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준은 승우의 창백한 얼굴을 무시한 채 대훈의 손에서 핸드폰을 받아 들었다.그러고 대훈의 말이 사실이라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발을 떼어내며 다정하게 웃었다.“그러게 진작 말했으면 이런 꼴 안 봤잖아요.”도준의 미소에 대훈은 마음을 놓기는커녕 더 겁에 질렸다.이제야 사람들이 왜 이 남자를 악마라고 부르는지 알 것만 같았다.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불안한 듯 숨을 몰아 쉬며 도준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다.도준은 대훈의 반응이 재미없어지자 마치 은혜라도 베푸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늦었는데 돌아가서 딸이나 돌봐요.”대훈은 극심한 고통이 느껴지는 머리와 가슴을 신경 쓸 새도 없이 비굴하게 머리를 조아렸다.“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이윽고 마을 마친 뒤 승우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도망쳤다.문이 열리는 순간, 승우의 눈에는 인사불성이 되어 있는 해연이 들어왔다.“해연 씨한테 무슨 짓 했어요?”도준은 발로 의자를 끌어와 천천히 앉더니 다리를 꼬며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형님, 그런 비겁한 짓 저질렀으면서 이제 와서 정의로운 척하지 마요. 저 간호사 이용할 때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알았을 거 아니에요. 그러면서 이제 와서 고고한 척은. 아니면 설마 역할극에 너무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는 건가?”도준의 도발에 승우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주먹을 꽉 그러쥐더니 한참이 지나서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해연 씨는 대훈과 달리 순수한 마음으로 도운 거니 해치지 마요.”그 말에 도준은 살짝 멈칫하더니 이내 미소 지었다.“그래요. 그럼 우리 와이프한테 사실대로 고백해요. 입원하게 된 게 모두 계획한 거였다고. 그러면 저 간호사 내버려둘게요.”아무리 마음의 준비를 했다 해도 도준의 말을 듣는 순간 승우는 숨이 턱 막혔다.이제야 가족들이 저를 달리 보고 만류하는데, 만약 이 모든 게 거짓이었다는 걸 알면 시윤은 아마 그에게 철저히 실망할 거다.그렇게 되는 걸 두고 볼 수 없다는 생각에 승우는 도준을 노려보았다.“나더러 고백하라면서
도준은 몇 분 사이 안색이 수없이 변한 승우를 바라보며 손목시계를 톡톡 두드렸다.“난 돌아가 우리 와이프 곁에 있어 줘야 해서 남은 시간 얼마 없어요.”승우는 충격에서 겨우 헤어 나와 다시 내정을 되찾았다. 하지만 잿빛이 된 얼굴을 여전히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았고 입을 연 순간 목소리마저 갈라져 있었다.“내가 의심하고 있다는 거 진작 알고 있었죠?”도준은 다리를 꼬고 의자 등받이에 기댄 채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설마 내가 그런 잔꾀도 눈치 못 챘다고 생각했어요? 형님 동생도 그런 유치한 수는 안 써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승우는 눈앞이 핑 돌았다. 