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연은 순산 이후 며칠간의 회복 끝에 컨디션이 좋아 보였다.올 블랙 긴 원피스에 미니햇을 하고 우아한 모습이었다.그녀는 진유진의 분노에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저는 그저 심지안 씨에게 마지막 인사를 드리려고 왔을 뿐인데 흥분할 필요 없을 것 같아요.”“연신 씨, 이 여자 계속 이곳에 머무르게 할 거면 지금 바로 지안이를 데리고 떠날거예요!”진유진은 붉으락푸르락 하면서 성연신에게 소리를 질렀다.성연신은 힘겹게 시선을 들어 임시연을 보더니 곧바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에게 머무른 시선은 3초도 되지 않았다.임시연은 옷소매에 숨겨두었던 두 손에 주먹을 꽉 쥐게 되었다. 출산해서부터 성연신은 한 번도 보러오지 않았기 때문이다.‘지석 씨만 보러오게 하고, 이게 뭐야. 아니야, 됐어. 어차피 지안 씨도 죽은 마당에 좋은 날이 오겠지.’사실 오늘 이곳에 온 목적은 따로 있었다.‘누가 뭐 이런 재수 없는 곳에 오고 싶어서 온줄 알아?’눈치가 빠른 정욱은 순간 성연신의 마음을 깨닫고 임시안의 앞에 가서 공손하게 말했다.“시연 씨, 이만 가시죠.”“저는 정말 다른 뜻이 없는데...”임시연은 일부러 창백한 표정을 하더니 진지하게 말했다.“지안 씨 죽음에 대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오늘 마지막 인사를 드리려고 왔는데 만약 전에 저에게 기분 안 좋은 일이 있었다면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정말 용서를 원한다면 지옥에 가서 사과하던가.”내내 입을 열지 않던 고청민이 갑자기 살기가 가득한 눈빛으로 마치 그녀의 꿍꿍이를 꿰뚫고 있는 듯 했다.임시연은 순간 얼어붙더니 분노가 가득했던 표정이 싹 사라지고 둘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지안 씨 정말 죽은 거 맞아요? 병원에 가서 살리기는 했어요?”화재가 발생한 그 날, 병원에서 고청민의 모습을 슬쩍 보았던 것이다.자신이 본 것이 맞다면 그날 그 사람은 고청민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때는 이미 불길이 세져 수술실 안에서 울려 퍼지는 비명소리를 똑똑히 들을수 있었다.심지안이 이 세상에서 사라
“내가 만약 병원에 있었다면 어떻게 지안이가 불에 타 죽어가는 걸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었겠어요?”성연신의 말투는 덤덤했다. 하지만 주먹을 너무 꽉 움켜쥔 탓에 새하얗게 변해버린 손톱이 그의 진짜 속내를 말해주고 있었다.성연신이 어떻게 그녀가 숨이 끊어지는 걸 그저 내버려 둘 수가 있겠는가.누구보다 그녀와 그토록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싶어 하는 사람이 바로 성연신이지 않은가.진유진이 분노가 가득 담긴 퉁퉁 부은 눈으로 성연신을 쏘아보며 말했다.“그럼 어디에 있었는데요?”성연신이 허탈하게 웃음 지었다.“그건 이제 의미가 없어요.”심지안은 영원히 알지 못할 것이다.진유진은 그가 변명을 늘어놓는다는 생각에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며 피식 웃었다.“이제 지안이가 없으니 당당히 임시연과 함께 다닐 수 있겠네요? 아주 좋아 죽겠죠?”“난 임시연을 좋아하지 않아요.”진유진은 성연신의 그런 말 따위 전혀 믿지 않은 채 피식 웃으며 자리를 떠났다.묘지에서 나가자 길 저편에 세워놓은 하얀색 마이바흐 한 대가 보였다.그때, 창문이 스르르 열리더니 앳되고 말끔한 얼굴이 드러났다.고청민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지금 시간 되세요? 할 얘기가 있어서요.”“네.”진유진이 떠나자 묘지엔 성연신 한 사람만 남았다.그가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그곳에 머물렀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정욱이 다음 날 아침 보광 그룹에 가보니 사무실 책상 위 서류들은 조금도 움직인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오전 회의 시간이 되었음에도 성연신은 여전히 나타나지 않았다.회사 모든 고위급 인사들이 회의실에 모여 그를 기다렸다. 기다린 지 한 시간이 지나자 정욱은 어쩔 수 없이 성씨 저택으로 가보기로 했다.하지만 중정원에도, 새로 건설한 장원에도, 성연신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순간 불길한 예감이 엄습해온 정욱은 곧바로 차를 몰고 교외로 향했다.겨울엔 낮이 짧고 밤이 길다.무덤이 있는 장소는 도시와 완전히 차단된 곳이었다. 하얀 안개에 뒤덮여있어 햇빛조차 보이지 않았다.으스
