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가 터졌을 때 장현진은 녹화 중이었다. 매니저는 급하게 녹화를 중지해달라고 요청하고는 그를 뒤로 끌어갔다.“요새 누구한테 밉보인 적 있어?”“아니. 나 평판 괜찮은 거 알잖아. 누가 날 건드린다고 그래. 혹시 뭐 잘못 본 거 아니야?”“뭐라는 거야. 지금 인터넷에서 난리 났어.”장현진은 흠칫 놀랐다.“뭔데.”매니저는 흐릿한 사진 몇장을 찾아 확대했다. 장현진은 휴대폰을 건네받고 찬찬히 보고는 욕을 퍼부었다.“시X, 이거 나 아니잖아!”“난 당연히 알지, 너 아닌 거. 근데 너랑 체형이나 특징이 너랑 너무 닮았어. 그러니까 누가 일부러 널 해코지하는 거라고 확신하는 거야. 너 도대체 누구한테 미움을 산 거야? 얼른 가서 사과하고 빨리 이 일을 처리해야 해.”장현진은 머리가 복잡했다.“나 진짜 누구 안 건드렸어. 누구한테 사과하라는 거야?”"잘 생각해봐. 난 먼저 누가 한 일인지 조사하러 갈게. 여러 언론사에서 동시에 터뜨린 걸 보면 만만치 않은 상대일 거야. 그러니까 맞서서는 안 되고 조용히 해결해야 해."장현진은 짜증이 났다. 그는 인터넷의 여론이 심지안의 회사에 부담이 될까 봐 걱정되었다. 한참 고민한 그는 결국 심지안한테 사과 메시지를 보냈다....심지안은 너무 바빴다. 종일 휴대폰을 볼 시간도 없었다.저녁에는 모든 부서가 야근했다. 고청민도 외근 중이었다. 심지안은 저녁 먹을 겨를도 없었다. 배에서는 여러 번 꼬르륵 소리가 났다.직원들은 배달을 시키느라고 웅성거렸다. 방매향은 아무 말 없이 일을 그만 놓고 밖으로 나갔다.십 분도 지나지 않아 방매향은 따뜻한 도시락을 들고 돌아왔다. 그리고 그 도시락을 심지안의 책상에 올려놓더니 얘기했다.“이거 먹어요, 편의점에 이것 밖에 안 남았더라고요.”심지안은 바보가 아니었다. 그녀는 방매향의 태도가 조금 바뀐 것을 눈치챘다. 저번 레스토랑에서 그녀를 감싸는 말을 했던 건 우연이라고 해도, 이번은 절대 우연이 아닐 것이다.하지만 그녀는 금방 일을 받았고 처리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심지안은 머쓱해 하는 정욱을 흘깃 보고 시간을 확인했다.“너무 늦었어요. 안 갈래요.”변요석이 또 거기서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다. 그녀는 그가 반성하는 연기를 봐줄 시간이 없다.“다른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어르신과 도련님뿐이세요.”정욱은 차분한 태도로 말했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는 것처럼 말이다. 그는 장담했다.“성 대표님께서 저번과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하셨어요.” 심지안은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거절할게요. 다음부터 미리 말씀해주세요. 저도 바빠요. 전 성씨 가문에서 고용한 요리사가 아니라고요.”정욱은 머뭇거렸다. 이렇게 포기하면 성연신이 그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심지안은 그와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그녀는 하품하고는 그를 지나쳐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다.“지안 아가씨 잠시만요.”“제가 말했잖아요. 안 간다고.”“그것 때문이 아니라, 제가 여쭤볼 게 있어서요. 유진 씨와 계속 연락하시나요? 혹시 연락처 좀 주실 수 있나요?”심지안은 그대로 멈췄다. 그녀는 신대륙을 발견한 듯 정욱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유진이 좋아하세요?”정욱은 깜짝 놀라 한참 동안 반응하지 못했다. 그녀가 이렇게 직설적으로 질문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그의 구릿빛 얼굴이 삽시간에 새빨개졌다.“모르겠어요. 그냥 유진 씨랑 연락하고 싶어요.”“그래요. 연락처 드릴게요.”심지안은 재빠르게 진유진의 번호를 정욱에게 알려줬다.얘가 몇 년째 솔로로 지내고 있는데, 연애할 때도 되지 않았나.정욱은 그 개 같은 성연신의 비서지만 인품이 발랐다. 유진이가 원한다면 그녀는 축하해 줄 것이다.“고마워요, 지안 아가씨.”정욱은 전화번호를 저장하는 한편, 어떻게 하면 심지안을 데려갈 수 있을지 고민했다. 심지안의 입에서 마지막 숫자가 나오기 직전, 그는 이를 꽉 깨물고 말했다.“지안 아가씨, 저랑 저택으로 갑시다. 성 대표님께서 이번 한 번만 오시면 식사를 두 번 차린 것으로 퉁쳐주겠다고 하셨어요.”심지안은 멈칫했다.“잠시만요, 녹음
