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하연은 며칠 동안 밀렸던 일을 처리하고 있었는데, 그 말을 듣고 서류에 집중하던 고개를 들었다. “무슨 정보요?”[강영숙 어르신이 실종됐습니다.]자백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고강도 심문 끝에 한서준이 최하연을 증오하게 되었고, 방어선이 무너져 자백하게 되었다.하연은 ‘강영숙 어르신’라는 말을 듣자마자 일어섰다. “다른 자백은 없었어요?”[그게 전부입니다. 더 이상 말하려 하지 않아서, 우리 사람들이 강영숙 어르신의 행방을 수색하고 있습니다. 최 사장님께도 여쭤봐야 할 것 같아서요.] 하연은 사무실을 오가며 걸었다. 그녀는 이수애에게서 강영숙이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말을 들었고, 무슨 일이 생길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지만, 이후 벌어진 일들이 너무 급작스러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저도 할머니께서 어디 계신 줄 몰라요. 그분은 한서준의 친할머니잖아요. 그런 분에게까지 손을 대다니!”[막다른 길에 몰리면 자기 자신도 희생할 수 있는 법이죠. 하물며 가족은 말할 것도 없고요.]...양한빈은 유용한 정보를 얻지 못한 채 전화를 끊고 손이현에게 전화했다.한씨 가문의 숨겨진 친척으로서, 이현도 이 사실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알고 있어.] 이현의 목소리는 냉담했다. [나도 바로 고향으로 사람을 보내 할머니를 찾았지만, 찾을 수 없었어.]“그럼 끝난 거네요. 어르신의 건강이 이 상황을 견딜 수 있을까요?”[내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할머니께서 한서준의 남은 세력에게 잡혀 있지는 않으신 것 같아. 어디로 가셨는지는... 아직 찾고 있지만, 너희도 멈추지 마.]지난번 한서준과 싸웠을 때, 이현은 한서준의 어투에서 강영숙을 인질로 삼았다는 뉘앙스를 느꼈다.그래서 즉시 사람을 보내 강영숙을 보호하려 했지만, 아무런 흔적도 찾지 못했다.하지만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났고, 한서준 자신도 지금쯤 정신없이 몰려 있을 테니, 강영숙에게 해코지할 여력이 없어 보였다.문제는 이방규다. 한서준이 사고를 친 이후로 이방규는 행방불명 상태였다..
공식적인 장소의 전용 엘리베이터는 고위층 인사들을 위해 준비되어 있었다. 한창명은 분명히 하연이 불편을 겪을까 봐 신경을 쓴 것이다.현장에 있던 방송국의 고위층 인사들은 왕정의 모습을 보고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이 상황을 지켜보던 왕진은 경험이 많은 듯, 한마디 덧붙였다. “친구예요?”하연은 한창명이 고위층 인사들의 환대를 받으며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세 번 만났을 뿐이에요.”‘이번까지 포함해야 겨우 세 번인데...’“그럼 친구라고 할 수 없겠네요.” 왕진은 하연의 옆을 지나며 말했다. “제 생각에 저분이 아가씨에게 관심 있는 것 같은데요. 나중에 친구가 아니라 남자 친구로 발전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하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왕진의 단순한 생각으로는 두 사람 사이에 얽힌 복잡한 감정을 이해할 수 없을 터였다. 하연은 한창명의 속내가 따로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왕정의 자리는 맨 앞줄에 배정되어 있었고, 하연은 회사 걸그룹의 여자아이들이 왕정과 인사를 나누게 했다.이번 행사의 보석 후원을 맡은 신가흔이 하연과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역시 최씨 가문의 막내딸은 착하네, 이렇게 신경을 쓰고 말이야.”하연은 가흔의 농담을 무시하고 물었다. “하성 오빠는 아직 안 왔어? 분명 온다고 했었는데.”최하성이 굳이 올 필요는 없었지만, 온다면 더 좋을 것 같았다.가흔은 약간 달라진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마 내가 있어서 안 오는 거겠지.”“싸웠어?”가흔은 대답하지 않았고,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관객들이 입장 중이었다. “부상혁은 왔네.”하연은 고개를 들었다.상혁은 특별 대우를 받지 않고, 사람들 사이에서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가느다란 햇빛이 상혁의 몸에 비추자, 흰 셔츠에 검은 바지를 입은 그는 단정하고 우아해 보였다. 그야말로 깔끔하면서도 시선을 사로잡는 모습이었다.많은 사람이 상혁을 돌아보았다.상혁은 하연을 향해 걸어왔다. “아직 시작 안 했네.