성연신의 시선이 드디어 다시 아이에게로 향했다. 그가 우는 아이를 쳐다보며 이마를 찌푸렸다.“왜 이래?”“배가 고파서 우는 걸 거야. 내가 옆방에 가서 우유를 먹이고 올게.”임시연은 짜증 한 번 내지 않고 아이를 다독였다.그녀가 나간 뒤 오지석은 더이상 성연신을 설득하지 않고 한 마디만 덧붙였다.“새 생명은 때로는 우리에게 행운을 가져다줘.”“행운?”그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내 삶은 이미 망가졌어. 여기에서 더 나빠질 것도 없지.”오지석은 마땅히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을 다문 채 조용히 머무르다가 집으로 돌아갔다.반면 임시연은 밤까지 성연신의 곁에 남아있었다.임시연이 아기를 안고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 대부분 시간 동안 아이를 다독이며 성연신과는 별다른 얘기를 하지 않았다.어쩌면 성연신이 그녀에게 대화할 기회를 주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연신아, 나 화장실에 다녀올 테니까 그동안 아이 좀 봐줘.”온종일 유지하고 있던 임시연의 미소가 이젠 조금 경직되었다.소파에 누워있는 아기를 바라보는 성연신의 눈동자에 복잡한 연민과 사랑의 감정이 피어올랐다.병실 밖 몇 명 간호사들의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장미연 씨가 어디에 갔는지 알아요? 연속 며칠 동안 안 보이더라고요. 오늘 수간호사님한테 물었는데 그분도 잘 모르시더라고요.”“몰랐어요? 장미연 씨 부모님이 병원에 오셨잖아요. 병원장님께서 힘들게 부모님들에게 사실을 알렸어요. 장미연 씨에게 변고가 생긴 것 같아요.”“아... 무슨 변고인데요?”“화재가 일어났던 그 날 밤 장미연 씨가 수술실에서 당직을 서고 있었대요.”“장미연 씨가 죽었다고요?”“제 생각엔 그래요. 아니면 왜 갑자기 사라졌겠어요.”“하지만 경찰 조사 결과에 의하면 한 사람의 흔적만 발견됐다고 하던데...”“맞아요. 그게 좀 이상해요.”그 순간.간호사 눈앞 병실 문이 벌컥 열렸다. 성연신은 그들은 신경 쓰지도 않은 채 곧장 병원장 사무실로 달려갔다.그는 병원장 사무실에서 30분 머무른 뒤 나
정욱이 물었다.“성씨 가문엔 왜 가시는 거예요?”성연신이 어두워진 눈동자로 먼 곳을 바라보았다.“확인하려고.”초저녁의 노을이 금빛을 내뿜으며 성씨 가문 정원을 따뜻하게 감싸 안고 있었다.성동철이 마당 흔들의자에 앉아 유유자적 차를 마시며 고요함을 즐기고 있었다.집사가 급히 그에게로 다가왔다.“어르신, 성연신 대표님께서 오셨습니다.”찻잔을 든 성동철의 손이 떨려왔다. 순간 고청민이 했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심지안이 화재로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은 익히 들어 알고 있다. 고청민은 며칠간 줄곧 사당에 머무르고 있었기에 성연신과 관련되어있지 않을 것이다.여기까지 생각에 미친 성동철이 마음을 다잡고 말했다.“들여보내.”성연신은 집사의 안내로 들어와 성동철의 맞은편에 자리 잡고 앉았다. 그가 성동철이 입을 열기도 전에 말했다.“어르신, 고청민을 만나러 왔습니다.”성동철의 눈까풀이 툭툭 튀어 올랐다. 고청민이 무슨 일을 벌인 게 분명하다. 성동철은 이미 지긋이 나이를 먹었지만 성연신 앞에선 어딘가 주눅 들어 있었다.“걔는 왜 만나려고 하는 건가? 그 아인 아직 사당에 있네.”“물어볼 게 있습니다.”성연신이 숨기지 않고 차분히 말했다.자세히 들어보면 평소보다 약간 빠르고 떨리는 그의 목소리엔 긴장감과 기대감이 묻어있었다.성동철은 불길한 예감이 들긴 했으나 마땅히 거절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또한 이 집에서 선을 넘는 일은 벌이지 못할 테니 집사를 시켜 고청민에게 데려다주었다.고청민은 한창 붓을 들고 글씨 연습을 하고 있었다.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어 성연신을 본 순간 화들짝 놀랐다. 성연신이 이렇게나 빨리 이상함을 감지했을 줄이야.집사는 성연신을 의자에 안내하고는 문을 닫고 자리를 피했다.성연신은 곧바로 고청민이 쥐고 있던 붓을 던져버렸다. 먹물이 사방으로 튀어 나가 두 사람의 옷에 흩뿌려졌다.그가 고청민의 멱살을 잡고 확신에 찬 말투로 말했다.“심지안 안 죽은 거 맞죠?”고청민이 멍한 얼굴로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유골
증오라는 단어에 자극을 받은 성연신은 고청민의 목을 움켜쥐었다. 날카로운 눈동자에 살기가 번뜩거렸다.“심지안은 어디에 있어?”고청민은 호흡이 힘들어 얼굴이 벌겋게 부어올랐으나 겁에 질리기는커녕 한글자 한글자 내뱉으며 성연신을 도발했다.“그 여잔 죽었어요. 간접적으로 당신에게 살해당했죠.”“난 아니야! 난 지안 씨를 보호하고 있었다고!”그는 모든 일을 해결한 뒤 그녀를 자유롭게 놓아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전에 이런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겨버린 것이다.고청민은 숨이 쉬어지지 않아 힘겹게 말을 이어갔다.“이제 인정해요. 지안 씨는 당신의 그런 식의 보호를 필요로 하지 않아요. 그건 감옥이나 다름없는 거예요.”“당신은 스스로 마음이 넓고 배려가 깊다고 생각하죠?”“실은 줄곧 지안 씨를 옥죄이고 있었어요. 지금 이 모습 대체 누구한테 보이려고 이러는 거예요? 지안 씨가 볼 수나 있어요? 알기나 할까요? 다 죄책감을 씻으려고 하는 짓이잖아요.”