유재한은 급하게 고개를 저었다.“안돼. 엄마 허락 없이는 안방 맘대로 못 들어간단 말이야.”성우주는 팔짱을 꼈다.“그럼 기말고사 때 시험지 안 보여 준다?”“그래도 안돼... 우리 엄마 엄청 무섭다고.”“알았어.”성우주는 눈썹을 치켜뜨고 차갑게 말했다.“내일 학교에서 정연이한테 네가 걔 좋아한다고 말할 거야. 네가 정연이 머리끈도 숨긴 것도 말할 거야.”이건 효과가 있었다. 유재한의 포동포동한 얼굴은 순식간에 빨갛게 변했다. 유재한은 잘 익은 사과 같은 얼굴로 더듬더듬 빌었다.“그러지 마... 음료 가져올게, 응?”목적을 달성하자 성우주의 차가운 눈빛이 누그러들었다. 그는 유재한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난 그냥 무슨 음료인지 궁금해서 그러는 거야. 맘대로 가져가지 않을게. 우린 계속 친구야. 내 숙제도 너한테 계속 보여주고 정연이 꼬시는 것도 내가 도와줄게.”유재한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가슴을 두드렸다.“그럼 됐어. 우리 엄마가 집에 있는 물건이 줄어든 걸 아시면 날 가만두지 않을 거야. 근데 우리 지금 어떻게 가?”성우주는 주위를 살피며 그를 끌고 고용인들의 시선을 피했다.“쉿, 조용히 해. 좀 이따 택시 잡자.”...유재한의 집은 3킬로 정도 거리로 멀지 않아 십 분이면 도착할 수 있었다.유재한은 조심스럽게 안방의 비밀번호를 입력하고는 도둑질을 하는 것처럼 까치발을 들고 살금살금 걸어가 ‘음료’ 한 병을 성우주한테 건넸다. 성우주는 그 음료를 자세히 보았다. 확실히 슈퍼에서 이 브랜드의 음료를 본 적이 없었다.그는 영어를 잘했지만, 음료에 적힌 그 글자들을 알아보기 힘들었다. 그저 몇 개 단어만으로 뜻을 유추할 뿐이었다.“남녀 간의 감정을 싹트게 하는...”성우주는 단어들을 입에서 작게 굴려보았다. 그는 이게 무엇인지 알 것 같아 조금은 고민되었다. 하지만 아빠가 노총각인 것을 생각하자 또 도울 수밖에 없었다.심지어 유재한 부모님의 성공사례까지 들었으니 한번 시도해 보고 싶었다.합법적으로 파는 물건인데, 무슨
성연신은 천천히 고개를 돌리고 아들의 기대하는 눈을 보며 차갑게 거절했다.“안 마셔.”성우주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오렌지 주스를 성연신 앞에 가져다 놓았다.“금방 간 거예요. 맛있을 거예요. 비타민 좀 보충하라고 그러는 거예요.”성연신은 습관적으로 소파에 기대앉았다. 길고 가는 손가락으로 깍지를 낀 채 가슴 앞에 아무렇게나 올리고 얘기했다.“갑자기 효도하는 거야?”성우주는 입을 작게 연 채 놀라 얼어붙었다.아빠한테 들켰나?심지안은 이 상황을 보면서 성연신이 아이한테 너무 한다고 생각했다. 아이가 물을 떠다 주는데 이게 무슨 태도란 말인가.“우주야, 속상해하지 마. 이모가 대신 마셔줄게.”그녀는 고개를 젖혀 성우주 손에 든 오렌지 주스를 한입에 꿀꺽 삼켰다. 첫맛은 새콤달콤했지만, 자세히 맛보면 이상한 맛이 섞여 있었다.성우주는 당황했다.“지안이모...”성연신은 재빨리 일어나 제지했다. 그는 절반 남은 오렌지 주스를 낚아채고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을 뱉었다.“이걸 진짜 마셔요?”“제가 왜 못 마셔요? 우주가 저한테도 한 잔 줬잖아요.”심지안은 당당했다. 그녀의 말랑한 얼굴에 불만이 드러났다.아이들에게는 함께하는 시간과 격려도 중요하지만, 부모가 인내심 있게 맞춰주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성연신은 냉혈한이 아니랄까 봐. 자기 아들한테도 다정하지 않았다.성연신은 참지 못하고 그녀의 볼을 꼬집었다. 화가 나기도 하고 웃기기도 했다.“심지안 씨, 당신 진짜 바보구나.”탁.심지안은 그의 손을 쳐내고 동그란 눈을 크게 떴다.“그래요. 당신은 참 똑똑하네요. 게다가 정말 악독해요. 우주의 가장 큰 불행은 당신 아들로 태어났다는 거예요.”“우주가 정말 그렇게 한가해 보여요?”“???”“네 입으로 말해.”성연신은 성우주한테 말했다.성우주는 고개를 숙인 채 옷깃을 구겼다. 성우주는 매우 불안해 보였다.“뭘 말하라고요... 아빠.”“위층에 뭐를 숨겼어?”“아무것도 없어요.”“그래?”사태가 이렇게까지 되니 성우주도 말하지
