 내면서 말했다.박준은 이우범이 지난 몇 년 동안 항상 해외에 머무르고 있어 국내 친구들과의 연락이 매우 뜸했고 이번에 어쩌다 한 번 돌아왔는데 그들과 밥 먹고 술 한 잔 안 하고 허지영만 보러 온 거에 서운해했다.“나 공항에 가봐야 해.”이우범은 약간의 미안함은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우범은 하루도 여기서 보낼 생각을 안 하고 있었다.“저녁에 같이 밥 먹고 가. 지금 떠나면 너랑 나 친구로 끝이야. 알겠어?”박준은 협박하듯 말했다.이우범은 어쩔 줄 몰
박정아의 말에 허지영, 오세희, 이민정은 적극 찬성했다.다른 사람과 또 식을 올린다면 쪽팔리겠지만 같은 사람과 두번 식을 올리는 건 무엇을 설명할까? 그들이야 말로 찐 사랑인 것이다.——두 달 뒤.배인호와 허지영의 결혼식은 준비가 거의 되어가고 있었다. 결혼식의 사치와 호화로움은 무수한 감탄과 부러움을 불러일으켰다. 허지영은 천만 원 가치의 수제 웨딩드레스를 입었을때 기묘한 감정이 들었다.허지영은 처음 배인호한테 시집갈 때를 떠올렸다.그때 허지영은 자기가 직접 고른 웨딩드레스를 입었고 지금 사치스로운 드레스와 비교도 안 됐다. 그때의 배인호는 결혼식은 하나의 미션 수행처럼 모든 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그 후 몇 년이 지나고 그들은 다시 시작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허지영은 웨딩 드레스 위에 박힌 빛나는 다이아몬드를 가볍게 만졌고 그 순간 그녀는 찬란한 태양빛 처럼 화려하게 빛나는 것 같았다. 박정아를 포함한 친한 친구들은 연속 감탄했다.박정아는 허지영 주위를 돌면서 기쁨으로 가득 찬 눈빛으로 말했다. “영아, 정말 예쁘다. 몇 년 동안 방황하더니 결국 네가 원하는 행복을 얻게 되었네.”“맞아, 나도 너의 용기에 감탄해. 다행히 배인호도 정말로 많이 변한 거 같애.”오세희도 연속 감탄했다. 이민정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개과천선했으니 앞으로도 쭉 그럴 거야. 너를 또 상처 입힐 일이 있으면 우리 몇 명이 가만두지 않을 거야!”이때, 허지영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다가왔다. 두 사람은 아름다운 딸을 바라보며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허지영은 그들이 가장 아끼는 보물같은 존재였고 그녀는 감정적인 고통을 겪은 후에야 재혼이라는 결정을 내렀다. 처음에 부모님은 반대했지만 지금 받아들이기까지 수많은 과정이 있었다.하지만 이 순간, 허지영이 행복해 보이자 그들은 자신들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아빠, 엄마.”허지영은 부모님이 오자 이상하게 코가 찡해진 듯했다. 아마도 그들의 힘든 모습을 보다가 이렇게 뿌듯해하는 모습을
허지영은 배인호와 다른 여자의 스캔들을 폭로한 댓글을 보니 마음이 철렁 거렸다. 허지영은 일어서서 배인호와 아버지 쪽으로 걸어갔다. 두 사람은 바둑을 두고 있었고 경기는 아주 치열했다. 허지영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배인호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면서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허지영도 따라서 웃었다. 허지영은 스캔들에 대해 바로 묻지 않고 옆에 의자를 두고 앉아 조용히 두 사람이 바둑을 두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의 핸드폰 화면에는 배인호와 한 여자 연예인 간의 스캔들이 적힌 댓글이 고스란히 써져 있었다. 배인호는 허지영의 아버지와 바둑 한 판을 두고 난 뒤, 눈길은 자연스럽게 허지영의 핸드폰이 자기의 앞에 놓여져 있는 것을 보았고 화면이 꺼지려 하면 허지영이 화면을 다시 켜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화면에 적힌 그 말은 무슨 뜻이지?’배인호는 허지영의 휴대전화를 가져와 댓글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순간, 바둑을 계속 두고 싶은 마음도 사라졌다. 그와 허지영의 재혼을 많은 사람들이 좋게 보지 않았으며 이미 준비 중인 결혼식도 성사되지 못할 것이라는 의심이 가득하였다.‘결혼식이 엄청 화려해서 준비시간이 조금 오래 걸린 것 뿐인데 이게 무슨... 