“한편으로 임시윤과 꽁냥거리고, 한편으론 심지안을 위하는 척 난리를 치고. 설사 전자가 연극이라고 해도 지안 씨의 동의를 받은 건 아니잖아요. 이 세상이 당신을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모든 사람이 당신 뜻대로 행동해야 하나요?”성연신의 동공이 흔들렸다. 고청민이 정곡을 찌른 것이다. 그는 조용히 고청민을 쏘아보았다.두 남자는 누구 하나 물러서지 않고 팽팽히 시선을 맞추며 불꽃을 튕기고 있었다.성연신이 잠시 딴생각을 하는 사이에 고청민이 반격을 가했다.성연신은 한 대 맞은 뒤 다시 되받아쳐 고청민을 차고 딱딱한 바닥에 넘어뜨렸다.고청민은 통증에 앓는 소리를 냈다. 등 뒤엔 피부가 벗겨져 피가 흘렀고 온몸 곳곳에 크고 작은 상처들이 생겼다.그는 물러서지 않고 다시 일어서 공격했다.성연신은 몸을 회복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몸 상태로 무리했던지라 고청민에게 반격할 기회를 내어주고 말았다. 고청민의 주먹이 성연신의 배에 내리꽂혔다.싸움이 끝난 뒤.두 사람의 얼굴은 모두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성연신은 바닥에 떨어진 양복을 들고 밖으로 나갔는데 고청민은 무슨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는지 눈썹을 치켜 올렸다.문 앞에 와서 성연신은 잠깐 멈춰 고청민을 보고 말했다.“어찌 보면 당신도 나랑 똑같다는 생각이 드네요.”“뭐가요?”“지안 씨 위한다는 명목으로 상처를 주는 거요.”고청민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가 뭔가를 알고 있지 않는지 시험해 보려고 했지만 성연신은 그냥 자리를 떴다.성연신은 아침 6시까지 차 안에 앉아 있었는데 아침의 첫 햇살이 흐릿한 회색빛을 대지에 내뿜고 있었다. 그는 심지안이 살아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살아 있기를 바랐다....성연신의 차가 성씨 장원 밖에 줄곧 주차하고 있자, 집사가 고청민에게 보고했다.“성 대표님, 아무것도 안 하시고 조용히 차 안에만 계시다가 날이 밝자 바로 떠나셨습니다.”날이 밝아서...고청민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는데 어느새 해가 중천에 떠오르고 있었고 만물은 햇빛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모두 그들의 희망을 기다리는 것 같다.순간 그는 성연신의 생각을 이해했다. 살아있기만 하면 심지안은 영원히 다음 날의 태양을 기다릴 것이고 그는 잠시 한 발짝 물러서서 그녀가 상처를 치유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성연신은 성씨 가문을 떠난 다음, 바로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회사에서 모든 시간을 보내는 것 외에는 달라진 것이 없었는데 그 때문에 제일 힘든 건 정욱이었다. 원래도 개인 시간이 없었는데 성연신이 대부분 시간을 회사에서 지내는 바람에 일상이 더욱 바빠졌다.늦은 밤이 되자, 정욱은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진유진이 생각나서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지만, 받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진유진이 아마 성연신 때문에 자기를 차단했을 거라는 생각에 우울했다. 나중에도 여러 번 시도했지만, 아예 상대방의 전화가 꺼져있었는데 더 이상 바보가 되고 싶지 않아 연결을 포기했다....5년 후.심지안이 제경 공항에서 나오자, 이미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고청민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
성씨 가문 저택.성동철은 3년 전 심지안이 자기의 손녀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이 기쁜 소식을 대중에게 알리고 세움 주얼리 지분의 6분의 1을 심지안에게 양도하고 싶었지만 심지안이 귀국할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하며 거절했었다. 첫째는 심지안은 세움 주얼리의 모델만 했을 뿐 실제 업무에 대해 잘 몰랐기 때문이고, 둘째는 세움 주얼리는 고청민이 오랫동안 경영해 왔기 때문에 고청민에게 그의 이익을 뺏아 간다고 느낌게 하기 싫었기 때문이다. 고청민이 그녀를 많이 도와줬기에 기분 나쁘게 하고 싶지 않았다.심지안이 차에서 내리자, 성동철은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비행기 타느라 피곤했지. 네가 거부하지 않았으면 우리 비행기를 보냈을 거잖아.”“할아버지, 저 그렇게 허약하지 않아요.”그녀는 어떤 사람에게 서프라이즈를 주려고 귀국 사실을 알리지 않고 싶었다.“지안 씨가 하고 싶은 대로 해요. 시간도 많으니까.”고청민은 무조건 그녀의 편이었다.성동철은 고청민이 심지안을 보는 부드러운 눈빛을 보며 잠시 고민하더니 이제 말할 때가 된 것 같다고 생각했다.“지안아, 나 따라와 봐.”