그의 눈에는 잠깐 놀란 기색이 스쳤다. 정말 한순간이었지만 심지안은 그것을 보아냈다.심지안은 숨을 크게 들이쉬고 주먹을 말아쥐었다.“임시연은 비밀 조직 사람인가요?”성수광은 한참 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는 갑자기 피곤해진 말투로 말했다.“지안아, 이런 건 상관하지 마. 비밀 조직의 세력은 복잡해. 너희는 아직 젊어. 임시연은 이젠 연신이한테 집착하지 않잖아. 그냥 신경 쓰지 않으면 돼. 너희들의 앞날은 길어. 이미 끝난 일을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마”젊은 시절 군인이었던 그는 항상 가장 최전선에 용감하게 나섰다. 그는 하늘도 땅도 무서워하지 않았다.후에 집에 큰 변고가 생겨서야 그는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깨달았다.감당할 수 없는 일들은 건드리지 않는 게 좋다. 숙이고 있는 건 담이 작아서가 아니라 잃는 게 두려워서다.“그럼 그들이 우리를 맘대로 괴롭히는 걸 두고 볼 수밖에 없어요?”심지안은 성수광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목소리는 가벼웠지만, 눈시울은 붉어졌다.“그들이 우리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갔으니 갚아 줘야죠.”세상을 알기도 전에 떠난 그녀의 아이는 원래 건강하게 자랄 수 있었을 것이다.성수광이 입을 열었다.“두렵지 않아?”“두려워요, 당연히 두렵죠.”심지안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그녀는 한 글자 한 글자 힘을 주어 말했다.“두려워도 그 진흙탕 속에 살던 시간이 누구 때문인지는 잊지 말아야죠.”만약 진정한 흑막이 비밀 조직이라면, 임시연의 출현은 계획된 것이 틀림없다. 우연으로 보였던 설명할 수 있었다.그녀는 두려워할 수 없었다. 까짓거 목숨으로 목숨을 바꾸는 일이다. 그녀의 아이를 희생양이 되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성수광은 심지안을 오랫동안 바라보다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네 힘은 너무 적어. 달걀로 바위 깨는 격이야. 비밀 조직에는 아무런 영향도 줄 수 없어.”그녀는 미소를 지었다.“그럼 힘 닿는 데까지만 해보죠.”그녀는 모든 음모를 보고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 무엇이라
심지안은 이상한 시선으로 성연신을 쳐다보면서 물었다.“또 덮치려고요?”성연신은 입가를 끌어올리고 대답하지 않았다.누가 누구를 덮칠지는 지켜봐야 하는 법이다.심지안은 계속 가겠다고 하면서 휘청이며 걸어 내려갔다.그러다가 결국 발이 걸려서 앞으로 넘어지려고 했다.다행히 성연신이 손을 뻗어 긴 팔로 그녀를 품에 안아 넘어지지 않았다.심지안은 저도 모르게 성연신의 목에 팔을 감았다. 넘어질 뻔했지만 이내 시원한 그의 품에 안겨 긴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다리가 왜 말을 안 들어서...”성연신은 시선을 내려 그녀를 쳐다보며 말캉한 촉감에 마음이 떨렸다. 성연신은 가까이 다가가 심지안의 귓가에 속삭였다.“동의한 걸로 이해해도 되죠?”뜨거운 숨이 그녀의 목을 간지럽히자 심지안은 온몸을 바르르 떨었다. 몸에 힘이 빠져버려 그대로 쓰러질 것만 같았다.눈을 붉힌 심지안은 화가 나서 손을 떨면서 성연신을 밀어내려고 했다.“그런 적 없어요.”성연신은 그녀의 작은 손을 꼭 쥐었다. 차가운 손과 뜨거운 손이 닿은 순간, 심지안은 그를 밀어내지 못했다. 심지어는 그와 더 가까이하고 싶었다.“남아서 자고 가요.”성연신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상한 생각을 꾹 누르고 얘기했다.성우주가 가져온 물건은 몸에 위험한 물건은 아니다. 하지만 그래도 의사를 불러 심지안의 상태를 지켜보게 해야 할 것 같았다.천천히 머리를 드는 욕망에 심지안은 그저 몸이 달아오르고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성연신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힘이 빠진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성연신은 허리 숙여 심지안을 안은 후, 그녀를 침실로 데려갔다.그리고 화장실로 가서 수건을 적신 후 뜨겁게 달아오른 심지안의 몸을 열심히 구석구석 닦아주었다.성우주는 문 앞에 서서 불안함에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아빠, 지안 이모는 어떻게 됐어요?”“넌 가서 자.”성연신은 계속 심지안의 몸을 닦아주며 고개도 돌리지 않고 얘기했다.“죄송해요. 제가 잘못했어요...
