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룻밤 인연, 약혼남의 형과 사랑에 빠지다의 모든 챕터: 챕터 671 - 챕터 680

1604 챕터

제671화 윤회 

민상철은 일어나 앉고 싶었지만 몸이 이미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져 안간힘을 썼지만 겨우 침대 머리맡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그가 숨을 헐떡이며 병실 안에 있는 사람들을 빙 둘러보자 사람들은 감히 숨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애써 민상철을 관심하는 듯한 표정을 연기해냈다. 하지만 사람들이 더 관심하는 건 민상철의 건강이 아니라 누가 민상철의 자리를 차지하고 민씨 가문과 회사를 이끌지였다. 물론 가족들의 속내를 꿰뚫어봤지만 민상철은 실망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도 예전에 그렇게 자기 아버지를 바라봤었으니까. 그때 민상철은 권력을 자기 손에 넣겠다는 생각뿐이어서 아버지가 임종 직전에 어떤 눈빛을 했었는지 얼마나 피곤했을지 보아내지 못했다. 그리고 임종 직전, 민상철의 아버지는 민상철에게 반드시 자격을 갖춘 후계자가 될 수 있을 거라는 말을 남겼다. 그리고 그는 확실히 그걸 해냈다. 하지만 이 순간, 아버지가 그때 그런 말을 하던 심경을 문득 깨달았고 아버지의 못다 한 말을 깨달았다. 좋은 후계자가 되는 외에 민상철은 아무것도 잘해내지 못했다. 좋은 아들이 되지 못했고, 좋은 아버지, 좋은 할아버지도 되지 못했다……. 혼탁한 시선이 가면을 쓴 가식적인 사람들의 얼굴을 쭉 훑더니 유일하게 슬픈 척조차 하지 않는 남자에게 떨어졌다. 민도준은 슬퍼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무심한 눈빛으로 민상철을 살필 뿐. 살짝 올라간 입 꼬리 때문에 인간성이라고 보이지 않았으며 심지어 피도 눈물도 없어 보였다. 민상철이 계속 민도준을 바라보자 지팡이를 짚고 있던 민재혁이 슬쩍 막아섰다. “할아버지, 몸은 좀 어때요?” 민상철은 애써 정신을 가다듬고 고개를 저었다. “나도 이제 나이가 들어 앞으로 민씨 회사 일을 너희들이 대신해줘야 겠구나.”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공기는 이내 조용해졌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은 자기의 생각을 감추며 민상철을 위로하기 바빴다. “아버지, 그런 말씀하지 마세요. 아버지도 곧 괜찮아지실 거예요.” “그래요, 할아버지.” 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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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72화 버리지 마 

권하윤은 의외라는 생각을 했지만 고분고분 병상 옆으로 다가갔다. “할아버님.” 죽음이 다가와서인지 민상철이 하윤을 보는 눈빛은 예전처럼 분노와 살의가 가득한 대신 오히려 많이 평화로웠다. “도준이가 너에게 동림 부지를 줬다던데?” 목숨을 걸고 차지한 곳을 이렇게 쉽게 웬 여자에게 줬다는 건 누가 봐도 민도준이 사랑에 빠졌음을 알 수 있었다. 이 소식을 들었을 때 민상철은 도준의 마음을 다시 되돌리고 싶어도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하윤은 민상철의 말에 잠깐 어리둥절해 하다가 이내 그 뜻을 알아차렸다.  하긴, 이렇게 큰일을 민상철의 눈을 피해하는 건 불가능하니까. 하지만 이 순간 이 예기를 꺼내는 의도가 무엇인지 몰라 도준에게 도움의 눈길을 보냈다. 도준은 손으로 라이터를 돌리다가 팔을 의자 등받이에 기댄 채 건들건들한 태도로 말했다. “제 물건을 주고 싶은 사람한테 주겠다는데 뭐가 잘못됐어요? 게다가 마누라 하나 들이려면 이정도 혼수는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너무 당연한 듯한 도준의 말투에 하윤은 순간 멍해졌다. 하지만 민상철의 반응은 하윤의 생각과는 달랐다. 당연히 그 소리를 듣자마자 버럭 화를 내거나 몇 마디 욕설을 퍼부으며 자기를 속셈이 많은 여자라고 꾸짖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민상철은 그저 도준을 힐끗 바라봤다. “도준아, 잠깐 나가 있어. 둘이 잠깐 할 얘기가 있으니.” 하지만 도준은 껄렁한 자세로 앉은 채 움직이지도 않았다. “외로운 남녀가 한 공간에 있는 건 안 아무래도 안 좋을 것 같은데.” “너…….” “농담이에요. 살 날이 얼마 남지도 않았으면서 뭐 하러 그렇게 화를 내세요? 저는 없는 사람이라 생각하세요.” 민상철의 눈은 뭔가 한층 가려진 것처럼 흐릿하고 생기가 없었다. 거친 숨소리는 점차 심해져 도준과 싸울 여력도 없어 보였다. 이에 민상철은 헛기침을 하고는 하윤을 바라봤다. “내가 미우냐?” 하윤은 민상철이 이런 물음을 물을 거라고 생각지 못한 터라 잠깐 멈칫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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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73화 가족에게 인정받다 

