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준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는 안수지와 다른 사람들은 생소하다고 생각할 뿐이었지만, 왕인혁은 온몸에 벼락을 맞은 것처럼 한참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진서준이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자, 운전기사와 승객들은 총이 난무하는 틈을 타서 도망친 상태였고 그곳에는 총구멍이 가득 난 버스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그는 조희선의 곁으로 다가가면서 말했다.“해가 떨어지기 전에 집에 도착하려고 했는데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네요. 엄마, 우리 중고차를 사러 가요. 운전해서 집에 가는 수밖에 없겠어요.”새 차를 사려면 번거로운 절차들 때문에 반나절이나 기다려야 했기에 그는 상대적으로 편리한 중고차를 구매하기로 마음먹었다.조희선은 자애로운 눈빛으로 진서준을 바라보면서 말했다.“엄마는 네 의견에 무조건 찬성이야.”그녀는 진서준이 더 이상 예전의 철없던 아이가 아닌 대견한 어른이라고 생각했다.이때 안수지가 진서준의 앞을 가로막았다.“잠깐만요, 이대로 가면 안 되죠!”진서준은 얼굴을 찡그리며 언짢은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면서 물었다.“또 무슨 일이죠?”안수지는 곧장 엄숙한 태도로 답했다.“저희랑 같이 경찰서에 가서 조사를 받아야죠.”그녀는 왕인혁보다 더 뛰어난 실력을 갖춘 진서준이 버스를 탄 것은 분명히 꿍꿍이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가 범죄를 저질렀는지 아닌지를 밝혀내기로 결심했다.진서준은 경멸의 미소를 지으면서 되물었다.“내가 조사를 왜 받아야 하죠? 내가 무슨 죄를 지었죠? 당신의 작업에 넘어가지 않아서인가요, 아니면 당신을 보고도 못 본 체해서인가요?”그의 말에 다른 경찰관들은 수상한 눈초리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면서 나지막하게 수군댔다.“작업이라니요? 우리 안 경사가 먼저 저놈한테 대시했단 말이에요?”“이 세상 어느 남자가 안 경사의 대시에 넘어가지 않을 수 있단 말입니까?”“관건은 식인호를 단번에 죽인 걸로 보면 저놈도 보통 사람은 아닌 게 확실해요.”안민수는 그들의 수군거림에 화가 났는지 대뜸 고함을 질렀다.“언제까지 여기서 떠들 생각
왕인혁은 숭배심으로 가득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용존이 바로 진 상경의 타이틀이야!”안수지는 용존과 상경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지만, 왕인혁의 표정에서 진서준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실력을 갖췄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게다가 여태껏 벌어진 모든 사실도 그의 실력을 증명하고 있었다.왕인혁은 진서준이 중고차를 사러 간다는 말이 떠올라 다급하게 제안했다.“용존님, 차가 필요하세요? 제가 전화해서 당장 가져다 달라고 하겠습니다!”“괜찮겠어요?”“괜찮습니다, 10분 안에 가져다 달라고 하겠습니다!”왕인혁이 휴대전화를 꺼내 가장 가까운 곳에 사는 부자에게 전화를 걸려는 순간, 안민수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공손하게 한마디 했다.“왕 어르신, 제가 수지한테 차로 용존님을 집까지 모시라고 하겠습니다!”진서준은 그의 말을 듣자마자 손사래를 쳤다.“됐어요, 날 집이 아닌 경찰서에 데려갈지 누가 알아요.”안수지는 조금 전까지 지질한 사람이라고 조롱했던 진서준을 자기가 숭배하는 왕인혁이 극진히 모시는 이 상황이 민망해서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왕인혁은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용존님, 그러면 제가 같이 집까지 모셔다드릴게요. 저의 자그마한 성의라고 생각해 주세요.”진서준은 이내 안수지를 한 번 바라보면서 물었다.“운전 실력이 어때요?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서울시에 도착할 수 있겠어요?”안수지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고 왕인혁에게 고마움의 눈빛을 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문제없어요!”“그럼, 빨리 떠납시다!”진서준도 그와 어머니를 빨리 서울까지 데려다줄 수 있다면 어린 계집애와 이것저것 실랑이를 벌이고 싶지 않았다....서울로 가는 차 안, 진서준이 먼저 왕인혁에게 말을 걸었다.“지난 보름 동안 대한민국 무도계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요?”왕인혁은 그의 과분한 총애와 우대에 기뻐하면서도 불안감이 엄습했다.“아직 큰 움직임은 없지만 국안부의 인원 이동이 좀 잦습니다. 중부의 호국사들이 모두 국경으로 이동했고 해외에 있던 사람들도