성연신의 눈은 더욱 깊어져 갔다. 마음속의 악마와 싸우던 끝에 그는 심지안의 손을 떼어내며 얘기했다.“장난치지 말고 자요.”심지안은 불만스럽다는 듯 미간을 팍 찌푸렸다. 더는 성연신의 몸을 더듬지 않았다.성연신이 떠나려고 할 때, 갑자기 속옷이 그에게 떨어졌다.하얀색의, 은은한 체향이 담긴...고개를 약간 돌려보니 심지안은 이불을 이미 걷어차 버린 상태였다. 하얗고 부드러운 피부가 어둠 속에서 아른거리는 것이 매우 유혹적이었다.성연신은 바로 문 쪽으로 걸어갔다.하지만 그는 문을 열고 떠나는 것이 아니라 문을 걸어 잠그는 것을 선택했다.밤은 깊었고, 심지안은 너무 유혹적이었다.남자라는 동물은 이런 쪽에 본능이 남아있는 것 같았다. 5년 동안 하지 않았지만, 성연신은 여전히 능숙하게 분위기를 이끌었다.심지안은 밤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몰랐다. 그저 아침에 깨어났을 때는 목이 쉬었고 몸에는 흔적이 가득했다.심지안은 깊이 숨을 들이쉬고 상체를 훤히 드러낸 성연신을 노려보며 얘기했다.“나한테 약을 먹었어요? 정말 비겁한 사람이네요!”“내가 아니에요.”성연신은 여유로운 말투로 얘기했다. 잘생긴 얼굴에는 만족스러움이 가득했다.“거짓말하지 마요! 당신이잖아요!”“내가 어떻게 지안 씨한테 약을 탔겠어요.”심지안은 화가 나서 이를 꽉 깨물었다.“내가 어떻게 알아요.”“어제 마신 오렌지 주스에 문제가 있는 거 아니에요?”“?”“잘 생각해 봐요. 오렌지 주스 말고 더 마신 게 있어요?”성연신은 그 말만 남긴 채 샤워가운을 입고 천천히 욕실로 걸어들어갔다.힌트는 충분히 줬다. 심지안이 믿을지 말지는 그녀의 선택이다.성우주는 아직 아이다. 어린아이가 이런 수단을 쓸 것 같지는 않았다.옷을 입은 심지안은 4만 원을 꺼내 침대에 던졌다. 성연신이 심지안을 덮친 게 아닌, 심지안이 성연신의 하룻밤을 산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였다.성연신은 그저 심지안의 욕구를 풀기 위한 장난감에 불과하다고.떠나기 전에, 성우주가 심지안을 막아 나섰다.
심지안은 성씨 가문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장원에서 태극권을 연습하는 성동철을 만났다.심지안은 무의식적으로 옷매무시를 정리하고는 웃으며 인사했다."좋은 아침이에요, 할아버지."이 말을 들은 성동철은 동작을 멈추고 걱정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너, 어디 갔었어? 청민이가 밤새 너를 기다리다가 한잠도 못 잤어.""어디 안 가고 친구와 함께 있었어요. 핸드폰 배터리가 다 되었지 뭐예요."심지안은 자연스럽게 말하며 안을 힐끗 쳐다봤다."청민 씨에게는 제가 직접 가서 설명할게요.""내가 깨어났을 때 청민이는 없었어. 아마 세움..."성동철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고청민이 모습을 드러냈다.성지안은 속으로 기뻐하며 이내 그에게 설명했다."미안해요. 어젯밤에 돌아올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생겨서 지체됐어요. 걱정하지 말아요.""걱정 안 해요. 지안 씨에게 위험한 일이 없었다고 믿어요. 다만 노는 데 정신이 팔려 늦게 들어온 거겠죠."고청민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얼핏 들으면 으스스한 느낌이 들었다.웃음 속에 칼이 있는 것 같았지만 심지안은 눈치채지 못했다.고청민은 말이 잘 통하는 사람이었기에 심지안은 한숨 돌리면서 시간을 보며 말했다."곧 출근 해야 하죠? 우리 아침밥 먹고 함께 회사로 가요.""난 배고프지 않으니 지안 씨 혼자 먹으러 가요.""안 돼요. 아침은 반드시 먹어야 해요. 위에 안 좋아요."그녀는 손을 뻗어 고청민을 잡아당겼다. 가녀린 손가락이 그의 옷에 닿았을 때, 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심지안은 고청민을 쳐다봤다. 고청민은 온몸이 흠뻑 젖어 있었고 그의 눈썹에는 서리가 서려 있었다. 갈색 눈동자에는 어떠한 감정도 담겨있지 않았다. 잘생기고 진귀해 보이는 얼굴은 예전과 다름없이 깨끗했다.그의 눈은 진실한 감정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맑았다.심지안은 고청민을 바라봤다."옷이 왜 젖어 있어요?"고청민은 자신의 옷을 힐끗 쳐다보며 평온한 어조로 말했다."아마 잘 마르지 않은 것 같아요."심지안은 이
흥분을 가라앉힌 후, 심지안은 자신이 5년 전 해외에서 살았던 작은 별장과 흡사한 곳에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외부 경관이 달라 의아해하며 말했다.“5년 전과 똑같은 별장을 지었어요?”고청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짓다가 기침을 몇 번 하며 대답했다.“맞아요. 거의 차이가 없죠?”심지안은 방 안의 모든 물건을 둘러보며 고청민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조금 부드러워졌고, 마치 그를 가족으로 생각했던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어떻게 하지원을 설득했어요?”그녀는 고청민이 하지원을 이용하여 완벽한 알리바이를 만든 것에 의아함을 감추지못했다.“한마디 했더니 바로 승낙했어요.”고청민은 미소를 지었다.하지원은 이처럼 온 마음을 다해 고청민을 따랐다.심지안은 복잡한 마음으로 물었다.“하지원 씨에게 미안하지 않아요?”고청민은 아무런 감정 없이 말했다.