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만해. 할 얘기 있으면 돌아가서 해.”옆에 있던 오지석이 앞으로 다가와 두 사람을 말리며 얼른 헬기에 오르라고 했다.“깊은 산속이니 짐승이 출몰할지도 몰라.”심지안을 껴앉고 싶었던 성연신은 고청민의 훼방에 어쩔 수 없이 생각을 접게 되었고 아무 말도 없이 헬기에 탑승하였다. 심지안은 상황에 대해 설명하면서 간단히 치료를 받았다. 다행히 피부 외상만 있을 뿐 다른 데는 전혀 이상이 없었다. 의료진의 그 말을 들은 성연신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그러나 마취제를 맞은 탓에 피검사를 했고 경찰들은 내일쯤 결과를 알려준다고 하면서 그들에게 연락처를 남기라고 했다. 바로 이때, 오지석은 헛기침했다.“고청민 씨는 내가 바래다줄 테니까 연신이 넌 지안 씨 데리고 가서 어르신께 안부 전해드려.”그 말에 심지안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할아버지께서도 아셨어요? 할아버지께서 병도 있으신데...”“그러니 어르신께서 걱정하시지 않게 안부 전해드려야죠.”오지석의 말에 심지안은 안색이 어두워진 채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옆에 있던 고청민은 저도 모르게 차갑게 웃었다. ‘안부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지안 씨랑 같이 있고 싶어서 이러는 거 아니야?’그러나 그는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아직은 심지안의 사생활에 관여할 입장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입을 굳게 다물었다. 성씨 가문의 본가.서백호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심지안을 쳐다보았다.“지안 씨, 어떻게 된 거예요? 왜 이리 낭패한 꼴로...”“혹시 할아버지께서 아무것도 모르고 계시는 거예요?”미간을 찌푸리며 묻는 그녀의 말에 서백호는 더 어리둥절해졌다. “무슨 말이에요?”“성연신 씨, 지금 나 속인 거예요?”“당신을 속인 건 오지석이지 내가 아니에요.”“옆에서 말리지도 않았잖아요!”성연신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담담하게 말했다.“당신이 오고 싶어 하는 걸 내가 왜 말리겠어요?”한편, 서백호는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을 보고 이내 핑계를 대고는 자리를 떴다.“나더러 지금 여기서 하룻
그의 격렬한 키스에 심지안은 몸조차 제대로 가눌 수가 없었다. 왠지 모르게 매번 그와 키스할 때마다 그녀는 전혀 반항할 힘조차 없었다. 스킨십에 노련한 성연신은 단번에 그녀를 리드하기 시작했고 두 사람은 뜨거운 키스를 나누며 침실로 향했다. 몸이 폭신한 침대에 맞닿은 순간 갑자기 어젯밤 꿈이 생각난 그녀는 정신이 번쩍 들었고 이내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를 밀쳐냈다. “안 돼요. 나 건드리지 말아요.”그전에 있었던 잠자리는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거절할 수 있는 것이니 마땅히 거절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인간으로서 윤리는 지켜야 하니까.한편, 성연신은 뜨거운 눈빛으로 그녀를 빤히 쳐다보며 그녀의 입술을 어루만졌다.“당신 참 솔직하지 못해.”그녀는 눈빛이 흐린 채 그를 쳐다보며 숨을 가다듬고 있었다. “네?”“적극적으로 내 키스를 받아들인 건 당신 아니었어요?”입은 거짓말을 할 수 있지만 몸은 정직한 것이다. 그녀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 그를 노려보다가 이내 수줍게 그의 시선을 피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요. 인제 그만 자야겠어요.”“불은 당신이 질렀으니 당신이 꺼야 하지 않겠어요?”그의 뜨거운 눈빛에는 그녀에 대한 욕망이 가득 차 있었다. 심지안에게 왜 이렇게 반하게 되었는지, 왜 이렇게 그녀를 안고 싶어 안달이 났는지 그조차도 알 수가 없었다. 그의 시선에 심지안은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어떻게 된 거지? 이 사람에 대해 미련조차 없는데 왜 이런 느낌이 드는 거야?’“지안 씨, 고청민 씨한테서 전화 왔습니다.”문밖에서 들려온 하인의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든 심지안은 그의 품속을 빠져나왔다. 성연신은 아래층에서 전해진 목소리를 듣고는 눈빛이 차갑게 돌변했다. ‘고청민 이 인간. 분명 일부러 이러는 걸 거야! 진현수가 떨어져 나가니 이젠 이 인간까지!’바보 같은 이 여자가 남자를 홀리는 데 타고난 재능이 있는 게 분명한 것 같다. “지안 씨, 자고 있었던 거예요? 내가 방해한 건 아니겠죠?” 전화
