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룻밤 인연, 약혼남의 형과 사랑에 빠지다의 모든 챕터: 챕터 1041 - 챕터 1050

1603 챕터

제1041화 불륜 현장

눈물을 훔치고 있던 여자의 눈은 어느새 당황스러움으로 대체되었다.“도, 도준 씨…….”빛을 등진 채 우뚝 서 있는 도준의 얼굴은 어둠 속에 가려져 기분을 알 수 없었다.그리고 그런 도준을 본 하윤은 눈을 둥그렇게 뜬 채 애써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하지만 경성에 있어야 할 도준이 왜 갑자기 여기에 나타났는지는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하윤은 그 자리에 뻣뻣하게 굳은 채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혹시 이제 막 도착해서 저 찾아온 거예요?”도준은 슬금슬금 움직이며 제 시선을 가리려고 애쓰는 하윤을 보더니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이윽고 하윤의 머리 위를 지나 건너편에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아니, 불륜 현장 덮치러 왔는데?”하윤은 모든 게 들통났다는 걸 인지하고는 얼른 도준의 팔을 잡았다.“저 은우 만나지 않았어요. 그냥 여기서 조금 봤을 뿐이니까 화내지 말아요.”다급하게 해명하는 하윤의 모습에 도준은 피식 웃더니 팔을 들었다. 그 동작 때문에 팔짱을 끼고 있던 하윤은 그의 팔에 대롱대롱 매달리게 되었다.“내가 화내는 게 두려운 거야? 아니면 빡 쳐서 저 개자식한테 뭐라도 할까 봐 무서운 거야?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데 아직도 저 새X 편들다니 여전하네.”분명 화가 난 말투는 아니었지만 하윤은 마치 천근도 더 되는 무게가 저를 짓누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저 은우랑 정말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 도준 씨랑 저 이미 결혼도 했는데 제가 어떻게 다른 사람한테 딴 마음 품을 수 있겠어요? 저 믿어 줘요. 저 정말 멀리서 보기만 했어요.”도준은 믿어주겠다 말겠다 말도 없이 손을 내밀었다.그 동작에 하윤은 무의식적으로 눈을 감았다. 하지만 눈꼬리에 살짝 손이 닿는 느낌이 들 뿐 더 이상의 동작이 이어지지 않았다.그리고 그 시각, 도준은 손가락 끝에 묻었다 바람에 이내 사라져 버린 하윤의 눈물을 보더니 시뻘게진 하윤의 눈시울을 바라봤다.“왜? 나랑 결혼한 게 그렇게 억울해? 여기 숨어서 옛 애인 보며 몰래 울만큼?”하윤은 허둥지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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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42화 은우에 대한 마음

“핑계가 안 떠오르지?”“안 떠오르면 직접 만나서 말해.”도준은 말하면서 하윤의 팔을 덥석 잡았다. 당장이라도 팔을 으스러뜨릴 것처럼 꽉 잡은 탓에 하윤은 아무리 버둥대도 도준을 뿌리칠 수 없었다.“그러지 마요. 우리 돌아가요. 네?”“그래. 저 개자식만 만나면 바로 돌아가자고.”아무리 애원하고 뿌리쳐도 도준을 막을 길 없자, 하윤은 급한 마음에 아무 말이나 불쑥 내뱉었다.“도준 씨가 매번 이렇게 저 강요하지 않으면 저도 은우한테 빚지고 살 필요 없었잖아요. 은우 좀 가만히 내버려 두면 안 돼요?”하윤을 잡고 앞으로 걸어가던 도준은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서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뭐라고?”“내 말 틀렸어요?”하윤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솔직히 하윤도 잘 알고 있다. 은우도 저도 모두 실수로 바둑판에 발을 들인 평범한 사람일 뿐이라는 거, 이 치열한 판 속에서 살아 남는 것조차 힘든 평범한 사람이라는 거.만약 공은채가 죽었다면 하윤도 이토록 원망스럽지는 않을 거다. 하지만 잘 살아서 돌아다니는 공은채만 생각하면 화가 치밀어 올랐다.언젠가는 이 바둑판에서 희생당할 보잘것 없는 존재, 그게 바로 은우와 하윤이다.하지만 은우는 제가 하윤한테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 본인 손으로 제 다리에 구멍을 내는 걸 불사하면서까지.이건 은우가 도준을 위협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이며, 그가 갖고 있는 유일한 힘이다.사실 하윤이 바라는 건 별거 없다. 그저 은우의 생활이 방해받지 않는 거. 그 하나면 된다.‘그런데 왜 그것마저 안되냐고?’도준은 아무 말없는 하윤을 빤히 바라봤다. 직접 묻지 않아도 하윤이 속으로 그 개자식을 대신해 억울해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침묵 속에서 두 사람 사이는 점점 멀어졌다. 이미 갈라졌던 흔적에 또다시 금이 가기 시작했다.도준은 하윤을 잡아 끌던 손을 풀고 담배를 꺼내 들었다.“또 말해 봐.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한꺼번에 말해.”하윤은 어리둥절해졌다.“뭐라고요?”어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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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43화 솔직한 고백