“보상해 줄 거예요.”‘보상? 어떻게 보상할 건데? 여자의 청춘을 어떻게 보상할 건데...’심지안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반박하지 않았다.하지원에게는 그저 사랑이었으니까...“밤새 아무것도 안 먹어서 배고프죠? 지안 씨가 좋아하는 비빔면을 준비해 뒀어요. 게살 비빔면이요.”고청민은 웃으며 심지안에게 말했다.“지안 씨가 분명 좋아할 거예요.”심지안은 배가 고파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식탁에 다가가기 전, 그녀는 게살 비빔면의 향긋한 냄새를 맡았다.고청민은 게살 비빔면을 그녀 앞에 놓고 기대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먹어요. 제철 대게는 정말 맛있거든요.”심지안은 망설임 없이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그의 말대로 정말 맛있었다. 커다란 게살이 면과 어우러져 입안 가득 풍미를 더했다.고청민의 뜨거운 시선에 심지안은 불편해하며 말했다.“청민 씨도 먹어요. 나만 보지 말고...”고청민은 미소를 지으며 젓가락을 들어 면을 집어 먹으려 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기침이 그를 멈추게 했다.연달아 몇 번의 기침이 멈추지 않았다. 점차 그의 가냘프고 쇠약한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기침이 점점 심해지자 그
집에 돌아온 후, 성연신은 성우주를 재우고 나서 긴급한 회사 업무를 처리했다. 일을 마치고 나니, 이미 새벽 3시가 넘어 있었다.성연신은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어 고청민의 상황을 물어볼까 했지만, 숙면을 방해할까 봐 포기했다.다음 날 아침, 성연신은 일찍 깨어났다. 시계를 보니 6시 30분이었다. 그는 심지안이 오늘 세움의 신제품 출시 준비로 일찍 출근할 거로 생각하고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으려 했다.이때 손이 미끄러져 휴대폰을 바닥에 떨어뜨렸고, 주어 보니 액정이 나가 있었다.갑작스러운 실수에 그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깨진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불안감이 스며들었다.성연신은 다른 휴대폰으로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결국 부재중으로 받지 않았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성씨 가문으로 출발했다.성씨 가문에 도착했을 때, 성동철은 막 깨어나서 정원에서 산책 중이었다.성연신으로부터 두 사람이 지난밤 함께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성동철은 고청민이 출발 직전에 했던 말이 떠올라 이마를 찡그렸다.‘그 녀석이 설마...’성연신은 성동철의 표정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급하게 물었다.“어르신, 혹시 지안 씨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어쩌면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어디죠?”“해외에 있을 가능성이 크네.”성연신은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무슨 말씀입니까?”성동철은 고청민이 출발 전에 했던 특별한 부탁을 성연신에게 말해주고, 동시에 고청민에게 전화를 걸었다.성연신은 주먹을 꽉 쥐고 심지안에게 계속 전화를 걸었다. 한참의 신호음 끝에 전화가 연결되었다.“지안 씨, 어디에 있어요?”“성연신 대표님, 접니다.”고청민의 평온한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고, 성연신의 신경을 자극했다.성연신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이 자식아, 지안 씨를 어디로 데려간 거야?”“우리는 해외에 있어요. 안전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고청민은 계속해서 말했다.“지안 씨를 며칠만 빌리는 셈이에요. 너무 무리한 일은 하지 않을 테니, 흥분하지 마세요
“네. 할아버지, 그러니 제발 막지 말아 주세요.”“지금 나와 상의하는 게 아니라 통보하는 거구나!”“할아버지, 용서해 주세요.”성동철은 입을 열었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한순간에 십 년은 늙은 것처럼 보였고, 무력한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았다.한참 후에야 그는 천천히 말했다.“해외 전문가와 이미 연락을 취했으니, 너는 안심하고 치료에 전념해라. 우리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고청민은 그의 고집을 읽고 눈을 깜빡였다. 긴 속눈썹이 갑자기 젖어 들었다.사실, 그도 할아버지와 몇 년 더 함께하고 싶었다.집에 돌아오니, 성동철이 연락한 해외 전문가로부터 답변이 도착해 있었다. 그들은 신의라 불리는 의사가 이미 고청민을 치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자신들이 개입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고청민은 낙담하지 않고 오히려 성동철을 안심시키며 주제를 돌렸다.