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윤은 도준이 그냥 한 말이라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도준은 정말로 익숙한 듯 요리했다. 문제라면 음식 재료를 썰고 있는 모습이 왠지 모르게 시체를 분해하는 것처럼 섬뜩하다는 거였다.시윤은 놀라운 듯 시영이 가져온 의자에 시영과 나란히 앉아 고기를 다지고 있는 도준을 신기하게 바라봤다.그러다 한참 뒤 참지 못하고 질문했다.“그런데 밥은 어떻게 할 줄 알게 된 거예요?”도준은 시윤을 흘끗 바라봤다.“내가 못 하는 게 뭐가 있어?”‘하긴, 진짜네.’도준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다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을 때, 시영이 시윤의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형부 진짜 대단한 것 같아.”시윤 역시 시영의 귀에 소곤거렸다.“그러게.”하지만 시영은 얼마 앉아 있지 못하고 싫증이 났는지 가을이 준 앨범을 듣자며 시윤을 끌고 나갔다.두 딸이 나가는 걸 보자 양현숙은 걱정스러운 듯 당부했다.“네 언니 임신 중이라 조심해. 마구 뛰어다니지 말고.”“알았어요.”이미 멀리 간 시영은 제대로 듣지도 않은 것처럼 대충 대답했다.그걸 본 양현숙은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쟤를 어떡하면 좋아.’종알대던 두 사람이 사라지자 주방은 순간 조용해졌다.양현숙은 도준을 바라봤다. 밥할 줄 안다고 당당하게 말하더니 확실히 칼질에서 꽤 익숙해 보인다는 걸 알 수 있었다.한창 바라보던 양현숙 역시 궁금했는지 넌지시 물었다.“민 서방, 밥하는 건 언제 배웠어?”“해외에 있을 때요.”도준은 말을 길게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일전에 시윤한테서 도준이 얼마나 힘든 나날을 보냈는지 들은 적 있는 양현숙은 한층 다정해진 눈으로 도준을 봤다.“자네도 우리 윤이도 모두 기구한 삶을 살았는데, 지금 이렇게 애도 생기고 평화롭게 살 수 있어 다행이네. 앞으로 좋은 일만 있을 거네.”그러다 잠깐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윤이는 착한 애라 항상 남을 이해하려 하네. 아직 어려서 그런지 옳고 그름이 너무 명확하고 제 생각에 아닌 일이라면 용서를 쉽게 안 하는 게 문제지만.”양현숙
주방은 잠시 조용해졌다.그러다 한참 뒤 양현숙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도준을 바라봤다.“혹시 한 가지 부탁해도 되나?”“말씀하세요.”“만약, 내 말은 만약에 두 사람한테 또 우여곡절이 생긴다면 윤이한테 시간 좀 주게. 두 사람 모두 시간을 가져. 가끔 사람을 사랑하는 건 그 어떤 수단도 필요 없네. 그냥 기다리기만 하면 자연스럽게 다시 곁으로 돌아올 거네.”도준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기다리라고요?”“그렇네. 기다리게.”한창 얘기하고 있을 때 압력솥에서 갑자기 소리가 나는 바람에 양현숙은 이내 자리를 떴다.도준은 음식 냄새가 솔솔 풍기는 주방에 서서 양현숙이 내다보던 창밖을 바라봤다. 그 방향에는 작은 정원이 있었는데, 지난번에 왔을 때만 해도 가지뿐인 나무에 꽃이 만개하고 파릇파릇 잎이 돋아나 예쁘기 그지없었다.도준이 한창 넋을 놓고 밖을 바라보고 있을 때, 갑자기 누군가 허리를 끌어안아 돌아보니 시윤이 어느새 몰라 들어와 있었다.그러다 도준이 뭐라 하려 하자 시윤은 얼른 도준의 입에 사탕 한 알을 넣어 주며 교활한 미소를 지었다.“시영이한테서 훔쳐 온 거예요. 달죠?”“응, 달아.”도준은 고개를 끄덕였다.시윤은 그런 도준의 옷깃을 잡아당겨 기습 뽀뽀를 하더니 제 전리품인 사탕도 살짝 맛봤다.그때 마침 문 앞까지 쫓아온 시영이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악! 나 못 볼 거 봤어!”“반에서 젤 잘생긴 남학생 사진 보며 침 흘리던 게 누구더라?”“뭐야? 언니 내 앨범 훔쳐봤어?”“내가 언제 훔쳐봤다고 그래? 침대 머리맡에 놓여 있어 무시하고 싶어도 무시할 수가 없었거든.”시윤은 말하면서 손에 든 사진을 흔들어댔고, 그 순간 시영이 손을 허우적대며 펄쩍 뛰었다.“아, 돌려줘!”“싫은데.”시영과 함께 있어 그런지 시윤도 유치해져 도준을 사이 두고 빙빙 돌면서 저를 쫓아오는 시영을 요리조리 피했다.그때 마침 음식을 들고나온 양현숙이 두 딸을 보더니 깜짝 놀라 얼른 제지했다.“주방 복잡해서 조심해. 네 언니 배