민상철이 민도준을 아주 연약하게 묘사하자 권하윤은 왠지 웃음이 났다. 하지만 이토록 진지한 태도로 말하는데 뭐라 반박할 수 없어 고개를 돌리다 마침 도준의 눈빛 마주쳤다. 도준이 눈썹을 치켜 올리며 고개를 돌린 모습은 마치 그녀에게 ‘왜? 도망갈 거야?’라고 따져 묻는 것 같았다. 순간 입꼬리가 올라가더니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 나며 하윤은 대답했다. “네, 약속할게요.” 하윤의 대답을 듣자 민상철은 그제야 긴장을 푼 것처럼 눈빛이 다시 흐릿해졌다. “그래…… 그래…….” 이 시각 민상철의 숨소리는 언제 꺼질지 모르는 낡은 엔진처럼 매 순간 연기를 뿜어내고 있는 것 같았다. 이에 하윤은 순간 겁을 먹었다. “할아버님, 괜찮으세요?” “얼마 전까지…… 할아버지라고 불렀으면서…… 호칭은 그대로 불러.” 민상철의 말은 사이사이 끊겨서 들렸지만 하윤은 그의 말을 알아들었다. ‘이건 나를 인정한는 건가?’ 하윤은 믿기지 않았다. “지금 말씀하신 상대가 도준 씨 맞죠? 설마 저를 또 민승현 짝으로 보시는 건 아니죠?” 민상철은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그 웃음은 예전과 달리 약간 농담기도 섞여 있었다. “너도…… 참…… 내가 너를 승현이와 엮어주면 도준이가…… 미치지 않고 배겨?” 하윤은 자기가 바보 같은 질문을 했다는 걸 깨달아 약간 머쓱했지만 집안 어르신의 인정을 받았다는 게 내심 기뻤다. “할아버지.” “그래.” 민상철은 마지막 힘을 다해 도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더니 이미 초점을 잃은 눈으로 도준을 보며 낮게 읊조렸다. “아래사람의 실수에 눈감아줄 줄도 알아야 한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도준의 눈동자는 약간 흔들렸다. 민상철이 이 말을 처음 했을 때는 도준이 그룹 경영에 처음 참여했을 때다. 그때 도준은 그룹에 들어가자마자 억압을 받았었다. 그를 그토록 억압한 사람은 다름 아닌 민씨 가문의 어르신, 심지어 원로급 인물인 민상철의 형제 민병철이었다. 민병철은 도준의 거만함을 싫어해 일부러 온갖 시비를 걸고 제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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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74화 그해 그 일  