“네.”심지안은 성동철을 따라 서재에 가서 자리를 찾아 앉더니 테이블에 있는 포도를 보고는 한 개 집어 입에 넣었다.“할아버지, 무슨 일이에요?”5년 동안 그는 한 번도 금관성에 돌아오지 않았었다. 하지만 심지안 어머니의 신분을 알게 된 후 성동철이 가끔 프랑스에 다녀갔었는데 심지안도 마음속으로 가족애가 그리웠기에 거부하지 않았다.성동철은 잠깐 머뭇거리다가 말했다.“사실 오래전에 나와 고청민의 할아버지가 너와 고청민의 혼인을 약속했었어. 기존에는 너를 찾지 못해서 그냥 있었는데 이제 너도 돌아왔고 밖에서 고생도 많이 했으니 고청민과 결혼해서 계속 우리 성씨 가문에 있으면서 두 사람 같이 세움을 관리하면 좋을 것 같구나.”심지안은 눈을 깜박이더니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했다.“할아버지, 저는 이혼했었어요. 게다가 청민 씨는 저보다 몇 살 어린데 얼마나 억울하겠어요.”
심지안은 목소리를 듣고 아이라는 것을 알아채고 눈썹을 치켜들고 담담하게 고개를 돌렸는데 성우주가 그녀의 얼굴을 보는 순간 충격에 표정이 굳으며 말했다.“심지안?”심지안은 움직이지 않고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나 알아?”“알아요.”성우주는 팔짱을 끼고 어른인 듯했다.“응? 나를 어떻게 알아?”심지안이 궁금했다.‘설마 임시연이 아이 앞에서 내 욕을 했나?’“우리 아빠랑 바람 났었죠?”성우주가 확신에 찬 어조로 물었다.“바람? 너의 엄마가 그렇게 말했어?”심지안은 자기의 짐작이 맞았다는 생각에 입꼬리를 씰룩거렸는데 임시연이 자기를 흠집 내기 위해 아이한테 나쁜 말을 한 거라고 생각했다.“그런데 저는 믿지 않아요. 아줌마는 좋은 사람 같아요.”성우주가 진지하게 말했다.“어? 왜?”“할아버지 보러 오셨으니까요. 할아버지는 아줌마를 많이 사랑했다고 아빠가 말씀하셨어요. 오늘 할아버지 보러 오셨다는 건 아줌마가 양심이 있는 사람이 맞는다는 증명이고요. 임시연보다 할아버지한테 더 잘하시니까요.”심지안은 깜짝 놀랐다.“왜 이름을 불러?”‘요놈, 성연신과 똑같이 버릇이 없네.’성우주는 심지안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은 채, 새까맣고 빛나는 눈으로 심지안을 바라보며 물었다.“아줌마 죽은거 아니였어요?”“너랑 상관이 없는 것 같은데?”심지안이 되물었다. 그녀는 성우주에게 반감은 하나도 없고 오히려 예뻤는데 그렇다고 해도 모든 걸 말해 줄 수는 없었다.“상관없어요. 제가 알고 싶은 건 할아버지 보러 또 오실 거예요?”“내가 오든 안 오든 너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거지?”“저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지만, 할아버지에게는 큰 의미가 있어요.”성우주는 비록 어리지만 행동이 얼마나 민첩한지 순식간에 의자를 밟고 침대에 올라가 잠든 성수광의 손을 마사지해 주고 있었는데 자주 해본 티가 나게 행동이 아주 능숙했다.“의사 선생님이 그러시는데, 제가 계속 할아버지 마사지해 드리고 또 얘기를 들려준 관계로 할아버지 상황이 좋아지고 있대요. 할아버지가 아줌마
흥분을 가라앉힌 후, 심지안은 자신이 5년 전 해외에서 살았던 작은 별장과 흡사한 곳에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외부 경관이 달라 의아해하며 말했다.“5년 전과 똑같은 별장을 지었어요?”고청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짓다가 기침을 몇 번 하며 대답했다.“맞아요. 거의 차이가 없죠?”심지안은 방 안의 모든 물건을 둘러보며 고청민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조금 부드러워졌고, 마치 그를 가족으로 생각했던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어떻게 하지원을 설득했어요?”그녀는 고청민이 하지원을 이용하여 완벽한 알리바이를 만든 것에 의아함을 감추지못했다.“한마디 했더니 바로 승낙했어요.”고청민은 미소를 지었다.하지원은 이처럼 온 마음을 다해 고청민을 따랐다.심지안은 복잡한 마음으로 물었다.“하지원 씨에게 미안하지 않아요?”고청민은 아무런 감정 없이 말했다.“보상해 줄 거예요.”‘보상? 어떻게 보상할 건데? 여자의 청춘을 어떻게 보상할 건데...’심지안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반박하지 않았다.하지원에게는 그저 사랑이었으니까...“밤새 아무것도 안 먹어서 배고프죠? 지안 씨가 좋아하는 비빔면을 준비해 뒀어요. 게살 비빔면이요.”고청민은 웃으며 심지안에게 말했다.“지안 씨가 분명 좋아할 거예요.”심지안은 배가 고파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식탁에 다가가기 전, 그녀는 게살 비빔면의 향긋한 냄새를 맡았다.고청민은 게살 비빔면을 그녀 앞에 놓고 기대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먹어요. 제철 대게는 정말 맛있거든요.”심지안은 망설임 없이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그의 말대로 정말 맛있었다. 커다란 게살이 면과 어우러져 입안 가득 풍미를 더했다.고청민의 뜨거운 시선에 심지안은 불편해하며 말했다.“청민 씨도 먹어요. 나만 보지 말고...”고청민은 미소를 지으며 젓가락을 들어 면을 집어 먹으려 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기침이 그를 멈추게 했다.연달아 몇 번의 기침이 멈추지 않았다. 점차 그의 가냘프고 쇠약한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기침이 점점 심해지자 그