그리고 나와 한 여자 연예인이 하룻밤을 같이 보낸 스캔들이라고?’그날 밤에는 최소 일곱-여덟 명의 사람이 있었고 남자 여자 다 있었다. 주로 투자에 관한 이야기하다가 여자들이 떠나고 남은 몇 명의 남자들이 룸에서 잠을 잔 것이다. ‘언론은 이렇게 근거 없이 아무렇게나 사건의 앞뒤도 맞지 않는 헛소리를 늘어놓다니...’배인호는 허지영의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아버지, 좀 이따 다시 바둑을 둬도 괜찮을까요? 지금 급하게 좀 해결해야 할 일이 생겼어요.”허지영의 아버지는 자초지종을 모르고 배인호의 말에 급한 일이겠거니 생각하고 동의했다. 그러고 나서 허지영의 아버지는 허지영의 어머니를 도와주러 주방으로 향했다.허지영의 아버지가 나가자마자 배인호는 바로 허지영의 손을 붙잡았다. 얼굴에는 억울함이 가득
거절당한 후, 배인호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마치 모든 욕망을 내뱉으려는 듯했다.허지영은 이불을 감싸안고, 배인호와 사이에 안전한 구역을 만든 다음, 다시 잠을 이루려 했다.“여보, 벌써 자정이 넘었어.”겨우 십 분도 채 지나지 않아 약간 쉰 듯한 배인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허지영이 방금 잠에서 깨어나려는 찰나, 어느새 안전 구역을 넘어온 손이 허지영을 강하게 끌어당겨, 뜨거운 품에 꼭 안았다.“뭐 하는 거예요? 배인호 씨, 당신...”허지영이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입술이 막혔다. 겨우 의식을 회복했지만 뜨거운 키스 때문에 다시 정신이 흐릿해졌다. 허지영은 저항을 포기했다. 오늘 밤은 편하게 지낼 수 없을 것 같았다. 다음 날 정오가 되어서야, 허지영은 온몸이 녹아내린 듯한 느낌과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 주변을 돌아보자 배인호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샤워를 한 후, 허지영은 아래층으로 내려가 배인호를 발견했다.그리고 노성민과 박성아는 언제 왔는지 모르게 도착해, 세 아이를 데리고 왔다. 그 시간에 노 씨 집에 세 아이는 허지영의 세 아이와 노는 중이어서, 거실은 매우 활기찼다.박성아가 머리를 들어 계단에서 내려오는 허지영을 보고 말했다. “아이고, 지영아, 너 드디어 내려왔네. 재결합해서 기쁜 건 알겠지만, 몸조심해야 해!”허지영은 박성아를 쏘아보며, 얼굴에 부끄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자신의 옷깃을 조금 더 높이 당겼다. 그렇지 않으면 어젯밤 남은 흔적이 들킬 수 있다.그들은 다 같이 식사했다. 식사 도중, 박성아가 민설아의 일을 언급했다. “그래, 민설아가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매우 뛰어난 변호사를 고용했어. 이 여자 정말 죽을 쑤고 있어, 지금도 판을 뒤집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자신이 감옥에 안 가고 바로 무죄로 풀려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민설아의 이름을 듣고, 허지영은 본능적으로 배인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배인호는 로아와 승현, 두 아이에게 옥수수알을 까주는 데 집중하고 있어, 박성아의 말은 아예 듣
허지영은 병원으로 옮겨진 후 응급처치를 했다.허지영의 부모님은 거듭 의사에게 수술의 가능 여부 혹은 새로운 치료 방법으로 딸의 이 짧은 생명을 이어나갈 수 있는지 묻고 있었다.그러나 그들이 얻은 대답은 모두 절망적인 것이었다.병상 앞에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부모님은 마치 하룻밤 사이에 10살이나 더 늙은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병상에 누워있는 딸을 보며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졌다.“영아, 우리 놀라게 하지 말아줘. 빨리 깨어나, 강하게 버텨줘..”“우리는 다 널 응원할 거야. 네가 끈질기게 살아남을 거라고 했잖아... 버텨줘. 우리 같이 여행 가자. 응?”“넌 삼촌과 이모의 유일한 희망이야, 그들을 위해서라도 버텨야 해!”“영아, 우리 딸... 흑흑흑...”온갖 소리가 허지영의 귀에 들어왔다. 