“한 검사장님도 이런 행사에 관심이 있으시군요. 여기 생방송이 기록을 깼다고 하니, 꼭 한 번 보셔야겠지요.” 옆에 있던 방송국 고위층 인사 중 한 명이 농담을 던졌다.한창명은 미소만 지을 뿐, 그 말에 대꾸하지 않고 상혁을 지나 하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듣자 하니, DS그룹의 걸그룹이라고요?”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그가 하연에게 직접 말을 건네자, 하연은 조금 놀랐다. “네, 오랫동안 준비했습니다.”“괜찮네요.” 한창명이 짧게 평했다.상혁은 손에 든 물티슈로 손가락 하나하나를 닦으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한 검사장님도 이런 취미가 있으신가 보네요. J시에서 미인들을 많이 보셨을 텐데요.”한창명은 상혁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J시에서 본 여인들은 대부분이 ‘명문가 아가씨 수업’에서 오랜 훈련을 받은 분들인데, 아무리 아름다워도 다 똑같더라고요. 부 대표님이 원하신다면 제가 나중에 소개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저는 관심 없습니다.” 상혁은 그제야 무대 위로 시선을 옮겼다. 최근 유행하는 편곡과 안무가 펼쳐지자, 관객들이 열광하며 환호성을 질렀다. “저는 오히려 한 검사장님이 여기 계신 게 더 신기한데요. 워낙 명예를 중시하는 분이라 들었는데, 사적으로 이런 걸그룹 생방송에 참석한 게 알려지면, 이상한 소문이 퍼지지 않을까요?” 한창명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말했다. “왜 사적인 일이겠습니까? 동료도 있고, 부 대표님과 최 사장님도 같이 있는데 말입니다.”현장에서 이 말을 들은 방송국 고위층 인사들은 서둘러 맞장구를 치며, 하나같이 최하연을 유심히 살폈다.주경미가 B시에 왔을 때부터, 한창명과 최하연은 소개받은 사이라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 그래서 지금의 상황을 눈치챈 대부분의 사람은 한창명이 하연을 위해 왔을 거라 짐작했고, 두 사람 사이에 특별한 감정인 오간 것이 아니냐는 추측을 내놓던 참이었다.그러나 방송국 고위층은 부상혁 또한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부상혁 역시 정태산의 제자
“바보 같은 아이, 그런 말은 하지 마...” 왕진은 눈물을 참지 못하며 말했다.왕정은 갑자기 기침하더니 입가에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하연은 깜짝 놀라 손으로 피를 받으며 외쳤다. “정아!!”무대 앞은 순식간에 혼란에 빠졌다.상혁은 바로 일어나 현장에 있는 스태프들에게 지시했다. “길을 트고, 119를 불러야 해!”한창명은 눈살을 찌푸리며, 휠체어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하연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고, 손에는 피가 묻어 있었지만 전혀 주저하지 않고 피를 받아내고 있었다. 이 순간, 그도 하연의 진심 어린 걱정이 느껴졌다.“이걸 쓰세요.” 한창명은 바로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건넸다.하연은 누구의 것인지 따질 겨를도 없이 그것을 받아들고, 피를 닦으며 지혈을 시도했다.왕정은 곧바로 응급차로 이송되었는데, 응급차에는 가족만 동승할 수 있었다. 하연은 왕진 모녀가 떠나는 것을 지켜보았는데, 숨을 고르며 혼란스러운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괜찮을까요?”상혁은 하연의 흔들리는 몸을 붙잡았지만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실은 하연도 마음속으로 어느 정도의 결과를 예상했기 때문이었다.“괜찮을 거야.”하연의 긴 머리칼이 바람에 흩날렸다. 그녀는 힘이 빠진 듯 상혁의 품에 기대어 숨을 고르고 있었다.이 광경을 멀리서 지켜보던 한창명은 무표정하게 서 있었다. 옆에 있던 방송국의 한 고위층 인사가 웃으며 말했다. “최 사장님도 참... 저렇게 위독한 사람을 이런 자리에 데리고 오다니, 한 검사장님도 놀라셨겠어요.”한창명은 바로 굳은 얼굴로 말했다. “위독한 사람이라니,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아, 아닙니다... 그런 뜻은 아니었어요, 한 검사장님...” 한창명은 하연을 한 번 더 흘끗 쳐다본 후, 결국 아무 말 없이 빠르게 자리를 떠났다.걸그룹의 데뷔는 성공적이었다. 뛰어난 춤과 노래 실력으로 수많은 팬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왕정은 10시간의 긴 수술 끝에 결국 숨을 거두었다.깊은 밤, 하