하윤의 표정은 태연했다.“동병상련이요. 저랑 은우는 모두 아무것도 제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처지니까. 운명도, 신분도.”도준은 조금도 굴하지 않고 말하는 하윤의 말에 천천히 대답했다.“계속 말해 봐.”하윤은 잠깐 생각하더니 이를 악물며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았다.“저 도준 씨 사랑해요. 하지만 무서워요.”“오?”도준은 눈썹을 살짝 치켜 올렸다.그러자 하윤은 손을 들어 도준의 손목을 잡았다.“만약 우리가 평등하다면 뭐든 도준 씨한테 털어놓고 상의했을 거예요. 그런데 우린 아니잖아요. 저 도준 씨가 화낼 때마다 무서워요. 제가 감당할 수 없는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까 봐.”맨 처음, 도준이 하윤과 은우의 사이를 오해했을 때, 은우는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다.그리고 하윤이 중상을 입은 은우를 경성에 데려오자고 부탁했을 때, 은우는 그 대가로 다리 한쪽을 잃었다.하윤은 아직도 저와 도준이 결혼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제 오빠가 했던 말을 기억한다.‘잔인하고 난폭한 사람은 칼과 같아. 상대가 일부러 너 다치게 하려고 하지 않아도 너는 다칠 거야.’‘보통 사람은 화 나면 말다툼으로 끝내지만 민 사장은 화 나면 사람 목숨이 왔다 갔다 할 수 있어.’이 모든 걸 떠나 하윤을 가장 불안하게 하는 건 사실 도준이 뭘 하려고 하면 하윤은 그걸 막을 능력이 없다는 거다.너무 큰 차이 때문에 하윤은 언제나 조심해야 하고, 눈치 봐야 하고 도준의 사랑과 본성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가장 안전한 위치를 찾을 수밖에 없다.하윤도 솔직히 도준한테 솔직하고 싶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주변 사람을 끌이지 않는 선에서만 가능하다.……모든 걸 솔직히 털어놓고 나서야 하윤은 조마조마한 듯 도준의 눈치를 살폈다. 도준이 제 말을 믿어줄지, 또 더 화내지는 않을 지 하윤도 모른다. 때문에 그저 빤히 도준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그 시각 도준도 하윤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로등 빛이 마침 도준에게 떨어졌지만 오히려 더 섬뜩해 보이기만 했다.“지금 그 말은 자기와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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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44화 아수라장