“할아버지, 해외로 며칠 다녀오고 싶어요. 오랫동안 여행을 못 갔어요.”“안 돼. 네 몸 상태로는 그렇게 멀리 갈 수 없어!”성동철은 단호히 거절했다. 그는 아직 민채린의 스승에게 도움을 청해 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그러나 고청민은 말했다.“민채린이 해외에 있어요. 그녀가 옆에 있으면 할아버지도 안심하실 거예요.”“민채린?”성동철의 얼굴에 희미한 희망의 빛이 떠올랐다.“그렇다면 민채린의 스승에게 직접 찾아갈 수 있는 거니?”“제 병에 대해 이미 채린이의 스승님께 여쭤봤어요.”“결과는 어땠니?”“스승님께서 알려줄 수 있는 것은 모두 알려 주셨어요. 하지만 정말 치료하기 어려운 병이래요.”성동철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실망을 느꼈다.결국, 그는 손을 흔들며 말했다.“그래. 가고 싶다면 가도 좋아. 다른 환경에서 지내는 것이 네 몸에도 좋을 거다.”게다가 민채린이 옆에 있으니, 문제가 생기더라도 신속히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오늘 바로 떠나려고 해요.”“이렇게 갑자기?”“그냥 즉흥적으로 생각한 거예요. 가고 싶을 때 가야죠.”고청민은 말하며 눈치를 보지 않았다
30분 후, 성동철과 고청민이 병실에서 나왔다. 성동철은 걱정스럽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의사가 병원에 며칠 더 있으라 했잖니? 왜 말을 안 들어? 적어도 또 무슨 일이 생기면 이렇게 급하게 서두르지 않아도 되잖아. 치료 시간을 늦출 수도 있다고...”고청민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창백한 얼굴은 햇살처럼 부드러워 보였다.“괜찮아요. 집에 있는 의료 장비로도 충분해요.”성동철은 한숨을 쉬며 더 이상 고집하지 않았다.‘집에 있는 것도 나쁘지 않지. 집에 있으면 이 녀석을 더 볼 수 있잖아...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일이고...’성동철은 운전기사에게 차를 병원 앞에 대라고 지시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그는 병원 입구의 벤치가 비어 있는 것을 보고 주변을 둘러보며 의아해했다.“지안이 여기 앉아 있지 않았니? 어디 갔지?”고청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고운 속눈썹은 한껏 아래로 드리워 있었다. 눈에 감춰진 복잡한 감정이 보이지 않게 덮여 있는 것 같았다.“그리고 지원이도 보이지 않네. 네가 전화를 걸어 연락해 봐. 이제 집에 가야 한다고...”성동철은 난처한 표정으로 고청민에게 말하며,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전화는 계속 부재중이었다.고청민은 하지원에게 전화를 걸지 않고 바로 말했다.“지원이 오빠가 찾으러 왔어요. 아마도 지안 씨는 갑자기 일이 생겨서 간 것 같아요. 저희 먼저 집에 가죠.”성동철은 방금 의사가 자신에게 따로 했던 말들이 머릿속에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빨리 집에 가서 외국의 의료 전문가들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그래. 우리라도 먼저 가자.”‘성연신이 지안이를 데려갔을 수도 있어. 어쨌든 지안이는 다 큰 어른이니까 큰 문제는 없을 거야.’넓은 승용차 안에서, 고청민이 갑자기 성동철에게 말했다.“할아버지, 제가 죽으면 제 심장을 지원이에게 주세요.”어차피 죽으면 남겨둘 이유가 없으니, 필요한 사람에게 주는 것이 덕을 쌓는 일일 것이다.성동철은 얼굴빛이 변하며 호통쳤다.“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심지안은 차가운 눈빛으로 하지원을 바라보며 말했다.“모든 사람이 자기를 좋아하지도 않는 상대방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인생을 바칠 수 있는 것은 아니야.”심지안은 사랑의 위대함에 감탄했지만, 그런 희생정신을 가질 수는 없었다.하지원은 심지안의 말을 정확하게 알아듣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왜냐하면 난 인간미가 있고, 지안 씨는 없으니까요. 임시연이 당신 앞에서 죽었을 때, 살아있던 한 생명이 죽었는데도 지안 씨는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사람인 것처럼 무관심했잖아요.”심지안은 갑자기 고개를 들어 지금까지의 무심한 태도를 거두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하지원을 쳐다보며 목소리를 높였다.“맞아요. 임시연은 내 아이를 훔치고, 내 남자를 빼앗고, 내 결혼을 망쳤어요. 게다가 여러 번 나를 죽이려고 했었죠. 이번에 죽은 사람이 임시연이 아니었다면, 다음번에 죽을 사람은 나일 수도 있어요. 지금 임시연이 죽어서 폭죽이라도 터뜨리고 싶은 마음이니까, 자기 일 아니라고 그런 쉬운 소리 하지 마세요!”처음에는 임시연의 죽음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곧 심지안은 깨달았다. 