심지안은 아침을 한 상 가득 차렸다. 두유, 샤오룽바오 같은 중식도 있었고 과일 주스, 샐러드, 연어구이, 베이컨과 커피 같은 양식도 있었다. 가끔 서백호도 함께 식사하기 때문에 그녀는 조금 더 만들었다. 성수광은 샤오룽바오를 맛있게 먹었다. 그러나 성연신과 그녀한테 단둘이 있을 기회를 만들어 주고 싶었던 그는 하인에게 아침을 위층으로 가져다 달라고 명했다. 성연신은 오랜만에 그녀가 만든 아침을 먹었다. 겉으로는 아무 내색 하지 않았지만 사실 맛있어서 꽤 많이 먹었다. 몇 숟가락 뜨던 심지안은 갑자기 속이 울렁거려 젓가락을 놓고 주방으로 들어가 과일을 찾았다.“연신 오빠!” 애교 섞인 목소리와 함께 공주 치마를 입고 깡충깡충 뛰어 들어오는 고연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주방에서 포도를 먹고 있던 심지안은 주방에서 나갈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곧 떠나는 마당에 성연신의 여자 문제에 개입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성연신은 고개를 들고 차갑게 입을 열었다.“무슨 일이야?”“냄새 좋은데요. 급하게 오느라 아침도 먹지 못했어요... 같이 먹어도 돼요?”고연희는 냄새를 맡으며 납작한 배를 어루만졌다. 그 말에 심지안은 안색이 조금 어두워졌다.그녀가 아침을 준비한 건 늘 그녀에게 다정한 성수광과 어제 그녀를 구해준 성연신에게 고마움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하여 그녀는 힘들게 만든 아침을 고연희가 먹는 게 내키지 않았다. 그러나 여긴 성연신의 본가이고 그가 원한다면 그녀도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 성연신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연희를 거절했다.“안돼, 먹고 싶으면 셰프님한테 만들어 달라고 해. 테이블 위에 있는 음식들 건드리지 마.”그 말에 심지안은 눈을 깜빡이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양심은 있네.’“알았어요. 안 먹을게요. 근데 오빠 어제는 무슨 일 있었어요?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얘기해요.”“뭐?”“어제 단체 채팅방에서 오빠가 헬기를 타고 나갔다는 소식을 봤어요.”긴급할 상황이 아니라면 헬기를 띄우는 일은 거의 없었
성연신은 어깨를 들썩이며 담담하게 말했다.“사실이야.”“연신 오빠, 이 여자한테 너무 잘해주는 거 아니에요?”그녀는 큰 충격에 빠진 듯 믿을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얼마나 급한 일이길래 헬기까지 운전한 거야? 오빠가 이 여자를 엄청 좋아하나?’“잘해주는 게 아니라 난 단지 경찰 쪽의 체면을 생각해 도와준 것뿐이야.”“경찰이요?”그의 말에 고연희는 입을 삐죽거렸다.“거짓말하지 말아요. 오빠가 무슨 좋은 시민도 아니고. 그리고 경찰 쪽에서 부탁한 거라면 그냥 헬기만 빌려줬어도 되잖아요. 굳이 오빠가 직접 갈 필요 있었어요? 이 여자 때문에 간 거잖아요!”웬일인지 그는 고연희의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어린애는 어른의 마음을 알려고 하지 마.”“그래요. 오빠는 단지 도움을 준 것뿐이죠. 나라를 위해 헌신한 거고 그 누구 때문도 아니에요.”고연희는 비꼬는 말투로 심지안을 향해 입을 열었다.“그쪽이 도대체 뭐가 특별한 거예요?”“특별한 게 없는데요. 난 그냥 보통 사람일 뿐이에요.”심지안은 성씨 가문의 친척인 오지석이 한 부탁을 성연신은 모른 척할 수 없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또한 어쩌면 성연신이 자신을 조금 걱정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안이 감추는 게 있다고 생각한 고연희는 그녀를 끌고 밖으로 걸어갔다. “잠깐 얘기 좀 해요. 할 말이 있어요.”심지안은 고연희가 자존심이 강한 부잣집 아가씨일 뿐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해 그녀를 따라 정원으로 갔다. “말해봐요. 연신 오빠의 마음을 어떻게 사로잡은 거예요? 그 비법 내가 돈으로 살게요.”“사겠다고요? 얼마 줄 수 있는데요?”“나 돈 많아요. 연신 오빠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좋아요!”“그거 알아요? 당신의 연신 오빠한테 아이가 생겼다는 사실.”“아이요?”“연신 씨와 임시연 씨 사이에 아이가 생겼어요.”그녀의 말에 고연희는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임시연 그 여우 같은 여자가 돌아왔단 말이에요?”“임시연 씨 알아요?”“진작부터 알고 있었죠
