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연은 회색 패딩에 하얀색 긴 부츠를 신은 채 마스크를 끼고 예쁜 눈망울만 드러내 놓고 있었다. 그 신비로움이 그녀를 더 알아보고 싶게 만들었다.변석환은 마음이 아파서 말했다.“속눈썹에 서리 꼈어요. 다음부터는 많이 입어요. 따뜻하게.”“싫어요. 쭉 차 안에만 있고, 게다가 패딩 입어서 그렇게 춥지도 않아요.”“그래요. 그럼 다음부터는 안까지 운전해서 들어갈게요. 적게 걷게.”임시연은 눈이 붉어져서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그를 보았다.변석환은 당황해서 급하게 티슈를 찾았다.“무슨 일이에요. 내가 뭐 잘 못 말했어요?”그녀는 목이 멨다.“나한테 이렇게 잘해준 게 석환 씨가 처음이라...”변석환은 잠깐 당황했지만 이윽고 임시연에 대한 사랑을 더욱 깊이 느끼며 얘기했다.“시연 씨. 난 시연 씨한테 쭉 잘할 거예요.”“진짜요?”“그럼요. 난 내가 한 말은 지켜요.”임시연은 수줍게 웃고는 가볍게 그에게 팔짱을 꼈다.“먼저 밥부터 먹어요.”“그래요.”변석환이 웃으면서 대답했고 종업원이 그들을 심지안 옆 테이블로 안내했다.임시연은 처음에는 심지안을 못 보고 가방을 내려놓는 순간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심지안은 눈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안녕~”임시연은 눈이 동그랗게 커져서 부드럽던 목소리가 갑자기 커졌다.“당신이 왜 여기 있어요? 나 미행한 거예요?”“그럴 리가요. 누구처럼 한가한 게 아니라서.”“거짓말! 분명히 일부러 한 거죠!”“마음대로 생각해요. 모든 사람이 다 당신처럼 생각하는 건 아니에요.”임시연은 얼굴이 구겨지고 손에서 식은땀이나 마음 한구석이 찔리고 무서웠다.김슬비가 어제 그녀에게 전화 쳐 밑도 끝도 없이 한참을 욕했었다.임시연은 한참 뒤에야 심지안이 한 짓이라는 걸 알았다.“시연 씨. 이분은?”변석환은 사실 인터넷에서 임시연에 관한 찌라시를 본 적이 있었다. 그는 정색하고 화도 내지 않으면서 대인배 같은 면모를 보였다.기회를 찾아서 대화에 끼어든 건 단순히 임시연을 보호하고 싶어서였다.심지안은 더 밝게
성연신은 태연자약하게 말했다.“들어와요. 제가 뭐 잡아먹기라도 해요?”심지안은 경계를 풀지 않고 문에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밥해달라면서요. 여기서 뭘 할 수 있는데요?”“왜 안 돼요?”그녀는 귀찮았다.“여기 카페예요.”성연신이 뒤쪽에 있는 커튼을 거두자, 복고풍의 조리대가 눈에 안겨 왔다. 야채나 고기, 있을 건 다 있었다.“...이런거 쓸 줄은 몰라요.”“안의 구조는 다 현대식이야.”변요석은 해명을 하다가 적절하지 않은 것 같아서 멈칫했다.“오늘 너를 부른 건 밥해달라고 부른 게 아니야. 그건 성연신 씨의 농담이야.”심지안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밥 안 해도 되는 거면 갈게요. 다음번에는 용건이 있으면 똑바로 말해요. 두 분이랑 차 마시면서 풍경이나 구경할 시간도, 의무도 없으니까.”하룻저녁에 두 탕이나 뛰는 건 힘든 일이었다. 편하게 동료들이랑 회식이나 하는 게 더 재밌지 않겠는가?“용건이 있어요.”성연신은 따뜻한 차를 한 잔 따라서 빈 자리에 놨다. 골격이 분명한 손가락을 뻗은 성연신은 마치 조각품처럼 눈앞의 의자를 가리켰다.“앉아요. 관심 가는 일일 테니까.”다른 사람에게는 호기심이라도 불러일으킬 수 있겠지만 심지안 눈에는 그냥 쇼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눈을 깜빡이고 말했다.“그런 전 이만.”말을 마친 심지안은 태연하게 떠나면서 룸에 문도 닫아줬다.