안수지는 한참 동안 충격에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대한민국 무도계의 일인자? 그 정도로 대단한 인물이라고?’그녀는 믿기지 않았지만, 왕인혁의 모습을 자세히 보면 농담이 아닌 것 같았다.안수지는 그제야 비로소 얼마나 대단한 존재의 심기를 건드렸는지 알게 되었지만, 세상에는 후회약이 없듯이 아무리 잘못을 보완한다고 해도 진서준 마음속의 첫인상을 바꿀 수는 없는 일이었다....한편, 허성태는 미리 아침에 망가졌던 별장을 새롭게 인테리어했고, 그로 인해 예전에 풍겼던 집 냄새가 모두 사라져 버렸다.그래서 진서준은 조희선을 별장에 데려오고 싶었다.별장에 들어온 후, 조희선이 먼저 입을 열었다.“서준아, 서라는 아직도 임씨 가문에 있어?”진서준은 곧장 웃으며 답했다.“네, 서라 보고 내일 별장에 오라고 할게요. 서라도 엄마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으면 엄청나게 기뻐할 거예요!”진서라는 자기가 조희선의 친딸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녀가 생모와도 다름이 없다고 생각했기에 두 사람의 사이는 여느 모녀들보다 더 살가웠다.그러나 조희선은 최근에 일어났던 불미스러운 일을 생각하면 조금 망설여졌다.“됐어, 안 오는 게 좋겠어. 누군가가 서라를 노리기라도 하면 어떡해...”진서라가 임씨 가문에 나타난 이후로 경성 사람들의 관심은 그녀에게로 쏠렸다.이런 상황에서 만약 그녀가 섣불리 돌아온다면, 상상도 못 할 일이 생길지도 몰랐다!진서준은 자기의 실력이 뛰어났다면, 그들의 정체가 탄로 날 걱정이 없었을 거로 생각하면서 자책했다.이때 조희선의 머릿속에는 문득 예비 며느리인 허사연이 떠올랐다.“참, 사연이는? 사연이는 어디 갔어?”조희선은 전부터 허사연을 며느리라고 생각했다.“헤윤 씨, 연아 씨와 함께 금운으로 갔어요.”허사연과 그녀의 동창들이 수련을 시작했다는 것을 모르는 조희선이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금운? 거기는 뭐 하러 갔어?”진서준은 곧이어 그녀에게 그동안 일어났던 일들을 전부 털어놨다.모든 것을 다 말하고 나니 시간은 흘
모든 행동이 매혹적이라는 게 바로 타고난 몸매 소유자의 두려운 점인 것 같았다.진서준은 재빨리 정신을 차리기 위해 혀끝을 깨물었고, 정신을 돌아온 후에도 이가 나미를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어서 냉큼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내가 없는 동안 무슨 움직임이라도 있었어?”이가 나미는 그가 시선을 피하자, 조금 서운한 감정이 들었지만 진지하게 답했다.“그동안 섬나라에서 많은 고수들이 넘어왔고 지금은 남조 박씨 가문에서 대기하고 있어요. 그들이 청명절에 행동을 개시한다는 소식을 들었어요.”청명절에 조상님께 제사를 지내는 것은 대대로 내려오는 규칙이었고 현지 사람이라면 누구나 참석해야 했다.만약 그때 해외 강자들이 행동을 개시한다면, 대한민국 무도 후배들을 일망타진하지는 못하더라도 80퍼센트는 멸망시킬 수 있었다!진서준이 진지하게 다시 물었다.“그들이 어느 쪽으로 진공할 계획인지 알아?”이가 나미의 얼굴에 순식간에 걱정으로 가득 찼다.“사방에서 공격할 거예요. 이번에 미야모토 가문 검의 성인도 왔다고 들었어요! 게다가 그가 이번 무도 교류회에도 참석한대요.”이가 나미가 말한 섬나라의 3대 가문 중 미야모토 가문은 검도에 능하기로 유명했고 그 가문에서 검의 성인이라고 불리는 인물이라면 결코 만만한 실력이 아닐 것이다!진서준은 미간을 약간 찌푸리며 물었다.“그 사람의 실력이 어때?”“정확한 실력은 모르겠지만 해외의 악마섬에 다녀왔다는 얘기를 들었어요...”이가 나미는 악마섬이라는 단어를 말하면서 놀라움에 온몸을 가볍게 떨었다.이상함을 감지한 진서준은 이내 손을 뻗어 그녀의 손등을 토닥이며 달랬다.“악마섬이 그 정도로 무서운 곳이야?”곧이어 그녀가 섬세하고 가느다란 손으로 진서준의 손을 꽉 잡자, 진서준도 왠지 모르게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엄청나게 무서운 곳이에요. 가족들한테 들었는데 악마섬에 들어간 강자 중 십중팔구가 죽어서 돌아오지 못한대요!”“그런데 거기는 뭐 하러 가는 거지? 설마 섬에 무슨 보물이라도 있어?”진서준은 해외 강