임신한 지 한 달이 지난 데다 봄이 되자 시윤은 시도 때도 없이 졸았고, 매일 눈을 뜰 때면 오후가 훌쩍 넘곤 했다.오늘도 잠에서 깬 시윤은 기지개를 켜려고 고개를 들다가 저를 안고 있는 도준을 발견했다.요즘 들어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고 저녁 늦게 잠자던 도준은 오늘 보기 드물게 시윤과 함께 낮잠을 잤다.시윤은 도준을 배려하느라 깨어났음에도 움직이지 않고 얌전하게 도준의 품에 안겨 있었다.햇빛을 적당하게 막아준 커튼에서 눈을 뗀 시윤은 벽에 붙은 빛바랜 포스터, 유백색 옷장, 그리고 어릴 때 숙제를 하던 책상을 차례대로 바라보았다.시윤의 방은 아직도 어릴 적에 사용하던 그대로 소녀소녀한 핑크빛 감성이 묻어 있었다. 흰색과 연분홍색이 어우러져 있는 데다 카펫까지 폭신폭신했다.그 때문인지 침대에 멀대 같은 남자가 누워있자 위화감이 들었다 학창 시절 잠 못 드는 밤마다 침대에 누워 미래에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 훌륭한 발레리노가 될 수 있을지 상상하곤 했었는데.게다가 앞으로 어떤 남자를 만날지도 가끔 상상했다.키 크고 잘생긴 남자? 유머러스하고 매력적인 남자? 아니면 평범하고 착해 함께 고난을 이겨내고 평범한 행복을 좇을 수 있는 남자?학창 시절에는 가장 큰 적이 숙제와 쌤이라서 몇 년 뒤에 제 삶에 이렇게 큰 변화가 올 거라고 생각지도 못했다.그런데 그동안 본적 없는 어두운 나날을 보냈고, 평생 상상한 적도 없는 남자를 만났다.시윤은 고개를 들어 어둠 속에서 날렵한 턱선과 조각 같은 이목구비를 자랑하는 남자를 바라봤다. 깊은 아이홀에 그림자가 드리워 처음 봤을 때처럼 매혹적이었다.처음 몸을 섞었을 때 그토록 무섭던 남자가 지금 제가 어릴 때부터 자라온 곳에 누어 있고, 배 속에 그 남자의 아이까지 품고 있다고 생각하니 감회가 새로웠다.시윤은 말없이 제 배를 어루만졌다. 아이가 생겼다는 것이 기대되는 한편 조금 미묘한 느낌도 들었다. 마치 이제야 인생의 종점에 다다른 것처럼.아버지의 일을 겪은 뒤로 시윤은 줄곧 떠돌아다녔다. 아무리 고
시윤은 막무가내인 도준의 모습에 화가 나 이를 갈았다.“변태.”결국 도준은 시윤을 너무 몰아붙이지 않고 품 속에 꼭 끌어안았다.“우리 얘기 좀 해. 어릴 때 사용하던 방에 왔다고 학생 때로 돌아간 것처럼 굴며 나 못 만지게 하고 욕한 게 누군데? 어디서 그런 못된 버릇 배웠어?”“내가 언제 학생 때로 돌아간 척했다고 그래요? 는 그냥...”사실 도준의 말이 맞다. 이 방에만 돌아오면 시윤은 도준의 아내가 아닌 이씨 집안 딸, 시영의 언니가 된 기분이니까. 분명 스무 살도 넘은 성인인데, 이 방에만 오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연애에 빠진 학생이 된 것처럼 부끄러웠다.시윤은 도준의 어깨를 밀어 버리고 자리에 앉아 콧방귀를 뀌었다.“누구나 도준 씨 같은 줄 알아요? 그러다 이상한 소리라도 새어 나가 엄마랑 시영이가 들으면 하면 어떡하려고요? 도준 씨는 체면 같은 거 상관 안 해도 전 신경 쓴다고요.”도준은 나른하게 침대 헤드에 기대 시윤의 머리카락을 손에 잡고 그녀의 얼굴을 쓸어내렸다.“나 내일 계약 건으로 경성에 올라가야 해. 이틀 동안 여기서 나 기다려.”도준이 간다는 소식에 시윤의 표정은 이내 어두워졌다.“저도 같이 갈래요.”“지금 비행기 타면 위험해, 몇 달 뒤에 데려갈게.”시윤은 기분이 우울했지만 배 속의 아이를 위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그 뒤로 한 달 동안 도준은 대부분 시간 모두 해원에서 시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가끔 경성에 갈 때면 시윤을 양현숙의 집에 보냈다.그렇게 아이가 3달째 되자 시윤은 샤워할 때마다 볼록 나온 제 배를 볼 수 있게 되었다.심지어 입맛이 돌던 시기도 끝나 이것저것 가리는 게 많아져 투정이 심해졌다.오늘도 양현숙이 정성스럽게 몇 가지 음식을 준비했는데 시윤은 그저 젓가락으로 이리저리 휘젓다 다시 내려놓자, 양현숙은 화가 난 듯 시윤의 머리를 쿡쿡 찔렀다.“전생에 내가 너한테 큰 빚을 진 게 틀림없어.”“입맛 없단 말이에요.”시윤은 억울한 듯 투덜댔다.하지만 양현숙은 시윤의 체면
승우는 퇴원 한지 보름 정도 되자 떠나기 전 해연이 있는 병원에 들러 그녀의 동료에게 편지를 부탁했다.그 안에는 2억이나 저축되어 있는 카드 한 장과 ‘이용해서 미안하다’는 내용의 카드가 들어 있었다.해연의 진심을 배신한 걸 비겁하게도 이런 방법으로 보상할 수밖에 없었다.그동안 승우는 시윤에게 연락을 하지는 않았지만 가끔 집 근처에 가보곤 했다.그 덕에 때로는 장보고 돌아온 어머니를 볼 때도 있고, 어머니에게 끌려 억지로 산책하는 시윤을 볼 때도 있었다.아직 배가 나오지 않았지만 시윤은 벌써부터 걸을 때 배부터 감싸는 습관이 생긴 듯했다. 게다가 가끔 부드러운 눈빛을 드러내기도 했다.아이가 세상에 태어날 미래를 기대하는 듯한 모습이었다.그동안 마음을 정리한 승우는 더 이상 전처럼 충동적으로 행동하지 않았다. 시윤이 어렵사리 그 가는 팔로 가족 모두를 구렁텅이에서 빼내 이제야 삶다운 삶을 살까 하는데, 그 평화를 깨뜨릴 자격이 그에게는 없었다.때문에 승우는 조용히 출국행 티켓을 끊고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 떠나는 걸 선택했다....다음 날 오전 10시. 공항.시윤은 몰래 집에서 나와 택시를 타고 도준을 마중하러 공항에 도착했다.브리핑이 끝나면 전용기는 모두 전문가들에게 제공해야 하는 터라 도준은 미리 여객기에 올라탔다.도준이 정확한 시간을 알려주지 않았지만 10시에서 11시 사이에 도착하는 비행기라고 대충 짐작한 시윤은 도준을 빨리 ‘잡아오기’ 위해 미리 와 있었다.픽업 게이트로 오가는 사람들을 보던 시윤은 도준을 만날 생각에 어느새 미소를 짓고 있었다.게이트 쪽만 살피느라 시윤은 제 뒤를 내내 쫓아온 사람이 있다는 걸 발견하지는 못했다.그 사람은 다름 아닌 승우다. 그는 택시에 내려 시윤을 본 순간 시윤이 저를 배웅하러 온 거라고 생각해 잠깐 기뻐했었다. 하지만 곧장 픽업 게이트로 향하는 시윤을 보고 나서야 그녀가 도준을 마중하러 왔다는 걸 알아챘다.앞으로 언제 또 시윤을 볼 수 있을지 알 수 없었기에 승우는 곧바로 비행기에