성연신은 얼굴을 찌푸리고 그녀를 따라나섰다.“저랑 돌아가요.”“싫어요. 관심 없다고 말했을 텐데요. 귀먹었어요?”“친아빠가 누군지 알고 싶지 않아요?”심지안은 얼굴을 찡그렸다.“이미 알고 있으니까 말할 필요 없어요.”성연신은 도도하게 그녀를 바라봤다.“박만호가 아니에요.”“그럼, 누군데요.”“아까 카페에서 본 그 남자요.”...변요석은 태어날 때부터 귀한 사람이었고 일찍이 많은 일을 겪어 웬만한 일에는 동요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심지안과 마주 앉자, 어딘가 어색했다.“그러니까... 몇 년 전에 발생한 사고였어. 내가 다른 사람의 함정에
“아니, 절대로 널 돈으로 사겠다는 뜻은 아니야.”심지안은 그저 웃기만 할 뿐, 믿지 않았다.변요석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시선을 성연신에게로 돌렸다.심지안의 경계심은 너무 강했다. 그녀의 어머니와 완전히 달랐다.변요석은 어떻게 해야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성연신은 상관하고 싶지 않았다. 원래 심지안과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변요석 덕분에 원망만 더 샀다.하지만 변요석의 시선 아래, 성연신은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혈연관계로 따지면 지안 씨는 변요석 씨의 딸이에요. 하지만 직접 키운 적은 없으니 아버지로서의 책임을 하지 않을 거죠. 미래도 생각해 봐요.”심지안은 성연신의 의미심장한 시선을 보면서 담담하게 얘기했다.“그러니까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이익을 챙기라는 거예요?”성연신은 대답하지 않고 반박하지도 않은 채 담배만 피우면서 그저 심지안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길게 숨을 들이쉰 심지안은 이런 일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바로 얘기했다.“실망할 수도 있지만 저는 돈이나 권력에 관심이 없어서요. 있다고 해도 다 알아서 쟁취할 거예요. 이익을 가지려고 어머니의 명예에 먹칠하는 일은 못 하겠네요. 어머니의 과거를 발판 삼아 높은 곳으로 오르려는 건, 제정신인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거든요. 정말 묻고 싶네요. 당신들은 제정신이 있는 거예요?”그 말을 들은 변요석은 표정이 굳어버렸다. 모든 희망을 성연신에게 걸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누가 보면 변요석이 가만히 앉아있는 것으로 보이겠지만 사실은 진중하게 고민하고 있는 것이었다.변요석은 급하게 반박하지 않고 평정심으로 대책을 세웠다.너무 단순하게 생각하고 온 것 같았다. 심지안은 그의 자식들과 달랐다. 어릴 때부터 사랑을 받고 세상의 험악함을 모르는 아이들과는 달랐다.변요석의 아이들은 다른 사람이 잘 대해주면 그대로 갚으려고 했다.하지만 심지안은 경계심 많은 고양이처럼 발톱을 드러내 상대를 쫓아내려고 한다.성연신은 깊은 검은 눈동자로 그들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설득력 있게 얘
