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꽉 막힌 도로위.나는 ‘랑데부’카페의 구석 자리에서 두 시간째 앉아 있었다. 홀 맞은편에 앉아 하늘색 앞치마를 입고 바쁘게 음료수를 준비하는 젊은 여자를 보았다.그녀는 160 정도 되는 키에 45 킬로도 안 되는 마른 몸매였다. 하얀 피부에 숱 많은 검은 머리카락은 포니테일로 높게 묶어 넘실거렸다. 반달처럼 웃고 있는 눈이 매력적이었다.“사모님 커피 리필해 드릴가요?”그녀가 다가와 환하게 웃으며 물었다.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었다. 나도 모르게 그녀를 보며 넋을 놓고 있었다. 내가 여자라 다행이지 그게 아니면 변태 같아 보였을 것이다.“좋아요. 아메리카노로 주세요.”나는 나이스하게 웃으며 나긋하게 말했다.그녀는 빠르게 또 한 잔의 쓴 아메리카노를 가져왔다. 그녀는 금방 돌아서지 않고 잠시 고민하더니 말을 걸었다.“사모님 이미 아메리카노를 두 잔째 마시는 거 같으신데 너무 많이 마시면 몸 상하실까 걱정되네요. 아니면 다음에 와서 마시는 건 어떠세요?”그녀는 착하고 활발해 보였다. 말하는 목소리도 명랑해서 꼭 은방울을 굴리는 것처럼 듣기 좋았다.나는 테이블에 놓인 아메리카노를 한번 쳐다보고 백을 들고 일어섰다.“좋아요. 계산할게요.”그녀는 내가 그녀의 말대로 해서 신이 났는지 냉큼 뛰어가서 계산서를 보고 말했다.“사모님, 모두 2만원 입니다. 현금 결제로 하시겠어요? 아니면 카드로 하시겠어요?”나는 말없이 현금을 내고 밖으로 나왔다.“사모님.”이 기사는 내가 나오는 것을 보고 고개를 숙이며 차 문을 열어 주었다.“집으로 가죠.”차는 천천히 출발했고 나는 뒷좌석에 앉아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 아까 카페에서 봤던 여자의 청순하고 찬란하게 빛나던 얼굴이 계속 떠올랐다.그녀인가? 일 년 후 배인호가 가족들과 연을 끊고 어마어마한 위자료를 주면서까지 나와 이혼하게 만든 사람이.나도 생각지 못했다. 환생 후 처음으로 하는 일이 그녀가 일하는 곳에 찾아가 몰래 훔쳐보는 것일 줄은.너무나도 궁금했다. 도대체 어떤 여자가 내가 10년
“진심이에요.”나는 똑바로 앉아 흔들림 없이 그의 숨 막힐 듯한 눈빛을 마주했다.“5년이에요. 어차피 인호 씨도 나 사랑하지 않잖아요. 우리 서로 갈 길 가요.”한 달 후면 서울에서 열리는 대규모 비즈니스 심포지엄에서 배인호는 서빙을 하는 서란을 만나 첫눈에 반해 강제로 빼앗고 그녀를 소유하고 싶어 한다.나는 그 열렬한 그들의 사랑 이야기에서 바람처럼 빠져 줄 것이다.내가 하고 싶은 것, 할 수 있는 것, 해야 하는 것은 이미 전생에서 다 해봤지만 결국 비참한 결말이었다. 이번 생에 나는 절대로 세상의 비웃음거리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 가족도 진흙탕 속에 빠지게 할 수 없다. 내 눈빛이 너무 진지했는지 배인호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그의 성격은 별로 좋지 않았고 누가 건드리기만 하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았다. “허허, 나 배인호가 지금 누군가의 노리개가 된 거야?”그는 웃기 시작했지만, 눈빛은 차가웠다.“5년 전엔 그렇게 나한테 시집오려고 하더니 지금은 또 이혼하고 싶어? 허지영, 너 지금 나 갖고 장난해?”5년 전 배씨 가문과 허씨 가문은 사이가 좋았다. 그래서 우리 둘을 붙여 놓은 것이다.배인호의 성격상 말을 듣지 않았지만, 그때 마침 그의 할아버지께서 위독하셔서 부득이하게 나와 결혼했다. 배인호도 꽤 억울했을 것이다. 그도 사랑하는 사람이 없었고 마침 기업을 이어받을 준비를 하고 있어 현모양처가 필요했다. 그렇게 나와 5년을 함께 했다.나는 조금 슬픈 쓴웃음을 지었다.“그럼, 당신은 나와 이 허울뿐인 결혼을 계속 이어가고 싶어요?”“허울뿐인?”배인호는 그 네 글자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하더니 한쪽 눈썹을 올리곤 나를 조롱하듯 물었다.“아, 너 외로워?”“아니요. 나는 그저...”나는 할 말을 생각하고 있는데 그는 이미 내 쪽으로 걸어와 양손을 소파 옆에 올리더니 나를 품 안에 가둔 채 매력적인 목소리로 말했다.“외로우면 나한테 말하지. 왜 마음대로 이혼하자고 해. 그렇게 욕구불만이야?”배인호는 담배를 좋