하연과 이현은 조문객들 뒤편에 서 있었고, 주변은 흐느끼는 소리가 가득했다. 하지만 이현은 여유로운 목소리로 분위기를 완화하려는 듯했다.여러 일을 겪은 하연은 더 이상 이현이 낯선 사람이 아닌, 친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솔직하게 말했다. “그래요. 저와 상혁 오빠는 쉽게 헤어질 수 없는 인연이에요.”이현은 다른 사람의 감정에 대해선 신중한 편이라 더 이상 묻지 않았다.“축하해요.”“손이현 씨.” 그가 고개를 약간 돌린 순간, 하연은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듯 그를 불렀다. 이현은 그녀 쪽으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네?”그때, 계속 침목하고 있던 왕진이 갑자기 일어나더니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여기 왜 왔어?”그곳에는 한서영이 있었다. 그녀는 온통 검은빛으로 물든 장례식을 향해 새빨간 옷을 입고, 요염한 화장을 한 채 당당하게 다가오고 있었다.“아주머니, 따님이 떠났다고 해서 특별히 향이라도 하나 올리러 왔는데, 그렇게 나오실 거예요?” 왕진은 분노로 몸을 떨었고, 옆에 있던 사람들이 그녀를 부축했다.“나가! 넌 여기서 환영받지 못해!”하지만 서영은 신경 쓰지 않고, 당당하게 무덤 앞으로 다가갔다. “참 예쁜 얼굴이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마비된 걸까? 하긴, 이제라도 떠나서 다행이야. 자신도 괴롭고, 남까지 힘들게 한 삶이었으니까.” 이 말을 들은 하연은 당장 앞으로 나가려 했지만, 이현이 그녀를 단번에 붙잡았다. “지금 하연 씨가 나서는 건 좋지 않아요.”“근데 한서영이...” “당장 내 눈앞에서 사라져. 지금 당장 나가라고! 그렇지 않으면 내가 경찰을 부를 거야!” 왕진은 분노로 거의 기절할 지경이었다.“아주머니, 왜 이렇게 손님 대접을 못 하셔? 우리 엄마의 자금 지원이 없었으면, 당신 딸이 목숨 연장할 돈을 구할 수 있었을까? 우린 같은 길을 걸었는데, 이제 와서 나를 미워하는 거야?”서영은 비웃으며 웃음을 터뜨렸고, 숨이 찰 정도로 웃었다. “아주머니가 했던 일들, 사람들 앞에서 다 까
하연의 눈동자가 커졌다. 설마 한서영이 대낮에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난동을 부릴 줄은 상상도 못 했다.한서영의 동작은 너무 빨랐다. 손이현이 즉시 손을 뻗었지만, 그녀의 옷자락만 겨우 잡을 수 있었다. 서영은 그대로 하연에게 덮쳐 넘어뜨렸고, 칼을 든 손을 잔혹하게 휘둘렀다. 주위 사람들은 비명을 질렀다.하연은 즉각 머리를 돌려 가까스로 피했다.“한서영! 너 정말 미쳤구나!”하연은 서영의 손을 필사적으로 제압하려 했지만, 서영의 눈은 이미 피로 물들었고, 끝장을 보기 전까지는 포기할 기세가 아니었다.“내 인생은 망했어. 너도 나랑 같이 무덤에 들어가. 너희 집안도 우리 집안과 같이 무너져야 해!”서영은 몇 번이나 칼을 휘둘렀지만, 하연은 아슬아슬하게 피할 수 있었다. 하연은 무릎을 끌어올려 서영의 하반신을 강타했고, 곧바로 몸을 돌려 서영 위에 올라탔다.“한서영!” 하연은 소리치며 서영의 뺨을 세게 때렸다. “네 오빠는 이미 감옥에 들어갔어. 너도 그렇게 되고 싶어?”“지금 안 들어간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겠어!” 서영은 칼을 단단히 쥔 채, 주변 사람들을 경계했다. “이 모든 건 다 너 때문이야!”“왕씨 가문이 사람을 보냈어. 그 사람들은 우리를 망치고 우리 집안을 완전히 접수하려고 하지. 이것도 네가 꾸민 거 아니야?” 서영은 냉소를 지으며 갑자기 몸을 풀었다. “애초에 우리 오빠가 너를 데려오지 말았어야 했어. 호랑이 새끼를 우리 집에 들인 거야. 내가 널 저주한 게 아니라, 너는 원래부터 재앙이었어!” 서영은 말을 끝내며 하연을 향해 침을 뱉었다.옷이 이미 엉망이 된 것을 본 하연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왕씨 가문의 책임자로부터 답이 오지는 않았지만, 한서영이 이 사실을 알고 있다는 건, 그 집안의 책임자가 이미 한씨 가문을 처리할 준비를 끝마쳤다는 뜻이겠지. 그래서 절박한 한서영이 이렇게 미쳐가고 있는 거야.’“한씨 가문의 몰락은 최하연 씨 때문이 아니야.”이현은 서영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쉽게 그