집에 돌아온 후, 성연신은 성우주를 재우고 나서 긴급한 회사 업무를 처리했다. 일을 마치고 나니, 이미 새벽 3시가 넘어 있었다.성연신은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어 고청민의 상황을 물어볼까 했지만, 숙면을 방해할까 봐 포기했다.다음 날 아침, 성연신은 일찍 깨어났다. 시계를 보니 6시 30분이었다. 그는 심지안이 오늘 세움의 신제품 출시 준비로 일찍 출근할 거로 생각하고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으려 했다.이때 손이 미끄러져 휴대폰을 바닥에 떨어뜨렸고, 주어 보니 액정이 나가 있었다.갑작스러운 실수에 그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깨진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불안감이 스며들었다.성연신은 다른 휴대폰으로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결국 부재중으로 받지 않았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성씨 가문으로 출발했다.성씨 가문에 도착했을 때, 성동철은 막 깨어나서 정원에서 산책 중이었다.성연신으로부터 두 사람이 지난밤 함께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성동철은 고청민이 출발 직전에 했던 말이 떠올라 이마를 찡그렸다.‘그 녀석이 설마...’성연신은 성동철의 표정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급하게 물었다.“어르신, 혹시 지안 씨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어쩌면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어디죠?”“해외에 있을 가능성이 크네.”성연신은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무슨 말씀입니까?”성동철은 고청민이 출발 전에 했던 특별한 부탁을 성연신에게 말해주고, 동시에 고청민에게 전화를 걸었다.성연신은 주먹을 꽉 쥐고 심지안에게 계속 전화를 걸었다. 한참의 신호음 끝에 전화가 연결되었다.“지안 씨, 어디에 있어요?”“성연신 대표님, 접니다.”고청민의 평온한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고, 성연신의 신경을 자극했다.성연신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이 자식아, 지안 씨를 어디로 데려간 거야?”“우리는 해외에 있어요. 안전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고청민은 계속해서 말했다.“지안 씨를 며칠만 빌리는 셈이에요. 너무 무리한 일은 하지 않을 테니, 흥분하지 마세요
“네. 할아버지, 그러니 제발 막지 말아 주세요.”“지금 나와 상의하는 게 아니라 통보하는 거구나!”“할아버지, 용서해 주세요.”성동철은 입을 열었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한순간에 십 년은 늙은 것처럼 보였고, 무력한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았다.한참 후에야 그는 천천히 말했다.“해외 전문가와 이미 연락을 취했으니, 너는 안심하고 치료에 전념해라. 우리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고청민은 그의 고집을 읽고 눈을 깜빡였다. 긴 속눈썹이 갑자기 젖어 들었다.사실, 그도 할아버지와 몇 년 더 함께하고 싶었다.집에 돌아오니, 성동철이 연락한 해외 전문가로부터 답변이 도착해 있었다. 그들은 신의라 불리는 의사가 이미 고청민을 치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자신들이 개입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고청민은 낙담하지 않고 오히려 성동철을 안심시키며 주제를 돌렸다.“할아버지, 해외로 며칠 다녀오고 싶어요. 오랫동안 여행을 못 갔어요.”“안 돼. 네 몸 상태로는 그렇게 멀리 갈 수 없어!”성동철은 단호히 거절했다. 그는 아직 민채린의 스승에게 도움을 청해 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그러나 고청민은 말했다.“민채린이 해외에 있어요. 그녀가 옆에 있으면 할아버지도 안심하실 거예요.”“민채린?”성동철의 얼굴에 희미한 희망의 빛이 떠올랐다.“그렇다면 민채린의 스승에게 직접 찾아갈 수 있는 거니?”“제 병에 대해 이미 채린이의 스승님께 여쭤봤어요.”“결과는 어땠니?”“스승님께서 알려줄 수 있는 것은 모두 알려 주셨어요. 하지만 정말 치료하기 어려운 병이래요.”성동철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실망을 느꼈다.결국, 그는 손을 흔들며 말했다.“그래. 가고 싶다면 가도 좋아. 다른 환경에서 지내는 것이 네 몸에도 좋을 거다.”게다가 민채린이 옆에 있으니, 문제가 생기더라도 신속히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오늘 바로 떠나려고 해요.”“이렇게 갑자기?”“그냥 즉흥적으로 생각한 거예요. 가고 싶을 때 가야죠.”고청민은 말하며 눈치를 보지 않았다