고용인은 원인은 몰랐다. 하지만 변요석이 조금 화난 것같아서 머뭇거리지 않고 바로 몸을 일으켜 물러났다.저녁 열 시 반. 변석환은 운전해서 돌아왔다.고용인이 그에게 귀띔해 주었다.“공작님의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니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변석환은 멈춰서서 얘기했다.“여동생이 무슨 사고를 친 게 아니야?”변석환의 여동생은 어릴 때부터 오냐오냐 자라서 성격이 불같았다. 별것 아녀도 쉽게 화를 내는 성격이었다.“아무 말도 하지 않으셔서 모르겠습니다. 일단 들어가 보세요.”“그래.”거실에 앉아있던 변요석은 변석환을 보고 불쾌한 표정으로 물었다.“여자 친구가 생겼다며?”“네. 다음 주에 부모님께 얘기하려고 했습니다.”“임시연이라고 했지?”“네. 시연 씨는 부드러운 사람이에요. 알고 지낸 지 한달 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리고 애가 있다는 것도 알지만 사람은 누구나 실수하는 법이잖아요. 저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아요.”변요석은 말문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화를 참지 못한 그는 바로 변석환의 뺨을 때렸다.“그런 문란한 여자를 애인으로 둬?! 네가 정말 눈이 멀었구나!”“아버지, 시연 씨는 문란한 여자가 아닙니다. 사건을 제대로 몰라서 그럴 수도 있어요. 시연 씨는 피해자라고요!”변석환이 애써 변명했다. 항상 부드럽기만 하던 아버지가 오늘따라 이렇게 화를 내는 이유를 몰랐다.“너 이 자식. 당장 헤어져! 두 번 얘기하게 하지 마.”“왜요? 계속 결혼하라고 재촉하셨으면서, 지금은 왜 막으시는 거예요!”“임시연은 왕실에 들어올 수 없어. 신분도 깨끗하지 못하고 관계도 복잡해. 네가 보는 것과 완전히 다른 사람이야. 왕실에서 일어나는 일만으로도 충분하다. 더는 더러운 꼴을 보고 싶지 않구나.”“아버지, 시연 씨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니까요. 제가 증명할 수 있어요. 시연 씨는 겉과 속이 같은 사람이에요.”변요석은 자기 아들을 보면서 생각이 복잡했다.“이만 나가봐.”변석환은 미간을 찌푸렸다. 무언가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
심지안은 눈을 깜빡였다. “내연남? 내가 생각하는 그런 거예요?”“네, 남자랑요.”고청민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녀는 흠칫 당황했다. “말도 안 돼요. 이성애자 같았는데, 어떻게...”장현진 집이 부유하다는 건 전에 기사를 통해 알고 있었다. 그가 뜨는 과정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그가 자신을 팔면서, 그것도 남자랑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다.심지안의 당혹스러운 얼굴을 보는 고청민의 눈에는 의미심장한 감정이 서려있었다. “그런 말이 있잖아요.. 얌전한 고양이가 먼저 부뚜막에 올라간다고요.”“그렇긴 해요. 임시연도 같은 부류잖아요.”그녀는 장현진한테 큰 미련은 없었다. 그저 놀랍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재밌는 가십거리니까.계약 관계일 뿐이다. 맘에 안 들면 바꾸면 된다.고청민은 심지안을 눈으로 배웅해주고, 씻으러 화장실로 갔다. 그는 커다란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속의 고청민은 수려하고 점잖아 보였다. 웃는 눈에는 따뜻함이 서려 있어 친절한 사람 같아 보였다.하지만 자세히 보면 그의 미소는 껍데기뿐이었다. 깊이 감춰진 서늘한 시선을 가려주는, 껍데기 말이다. ...다음 날 아침, 심지안은 평소처럼 출근했다.아침 회의가 끝나고 장현진이 찾아왔다.심지안은 의아해하면서 비서더러 커피 두 잔을 타오라고 시켰다."어제 지안씨 부서에서 한 라이브를 봤어요. 왜 제가 못 나오게 하신 거죠? 제가 뭘 잘못했나요?" 