하연은 별로 개의치 않는 듯 말했다. “그런 일들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날 위해서 다른 일을 좀 해줘야겠어.” “무슨 일이죠?”“손이현에 대해 조사해봐. 그 사람의 모든 정보를 다 알아내 줘, 전부 다.”하연은 강조했다. 이에 정태훈은 당황스러워하며 물었다. “손이현 사장님요? 갑자기 왜 그분을 조사하려고 하시는 거죠?”요즘 일어난 사건들은 모두 손이현과 관련이 있었다. 원래 하연과는 아무 상관도 없던 사람이 이렇게 여러 사건에 관여하고 있었다.“학비도 기부금으로 충당해야 했던 고아가 어떻게 별장을 소유하고, 가게를 운영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는지 궁금하네. 나도 좀 배워야 할 것 같아.”태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한 후, 추가 정보를 전했다. “이미 승진하신 전 지방검찰청 검사장, 정태산 검사장님께서 곧 B시에 오실 예정입니다. HD그룹 방문 일정이 잡혀 있고, 송 대표님과의 만남 가능성도 매우 큽니다. 그 사이에 약 30분 정도 시간이 생길 것으로 보이는데, 그때 최 사장님께서 송 대표님을 뵐 수 있을 것 같습니다.”“정태산 검사장님은 언제 오신대?”“모레입니다.”하연은 일정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녀는 목의 상처를 만지며 말했다. “오늘 있었던 일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 상혁 오빠에게는 특히.”하연은 상혁이 자신을 걱정하는 걸 원하지 않았고, 더 큰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도 않았다. 그날 황연지가 했던 말이 가슴 깊이 박혔기 때문이다. 사실 하연도 자신이 상혁에게 너무나 큰 짐이 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태훈은 약간 민망해하며 헛웃음을 지었다. “그럴 리가요. 저는 최 사장님의 비서예요, 부 대표님의 비서가 아니잖아요.”하연은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 “너 꽤 많은 걸 말했잖아.”묘지를 떠난 후, 이현은 곧바로 가게로 향했다. 거기에는 양한빈이 오래 기다리고 있었다.“손 사장님, 도대체 무슨 일인데 전화로 말하지 않고 직접 보자고 한 거예요? 저도 바쁜 몸이라고요.” 양한빈이 농담을 던졌다.“한서영이 악
[창명이는 시류를 모르는 사람이 아니야. 내 학생 중에서도 창명이는 가장 규칙을 잘 지키고, 본분을 넘지 않는 애라고.]전화기 너머로 정태산이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그럼 저는요?”[너? 너는 말로는 듣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가장 엉뚱하게 행동하지. 거의 내 머리 위에 오르려고 하지 않았나?]만약 조진숙이라는 배경이 없었다면, 정태산은 사실 부상혁의 이런 행동을 참지 않았을 것이다. 상업에 종사하는 자가 정치에까지 간섭하며, B시의 두 거물을 몰락시켰다는 건 너무나도 지나친 일이었다. 스승과 제자의 인연은 여기까지 해도 충분했다. 더 이상 도울 수 있는 점이 없었다.상혁은 가볍게 웃음을 흘리며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정태산이 가장 아끼던 학생은 부상혁도, 한창명도 아니었다. 그것은 지금은 모습을 감춘 정태산의 자랑스러운 제자였다.전화를 끊자, 황연지가 문을 두드리며 들어왔다. 오늘의 업무를 보고한 후,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꺼냈다.“부 회장님께서 다시 DL그룹을 장악하신 이후, 부남준이 자주 드나들며 사실상 실권을 쥐고 있는 듯합니다. 이사회에서도 부남준에게 극진히 예를 갖추고 있습니다.”“모두...” 연지는 말을 잇지 못했다.“말해.” 상혁이 다그쳤다.“모두들 대표님이 완전히 총애를 잃고, DL그룹에서의 지위도 무너졌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원래 대표님을 지지하던 이사들마저도 지금은 흔들리며 저한테 상황을 물어보고 있습니다.”연지는 상혁이 FL그룹 일에 몰두하느라 DL그룹에서의 입지를 신경 쓰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하지는 않았다.“넌 뭐라고 대답했지?”“DL그룹의 구매팀과 재무팀은 여전히 저희 편에 있습니다. 그래서 부 대표님께서 DL그룹을 포기하실 생각이 없으니, 조금만 더 버티라고 했습니다. 지금은 부 회장님께서 화가 나 계시지만, 일이 끝나면 곧 돌아가실 거라고 말했습니다.”상혁이 눈을 들었다. 연지는 긴장하며 몸을 떨었다.“그게 내 지시였나?”“아닙니다...” 연지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 “