허지영은 몸에 아무런 힘도 없는 것이 느껴졌고, 눈앞은 어렴풋한 빛에 휩싸였다. 한참이 지나서야 부모님의 얼굴과 친구들이 슬퍼하는 모습이 또렷이 보였다.몹시 의외인 것은 이우범도 거기에 있었다. 그는 사람들의 가장자리에 서있었지만, 키가 커서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가 있었다.‘이우범이 왜 여기에 있지?’허지영은 입을 벌려보았지만,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고 온몸이 아프기만 하였다.“영아, 너 어떻게 우리를 버리고 떠날 수가 있어... 나랑 네 아빠는 어쩌고...” 어머니는 허지영이 깨어났지만 기뻐하기는커녕 더욱 슬프게 울고 있었다. 어머니는 자기 딸에게서 더 이상 살아갈 희망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부모님은 허지영이 왜 이 지경까지 이르렀는지 전혀 모른다.“아빠, 엄마, 제가 불효자예요... 미안해요... 다음 생이 있다면 제가 그때 효도할게요...”허지영은 허약하게 몇 마디 하려고 노력했지만, 부모님을 더 슬프게 할 뿐이였다.극심한 슬픔에 부모님은 뒤돌아 병실을 나왔다. 자기 딸에게 이토록 처참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박정아는 바로 앞장서서 허지영의 손을 꼭 잡았다.“영아, 너도 날 꼭 기억해야 해. 다음 생이 있다면 다시 나를 찾아줘.
허지영은 어린 시절부터 자기는 타고난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좋은 가문에 서로 사랑하는 부모님, 좋은 성적,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랑 결혼까지 했다. 그러나 서른도 안 되는 나이에 가정이 풍비박산나고 삶의 끝에 이르렀다.허지영은 부모님이 자신의 눈앞에서 눈물범벅이 된 모습을 지켜보고는 마음이 아려왔다. 그러나 그녀는 스스로를 속일 수가 없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고집스럽게 배인호를 그리워하고 있었다.‘배인호는 내가 유방암 말기라는 사실을 알면 보러 올까? 마음이 약해질까?’‘왜 지금 이때까지도 나는 그 잔인한 남자를 그리워하는 걸까?’허지영은 자신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현재 상태에서는 수술할 필요도 없고 방사선 치료와 안전하고 보수적인 치료 외에는 손쓸 방법이 없었다.허지영은 어떻게든 퇴원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가고 나서 가장 먼저 배인호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다.늘 그렇듯 또다시 거절당했다.허지영은 다시 배인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나 유방암 걸렸는데 말기래요. 당신이랑 얘기 좀 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이번에는 배인호가 답장을 했다.“병 걸렸으면 제대로 치료받아. 나는 의사가 아니야. 널 치료 해줄 수 없어.”이토록 차갑고 매정한 답장을 보면서 허지영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배인호의 마음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했는데, 왜 이 지경에 이르러서도 배인호는 그녀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는 걸까?“영아, 더 이상 배인호 생각은 안 하면 안될까?” 박정아와 친구들이 토끼처럼 눈이 붉어져서 허지영의 집으로 찾아왔다.“우리랑 여행 가자. 우리랑 아름다운 곳에서 아름다운 풍경도 맘껏 즐기면서 몇몇 쓰레기 같은 사람들은 깔끔하게 잊는 거야. 더는 그 쓰레기들에게 상처받지마. 응? ”허지영의 병을 알게 된 이후로 허지영의 부모를 제외하고 가장 슬퍼했던 건 박정아와 3명의 친구들이였다. 거의 매일 슬픔에 잠겨 허지영의 만날 때마다 울음을 참지 못했다.친구들은 더이상 허지영이 고통받는 걸 지켜보기 싫어했다. 그들은 허지영의 좋은 친