전에 사용했던 출혈 유발 약물이 진짜인 데다 이 시각 피가 거꾸로 솟아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하지만 승우는 애써 눈꺼풀을 든 채로 도준을 바라봤다.“만약 내가 고백하면 해연 씨 내버려둘 거예요?”“아마도요.”도준은 무심한 듯 말하더니 이내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그런데 고백하지 않으면 저 간호사는 죽어요.”승우는 도준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기에 그가 뱉은 말을 꼭 지킨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형님, 나 지금 형님한테 기회 주는 거예요. 스스로 고백하는 게 까발려지는 것보다는 낫잖아요. 안 그래요?”하긴, 대훈의 핸드폰이 도준의 손에 있는 한 승우가 고백하지 않는다 해도 도준이 까발릴 수 있다.하지만 도준이 그에게 ‘자수’할 기회를 주는 건 아마도 오늘 밤 벌어진 일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일 거다.그 생각에 승우는 크게 심호흡했다.“그래요, 직접 고백할게요.”도준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그래요. 그럼 잘 휴식하고 내일 어디 연기 잘해봐요.”말을 마친 도준이 뒤돌아 병실을 나서려 할 때, 승우가 갑자기 질문을 했다.“이거 혹시 다 계획된 거예요? 윤이를 곁에 붙잡아 두고 나를 윤이 옆에서 영원히 치워버리려고 계획한 거죠?”도준은 고개를 돌려 승우를 흘끗 쳐다봤다.“하, 서른 가까이 된 사람이 아직도 이렇게 순진해서야. 나 이길 수 있을 때 다
“남은 음식 먹으면 좋은 아빠가 될 수 있는 거야?”“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아이를 위해 200만 원이나 주고 돈가스를 사 오니 좋은 아빠가 아니면 뭔데요?”도준은 손을 들어 시윤의 목덜미를 잡고 제 쪽으로 끌어당기더니 코가 맞닿을 거리에서 멈춰선 채 낮게 속삭였다.“누가 그래? 내가 아이를 위해 산 거라고? 난 자기 위해 산 건데.”도준의 눈과 마주친 순간 시윤은 가슴이 콩닥거렸다.지금껏 도준이 이토록 고분고분한 게 군 것도 분명 아이 때문일 거라 생각했는데 도준의 말을 들으니 마음이 따뜻해지며 몽글몽글해졌다.하지만 분명 기쁘면서도 입으로는 아닌 척 투덜댔다.“애가 태어나서 도준 씨가 이렇게 편애하는 거 알면 화낼 거예요.”“뭐 어때? 아직 잘 알지도 못하는데.”“아니!”도준이 애를 신경도 쓰지 않자 시윤은 도저히 기뻐할 수가 없어 벌떡 일어나 욕지거리를 퍼부었다.“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왜 애는 낳게 했어요? 이건 노동 성과를 존중해주지 않는 거랑 다름 없다구요!”도준은 욱해서 따지고 드는 시윤의 손을 잡아 제 앞으로 끌어당겼다.“남의 애는 싫어하는데...”그러면서 시윤의 배를 어루만졌다.“자기가 내 애 낳는 건 좋아. 이 애는 우리 둘 이어주는 증명이니까. 죽어도 천륜은 못 끊어낸다잖아. 자기 이제 나한테서 못 벗어나.”처음에 감동했던 시윤은 도준의 말을 듣다가 결국 헛웃음이 나왔다.“뭐가 죽네 사네예요? 저 지금 도준 씨 애 가진 거예요. 또 사고라도 나서 나 떠나면 그땐 죽어라 물어댈 거예요.”이를 가는 시윤의 모습은 예전처럼 귀여운 모습이 아니라 조금 박력 있었다. 그 모습에 도준은 재밌는 듯 시윤을 끌어당기더니 의자에 앉은 채로 오려다 보았다.“어디를 물고 싶은데? 응?”“저리 비켜요.”...샤워를 할 때 시윤은 귀찮았는지 도준을 부려 먹었다.도준은 하얀 목덜미를 덮은 긴 머리카락을 보더니 시선을 점점 아래로 내렸다. 그랬더니 요즘 살이 붙어 한층 더 굴곡진 허리가 눈에 들어왔다.그걸 본 순간 도준은 시윤