이들은 나의 제일 친한 친구들이다. 전생에 나의 사랑 때문에 우리 가문까지 배인호에게 짓밟힐 때 그녀들이 도와주었다. 비록 배인호를 이기진 못했지만 가장 힘들 때 도와준 그녀들의 마음을 나는 가슴 깊이 새겼다. 나는 그녀들에게 환생했다는 이야기는 할 수 없었지만, 곧 배인호와 이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나의 말을 듣고 세 사람은 몇 초 침묵하더니 바로 손뼉을 쳤다.“잘했어! 우리 지영이 콩깍지 벗겨진 걸 축하하며 오늘 마시고 죽자!’“CHeers!”나도 즐겁게 환호하며 마른 나뭇가지 같은 팔을 높게 들었다. 배인호와 이혼하면 전생의 비극에서 벗어나 새로운 인생을 자유롭게 펼칠 것이다. 술이 몇 잔 들어가니 다들 조금 취했다. 우리는 술기운에 더 열정적으로 춤을 추기 시작했다.민정이가 나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지영아, 주위에 잘 봐봐. 눈에 들어오는 멋진 남자 없는지. 무서워하지 말고 즐겨! 배인호는 계속 스캔들 터지는데 우리도 질 수는 없어!”“그... 그래. 일리 있네.”나는 취해서 몽롱한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시선이 한 뒷모습에 멈췄다. 키도 크고 말라서 옷도 어리게 입은 걸 보니 아마도 대학생?배인호도 여자 대학생을 만나는데 나라고 못 만날 거 있나.나는 술잔을 들고 이리저리 휘청이며 다가가서 남자의 어깨를 톡톡 쳤다.“머... 멋진 오빠. 같이 술 마실래요? 내가 살... 살게요.”젊은 남자는 고개를 돌렸다. 예쁘장하게 잘생긴 꽃미남 느낌이었다.그는 놀라서 나를 쳐다보더니 미안한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죄송해요, 누나. 저 여친 있어요.”“아, 그래? 그럼, 미안. 여친 없는 사람으로 다시 찾아볼게...”나는 그 남자에게 허리 숙여 사과했다. 알코올에 마비되어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다. 나는 방향을 틀어 다른 사람을 물색했다.그런데 몇 걸음 걷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에 이리저리 치어 손에 들고 있던 술잔도 떨어뜨려 깨졌다. 나는 어지러워 거의 쓰러
“꿈도 꾸지 마! 허지영. 이렇게 평생을 나와 결혼한 걸 후회하면서 살아.”배인호는 이성을 되찾았고 나의 의도를 알아차린 듯했다.“각자 놀고 싶어? 그러자 그럼.”충격적이었다. 그와 결혼한 걸 후회하게 하려고 내가 바람을 피워도 감수하겠다는 건가? 억지로 한 결혼이 그에게 이렇게 큰 트라우마로 될 줄은 몰랐다. 그래서 이토록 극단적인 방법으로 나에게 되갚아줘야 그의 마음이 풀리는 거다.잠시 생각에 빠져 있는데 배인호는 손을 뻗어 나의 허리를 잡아 끌었다. 나의 몸을 그에게 바짝 붙였다. 그는 입술을 핥으며 어두운 눈빛으로 내게 말했다.“내가 이차성징 도와줄까?”“싫어.”나는 배인호를 막았다.배인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처럼 똑똑한 사람이 요즘 나의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을 리가 없다. 그는 나의 턱을 잡아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바라보게 했다.“허지영 쌍둥이 동생이야? 응?”그를 10년이나 좋아한 여자가 어떻게 이렇게 변할 수 있지?나는 쓴웃음을 지었다.“맞춰봐요.”“허지영. 우리 결혼은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야. 끝나는 순간 얼마나 많은 분쟁이 일어나는지 알아? 난 너랑 사랑놀이할 시간 없으니깐 그렇게 외로우면 밖에서 놀아.”그는 내 물음을 가볍게 흘렸다. 그러고는 귓가에 다가와 속삭였다.“콘돔 끼는 거 잊지 말고. 나는 잡종은 인정 못 해.”나는 한번 죽었다 깨어난 사람인지라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평정심을 가졌다고 생각했지만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배인호의 뺨을 아프게 때렸다. 얼마나 힘을 줬는지 나의 손도 얼얼했다.배인호의 뺨에 나의 손가락 자국이 빨갛게 올라왔다. 이 상황에서도 그의 옆모습은 날카로운 턱선을 자랑하는 완벽한 얼굴이었다. 따귀를 맞아도 잘생긴 남자였다.그는 천천히 머리를 돌렸다. 눈빛이 음침하고 무서웠고 당장이라도 나의 목을 조를 것만 같았다. 나는 손이 부들부들 덜려왔다. 무서워서가 아니라 너무 세게 때린 나머지 손에 난 상처가 벌어져 피가 흐르고
“이 기사님, 가사 서비스 회사에 연락해서 이모님 몇 분 구해주세요. 음식 솜씨가 엄청 좋은 사람으로, 영양사 자격증까지 있으면 더 좋고요.”나는 영양제가 든 쇼핑백과 나란히 뒷좌석에 탔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이 기사님에게 부탁했다.“알겠습니다. 사모님.”이 기사가 대답했다.배인호와 결혼하고 양가 부모님들은 가사도우미 몇 분을 고용해 청소, 정원수리, 요리 등을 시키라고 하셨지만 그때 나는 콩깍지가 단단히 씌워져 있을 때라 거절했다. 배인호와 나의 신혼집에 다른 사람이 있는 게 거슬렸다. 신혼인데 거실에서부터 주방까지 구애받지 않고 애정행각을 하려면 방해받을 것 같았다. 결국 보다시피 나는 과부처럼 지내고 있다. 환생하고 나서 다시는 그런 헛된 꿈을 꾸고 싶지 않았다.집에 도착한 나는 프라다 핸드백을 들고 앞에서 걸어가고 있었고 뒤에서는 이 기사님이 영양제가 든 쇼핑백을 들고 따라왔다. 문을 열자, 배인호가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옷소매를 정리하는 모습이 자연스러우면서도 매력적이었다.“이 기사님, 그만 가보세요.”