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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배사장의 그녀

“이 기사님, 가사 서비스 회사에 연락해서 이모님 몇 분 구해주세요. 음식 솜씨가 엄청 좋은 사람으로, 영양사 자격증까지 있으면 더 좋고요.”

나는 영양제가 든 쇼핑백과 나란히 뒷좌석에 탔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이 기사님에게 부탁했다.

“알겠습니다. 사모님.”

이 기사가 대답했다.

배인호와 결혼하고 양가 부모님들은 가사도우미 몇 분을 고용해 청소, 정원수리, 요리 등을 시키라고 하셨지만 그때 나는 콩깍지가 단단히 씌워져 있을 때라 거절했다. 배인호와 나의 신혼집에 다른 사람이 있는 게 거슬렸다. 신혼인데 거실에서부터 주방까지 구애받지 않고 애정행각을 하려면 방해받을 것 같았다. 결국 보다시피 나는 과부처럼 지내고 있다. 환생하고 나서 다시는 그런 헛된 꿈을 꾸고 싶지 않았다.

집에 도착한 나는 프라다 핸드백을 들고 앞에서 걸어가고 있었고 뒤에서는 이 기사님이 영양제가 든 쇼핑백을 들고 따라왔다. 문을 열자, 배인호가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옷소매를 정리하는 모습이 자연스러우면서도 매력적이었다.

“이 기사님, 그만 가보세요.”

나는 핸드백을 내려놓고 이 기사님에게 말했다.

이 기사님은 영양제를 테이블에 올려놓고 배인호에게 허리 굽혀 깍듯이 인사하고는 서둘러 떠났다.

“한 시간 뒤에 파티 있어. 네 부모님들도 참석하실 거야. 너도 준비하고 같이 가.”

배인호는 내가 무엇을 사 왔는지 관심도 없었고 그저 묵묵히 나에게 통보했다. 그는 종래로 이런 장소에 나를 데리고 간 적이 없었다. 오늘처럼 부모님들이 참석해야 나는 쓸모가 있었다.

환생하고 나서는 부모님을 뵌 적이 없었다. 불효라는 걸 알지만, 전생의 일들 때문에 뵐 면목이 없었다.

“음... 그래요.”

나는 이층으로 올라갔다.

지난 보름 동안 나는 끊임없이 새 옷들을 쇼핑했다. 전에 입던 단조롭고 우중충한 옷들 말고 다양한 디자인으로 샀다.

빨간색 미니드레스를 골랐다. 오프숄더에 앞은 브이넥으로 디자인되어 있어 살짝 파이긴 했지만 얇은 레이스로 감싸고 있었다. 아래는 머메이드 디자인으로 각선미를 돋보이게 하는 드레스였다.

나는 비록 말랐지만, 흰 피부에 키도 168이었다. 가슴 빼곤 다 자신 있었다. 나도 이제 20대 후반인데 서란처럼 그렇게 청순한 스타일은 나한테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다.

화장을 끝내고 눈부시게 빛나는 크리스털 귀걸이에 세트로 된 목걸이를 했다. 그것들은 불빛 아래서 더욱 눈부시게 반짝였다. 예전에 검소하게 다닌만큼 지금은 더 나대고 싶었다.

배인호는 아래층에서 기다리며 통화를 하고 있었다. 내가 내려오는 소리를 들었을 텐데 아무 반응도 없었다. 나는 신경 쓰지 않고 먼저 차쪽으로 걸어 갔다.

몇 분 뒤 배인호가 차에 올라탔다. 단 1초도 나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가는 길에 우리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는 운전하고 나는 핸드폰으로 기선우에게 카톡을 보내며 안부를 물었다.

「선우야 병원 밥은 어때? 먹을만해? 맛이 없으면 누나가 반찬 좀 보내 줄게.」

「괜찮아요, 누나. 잘 먹고 있어요.」

「오늘 영양제 샀는데 가져다준다는 걸 깜빡했네. 내일 내가 가져다줄게.」

「어우, 괜찮습니다.」

「괜찮긴. 나 때문에 다쳐서 입원했는데. 거절하지 말고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

기선우와 서란의 집안은 비슷했다. 서란한테 배인호는 돈 많고 키 크고 잘생긴 남자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도 기선우한테 돈 많은 예쁘고 아름다운 여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생각해 보니 꽤 그럴듯해서 마음에 미묘한 안도감이 들었다.