다음날.시윤은 양현숙을 보러 아침 일찍 병원에 갔다. 다행히 잘 회복되어 며칠 뒤면 퇴원해도 된다는 의사의 검사 결과를 받게 되었다.검사를 마친 양현숙은 운동도 할 겸 승우를 보러 가자고 제안하였지만 병실에 도착해보니 텅 빈 병실 안에서 간호사 한 명이 울고 있었다.그 모습에 시윤은 심장이 덜컹 내려 앉았다.“왜 그래요? 혹시 오빠한테 무슨 일 있는 거예요?”해연은 인기척이 들리자 얼른 눈물을 닦고 편지를 건넸다.“승우 오빠가 이거 전해주래요.”편지를 펼쳐 보니 승우의 글씨체가 눈에 들어왔다.[어머니랑 윤아가 이 편지 볼 때쯤 나 아마 떠났을 거예요. 두 사람 앞에서 직접 밝히지 못하는 나약한 저를 용서해 줘요. 사실 저 쇼크 왔던 거 사고 아니에요. 두 사람 동정을 얻으려고 일부러 설계한 거예요.제 친구 대훈이를 통해 수술 중에 출혈 쇼크를 일으킬 수 있는 약물을 구하게 해서 해연 씨한테 수술 중에 몰래 바꿔 투여해 달라고 부탁했거든요. 두 사람 곁에 남으려는 욕심에.예전에 편지를 숨겼던 건 두려움 때문에, 할 수 없이 한 선택이었다면.이번 수술을 통해 내가 진짜 비겁한 사람이란 걸 알았어요.어제저녁 이 잘못을 어떻게 용서받을지 수없이 생각했는데 답을 끝내 못 찾았어요.나 때문에 아버지가 그렇게 됐고, 어머니도 아버지 마지막 모습도 못 봤어요. 윤이도 나 때문에 그런 고통을 겪었고.그래서 생각해 봤는데 유일한 방법이 떠나는 거더라고요.저 병원 옮겼어요. 회복하는 대로 떠나려고요. 아마 몇 년이 될 수도 있고 십 몇 년이 지나 두 사람이 나 더 이상 미워하지 않으면, 그때 돌아올지도 모르겠네요.나 잊고 살아요. 승우가.]편지를 본 양현숙은 눈시울을 붉히며 중얼거렸다.“왜 이렇게 바보 같아?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건데?”시윤 역시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저 마음이 답답하고 무거웠다.어제만 해도 승우가 위독할까 봐 슬퍼했는데, 갑자기 그게 모두 쇼였다니.오빠가 왜 이렇게 변했는지, 왜 마지막 존엄마저 버렸는지 시윤은
시윤은 도준이 그냥 한 말이라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도준은 정말로 익숙한 듯 요리했다. 문제라면 음식 재료를 썰고 있는 모습이 왠지 모르게 시체를 분해하는 것처럼 섬뜩하다는 거였다.시윤은 놀라운 듯 시영이 가져온 의자에 시영과 나란히 앉아 고기를 다지고 있는 도준을 신기하게 바라봤다.그러다 한참 뒤 참지 못하고 질문했다.“그런데 밥은 어떻게 할 줄 알게 된 거예요?”도준은 시윤을 흘끗 바라봤다.“내가 못 하는 게 뭐가 있어?”‘하긴, 진짜네.’도준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다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을 때, 시영이 시윤의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형부 진짜 대단한 것 같아.”시윤 역시 시영의 귀에 소곤거렸다.“그러게.”하지만 시영은 얼마 앉아 있지 못하고 싫증이 났는지 가을이 준 앨범을 듣자며 시윤을 끌고 나갔다.두 딸이 나가는 걸 보자 양현숙은 걱정스러운 듯 당부했다.“네 언니 임신 중이라 조심해. 마구 뛰어다니지 말고.”“알았어요.”이미 멀리 간 시영은 제대로 듣지도 않은 것처럼 대충 대답했다.그걸 본 양현숙은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쟤를 어떡하면 좋아.’종알대던 두 사람이 사라지자 주방은 순간 조용해졌다.