부동건은 갑작스레 거칠게 기침을 터뜨렸다. “컥”‘피 맛...?’ 목 안에서 치밀어 오르는 피비린내를 억지로 삼켰다. 손등에 핏줄이 선명히 드러나고, 이성의 끈은 이미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부동건의 시선이 천천히 송혜선과 조봉규를 향했다. ‘죽여버리고 싶다.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너희들... 너희들...” 부동건의 입술은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송혜선은 극도의 공포에 휩싸였다. ‘이건 아니야... 이렇게 끝나면 안 돼...’ 그녀는 급히 앞으로 다가가 부동건의 팔을 붙잡았다. “회장님... 우리, 조 선생님이랑 그냥 산후 회복 얘기하던 중이었어요. 진짜예요, 저희는...” 그 말이 끝나기도 전, 부동건의 손이 송혜선의 뺨을 후려쳤다. 짝! 순간 정적. 강하게 내리친 손바닥 소리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숨을 멈춘 듯 조용해졌다. 송혜선의 얼굴 한쪽이 순식간에 붉게 부어올랐다. 눈가가 덜덜 떨리며, 눈물도 같이 맺혔다. “이 천하의... 배은망덕 같은 것. 내가 너를 어떻게 믿었는데... 감히 날 기만해?” 뒤에 서 있던 하객들 사이에서도 탄식이 흘러나왔다. “저 정도였어?” “저게 진짜였네... 소문이 아니고...” “...”송혜선은 뺨의 통증을 애써 무시한 채, 다시 붙잡았다. “회장님, 제발... 오해예요. 저희 그런 사이 아니에요. 저는... 당신뿐이었어요.” 그러나 부동건은 그 손마저 거칠게 뿌리쳤다. 그리고는 힘껏 송혜선의 복부를 발로 찼다. 퍽!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송혜선은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 그녀의 입에서 신음이 터졌다. 조봉규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아니야... 지금 나섰다간 나도 끝장이야.’ 한 걸음 다가가려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회... 회장님... 저희... 아무 일도 없었어요... 정말이에요...” 하지만 그 한마디가 기름을 붓는 꼴이 됐다. 부동건은 그대로 조
일 순간 충격의 정점이었다.부동건은 들고 있던 와인잔을 그대로 바닥에 내던졌다. 쨍그랑! 깨지는 소리와 동시에 모든 시선이 그에게 꽂혔다. “저... 저런 미친...!” 그는 화면을 가리키며, 얼굴을 붉힌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숨이 거칠게 턱 끝까지 차올랐다. ‘송혜선... 네가 감히!’ 주변 하객들도 이미 술렁이기 시작했다. “저게 진짜야?” “부 회장님 딸이... 아니라고?” “와... 이건 완전히 생각지도 못한 미친 패륜이야, 상상도 못 했어.” 오늘의 연회는 더없이 화기애애한 분위기였지만, 이제 와선 최악의 스캔들 파티가 되어버렸다. ‘이 연회가... 전부 거짓된 일 때문에 생긴 일이란 말이야?’ ‘우리, 사기당한 거네. 다 같이.’ 그때 스크린이 멈췄고, 연회장 전체의 조명이 다시 환히 켜졌다. 하객들은 본능적으로 두리번거리며 부동건을 찾았다. “회장님, 괜찮으십니까?” 하지만 부동건은 아무런 대답 없이 어금니를 꽉 물고, 몸을 떨며 계단 쪽으로 향했다. 하객들은 그 뒤를 따라붙었다. ‘뭔가 일어나겠군...’ ‘이번엔 진짜 끝장이다.’ ...같은 시각, 2층 방 안. 송혜선은 조봉규의 손등을 다독이며 조용히 말했다. “조금만 참아. 며칠만 지나면 내가 다시 올게.” 조봉규는 싱긋 웃으며, 그녀의 허벅지를 장난스럽게 움켜쥐었다. “응. 기다릴게, 자기.” 하지만 그 말이 끝나기도 전, 문이 거칠게 흔들렸고,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쾅!! “송혜선! 당장 안 나와?!” 송혜선의 온몸이 순간 얼어붙었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조봉규의 팔을 꽉 잡았다. ‘망했다.’ “어떡해, 부동건이 올라왔어.” 두 사람은 당황하며 방 안을 둘러봤지만, 창문 하나 없는 좁은 방엔 도망칠 곳조차 없었다. ‘안 돼... 이렇게 들키면, 끝장이야. 정말 끝이야.’ 송혜선은 급하게 숨을 고르며 애써 이성을 붙잡으려 했다. ‘진정해. 침착해야 돼.