30분 후, 성동철과 고청민이 병실에서 나왔다. 성동철은 걱정스럽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의사가 병원에 며칠 더 있으라 했잖니? 왜 말을 안 들어? 적어도 또 무슨 일이 생기면 이렇게 급하게 서두르지 않아도 되잖아. 치료 시간을 늦출 수도 있다고...”고청민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창백한 얼굴은 햇살처럼 부드러워 보였다.“괜찮아요. 집에 있는 의료 장비로도 충분해요.”성동철은 한숨을 쉬며 더 이상 고집하지 않았다.‘집에 있는 것도 나쁘지 않지. 집에 있으면 이 녀석을 더 볼 수 있잖아...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일이고...’성동철은 운전기사에게 차를 병원 앞에 대라고 지시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그는 병원 입구의 벤치가 비어 있는 것을 보고 주변을 둘러보며 의아해했다.“지안이 여기 앉아 있지 않았니? 어디 갔지?”고청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고운 속눈썹은 한껏 아래로 드리워 있었다. 눈에 감춰진 복잡한 감정이 보이지 않게 덮여 있는 것 같았다.“그리고 지원이도 보이지 않네. 네가 전화를 걸어 연락해 봐. 이제 집에 가야 한다고...”성동철은 난처한 표정으로 고청민에게 말하며,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전화는 계속 부재중이었다.고청민은 하지원에게 전화를 걸지 않고 바로 말했다.“지원이 오빠가 찾으러 왔어요. 아마도 지안 씨는 갑자기 일이 생겨서 간 것 같아요. 저희 먼저 집에 가죠.”성동철은 방금 의사가 자신에게 따로 했던 말들이 머릿속에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빨리 집에 가서 외국의 의료 전문가들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그래. 우리라도 먼저 가자.”‘성연신이 지안이를 데려갔을 수도 있어. 어쨌든 지안이는 다 큰 어른이니까 큰 문제는 없을 거야.’넓은 승용차 안에서, 고청민이 갑자기 성동철에게 말했다.“할아버지, 제가 죽으면 제 심장을 지원이에게 주세요.”어차피 죽으면 남겨둘 이유가 없으니, 필요한 사람에게 주는 것이 덕을 쌓는 일일 것이다.성동철은 얼굴빛이 변하며 호통쳤다.“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심지안은 차가운 눈빛으로 하지원을 바라보며 말했다.“모든 사람이 자기를 좋아하지도 않는 상대방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인생을 바칠 수 있는 것은 아니야.”심지안은 사랑의 위대함에 감탄했지만, 그런 희생정신을 가질 수는 없었다.하지원은 심지안의 말을 정확하게 알아듣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왜냐하면 난 인간미가 있고, 지안 씨는 없으니까요. 임시연이 당신 앞에서 죽었을 때, 살아있던 한 생명이 죽었는데도 지안 씨는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사람인 것처럼 무관심했잖아요.”심지안은 갑자기 고개를 들어 지금까지의 무심한 태도를 거두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하지원을 쳐다보며 목소리를 높였다.“맞아요. 임시연은 내 아이를 훔치고, 내 남자를 빼앗고, 내 결혼을 망쳤어요. 게다가 여러 번 나를 죽이려고 했었죠. 이번에 죽은 사람이 임시연이 아니었다면, 다음번에 죽을 사람은 나일 수도 있어요. 지금 임시연이 죽어서 폭죽이라도 터뜨리고 싶은 마음이니까, 자기 일 아니라고 그런 쉬운 소리 하지 마세요!”처음에는 임시연의 죽음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곧 심지안은 깨달았다. 임시연의 죽음은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으며, 그녀는 죽어 마땅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임시연은 살아서 더 많은 사람을 해치려 했기에 어쩌면 이렇게 죽는 것이 더 나은 상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원은 심지안의 큰 목소리에 깜짝 놀라 얼굴이 창백해졌고, 잠시 말을 잃었다.“지원 씨는 사랑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난 아니에요. 날 냉정하다고 생각해도 좋아요.”심지안은 하지원과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하지원도 불쌍한 사람일 뿐이었다. 심지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로 들어가려 했다. 한 발을 내딛자, 하지원이 다시 말을 걸었다.“정말로 청민 선배를 도와줄 생각이 없는 거예요? 사람 하나 구한다고 생각해 줘요... 평생 고마워할게요.”심지안은 잠시 멈칫했지만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그건 도움을 청하는 게 아니라 도덕적 강요에요.”심지안은 친구로