도준은 여자를 보는 체도 하지 않고 대충 대답했다.“아내가 싫어해요.”여자는 그 대답을 당연히 믿지 않았다. 여자는 지금껏 수많은 사람을 만나왔다고 자신하기에 이런 남자가 젊은 나이에 여자에게 얽매이는 걸 선택할 리 없다고 확신했다.이에 여자는 도준의 앞을 가로막더니 제 머리를 뒤로 넘기며 매력을 발산했다.“에니, 연락처 교환하는 게 뭐 큰일도 아니고. 매너 있는 남자는 여자 체면 살려주던데.”도준은 여자를 흘깃거리더니 여전히 무뚝뚝한 표정으로 대답했다.“그쪽 체면이 나랑 무슨 상관이죠?”예쁘장하게 생긴 여자는 처음으로 이런 취급을 받은 건지 얼굴이 어두워졌다.“뭔 사람이 이렇게 똥 매너야?”여자가 목소리를 줄이지 않은 탓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하나둘씩 소곤대기 시작했다.그걸 본 시윤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앞으로 다가가 도준의 팔짱을 꼈다.“이보세요. 우리 남편이 이미 결혼했다는 데 계속 들러붙은 게 누군데, 지금 어디서 적반하장이에요? 매너 없는 게 누군데요?”도준은 눈살을 찌푸린 채 제 앞을 막아서서 화를 내는 시윤을 빤히 바라봤다.‘이젠 점점 내 말 안 듣네. 연락도 없이 나오다니.’하지만 제 걸 지키려고 애쓰는 시윤의 모습에 잠시 봐주기로 결심했다.상대의 아내가 나타나면 일이 바로 해결될 줄 알았으니, 여자는 제 체면이 깎이자 오히려 도준을 모함했다.“이봐요! 그쪽 남편이 비행기에서 저한테 먼저 관심을 보여 솔로인 줄 알고 말 섞은 거거든요. 남편 관리나 제대로 할 것이지 같은 여자 난처하게 해서 얻는 게 뭐 있어요? 억지 좀 부리지 마요!”여자가 도준을 모함하자 시윤은 분노가 폭발하여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지금 어디서 사실을 왜곡해요?”화를 참지 못해 점점 목소리가 격앙되고 있을 때, 도준이 등 뒤에서 시윤을 꼭 안으며 여자를 향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내가 그쪽한테 관심을 보였다고? 아까 보니 도착하자마자 스폰서한테 전화해 애교부리던데, 내가 언제 관심을 보였다고 그러지?”그 말에 여자는 순간 난감한
만약 한 달 전이었다면 승우는 고민 없이 시윤에게 사실을 털어놓았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시윤이 도준을 얼마나 감싸는지, 다른 사람이 도준을 비방하는 걸 얼마나 참지 못하는지 똑똑히 봤는데, 자기가 감싸던 사람을 본인조차 알지 못했다는 걸 알게 되면 시윤이 어떻게 될까 두려웠다.결국 한참을 생각한 승우는 태준에게 전화를 걸었다.“태준 씨, 혹시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오후.시윤이 도준과 함께 집에 도착하자 양현숙은 이미 음식을 준비한 채 기다리고 있었다. 몇 달 동안 경성 음식을 꾸준히 연습한 덕에 요리 솜씨가 놀라울 정도로 늘어난 양현숙은 손수 막국수까지 준비했다.찬물에 헹군 국수를 그릇에 담아 식탁에 올려놓던 양현숙은 도준과 함께 들어온 시윤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너 어떻게 민 서방이랑 같이 들어와? 산책하러 간다고 하지 않았어?”“네? 제가 그랬어요?”시윤은 눈알을 굴리며 양현숙의 눈을 피했다.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양현숙은 화가 나 젓가락을 내팽개쳤다.“너 이제 하다 하다 엄마까지 속여? 공항이 얼마나 복잡한데 아무 말도 없이 그런 곳까지 왜 혼자 갔어? 엄마가 안중에 있기는 해?”시윤은 도준의 등 뒤에 숨어 고개를 쏙 내밀고 변명했다.“공항에 가는 것도 산책이잖아요.”양현숙은 못 당해내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난 이제 너 상관 못 하겠어. 민 서방, 앞으로 자네가 윤이 챙겨.”양현숙이 정말 화를 내자 시윤은 얼른 다가가 양현숙의 팔짱을 꼈다.“죄송해요. 다음엔 안 그럴게요.”양현숙은 콧방귀를 뀌고 홱 돌아서더니 시윤을 무시한 채 음식을 나르기 시작했다.투명 인간 취급에 멍하니 서 있는 시윤을 보자 도준은 얼른 손에 쥐고 있던 상자를 건네주며 주방을 향해 고개를 까닥거렸다.상자를 슬쩍 열어본 시윤은 이내 눈을 반짝이며 양현숙에게 달려갔다.“엄마, 이것 봐요. 이거 엄마가 지난번에 티브이에서 본 옥으로 된 찻잔이잖아요. 엄마 컵 수집하는 거 좋아하잖아요. 이걸 봐서라도 화 풀어요.”그