연회장 안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가득했다. 부동건은 손에 잔을 들고, 연신 들어오는 축하 인사에 밝은 표정으로 답하고 있었다. “회장님, 따님이 너무 예뻐요. 축하드립니다!” “아이고, 이런 경사는 자주 있어야죠!” ‘그래, 이 정도면 완벽하지. 오늘은 그 누구도 나를 흔들 수 없어.’ 그렇게 술이 한 잔, 두 잔 더해지며 연회장의 분위기도 점점 무르익고 있었다. 그때, 갑작스레 모든 조명이 꺼졌다. 탁! “어, 뭐야?” “불 꺼졌어! 왜 이래?” “아야, 누가 내 발 밟았어!” “...”순식간에 어둠이 덮친 연회장. 사람들의 놀란 목소리와 웅성거림이 퍼졌다. 잔을 들고 있던 부동건은 순간 정지된 듯 멈췄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변을 살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당장 가서 확인해봐!” “네, 회장님!” 직원들이 급히 움직였고, 부동건은 진정시키려는 듯 손을 들고 말했다. “여러분, 당황하지 마시고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전기 쪽 문제인 것 같습니다. 금방 복구됩니다.” 사람들은 잠시 멈춰 서서 어둠 속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고- 그 순간, 연회장 한쪽 벽면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이 조용히 켜졌다. “위이잉...” 어둠 속에서 갑작스레 터진 화면의 빛에 모두가 눈을 찌푸리며 반사적으로 손으로 눈을 가렸다. 그 빛이 익숙해질 무렵, 누군가가 터트린 외마디 감탄에, 시선이 일제히 스크린으로 향했다. “어... 저거 뭐야? 헉, 저게... 말이 돼?” 그리고, 그 스크린 안에 있는 건... 분명 두 남녀의 은밀한 장면이었다. 화면 속, 분명히 누군가를 알아본 듯한 목소리가 터졌다. “저 여자... 그분 아니야?” “옆에 있는 남자는...?” “헐, 이건 진짜 레전드다.” “아, 눈 버렸어. 이게 뭐야, 이게...” “...”사람들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고, 순식간에 연회장은 도저히 되돌릴 수 없는 혼돈의 도가니로 빠져들고 있었다.사람들 사이에 웅성거림이
송혜선이 복도 입구에 막 다다랐을 때였다. 갑작스레 어디선가 튀어나온 그림자가 그녀를 뒤에서 껴안았다. “꺄악!” 놀란 송혜선은 반사적으로 비명을 질렀고, 누군가 재빨리 그녀의 입을 막았다. “나야! 나야, 혜선아.” 익숙한 목소리에 송혜선은 순간 멈칫했다. 그리고 조심스레 남자의 손을 떼어내며 차갑게 말했다.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이 사람, 지금 제정신인 거야?’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이어서 급히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송혜선은 그제야 숨을 돌리며, 낮은 목소리로 흘기듯 말했다.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미쳤어, 사람들 눈에 띄면 어쩌려고!!” 그 말엔 명백한 불만과 경계심이 섞여 있었다. 조봉규는 잠시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안 되는데...’ 그 순간의 긴장, 그리고 복잡한 감정이 두 사람 사이에 감돌았다.조봉규의 시선이 송혜선의 얼굴에서 천천히 내려앉았다. 송혜선은 산후라 그런가, 몸매는 훨씬 더 부드럽고 풍성해져 있었다. ‘이러니까, 잊으려고 해도... 더 생각이 나잖아.’ 그는 순간 충동적으로 송혜선의 팔을 붙잡았다. “잠깐만.” 당황한 송혜선이 눈을 부릅떴다. “뭐 하는 거야!! 지금...” 그러나 조봉규는 말없이 송혜선을 옆방으로 이끌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작게 ‘탁’ 하고 울렸다. 좁은 공간, 차오르는 침묵. 송혜선은 남자를 노려보며 벽에 등을 댔다. “정신 차려!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조봉규는 그녀를 바라보며 낮게 숨을 내쉬었다. “다들 홀에 있잖아. 아무도 몰라.” 남자의 말투엔 간절함과 조급함이 섞여 있었다. 이건 단순한 욕망이 아니었다. 그리움, 억눌림, 그리고 못다 한 말들. 그는 조심스럽게 송혜선의 턱선을 손끝으로 만지며 말했다. “혜선아... 나, 정말 많이 참았어.” ‘이 사람 또 이러네...’ 송혜선의 심장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분