막 거절하려던 진서준은 불쌍한 이가 나미의 모습을 보고 어쩔 수 없이 머리를 끄덕였다“알았어, 하지만 도를 넘으면 안 돼.”진서준이 응낙하자, 이가 나미는 기뻐하며 진서준의 두 손을 꼭 끌어안았다.비록 이가 나미가 가죽옷을 입었지만 진서준은 여성의 부드러움과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다.진서준의 본능적 욕망은 지난번 허사연과 보다 깊은 관계를 맺으면서 시작했다.게다가 보름 넘도록 여자라곤 본 적이 없었는지라, 이가 나미가 유혹하는 순간, 남성의 욕망이 밖으로 솟구치는 걸 어쩔 수 없었다.“어서 말해봐, 무슨 소원인지 들어나 보자.”진서준은 순간 갈증을 느끼며 일부러 힘을 주어 말했다.그는 서두르지 않으면 오늘 저녁에 못 갈 것만 같았다.“주인님... 절 안아 주시면 안 돼요?”이가 나미가 눈을 깜빡이면서 조심스레 물어 왔다.평범한 여자가 이런 요구를 제출하면 아무 생각 없이 들어줄 수 있다.한데 이가 나미는 워낙 요염하게 생겼는데, 오늘따라 옷차림마저 섹시했다.보통 남자들이 이가 나미의 이런 소원을 듣는 순간 격동되어 기절할지도 모르지만, 진서준도 이 요구를 듣는 순간 멈칫했다.“안 돼, 다른 소원으로 바꿔.”진서준의 이 몸 상태로 이가 나미를 안고 있으면 아마도 사고 칠 확률이 높을 것이었다.그는 절대로 허사연에게 미안한 짓은 할 수 없었다. 하물며 내일은 운대산에 가서 허사연을 만나기로 했는데, 오늘 저녁에 이가 나미와 그런 짓을 한다면 그녀를 볼 면목이 없을 것이었다.“주인님... 딱 한 번만도 안 되나요? 저에겐 단지 이 한 가지 소원밖에 없단 말이에요...”이가 나미는 눈물이 가랑가랑해서 애원하듯 진서준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녀는 마치 엄청난 설움을 당한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진서준의 냉정한 가슴은 삼 초도 안 되어 사르르 녹고 말았다.“알았어, 딱 한 번만 안아 줄게...”진서준은 어쩔 수 없이 대답했다.“진짜죠? 고맙습니다, 주인님!”이가 나미는 잡고 있던 진서준의 손을 놓고, 잽싸게 차에서 내려
“필요 없어. 어서 가.”진서준은 창피스러워 이가 나미를 상대할 면목이 없었다. 방금 두 사람이 포옹하고 있을 때 이가 나미는 이미 모든 것을 눈치챘다.“주인님, 안 불편하세요?”“네가 여기 있으면 더 불편해. 먼저 갈게!”진서준은 즉시 차에 올라 가속 페달을 밟고 씽 하니 가버렸다. 도망치듯 가버린 진서준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이가 나미는 피식 웃으면서 핑크빛 혀로 섹시한 입술을 핥았다.“주인님, 당신은 절대 도망 못가요, 다음 번엔 꼭 당신을 손에 넣고 말 거야.”...집에 도착한 진서준은 자지 않고 수련을 시작했다.수련을 하고 있는 진서준의 머리속은 야한 화면들로 꽉 차 있었다.진서준은 어쩔 수 없이 냉수로 샤워하고 잠자리에 누웠다.이날 저녁에 진서준은 꿈을 꿨다.꿈에서 그는 허사연, 김연아 등 많은 여자를 보았는데, 그녀들은 모두 섹시한 옷을 입고 진서준의 주위에서 맴돌면서 그를 유혹했다. 정욕에 사로잡힌 그는 끝내는 그녀들을 덮치고 말았다.‘후유... 다행히 꿈이었어...’‘근데 내가 왜 이런 꿈을 다 꾸지, 바람둥이처럼...’꿈속의 야한 화면을 떠올리는 진서준은 저도 모르게 자신의 뺨을 철썩 쳤다.만일 이게 꿈이 아니라 현실이었다면, 허사연에게 너무나 미안한 일이었다.진서준은 조희선과 함께 아침밥을 먹은 뒤, 조희선을 차에 태워 금문으로 출발했다.금문으로 가는 도중에 그는 진서훈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화가 통하자, 진서훈은 바로 그에게 물었다.“신농산에서 나왔어?”“네, 어머니를 모시고 나왔습니다.”진서준이 대답했다.“나왔으니 됐다. 수선 네 엄마부터 안전한 곳으로 모셔라, 해외 그놈들도 아마 네 엄마의 종적을 찾을 테니.”진서훈이 그에게 귀띔해주었다.애초에 조희선이 경성을 떠난 이유도 해외 강적들을 피하기 위해서였다.지금 해외 강적들이 다시 손을 잡고 대한민국을 공격하고 있으니 또다시 그녀의 종적을 찾을 것이었다.“할아버지, 며칠 뒤에 다국적 무도교류회가 열린다고 들었습니다.”진서
진서준이 추측한 바와 같이 이 아가씨는 확실히 이국 공주였다.그녀의 신분은 서방 용란제국의 공주였다.이번 다국적 무도교류회에 용란제국도 참석하기에 엘리사 공주도 참석인원들을 따라서 대한민국에 온 것이었다.용란제국과 대한민국의 외교 관계는 별로 좋지 않았다.100년 전에 용란제국은 대한민국을 침략한 적 있었기에 대한민국 국민은 용란제국을 적대시하고 있었다.진서준이 자기를 보고 있다는 것을 느낀 엘리사는 예절상 미소를 지으면서 차창을 닫았다.진서준도 가벼운 미소를 짓고 금시 이국 공주를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운대산을 향해 걸어갔다....차창이 닫힌 후, 뒷좌석에 앉은 중년 남자가 불쾌한 어투로 말했다.“공주님은 이따위 비천한 사람한테 미소를 지을 필요가 없습니다.”“그들은 공주님의 미소를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공주님의 미소는 그들에게 큰 은혜입니다.”“해리스, 대한민국의 시를 들어 본 적 있어요?”엘리사가 차분하게 물었다.해리스는 눈살을 살짝 찌푸리면서 대답했다.“공주님, 제가 대한민국의 문화에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아시면서…”엘리사는 가벼운 웃음을 지으며 유창한 한국어로 말했다.“시인막소지중수, 천처무방유와용.”해리스는 여러 나라 언어를 배웠기에 한국어에 능숙하지는 못하더라도 배우긴 했었다.그래서 엘리사가 옛 시를 읊자, 해리스는 한참 머리를 쥐어짜더니 말했다.