하윤은 이제 기운이 빠질 지경이었다. 성은우의 관을 넘었나 했더니 또 공태준이 나타나단.하지만 이번에는 오히려 자진해서 설명했다.“저기, 제가 은찬이 뒤를 쫓다가 웬 식당에 갔는데 그곳에서 우연히 만난 거예요. 그런데 마침 생일이라고 해서, 어, 같이 케익 좀 먹었고…….”하윤은 말하면 말할수록 물 소리가 작아졌다.“화 내지 마요. 네?”“내가 화를 왜 내?”도준은 싱긋 웃으며 하윤의 옆 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었다.“내 말 귓등으로 들었다고 화 낼까? 아니면 내가 없는 틈에 공 가주 생일까지 함께 보내준 걸 화낼까?”하윤은 도준의 말에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미안해요. 잘못했으니까 속 시원하게 욕해요.”도준은 차에서 내려오는 태준을 힐끗 보더니 느긋하게 대답했다.“욕하라고? 아까까지만 해도 내가 무섭다고 자유도 없다면서 찡얼댔으며서.”도준이 말을 할 때마다 하윤의 머리는 점점 땅으로 꺼졌다. 심지어 마지막 한마디에 아예 고개를 도준의 가슴에 파묻은 채 중얼거렸다.“그런 뜻이 아니라, 그냥…….”하지만 하윤이 우물쭈물하며 말을 잇지 못하고 있을 때, 나지막한 남자의 목소리가 하윤의 말을 끊었다.“민 사장님.”고개를 돌려 보니 태준은 어느새 차에서 내려 두 사람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제가 윤이 씨 데리고 은우 보러 온 거예요. 그러니 난처하게 하지 마요.”태준은 말 한마디로 모든 책임을 짊어지면서 하윤과 도준의 사이를 더 갈라놓았다.이쯤 되자 도준의 인내심도 바닥이 나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섬뜩한 분위기를 풍겼다.“공씨 가문은 뭐 유기견 혈통이라도 되나? 왜 주인 하나 물면 그 주위를 맴돌지 못해 안달이지? 내가 내 와이프랑 대화 좀 하겠다는데 왜 끼어들고 그래요? 집안 망한 것 때문에 이제 제비라도 돼 보려고 미리 업무 숙지라도 해두려고 그러나?”자존심을 긁는 도준의 천박한 말투에 태준의 눈은 일순 싸늘해졌다.“그러는 민 사장님 눈에 윤이 씨는 본인만의 공간도 자유도 가질 수 없는 겁니까? 그간 은우 때문에 불안해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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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45화 딱 기다려

공기는 삽시간에 조용해졌다.하지만 미소를 띤 공태준과 달리 도준의 얼굴은 음산하고 무서웠다.“지금 뭐라고 했어?”그 말을 듣고도 하윤은 곧바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오히려 손을 등 뒤에 대고 사각지대에서 도준에게 누군가 보고 있다는 걸 알려주었다.하지만 태준에게 들킬까 봐 급한 마음에 마구 손을 뒤집은 바람에 아무런 뜻도 전달하지 못했다.그나마 다행인 건, 하윤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도준이 그 뜻을 대충 알아들었다는 거다. 그제야 도준은 이를 악문 채 하윤을 제 쪽으로 돌려 놓으며 다시 물었다.“다시 말해 봐. 뭐라고?”하윤은 태준을 등진 채로 도준에게 키스를 날리면서 태연하게 연기를 이어 나갔다.“도준 씨만 아니었다면 은우가 지금처럼 됐을 리는 없었잖아요.”아까와 똑 같은 말이었지만 진심이 아니라는 걸 전달하기 위해 마구 윙크를 날리는 바람에 하윤은 퍽 우스꽝스러웠다.이미 한번 한 적 있는 대사로 두 사람은 한마디 한마디 주고받으며 아까처럼 싸워댔다.심지어 아까의 절절한 고백은 빠진 채 저와 은우야 말로 같은 세상 사람이라던 차가운 말만 내뱉었다.그걸 옆에서 듣고 있던 태준마저 미간을 좁혔다 펴기를 반복했다.너무 실감 나는 싸움에 차마 두고 볼 수 없었던 태준은 얼른 앞으로 다가가 하윤을 말렸다.“윤이 씨, 제가 집까지 데려다 줄게요.”그 말을 들은 순간 도준이 뭐라 말하려고 했지만 하윤이 도준의 새끼 손가락에 제 손가락을 걸더니 옆을 스쳐 지나며 태준의 차에 올라탔다.‘오냐오냐 했더니 이제 내 꼭대기까지 기어오르네?’한편, 하윤은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제 뼛속까지 파고드는 듯한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이윽고 차에 오른 하윤은 제 팔을 문지르며 스스로를 위로했다.‘호랑이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하잖아. 이건 공은채를 잡기 위한 미끼일 뿐이야.’그렇게 한참 생각하고 있을 때 핸드폰이 갑자기 진동했다.[집에서 딱 기다려. 쉽게 끝나지 않을 줄 알아.]문자를 본 순간 하윤은 등골이 오싹해 얼른 핸드폰을 무름 위에 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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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46화 내기