민상철의 눈은 점점 초점이 흐려지더니 병상에서 마치 무엇을 잡으려는 듯 손을 뻗었다. “명주야.” “둘째…… 용현아…….” “…….” “아버지!” 시간 뚫고 나온듯한 부름 소리가 민상철 생전에 가장 떠올리고 싶지 않은 장면을 불러왔다. 민용현이 늠름한 모습을 한 채 밖에서 들어오면서 소리쳤다. “아버지, 저 칩 연구에 성공했어요. 새로운 과학 기술 시대가 곧 도래할 거예요.” 아들의 말에 민상철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정말이냐?” 민상철의 몇몇 아들 중 유독 민용현만 부잣집 도련님 같은 오만함도 가업에 대한 욕심도 없이 오로지 과학 연구에만 매진했다. 하지만 민상철은 그걸 항상 자랑으로 여겼다. 그가 아무리 나이가 들었어도 과학 기술이야 말로 정말 막대한 수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프로젝트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이토록 선진적인 기술을 민씨 가문에서 가장 먼저 연구해냈으니 이건 앞으로 민씨 가문의 미래가 창창한 건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프로젝트 정식으로 가동하면 국내의 기술팀에 연락해 어떻게 하면 개발 사용 범위를 확대할 수 있는지 알아보려고요.” “뭐? 너 미쳤어? 네가 그 기술을 남에게 공유하면 모든 사람이 그 기술을 장악할 수 있게 되잖니!” 민용현은 민상철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버지, 지금 무슨 말씀이에요? 과학기술에 새로운 힘을 불어넣지 않으면 그 자리에 정체될 수밖에 없어요. 칩기술을 장악한 사람이 많을수록 과학기술은 발전한다고요.” 그 말에 민상철은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그제야 민용재는 과학 연구에 너무 오래 취해 속세를 벗어난 사람이나 다름없다는 걸 깨달았다. 이에 민상철은 아들에게 도리를 설명하려고 애써봤다. “용현아, 넌 민씨 집안 사람이야. 그러니 가문을 위해 생각할 수는 없겠니? 칩기술을 공유했다가 다른 사람이 우리보다 더 잘 응용하면 어떡하려고 그러니?” “그러면 더 좋은 거 아닌가요?” 민용현은 사뭇 진자한 눈빛으로 말했다. “아버지, 이건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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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75화 임종 직전 

“도준아…… 너 내가…… 내가…… 밉지…….” 민상철의 시선은 민도준을 향했다. 죽음에 임박하자 그는 도준의 입에서 무슨 말이라도 듣고 싶었다. 아들 민용현과 똑같은 도준의 두 눈을 본 순간 그런 생각은 더해졌다. 비슷한 눈매였지만 그 속에 담긴 건 완전히 달랐다. 민용재는 온화하고 선량했지만 도준은 오래된 핏자국처럼 검고도 잔인했다. 도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평생 경성 바닥을 휩쓸며 살아온 할아버지가 점점 생기를 잃는 모습을 느긋하게 지켜봤다. 결국 민상철은 죽을 때까지 그토록 원했던 용서를 받지 못했다. 바이탈 기계에서 ‘삐삐’ 하는 소리가 들려왔고 민상철의 눈은 여전히 도준을 향한 채 얼굴이 그대로 굳었다. 그제야 도준은 입꼬리를 움직이더니 앞으로 다가가 민상철의 귀에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제가 해외에 있다가 본가로 돌아왔을 때 저한테 뭐라고 했던지 기억하세요? 이미 다 지났으니 이젠 더 이상 생각하지 말자고 하셨어요. 노망나셨나? 어떻게 본인이 했던 말도 기억 못하세요?” “저승에 가서 우리 부모님을 보시거든 안부 좀 전해줘요. 앞으로 다시 환생한다면 대로 환생하라고. 다시 이번 생으로 환생했다가 뼈도 못 추리지 마시고.” 이윽고 도준은 비웃는 듯한 눈빛으로 민상철을 바라봤다. “할아버지, 안녕히 가세요.” 그 말을 끝으로 바이탈 기계의 소리가 멈추면서 불안정하게 움직이던 곡선이 긴 직선으로 변했다. “삐-” 도준은 손을 들어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한 민상철의 눈을 감겨 드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긴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그러다가 고개를 돌렸을 때 마침 눈시울이 붉게 물든 하윤과 마주치고는 피식 웃었다. “왜 울고 그래?” 하윤은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스스로도 자기가 왜 우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방금 전의 장면이 마치 도준을 감싸고 있던 어둠에 자그마한 구멍을 뚫어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속으로 도준의 과거를 조금 들여다본 것만으로도 하윤은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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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76화 둘째 작은 사모님 