“공주님은 아까 그 젊은이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십니까?”해리스가 옛 시의 뜻을 깨닫고 눈썹을 찌푸리면서 물었다.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진서준이 평범해 보이기만 했다. 심지어 벌써 그가 어떻게 생긴 것마저 잊어버렸다.“저 사람이 가는 방향을 보세요.”엘리사가 희고 긴 손가락으로 진서준이 가는 방향을 가리켰다.진서준이 운대산으로 가는 것을 본 해리스는 흠칫 놀라 잠시 몸을 가누지 못했다.방금 엘리사 일행도 운대산에 오르려고 입구까지 갔댔지만, 류재훈이 나서서 앞길을 막았다.그들은 류재훈이 국안부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순순히 물러섰다.국안부가 어떤
“어서 별장부터 사들여, 그리고 저녁 식사 같이할 수 있도록 준비해. ”엘리사가 해리스의 말을 잘라 버리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엘리사가 마음먹은 걸 본 해리스는 더는 말리지 않았다.그는 묵묵히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보내어 엘리사 주위에 경계를 강화할 것을 지시했다....누군가 산을 오르고 있다는 걸 감지한 류재훈은 즉시 뛰쳐나왔다.온 사람이 진서준이라는 것을 알아본 그는 이내 희색이 만면해서 인사했다.“용준님!”진서훈은 류재훈이 왜 아직도 운대산을 지키고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됐다. 지금 국안부 전체가 비상 상태에 처해 있었다.류재훈은 비록 실력이 뛰어나지는 않지만, 그래도 종사였다.현재 이런 상황에서 국안부에서 류재훈을 파견하여 진서준을 대신하여 산을 지키라고 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류 종사님, 왜 아직 여기에 있어요?”류재훈을 본 진서준은 벙긋 웃으면서 인사했다.“현천진군께서 저더러 여기서 용준을 기다리라 하셨어요. 그이께서는 저더러 용준님이 언제 도착하시면 언제 떠나라고 하셨어요.”류재훈이 이실직고했다.진서훈은 허사연 일행이 여기에 있다는 걸 알고 일부러 류재훈을 보내어 입구를 지키게 했다.국안부 인원이 이곳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알면 아무도 섣불리 행동하지 못할 테니깐.할아버지께서는 참말로 진서준에게 많은 도움을 주셨다.“류 종사님, 폐를 많이 끼쳤습니다, 앞으로 저의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진서준이 웃으면서 말했다.이 말을 들은 류재훈의 두 눈은 반짝 빛났다.“아닌 게 아니라 용준님에게 한가지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만…”진서준이 웃음보를 터뜨리면서 말했다.“말씀하세요.”“저에게 친구가 한 분 있는데, 요즘 몸이 좀 안 좋아요. 만일 용준님께서 시간 되시면….”“알겠습니다, 이틀 안으로 연락 드리겠습니다.”진서준은 시원하게 대답했다.류재훈이 진서준을 많이 도와줬었다. 이 작은 소원을 진서준이 거절할 리가 만무했다.“용준님, 고맙습니다.”류재훈은 감격 되어 연신 진서준을
황예은이 옷을 다 갈아입자 서지은이 자리에서 일어나 진서준을 찾으러 갔다.“서준아, 예은 언니가 좀 화난 것 같으니까 이따가 해명할 때 되도록 조심해.”서지은이 걱정스럽게 당부했다.“알았어.”진서준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진서준은 조심하라는 말을 다시 되새겼다.만약 상대가 너무 무례하게 굴면 진서준도 결코 양보하며 자세를 낮추지 않을 예정이었다.문제는 자기가 일부러 실수한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진서준은 황예은이 안에서 옷을 갈아입는 걸 번연히 알면서도 들어간 게 아니었다.게다가 진서준은 황예은 생명의 은인이기도 했다.“진서준 씨, 아까 지은한테서 들었는데, 진서준 씨가 저를 구했다고 하던데요.”황예은은 소파에 앉아 고개를 들어 진서준을 바라보았다.그 눈빛과 태도는 마치 왕좌에 앉은 여왕처럼 고압적이었다.이는 오랫동안 높은 자리를 지키며 형성된 자연스러운 분위기였다.황경영이 대한민국을 떠나기 전에 이미 황예은은 회사 업무의 일부를 맡아 처리하고 있었다.회사의 지도자, 그것도 여성이 지도자가 되는 것은 쉽지 않았다.그러니 황예은의 성격도 강인하고 단호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회사 사람들을 제대로 관리할 수 없었다.황예은이 이사장으로 올라간 후, 회사 내에서 황예은의 이름만 들어도 직원들이 벌벌 떨곤 했다.“맞아요. 제가 구했습니다.”진서준은 담담한 표정으로 황예은 맞은편에 앉았다.그런데 앉고 나서야 진서준은 후회했다.황예은이 입은 옷은 목선이 매우 낮았다.비록 황예은이 자세를 바르게 고치고 앉아 있었지만 풍만한 가슴이 살짝 드러나 있었고 그 모습이 진서준의 시야에 그대로 들어왔다.당혹한 모습을 감추려고 진서준은 뒤로 기대어 눈을 감았다.하지만 이 자세는 상대방에게 매우 무례하다는 인상을 주었다.황예은은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녀와 대화할 때 이런 태도로 임하는 것은 큰 실례였다.진서준이 소파에 기대 누운 모습을 보자 황예은의 마음속에서 잠잠했던 분노가 다시 타오르기 시작했다.“진서준 씨는 다른 사람