“아니요...”“거짓말이죠. 오빠는 보통 친구를 집에 들이지 않는 사람이에요.”“그렇다면요. 어쩔 생각인가요?”‘나한테 복수라도 할 생각인가?’“오해하지 말아요. 연신 오빠의 전처를 찾아 우리 셋이 함께 임시연을 쫓아내요!”심지안은 한참 동안 고연희를 쳐다보다가 갑자기 크게 웃었다.“연신 씨 전처는 아마 당신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거예요.”“시도 안 해보고 어떻게 알아요?”“시도해 볼 필요 없어요. 내가 바로 그 전처이니까.”심지안은 고연희의 어깨를 토닥이며 피식 웃었다. 그 말에 당황한 고연희는 얼굴이 차갑게 변하였다.“처음부터 날 놀린 거예요?”“아니요. 난 처음처럼 당신이랑 엮이고 싶지 않았어요.”말을 마친 그녀는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근데 뜻밖에도 고연희가 그녀의 뒤를 따라 방 안으로 들어왔다.그녀는 엄숙한 표정을 지은 채 진지하게 말을 꺼냈다.“우리 함께 힘을 합쳐서 임시연을 쫓아내요. 당신한테서 연신 오빠 뺏을 생각은 없어요.”“그럼 당신이 원하는 건 뭐예요?”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묻는 심지안의 말에 고연희는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난 연신 오빠가 행복하길 바랄 뿐이에요. 그거면 난 만족해요.”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한다면 그 어떤 것도 바라지 않는 것이다. 그 사람만 행복하다면 뭐든 다 좋으니까. 잠시 침묵하던 심지안이 입을 열었다.“미안해요. 난 이미 연신 씨와 끝난 사이에요.”“아니요. 끝났다는 건 다시는 연락하지도 만나지도 않는다는 거예요. 그러나 난 지난번 할아버지 생신 연회에서 당신을 봤어요. 그게 우연이라면 어젯밤 오빠가 왜 그리 급히 당신을 찾으러 갔겠어요?”그 말에 흠칫한 심지안은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그건 경찰들을 도우려고 그런 거예요.”“그쪽 생각에 오빠가 아무 사람이나 도와주는 착한 사람 같아요? 어젯밤에 전혀 감동받지 않은 거예요? 언니, 행복은 스스로 쟁취하는 거예요. 임시연 그 여자는 여우 같은 여자예요. 절대 이 집안에 들일 수 없어요!”“아니요. 어찌 됐든 우
성수광은 차갑게 웃었다.“이유 없이 어찌 대가를 받겠나. 자네의 선물은 받을 수가 없네.”“할아버지, 그런 말씀 마세요. 이건 제가 할아버지께 효도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거예요.”“자네가 무슨 자격으로 나한테 효도를?”임시연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계속해서 선물을 손에 들고 있었다.“할아버지, 할아버지께서 절 마음에 들어 하시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어요. 예전에 제가 했던 일들은 어쩔 수 없었던 거예요. 저도 먹고살아야 했으니까.”“연신이 그놈도 없는 자리에서 불쌍한 척 연기 하지 말거라. 나한테는 전혀 소용없으니까.”성수광은 차갑게 콧방귀를 끼었고 그녀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임시연은 낮은 목소리로 울먹이며 말을 이어갔다.“불쌍한 척하는 게 아니에요...”아무리 공부를 잘했다 하더라도 그녀는 여전히 시골 출신이고 내세울 집안이 없는 여자였다. 뼛속까지 궁핍한 시골 사람의 신분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녀는 애써 상류층 사람들의 비위를 맞췄고 더 열심히 살 수밖에 없었다. ‘내가 한 노력은 마땅히 칭찬받아야 하는 것이지 비난받을 일이 아니야.”한편, 성수광은 그녀를 차갑게 노려보며 말을 꺼냈다.“지안이를 납치한 건 네가 한 짓이냐?”“지안 씨가 납치됐어요? 어떻게 그런 일이... 지금은 어떻게 됐어요? 무사한가요?”그녀는 경악한 표정을 지으며 다급히 되물었다.“거짓말하지 마. 네가 한 짓이라는 걸 난 알고 있다.”임시연은 주먹을 불끈 쥔 채 눈물을 흘렸다.“할아버지, 제가 아무리 마음에 안 드셔도 저한테 누명을 뒤집어씌우면 안 돼죠. 제가 어찌 감히 그런 천리에 어긋나는 일을 할 수 있겠어요?”“증거까지 내놓아야 인정할 것이냐?”그 말에 마음이 덜컥 내려앉은 임시연은 저도 모르게 식은땀을 흘렸다.‘아니야, 늙은이한테 증거가 있을 수 없어. S 그 사람이 이렇게 쉽게 노출될 일은 없다고. 분명 날 떠보고 있는 것이겠지.’“제가 하지도 않은 일에 증거라니요?”그녀의 표정 변화를 눈치챈 성수광은 엄숙하게 되물었다.“배후를 밝히
정장을 입고 온 심지안은 골프장에 도착해 탈의실로 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블랙 컬러의 슬림하고 스포티한 원피스는 그녀의 늘씬한 몸매를 더 돋보이게 만들었고 훤히 드러난 하얗고 매끄러운 팔은 사람들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심지안은 거울을 보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사실 그녀는 골프를 잘 치지 못하지만 어떤 자리에서 어떤 옷을 입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고 상대방의 취미를 존중할 줄 아는 센스도 가지고 있었다. 여자 탈의실을 나와 남자 탈의실을 지나칠 때 그녀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주 대표님인 것 같은데...’발걸음을 멈추고 잠깐 서 있자 주 대표가 주원재를 데리고 안에서 걸어 나왔다. 환하게 웃으며 다가가 인사를 건네려고 할 때 그녀는 두 사람의 뒤에 서 있는 한 남자를 발견하게 되었다.세련된 옷차림을 하고 있는 성연신은 귀티가 넘쳐흘렀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자 그의 검은 눈동자가 살짝 떨리더니 이내 아무렇지 않은 듯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렸다.