배인호는 식탁 위의 아침밥을 흘깃 보고선 한마디 대답도 없이 넥타이를 묶으며 거실 방향으로 걸어갔다. 허지영은 뒤따라가 한 번 더 묻고 싶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배인호가 차에 올라타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리는 모습뿐이었다.허지영은 입을 열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배인호는 크나큰 빙산이고 허지영은 작디작은 불씨였다. 허지영은 자신의 불씨로 빙산을 녹이려고 하였지만, 결국 그 작은 불씨는 빙산에 의해 꺼져버렸다.“허지영, 우리 이혼하자.”배인호는 어느날 드디어 허지영에게 처음으로 이혼을 얘기했다.허지영은 배인호가 간만에 집에 돌아왔다는 기쁨에 사로잡혀있었다. 허지영은 자신이 가장 예쁘다고 생각하는 옷을 입고 저녁에는 무엇을 먹을지 계획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혼합의서가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배씨 그룹 지분의 3%면 충분해?”“이혼이요?”허지영은 마치 날벼락을 맞은 것 같았다. 배인호가 갑자기 이혼을 꺼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 둘은 결혼 이후 함께 지낸 시간은 적었지만, 허지영은 결코 배인호의 어떤 일에도 관여하지 않고 절대적인 자유를 주었다. 이것만으로도 모자라는가?허지영은 그 수많은 스캔들을 꿋꿋이 참아오면서 작은 꼼수를 부리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하려 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배인호는 이혼을 원하는 걸까.“맞아. 난 널 전혀 사랑하지 않아. 난 지금 지키고 싶은 여자가 생겼어.”배인호는 이 말을 할 때 차갑기 그지없었다. 마치 배인호와 5년 동안이나 결혼 생활을 해온 허지영이 생명이 없는 장난감일 뿐이며 그가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존재로 여기며 아픔도 슬픔도 느끼지 않는 것처럼. 허지영의 목소리를 떨면서 말했다.“누굴 사랑하게 된 건데요? 누구예요?”하지만 배인호가 허지영에게 이런 일들을 얘기해줄 리가 없었다. 그는 차갑게 소매를 털며 말했다.“이혼 합의서 잘 살펴보고 괜찮은 것 같으면 사인해. 별로라면 나한테 연락해. 다시 얘기하자.”허지영이 말도 꺼내기 전에 배인호는
“인호 씨.”허지영은 먼저 배인호에게 인사를 건넸지만, 돌아오는 것은 상대방의 서늘하기에 그지없는 눈빛뿐이었다.그 순간 허지영은 그녀가 새신부가 아니라 철천지원수인 것만 같았다.허지영은 그 눈빛에 놀라 흠칫했다. 아마 배인호의 어머님이 때마침 나타나지 않았다면 계속 계단에 서서 멍만 때렸을 것이다.“지영아, 내려와서 아침밥 먹어야지.”배인호의 어머님이 인사를 건넸다.그제야 허지영은 정신을 차리고 조심스럽게 식당으로 걸어갔다.배인호는 처음부터 끝까지 허지영의 존재를 무시했고, 밤새 잠을 자지 않은 듯 턱에는 푸릇푸릇한 수염이 자랐고 눈은 약간 충혈되어 매우 피곤하고 짜증이 난 것같은 모습이었다.하지만 허지영은 감히 더 물어볼 수 없었고 물어보아도 대답도 안 해줄 것을 알고 있었다.그날부터 허지영은 배씨 가문의 사모님이 되었고 철저한 장식품이 되었다. 배인호는 심지어 결혼전 보다도 더 차갑게 굴었으며 종종 집에 오지 않았다.허지영은 신혼집 인테리어에 모든 심혈을 기울였고 청담동이라는 곳에 있는 별장이 바로 그녀와 배인호의 신혼집이었다. 기초 공사는 거의 끝마쳤지만 가구와 같은 인테리어도 천천히 골라야 했다.허지영은 6개월이라는 시간을 들여 청담동 별장을 꿈의 신혼집 모습으로 장식해 놓았다. 그녀는 배인호가 돌아오리라 생각했지만, 이 아름다운 집은 결국 그녀의 외로운 결혼의 무덤이 되어버렸다.“결혼한 지 얼마 됐다고 벌써 5명이나 스캔들이 생겨? 영아, 너 진짜 잘 참는다!”박정아의 전화 10통 중 9통은 배인호의 뒷담화였다.“그거 다 보여주기식일 거야.”허지영은 사실 배인호가 자신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을 마음속으로는 잘 알고 있었지만, 마치 자기의 가련한 자존감을 지키려는 듯 배인호의 편을 들어주었다.인정하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날 것만 같아서 허지영은 끝내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하루 또 하루, 한 해 또 한 해가 지나면서 허지영은 혼자 청담동에서 망부석이 된 것만 같았다. 마치 웃음거리인 것처럼 다들 그녀에 대한 기억은 점점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