이제 민도준이 민씨 가문을 이끌게 됐으니 민씨 가문의 이미지를 위해서든 제국그룹의 이미지를 위해서든 민씨 집안 사람들은 도준의 잘못을 일부러 찾아내는 짓은 하지 않을 거다. 하지만……. 권하윤은 도준의 얼굴을 힐끗 바라봤다. ‘민상철이 아무리 그래도 할어비지인데 슬프지 않나?’ 물어보고 싶어 안달 난 하윤의 표정과 동정의 눈빛은 무시할래야 무시할 수 없었다. 이에 도준은 하윤을 힐끗 흘겨보더니 물었다. “왜? 날 도화하기라도 하려고?” “도준 씨…… 혹시 어디 불편한 곳 없어요?” “불편한 곳? 있긴 하지.” 그 말에 하윤이 얼른 위로의 말을 준비했다. 사람이 죽으면 다시 살아날 수 없다는 둥 하는 말로 말이다. 하지만 도준은 오히려 의외의 말을 늘여 놓았다. “그런데 이따가 돌아가서 기분 좋은 짓 하면 괜찮아질 것 같아.” “…….” 하윤은 도준이 말한 곳이 별장이라고 생각했지만 도준은 별장이 아닌 민씨 저택으로 차를 돌렸다. 하긴, 민상철이 돌아갔으니 손자인 도준이 해야 할 일이 당연히 많을 테니까. 다시 민씨 저택에 도착하니 하윤은 왠지 새로운 느낌이 들었다. 도준이 하윤을 차에서 끌고 내렸을 때 두 사람은 마침 순찰하는 경비원을 마주쳤다. 지금껏 숨는 것에 습관이 되어 하윤은 무의식적으로 움츠리려 했지만 곧바로 도준에게 잡히고 말았다. 그제야 지금은 더 이상 숨을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경비원은 도준을 보자마자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도준 도련님.” “음.” 하지만 하윤을 보는 순간 입을 몇 번이고 벌렸다 닫았다 하다가 끝내 마땅한 호칭을 찾아내지 못했다. 그때 도준이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안 보이나? 아니면 말을 못하나?” “어, 그게, 저기…….” 때마침 똘똘한 메이드 하나가 이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둘째 작은 사모님.” 순간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주차장에서 울려 퍼졌다. 전에 다섯째 작은 사모님으로 불릴 때는 아무런 감각도 없던 하윤이었는데, 숫자 하나만 바뀌었을 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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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77화 다른 사람 만나지 마요 

민도준의 동작은 잠깐 멈칫하더니 다음 순간 바로 아무렇지 않은 듯 뜨거운 입술을 권하윤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왜인 것 같아?” 하윤은 목을 움츠리며 애써 도준의 손을 내리 눌렀다. “저도 모르니까 묻는 거잖아요.” 이윽고 버둥대며 몸을 돌렸다. “왠지 할아버지 말씀에 숨은 뜻이 있는 것 같아서요.” 도준은 눈을 내리깐 채 눈살을 찌푸리고 심각하게 고민하는 여인을 바라봤지만 어느새 눈동자가 한층 더 어두워져 있었다. “응?” 약간 올라간 끝 음이 조용한 공기 속에서 파문을 일으켰다. 하지만 하윤은 여전히 자기만의 세상에 갇혀 생각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민상철이 그렇게 많은 말을 한 건 그저 듣기에는 도준과 잘 지내라는 말인 것 같지만 상세히 생각해보면 자기 더러 뭔가를 포기하라는 뜻이라고 생각됐다. 하윤은 도준과 지금껏 함께 오면서 이제는 더 이상 누구도 누구에게 빚을 지지 않는 사이가 됐다. 아니, 자세히 따져보면 하윤이 도준한테 빚진 게 더 많았다. 그걸 민상철도 분명 알고 있었을 텐데 그런 말을 했다는 건 설마……. 하윤이 생각하고 있을 때 도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하윤을 바라보기만 했다. 하지만 그 눈빛은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마치 벽에 걸린 그림과 하나가 된 것처럼. 벽에 걸려있는 사자는 분명 조용했지만 사람에게 공포감을 안겨준다. 왜냐하면 언제 그 사자가 언제 달려들어 사냥감의 목덜미를 물어 뜯을지 모르니까. 현재 도준의 눈빛이 그러하다. 그런 시선이 느껴지자 하윤은 의아한 듯 조심스럽게 도준을 쳐다봤다. “도준 씨…….” 도준은 천천히 손을 들어 하윤의 얼굴을 받쳐 들었다. “왜?” “설마 도준 씨 바람 피는 건 아니죠?” 공기 속에 몇 초 간의 침묵이 흐르더니 도준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뭐라고?” “그렇지 않고 서야 할아버지께서 저더러 너무 많은 걸 따지지 말라고 하셨을리가 없잖아요. 재벌가 사모님이 되면 인내심을 알아야 한다는 걸 저한테 알려주려는 게 틀림없어요.” 하윤은 얼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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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78화 소년 민도준 