성동철은 깜짝 놀라 지팡이도 잊은 채 급히 움직였다. 카펫에 걸려 넘어질 뻔했지만, 한순간도 지체하지 않고 휘청거리며 2층으로 올라갔다.집사는 구급차를 부르기 위해 전화를 걸었고, 남은 하인들은 손님들을 휴식 공간으로 안내했다. 연회 내내 활기찼던 분위기가 갑자기 혼란스럽고 긴장된 분위기로 바뀌었다.심지안은 찡그린 얼굴로 성동철의 뒤를 따라 고청민의 방으로 들어갔다.커튼은 빛 한 줄기도 들어오지 못하게 꽉 닫혀 있었지만, 문을 열자 짙은 피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하인이 먼저 한 발 앞으로 나서서 전원 스위치를 켜자, 방 안은 갑자기 밝아졌다.우드톤 가구들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옷들도 정리되어 소파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심지안은 방 안을 둘러보았지만, 고청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심지안은 약간 열려 있는 화장실 문을 바라보며, 눈빛이 어두워졌다.이때, 하지원이 화장실을 가리키며 말했다.“안에 있어요.”성동철은 떨리는 손으로 화장실 문을 열었다. 안은 엉망진창이었다. 바닥에는 붉은 핏자국이 가득했다.고청민은 욕조 안에 누워 있었다. 옷은 물에 젖어 축축하게 몸에 붙어 있었고, 두 손은 욕조 가장자리에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머리는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고, 입가에는 피가 묻어 있어 원래 창백한 피부가 더욱 하얗게 보였다.고청민은 말라비틀어진 채 생기가 전혀 없는 모습이었다.성동철은 이마에 땀을 흘리며 손가락을 고청민의 코 밑에 대어 보았다. 그는 길게 숨을 내쉬며 하인들에게 소리쳤다.“구급차가 일찍 도착할 수 없을지도 모르니, 빨리 차에 태워서 병원으로 데리고 가!”하인들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럽게 고청민을 욕조에서 꺼냈다.심지안은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겁에 질린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심장이 빨리 뛰었다. 그녀는 혼이 나간 하지원을 바라보았다.“청민 씨... 어쩌다 이렇게 된 거죠? 왜 이렇게 피를 많이 흘린 건가요?”이 상황이 마치 자살을 암시하는 것 같았지만, 하지원은 그 말을 입 밖에
심지안은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했다.“말 좀 해봐요. 정말 시연 씨가 죽길 바란 거예요? 시연 씨가 죽으면 속 시원할 것 같았냐고요!”변석환은 심지안에게 소리쳤다. 울부짖는 변석환의 두 눈은 심하게 충혈되어 무섭게 보였다. 그리고 그의 큰 목소리는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변요석과 성연신이 먼저 달려왔다. 성연신은 심지안을 보호하며 변석환을 몇 걸음 뒤로 밀어냈다. 성연신의 행동은 냉담하면서도 약간의 분노가 섞여 있었다.“지안 씨 앞에서 임시연 그 여자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마. 다시 한번 실수하면 내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하하하! 살인범을 감싸고 도는 건가요?”변석환이 큰 소리로 웃으며 말을 이었다.“맞아요. 시연 씨의 죽음에는 당신과 심지안 씨도 책임이 있어요.”“퍽!”변요석은 변석환의 얼굴을 한 대 때렸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정신 차려. 임시연은 원래 죽어 마땅한 여자야! 더 이상 나를 창피하게 만들지 마!”변석환은 변요석을 바라보며, 맞은 얼굴을 손으로 문지르며 중얼거렸다.“원래 죽어야 했고... 맞아... 나를 속이고 이용했어... 죽어 마땅한 여자야...”하지만 변석환은 스스로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잠을 잘 수도, 밥을 먹을 수 없었다.임시연이 죄를 지었음을 알고 있었지만, 변석환은 여전히 너무나도 힘들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녀를 미워하면서도 그녀가 죽기를 바라지 않았다.변요석은 주변에 지켜보는 눈이 많다는 것을 의식하며 분노를 억누르고 변석환에게 경고했다.“지금 당장 성씨 가문을 떠나. 네가 정신 차리고 지안 씨에게 사과할 준비가 되면... 그때 돌아와.”변석환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 비틀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순간, 사람들 사이로 문득 익숙한 그림자를 본 것 같았다.변석환은 그 그림자를 쫓아갔지만,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변석환은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었고, 그제야 그것이 자신의 착각임을 깨달았다.살아 있는 사람은 죽은 사람보다 더 큰 고통을 겪는다. 임시
