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후, 서강훈이 집으로 들어왔다. 아내와 아이가 함께 자리에 있었고 아이가 꺄르르 웃으며 즐겁게 노는 모습에 서강훈도 진심으로 기뻐하는 표정으로 예의를 차리며 말했다.“한 대표님! 그럼 실례하겠습니다.”우리 부모님께도 인사를 올리고는 콩이에게 줄 간식도 사 온 모양이었다.이번 저녁 식사는 모두가 행복하게 즐겼다. 심은정의 얼굴에는 마치 큰 짐을 내려놓은 듯한 안도의 표정이 역력했다. 식사 후, 그녀는 아이들과 놀아주겠다고 자처했고, 부모님은 내가 서강훈과 이야기할 것을 알고 밖으로 산책하러 갔다.나와 서강훈은 신예의 현재 상황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했고, 최근 전씨 집안이 매우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사업을 빼앗고, 여러 프로젝트를 차지했으며, 몇 명의 큰 주주들을 끌어들여, 상장을 준비하고 있었다.이 모든 일의 배후 조종자는 전희였다. 사실, 서강훈이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전지훈은 변변한 사람이 못됐고 항상 전희가 올리뛰고 내리뛰며 모든 것을 주도했다. 사실 이청원과 부부관계인 이상, 돈이 부족할 리 없음에도 그녀가 왜 이토록 날뛰고 다니는지는 의문이었다.또 다른 의문은, 전희가 이청원의 자원과 인맥을 가로채고 있는데 왜 이청원은 나서서 제재하지 않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내 기억 속 이청원은 여자가 자기 머리 꼭대기에 올라서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심지어 그의 자기 여자라 할지라도 말이다.그렇다면 이청원은 망설임 없이 전씨 집안을 자신의 기업에서 완전히 배제했을 것이다.전희가 지금처럼 행동하는 것을 보면, 언젠가 그녀와 이청원 사이에 치러야 할 분쟁이 도사려있음은 분명했다.나는 이청원에게 먼저 의견을 표명해야 할 것 같았다. 그가 나에게 전희에 대해 언급하며 체면을 지켜줄 필요가 없다고 암시했던 것을 생각하면, 이것은 상당한 무언가를 암시하는 것 같았다.이 부분에 대해서는 좀 더 조사를 해봐야 할 것 같았다.재벌의 세계는 이런 식이다.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알고 있는 것들이
나는 충동을 이기지 못한 채 남자의 옆으로 성큼 다가가 고개를 돌려 그 남자를 쳐다봤다. 각진 얼굴은 고동색을 띠고 있었고 짙은 눈썹에 큼지막한 눈에 생김새가 나쁘지는 않았다. 다만 눈동자에는 은은한 살기를 담고 있어 눈이 마주치는 사람마다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칠 정도였다.남자는 갑작스러운 내 행동에 놀랐는지 깊고 짙은 눈동자에 경계심을 가득 품은 채 나를 쳐다봤고 나는 눈빛을 숨기고는 태연한 척 물었다.“수납 끝나셨나요? 제가 급해서요, 죄송해요!”하지만 그의 눈빛이 날카로워지며 내 얼굴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마침 그의 처방전이 창구를 통해 건네졌고 그는 단숨에 잡아채더니 몸을 돌려 떠났다.나는 처방전을 건네주는 척하면서도 눈길은 조용히 그 남자를 좇았고 남자가 바쁜 걸음으로 약을 받는 창구로 가는 것이 보였다.저번에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는 못했어도 방금 그의 태도로 봤을 때 그 사람임을 확신했다. 그는 분명히 내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아니라면 눈동자가 그렇게 날카로워질 리가 없었다.처방전을 다시 건네받고는 약 받는 창구를 돌아보자 이미 남자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나는 조급한 마음에 약을 받는 것도 제쳐둔 채 대기실을 사방팔방으로 훑어댔지만 남자는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난 뒤였다.빨라도 너무 빨랐다, 정말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나는 그 남자가 그날 밤 나를 납치했던 사람이며 나를 알아봤다고 확신했다.아니라면 이렇게 빨리 사라지지 않았을 것이니 말이다. 혹시 어딘가에 숨어서 나를 지켜보고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등골이 서늘해나며 행동이 조심스러워졌다. 관찰당하는 쪽은 그가 아니라 나였기 때문이다.알 수 없는 불길한 예감이 가슴속에서 스멀스멀 피어올랐다.내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그날 밤 그 남자는 상처를 입었었다. 그가 칼을 들고 나에게 달려들 때 배현우의 사람이 총을 발사해 손목이나 팔목에 상처를 입었을 것으로 예상하며 그 덕분에 나는 칼날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후에 배현우