별장에서 황예은은 이미 깨어난 상태였다.다만 지금 황예은의 몸에는 옷이 거의 없었다.정확히 말하면 상반신에는 레이스가 달린 검은 속옷 하나만 걸쳐져 있었다.이 속옷은 서지은이 가져온 속옷이었고 아직 한 번도 입지 않은 새것이었다.그리고 하반신에는 아까 진서준이 마사지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없었다.문 여는 소리가 들리자 두 여자는 동시에 문 쪽을 바라보았다.황예은은 문을 열고 들어온 낯선 남자를 보고 얼굴이 잿빛으로 변했다.비록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지는 않았지만 황예은의 차가운 눈빛만으로도 지금 심정을 충분히 드러내고 있었다.황예은은 자기 알몸을 보고 있는 이 남자를 죽여버리고 싶었다.하지만 황예은은 사실 이번이 진서준에게 두 번째로 알몸을 고스란히 드러낸 순간이란 걸 몰랐다.“서준아, 왜 노크하지 않고 그냥 들어왔어...”서지은이 어색한 표정으로 물었다.서지은은 진서준이 약왕 이용진과 저녁 식사를 오래 하고 밤늦게나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예상과 달리 진서준이 너무 일찍 돌아온 것이다.“언제까지 더 볼 생각이야?”황예은이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물었다.진서준은 정신을 차리고 코를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돌린 뒤 말했다.“먼저 나가 있을게. 옷을 다 갈아입었으면 날 불러.”진서준이 나간 뒤, 황예은은 서지은을 바라보며 물었다.“저 사람 누구야?”“진서준이에요. 제 남자친구거든요.”서지은이 솔직하게 대답하며 한마디 보탰다.“예은 언니, 사실 언니 목숨도 진서준이 구한 거예요.”그 말을 듣자 황예은의 눈에서 뿜어나오던 냉기가 다소 누그러졌다.어쨌든 자기 목숨을 구해준 은인인데 너무 차가운 태도로 대할 수는 없었다.그러나 황예은은 문득 뭔가가 떠올랐다.“내 옷은 네가 벗긴 거야?”서지은은 그 말에 순간 멈칫했지만 이내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서준이 언니를 치료할 때 상황이 너무 위급해서 먼저 언니를 여기 데려온 거예요. 나도 여기 들어와 치료 과정을 볼 때 서준이 언니를 추행하는 줄 알았어
지금까지도 진서준은 박씨 가문의 의도가 오리무중이었다.하지만 박씨 가문의 일은 더 이상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지금 진서준의 우선순위는 약재를 구하고 모든 정력을 간첩을 잡는 데 쏟아부어야 했다.호텔을 떠난 진서준은 이용진의 차를 타고 이동했다.30여 분을 달린 끝에 진서준 일행은 마침내 이용진의 장원에 도착했다.이용진의 장원 면적은 서씨 가문 것만큼 크지 않았지만 화려함만큼은 서씨 가문을 능가할 기세였다.각종 명인의 고화와 진귀한 보물들이 온 사방에 진열되어 있었다.이 모든 보물은 하나하나가 최소 10억 이상의 진품이었고 적어도 진서준이 자세히 살펴본 결과 위조품은 하나도 없었다.이 보물들만 해도 자산 가치가 조 단위를 뛰어넘을 될 터였다.“용존님,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말만 하세요.”이용진이 호탕한 어조로 말했다.“난 이런 것들에는 관심 없습니다.”진서준은 담담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그렇군요...”이용진은 약간 실망한 기색을 보였다.돈을 통해 진서준과의 관계를 더 가까이 만들고자 했던 이용진의 계획이 무산되는 순간이었다.진서준과 친분이 두터워지면 나중에 치료를 부탁하기도 훨씬 수월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진서준은 이용진의 속셈을 꿰뚫어 본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약왕님 체내 내상이 다 나으면 매주 두 번씩 무도를 연마하고 한 달에 다른 사람과 한 번 실력을 겨루는 수준으로 수련하면 됩니다. 이 과정을 통해 약왕님 무도 실력도 늘어날 뿐 아니라 건강에도 아무 문제가 생기지 않을 겁니다.”“알겠습니다. 앞으로 꼭 용존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이용진은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수많은 별장을 지나 진서준은 이용진을 따라 규모가 어마어마한 냉장실로 들어갔다.냉장실 안에는 사람 키 절반 정도 되는 기둥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각 기둥 위에는 희귀한 약재들이 놓여 있었고 방탄유리로 보호되고 있었다.진서준이 자세히 둘러보니 여기에 진열된 약재는 성약당의 것만큼 많지는 않았지만 희귀성만큼은 성약당을 훨씬 뛰어넘었다.