생각에 잠겨 있던 찰나, 정문 쪽에서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부동건이 고개를 돌리자, 최하연이 부상혁의 팔을 자연스럽게 끼고 등장하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순간, 많은 이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쏠렸다. 잘생긴 남자와 우아한 여자의 조합. 누가 봐도 완벽한 한 쌍이었다. ‘딱 봐도 좋은 그림이야. 저 둘은 그냥 서 있기만 해도 눈길을 끌어...’ “회장님, 부상혁 대표님은 정말 복도 많으십니다. 최씨 가문의 따님과 이렇게 잘 어울리는 커플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 누군가의 말에 부동건의 표정이 확 풀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미묘하던 분위기가 사라지고, 부동건의 얼굴에는 흐뭇한 미소가 피어났다. 부동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두 사람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젊은 사람들이 서로 마음이 맞아 좋아하는 걸, 우리 어른들은 그저 기쁜 마음으로 축하해줘야 하는 일일 뿐이지요.” “게다가 상대가 최씨 가문의 따님이라니, 정말 금상첨화가 아닙니까.” 부동건은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역시 상혁이다. 내 아들이라면 이 정도는 돼야지.’ 상혁은 오늘 이 자리에서 당당히 아버지의 체면을 세워주고 있었다. 한편, 송혜선도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방금 전까지 얼굴에 띄웠던 미소는 점점 사라져 갔고, 그녀의 시선은 어느새 하연에게 향했다. 오늘의 하연은, 나무나 예쁘고... 아니, 그냥 눈이 부실 만큼 찬란했다. 그리고 또렷한 이목구비에 윤기 흐르는 머릿결, 화사하게 피어난 얼굴빛까지. 하연의 행복함이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듯했다. 송혜선의 눈빛이 서서히 차가워졌다. ‘정다영... 그년, 나를 속였어.’ 그동안 하연 쪽에서 뭔가 반응이 있을 줄 알고 기다려 왔다. 하지만 소식은커녕, 정다영조차 자취를 감췄다. ‘다영이 걔가 하연이에게 약 먹이는 계획이 분명 실패한 거야. 그렇지 않고 선 지금 저렇게 멀쩡한 얼굴로 서 있을 수는 없어.’ 이대로 배가 불러오면, 섣불리 손도 쓸 수 없게 된다. ‘
이 질문에 송혜선은 눈을 반짝이며 부동건을 바라봤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젠 나를 당당히 소개해 줄 때가 됐겠지.’ 오늘 이 자리에서, 그녀는 부동건의 정식 아내로서 인정받기를 바라고 있었다. “회장님, 말씀 좀 해보세요?” 조금은 성급한 목소리로 말을 꺼내자, 주변의 시선도 하나둘 송혜선과 부동건을 향했다. 모두 속으로는 뻔히 알고 있었다. 부동건이 과연 예전 애인을 진짜로 정실로 앉혔는지,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했다. 부동건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숨기거나 피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담백하게 말했다. “오 회장님, 이 사람은 제 딸의 어머니입니다.” 순간, 송혜선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딸의... 어머니?’ 손에 들고 있던 와인 잔이 살짝 흔들렸다. 금세 넘칠 듯한 와인, 애써 잡고 있는 감정. ‘지금... 이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억울함이 툭 하고 솟구쳤다. 심지어 손에 힘이 들어가며 하얗게 질린 손등이 떨렸다. 오병지는 단번에 눈치챘고, 싱긋 웃으며 더는 묻지 않았고, 대신 가볍게 말을 건넸다. “축하드립니다. 부 회장님, 여전히 복이 많으시네요.” 부동건은 공손하게 웃으며 송혜선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 손길엔 무언의 위로가 담겨 있었다. “아닙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나중에 저와 이 사람의 결혼식엔 꼭 오셔서 축배 들어주세요.” 그 말에 송혜선의 눈이 번쩍 뜨였다. ‘결혼식...?’ 순간, 가슴이 쿵 하고 울렸다. 이어서 고개를 들며 수줍게 웃었다. “회장님...” 부동건은 말없이 그녀를 더 가까이 끌어안았다. 더 이상의 말은 없었지만, 그 행동으로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주변의 사람들 시선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송혜선을 무시하거나 조롱하던 눈빛이, 지금은 선망과 부러움으로 가득했다. 결국, ‘부동건의 아내’라는 타이틀은 그 자체로 막대한 부와 권력을 상징하는 이름이었다.송혜선은 온