나는 핸드백을 내려놓고 이 기사님에게 말했다.이 기사님은 영양제를 테이블에 올려놓고 배인호에게 허리 굽혀 깍듯이 인사하고는 서둘러 떠났다.“한 시간 뒤에 파티 있어. 네 부모님들도 참석하실 거야. 너도 준비하고 같이 가.”배인호는 내가 무엇을 사 왔는지 관심도 없었고 그저 묵묵히 나에게 통보했다. 그는 종래로 이런 장소에 나를 데리고 간 적이 없었다. 오늘처럼 부모님들이 참석해야 나는 쓸모가 있었다.환생하고 나서는 부모님을 뵌 적이 없었다. 불효라는 걸 알지만, 전생의 일들 때문에 뵐 면목이 없었다.“음... 그래요.”나는 이층으로 올라갔다.지난 보름 동안 나는 끊임없이 새 옷들을 쇼핑했다. 전에 입던 단조롭고 우중충한 옷들 말고 다양한 디자인으로 샀다.빨간색 미니드레스를 골랐다. 오프숄더에 앞은 브이넥으로 디자인되어 있어 살짝 파이긴 했지만 얇은 레이스로 감싸고 있었다. 아래는 머메이드 디자인으로 각선미를 돋보이게 하는
이청하는 그제야 나를 알아보았는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눈빛에서 강한 적대감이 느껴졌지만 먼저 나를 건드리진 못했다.엄마와 같이 자리에 앉았고 투정을 부렸다.“사실 나 별로 오고 싶지 않았는데 인호 씨가 같이 오자고 해서 왔어요. 근데 너무 심심해요.”“이건 일이야. 얘는 심심하긴 뭐가 심심해.”엄마는 나의 작은 손을 잡고 야단쳤지만, 말투에서 애정이 느껴졌다.나는 곁눈질로 이청하를 한번 쳐다보고는 엄마와 일상적인 수다를 이어갔다.“심심한데 어떡해요. 맞다 엄마, 나 이 기사님한테 가사 서비스 전문 업체에 연락해서 가사도우미분 좀 구해달라고 했어요. 갑자기 살 좀 찌우고 싶어요. 인호 씨도 나 너무 말랐다고 해서 밥 잘 챙겨 먹고 꿀잠도 자야겠어요.”이청하는 입술을 깨물며 애써 참고 있는 것 같았다.“처음부터 구했어야지. 둘이 살기에 좀 큰 집이니. 너 혼자서 어떻게 다 한다고.”엄마는 나의 말에 찬성했다.“나는 그저 남편이랑 둘만의 공간을 즐기고 싶었죠. 이젠 충분해요.”나는 일부러 야릇한 말들을 했다. 이청하쯤이면 배인호 인생에서 가볍게 만나고 버리는 정도였다. 서란처럼 중요한 캐릭터도 아닌데 굳이 내가 나설 필요도 없었다.이청하는 화가 난 듯 일어나서 파티장을 나갔다.진소진도 민망한지 따라 나갔다.파티가 끝나기를 기다리던 나는 배인호와 같이 돌아가고 싶지 않아 친정에서 며칠 부모님과 함께 있겠다고 했다.“그럼 나 먼저 갈게.”배인호는 내가 그를 쪽팔리게만 하지 않는다면 어디로 가든 상관하지 않았다.아빠는 파티가 끝났는데도 아직 친구들과 얘기 중이셨다. 엄마는 나에게 차 키를 주며 아빠를 데리고 갈테니 먼저 주차장에 가서 기다리고 했다.나는 차 키를 들고 주차장으로 내려가 아빠 차를 찾았다. 차에 타려는데 배인호와 이청하가 다투는 모습이 보였다.이청하는 억울한 듯 배인호의 옷소매를 잡고 애원했다.“나한테 그렇게 잘해줬으면서 한 번도 진심이 아니었어요? 난 못 믿어요!”“믿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해. 귀찮게 하지 말고
“아이고, 너 대체 무슨 일이야? 인호가 서운하게 했어? 내일 내가 인호 찾아가서 우리 딸 괴롭히지 말라고 따끔하게 혼내야겠네......”엄마가 깜짝 놀라시면서 달려와 나를 안아 주셨다.“엄마, 인... 인호 씨가 그런 거 아니에요. 엄마가 잘해주니깐 내가 너무 감동 받아서...”나는 엄마의 허리를 끌어안고 울먹이며 말했다.배인호가 괴롭힌 것이 아니라 모든 일은 나의 미련한 희망 때문이었다. 그는 잔인한 악당이었고 나는 어리석게 그를 사랑하는 여자였다.엄마는 나의 등을 살살 쓰다듬어 주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하나뿐인 딸인 나를 엄마는 제일 잘 알고 있었다. 어떻게 배인호 때문이라는 걸 엄마가 모를 수 있을까?나는 울보가 아니다. 억울한 일만 없으면 절대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삼계탕 먹을 거야?”“먹을래요. 너무 먹고 싶었어요...”나는 눈물을 닦으며 침대에서 일어나 엄마의 팔짱을 끼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아빠는 이미 주무시는 것 같았다. 식탁에서 엄마와 둘이 앉아 오붓하게 얘기하며 맛있게 삼계탕을 먹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반 마리를 해치웠다. 요 몇 년 사이 너무 적게 먹었는데 갑자기 많이 먹으니 체해서 토할뻔했다. 엄마는 나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왜 그렇게 많이 먹어. 그러다 불편해서 잠 안 올 수도 있어.”“너무 배고파서요.”나는 바보처럼 웃었다. 이렇게 맛있게 먹은 적이 정아 그리고 다른 애들과 함께한 졸업 파티에서였다. 졸업한 뒤 배인호와 결혼했고 그 뒤로는 원망만 가득한 여자의 삶을 살았다.“배고파도 천천히 먹어. 적당히 먹는 게 제일 좋아.”엄마는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나는 그녀의 팔에 얼굴을 비비며 애교를 부렸다.“엄마, 오늘 나랑 같이 자요. 건강 상식도 가르쳐주고!”엄마가 그러자고 할 줄은 생각지 못했다.다음날 일어나니 전례 없이 개운했다. 잘 먹고 잘 잘잤고 집에서 아침밥까지 먹고 나는 병원으로 향했다.기선우는 핸드폰을 하고 있었다. 다리는 뼈까지 다친 건 아니지만 피부 손상이 심해 꿰매고 붕대가