임시연의 죽음은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으며, 그녀는 죽어 마땅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임시연은 살아서 더 많은 사람을 해치려 했기에 어쩌면 이렇게 죽는 것이 더 나은 상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원은 심지안의 큰 목소리에 깜짝 놀라 얼굴이 창백해졌고, 잠시 말을 잃었다.“지원 씨는 사랑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난 아니에요. 날 냉정하다고 생각해도 좋아요.”심지안은 하지원과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하지원도 불쌍한 사람일 뿐이었다. 심지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로 들어가려 했다. 한 발을 내딛자, 하지원이 다시 말을 걸었다.“정말로 청민 선배를 도와줄 생각이 없는 거예요? 사람 하나 구한다고 생각해 줘요... 평생 고마워할게요.”심지안은 잠시 멈칫했지만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그건 도움을 청하는 게 아니라 도덕적 강요에요.”심지안은 친구로
성동철은 깜짝 놀라 지팡이도 잊은 채 급히 움직였다. 카펫에 걸려 넘어질 뻔했지만, 한순간도 지체하지 않고 휘청거리며 2층으로 올라갔다.집사는 구급차를 부르기 위해 전화를 걸었고, 남은 하인들은 손님들을 휴식 공간으로 안내했다. 연회 내내 활기찼던 분위기가 갑자기 혼란스럽고 긴장된 분위기로 바뀌었다.심지안은 찡그린 얼굴로 성동철의 뒤를 따라 고청민의 방으로 들어갔다.커튼은 빛 한 줄기도 들어오지 못하게 꽉 닫혀 있었지만, 문을 열자 짙은 피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하인이 먼저 한 발 앞으로 나서서 전원 스위치를 켜자, 방 안은 갑자기 밝아졌다.우드톤 가구들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옷들도 정리되어 소파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심지안은 방 안을 둘러보았지만, 고청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심지안은 약간 열려 있는 화장실 문을 바라보며, 눈빛이 어두워졌다.이때, 하지원이 화장실을 가리키며 말했다.“안에 있어요.”성동철은 떨리는 손으로 화장실 문을 열었다. 안은 엉망진창이었다. 바닥에는 붉은 핏자국이 가득했다.고청민은 욕조 안에 누워 있었다. 옷은 물에 젖어 축축하게 몸에 붙어 있었고, 두 손은 욕조 가장자리에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머리는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고, 입가에는 피가 묻어 있어 원래 창백한 피부가 더욱 하얗게 보였다.고청민은 말라비틀어진 채 생기가 전혀 없는 모습이었다.성동철은 이마에 땀을 흘리며 손가락을 고청민의 코 밑에 대어 보았다. 그는 길게 숨을 내쉬며 하인들에게 소리쳤다.“구급차가 일찍 도착할 수 없을지도 모르니, 빨리 차에 태워서 병원으로 데리고 가!”하인들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럽게 고청민을 욕조에서 꺼냈다.심지안은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겁에 질린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심장이 빨리 뛰었다. 그녀는 혼이 나간 하지원을 바라보았다.“청민 씨... 어쩌다 이렇게 된 거죠? 왜 이렇게 피를 많이 흘린 건가요?”이 상황이 마치 자살을 암시하는 것 같았지만, 하지원은 그 말을 입 밖에
심지안은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했다.“말 좀 해봐요. 정말 시연 씨가 죽길 바란 거예요? 시연 씨가 죽으면 속 시원할 것 같았냐고요!”변석환은 심지안에게 소리쳤다. 울부짖는 변석환의 두 눈은 심하게 충혈되어 무섭게 보였다. 그리고 그의 큰 목소리는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변요석과 성연신이 먼저 달려왔다. 성연신은 심지안을 보호하며 변석환을 몇 걸음 뒤로 밀어냈다. 성연신의 행동은 냉담하면서도 약간의 분노가 섞여 있었다.“지안 씨 앞에서 임시연 그 여자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마. 다시 한번 실수하면 내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하하하! 살인범을 감싸고 도는 건가요?”변석환이 큰 소리로 웃으며 말을 이었다.“맞아요. 시연 씨의 죽음에는 당신과 심지안 씨도 책임이 있어요.”“퍽!”변요석은 변석환의 얼굴을 한 대 때렸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정신 차려. 임시연은 원래 죽어 마땅한 여자야! 더 이상 나를 창피하게 만들지 마!”변석환은 변요석을 바라보며, 맞은 얼굴을 손으로 문지르며 중얼거렸다.“원래 죽어야 했고... 맞아... 나를 속이고 이용했어... 죽어 마땅한 여자야...”하지만 변석환은 스스로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잠을 잘 수도, 밥을 먹을 수 없었다.임시연이 죄를 지었음을 알고 있었지만, 변석환은 여전히 너무나도 힘들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녀를 미워하면서도 그녀가 죽기를 바라지 않았다.