조이스는 이번에 우리 기업의 전반적인 맥락을 잡아줄 운영 기획자를 초청해 온 일로 신흥을 방문했다고 했다. 항상 이런 일은 장영식이 계획해 왔기에 그가 일에서 손을 놓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최근 나와 영식은 서로에게 기회를 주려고 일부러 붙어있었다. 이런 이유로 장영식도 더욱 조급하게 스퍼트를 올려 신흥을 더 높은 자리로 올려놓으려 노력했다.나는 몰래 조이스를 관찰했다. 동양인의 특징을 그대로 닮은 얼굴이었지만 성격은 밝고 활달했으며 장영식을 대하는 태도도 숨김없이 열정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으니 영식의 수줍음 많고 조용한 성격과 마침 서로 보완해 줄 수 있었다. 나는 왠지 모르게 이 둘이 천생연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장영식의 주의력은 모두 나에게 쏠려있으니 나로서는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조이스는 나를 보더니 장영식이 나를 대하는 태도가 남다름을 민감하게 눈치챘는지 나에게 상당한 호기심을 드러냈다. 눈동자 속에는 무의식적으로 탐색의 빛이 돌았지만, 굳이 숨기려고 애쓰지도 않았다.오후에 조이스가 초청한 운영 기획팀 3명이 신흥에 도착하자 우리는 회의실에서 서로의 생각을 나누며 초기 단계의 계획을 세워나갔다.퇴근 후 미연이 전화를 걸어왔고 나에게 이세림이 서울로 돌아왔다는 뉴스를 털어놨다.이에 나도 서둘러 동철에게 전화해 사람을 붙여 이세림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의 깊게 관찰해달라 부탁했다.이번에 돌아온 이상 그녀도 잠자코 조용히 있을 리는 없었고 반드시 무언가 행동을 취할 것으로 생각했다.그날 밤 나와 영식은 운영 기획팀에게 감사를 전하기 위해 조이스도 함께 불러 루나에서 저녁 만찬을 함께 했다.루나에 도착해 엘리베이터에 들어가자마자 마침 도혜선이 전화를 걸어왔다. 나는 영식에게 손님을 모시고 먼저 올라가라고 눈짓하고는 아래층 홀에서 전화를 받았다.전화를 끝내고 다시 엘리베이터에 오르자 부부처럼 보이는 한 쌍이 함께 올랐는데 남자는 길쭉하게 뻗은 몸매에 얌전하고 조용한 모습이 학자 같았지만, 유난히 날카롭고 뜻을 보아낼 수 없는 깊은
동철은 내 지시를 들은 뒤 나를 긴장케 할 소식 하나를 전해줬다.“한 대표님, 누군가 이랑을 뒷조사하고 있습니다.”동철의 말투는 사뭇 진지했고 나는 그 속에서 위험의 시그널을 들어낼 수 있었다.“언젠데요?”나는 숨을 참고 바로 질문했다.“방금 누군가 이랑의 시스템에 침입을 시도했고 저희한테 발각됐어요. 시스템을 강화했으니 지금으로선 저들도 더는 방법이 없을 겁니다. 하지만 이런 사건이 발생했으니 누군가 이랑을 조사하려 하고 이랑을 무너뜨리려는 것만은 확실해요.”동철이 확신에 찬 채 말했다.“그럼 상대방은 누군지 알아낼 수 없나요?”이런 시기에 우리를 뒷조사할 사람이 또 누가 있을까.“철수가 빨라서 단서를 미처 잡아내진 못했어요!” 동철이 아쉽다는 듯 말했다.어떻게 이랑에 주의를 돌린 거지? 나는 조바심이 나며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게 누구든 좋은 일은 절대 아닐 것이다.이랑을 아는 사람은 불과 몇 명뿐인데 이들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적이었다.더군다나 이 시점에서 이랑이라는 히든카드를 드러낼 수는 없었다.“아, 맞아요, 동철 씨. 오늘 병원에서 깁스를 풀 때 한 남자와 마주쳤는데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날 납치할 때 있었던 그 사람 같아요!” 나는 사건의 경위를 동철에게 설명해 줬다.“이제 보니, 누군가가 우리를 조사하고 있는 게 확실하네요. 대표님, 지금부터 나가실 때 안전에 유의하세요. 사람을 시켜 조사를 맡기고 저도 우연 씨가 조사하고 있던 결과를 슬쩍 물어볼게요.”동철이 신신당부했다. “저들이 몰래 숨어있으니, 우리도 경계를 늦춰선 안 됩니다”“그래요! 무슨 소식 있으면 바로 알려주세요!”나는 동철에게 말했다. “이랑 쪽은 최대한 비밀에 부쳐주세요. 길진 않을 겁니다. 계획대로 실행되고 나면 상관없을 거예요.”계획의 물밑 작업을 끝내고 나면 그들이 알든 말든 상관이 없었기에 길게 비밀에 부칠 생각을 하지 않았다.동철과 통화를 마친 후에야 룸에 들어갔고 영식은 앉을 자리를 마련해줬다.이번 만찬은 사무실에서 채 못다 한
다만 천우 그룹과 형원 중 어느 곳도 내가 좌지우지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그러나 어쩐지 이 두 회사 중 누가 건물 시공을 맡더라도 내게 인테리어 작업이 넘어올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천우 그룹은 이미 우리와 인테리어 계약을 맺었으니, 그들이 개발권을 얻으면 우리도 자동으로 인테리어 권한을 얻는 것이었고 형원의 경우도 지금 나와 이청원 사이의 관계를 보면, 그도 이 일을 내 손에 맡길 가능성이 있었다. 나는 나와 이청원 사이에 이미 그런 암묵적인 합의가 있다고 확신했다.만약 개발권을 얻어낼 승산이 없다면 왜 차선책을 선택해 내 전공 분야에 집중하지 않았을까?나만의 인테리어 브랜드를 발전시킬 수 있으니 하늘이 내린 기회가 아닐까?특히 지금, 우리에게는 제니 같은 디자이너가 있으니, 그녀를 기반으로 몇 명의 유명한 국내외 디자이너를 영입하면 우리만의 경쟁력과 설득력도 생기고 분명히 승산이 있을 것이다.이런 생각이 머릿속에 떠오르자마자 나는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찾은 듯 바로 운영 기획자와 이 아이디어를 공유했다.의외로 그들은 이 아이디어에 흥미를 느꼈는지 한층 더 발전시키며 큰 짐을 내려놓게 해줬다. 