어떻게 인사를 건네야 할지 몰랐던 심지안은 그 자리에서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두 사람을 쳐다보던 주 대표가 먼저 입을 열었다.“혼자예요? 우리랑 같이 칠래요?”“아니요. 사업 파트너와 함께 왔어요.”옆에 있던 주원재가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어느 구역으로 갈 건데?”심지안은 솔직하게 대답하고는 이내 자리를 떴고 파트너를 찾으러 갔다. 그녀의 파트너는 유정호라는 사람이었다. 그녀를 본 유정호는 눈빛을 반짝였다.“역시 세움의 모델은 뭐가 달라도 다르네요! 정말 예쁘시네요!”그 말에 심지안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과찬이세요. 일단 사업 얘기부터 할까요? 아니면 골프부터 칠까요?”“당연히 공부터 쳐야죠. 골프 칠 줄 알아요?”유정호는 골프채를 그녀에게 건네주며 입을 열었다.“조금요. 잘 치지는 못해요.”“자자자, 내가 가르쳐줄게요.”말을 마친 그가 그녀의 뒤로 다가가 그녀를 안았다. “아니요!”심지안은 이내 그를 밀어내고 뒤로 두 걸음 물러나 그와 거리를 유지했다
“아니야, 난 모르는 사람인데.”그리고 성연신이 불편했던 그녀는 단번에 거절했다.“괜찮아, 채영이 까칠한 사람 아니야. 가자. 내가 방금 유정호도 쫓아내 줬잖아. 그러니까 네가 날 좀 도와줘.”주원재는 결국 심지안을 끌고 갔다. 한편, 주 대표와 성연신은 한창 골프를 즐기고 있었고 그 옆에는 약간 통통한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160CM 쯤 되어 보이는 키에 통통한 몸매, 하얀 피부를 가지고 있는 그녀는 한눈에 봐도 귀티 나는 부잣집 딸 같아 보였다. 심지안은 성연신의 옆으로 가서 앉았고 그런 그녀를 성연신은 뚫어지게 쳐다보았다.그러나 그녀가 입을 열려고 할 때 성연신은 차갑게 시선을 거두고 그녀에게 말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주 대표와 성연신은 비즈니스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고 그 사업에 관한 관여하고 싶지 않았던 그녀는 조용히 옆에서 듣고만 있었다.그러나 주 대표는 그녀를 끌어들일 생각인지 가끔 그녀의 의견을 물었다. 심지안은 완곡하게 그를 거절했다. 돈도 없고 인맥도 없는 자신이 이런 사람들 사이에 끼는 게 자격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주 대표는 성연신이 그녀를 도와줄 생각이 없어 보이자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한 시간 동안, 쌀쌀맞은 성연신과는 달리 주원재와 박채영은 끊임없이 그녀에게 말을 걸어왔다. “지안 씨가 왠지 모르게 낯이 익어요. 내가 알고 있는 어떤 아줌마와 많이 닮은 것 같은데.”박채영은 두 손으로 오동통한 얼굴을 받들고 심지안을 쳐다보았다. “푸흡. 요즘 사람들이 자꾸만 내가 누구랑 닮았다고 하던데. 내가 흔한 얼굴이라서 그런 가 봐요.”심지안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이에요. 성동철 할아버지의 따님과 많이 닮았어요. 그분 사진 본 적 있거든요.”주원재는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많이 닮았어?”“많이 닮은 건 아닌데. 눈매랑 얼굴형이 많이 닮았어.”박채영은 궁금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두 사람 혹시 먼 친척 사이 아니에요?”‘먼 친척 사이라...’심지안은 흠칫했다. ‘엄
흥분을 가라앉힌 후, 심지안은 자신이 5년 전 해외에서 살았던 작은 별장과 흡사한 곳에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외부 경관이 달라 의아해하며 말했다.“5년 전과 똑같은 별장을 지었어요?”고청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짓다가 기침을 몇 번 하며 대답했다.“맞아요. 거의 차이가 없죠?”심지안은 방 안의 모든 물건을 둘러보며 고청민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조금 부드러워졌고, 마치 그를 가족으로 생각했던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어떻게 하지원을 설득했어요?”그녀는 고청민이 하지원을 이용하여 완벽한 알리바이를 만든 것에 의아함을 감추지못했다.“한마디 했더니 바로 승낙했어요.”고청민은 미소를 지었다.하지원은 이처럼 온 마음을 다해 고청민을 따랐다.심지안은 복잡한 마음으로 물었다.“하지원 씨에게 미안하지 않아요?”고청민은 아무런 감정 없이 말했다.“보상해 줄 거예요.”‘보상? 어떻게 보상할 건데? 여자의 청춘을 어떻게 보상할 건데...’심지안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반박하지 않았다.하지원에게는 그저 사랑이었으니까...“밤새 아무것도 안 먹어서 배고프죠? 지안 씨가 좋아하는 비빔면을 준비해 뒀어요. 게살 비빔면이요.”고청민은 웃으며 심지안에게 말했다.“지안 씨가 분명 좋아할 거예요.”심지안은 배가 고파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식탁에 다가가기 전, 그녀는 게살 비빔면의 향긋한 냄새를 맡았다.