시윤의 모든 검사 결과는 정상으로 나왔기에 조심하면 가능하기는 했다. 하지만 아직 초보라 시윤은 여전히 걱정이 앞서 도준의 제안이 놀라 뒷걸음쳤다.“안 돼요. 그러다 절제력을 잃고 애 다치게 하면 어떡해요.”거리가 멀어졌지만 도준의 눈빛은 공격성을 띄고 있어 위험하기 그지없었다. 도준은 입꼬리를 천천히 말아 올리며 점점 뒷걸음치는 시윤에게 한 걸음씩 다가갔다.그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등 뒤에 있던 테이블에 막혀 움직이지 못하게 되자 시윤은 얼른 경고했다.“함부로 굴지 마요. 여기 아래층이에요.”도준은 한 손으로 테이블을 짚고 다른 한 손으로 시윤의 턱을 들어 올리며 허리를 숙이더니, 시윤이 무의식적으로 눈을 감자 닿을락 말락 한 거리에 멈춰 선 채로 속삭였다.“지금 보니 엉큼한 생각하는 건 내가 아니라 자기인 것 같은데?”눈을 뜬 순간 도준의 장난기 섞인 눈과 마주치자 시윤은 화가 나 사람을 물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윽고 도준을 밀어내고는 혼자 제 방으로 돌아갔다.‘사람이 진짜 너무하네. 어쩜 선물도 잊었으면서 놀리기만 하고.’시윤은 배를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너 나중에 나오면 아빠 절대 따라 배우지 마. 아빠는 반면교사야.”한창 ‘태교’에 열중하고 있을 때 목에 차가운 뭔가가 떨어져 확인하니 목걸이였다.시윤은 고개를 숙여 정교한 목걸이를 한참 동안 바라봤다. 체인에도 작은 다이아가 달려 있어 대체 어떻게 만들었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보석의 크기는 작은 체인 구멍에 딱 들어맞았는데 가까이에서 보면 반짝반짝 눈 부신 빛을 발산하고 잇었다.놀란 시윤은 이내 고개를 돌려 도준을 바라봤다.“도준 씨가 산 거예요?”도준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당연한 거 아니야? 자기 목걸이 사면서 그 컵은 겸사겸사 산 거야. 누구 때문에.”시윤은 목걸이가 마음에 꼭 들었는지 기쁨을 숨기지 못했지만 애써 도도한 표정을 유지했다.“샀으면서 놀리긴. 진짜 못됐어.”응석을 부리는 듯한 귀여운 모습에 도준의 눈은 점점 어두워졌다. 도준은 아무 말도 하
연말이 되자, 하윤은 사람들 다 같이 경성에서 새해를 맞이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경성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진가연과 한성운도 그러고 싶어 했다.남은 사람은 양현숙이었다.하윤은 원래 양현숙을 데리고 경성에 오려고 했는데, 양현숙이 해성시의 집을 떠나기 싫어했다. 양현숙은 집을 지켜야 한다면서 오래 집을 비우면 너무 처량한 느낌이 난다고 했다.하윤은 양현숙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집뿐만이 아니라 이성호와의 추억이다.그래서 하윤은 그렇게 요구하지 않고 도윤을 데리고 자주 보러 갔다.이번에 하윤의 요청에 양현숙이 기분 좋게 동의하면서 31일에 같이 새해를 맞이하기로 했다.하윤은 손님 맞을 준비를 했고 곧 새해가 다가왔다. 양현숙이 하윤에게 전화를 걸었고 조금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하윤에게 물었다.“하윤아, 네 오빠 귀국한다는데, 만나볼래? 싫으면 너희 방해하지 말라고 할게.”그때 병원에서 기분 나쁘게 헤어진 뒤로 만난 적이 없었다.승우는 도윤의 나이를 잘 기억하고 있어 가끔 나이에 맞는 장난감을 보내주었다.이렇게 여러 해 지나고 하윤은 전의 일을 마음에 담아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너무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한 것에 대해 조금 자책했다. 양현숙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하윤은 양현숙이 중간에서 힘들까 봐 가볍게 말했다.“오빠 돌아왔으면 같이 오세요. 우리 한 가족 되게 오래 같이 못 만났잖아요?”양현숙은 기뻐서 대답했다.“알았어, 그렇게 오빠한테 전달할게.”...통화를 마친 하윤은 이 일을 도준에게 얘기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승우가 하윤의 오빠지만, 하윤이 이 이년 사이에 아무 이성과 접촉하지 않았다. 심지어 수컷 모기까지 도준은 하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도준은 승우를 항상 경계해 왔다.도준이 동의하지 않을까 봐 그날 저녁 도준이 돌아왔을 때, 하윤은 120%로 잘 보이려고 했다.하윤은 발꿈치를 들고 도준의 외투를 벗겨주었다.“여보 왔어요? 어땠어요? 오늘 일은 힘들지 않았어요?”도준이 하윤을 힐끔 쳐다보고 소파에 앉아