즉, 이런 방식으로 우리의 자격, 경험, 자본이 더 설득력 있게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조이스는 내 아이디어에 대해 극찬하며 전적으로 동의했다. "저도 대표님의 이 아이디어에 완전히 동의해요. 자격, 경험, 현재의 자본 모두 인테리어 작업에 더 적합해요. 브랜드를 확립하고 입지를 다진 후에 조금씩 개발로 나아가면 더욱 튼튼해질 거예요."그녀의 옅은 갈색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았다. “이것도 하나의 과정이 필요한 거예요. 단번에 완성하기엔 아직 우리의 경험이 부족하기도 하고요. 선배님, 이건 제가 항상 생각해 왔던 의견이에요!”장영식은 나와 조이스가 뜻을 모으자 바로 기획자들과 새로운 방법을 추가시켰다.열띤 토론과 총결을 거친 결과, 이 방법이 더 접근하기 쉬워 보였다. 결국, 신흥은 인테리어와 건축 자재 분야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니
"그건 그가 너의 진정한 배필이 아니라는 뜻이야! 너에게 필요한 것을 줄 수 있는 사람은, 너를 지켜주고 소중히 여길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해. 그 사람이 너에게 아무것도 줄 수 없으면서, 오히려 위험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게 어떻게 배필이겠어?" 내 말은 꽤 거칠었다.미연은 반박하지 않았고, 한참을 망설이다가 나에게 속삭였다. "사실, 지아야, 나도 고민했어. 하지만 그를 떠나는 고통을 생각하면, 차라리 죽음을 맞이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어. 어쩌면 많은 수고를 더는 방법이기도 하겠지."나는 어이가 없었지만, 미연이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었다. 마음속으로는 나도 배현우에 대한 미련을 끊어내지 못했기에 가장 좋은 방법은 그가 먼저 등을 돌리는 것이라 생각했다. 마치 그때의 우리처럼 말이다. "너희들은 어떻게 만났어?" 나는 미연에게 물었다.미연은 여전히 소파에 축 늘어져 있었고,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의 목소리가 멀게 들려왔다."우연히 만났어. 내가 관리하는 소속 아티스트 중에 루한이라는 친구가 있는데, 누군가를 따라서 제경에 간 거야. 그때 웬 양아치 눈에 들어버렸지. 하필 루한이는 내가 제일 아끼는 신인이었는데 말이야."나는 잔을 들고 그녀 곁에 앉아 진지하게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그날 사건이 터졌을 때, 그녀가 내 핸드폰으로 전화했어. 나는 당장 제경으로 달려갔지만 그 양아치 도련님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 내 체면을 봐줄 리도 없었지. 나한테까지 손을 쓰려고 하더라고. 그래서 나도 망설임 없이 술병을 들고 그놈 머리를 깨버렸어..."나는 무의식적으로 흠칫 놀랐다. 사태가 심각했음을 알 수 있었다."결과적으로 사건은 커졌어. 그 양아치 새끼 배경이 엄청나서, 제경을 도망쳐 나오기도 전에 제경 자체가 포위돼 버린 거야. 그곳에 온 사람들은 일반 사람들이 상상도 못 할 만큼의 영향력이 있었거든. 나는 굴복하기도 싫었고 화도 났던 터라 부러진 술병을 내 정맥에 대고 그들을 위협했지만, 그들이 이깟 걸로 무서워할 사람
우리 둘은 잠깐 침묵했고, 그 후에야 미연이 다시 말을 이었다."자리에 있으면 그 자리에 맞는 일을 해야 해. 내가 책임진 아티스트들이 상처받는 걸 그냥 둘 순 없잖아. 그녀가 전화를 안 했다면 모를까, 전화가 왔으니 무시할 수 없어."나는 미연이 얼마나 의리 있는 사람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확신하는 일에는 무모하게라도 뛰어들었다.그래서 나와 신호연이 이혼하려 했을 때, 그녀와 신호연 사이에 무슨 일이 있다고 의심했던 것은, 항상 내 마음속에 미연에 대한 미안함으로 남아있었다.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았지만, 나는 계속 마음에 담아두었다.미연은 내 생각을 알지 못하고 계속 말했다. "그 당시 상황에서는 루한이를 데리고 나가고 싶었어. 그 아이는 데뷔한 지 얼마 안 됐고, 앞날이 창창한 데다 부지런하고 허영심도 없는 아이였어. 솔직히 말해, 한소연보다 훨씬 가치가 있었지. 내가 어떻게 할 수 있었겠어? 그녀가 해를 입고 앞날을 망치는 걸 그냥 지켜볼 순 없었겠지?"나는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미연은 갑자기 매우 진지하게 나에게 말했다."그리고 그거 알아? 루한이를 제경에 데려간 건 임가연이 소개한 사람이야. 루한이에게 모델 자리를 소개해 준다고 거짓말까지 했대""그 임가연도 진짜 골칫덩어리야. 모두에게 해를 끼치고 있잖아. 너희 회사에서는 왜 그런 사람을 계속 쓰는 거야?" 나는 조금 화가 치밀었다."이번 천우 그룹 사건 때문에 이미 해고됐어. 그날 차에서 돌아가는 길에 이세림에게 전화를 걸었더라고. 이세림이 알고 있는 정보는 그녀가 흘린 거야." 미연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이게 바로 네가 원하던 결과 아닌가?""맞아! 나는 이세림를 다시 서울로 데려와야 해. 그런 나쁜 짓을 하고도 멀쩡하게 돌아갈 수는 없지. 그렇게 쉽게 끝낼 순 없어. 농락당하는 기분을 느끼게 해주고야 말겠어."나는 술을 한 모금 마시고 미연에게 물었다. "그 뒤로는 어떻게 됐어? 어떻게 사랑에 빠진 거야?"나는 은유적으로 물었고, ‘사