고청민은 게살 비빔면을 그녀 앞에 놓고 기대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먹어요. 제철 대게는 정말 맛있거든요.”심지안은 망설임 없이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그의 말대로 정말 맛있었다. 커다란 게살이 면과 어우러져 입안 가득 풍미를 더했다.고청민의 뜨거운 시선에 심지안은 불편해하며 말했다.“청민 씨도 먹어요. 나만 보지 말고...”고청민은 미소를 지으며 젓가락을 들어 면을 집어 먹으려 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기침이 그를 멈추게 했다.연달아 몇 번의 기침이 멈추지 않았다. 점차 그의 가냘프고 쇠약한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기침이 점점 심해지자 그
집에 돌아온 후, 성연신은 성우주를 재우고 나서 긴급한 회사 업무를 처리했다. 일을 마치고 나니, 이미 새벽 3시가 넘어 있었다.성연신은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어 고청민의 상황을 물어볼까 했지만, 숙면을 방해할까 봐 포기했다.다음 날 아침, 성연신은 일찍 깨어났다. 시계를 보니 6시 30분이었다. 그는 심지안이 오늘 세움의 신제품 출시 준비로 일찍 출근할 거로 생각하고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으려 했다.이때 손이 미끄러져 휴대폰을 바닥에 떨어뜨렸고, 주어 보니 액정이 나가 있었다.갑작스러운 실수에 그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깨진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불안감이 스며들었다.성연신은 다른 휴대폰으로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결국 부재중으로 받지 않았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성씨 가문으로 출발했다.성씨 가문에 도착했을 때, 성동철은 막 깨어나서 정원에서 산책 중이었다.성연신으로부터 두 사람이 지난밤 함께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성동철은 고청민이 출발 직전에 했던 말이 떠올라 이마를 찡그렸다.‘그 녀석이 설마...’성연신은 성동철의 표정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급하게 물었다.“어르신, 혹시 지안 씨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어쩌면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어디죠?”“해외에 있을 가능성이 크네.”성연신은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무슨 말씀입니까?”성동철은 고청민이 출발 전에 했던 특별한 부탁을 성연신에게 말해주고, 동시에 고청민에게 전화를 걸었다.성연신은 주먹을 꽉 쥐고 심지안에게 계속 전화를 걸었다. 한참의 신호음 끝에 전화가 연결되었다.“지안 씨, 어디에 있어요?”“성연신 대표님, 접니다.”고청민의 평온한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고, 성연신의 신경을 자극했다.성연신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이 자식아, 지안 씨를 어디로 데려간 거야?”“우리는 해외에 있어요. 안전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고청민은 계속해서 말했다.“지안 씨를 며칠만 빌리는 셈이에요. 너무 무리한 일은 하지 않을 테니, 흥분하지 마세요
“네. 할아버지, 그러니 제발 막지 말아 주세요.”“지금 나와 상의하는 게 아니라 통보하는 거구나!”“할아버지, 용서해 주세요.”성동철은 입을 열었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한순간에 십 년은 늙은 것처럼 보였고, 무력한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았다.한참 후에야 그는 천천히 말했다.“해외 전문가와 이미 연락을 취했으니, 너는 안심하고 치료에 전념해라. 우리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고청민은 그의 고집을 읽고 눈을 깜빡였다. 긴 속눈썹이 갑자기 젖어 들었다.사실, 그도 할아버지와 몇 년 더 함께하고 싶었다.집에 돌아오니, 성동철이 연락한 해외 전문가로부터 답변이 도착해 있었다. 그들은 신의라 불리는 의사가 이미 고청민을 치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자신들이 개입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고청민은 낙담하지 않고 오히려 성동철을 안심시키며 주제를 돌렸다.“할아버지, 해외로 며칠 다녀오고 싶어요. 오랫동안 여행을 못 갔어요.”“안 돼. 네 몸 상태로는 그렇게 멀리 갈 수 없어!”성동철은 단호히 거절했다. 그는 아직 민채린의 스승에게 도움을 청해 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그러나 고청민은 말했다.“민채린이 해외에 있어요. 