하윤은 요즘 아들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았다.도윤은 다른 애들과 달리 장난감으로 놀기 좋아하거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장 많이 하는 일이 책을 보는 일이었다.가끔 하윤은 도윤이 너무 오래 앉아 있어 힘들까 봐 텔레비전 앞에 데려와서 애니메이션을 틀어줬다.그러나 하윤이 할 일을 하고 돌아오니, 도윤이 뉴스 채널을 돌려서 재밌게 보고 있었다.소파 위에 있는 작은 아들을 보고 하윤은 걱정이 앞섰다.‘설마 내가 너무 연습에 몰두해서 아들을 소홀히 했나? 그래서 아들이 상처를 받아서 저런가? 안 돼! 도윤에게 완벽한 동년을 줄 거야!’하윤은 이 일이 엄청나게 큰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동안 생각하고 도윤을 데리고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과 많이 만나게 하려고 했다. 많이 만나면 도윤의 동심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다.하윤은 어디를 가던 도우미가 자기를 보는 것이 싫어, 그냥 아파트에 살았다. 이곳에는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가 있었고 그중에 모래로 촉감놀이 하는 곳이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하윤은 그곳에 도윤을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날씨가 좋아 하윤은 도윤의 손을 잡고 그를 집 밖으로 데리고 갔다.모래가 있는 곳으로 가자, 도윤은 모래를 뿌리며 재밌다고 웃어대는 친구들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하윤은 도윤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신나게 말했다.“도윤아, 친구들 얼마나 재밌게 놀아, 우리도 얼른 들어가서 놀자.”도윤은 눈썹이 붙을 정도로 찌푸렸지만, 하윤이 기대에 찬 모습에 하윤과 함께 놀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도윤은 하윤이 시키는 대로 신발을 벗고 양말을 신은 채로 하윤과 함께 모래에 들어갔다.도윤의 눈썹과 눈은 하윤을 닮았고 나머지는 도준과 똑같았다. 너무 잘생겨서 순식간에 다른 애들의 주의를 끌었다.한 아이가 도윤에게 말했다.“우리 같이 모래 파서 궁전 만들자!”그 아이가 손을 잡으려고 하자 도윤이 한 걸음 물러났다.“미안, 난 엄마랑 놀아야 해서.”하윤은 도윤이 자기랑 놀고 싶어 하는 줄 알고 마음속으로
하윤이 해성시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소혜에게서 전화가 왔다. 소혜는 딸 민효연이 첫돌 생일을 쇠는 김에 미뤘던 결혼식도 같이 한다고 했다.지훈이 산을 구매해서 이제 산속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했다.하윤이 깜짝 놀랐다.“결혼식 한다고?”“네!”소혜는 간식을 먹으며 말했다.하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혜를 불렀다.“소혜야.”소혜가 목을 쭉 뻗었다.“네?”지훈이 욕실에서 몸을 내밀자, 빛나는 눈은 여우처럼 사람을 홀렸고 머리가 젖어 더욱 섹시해 보였다.지훈의 보조개는 아주 귀여웠다.“수건 가져다줘.”지훈의 섹시한 모습에 소혜가 다급히 말했다.“언니, 오빠한테 언제 시간 되는지 물어봐 줄래요? 그럼, 이렇게 정하고 저는 남자 만지러, 아, 아니, 수건 가져다주러 갈게요!”‘헤헿.’통화를 마친 하윤이 소혜가 보낸 웨딩사진을 보고 마음이 조금 찡했다.소혜를 보고 그런 것이 아니라 지훈을 보고 그런 느낌이 들었다.저녁 식사를 할 때, 하윤이 이 일을 도준에게 말했다.“지훈이 소혜랑 결혼식 올린대요. 다음 달에 한다는데, 당신이 언제 경성에 있는지 물어보라고 하던데.”도준이 하윤을 바라봤다.“그건 당신한테 달린 거 아닌가? 당신이 자꾸 밖으로 돌아다니니까 내가 힘을 좀 써서 당신을 잡아와야지.”“말하는 것 좀 봐요. 제가 무슨 나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말하네요? 다 연습하러 가는 거지.”하윤은 젓가락을 입에 물고 일부러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소혜랑 지훈이 결혼식 한대요.”도준은 물을 마시고 콧소리가 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도준이 눈치채지 못하자, 하윤은 더 선명하게 눈치를 줬다.“아니, 쟤네는 아이가 태어난 뒤에 미뤘던 결혼식 올리는 거네요?”도준이 웃으며 말했다.“아니면? 아기를 배속에 다시 밀어 넣고 결혼식 할 수는 없잖아?”하윤은 화가 나 그릇에 담겼던 완자에 구멍을 뚫었다.“맞아요! 맞는 말이죠!”도준이 눈치가 없자, 하윤은 밥을 다 먹고 나서도 도준과 한마디도 하지 않고 텔레비전을 봤다.
경성에서 하윤이 자기 전에 핸드폰을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침대에서 급히 일어나 욕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여보!”“도준 씨!”“도준 씨!!”욕실의 안개가 도준의 넓은 어깨에 흩어졌고 도준은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가슴팍이 보였고 물기를 채 닦지 않아 가슴팍과 근육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렸다.도준은 하윤의 다급한 부름에 어디 부딪힌 줄 알고 급히 나왔는데, 나와보니 하윤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고 있었다.