“애초에 보상해야 할 범위가 정해진 것도 아니고 선우 다리에 흉도 질텐데 이만큼 받아야지. 얘기 나눠. 나는 일 있어서 그만 일어날게.”나는 말을 마치고 병실을 나섰다.두 사람이 아무 걱정 없이 달콤한 시간을 보낼 날도 고작 보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보름 뒤면 배인호의 강렬한 등장으로 서란은 그의 사냥감이 될 것이고 기선우는 서란과 행복하게 웃으며 대화할 기회조차 없을 것이다.이렇게 생각하니 배인호가 정말 짐승 같았다.병원을 떠나며 나는 이 기사님에게 청담동에 위치한 배인호와 나의 별장으로 가달라고 했다. 얼마 전에 지은 한약을 거기에 두고 왔다. 한약을 가지고 친정에서 달여 먹으면서 거기에 엄마의 음식솜씨까지 더해지면 금방 살이 오를 것이다.한약은 거실에 그대로 있었다. 어젯밤 배인호는 집에 돌아오지 않았나 보다. 이청하와 어떻게 끝냈는지 알 수 없었다.“어제 왜 차에서 안 내렸어?”한약을 가지고 떠나려는데 계단에서 내려오는 배인호와 마주쳤다. 그는 불쾌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그가 왜 집에 있는 거지? 평소라면 3개월에 한 번 들어오는데.배인호는 올 블랙의 홈웨어를 입고 있었고 매우 심플해보였다. 하지만 그의 얼굴과 몸매가 더해지니 더 매력적으로 보였다.“전에도 당신의 스캔들에 나는 관여하지 않았어요. 이번에도 다를 거 없고요.”나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래? 그럼, 걔네들이 하나 같이 캐스팅이 무산되고 안 좋은 스캔들이 터진 건 다 우연이겠네?”그는 무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그는 내가 한 일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나를 막지 않은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여자들은 그저 잠시 데리고 놀뿐 진심이 아니었다. 서란을 만난 후로 내가 그녀를 만나 대화라도 해보려고 하면 배인호는 성난 사자처럼 나를 찢어 죽일 듯이 달려들었다.나는 부인하지 않았다.“매번 당신이 그녀들한테 적지 않은 돈과 캐스팅 기회를 주는데 그것도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에요. 내가 내 방식대로 돌려받겠다는데 뭐가 문제죠?”배인호가
허지영은 이우범이 진심으로 배인호에게 말하는 것을 들어서야 마음 깊이 있던 궁금증이 드디어 풀렸다.그녀는 이것이 배인호와 이우범이 화해하는 발판이 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역시 배인호의 얼굴은 점점 더 편안해져 갔다. 잠깐의 침묵이 있었던 뒤 배인호도 말했다.“그래, 우리도 영원한 친구야.” 그는 말을 끝낸 후에 허지영을 바라보았다. 허지영은 그의 행동이 맞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배인호는 이 순간이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손에 넣고 우정도 되찾은 진정한 승리자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전화를 끊은 후, 배인호는 두 팔을 벌렸고 허지영은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품에 안겼다. 그들은 서로를 꽉 껴안았다. 빈이가 로아와 승현을 데리고 이런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빠, 아빠한테 책 좀 읽어달라고 해줘요~”로아가 낮은 목소리로 빈이를 재촉하였다.세 사람은 잠을 오지 않아서 내려가 배인호더러 그들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하려고 했다.그런데 세 사람은 내려오자마자 아빠와 엄마가 행복하게 안고 있는 것을 보자 조금은 부끄러워졌다.로아와 승현 두 아이는 너무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을 감출 수 없었고 빈이는 어른이 다 되였기 때문에 괜찮았다.“유니콘, 유니콘!”승현는 유니콘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계속 떠오르고 있었다. 배인호가 유니콘의 이야기를 승현에게 들려준 후부터 승현은 노래를 들을 때도《유니콘》만 듣고 싶어 했다.두 어린이는 빈이를 양쪽에서 감쌌고 포동포동한 손으로 그의 소매를 잡으며 기대로 가득 찬 큰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로아와 승현은 나이는 어리지만 똑똑해서 아빠와 엄마가 포옹하고 있을 때는 방해하면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이가 그들보다 많은 빈이는 방해해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빈이가 주저하고 있을 때 로아의 간절한 눈빛에 빈이는 말했다.“내가 너희들에게 책을 읽어주면 어때?”“형은 못 해! 못 해!”승현이가 거절했다. 왜냐하면 형한테 유니콘을 불러달라 했을 때 음정이 하나도 맞지 않아서였다.로아도 그렇