자책하는 심지안을 보는 성연신은 가슴이 아픈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당연히 아니죠. 임시연의 죽음은 지안 씨와 아무 상관없어요. 그러니까 혼자 그런 생각 하지 마요.”심지안도, 성연신도, 그 누구도 임시연이 거기서 뛰어내릴 거라고는 생각 못 했을 것이다.임시연이 심지안 앞에서 그리고 성원 그룹에서 죽은 건 심지안과 성연신에게 트라우마를 남겨주기 위해서였다.만약 제가 잘못되어 죽는다 해도 살아있는 사람들도 마음이 편하진 않을 테니까 그걸 노리고 뛰어내렸던 것 같다.성연신도 놀라긴 했지만 직접 본 게 아니니 그리 큰 충격은 받지 않았는데 문제는 심지안이었다.물론 임시연도 죽을 줄은 모르고 뛰어내렸겠지. 그냥 크게 다쳐서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게 감옥에 있는 것보단 나으니까 뛰어내린 걸 텐데 이렇게 죽어버려서 심지안만 힘들어하고 있었다.심지안은 공허한 눈으로 성연신을 보며 웃어보려 했지만 표정이 잔뜩 굳어있어서 웃는 게 우는 것보다 더 이상했다.“당신 말이 맞아요. 임시연은 천벌 받아서 죽은 건데 내가 기뻐하는 게 맞죠.”“그래요, 안 뛰어내렸어도 경찰한테 잡혀서 자유롭진 못했을 거예요.”성연신은 심지안의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내가 지안 씨더러 임시연 잡아놓으라고 한 거잖아요. 귀신이 되어도 날 찾아올 거니까 지안 씨는 아무 걱정 하지 마요.”그때 오지석이 사실은 사람들을 데리고 올라오려 했지만 임시연이 미리 눈치를 채고 송준에게 도움을 청할까 봐 성연신이 말렸었는데 임시연이 이렇게 극단적인 사람인 줄 알았더라면 심지안을 절대 혼자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알겠어요.”긴장이 풀렸는지 심지안이 눈을 살짝 감으며 말했다.“나 아까 제대로 못 쉬어서 좀 잘래요.”“그래요, 내가 옆에 있을게요.”“네, 할아버지랑 우주한테는 나 병원에 있단 말 하지 마요.”“네.”가족들이 괜히 걱정할까 봐 신신당부를 하고서야 심지안은 침대에 누웠다.제 앞에 앉아있는 듬직한 성연신을 보니 안심이 되는지 그렇게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한편 성연신은
그렇게 회의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누구는 임시연을 구하겠다고 1층으로 달려 내려가고 누구는 창가에 기대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아직 살아있어요!"그 모습을 보고 있던 심지안은 사람들의 인영이 환영처럼 눈 앞을 스쳐지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머리도 어지럽고 귀에 까지 이명이 들려 온 세상이 흐릿하게 보였다.임시연이 뛰어내리는 결말을 예상해본적은 없었는데, 3층이 아주 높진 않지만 그렇다고 낮은 층수도 아니었다.조금 정신을 차린 심지안은 사람들의 질책이 담긴 시선을 느꼈다. 그들은 저들끼리 수군대며 심지안을 힐끔힐끔 보고 있었다."사모님도 너무 하시지, 어떻게 사람을 뛰어내릴 때까지 몰아붙여? 저러면 밤에 악몽 안 꾸나?""그리고 왜 자꾸 연다빈 씨한테 임시연이라고 하는 거야? 너무 간 거 아니야?""다빈 씨가 죽기라도 하면 어떡해? 그럼 사모님이 살인자 되는 거야?""다빈 씨가 귀신 돼서 사모님한테 복수하겠다고 찾아올 것 같아요."그 말을 듣고 있던 심지안은 이마에 힘을 주며 소리질렀다."내가 몰아붙인 거 아니고 본인이 뛰어내린 거야. 나랑 상관 없다고."심지안의 호통에 수군거림은 사라졌지만 그녀를 보는 시선은 여전히 매정했다.다들 "연다빈"에게 일이 생기면 심지안 책임으로 돌릴 준비가 되어있는 듯 싶었다.심지안은 애써 심호흡을 하며 현기증을 이겨내려 했다. 그리고 구급차를 부르려고 뒤를 돌 때 마침 이곳으로 뛰어오는 성연신과 오지석을 발견했다.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는 성연신이 빠르게 다가와 심지안의 어깨를 잡으며 주드럽게 다독였다."괜찮아, 내가 왔잖아. 내가 알아서 할게."속눈썹이 떨릴 정도로 긴장하고 있던 심지안은 마침 다가오는 성연신을 보고 무슨 말이 라도 하려고 입을 벌렸지만 말을 채 내뱉기도 전에 다리에 힘이 풀리며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시간이 조금 흘러 심지안이 눈을 뜬 곳은 병원이었다.흰 벽과 소독약 냄새, 그리고 핸드폰에서 흘러나오는 성원 그룹 직원 자살 사건은 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