“데려다 줘서 고마워. 나 먼저 들어갈게.”차가 호텔 앞에 도착하자마자 하윤은 공태준과 작별했다.그때 하윤을 도와 문을 열어주던 태준이 뜬금없이 사과를 건넸다.“미안해요.”“뭐?”갑작스러운 한 마디에 하윤은 멍하니 고개를 돌렸다.그러자 태준은 차 문을 닫고 하윤 앞에 다가왔다.“은채 일, 대신 사과할게요.”공은채를 언급하자 하윤의 얼굴은 순식간에 차갑게 식어버렸다.“대신 사과한다고? 당신이 왜 사과해? 사과 한마디로 아버지 죽음을 그대로 묻어두라는 뜻인가?”“아니, 오해예요.”태준은 낮은 소리로 해명했다.“전 그런 뜻이 아니에요. 그간 은채가 살아 있었다는 걸 속인 게 미안하다는 뜻이었어요. 그 때문에 윤이 씨가 고생했잖아요.”하윤은 태준이 이런 말을 먼저 꺼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하지만 그 순간 일부러 잊으려고 애쓰던 일들이 하나 둘 떠올라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태준의 말은 하윤이 그간 제 식구가 공은채를 ‘죽게 만들었다’는 죄책감 때문에 얼마나 많은 수모를 겪고 고생을 해왔는지 다시 상기시켜주었다.심지어 집에서 도망치려는 공은채의 욕심 때문에 하윤의 가족은 이리저리 부딪히고 피 흘리면서 희생당했다.그런데 그걸 도준마저 외면했다는 걸 생각하니 하윤은 숨이 턱 막혀 왔다.“할 말없으면 먼저 갈게.”“잠깐만요.”태준은 하윤을 불러 세우며 명함 한 장을 내밀었다.“공천하가 갇혀 있는 감옥 주소예요. 내일 오후 1시 면회 신청해 놓았으니 가보면 궁금했던 거 알 수 있을 거예요.”‘공천하…….’공은채가 그때 그런 일을 꾸민 건 공천하를 무너뜨리기 위해서였으니 그 당사자는 분명 다른 사람이 모르는 속사정을 알고 있을 게 뻔했다.그 생각이 드는 순간 명함에 그려진 넝쿨이 하윤의 손을 점점 위로 잡아당기는 느낌이 들었다. ……한편, 맞은편 차 안.운전석에 앉은 공은채는 도준을 돌아보며 말을 꺼냈다.“내가 뭐랬어요? 받을 거라고 했죠?”도준은 차창 너머로 태준의 손에서 명함을 받아 든 하윤을 빤히 쳐다봤다.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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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47화 야릇한 임무

도준의 의미심장한 미소를 본 순간 하윤은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심지어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저기, 저 아직 씻지 않았어요.”“가서 씻고 와.”하윤은 말하면서도 무시당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도준은 의외로 순순히 그녀를 놓아주었다.하지만 일이 너무 쉽게 풀리자 하윤은 오히려 믿기지 않았다. 그 때문인지 정신을 차리고 욕실로 걸어가면서까지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그런데 하윤이 막 욕실 문 앞에 다다랐을 때, 도준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씻을 때 잘 준비해 둬. 또 울며불며 나 탓하지 말고.”“네.”갑작스러운 한마디에 삐끗한 하윤은 작은 소리로 대답하고는 도망치듯 문을 닫아 버렸다.도준은 하윤의 콩알만한 심장을 비웃으며 소파에 앉아 담배를 꺼내 들었다. 하지만 때마침 그때, 소파 틈새에 있는 명함이 도준의 눈에 들어왔다.명함을 이런 곳에 숨겨둘 사람은 하윤일 게 뻔했다.‘결과는 고려하지도 않고 물건 숨기는 것도 이렇게 조심성이 없어서야 원.’도준은 명함을 꺼내 힐끗 바라봤다.그 순간 귓가에 공은채의 말이 떠올랐다.‘그리고 또 알아 맞혀 보자면, 이시윤은 아마 내일 공천하 만나러 갈 거예요. 그것도 도준 씨 몰래.’마치 모든 걸 꿰고 있는 듯한 공은채의 말투에 도준은 순간 언짢았다.특히 하윤이 저를 배신할 거라고 확신에 찬 말투로 말하는 모습이 꼴 보기 싫었다.하지만 하윤의 선택에 본인마저 확신이 서지 않았기에 도준은 혀로 치열을 훑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어디 한번 보자고. 제대로 길들여졌는지.’그 시각, 하윤은 뜨거운 물을 맞으며 머릿속으로 온통 도준이 했던 말을 되뇌었다.‘직접 준비하라니!’아까는 정신이 없어 엉겁결에 대답했는데 들어와서 생각해 보니 이건 그렇게 쉽게 대답할 일이 아니었다.지금껏 모든 걸 도준이 알아서 해줬는데 오늘 갑자기 스스로 하라니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몰랐다.하지만 도준이 일부러 저를 골탕 먹이려 한다는 걸 알아도 목숨을 부지하려면 순순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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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48화 춤 춰 봐