그녀가 옆에 있으면 할아버지도 안심하실 거예요.”“민채린?”성동철의 얼굴에 희미한 희망의 빛이 떠올랐다.“그렇다면 민채린의 스승에게 직접 찾아갈 수 있는 거니?”“제 병에 대해 이미 채린이의 스승님께 여쭤봤어요.”“결과는 어땠니?”“스승님께서 알려줄 수 있는 것은 모두 알려 주셨어요. 하지만 정말 치료하기 어려운 병이래요.”성동철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실망을 느꼈다.결국, 그는 손을 흔들며 말했다.“그래. 가고 싶다면 가도 좋아. 다른 환경에서 지내는 것이 네 몸에도 좋을 거다.”게다가 민채린이 옆에 있으니, 문제가 생기더라도 신속히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오늘 바로 떠나려고 해요.”“이렇게 갑자기?”“그냥 즉흥적으로 생각한 거예요. 가고 싶을 때 가야죠.”고청민은 말하며 눈치를 보지 않았다
30분 후, 성동철과 고청민이 병실에서 나왔다. 성동철은 걱정스럽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의사가 병원에 며칠 더 있으라 했잖니? 왜 말을 안 들어? 적어도 또 무슨 일이 생기면 이렇게 급하게 서두르지 않아도 되잖아. 치료 시간을 늦출 수도 있다고...”고청민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창백한 얼굴은 햇살처럼 부드러워 보였다.“괜찮아요. 집에 있는 의료 장비로도 충분해요.”성동철은 한숨을 쉬며 더 이상 고집하지 않았다.‘집에 있는 것도 나쁘지 않지. 집에 있으면 이 녀석을 더 볼 수 있잖아...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일이고...’성동철은 운전기사에게 차를 병원 앞에 대라고 지시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그는 병원 입구의 벤치가 비어 있는 것을 보고 주변을 둘러보며 의아해했다.“지안이 여기 앉아 있지 않았니? 어디 갔지?”고청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고운 속눈썹은 한껏 아래로 드리워 있었다. 눈에 감춰진 복잡한 감정이 보이지 않게 덮여 있는 것 같았다.“그리고 지원이도 보이지 않네. 네가 전화를 걸어 연락해 봐. 이제 집에 가야 한다고...”성동철은 난처한 표정으로 고청민에게 말하며,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전화는 계속 부재중이었다.고청민은 하지원에게 전화를 걸지 않고 바로 말했다.“지원이 오빠가 찾으러 왔어요. 아마도 지안 씨는 갑자기 일이 생겨서 간 것 같아요. 저희 먼저 집에 가죠.”성동철은 방금 의사가 자신에게 따로 했던 말들이 머릿속에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빨리 집에 가서 외국의 의료 전문가들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그래. 우리라도 먼저 가자.”‘성연신이 지안이를 데려갔을 수도 있어. 어쨌든 지안이는 다 큰 어른이니까 큰 문제는 없을 거야.’넓은 승용차 안에서, 고청민이 갑자기 성동철에게 말했다.“할아버지, 제가 죽으면 제 심장을 지원이에게 주세요.”어차피 죽으면 남겨둘 이유가 없으니, 필요한 사람에게 주는 것이 덕을 쌓는 일일 것이다.성동철은 얼굴빛이 변하며 호통쳤다.“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심지안은 차가운 눈빛으로 하지원을 바라보며 말했다.“모든 사람이 자기를 좋아하지도 않는 상대방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인생을 바칠 수 있는 것은 아니야.”심지안은 사랑의 위대함에 감탄했지만, 그런 희생정신을 가질 수는 없었다.하지원은 심지안의 말을 정확하게 알아듣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왜냐하면 난 인간미가 있고, 지안 씨는 없으니까요. 임시연이 당신 앞에서 죽었을 때, 살아있던 한 생명이 죽었는데도 지안 씨는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사람인 것처럼 무관심했잖아요.”심지안은 갑자기 고개를 들어 지금까지의 무심한 태도를 거두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하지원을 쳐다보며 목소리를 높였다.“맞아요. 임시연은 내 아이를 훔치고, 내 남자를 빼앗고, 내 결혼을 망쳤어요. 게다가 여러 번 나를 죽이려고 했었죠. 이번에 죽은 사람이 임시연이 아니었다면, 다음번에 죽을 사람은 나일 수도 있어요. 지금 임시연이 죽어서 폭죽이라도 터뜨리고 싶은 마음이니까, 자기 일 아니라고 그런 쉬운 소리 하지 마세요!”처음에는 임시연의 죽음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곧 심지안은 깨달았다. 임시연의 죽음은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으며, 그녀는 죽어 마땅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임시연은 살아서 더 많은 사람을 해치려 했기에 어쩌면 이렇게 죽는 것이 더 나은 상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원은 심지안의 큰 목소리에 깜짝 놀라 얼굴이 창백해졌고, 잠시 말을 잃었다.