몇년 전만 하더라도 복 끝 방의 불은 항상 켜져 있었다. 매일 밤 집에 돌아오면 부부가 책상에 엎드려 무언가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러다가 도준은 갑자기 뭔가 생각나기라도 한 듯 눈에 미소가 번졌다. 그토록 예의를 중시하는 부부가 자기 같은 아들을 교육해야 했던 걸 생각하면 참 고생이 많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막 이렇게 생각하자마자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이렇게 늦게 그것도 술 냄새 풀풀 풍기면서 돌아오다니, 너를 어쩌면 좋아?” 금테 안경을 쓴 중년이 곧바로 아내를 달래듯 입을 열었다. “어, 아마 아버지가 쟤를 데리고 접대하러 갔었던 것 같아.” “접대는 무슨, 그저 술 마시러 간 거겠지.” 비난을 받은 젊은 남자가 외투를 어깨에 걸치며 눈썹을 치켜 올렸다. 아직 소년의 분위기를 벗어 던지지 못한 남자는 방탕한 표정으로 문에 기대고선 채 헛소리를 늘여 놓았다. “엄마, 학술을 한다는 분이 실사구시의 태도를 취해야지 증거도 없이 그렇게 결론을 내면 어떻게 해요? 이거 비판 받아야 해요. 이런 빈틈 많은 학술 사상으로 어떻게 좋은 연구를 할 수 있겠어요?” 진명주와 같은 학자가 말로 도준을 이기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애먼 남편을 닥달할 수밖에 없었다. “민용현! 당신 아들 좀 어떻게 해 봐!” “됐어, 됐어. 도준이도 농담한 거야.” 민용현은 아내를 위로하며 도준에게 경고의 눈빛을 보냈다. 그제야 도준은 ‘쳇’하며 콧방귀를 뀌었다. '참 복에 겨운 줄 모른다니까. 온갖 더러운 짓거리를 하는 부잣집 도련님들에 비하면 난 미덕과 품행을 갖춘 착한 청년이라고요.’ 도준은 혼자 생각하며 무심한 듯 사과했다. “엄마도 참, 농담한 것 가지고 뭐 하러 화를 내고 그래요? 오늘 할아버지와 함께 접대하러 간 거 맞아요. 할아버지께서 술을 마시면 안 돼서 제가 대신 몇 잔 마신 거고. 어른을 공경한다고 칭찬은 못해줄 망정 어쩜 용부터 하세요?” “정말이지?” 진명주는 도준에게 여러번 속은 탓에 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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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79화 곁에 있어줘 