도준은 들고 있던 수건으로 하윤의 엉덩이를 때렸다.“왜 그래? 무슨 귀신이라도 봤어?”하윤은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도준의 어깨에 놓고 핸드폰을 도준에게 들이밀었다.“빨리 봐봐요! 빨리!”하윤이 너무 날뛰어 핸드폰을 너무 가까이 대는 바람에 도준은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도준은 하윤의 손목을 뒤로 잡아당겼지만 하윤이 손을 흔드는 바람에 인내심이 없어 하윤의 허리를 안고 침대에 눕혔다. 혹시라도 너무 흥분해서 침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보기 귀찮으니까 얘기해 줘.”“고은지가 결혼한대요! 누구랑 하는지 맞혀 봐요!”도준이 물어보기도 전에 하윤은 참지 못하고 얘기했다.“곽준호! 곽도원의 아들 말이에요! 세상에, 아무런 연관이 없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결혼하게 된 거죠?”도준은 침대에 기대며 말했다.“아무 연관이 없진 않지. 전에 곽도원이 고은지를 새 아내로 맞이한다고 술자리를 열었었어.”“네?”하윤이 깜짝 놀랐다.‘그럼, 고은지가 곽준호 새엄마? 세상에! 나보다 더 용감하네?’하윤은 참지 못하고 도준을 밀었다.“얼른 얘기해 봐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도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팔을 하윤의 다리에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하윤은 도준의 팔을 치워버렸다.“쳇, 당신도 몰라요?”하윤의 귀여운 모습에 도준이 하윤의 볼을 꼬집으며 그녀를 돌렸다.“그렇게 알고 싶으면 결혼식에 가면 되겠네.”하윤은 볼이 꼬집혀서 말을 똑바
준호는 가볍게 물었지만, 눈빛에는 긴장함이 깃들어 있었다.준호는 은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 그녀의 마음도 자신처럼 뜨거운지 보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은지가 왜 준호를 찾지 않고 준호가 왔을 때 그에게 기회를 주는지 알지 못했다.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수도 없이 많아진다. 은지를 볼 수 없을 때는 볼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또 만나니까 가지 말라고 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지 말라고 잡으면 은지 마음속에 준호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준호의 마음은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흩어져 버렸다.준호의 손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고 자신의 기분을 은지가 느끼게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난 너 속이기 싫어, 난 너 없어도 잘 살아.”준호의 손에 힘이 빠졌고 빛나던 눈도 빛을 잃었다.준호가 기분이 처져 손을 떼려고 하는데, 은지의 차가운 손이 준호의 손등을 감쌌다.“근데 네가 있으면 난 더 기분이 좋아서 매일 행복하게 살 거 같아.”실망했던 준호는 조금 희망을 얻고 말했다.“왜 말을 그렇게 늦게 해! 날 그렇게 힘들게 할 거야?”은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아마도?”준호는 은지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고, 이렇게 정말 기뻐서 나오는 웃음은 더 본 적이 없었다.준호는 성큼성큼 은지에게 다가가 입맞춤했다.“고은지, 너 이번에 또 가면 너 절대 안 놔줄 거야!”“응.”비음이 섞인 은지의 목소리에 준호의 몸은 순식간에 타올랐고 준호는 은지를 품에 안았다.“더 이상 나 화나게 하면 안 된다?”“될수록 그렇게 해볼게.”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네 성격에는 문제가 없어?”“너!”준호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계속 품에 안고 싶었던 은지를 안고 있어 화를 낼 수 없었다.“성격 안 좋은 거 나도 알아, 차근차근 알려주면 나 다 고칠 수 있어.”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말은 잘 듣네.’“다 고쳐도 나 좋아해야 된다? 안 그러면 너 안 놔줄 거야!”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될