“지원 씨는 사랑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난 아니에요. 날 냉정하다고 생각해도 좋아요.”심지안은 하지원과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하지원도 불쌍한 사람일 뿐이었다. 심지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로 들어가려 했다. 한 발을 내딛자, 하지원이 다시 말을 걸었다.“정말로 청민 선배를 도와줄 생각이 없는 거예요? 사람 하나 구한다고 생각해 줘요... 평생 고마워할게요.”심지안은 잠시 멈칫했지만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그건 도움을 청하는 게 아니라 도덕적 강요에요.”심지안은 친구로
성동철은 깜짝 놀라 지팡이도 잊은 채 급히 움직였다. 카펫에 걸려 넘어질 뻔했지만, 한순간도 지체하지 않고 휘청거리며 2층으로 올라갔다.집사는 구급차를 부르기 위해 전화를 걸었고, 남은 하인들은 손님들을 휴식 공간으로 안내했다. 연회 내내 활기찼던 분위기가 갑자기 혼란스럽고 긴장된 분위기로 바뀌었다.심지안은 찡그린 얼굴로 성동철의 뒤를 따라 고청민의 방으로 들어갔다.커튼은 빛 한 줄기도 들어오지 못하게 꽉 닫혀 있었지만, 문을 열자 짙은 피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하인이 먼저 한 발 앞으로 나서서 전원 스위치를 켜자, 방 안은 갑자기 밝아졌다.우드톤 가구들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옷들도 정리되어 소파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심지안은 방 안을 둘러보았지만, 고청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심지안은 약간 열려 있는 화장실 문을 바라보며, 눈빛이 어두워졌다.이때, 하지원이 화장실을 가리키며 말했다.“안에 있어요.”성동철은 떨리는 손으로 화장실 문을 열었다. 안은 엉망진창이었다. 바닥에는 붉은 핏자국이 가득했다.고청민은 욕조 안에 누워 있었다. 옷은 물에 젖어 축축하게 몸에 붙어 있었고, 두 손은 욕조 가장자리에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머리는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고, 입가에는 피가 묻어 있어 원래 창백한 피부가 더욱 하얗게 보였다.고청민은 말라비틀어진 채 생기가 전혀 없는 모습이었다.성동철은 이마에 땀을 흘리며 손가락을 고청민의 코 밑에 대어 보았다. 그는 길게 숨을 내쉬며 하인들에게 소리쳤다.“구급차가 일찍 도착할 수 없을지도 모르니, 빨리 차에 태워서 병원으로 데리고 가!”하인들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럽게 고청민을 욕조에서 꺼냈다.심지안은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겁에 질린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심장이 빨리 뛰었다. 그녀는 혼이 나간 하지원을 바라보았다.“청민 씨... 어쩌다 이렇게 된 거죠? 왜 이렇게 피를 많이 흘린 건가요?”이 상황이 마치 자살을 암시하는 것 같았지만, 하지원은 그 말을 입 밖에
심지안은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했다.“말 좀 해봐요. 정말 시연 씨가 죽길 바란 거예요? 시연 씨가 죽으면 속 시원할 것 같았냐고요!”변석환은 심지안에게 소리쳤다. 울부짖는 변석환의 두 눈은 심하게 충혈되어 무섭게 보였다. 그리고 그의 큰 목소리는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변요석과 성연신이 먼저 달려왔다. 성연신은 심지안을 보호하며 변석환을 몇 걸음 뒤로 밀어냈다. 성연신의 행동은 냉담하면서도 약간의 분노가 섞여 있었다.“지안 씨 앞에서 임시연 그 여자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마. 다시 한번 실수하면 내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하하하! 살인범을 감싸고 도는 건가요?”변석환이 큰 소리로 웃으며 말을 이었다.“맞아요. 시연 씨의 죽음에는 당신과 심지안 씨도 책임이 있어요.”“퍽!”변요석은 변석환의 얼굴을 한 대 때렸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정신 차려. 임시연은 원래 죽어 마땅한 여자야! 더 이상 나를 창피하게 만들지 마!”변석환은 변요석을 바라보며, 맞은 얼굴을 손으로 문지르며 중얼거렸다.“원래 죽어야 했고... 맞아... 나를 속이고 이용했어... 죽어 마땅한 여자야...”하지만 변석환은 스스로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잠을 잘 수도, 밥을 먹을 수 없었다.임시연이 죄를 지었음을 알고 있었지만, 변석환은 여전히 너무나도 힘들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녀를 미워하면서도 그녀가 죽기를 바라지 않았다.변요석은 주변에 지켜보는 눈이 많다는 것을 의식하며 분노를 억누르고 변석환에게 경고했다.“지금 당장 성씨 가문을 떠나. 네가 정신 차리고 지안 씨에게 사과할 준비가 되면... 그때 돌아와.”변석환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 비틀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순간, 사람들 사이로 문득 익숙한 그림자를 본 것 같았다.변석환은 그 그림자를 쫓아갔지만,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변석환은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었고, 그제야 그것이 자신의 착각임을 깨달았다.살아 있는 사람은 죽은 사람보다 더 큰 고통을 겪는다. 임시