쇼핑백 안에 든 것은 야한 속옷이 아니라 공연복이었다.그것도 하윤이 공연 때마다 입던 발레 복.하지만 애석하게도 흰 스타킹이 없는 탓에 아무것도 가리지 못하는 치마로 제 몸을 가릴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다리를 훤히 드러낸 채로 말이다.그 때문에 안정감이 없는 건 당연했다. 심지어 이렇게 입는 것보다 차라리 야한 속옷이 낫다고 생각될 지경이었다.하지만 숨어 있을 수도 없는 탓에 하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욕실 문을 나섰다.그리고 그 순간 밝은 불빛 때문에 하윤은 눈을 가늘게 접었다.도준은 방 안의 모든 불을 켠 채 다리를 꼬고 소파에 앉아 있었다.심지어 아무 일 없다는 듯 여유로운 모습은 하윤과 선명한 대조를 이루었다.하윤은 가슴을 가리고 있는 정교한 레이스를 불편한 듯 잡아당기며 모기 소리로 중얼거렸다.“다 갈아입었어요.”환한 불빛은 붉게 물든 하윤의 볼과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여과없이 보여주었다.남자의 노골적인 시선은 하윤의 발목부터 점점 위로 올라가더니 끝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음, 춤 춰 봐.”‘춤?’하윤은 이런 꼴로 춤을 출 수 없어 어물쩍거리며 시간을 끌었다.“무대도 없는데 어떻게 춰요?”도준은 소파에 기댄 채 고개를 살짝 들었다.“얼른, 자기는 예뻐서 아무렇게 춰도 예뻐.”어물쩍 넘기려던 하윤은 도준의 말에 끝내 싫다는 말은 내뱉지 못한 채 속으로 중얼거렸다.‘평소 여자 마음 사려고 일부러 주접 멘트 날리지 않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여자들 다 죽어났겠네.’음악도 없이 춤 추려니 어색했는지 하윤은 음악을 틀고 싶다고 요구했고, 도준도 순순히 동의했다.더 이상 미룰 수 없게 되자 하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춤을 추기 시작했다.하지만 춤을 사랑하기에 그게 어떤 곳이든 이내 집중할 수 있었다.긴 팔을 쭉쭉 뻗으며 허리를 약간 숙이는 하윤의 모습은 백조가 따로 없었다.뒤로 높게 얹어야 할 머리를 풀어헤친 채 어깨에 드리우고 있어서 그런지 우아함은 덜했지만 오히려 더 매혹적이었다.제 자리에서 빙빙 돌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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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49화 심부름