허지영은 자기 앞에 무릎을 꿇은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이것은 그녀가 오랫동안 사치하게 그리던 장면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일을 겪은 후에야 이룰 수 있었다.그녀의 눈시울도 붉어졌고 마침내 그녀는 머리를 끄덕였다. “좋아요.”사람들은 열렬한 박수를 터뜨렸다. 모두 이 부부의 재결합을 기뻐했지만 아무도 인파 뒤에서 한 남자가 조용히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그는 모자와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 얼굴을 알아보기 어려웠다. 그는 배인호가 반지를 허지영의 손가락에 끼우는 것을 보고 나서야 묵묵히 자리를 떠났다.그는 저택을 떠나 차에 올랐고 모자와 선글라스를 벗으며 차갑고 마른 얼굴을 드러냈다.이우범은 원래 해외에 있어야 했지만 참지 못하고 결국 배인호와 허지영의 결혼식에 참석했고 오늘의 입장권도 박준이 그를 위해 비밀리로 얻어 주었다.이제 허지영이 행복을 찾았음을 직접 보았으니 이우범은 안심하고 떠날 수 있었다.이우범이 막 차를 몰고 떠나려고 할 때, 박준이 어느새 따라 나와 차 앞에 막아 섰다.“이우범, 왜 벌써 가려고?”다른 사람들은 이우범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박준은 그가 올때부터 알아 보았다.박준은 이우범이 아직 허지영을 놓지 못했고 분명히 그녀의 결혼식에 몰래 참석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넌 왜 나왔어?”이우범은 박준을 보고 조금 놀랐다.“내가 안 나오면, 너는 이렇게 가버릴 거잖아. 배인호는 안 보면 그만이지, 나와 노성민도 안 볼 거니?”박준은 화가 내면서 말했다.박준은 이우범이 지난 몇 년 동안 항상 해외에 머무르고 있어 국내 친구들과의 연락이 매우 뜸했고 이번에 어쩌다 한 번 돌아왔는데 그들과 밥 먹고 술 한 잔 안 하고 허지영만 보러 온 거에 서운해했다.“나 공항에 가봐야 해.”이우범은 약간의 미안함은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우범은 하루도 여기서 보낼 생각을 안 하고 있었다.“저녁에 같이 밥 먹고 가. 지금 떠나면 너랑 나 친구로 끝이야. 알겠어?”박준은 협박하듯 말했다.이우범은 어쩔 줄 몰
박정아의 말에 허지영, 오세희, 이민정은 적극 찬성했다.다른 사람과 또 식을 올린다면 쪽팔리겠지만 같은 사람과 두번 식을 올리는 건 무엇을 설명할까? 그들이야 말로 찐 사랑인 것이다.——두 달 뒤.배인호와 허지영의 결혼식은 준비가 거의 되어가고 있었다. 결혼식의 사치와 호화로움은 무수한 감탄과 부러움을 불러일으켰다. 허지영은 천만 원 가치의 수제 웨딩드레스를 입었을때 기묘한 감정이 들었다.허지영은 처음 배인호한테 시집갈 때를 떠올렸다.그때 허지영은 자기가 직접 고른 웨딩드레스를 입었고 지금 사치스로운 드레스와 비교도 안 됐다. 그때의 배인호는 결혼식은 하나의 미션 수행처럼 모든 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그 후 몇 년이 지나고 그들은 다시 시작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허지영은 웨딩 드레스 위에 박힌 빛나는 다이아몬드를 가볍게 만졌고 그 순간 그녀는 찬란한 태양빛 처럼 화려하게 빛나는 것 같았다. 박정아를 포함한 친한 친구들은 연속 감탄했다.박정아는 허지영 주위를 돌면서 기쁨으로 가득 찬 눈빛으로 말했다. “영아, 정말 예쁘다. 몇 년 동안 방황하더니 결국 네가 원하는 행복을 얻게 되었네.”“맞아, 나도 너의 용기에 감탄해. 다행히 배인호도 정말로 많이 변한 거 같애.”오세희도 연속 감탄했다. 이민정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개과천선했으니 앞으로도 쭉 그럴 거야. 너를 또 상처 입힐 일이 있으면 우리 몇 명이 가만두지 않을 거야!”이때, 허지영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다가왔다. 두 사람은 아름다운 딸을 바라보며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허지영은 그들이 가장 아끼는 보물같은 존재였고 그녀는 감정적인 고통을 겪은 후에야 재혼이라는 결정을 내렀다. 처음에 부모님은 반대했지만 지금 받아들이기까지 수많은 과정이 있었다.하지만 이 순간, 허지영이 행복해 보이자 그들은 자신들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아빠, 엄마.”허지영은 부모님이 오자 이상하게 코가 찡해진 듯했다. 아마도 그들의 힘든 모습을 보다가 이렇게 뿌듯해하는 모습을