빨간 불에 잠깐 차가 멈췄고 배인호는 목을 풀다가 나를 힐끔 돌아봤다. 뒤늦게라도 내가 오늘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발견한 듯 했지만 그 입에서 좋은 소리가 나올리 없었다.

“네가 입으니깐 옷이 아깝네.”

역시 드라마에서 보던 여자주인공의 변화에 놀라는 남자주인공의 장면은 다 거짓이었다. 나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손으로 가슴을 치켜올리며 물었다.

“그렇게 작아요? 오늘 특별히 두꺼운 뽕으로 넣었는데.”

나의 과한 액션은 그의 심기를 건드리는데 성공했다. 그는 싸늘하게 말했다.

“허지영, 네 말과 행동 조심해.”

“왜요?”

나는 반문했다. 이미 긴 시간 동안 조심하며 살았는데 그러면 뭐 하나? 죽으면 그만인데. 다시 돌아온 이상 그런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날아다니고 싶었다.

“네 신분을 잊지 마!”

배인호는 열 받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나를 와이프로 대한 적도 없으면서 그 신분에 맞게 행동하라고 요구했다.

나는 더 얘기하고 싶지 않아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예전 같았으면 배인호가 말 한 마디라도 걸어주면 나는 기뻐서 어쩔줄 몰랐을 것이고 여러 화제를 찾아 대화를 이어 나갔을 것이다.

파티장에 도착하고 나는 배인호와 쇼윈도 부부행세를 시작했다. 나는 몇몇 낯 익은 분들을 만나 몇 마디 주고받고 혼자 자리를 찾아 앉았다.

내 옆자리에 앉은 여자를 자세히 보니 얼마 전 배인호와 호텔에서 목격되어 실시간 검색어에 오른 그녀였다.

“청하야, 왜 혼자 있어?”

그녀의 옆에 또 다른 여자가 다가와서 물었다.

“잠깐 쉬고 싶어서. 너도 잠깐 앉아.”

이청하의 애교 섞인 목소리는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그러고 보니 배인호는 목소리가 좋은 여자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서란도 그렇고 전에 스캔들이 났던 상대들도 그렇고 거의 비슷했다.

둘은 옆에서 수다를 떨었고 나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진소진은 이청하에게서 장난스럽게 물었다.

“너네 배 사장님은 어디 계셔? 가서 인사 안 해?”

“함부로 말하지 마. 내 거 아니야. 그 사람 와이프 있어.”

이청하는 뿌루퉁하게 대답했다.

“그 사람 와이프 백만 년이 돼도 한 번도 본 적 없어. 쇼윈도 부부 아니야? 네가 요즘 그 사람하고 제일 가깝게 지내는 거 다 알아. 너한테 집도 사줬다며?”

진소진의 말투에서 부러움과 질투가 묻어나왔다.

“응. 나한테 잘해줘.”

이청하는 은근히 자랑하듯 말했다.

“왜 이렇게 나한테 잘해주는지 모르겠어. 그 사람을 만난 건 정말 행운이야.”

배인호는 이름만 와이프인 나를 제외한 모두에게 잘해줬다. 스캔들이 났던 여자들 모두 헤어진 뒤에도 그를 굉장히 좋게 평가했다. 그게 바로 돈의 맛이다.

그때 부모님이 내쪽으로 걸어왔다. 내가 혼자 앉아 있자 물으셨다.

“지영아, 인호는? 왜 너랑 같이 안 있고?”

배인호의 이름을 들은 이청하와 진소진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고 표정이 아주 가관이었다.

나는 일어나서 엄마의 팔짱을 끼며 애교를 부렸다.

“같이 다니면 재미없어요. 다 일 얘기뿐이고, 난 엄마랑 얘기할래요.”

엄마는 요 몇 년간 애교가 없던 나의 모습만 봐서 그런지 놀라시면서 나를 쳐다봤다.

“그럼, 모녀끼리 얘기 나눠요. 나는 친구들한테 가볼 테니.”

아빠는 워낙 상남자라 나의 변화를 눈치 채지 못하고는 허허 웃으시면서 옛 친구들을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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