양현숙은 도준을 바라봤다. 밥할 줄 안다고 당당하게 말하더니 확실히 칼질에서 꽤 익숙해 보인다는 걸 알 수 있었다.한창 바라보던 양현숙 역시 궁금했는지 넌지시 물었다.“민 서방, 밥하는 건 언제 배웠어?”“해외에 있을 때요.”도준은 말을 길게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일전에 시윤한테서 도준이 얼마나 힘든 나날을 보냈는지 들은 적 있는 양현숙은 한층 다정해진 눈으로 도준을 봤다.“자네도 우리 윤이도 모두 기구한 삶을 살았는데, 지금 이렇게 애도 생기고 평화롭게 살 수 있어 다행이네. 앞으로 좋은 일만 있을 거네.”그러다 잠깐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윤이는 착한 애라 항상 남을 이해하려 하네. 아직 어려서 그런지 옳고 그름이 너무 명확하고 제 생각에 아닌 일이라면 용서를 쉽게 안 하는 게 문제지만.”양현숙
주방은 잠시 조용해졌다.그러다 한참 뒤 양현숙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도준을 바라봤다.“혹시 한 가지 부탁해도 되나?”“말씀하세요.”“만약, 내 말은 만약에 두 사람한테 또 우여곡절이 생긴다면 윤이한테 시간 좀 주게. 두 사람 모두 시간을 가져. 가끔 사람을 사랑하는 건 그 어떤 수단도 필요 없네. 그냥 기다리기만 하면 자연스럽게 다시 곁으로 돌아올 거네.”도준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기다리라고요?”“그렇네. 기다리게.”한창 얘기하고 있을 때 압력솥에서 갑자기 소리가 나는 바람에 양현숙은 이내 자리를 떴다.도준은 음식 냄새가 솔솔 풍기는 주방에 서서 양현숙이 내다보던 창밖을 바라봤다. 그 방향에는 작은 정원이 있었는데, 지난번에 왔을 때만 해도 가지뿐인 나무에 꽃이 만개하고 파릇파릇 잎이 돋아나 예쁘기 그지없었다.도준이 한창 넋을 놓고 밖을 바라보고 있을 때, 갑자기 누군가 허리를 끌어안아 돌아보니 시윤이 어느새 몰라 들어와 있었다.그러다 도준이 뭐라 하려 하자 시윤은 얼른 도준의 입에 사탕 한 알을 넣어 주며 교활한 미소를 지었다.“시영이한테서 훔쳐 온 거예요. 달죠?”“응, 달아.”도준은 고개를 끄덕였다.시윤은 그런 도준의 옷깃을 잡아당겨 기습 뽀뽀를 하더니 제 전리품인 사탕도 살짝 맛봤다.그때 마침 문 앞까지 쫓아온 시영이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악! 나 못 볼 거 봤어!”“반에서 젤 잘생긴 남학생 사진 보며 침 흘리던 게 누구더라?”“뭐야? 언니 내 앨범 훔쳐봤어?”“내가 언제 훔쳐봤다고 그래? 침대 머리맡에 놓여 있어 무시하고 싶어도 무시할 수가 없었거든.”시윤은 말하면서 손에 든 사진을 흔들어댔고, 그 순간 시영이 손을 허우적대며 펄쩍 뛰었다.“아, 돌려줘!”“싫은데.”시영과 함께 있어 그런지 시윤도 유치해져 도준을 사이 두고 빙빙 돌면서 저를 쫓아오는 시영을 요리조리 피했다.그때 마침 음식을 들고나온 양현숙이 두 딸을 보더니 깜짝 놀라 얼른 제지했다.“주방 복잡해서 조심해. 네 언니 배
임신한 지 한 달이 지난 데다 봄이 되자 시윤은 시도 때도 없이 졸았고, 매일 눈을 뜰 때면 오후가 훌쩍 넘곤 했다.오늘도 잠에서 깬 시윤은 기지개를 켜려고 고개를 들다가 저를 안고 있는 도준을 발견했다.요즘 들어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고 저녁 늦게 잠자던 도준은 오늘 보기 드물게 시윤과 함께 낮잠을 잤다.시윤은 도준을 배려하느라 깨어났음에도 움직이지 않고 얌전하게 도준의 품에 안겨 있었다.햇빛을 적당하게 막아준 커튼에서 눈을 뗀 시윤은 벽에 붙은 빛바랜 포스터, 유백색 옷장, 그리고 어릴 때 숙제를 하던 책상을 차례대로 바라보았다.