이 사람은 바로 어제 서울시에서 체포되었던 박운기였다.진서준 역시 이렇게 빨리 박운기를 다시 마주칠 줄은 몰랐다.“운기야, 저 사람 알아?”무리의 선두에 서 있던 중년 남자가 박운기를 힐끔 바라보며 물었다.“바로 저놈이 사람들을 이끌고 내 계획을 망쳤습니다.”박운기가 이를 갈며 말했다.만약 진서준이 방해하지 않았더라면 박운기의 계획은 이미 성공했을 것이다.그랬다면 박씨 가문으로 돌아갈 때는 차가운 시선 대신 온갖 선물이 기다리고 있었을 터였다.이번에 서울시에서의 임무를 맡기 위해 박운기는 온갖 시련을 이겨내며 경쟁했다.모두가 보기에 이 임무는 그야말로 공을 세우기 위한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이다.하지만 이렇게 쉬운 임무를 박운기가 망쳐버렸다.망친 것도 모자라 박씨 가문은 관계를 동원해 박운기를 구출해야만 했다.공을 세워야 할 장사가 완전히 손해만 본 장사로 탈바꿈한 것이다.박씨 가문의 계획을 망친 장본인이 진서준이라는 사실을 알자 중년 남자는 진서준을 쓱 훑어보고는 냉랭하게 비웃었다.“전설 속의 용존님, 역시 이름값 제대로 하시는군요.”진서준은 그 남자를 힐끗 보고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엘리베이터로 걸어 들어갔다.진서준이 자기를 무시하자 중년 남자의 눈빛에 차가운 기운이 잠깐 스쳤지만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았다.“약왕님은 언제부터 용존님과 친구가 되셨습니까?”중년 남자는 이용진을 발견하자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다가갔다.“박재명, 분명히 말해두지. 용존님 일은 바로 내 일이야. 감히 용존님에게 시비를 걸려고 한다면 내가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이용진이 싸늘하게 대응했다.박재명은 박씨 가문의 실질적인 권력자가 아니었다.그는 단지 박서명의 넷째 동생일 뿐이었다.그래서 이용진은 굳이 박재명을 깍듯하게 모시며 아부할 필요가 없었다.이용진의 말에 박재명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약왕님, 굳이 한 사람 때문에 우리 박씨 가문을 적으로 돌릴 필요가 있겠습니까?”이용진은 그 말에 코웃음을 쳤다
“당연히 가능하죠. 그렇지 않았다면 제가 애초에 병이 있다고 말하지도 않았겠죠.”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정말 다행입니다. 감사합니다, 용존님.”그러자 진서준이 손을 내저으며 진지하게 말했다.“아직은 섣불리 고마워하지 마세요. 제가 치료하는 데에는 조건이 있습니다.”“무엇이든 말씀만 하십시오. 저 이용진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기꺼이 돕겠습니다!”이용진이 자신 있게 가슴을 치며 말했다.“제가 약왕인 당신에게 부탁이 있다면 당연히 약재 때문이죠.”진서준은 차분하게 진서라의 체내 독소를 치료하기 위해 필요한 네 가지 약재를 설명했다.이용진은 그 얘기를 들은 뒤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용존님, 솔직하게 말할게요. 용존님이 언급하신 약재 중 혈령지는 제 약재 창고에 하나 있습니다. 하지만 나머지 세 가지 약재는 아쉽게도 제 창고에 없습니다.”“그것 하나만 있어도 충분합니다.”진서준은 크게 실망하진 않았다. 적어도 하나는 확보했으니 오늘 헛걸음을 한 게 아니었다.“얼마면 되겠습니까? 시세대로 구매하겠습니다.”이용진은 그 말을 듣고 자기 얼굴을 가볍게 툭툭 쳤다.“용존님, 가격을 말하는 건 제게 따귀를 날리는 겁니다. 용존님이 제 목숨을 구해주셨는데 제가 어떻게 돈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제 약재 창고에 나머지 세 가지 약재가 있었다면 전부 무료로 드렸을 겁니다.”이용진이 이렇게 호탕하게 나오자 진서준도 더는 사양하지 않았다.생명을 구해준 대가로 혈령지 하나를 받는 건 결코 과한 요구가 아니었다.“용존님, 급하지 않으시다면 식사를 마친 후 제가 약재 창고로 가서 혈령지를 가져오겠습니다.”이용진의 제안에 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하죠.”“오늘 식사는 제가 모시겠습니다. 곽 선생님, 어서 앉으시죠.”이용진은 웨이터를 불러 이곳의 대표 요리를 전부 주문했다.이 대표 요리들만 해도 가격이 2억을 넘겼다.일반인 한평생 월급을 한 끼 식사로 소비하는, 그야말로 호화로운 만찬이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음식이 차려졌