“도준 씨, 앞으로 제가 항상 곁에 있어 줄게요. 어때요?” 권하윤은 고개를 든 채 자기 감정을 남김 없이 내비쳤다. 이에 민도준이 눈썹을 들어올렸다. “응?” 그러다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하윤을 바라봤다. “그렇다면서 예전에 도망치려고 했어?” 도준이 어떤 말을 할지 기대하던 하윤은 순간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그러다가 순간 무드가 없는 도준의 행동에 화가 나 턱을 도준의 가슴에 내리치며 투덜댔다. “어떻게 이럴 수 있어요? 저 지금 진심으로 하는 말인데.” 도준은 하윤의 머리를 받쳐 들며 하윤의 수단이 안 통한다는 듯 가차없이 말했다. “이것도 진심이라고? 진심이 안 느껴지는데?” “누가 그래요? 저 정말 진심으로 한 말이거든요.” “그렇다면 진짜 진심을 말하는 건 어때?” 하윤을 끌어안은 손이 하윤의 목덜미를 쓸며 불안한 듯 뛰는 맥박을 눌러대더니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해야지. 죽을 때까지 영원히 내 곁에서 떠나지 않고 죽더라도 땅에 묻히지 않고 내 곁에서 매일 밤낮을 함께 있겠다고.” 하윤은 도준의 으슥한 말투에 등골이 오싹해 작은 손으로 그의 어깨를 내리쳤다. “무섭게 왜 그래요? 게다가 제가 죽었는데 시체는 뭐 하러 끼고 있겠다는 거예요? 벌레 꼬일까 봐 걱정되지도 않나 몰라.” 도준은 하윤의 다양한 표정을 바라보며 찬성하는 듯 말했다. “하긴 그러네. 그러니까 자기야, 열심히 살아야 해.” 방금까지 따뜻하던 분위기가 순간 으슥하게 변했다. 하지만 하윤은 무서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웃으며 도준에게 다가갔다. “도준 씨 설마 제가 죽을까 봐 두려워요?” 이윽고 하윤은 두 눈을 반짝이며 으쓱한 듯 말했다. “걱정하지 말아요. 저 죽는 거 제일 무서워하거든요. 그러니 꼭 이 목숨 잘 지켜내서 도준 씨 곁에 오래 남아 있을 거예요.” 도준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손으로 하윤의 목덜미를 살살 문지르기만 했다. 도준은 예전에 생각했던 적이 있다. 모든 게 밝혀지고 나면 어떤 심정일지. 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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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80화 호칭을 바꾸다 

권하윤은 대답할 수 없었다. 그저 트집을 잡으며 자기 체면을 살리려던 것뿐이었으니. 반성하는 듯하던 도준도 사실은 순수한 목적이 아니었는지 하윤의 얼굴에 입을 맞추며 숨결을 내뱉으며 하윤의 욕망을 건드렸다. “이제 좀 진지해지는 게 어때요?” 하윤은 도준의 입맞춤을 피했다. “설마 지금…… 그러지 마요.” 물론 민상철이 하윤의 할아버지는 아니지만 어쨌든 어르신인데 최소한의 존중은 해줘야 하니까. 도준도 사실은 하윤을 건드릴 생각이 없었는데 양갓집 규수처럼 구는 하윤의 모습에 순간 장난기가 발동했다. “왜? 설마 영감탱이를 위해 3년간 애도라도 하려고?” ‘엥? 3년?’ ‘그건 좀 너무 긴 거 아닌가?’ 하윤의 충격을 받은 표정을 보자 도준은 악랄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뭐 3년간 참아보지 뭐.” 도준의 얼굴에서 장난기를 읽어낸 하윤은 이내 콧방귀를 뀌었다. “그래요. 그러면 절대 저 건드리지 마요.” 말을 마친 하윤이 자리를 떠나려 할 때, 도준이 곧바로 그녀를 끌어당겼다. “됐어. 그만하고 자자. 오후에 장례도 해야 하잖아.” 커튼이 햇빛을 가려 방은 다시 어둠 속에 잠겼다. 그렇게 침대에 한참을 누워 있던 하윤은 슬금슬금 도준의 곁으로 다가갔다. “도준 씨.” “응.” “그때 아저씨랑 아주머니가 정말…… 구하려다가 돌아가신 거예요?” 하윤은 공은채라는 이름을 일부러 얼버무렸다. 하윤도 민시영한테서 사실 들은 적이 있다. 부모님이 폭동으로 돌아가신 해, 도준은 고작 19이었는데 그 어린 나이에도 민씨 가문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고. 그때 도준이 부모님과 함께 해외로 나갔던 건 첫째네 식구, 즉 민용재가 손을 쓰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도준이 간과한 건 민용재가 도준의 부모님을 죽이기 위해 가장 번화한 거리에서 폭동을 일으키는 미친 짓을 벌였다는 거다. 그런 위험한 상황에서 도준은 혼자의 힘으로 총 하나만 가지고 가족을 데리고 도망쳣다. 만약 그때 도준의 부모님이 폭동에서 미처 도망가지 못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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