허지영은 배인호와 다른 여자의 스캔들을 폭로한 댓글을 보니 마음이 철렁 거렸다. 허지영은 일어서서 배인호와 아버지 쪽으로 걸어갔다. 두 사람은 바둑을 두고 있었고 경기는 아주 치열했다. 허지영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배인호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면서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허지영도 따라서 웃었다. 허지영은 스캔들에 대해 바로 묻지 않고 옆에 의자를 두고 앉아 조용히 두 사람이 바둑을 두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의 핸드폰 화면에는 배인호와 한 여자 연예인 간의 스캔들이 적힌 댓글이 고스란히 써져 있었다. 배인호는 허지영의 아버지와 바둑 한 판을 두고 난 뒤, 눈길은 자연스럽게 허지영의 핸드폰이 자기의 앞에 놓여져 있는 것을 보았고 화면이 꺼지려 하면 허지영이 화면을 다시 켜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화면에 적힌 그 말은 무슨 뜻이지?’배인호는 허지영의 휴대전화를 가져와 댓글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순간, 바둑을 계속 두고 싶은 마음도 사라졌다. 그와 허지영의 재혼을 많은 사람들이 좋게 보지 않았으며 이미 준비 중인 결혼식도 성사되지 못할 것이라는 의심이 가득하였다.‘결혼식이 엄청 화려해서 준비시간이 조금 오래 걸린 것 뿐인데 이게 무슨... 그리고 나와 한 여자 연예인이 하룻밤을 같이 보낸 스캔들이라고?’그날 밤에는 최소 일곱-여덟 명의 사람이 있었고 남자 여자 다 있었다. 주로 투자에 관한 이야기하다가 여자들이 떠나고 남은 몇 명의 남자들이 룸에서 잠을 잔 것이다. ‘언론은 이렇게 근거 없이 아무렇게나 사건의 앞뒤도 맞지 않는 헛소리를 늘어놓다니...’배인호는 허지영의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아버지, 좀 이따 다시 바둑을 둬도 괜찮을까요? 지금 급하게 좀 해결해야 할 일이 생겼어요.”허지영의 아버지는 자초지종을 모르고 배인호의 말에 급한 일이겠거니 생각하고 동의했다. 그러고 나서 허지영의 아버지는 허지영의 어머니를 도와주러 주방으로 향했다.허지영의 아버지가 나가자마자 배인호는 바로 허지영의 손을 붙잡았다. 얼굴에는 억울함이 가득
거절당한 후, 배인호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마치 모든 욕망을 내뱉으려는 듯했다.허지영은 이불을 감싸안고, 배인호와 사이에 안전한 구역을 만든 다음, 다시 잠을 이루려 했다.“여보, 벌써 자정이 넘었어.”겨우 십 분도 채 지나지 않아 약간 쉰 듯한 배인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허지영이 방금 잠에서 깨어나려는 찰나, 어느새 안전 구역을 넘어온 손이 허지영을 강하게 끌어당겨, 뜨거운 품에 꼭 안았다.“뭐 하는 거예요? 배인호 씨, 당신...”허지영이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입술이 막혔다. 겨우 의식을 회복했지만 뜨거운 키스 때문에 다시 정신이 흐릿해졌다. 허지영은 저항을 포기했다. 오늘 밤은 편하게 지낼 수 없을 것 같았다. 다음 날 정오가 되어서야, 허지영은 온몸이 녹아내린 듯한 느낌과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 주변을 돌아보자 배인호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샤워를 한 후, 허지영은 아래층으로 내려가 배인호를 발견했다.그리고 노성민과 박성아는 언제 왔는지 모르게 도착해, 세 아이를 데리고 왔다. 그 시간에 노 씨 집에 세 아이는 허지영의 세 아이와 노는 중이어서, 거실은 매우 활기찼다.박성아가 머리를 들어 계단에서 내려오는 허지영을 보고 말했다. “아이고, 지영아, 너 드디어 내려왔네. 재결합해서 기쁜 건 알겠지만, 몸조심해야 해!”허지영은 박성아를 쏘아보며, 얼굴에 부끄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자신의 옷깃을 조금 더 높이 당겼다. 그렇지 않으면 어젯밤 남은 흔적이 들킬 수 있다.그들은 다 같이 식사했다. 식사 도중, 박성아가 민설아의 일을 언급했다. “그래, 민설아가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매우 뛰어난 변호사를 고용했어. 이 여자 정말 죽을 쑤고 있어, 지금도 판을 뒤집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자신이 감옥에 안 가고 바로 무죄로 풀려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민설아의 이름을 듣고, 허지영은 본능적으로 배인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배인호는 로아와 승현, 두 아이에게 옥수수알을 까주는 데 집중하고 있어, 박성아의 말은 아예 듣