장현진은 겸허한 태도로 질문했다.심지안은 어제 고청민이 한 말을 떠올리고는 어색해져서 장현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라이브는 전문가한테 맡기는 거로 결론을 냈어요. 갑자기 사람을 바꾸면 시청자들이 받아들이기도 힘들 거로 생각해서 우리 회사의 쇼호스트가 하기로 했습니다.”“그렇군요... 어쩔 수 없죠. 저도 전에 쇼호스트를 해본 경험이 있어요. 기회가 된다면 저도 라이브를 하고 싶네요. 페이는 받지 않을게요.” 장현진은 오랜만에 좋아하게 된 여자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일 얘기로 천천히 친해질 수밖
기사가 터졌을 때 장현진은 녹화 중이었다. 매니저는 급하게 녹화를 중지해달라고 요청하고는 그를 뒤로 끌어갔다.“요새 누구한테 밉보인 적 있어?”“아니. 나 평판 괜찮은 거 알잖아. 누가 날 건드린다고 그래. 혹시 뭐 잘못 본 거 아니야?”“뭐라는 거야. 지금 인터넷에서 난리 났어.”장현진은 흠칫 놀랐다.“뭔데.”매니저는 흐릿한 사진 몇장을 찾아 확대했다. 장현진은 휴대폰을 건네받고 찬찬히 보고는 욕을 퍼부었다.“시X, 이거 나 아니잖아!”“난 당연히 알지, 너 아닌 거. 근데 너랑 체형이나 특징이 너랑 너무 닮았어. 그러니까 누가 일부러 널 해코지하는 거라고 확신하는 거야. 너 도대체 누구한테 미움을 산 거야? 얼른 가서 사과하고 빨리 이 일을 처리해야 해.”장현진은 머리가 복잡했다.“나 진짜 누구 안 건드렸어. 누구한테 사과하라는 거야?”"잘 생각해봐. 난 먼저 누가 한 일인지 조사하러 갈게. 여러 언론사에서 동시에 터뜨린 걸 보면 만만치 않은 상대일 거야. 그러니까 맞서서는 안 되고 조용히 해결해야 해."장현진은 짜증이 났다. 그는 인터넷의 여론이 심지안의 회사에 부담이 될까 봐 걱정되었다. 한참 고민한 그는 결국 심지안한테 사과 메시지를 보냈다....심지안은 너무 바빴다. 종일 휴대폰을 볼 시간도 없었다.저녁에는 모든 부서가 야근했다. 고청민도 외근 중이었다. 심지안은 저녁 먹을 겨를도 없었다. 배에서는 여러 번 꼬르륵 소리가 났다.직원들은 배달을 시키느라고 웅성거렸다. 방매향은 아무 말 없이 일을 그만 놓고 밖으로 나갔다.십 분도 지나지 않아 방매향은 따뜻한 도시락을 들고 돌아왔다. 그리고 그 도시락을 심지안의 책상에 올려놓더니 얘기했다.“이거 먹어요, 편의점에 이것 밖에 안 남았더라고요.”심지안은 바보가 아니었다. 그녀는 방매향의 태도가 조금 바뀐 것을 눈치챘다. 저번 레스토랑에서 그녀를 감싸는 말을 했던 건 우연이라고 해도, 이번은 절대 우연이 아닐 것이다.하지만 그녀는 금방 일을 받았고 처리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심지안은 머쓱해 하는 정욱을 흘깃 보고 시간을 확인했다.“너무 늦었어요. 안 갈래요.”변요석이 또 거기서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다. 그녀는 그가 반성하는 연기를 봐줄 시간이 없다.“다른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어르신과 도련님뿐이세요.”정욱은 차분한 태도로 말했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는 것처럼 말이다. 그는 장담했다.“성 대표님께서 저번과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하셨어요.” 심지안은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거절할게요. 다음부터 미리 말씀해주세요. 저도 바빠요. 전 성씨 가문에서 고용한 요리사가 아니라고요.”정욱은 머뭇거렸다. 