변요석은 주변에 지켜보는 눈이 많다는 것을 의식하며 분노를 억누르고 변석환에게 경고했다.“지금 당장 성씨 가문을 떠나. 네가 정신 차리고 지안 씨에게 사과할 준비가 되면... 그때 돌아와.”변석환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 비틀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순간, 사람들 사이로 문득 익숙한 그림자를 본 것 같았다.변석환은 그 그림자를 쫓아갔지만,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변석환은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었고, 그제야 그것이 자신의 착각임을 깨달았다.살아 있는 사람은 죽은 사람보다 더 큰 고통을 겪는다. 임시
자책하는 심지안을 보는 성연신은 가슴이 아픈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당연히 아니죠. 임시연의 죽음은 지안 씨와 아무 상관없어요. 그러니까 혼자 그런 생각 하지 마요.”심지안도, 성연신도, 그 누구도 임시연이 거기서 뛰어내릴 거라고는 생각 못 했을 것이다.임시연이 심지안 앞에서 그리고 성원 그룹에서 죽은 건 심지안과 성연신에게 트라우마를 남겨주기 위해서였다.만약 제가 잘못되어 죽는다 해도 살아있는 사람들도 마음이 편하진 않을 테니까 그걸 노리고 뛰어내렸던 것 같다.성연신도 놀라긴 했지만 직접 본 게 아니니 그리 큰 충격은 받지 않았는데 문제는 심지안이었다.물론 임시연도 죽을 줄은 모르고 뛰어내렸겠지. 그냥 크게 다쳐서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게 감옥에 있는 것보단 나으니까 뛰어내린 걸 텐데 이렇게 죽어버려서 심지안만 힘들어하고 있었다.심지안은 공허한 눈으로 성연신을 보며 웃어보려 했지만 표정이 잔뜩 굳어있어서 웃는 게 우는 것보다 더 이상했다.“당신 말이 맞아요. 임시연은 천벌 받아서 죽은 건데 내가 기뻐하는 게 맞죠.”“그래요, 안 뛰어내렸어도 경찰한테 잡혀서 자유롭진 못했을 거예요.”성연신은 심지안의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내가 지안 씨더러 임시연 잡아놓으라고 한 거잖아요. 귀신이 되어도 날 찾아올 거니까 지안 씨는 아무 걱정 하지 마요.”그때 오지석이 사실은 사람들을 데리고 올라오려 했지만 임시연이 미리 눈치를 채고 송준에게 도움을 청할까 봐 성연신이 말렸었는데 임시연이 이렇게 극단적인 사람인 줄 알았더라면 심지안을 절대 혼자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알겠어요.”긴장이 풀렸는지 심지안이 눈을 살짝 감으며 말했다.“나 아까 제대로 못 쉬어서 좀 잘래요.”“그래요, 내가 옆에 있을게요.”“네, 할아버지랑 우주한테는 나 병원에 있단 말 하지 마요.”“네.”가족들이 괜히 걱정할까 봐 신신당부를 하고서야 심지안은 침대에 누웠다.제 앞에 앉아있는 듬직한 성연신을 보니 안심이 되는지 그렇게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한편 성연신은
그렇게 회의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누구는 임시연을 구하겠다고 1층으로 달려 내려가고 누구는 창가에 기대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아직 살아있어요!"그 모습을 보고 있던 심지안은 사람들의 인영이 환영처럼 눈 앞을 스쳐지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머리도 어지럽고 귀에 까지 이명이 들려 온 세상이 흐릿하게 보였다.임시연이 뛰어내리는 결말을 예상해본적은 없었는데, 3층이 아주 높진 않지만 그렇다고 낮은 층수도 아니었다.조금 정신을 차린 심지안은 사람들의 질책이 담긴 시선을 느꼈다. 그들은 저들끼리 수군대며 심지안을 힐끔힐끔 보고 있었다."사모님도 너무 하시지, 어떻게 사람을 뛰어내릴 때까지 몰아붙여? 저러면 밤에 악몽 안 꾸나?""그리고 왜 자꾸 연다빈 씨한테 임시연이라고 하는 거야? 너무 간 거 아니야?""다빈 씨가 죽기라도 하면 어떡해? 그럼 사모님이 살인자 되는 거야?""다빈 씨가 귀신 돼서 사모님한테 복수하겠다고 찾아올 것 같아요."그 말을 듣고 있던 심지안은 이마에 힘을 주며 소리질렀다."내가 몰아붙인 거 아니고 본인이 뛰어내린 거야. 나랑 상관 없다고."심지안의 호통에 수군거림은 사라졌지만 그녀를 보는 시선은 여전히 매정했다.다들 "연다빈"에게 일이 생기면 심지안 책임으로 돌릴 준비가 되어있는 듯 싶었다.심지안은 애써 심호흡을 하며 현기증을 이겨내려 했다. 그리고 구급차를 부르려고 뒤를 돌 때 마침 이곳으로 뛰어오는 성연신과 오지석을 발견했다.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는 성연신이 빠르게 다가와 심지안의 어깨를 잡으며 주드럽게 다독였다."괜찮아, 내가 왔잖아. 내가 알아서 할게."속눈썹이 떨릴 정도로 긴장하고 있던 심지안은 마침 다가오는 성연신을 보고 무슨 말이 라도 하려고 입을 벌렸지만 말을 채 내뱉기도 전에 다리에 힘이 풀리며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시간이 조금 흘러 심지안이 눈을 뜬 곳은 병원이었다.흰 벽과 소독약 냄새, 그리고 핸드폰에서 흘러나오는 성원 그룹 직원 자살 사건은 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