허지영은 병원으로 옮겨진 후 응급처치를 했다.허지영의 부모님은 거듭 의사에게 수술의 가능 여부 혹은 새로운 치료 방법으로 딸의 이 짧은 생명을 이어나갈 수 있는지 묻고 있었다.그러나 그들이 얻은 대답은 모두 절망적인 것이었다.병상 앞에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부모님은 마치 하룻밤 사이에 10살이나 더 늙은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병상에 누워있는 딸을 보며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졌다.“영아, 우리 놀라게 하지 말아줘. 빨리 깨어나, 강하게 버텨줘..”“우리는 다 널 응원할 거야. 네가 끈질기게 살아남을 거라고 했잖아... 버텨줘. 우리 같이 여행 가자. 응?”“넌 삼촌과 이모의 유일한 희망이야, 그들을 위해서라도 버텨야 해!”“영아, 우리 딸... 흑흑흑...”온갖 소리가 허지영의 귀에 들어왔다. 허지영은 몸에 아무런 힘도 없는 것이 느껴졌고, 눈앞은 어렴풋한 빛에 휩싸였다. 한참이 지나서야 부모님의 얼굴과 친구들이 슬퍼하는 모습이 또렷이 보였다.몹시 의외인 것은 이우범도 거기에 있었다. 그는 사람들의 가장자리에 서있었지만, 키가 커서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가 있었다.‘이우범이 왜 여기에 있지?’허지영은 입을 벌려보았지만,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고 온몸이 아프기만 하였다.“영아, 너 어떻게 우리를 버리고 떠날 수가 있어... 나랑 네 아빠는 어쩌고...” 어머니는 허지영이 깨어났지만 기뻐하기는커녕 더욱 슬프게 울고 있었다. 어머니는 자기 딸에게서 더 이상 살아갈 희망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부모님은 허지영이 왜 이 지경까지 이르렀는지 전혀 모른다.“아빠, 엄마, 제가 불효자예요... 미안해요... 다음 생이 있다면 제가 그때 효도할게요...”허지영은 허약하게 몇 마디 하려고 노력했지만, 부모님을 더 슬프게 할 뿐이였다.극심한 슬픔에 부모님은 뒤돌아 병실을 나왔다. 자기 딸에게 이토록 처참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박정아는 바로 앞장서서 허지영의 손을 꼭 잡았다.“영아, 너도 날 꼭 기억해야 해. 다음 생이 있다면 다시 나를 찾아줘.
허지영은 어린 시절부터 자기는 타고난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좋은 가문에 서로 사랑하는 부모님, 좋은 성적,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랑 결혼까지 했다. 그러나 서른도 안 되는 나이에 가정이 풍비박산나고 삶의 끝에 이르렀다.허지영은 부모님이 자신의 눈앞에서 눈물범벅이 된 모습을 지켜보고는 마음이 아려왔다. 그러나 그녀는 스스로를 속일 수가 없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고집스럽게 배인호를 그리워하고 있었다.‘배인호는 내가 유방암 말기라는 사실을 알면 보러 올까? 마음이 약해질까?’‘왜 지금 이때까지도 나는 그 잔인한 남자를 그리워하는 걸까?’허지영은 자신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현재 상태에서는 수술할 필요도 없고 방사선 치료와 안전하고 보수적인 치료 외에는 손쓸 방법이 없었다.허지영은 어떻게든 퇴원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가고 나서 가장 먼저 배인호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다.늘 그렇듯 또다시 거절당했다.허지영은 다시 배인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나 유방암 걸렸는데 말기래요. 당신이랑 얘기 좀 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이번에는 배인호가 답장을 했다.“병 걸렸으면 제대로 치료받아. 나는 의사가 아니야. 널 치료 해줄 수 없어.”이토록 차갑고 매정한 답장을 보면서 허지영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배인호의 마음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했는데, 왜 이 지경에 이르러서도 배인호는 그녀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는 걸까?“영아, 더 이상 배인호 생각은 안 하면 안될까?” 박정아와 친구들이 토끼처럼 눈이 붉어져서 허지영의 집으로 찾아왔다.“우리랑 여행 가자. 우리랑 아름다운 곳에서 아름다운 풍경도 맘껏 즐기면서 몇몇 쓰레기 같은 사람들은 깔끔하게 잊는 거야. 더는 그 쓰레기들에게 상처받지마. 응? ”허지영의 병을 알게 된 이후로 허지영의 부모를 제외하고 가장 슬퍼했던 건 박정아와 3명의 친구들이였다. 거의 매일 슬픔에 잠겨 허지영의 만날 때마다 울음을 참지 못했다.친구들은 더이상 허지영이 고통받는 걸 지켜보기 싫어했다. 그들은 허지영의 좋은 친