시윤의 방은 아직도 어릴 적에 사용하던 그대로 소녀소녀한 핑크빛 감성이 묻어 있었다. 흰색과 연분홍색이 어우러져 있는 데다 카펫까지 폭신폭신했다.그 때문인지 침대에 멀대 같은 남자가 누워있자 위화감이 들었다 학창 시절 잠 못 드는 밤마다 침대에 누워 미래에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 훌륭한 발레리노가 될 수 있을지 상상하곤 했었는데.게다가 앞으로 어떤 남자를 만날지도 가끔 상상했다.키 크고 잘생긴 남자? 유머러스하고 매력적인 남자? 아니면 평범하고 착해 함께 고난을 이겨내고 평범한 행복을 좇을 수 있는 남자?학창 시절에는 가장 큰 적이 숙제와 쌤이라서 몇 년 뒤에 제 삶에 이렇게 큰 변화가 올 거라고 생각지도 못했다.그런데 그동안 본적 없는 어두운 나날을 보냈고, 평생 상상한 적도 없는 남자를 만났다.시윤은 고개를 들어 어둠 속에서 날렵한 턱선과 조각 같은 이목구비를 자랑하는 남자를 바라봤다. 깊은 아이홀에 그림자가 드리워 처음 봤을 때처럼 매혹적이었다.처음 몸을 섞었을 때 그토록 무섭던 남자가 지금 제가 어릴 때부터 자라온 곳에 누어 있고, 배 속에 그 남자의 아이까지 품고 있다고 생각하니 감회가 새로웠다.시윤은 말없이 제 배를 어루만졌다. 아이가 생겼다는 것이 기대되는 한편 조금 미묘한 느낌도 들었다. 마치 이제야 인생의 종점에 다다른 것처럼.아버지의 일을 겪은 뒤로 시윤은 줄곧 떠돌아다녔다. 아무리 고
시윤은 막무가내인 도준의 모습에 화가 나 이를 갈았다.“변태.”결국 도준은 시윤을 너무 몰아붙이지 않고 품 속에 꼭 끌어안았다.“우리 얘기 좀 해. 어릴 때 사용하던 방에 왔다고 학생 때로 돌아간 것처럼 굴며 나 못 만지게 하고 욕한 게 누군데? 어디서 그런 못된 버릇 배웠어?”“내가 언제 학생 때로 돌아간 척했다고 그래요? 는 그냥...”사실 도준의 말이 맞다. 이 방에만 돌아오면 시윤은 도준의 아내가 아닌 이씨 집안 딸, 시영의 언니가 된 기분이니까. 분명 스무 살도 넘은 성인인데, 이 방에만 오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연애에 빠진 학생이 된 것처럼 부끄러웠다.시윤은 도준의 어깨를 밀어 버리고 자리에 앉아 콧방귀를 뀌었다.“누구나 도준 씨 같은 줄 알아요? 그러다 이상한 소리라도 새어 나가 엄마랑 시영이가 들으면 하면 어떡하려고요? 도준 씨는 체면 같은 거 상관 안 해도 전 신경 쓴다고요.”도준은 나른하게 침대 헤드에 기대 시윤의 머리카락을 손에 잡고 그녀의 얼굴을 쓸어내렸다.“나 내일 계약 건으로 경성에 올라가야 해. 이틀 동안 여기서 나 기다려.”도준이 간다는 소식에 시윤의 표정은 이내 어두워졌다.“저도 같이 갈래요.”“지금 비행기 타면 위험해, 몇 달 뒤에 데려갈게.”시윤은 기분이 우울했지만 배 속의 아이를 위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그 뒤로 한 달 동안 도준은 대부분 시간 모두 해원에서 시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가끔 경성에 갈 때면 시윤을 양현숙의 집에 보냈다.그렇게 아이가 3달째 되자 시윤은 샤워할 때마다 볼록 나온 제 배를 볼 수 있게 되었다.심지어 입맛이 돌던 시기도 끝나 이것저것 가리는 게 많아져 투정이 심해졌다.오늘도 양현숙이 정성스럽게 몇 가지 음식을 준비했는데 시윤은 그저 젓가락으로 이리저리 휘젓다 다시 내려놓자, 양현숙은 화가 난 듯 시윤의 머리를 쿡쿡 찔렀다.“전생에 내가 너한테 큰 빚을 진 게 틀림없어.”“입맛 없단 말이에요.”시윤은 억울한 듯 투덜댔다.하지만 양현숙은 시윤의 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