이용진은 평생 실력이 이 정도로 무시무시한 청년을 본 적이 없었다.자기를 지키는 두 호위가 반응할 틈조차 없이, 아니, 심지어 방어할 기회도 없이 한순간에 당하다니, 너무나 놀라운 일이었다.곽윤상 역시 진서준이 갑자기 공격을 시도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덕분에 해명할 기회가 생겼다.“약왕님, 이분은 바로 국안부 용존님이십니다.”곽윤상이 재빨리 이 틈을 이용해 설명했다.“뭐라고? 네가 바로 그 용존이라고?”이용진은 입을 떡 벌린 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진서준을 바라보았다.용존이라는 이름은 이미 명주시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대다수 명주시 명문대가는 이 절세 천재를 돈으로라도 끌어들이고 싶어 했다.진서준을 끌어들이려는 이유는 단순했다. 진서준이 아직은 새파랗게 젊은 청년이었기 때문이다.스무 살 남짓한 나이에 용존이라는 봉호를 받은 인물이니 앞으로 거의 30년이 지나면 대한민국 전역에서 진서준과 겨뤄볼 만한 상대가 있을 리 없었다.심지어 4대 은거 문파조차도 진서준에게 미치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보시다시피 용존이 틀림없습니다.”진서준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진서준이 처음부터 용존이라는 신분을 밝혔다면 이용진은 아마 믿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지금은 믿을 수밖에 없었다.대한민국 전역에서 이 나이에 육급 절정의 대종사를 단숨에 제압할 수 있는 사람은 진서준 외에는 없었기 때문이다.이용진은 이제야 이 청년이 이렇게 자신만만하고 여유로운 태도로 대화할 수 있었던 이유를 깨달았다.“용존님, 방금 제가 무례했던 점은 널리 용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약왕 이용진은 몸을 약간 숙이며 진서준에게 진심으로 사과했고 조금 전의 거만했던 태도와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용진은 곽윤상이 명주시의 얼굴에 먹칠을 한다고 질책했었다.그런데 3분도 안 돼 본인이 직접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고 있었다.이용진은 지금 누군가가 그에게 귀싸대기라도 날린 것처럼 얼굴이 화끈거렸다.“약왕님, 앉으세요.”진서준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용진은 눈을 가늘게 뜨고 놀라운 기색이 담긴 눈빛으로 진서준을 바라봤다.진서준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평온하게 입을 열었다.“방금 당신이 한 얘기는 전부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신 체내에 숨은 질병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비 오는 날씨에 수련을 하다 보면 체내 강기를 돌릴 때 복부 아래쪽에 약간의 통증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 통증은 심하지 않아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도 있겠지요. 설령 신경이 쓰여 의사를 보인다고 해도 보통 의사라면 문제를 발견하지 못할 겁니다. 병원에서 사용하는 정밀한 장비로도 알아내기 어렵겠죠.”진서준의 이 말에 이용진의 표정이 한순간 어두워졌다.진서준은 정확히 이용진의 몸 상태를 파악하고 있었다.지난 2년 동안, 비만 오면 이용진은 온몸이 불편해졌다.특히 강기를 돌릴 때면 복부 아래쪽에서 은은하게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처음에는 이용진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그러나 점점 이상하다고 느껴져 성약당의 장로까지 불러 진찰을 받았지만 아무런 문제도 발견되지 않았다.그런데 진서준이 오늘 초면에 단번에 이 문제를 짚어내자 이용진은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그걸 어떻게 알았어?”이용진이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이며 묻자 진서준은 태연히 대답했다.“당연히 당신 얼굴을 보고 알았죠.”“얼굴을 본다고 어떻게 알 수 있어?”이용진의 표정이 밝아졌다가 어두워졌고 눈에서 분노의 불길이 일기 시작했다.“터무니없군. 성약당의 장로조차 알아내지 못한 문제를 네가 단번에 알아냈다고?”이용진은 탁자를 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손가락으로 진서준을 가리키며 소리쳤다.“이봐 청년, 솔직하게 말해. 내 곁에 내통자를 심어 놓은 게 아니야?”명주시에서 이용진 같은 높은 지위에 있는 인물은 항상 최악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경계해야 했다.다시 말해 억울한 사람 천 명을 죽이더라도 내통자 한 명도 놓치지 않는 태도가 생존의 비결이었다.그렇지 않으면 명주시 같은 복잡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어려웠다.이용진 곁의 두 대종사도 이