이것은 나에게 회피할 수 없는 책임이었다.나는 반드시 문기태를 만나야 했다. 그와 직접 만나보지 않고서는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지금의 이 감정은, 문기태에게 다른 이유가 있지 않다면, 그도 미연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남자들처럼 바람을 피운 것일 뿐이다.하지만 만약 그가 정말 그런 생각을 했다면, 그건 미연을 회생 불가능한 상황으로 몰아넣는 것이 될 것이다. 생각만 해도 너무나 끔찍한 일이었다.나는 미연이 그의 손에 망가지는 걸 그냥 지켜볼 수 없었다. 그건 완전한 재앙이 될 것이다.남미주가 그에게 전혀 관심이 없거나, 그가 밖에 다른 여자가 있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다면 모를까,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매우 작았다. 그런 유아독존인 여자가 어떻게 다른 사람과 자신의 남자를 공유할 수 있겠는가?게다가 저녁에 마주쳤을 때 동행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그들의 돈독한 관계를 보아낼 수 있었다.이런 냉철한 분석을 거치자 나는 점점 불안해졌다. 마치 얼음 구덩이에 빠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미연의 모습을 보니, 그녀는 마치 이미 죽음을 각오한 것처럼 보였다."사랑 앞에서 사람들은 원칙을 고수할 수 없어. 빠져들면 할 수 없지. 우리는 신이 아니라 사람이야. 하,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어.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냥 순리대로 가는 거야, 감정을 따라가는 거지."미연의 표정은 복잡했고, 그녀의 말은 나를 더욱 불안하게 했다. 나는 그녀의 심정을 잘 이해할 수 있었지만, 사랑해도 얻을 수 없는 그런 쓰라림을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시간이 너무 늦어지자 나는 일어나 그녀에게 작별 인사를 했고 미연이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냥 여기서 자는 건 어때?"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집에 가는 게 낫겠어. 여기서 우리 둘이 잠들 수나 있을 것 같아? 내일 중요한 일도 있고. 너도 너무 많은 걸 생각하지 마. 하지만 충고하는 데 남미주는 결코 평범한 사람이 아니야. 두려워하라는 게 아니라, 조심해야 해."나는 그녀
나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 마지못해 고개를 들어 서강민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서강민 씨, 먼저 들어가시죠. 언니가 깨서 서강민 씨를 보면 또 흥분할 것 같은데... 지금 같은 상황에 언니가 회복하는 게 제일 중요하잖아요.”그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았지만, 나는 한마디 더 보탰다.“어떤 일들은 천천히 해야 해요. 언니한테 시간을 좀 주세요. 서로 생각을 정리해 봐요.”서강민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고 깊은 잠에 빠진 도혜선을 한참이나 지켜보았다. 발길을 돌리기 전에도 아쉬움에 한 번 더 뒤돌아보며 나한테 말했다.“고생해 줘요.”나도 담담히 답했다.“제가 해야 할 일인걸요. 언니에게 시간을 좀 줘요. 언니도 회복할 시간이 필요할 수 있잖아요.”내가 말하는 회복이 뭔지는 서강민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건 도혜선이 마음에 입은 상처였다. 오늘 도혜선의 행동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그녀의 상처는 아물 수 없을 것이다. 언급만 해도 피가 흘러내릴 만한 상처였다.잠시 후, 서강민은 한발 물러섰지만, 눈길은 여전히 도혜선에게 머물러 있었다. 평온해 보이는 모습 아래에서 어떠한 파도가 휘몰아치는지 나는 몰랐다.한참 전 도혜선이 했던 말들은 마디마디가 주옥이었다. 모두 그녀가 마음속으로만 담아두었던 것들이었고 또한 서강민의 약점이었다. 얼마나 아플지는 서강민 본인만 알고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쓰디쓴 독주도 그는 혼자 삼켜내야만 했다.도혜선의 눈가가 파르르 떨려와 깨어나려는 낌새가 보이고 나서야 서강민은 조용히 병실을 나갔다.나는 마음이 아파와 한숨을 내쉬며 손을 뻗어 도혜선의 손을 맞잡았다.인제야 하루 종일 배현우에게서 연락이 없었다는 것이 생각났다. 그쪽에는 어떤 상황인지, 김우연에게서는 소식이 없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도혜선을 보니 아직 깨어나지 않은 것 같아 살며시 그녀의 손을 놓고 일어서려 했을때, 그녀는 다시 나를 잡으며 미약한 목소리로 말했다.“가지 마...”나는 너무 놀라 얼른 그녀를 향해 몸을 돌렸다.