아까는 은지에게 핍박을 당해 자기도 모르게 질문이 나왔다.두 사람은 마주 보며 차에 앉아 있었고 은지가 준호를 지그시 바라보자, 준호는 그 물음을 다시 물어볼 수 없었다.그러나 준호가 물어보지 않았는데, 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한 적 있어.”아까까지 겨울의 추위에 덜덜 떨던 준호가 은지의 대답에 봄으로 끌려온 것 같았다.준호는 자기가 잘못 들은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기분이 좋아 다시 물었다.“뭐라고?”은지는 담담하게 바로 대답했다.“이 6개월 동안 너 생각한 적 있다고.”이 6개월 동안 은지는 준호처럼 어린 사람, 준호처럼 무모한 사람, 은지를 마음에 들어한 사람,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 중에 준호처럼 진심으로, 물을 끼얹어도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은지는 30여 년간 계속 연기를 했었다. 이성희한테서 귀염을 받으려고, 고씨 집안의 사랑을 받으려고, 곽도원의 귀염을 받으려고 말이다.은지가 수많은 자태를 뽐냈지만, 준호는 은지가 가장 악독하고 차가운 모습을 보고도 좋아한 사람이다. 그래서 준호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생각났다.“그럼, 앞으로 생각 안 할 거야.”“너!”준호가 다급히 말했다.“왜? 아까는 내 생각 했다며?”은지는 대답하지 않고 준호를 바라보았다. 은지는 준호의 화가 차츰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준호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나, 나도 네 생각 했어.”이때 차의 라디오에서 로맨틱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준호는 평소에 이런 노래를 듣기 싫어했는데, 지금 들으니 아주 로맨틱했다.준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은지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가게는 저기 있어.”은지가 물어보지 않자, 준호도 은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나랑 가는 거야, 마는 거야?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볼 용기가 안 나!’마을이 너무 작아 노래 한 곡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목적지에 도착했다.은지가 차에서 내리자, 준호도 따라서 내렸고 은지가 계단으로 올라가자, 준호도 따라
호텔 내부의 뜨거운 공기에 준호는 재채기를 했고 곧이어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은지를 발견했다.반년이 지나 은지의 머리는 좀 길었지만 조금 헝클어진 상태로 풀어 놓았다. 회색 니트를 입고 있었고 전에 비해 가벼운 느낌이었다. 준호는 뜨거운 공기 때문에 목이 말랐다. 열정 넘치는 아저씨가 준호 보고 얼른 와서 앉으라고 하면서 술을 부어주었다.“은지 남자 친구죠?”준호는 은지가 또 전처럼 새엄마라고 할까 봐 경계했다.그러나 은지는 그저 간결하게 대답했다.“아니요.”준호는 한숨 돌렸다. 그러나 곧이어 준호는 또 짜증이 났다.이제 은지가 준호의 새엄마도 아니니 정말 아무런 사이가 아니다.희현은 은지에게 귓속말했다.“저 사람은 왜 또 언니 잡으러 온 거예요? 제가 문 지킬 테니까 도망갈래요?”말을 채 하지 못했는데, 은지가 희현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었다.“왜요? 이 계획 별로예요?”“아니, 너 목소리 너무 커서 저 사람이 너 보고 있어.”과연 고개를 돌리자, 준호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희현을 바라보고 있었다.희현은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이제 막 유명해지려고 하는데, 죽으면 안 되지.’희현이 한 말 때문인지, 은지가 준호를 불러 놓고 준호랑 말을 안 해서인지, 밥을 채 먹지 못했는데, 그는 은지가 화장실을 갔을 때 막아섰다.은지가 손을 씻고 돌아섰는데, 준호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은지는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준호가 지금까지 버틴 것이 기적 같았다.“손 씻으려고?”준호는 잘 얘기해 보려고 했는데, 은지의 말에 또 화가 났다.“손 씻는다고? 내가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왔는데, 손 씻으러 왔겠어?”은지는 준호의 손에 묻은 양념을 가리키며 말했다.“그건 아니겠지만, 손은 씻어야 할 거 같아.”준호는 은지가 한 말에 반박할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씻었다.손을 다 씻은 준호는 은지가 자리에 돌아갔을 줄 알았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은지가 옆에 서 있었다. 거울 속의 두 사람은 연인처럼 붙어 있었다.은지가 준호를 보자,