“아, 그래? 그럼 계속 자.”“어, 잠깜만요.”하윤은 눈을 번쩍 떴다.“저 배고파요. 뭐 좀 먹고 싶어요.”“내려가서 먹자.”“움직이기 싫어서 그러는데, 도준 씨가 사다주면 안 돼요?”도준은 꿈쩍도 하지 않은 채 하윤을 위아래로 살폈다.그 모습에 하윤은 오히려 큰 소리를 쳤다.“뭐? 왜요? 도준 씨 때문에 이렇게 됐는데 꼭 부상자를 끌고 밥 먹으러 내려 가야겠어요?”하윤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도준은 침대를 짚은 채 허리를 숙였다. 당장 사냥감을 잡아먹으려는 것처럼 위협적인 자세로 서 있는 도준을 보자 하윤은 저도 모르게 발을 구르며 뒷걸음 쳤고 목소리마저 점점 기어들어갔다.“안 돼요?”“뭐 먹고 싶은데?”“국수요.”“알았어.”도준은 곧바로 외투를 챙겨 입었다. 잘 빠진 어깨 라인을 보자, 역시 옷 태가 산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건가 싶었다.이윽고 하윤은 차 키를 잡으려는 도준의 손을 꽉 잡으며 동그란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일찍 다녀와야 해요.”제 속내도 숨기지 못하는 하윤을 보자 도준은 하윤이 침대에서 내리지 못할 정도로 괴롭히고 싶었다.하지만 하윤은 도준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도 모른 채 계속 도준의 손을 감싸 쥐었다.도준은 입 안에서 혀를 굴리며 하윤의 손을 잡아 이불 속에 넣어주었다.“말 참 많네.”……5성급 호텔에 묵으면서 레스토랑에 내려가 음식을 포장하는 건 솔직히 어려운 일도 아니다. 하지만 하필이면 5성급 호텔 조식은 영혼이 없다며 따뜻한 국물이 있는 국수가 먹고 싶다는 하윤 때문에 도준은 곧장 1층으로 내려갔다.그런데 도준이 차 옆에 도착했을 때, 그 뒤에 주차되어 있던 흰색 마세라티 차문이 벌컥 열리더니 공은채가 싱긋 웃으며 차에서 내렸다.“혼자예요?”도준은 공은채를 힐끗 보더니 코웃음을 쳤다.“술집 여자 같은 멘트를 잘도 입에 담네.”공은채는 도준의 모욕에도 아무렇지 않은 듯 걸어오더니 도준의 차에 기대섰다.이윽고 도준의 목에 난 손톱 자국을 훑으며 피식 웃었다.“그런 게 취향이면 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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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50화 깨달음

도준은 마개를 딴 물병을 내려 놓으며 잔뜩 긴장한 하윤의 얼굴을 바라봤다.“왜? 무슨 일 있어?”도준은 하윤에게 더 이상 희망을 품지 않았다. 오직 하윤이 무슨 변명을 대며 저를 따돌릴지 궁금했을 뿐.제 동작 하나하나가 모두 도준의 눈을 피할 수 없다는 걸 모르는 하윤은 한참 동안 고민하더니 아랫입술을 깨물며 큰 결심을 내린 듯 입을 열었다.“만약 오후에 시간 되면 저랑 같이 공천하가 수감된 감옥에 가줄 수 있어요?”도준의 눈빛은 살짝 흔들렸다.“공천하가 수감된 감옥?”“네.”곧이어 하윤은 공태준한테서 명함을 받은 사실을 빠짐없이 털어 놓았다. 심지어 다 말하고 난 뒤 잘못을 한 아이처럼 고개를 푹 숙인 채 사과까지 했다.“미리 말했어야 하는데…… 또 거절할까 봐 말하지 못했어요. 게다가 어제 말할 기회도 없어서 이제야 말하는 거예요.”말을 마친 하윤은 고개를 든 채 불상한 눈으로 도준을 바라봤다.“화 내지 마요. 네?”하윤은 도준과 공은채가 저를 두고 내기를 했다는 것도 모른 채 진지하게 고민하고 제 운명이라도 맡기듯 조심스럽 진심을 내보였다.그제야 도준은 어제 하윤이 했던 말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저 도준 씨 사랑해요. 하지만 무서워요.’‘하, 이런 뜻이었어?’사실 하윤을 놓고 내기한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하윤의 반응을 보기 위해 도준은 성은우한테도 내기를 제안했었다. 그때도 도준은 단지 구경꾼이었고 하윤은 도준이 짜놓은 판 속에서 살아남으려고 버둥대는 바둑에 불과했다…….곧이어 공은채의 말도 도준의 뇌리를 세게 강타했다.‘우리가 저를 두고 어떤 판을 짰는지도 모르고 저랑 같은 처지인 벗이 희생당했다고 무너지는 꼴이라니…….’하윤은 확실히 저를 조종하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모른 채 주위에 있는 사람이 다칠 때마다 저 때문이라고 자책해 왔다.깊은 함정에 빠진 게 저인 줄도 모르고, 다른 사람이 저를 두고 내기하는 줄 도 모르고 도준한테 독을 먹이려 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려 왔다.분명 가장 큰 피해자가 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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