‘서강민은 본인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기나 하는 걸까?’“당시의 사고는 내가 저지른 거야. 그녀도 나 때문에 다쳐서 지금처럼 된 거고… 나는 좋은 남편이 아니야. 아내가 식물인간이 되었는데 나는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으니 말이야...”서강민은 여기까지 말하며 후회하는 기색을 내비쳤다.“그녀를 마주할 때마다 너무 죄책감이 들고 고민스러워. 나 또한 발버둥 쳐봤지.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나의 일탈을 받아들일 수 있어 해. 그녀한테 정말 미안한 일이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내가 널 사랑하고 있다는 거야...”“강민 씨!”도혜선은 꾸짖는 듯한 말투로 그의 말을 잘랐다.“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당신 아내가 듣고 있을 거예요. 저를 끌어들여서 같이 속죄할 생각하지 마세요. 저는 당신의 구세주가 아니에요. 저는 그냥 사람답게 살고 싶은 평범한 여자라고요. 저 좀 그냥 내버려둘 순 없어요?”도혜선은 말하면 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라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하얗게 질린 얼굴이 일그러지며 그녀는 한 손으로 본능적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나는 깜짝 놀라 그녀 앞으로 갔다.“혜선 언니, 움직이지 마! 위험해...”늑골 골절과 뇌진탕이 있는 환자다 보니 이러한 행동은 그녀에게 너무나도 위험했다.도혜선은 손을 들어 그녀를 안으려고 하는 한지아를 제지했다.“제가 오늘 한 말이 아직도 이해가 안 되나요? 서강민 씨, 저의 인생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당신한테 묶여 당신의 부속품이 되었었는데 저도 자존심이 있어요. 더 이상 당신처럼 지난날의 죄책감을 짊어지며 답답하게 살아가지 않을 거예요.”도혜선은 여전히 분노에 차 외치고 있었다.“매일 제 앞으로 와 지난날의 행동에 대해 속죄하라고 일깨워 주실 필요 없어요! 당신을 보면 저는 지난날 모든 서울 사람의 웃음거리가 되었던 치욕적인 과거가 떠올라요. 당신은 마음 가는 대로 해요. 당신은 아내와 했던 약속을 지켜야 해요.”말을 마친 도혜선은 숨이 차올랐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보였다.
도혜선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계속하여 들려왔다.“당신은 아무런 부담 가질 필요 없어요. 저 같은 여자 마음속에 담아두지 않아도 돼요.”그녀는 자기비하적인 말을 내뱉었다.”선아...”“설사 강민 씨가 와이프와의 약속을 안 지킨다 해도 당신의 신분과 지위로 당신에게 더 어울릴만한 사람 충분히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저는 당신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에요. 하물며 당신네 부부 눈에는 저는 그냥 염치없고 미천한 사람일 뿐이죠. 저 같은 사람은 본처가 되기에 적합하지 않아요. 사모님이라는 호칭도 어울리지 않죠.”“나는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 오해하지 마.”서강민은 조급함에 한 발 앞으로 나서며 해명하려 했다.하지만 도혜선은 손을 들어 그를 막아섰다.“강민 씨... 해명하지 않아도 돼요. 당신의 행동이 모든 걸 설명해 주고 있어요! 장담하건대 아직 당신들이 어떤 의도로 얘기하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바보가 된 건 아니에요. 그녀는 정말 대단하네요. 죽을 때까지도 제가 이길 수 없는 사람이었어요. 그녀는 아무리 병상에 누워있어도 고상한 사람이고 저는 그냥 미천한 사람일 뿐이니 말이에요.”도혜선은 말을 내뱉으며 입가에 처량한 미소를 비췄다. 누가 봐도 가슴 아픈 미소였다.“이전의 저는 확실히 허례허식에 차 있는 사람이었지만 저도 성장했어요. 정신 차렸어요. 당신 앞에 있는 저의 진정한 가치가 어떤 것인지 깨달았어요. 저는 하나의 도구, 들러리뿐이었지만 원망하지 않았어요.”그녀는 여기까지 말하고 한숨 돌렸다. 얼굴빛은 아까보다 더 창백해져 있었다.“하지만 이제 저는 자존감을 챙기며 살고 싶어요. 누군가에게 의탁하지 않고 쓰레기같은 취급을 받더라도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며 살고 싶어졌어요.”점점 더 차가워지는 도혜선을 바라보며 서강민은 답했다.“혜선아, 나는 널 한 번도 무시한 적 없어. 나는 그냥 내가 뭘 하든지 네가 다 이해해 줄 줄 알았어.”도혜선의 서강민의 말을 듣고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안색은 더 창백해져 있었다.“이해? 당신이 어떤 말을