‘설마 고은지?’곧이어 여자가 목도리를 벗자, 얼굴이 보였다.은지가 아니라, 전에 은지와 함께 준호를 속였던 배우 희현이었다.연말이 되자, 밖에서 일하던 자녀들이 다 무진으로 돌아왔기에 마을에 못 보던 차가 많이 세워져 있어 희현은 준호의 차를 의심하지 않고 차 주변을 돌며 통화를 했다.“여보세요? 언니, 저 도착했는데, 어디 계세요?”“호텔 쪽에 있어요? 아, 그럴 줄 알았으면 택시 타고 호텔로 갔죠.”준호는 희현의 통화를 듣고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다.‘언니? 고은지인가? 고은지도 여기 있나?’...무진에 호텔이 하나밖에 없었지만, 항상 손님이 별로 없었다. 연말이라 손님이 더 없어서 주인장은 일 층에 탁자를 다 붙여서 음식을 해놓았다. 아이들이 모여 있어 희현이 왔을 때 아이들이 희현에게 달려왔다.“희현 언니!”희현은 통쾌하게 용돈을 나눠줬다.“이리와, 언니 돈 많이 벌어서 너희 용돈 줄게!”아이들을 보내고 희현은 창 옆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언니, 저 왔어요!”은지가 처음에 무진에 왔을 때는 준호를 피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피할 필요가 없어져 사탕 가게를 책방으로 바꾸고 알바생을 찾았다. 이 책방에서 책을 보면 사탕을 먹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했다.이 반년 동안 은지는 여행을 다니면서 지냈다.며칠 전, 호텔 주인이 은지보고 무진에 와서 연말을 보내라고 했고 아이들이 은지를 보고 싶다고 해서 오기로 했다.희현은 옆 마을에서 드라마를 찍다가 같이 식사하러 왔다.식탁에는 맛있는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었고 사람들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둘러앉았다.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준호만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차가워진 도시락을 들고 화를 냈다.준호는 은지가 외롭게 연말을 보낼 줄 알고 도시락까지 싸서 왔는데, 이렇게 화목하게 모여서 보낼 줄 몰랐다.준호는 몇 시간을 운전해서 여기까지 온 자신이 참 바보 같았다.이렇게 도시락을 건네주기는 좀 그렇고, 아무 말도 안 건네고 가자니 아쉬
준호도 그동안 못 완성했던 임무를 마저 수행해야 했다.전에는 은지를 찾는 데만 집중해서 임무는 뒷전이었다. 이번에는 각 지역을 하나씩 제대로 돌아봐야 했다.돌아본 곳이 많아질수록 준호의 마음도 점차 평온해졌다.마을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자연과 마주하니 준호의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다.3개월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준호는 남한성에 돌아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냈다.팀장은 준호가 전과 달라진 모습에 칭찬했다.“이런 일 많이 하니까 좋은 점이 있네.”...그 후로 준호는 예전처럼 훈련하고 임무를 수행했다.이곳에 있으면 외계의 간섭을 덜 받기에 사람들이 준호의 집안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개의치 않았다.그저 매일 밤 침대에 누우면 준호는 신옥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은지 씨가 정말 차가운 사람이라면 날 위해 비밀을 지켜주지 않았을 거야.’신옥영도 이 비밀을 준호가 알게 되면 많은 것을 바꾸게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은지처럼 작은 일도 따지는 사람은 무조건 알았을 것이다.준호는 전에 은지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냉혈 동물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잘 알 수 없었다.‘고은지 나한테 정은 있었나?’준호는 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뜨겁기도 했다.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에 쉽게 들 수 없었다.‘만약 고은지가 나한테 마음이 없다면 이미 놔줬으니까 다시 가서 방해하면 안 돼. 근데 혹시 나한테 마음이 있었다면?’...눈 깜짝할 사이에 연말이 되어 길거리는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준호는 신옥영이 머무는 저택으로 갔는데, 집안이 시끄러웠다.하나가 장원수를 지휘하며 집을 꾸몄고 하나는 신옥영과 함께 음식을 만들며 신옥영에게 애교를 부렸다.올해에 준호는 신옥영의 저택에서 이 부녀를 자주 봤는데, 처음에 그들을 만났을 때, 살기 가득한 눈으로 장원수를 쏘아보며 일자리며 가족 관계까지 다 물어봤었다. 나쁘지 않았다.그러나 신옥영은 재혼할 마음이 없어 보였고 준호는 신옥영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자기는 신옥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