배인호는 식탁 위의 아침밥을 흘깃 보고선 한마디 대답도 없이 넥타이를 묶으며 거실 방향으로 걸어갔다. 허지영은 뒤따라가 한 번 더 묻고 싶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배인호가 차에 올라타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리는 모습뿐이었다.허지영은 입을 열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배인호는 크나큰 빙산이고 허지영은 작디작은 불씨였다. 허지영은 자신의 불씨로 빙산을 녹이려고 하였지만, 결국 그 작은 불씨는 빙산에 의해 꺼져버렸다.“허지영, 우리 이혼하자.”배인호는 어느날 드디어 허지영에게 처음으로 이혼을 얘기했다.허지영은 배인호가 간만에 집에 돌아왔다는 기쁨에 사로잡혀있었다. 허지영은 자신이 가장 예쁘다고 생각하는 옷을 입고 저녁에는 무엇을 먹을지 계획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혼합의서가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배씨 그룹 지분의 3%면 충분해?”“이혼이요?”허지영은 마치 날벼락을 맞은 것 같았다. 배인호가 갑자기 이혼을 꺼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 둘은 결혼 이후 함께 지낸 시간은 적었지만, 허지영은 결코 배인호의 어떤 일에도 관여하지 않고 절대적인 자유를 주었다. 이것만으로도 모자라는가?허지영은 그 수많은 스캔들을 꿋꿋이 참아오면서 작은 꼼수를 부리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하려 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배인호는 이혼을 원하는 걸까.“맞아. 난 널 전혀 사랑하지 않아. 난 지금 지키고 싶은 여자가 생겼어.”배인호는 이 말을 할 때 차갑기 그지없었다. 마치 배인호와 5년 동안이나 결혼 생활을 해온 허지영이 생명이 없는 장난감일 뿐이며 그가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존재로 여기며 아픔도 슬픔도 느끼지 않는 것처럼. 허지영의 목소리를 떨면서 말했다.“누굴 사랑하게 된 건데요? 누구예요?”하지만 배인호가 허지영에게 이런 일들을 얘기해줄 리가 없었다. 그는 차갑게 소매를 털며 말했다.“이혼 합의서 잘 살펴보고 괜찮은 것 같으면 사인해. 별로라면 나한테 연락해. 다시 얘기하자.”허지영이 말도 꺼내기 전에 배인호는
“인호 씨.”허지영은 먼저 배인호에게 인사를 건넸지만, 돌아오는 것은 상대방의 서늘하기에 그지없는 눈빛뿐이었다.그 순간 허지영은 그녀가 새신부가 아니라 철천지원수인 것만 같았다.허지영은 그 눈빛에 놀라 흠칫했다. 아마 배인호의 어머님이 때마침 나타나지 않았다면 계속 계단에 서서 멍만 때렸을 것이다.“지영아, 내려와서 아침밥 먹어야지.”배인호의 어머님이 인사를 건넸다.그제야 허지영은 정신을 차리고 조심스럽게 식당으로 걸어갔다.배인호는 처음부터 끝까지 허지영의 존재를 무시했고, 밤새 잠을 자지 않은 듯 턱에는 푸릇푸릇한 수염이 자랐고 눈은 약간 충혈되어 매우 피곤하고 짜증이 난 것같은 모습이었다.하지만 허지영은 감히 더 물어볼 수 없었고 물어보아도 대답도 안 해줄 것을 알고 있었다.그날부터 허지영은 배씨 가문의 사모님이 되었고 철저한 장식품이 되었다. 배인호는 심지어 결혼전 보다도 더 차갑게 굴었으며 종종 집에 오지 않았다.허지영은 신혼집 인테리어에 모든 심혈을 기울였고 청담동이라는 곳에 있는 별장이 바로 그녀와 배인호의 신혼집이었다. 기초 공사는 거의 끝마쳤지만 가구와 같은 인테리어도 천천히 골라야 했다.허지영은 6개월이라는 시간을 들여 청담동 별장을 꿈의 신혼집 모습으로 장식해 놓았다. 그녀는 배인호가 돌아오리라 생각했지만, 이 아름다운 집은 결국 그녀의 외로운 결혼의 무덤이 되어버렸다.“결혼한 지 얼마 됐다고 벌써 5명이나 스캔들이 생겨? 영아, 너 진짜 잘 참는다!”박정아의 전화 10통 중 9통은 배인호의 뒷담화였다.“그거 다 보여주기식일 거야.”허지영은 사실 배인호가 자신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을 마음속으로는 잘 알고 있었지만, 마치 자기의 가련한 자존감을 지키려는 듯 배인호의 편을 들어주었다.인정하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날 것만 같아서 허지영은 끝내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하루 또 하루, 한 해 또 한 해가 지나면서 허지영은 혼자 청담동에서 망부석이 된 것만 같았다. 마치 웃음거리인 것처럼 다들 그녀에 대한 기억은 점점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