방금 허투루 한 말이 어머니의 진실인가 싶다. 보아하니 어머니가 나를 속이는 일이 있는 것 같았다. 마음속의 의문점이 점점 많아졌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식사를 마치고 차씨 가문의 할머니께 말씀을 드린 후, 위층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 도혜선을 보러 가려고 준비했다.그리고 팔도 겸사겸사 검사하려고 했다. 차에 앉고 나서 배현우한테 전화를 걸었는데 받지 않았다. 이 이른 아침에 뭐 하러 갔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김우연 쪽에 무슨 소식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했다.'생각해 보니 이렇게 빠르진 않겠지? 몇 시간밖에 안 됐는데.'병실에 도착하자마자 도혜선이 노발대발하는 장면을 포착했다. 병실에는 도혜선과 서강민 두 사람만 보이고 이미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내가 들어서자 분위기가 좀 이상하고 심상치 않는 것을 느꼈다.침대 옆 머릿장에는 보온병이 놓여있다. 서강민은 오늘도 도혜선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주러 온 것 같다.서강민은 침대 앞에 떡 하니 서있었고 침대에 있던 도혜선은 차가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도혜선은 내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 같았다.상황을 정리하려고 다가가서 서강민에게 인사를 하고 도혜선에게 다가갔다. "오늘은 좀 어때?""별로야."도혜선은 차갑게 대답하더니 또 말을 건넸다. "지아야, 손님 좀 배웅해 줄래?"난감했다, 도혜선은 서강민을 내쫓으라고 하는 거였다. 난 당연히 그 뜻을 알고 있다. 조심스럽게 서강민을 쳐다보았다. "혜선아, 꼭 이래야 하니?"서강민은 씁쓸한 표정으로 도혜선을 바라보며 물었다."네! 서강민씨, 저는 이미 분명히 말했고 두 번 다시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도혜선은 내가 그 자리에 있다고 해서 서강민의 체면을 세워주지 않았다.참지 못하고 웃어 버렸다. "언니, 화 그만 내고 진정 좀 해. 초조해하는 거 알아, 점차 좋아질 거야. 강민씨랑 얘기 좀 하고 있어. 나는 팔 검사해야 돼서, 금방 돌아올 거야!"나는 핑계를 대고 떠나서 그들에게 자리를 비워주었다.
배현우는 나의 우울한 모습을 보고 말했다. "그리고 내가 없는 동안에 회사 일도, 한심로얄의 마지막 한방도 둘 다 포기할 수 없잖아요. 신예 쪽 일도 있고, 전희가 다시 살아날 기회를 얻지 않도록 조심해야 돼요. 지금 모든 게 중요한 시기이니까요.""지금 그 누구도 아버지보다 중요하지 않아요! 수십년간 도망치면서만 살았는데 죄책감도 가지고 있었을 거예요, 분명 아주 괴로워하고 있을 거예요. 그리고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무도 모르고 있는데, 내가... 내가 딸로서, 난..."배현우는 내 말을 듣고 나서 침대에 누워 나를 꼭 껴안고 말했다. "일단 내일 소식을 기다려 봅시다. 김우연 쪽에서 어떤 정보를 얻었는지 보고 결정합시다."배현우는 나의 어깨를 툭툭 쳤다. "제 말 듣고 일단 자세요, 내일 일어나서 먼저 할 일들을 처리하고 준비하고 있으세요, 만약에 상황이 좋으면 내일 같이 데리고 갈게요, 당신 마음 충분히 이해해요."배현우가 지금 나를 위로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다. 내가 기분 나빠하는 모습을 보지를 못한다. 그 말을 들으니 마음이 좀 편해지는 것 같았다. 배현우의 따뜻한 품에 안기며 눈을 감고 내일 먼저 무엇을 처리해야 할지 생각했다.근데... 눈을 떠서 배현우를 쳐다보는데 배현우도 잠에 들지 않았다. "현우씨... 할머니가 보존하고 있는 CCTV를 보여주시겠어요?"'그 영상을 꼭 보고 싶었다, 알고 싶었다. 어머니가 어떻게...'"알았어요, 하지만 지금은 자세요, 나중에 보여 드릴게요. " 팔짱을 끼더니 분명히 나를 얼버무리고 있는 것이다. 배현우가 그 장면을 내게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밤이 깊었고, 비까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배현우의품에 안겨 점점 잠이 들었다. 아침이 밝았다. 날씨는 여전히 흐렸다. 배현우는 이미 곁에 없었고, 손을 뻗어 그가 누워 있던 곳을 만졌다. 이미 차가운 걸 보니 배현우는 일찍 침대에서 일어났나 보다.'무슨 소식이라도 왔나?'이