‘이 녀석 미쳤나?’방 안의 모든 사람이 같은 반응을 보였다.이용진이 누구인가? 바로 명주시에서 누구나 다 아는 약왕이었다.전국을 논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절반 이상의 귀한 약재는 약왕의 손을 거친다.이런 사람이 어떻게 병에 걸릴 수 있을까?더군다나 매일 약재를 다루는 약왕에게 병이 있다면 명의들이 못 알아챘을 리가 없었다.그러니 진서준이 이용진에게 병에 걸렸다고 말한 건 미친 소리가 아니면 설명할 수 없는 소리였다.“이봐, 넌 지금 무슨 헛소릴 지껄이는지 알고는 있나?”이용진의 얼굴은 어둠 그 자체였다.그는 이곳에서 꼬박 30분 넘게 기다렸다.그런데 자기를 이렇게 오래 기다리게 한 장본인이 고작 이런 애송이였고 오자마자 병이 있다며 모욕까지 했다.평소 인내심이 깊고 신사적이던 이용진도 이 순간만큼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이용진의 분노를 눈치채자 곽윤상은 얼굴이 창백해졌고 겁에 질려 진서준의 옷자락을 살짝 당겼다.하지만 진서준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듯, 태연히 이용진 맞은편에 앉아 스스로 차를 따라 마셨다.진서준의 이 태연한 모습에 이용진은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다.아무래도 이 청년은 약왕인 이용진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듯했다.“난 똑같은 말을 두 번 하지 않아요.”진서준은 차 한 모금을 마신 뒤, 평온한 어조로 말했다.진서준의 말에 이용진 오른쪽에 앉아 있던 대종사가 비웃으며 말했다.“약왕님은 무공을 수십 년간 연마하셨고 이미 종사 경지에 도달한 무인이야. 병에 걸렸다면 네가 말하지 않아도 진작 발견되었을 거야. 허튼소리도 정도껏 해야지.”보통 종사 경지에 오른 무인은 병에 걸리는 일이 극히 드물었다.무인의 근육, 뼈, 혈액은 이미 평범한 인간을 초월했기에 체내 바이러스조차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종사 무인이 병에 걸릴 경우라면 대개 다음 세 가지 이유 중 하나였다.난치병이거나 중독이거나 아니면 심각한 내상이 있을 경우였다.하지만 이용진은 이 세 가지 어디에도 해당하지 않았다.난치병은커녕, 누군가의 독에
“여기는 국제적인 대도시잖아요.”곽윤상도 감탄했다.호텔 입구에 도착하자 교내 미인 대회에 나가도 손색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여성 안내원이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손님, 저희 호텔은 회원제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식사나 숙박을 원하시면 회원 자격이 필요합니다.”곽윤상은 군말 없이 금박으로 장식된 카드를 꺼냈다.여성 안내원은 카드를 꼼꼼히 확인한 뒤,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곽 선생님, 안으로 모시겠습니다.”“이미 예약을 해두었습니다. 꼭대기 층의 5번 방입니다.”곽윤상의 말에 여성 안내원이 대답했다.“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확인해 보겠습니다.”여성 안내원은 프런트로 가서 예약 사항을 확인한 뒤, 두 사람을 엘리베이터로 안내했다.꼭대기 층으로 가는 직행 엘리베이터는 총 네 대였고 속도는 어마어마했다.무려 300미터의 높이를 단 20초도 되지 않아 올라갔다.꼭대기 층에 도착하자 진서준은 눈앞의 광경에 말문이 막혔다.사방이 투명한 유리로 되어 있어 멀리 보이는 구름층과 자기와 나란히 있는 듯한 달빛이 시야에 들어와 하늘 속에 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진 마스터님, 여긴 어떠십니까?”곽윤상의 질문에 진서준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내가 가본 레스토랑 중 가장 호화로운 곳 중 하나로군요.”“그렇긴 하죠. 이 호텔은 국제적으로도 유명한 곳입니다.”곽윤상은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였다.“이 호텔 서비스를 이용하려면 반드시 회원이어야 하는데 꼭대기 층에 오고 싶다면 일반 회원으로는 부족하고 최소한 골드 회원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골드 회원권을 발급받는 데만 200억이 필요합니다.”골드 회원권이 200억이나 한다는 말에 진서준이 다른 질문을 던졌다.“그럼 일반 회원은 얼마인가?”“10 억입니다.”곽윤상이 손가락으로 숫자를 표시하며 말했다.“그리고 이 돈은 카드에 적립되는 게 아니라 그냥 회원권 발급 비용일 뿐입니다.”그 말을 듣고 진서준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전국을 통틀어도 이런 가격을 자신 있게 책정하는 곳은 명주시의 호텔들뿐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