자책하는 심지안을 보는 성연신은 가슴이 아픈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당연히 아니죠. 임시연의 죽음은 지안 씨와 아무 상관없어요. 그러니까 혼자 그런 생각 하지 마요.”심지안도, 성연신도, 그 누구도 임시연이 거기서 뛰어내릴 거라고는 생각 못 했을 것이다.임시연이 심지안 앞에서 그리고 성원 그룹에서 죽은 건 심지안과 성연신에게 트라우마를 남겨주기 위해서였다.만약 제가 잘못되어 죽는다 해도 살아있는 사람들도 마음이 편하진 않을 테니까 그걸 노리고 뛰어내렸던 것 같다.성연신도 놀라긴 했지만 직접 본 게 아니니 그리 큰 충격은 받지 않았는데 문제는 심지안이었다.물론 임시연도 죽을 줄은 모르고 뛰어내렸겠지. 그냥 크게 다쳐서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게 감옥에 있는 것보단 나으니까 뛰어내린 걸 텐데 이렇게 죽어버려서 심지안만 힘들어하고 있었다.심지안은 공허한 눈으로 성연신을 보며 웃어보려 했지만 표정이 잔뜩 굳어있어서 웃는 게 우는 것보다 더 이상했다.“당신 말이 맞아요. 임시연은 천벌 받아서 죽은 건데 내가 기뻐하는 게 맞죠.”“그래요, 안 뛰어내렸어도 경찰한테 잡혀서 자유롭진 못했을 거예요.”성연신은 심지안의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내가 지안 씨더러 임시연 잡아놓으라고 한 거잖아요. 귀신이 되어도 날 찾아올 거니까 지안 씨는 아무 걱정 하지 마요.”그때 오지석이 사실은 사람들을 데리고 올라오려 했지만 임시연이 미리 눈치를 채고 송준에게 도움을 청할까 봐 성연신이 말렸었는데 임시연이 이렇게 극단적인 사람인 줄 알았더라면 심지안을 절대 혼자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알겠어요.”긴장이 풀렸는지 심지안이 눈을 살짝 감으며 말했다.“나 아까 제대로 못 쉬어서 좀 잘래요.”“그래요, 내가 옆에 있을게요.”“네, 할아버지랑 우주한테는 나 병원에 있단 말 하지 마요.”“네.”가족들이 괜히 걱정할까 봐 신신당부를 하고서야 심지안은 침대에 누웠다.제 앞에 앉아있는 듬직한 성연신을 보니 안심이 되는지 그렇게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한편 성연신은
그렇게 회의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누구는 임시연을 구하겠다고 1층으로 달려 내려가고 누구는 창가에 기대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아직 살아있어요!"그 모습을 보고 있던 심지안은 사람들의 인영이 환영처럼 눈 앞을 스쳐지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머리도 어지럽고 귀에 까지 이명이 들려 온 세상이 흐릿하게 보였다.임시연이 뛰어내리는 결말을 예상해본적은 없었는데, 3층이 아주 높진 않지만 그렇다고 낮은 층수도 아니었다.조금 정신을 차린 심지안은 사람들의 질책이 담긴 시선을 느꼈다. 그들은 저들끼리 수군대며 심지안을 힐끔힐끔 보고 있었다."사모님도 너무 하시지, 어떻게 사람을 뛰어내릴 때까지 몰아붙여? 저러면 밤에 악몽 안 꾸나?""그리고 왜 자꾸 연다빈 씨한테 임시연이라고 하는 거야? 너무 간 거 아니야?""다빈 씨가 죽기라도 하면 어떡해? 그럼 사모님이 살인자 되는 거야?""다빈 씨가 귀신 돼서 사모님한테 복수하겠다고 찾아올 것 같아요."그 말을 듣고 있던 심지안은 이마에 힘을 주며 소리질렀다."내가 몰아붙인 거 아니고 본인이 뛰어내린 거야. 나랑 상관 없다고."심지안의 호통에 수군거림은 사라졌지만 그녀를 보는 시선은 여전히 매정했다.다들 "연다빈"에게 일이 생기면 심지안 책임으로 돌릴 준비가 되어있는 듯 싶었다.심지안은 애써 심호흡을 하며 현기증을 이겨내려 했다. 그리고 구급차를 부르려고 뒤를 돌 때 마침 이곳으로 뛰어오는 성연신과 오지석을 발견했다.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는 성연신이 빠르게 다가와 심지안의 어깨를 잡으며 주드럽게 다독였다."괜찮아, 내가 왔잖아. 내가 알아서 할게."속눈썹이 떨릴 정도로 긴장하고 있던 심지안은 마침 다가오는 성연신을 보고 무슨 말이 라도 하려고 입을 벌렸지만 말을 채 내뱉기도 전에 다리에 힘이 풀리며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시간이 조금 흘러 심지안이 눈을 뜬 곳은 병원이었다.흰 벽과 소독약 냄새, 그리고 핸드폰에서 흘러나오는 성원 그룹 직원 자살 사건은 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