이렇게 포기하면 성연신이 그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심지안은 그와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그녀는 하품하고는 그를 지나쳐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다.“지안 아가씨 잠시만요.”“제가 말했잖아요. 안 간다고.”“그것 때문이 아니라, 제가 여쭤볼 게 있어서요. 유진 씨와 계속 연락하시나요? 혹시 연락처 좀 주실 수 있나요?”심지안은 그대로 멈췄다. 그녀는 신대륙을 발견한 듯 정욱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유진이 좋아하세요?”정욱은 깜짝 놀라 한참 동안 반응하지 못했다. 그녀가 이렇게 직설적으로 질문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그의 구릿빛 얼굴이 삽시간에 새빨개졌다.“모르겠어요. 그냥 유진 씨랑 연락하고 싶어요.”“그래요. 연락처 드릴게요.”심지안은 재빠르게 진유진의 번호를 정욱에게 알려줬다.얘가 몇 년째 솔로로 지내고 있는데, 연애할 때도 되지 않았나.정욱은 그 개 같은 성연신의 비서지만 인품이 발랐다. 유진이가 원한다면 그녀는 축하해 줄 것이다.“고마워요, 지안 아가씨.”정욱은 전화번호를 저장하는 한편, 어떻게 하면 심지안을 데려갈 수 있을지 고민했다. 심지안의 입에서 마지막 숫자가 나오기 직전, 그는 이를 꽉 깨물고 말했다.“지안 아가씨, 저랑 저택으로 갑시다. 성 대표님께서 이번 한 번만 오시면 식사를 두 번 차린 것으로 퉁쳐주겠다고 하셨어요.”심지안은 멈칫했다.“잠시만요, 녹음
유재한은 급하게 고개를 저었다.“안돼. 엄마 허락 없이는 안방 맘대로 못 들어간단 말이야.”성우주는 팔짱을 꼈다.“그럼 기말고사 때 시험지 안 보여 준다?”“그래도 안돼... 우리 엄마 엄청 무섭다고.”“알았어.”성우주는 눈썹을 치켜뜨고 차갑게 말했다.“내일 학교에서 정연이한테 네가 걔 좋아한다고 말할 거야. 네가 정연이 머리끈도 숨긴 것도 말할 거야.”이건 효과가 있었다. 유재한의 포동포동한 얼굴은 순식간에 빨갛게 변했다. 유재한은 잘 익은 사과 같은 얼굴로 더듬더듬 빌었다.“그러지 마... 음료 가져올게, 응?”목적을 달성하자 성우주의 차가운 눈빛이 누그러들었다. 그는 유재한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난 그냥 무슨 음료인지 궁금해서 그러는 거야. 맘대로 가져가지 않을게. 우린 계속 친구야. 내 숙제도 너한테 계속 보여주고 정연이 꼬시는 것도 내가 도와줄게.”유재한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가슴을 두드렸다.“그럼 됐어. 우리 엄마가 집에 있는 물건이 줄어든 걸 아시면 날 가만두지 않을 거야. 근데 우리 지금 어떻게 가?”성우주는 주위를 살피며 그를 끌고 고용인들의 시선을 피했다.“쉿, 조용히 해. 좀 이따 택시 잡자.”...유재한의 집은 3킬로 정도 거리로 멀지 않아 십 분이면 도착할 수 있었다.유재한은 조심스럽게 안방의 비밀번호를 입력하고는 도둑질을 하는 것처럼 까치발을 들고 살금살금 걸어가 ‘음료’ 한 병을 성우주한테 건넸다. 성우주는 그 음료를 자세히 보았다. 확실히 슈퍼에서 이 브랜드의 음료를 본 적이 없었다.그는 영어를 잘했지만, 음료에 적힌 그 글자들을 알아보기 힘들었다. 그저 몇 개 단어만으로 뜻을 유추할 뿐이었다.“남녀 간의 감정을 싹트게 하는...”성우주는 단어들을 입에서 작게 굴려보았다. 그는 이게 무엇인지 알 것 같아 조금은 고민되었다. 하지만 아빠가 노총각인 것을 생각하자 또 도울 수밖에 없었다.심지어 유재한 부모님의 성공사례까지 들었으니 한번 시도해 보고 싶었다.합법적으로 파는 물건인데, 무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