"할머니가 이번 사건을 피할 수 있었던 건 당시 큰 병을 앓은 것에 대해 감사해야 했어요. 제 생각에는 반은 꽤병인것 같아요. 직접 사표를 쓰고 나서도 서둘러 호주를 떠나지 않았다는 게 참 슬기로운 선택이었어요.""네?"너무 놀라서 몸 둘바를 몰랐다.배현우는 인정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는 호주를 떠나지 않으셨어요. 그곳에 머물면서 배씨 저택의 인기척을 살피다가 배씨 저택의 요상한 소문들이 완전히 자취를 감춘 뒤에야 조용히 호주를 떠나셨어요."나도 모르게 할머니의 메커니즘에 감탄했다."저도 그때 상황을 잘 몰라서, 할머니도 몸이 허약했고 내 행방을 알아 볼 길이 없어 그 비밀을 계속 지켜왔었나봐요. 부하들이 할머니를 찾고 나서도 여전히 어리석은 척을 하고 있었지 뭐에요."배현우는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할머니께서 저를 두눈으로 직접 보고서야 그걸 꺼냈어요."배현우의 말을 듣고 나니 할머니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러던 중 배현우가 나를 쳐다보더니 나의 지친 모습을 보고서야 손을 들어 대문을 열어 장벽들이 천천히 열리는 걸 볼 수 있었다.차는 왔던 길을 따라 경원으로 다시 돌아갔다. 벌써 자정이 되어 우리 둘은 차를 세우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가 방에 돌아왔다.'우리를 배신한 소인이 두 집안을 풍비박산 시켰다니. 오늘 밤 일어난 모든 일들은 듣고도 믿기지 않았다.'간단히 씻고 걱정 가득채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태어나서 얼굴도 한번 못 본 아버지가 어디 있는지, 밥은 먹고 다니는지를 걱정해 발 뻗고 자지 못했다. '한강인이랑 한걸은 이미 잡혔는데, 우리 아버지는? 그의 처지는 어떤지.''한씨 부자가 그저 아버지를 인질로 삼아 그들의 안전을 확보하려 했다면 왜 배현우는 그곳의 환경이 복잡하다고 했을가.''이유는 간단하다. 누군가 아버지를 미끼로 삼으려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를 보고 싶으려는 걸가?''배현우? 아니면 배유정?'생각할수록 더욱 걱정이 됬다.아버지의 이번생은 이미 충분히 힘들다.어머니랑 서로
나는 걱정스레 배현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배현우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계속 말했다.“후에 목격자 어르신을 찾고서 한강인을 자세히 조사하니 한강인은 이 모든 것이 일어난 뒤에야 천우 그룹을 떠난 거였어요. 지아 씨도 알잖아요. 그때 당시 천우 그룹은 아직 배유정 손에 있었어요.”“현우 씨의 말은 한강인은 배유정 과도 사이가 틀어졌단 말인가요?”나는 추측하며 물었다.“우리가 조사할 때 이상한 단서 하나가 나왔어요. 한동안 배유정도 한강인을 찾았고 심지어 한강인에 대한 추살령도 내렸어요! 참 이상해요. 배유정은 왜 한강인을 죽이라고 지령을 내린 걸까요?”“이유는 하나뿐이죠. 즉 한강인이 분명 무엇을 알아냈거나? 아니면 어떤 일에 참여하였거나?”나는 대답했다.배현우는 고개를 끄덕이었다.“진백이 죽임을 당했듯이 이 안에는 분명 남들한테 들키면 안 되는 비밀이 있는 거겠죠. 우리는 이 단서를 따라 계속 추적해 보니 한강인의 혐의가 점점 더 드러나더군요. 그리고 그의 아들 한결도 같이 도망쳤어요.”“그러고 보니 이 안에는 분명히 또 다른 요소가 있겠네요!”나는 사색에 잠겼다.“그래서 우리는 추측했죠. 한강인은 확실히 이 사건이랑 연관이 있고 둘이 도주하는 과정에 서로 연락하는 빈도를 보아서 부자 둘은 서로 다른 곳에 있는 것으로 판단했어요.”“그리고 한강인이 도망 다니는 그 시기에 그의 모친이랑 누나 모두 영문도 모른 채 실종되었어요. 지금 보니 그분들은 아마 이미 이 세상을 떠난 것 같네요. 이 때문에 한강인은 고두리에 놀란 새가 돼서 끊임없이 도망치며, 이 또한 한강인이 지금의 상태로 되게 한 원인인 것 같아요. 사실 한강인은 원래 지금의 모양이 아니거든요.”배현우의 말을 듣자 나는 저도 모르게 아까 보았던 한강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한강인은 극도의 공포 속에서 엄청 정신적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니면 다른 기타 방식으로 정신을 잃지 않게 버티고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사람이 저렇게 말라죽을 정도일 리가 없다.“그리고 한 가
배현우는 나를 한눈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었다.“맞아요. 제 씨 어머니가 얼마나 총명한지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어요. 제 씨 어머니는 책 속에 카메라를 숨겨두고 만약 사고가 난다면 여기에 있는 이 물건을 숨겨두었다가 훗날 믿음직스러운 사람에게 주라고 할머니한테만 똑똑히 당부해 두셨어요!”나는 코가 찡긋거리더니 눈에는 눈물이 핑 돌았다.“보아하니 제 씨 어머니는 분명 위험이 닥칠 거라는 것을 미리 예감했던 거네요!”배현우는 안색이 조금 어두워지더니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갑자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제 씨 어머니는 만약 자신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할머니더러 애들을 데리고 허씨 가문으로 가라고 할머니한테 당부하셨어요.”나는 끝내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고 코를 훌쩍이었다.배현우는 자기 손을 꽉 움켜쥐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참 생각지도 못한 게 모든 것이 제 씨 어머니의 예상대로 일어났고 감춰둔 카메라에 모든 것이 담겼어요! 근데 할머니는 제 씨 어머니의 뜻대로 우리 둘을 순리롭게 허씨 가문으로 데려가지 못했어요.”“급한 나머지 할머니는 고씨 가문에만 소식을 전했고 그마저도 나쁜 놈들보다 동작이 빠르지 못해 그들이 지아 씨를 데려간 후였어요. 그래서 저만 고씨 가문에서 데려갔어요.”나는 눈물을 닦아내면서 그때 당시의 내가 얼마나 힘없고 무력했을지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갑작스럽게 어머니가 돌아가신 데다가 배현우와 억지로 갈라지게 되었다.배현우는 내 손을 꽉 잡으며 손에 힘을 주었다.나도 배현우 지금의 심정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날 배현우는 눈앞에서 억지로 끌려 나가는 나를 보기만 하고 반항할 수도 없는 그런 무능력함은 아마 배현우한테 평생 잊지 못할 아픔이 되었을 것이다.차 안은 갑자기 조용해졌고 자동차가 앞으로 가는 소리밖에 안 들렸다.한참 뒤에야, 배현우의 잠긴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이런 것들을 찾은 후에야 비행기 추락 사고가 떠올랐고 이로써 모든 것들이 비로소 한강인을 추측하게 했으며 그 이후에 우리는 한강인
이 소식은 그야말로 나를 입이 떡 벌어지게 했다. ‘나를 데려간 게 어떻게 그 사람이지?’“맞아요. 우리는 유일한 목격자를 찾았어요. 그 당시 그쪽 산에서 약재를 캐는 어르신이신데 그때는 중년인이셨어요. 하늘의 뜻인지, 우리가 수년을 찾아 헤맨 끝에야 비로소 이 참극의 전부를 직접 목격한 증인을 찾아냈어요.”“그 어르신 정말로 전체 과정을 모두 목격하셨나요?”나는 믿어지지가 않았다. 배현우 얘네가 얼마나 큰 공을 들여야 바다에서 바늘 건지는 것 같은 일을, 그것도 몇 년이 지났는데도 당시의 목격자를 찾아낸 걸까.“어르신의 말로는, 당시 자기는 산 위에서 내려오는 도중에 잠시 계단에서 쉬고 있었는데 그러다가 아래 도로에서 일어나는 광경을 목격했다고 해요. 알다시피 외국에서는 약재를 캐는 일은 엄청 드물어요.”배현우는 엄청 뿌듯한 말투로 말했다.“우리 형제들이 엄청나게 고생 많았어요. 십수 년을 하루같이 귀찮음을 마다하고 사건 지역을 탐방하러 다니면서 일말의 흔적도 소홀히 하지 않았어요.”나도 믿어지지 않아 입을 열었다.“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어요. 참 노고가 많았어요.”“어르신이 말씀하기를 당시의 장면은 엄청 아슬아슬했대요. 부딪힌 차는 거의 굴러떨어지기에 일보 직전이었는데 후에 폭발했대요. 어르신은 우리의 차가 폭발한 뒤 키 크고 마른 한 남자가 차에서 내리는 걸 똑똑히 봤다고 해요. 그리고 그 남자는 길 왼쪽의 언덕 아래로 달려가 무언가를 찾았대요.”배현우는 그때 당시의 장면을 묘사하였다. 나는 머릿속으로 그때 당시의 상황을 필사적으로 상상해 내려고 하니 머리가 또 아파 났지만, 배현우가 말을 멈출까 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당시에 일어난 이 모든 것, 전부 나한테는 엄청난 매력이었다. 나는 지금 내가 찾아낸 산산조각 난 퍼즐들을 하루빨리 제 위치에 맞춰서 하나의 완전한 그림을 만들어 내고 싶었으며 그때 당시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을 되찾고 싶었다.그 뒤로 난 어떻게 Z 국의 만덕동에서 떠돌게 되었고 또 어떻게 지금의 한지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