부지윤의 ‘한 달 잔치’는 그야말로 성대한 수준의 파티였다. 초대받은 인사들만 봐도, 그 위세가 느껴졌다. F국 재계의 실력자들, 정재계의 핵심 인물, 이름만 대면 아는 명문가 자제들이 대거 초청됐고, 심지어 부씨 가문 어른들에게도 한 사람도 빠짐없이 직접 청첩장을 보냈다. 이 정도면, 사실상 이 아이를 공식적으로 가문에 편입시키겠다는 의지나 다름없었다. 부동건이 이 아이에게 얼마나 애정을 집착하듯 쏟고 있는지, 이날 행사 하나로 증명되고 있었다. 모든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부동건은 스스로의 체면과 명예를 걸고, 딸을 세상에 내보이고 있었다. ...잔치 당일, 연회장은 유난히 붐볐다. 샹들리에의 조명이 화사하게 반짝였고, 고급스러움이 풍겨 나는 악단의 선율이 분위기를 감싸고 있었다. 송혜선은 산후조리를 마친 직후였지만, 여전히 그만의 풍채와 여유를 잃지 않았다. 예전보다 조금 살이 오른 듯했지만, 그 덕에 오히려 분위기가 더 너그러워 보였다. 그녀가 행사장에 들어서자, 평소 자주 어울리던 재벌가 부인들이 앞다투어 다가왔다. “혜선씨는 진짜 복이 많은 사람이에요. 그 고생 끝에 드디어 볕뜰날이 왔네요.” “부 회장님이 이렇게까지 챙기시는 거 보니까, 이제 정말 한 자리 하시겠어요.” “정말 이러다 조만간 ‘겹경사’ 나는 거 아니예요? 우리라도 미리 축하해줘야 하는 거야?” 송혜선은 그 소리에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얄미울 정도로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 ‘역시 사람은 자리가 높아야 대접 받는 거야.’ “지윤이는 회장님의 첫 딸이잖아요. 그러니까 귀하지 않겠어요? 그리고 회장님이 우리 모녀를 절대 가볍게 보지 않으신다는 건, 여기 있는 분들도 느끼셨을 테고요.” 그 말에 다들 박수까지 치며 웃었다. “이제 우리도 호칭 바꿔야지, 사모님!” 누군가 먼저 그렇게 불렀고, 뒤이어 몇몇이 장난처럼 따라 불렀다. 송혜선은 그 말에 딱히 제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턱을 살짝 들며, 그 호칭이 제법 익숙
진윤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마침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부남준은 법을 무시하고, 사람을 죽였어요. 부씨 가문이 이 일에 개입한다면... 여론은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감싸려 들면 들수록, 결국은 함께 나락으로 떨어지겠죠.” ‘이건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가문의 존망이 걸린 문제야.’ 맞은편 소파에 앉은 상혁은 다리를 꼬고, 한쪽 손으로 턱을 괸 채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의 눈빛엔 어떤 감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마치 세속의 먼지 따윈 전혀 묻지 않은 사람처럼. 진윤의 말이 끝났지만, 상혁의 표정엔 미동 하나 없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부씨 가문은 항상 법의 테두리 안에서 움직여왔습니다. 그건 변하지 않습니다, 여사님.” 그는 손짓으로 테이블 위를 가리켰다. 거기엔 작은 검은색 USB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이 안에... 고나희 씨가 남긴 게 있습니다. 여사님께 드리라고 하더군요.” 순간, 진윤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숨이 턱 막히는 듯한 표정으로, USB를 바라봤다. “지금... 뭐라고 하셨죠?” 그녀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나희가... 뭔가를 남겼다고...?’ 사고는 너무도 갑작스러웠다. 딸의 마지막을 함께할 시간조차 없이, 그녀는 세상을 떠났고, 어떤 유언도, 한마디 말도 남기지 못한 줄 알았다. “나희... 그 애가... 무슨 말을 남겼다는 거예요...” 진윤은 입을 틀어막았다. 눈물은 이미 참을 수 없다는 듯 쏟아지려 하고 있었다. 상혁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쌌다. “사람이 떠난 건 바꿀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남겨진 마음은, 누군가가 반드시 전해야죠.” 그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거운 공기를 뒤로한 채, 조용히 방을 나섰다. 잠시 후.룸 안에서 낮고, 억눌렀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나희야...” 진윤은 USB를 손에 쥐고, 세상이 무너진 듯한 표정으로 울고 있
진윤은 송혜선이 내민 공백 수표를 내려다보며 손끝까지 떨렸다. 종이 한 장.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그녀의 심장을 조용히 갉아먹었다. ‘돈이란 게... 사람을 어디까지 비참하게 만들 수 있는 건지.’ 그녀는 허탈하게 웃었다. “돈, 참 좋은 거죠. 수많은 집이 그거 하나 때문에 무너지고, 사람 목숨도 스스럼없이 거래되고.” 그녀의 눈빛이 서서히 날카로워졌다. “고경수도 그랬어요. 결국 돈 때문에 스스로 감방에 들어갔고, 지금 당신은 그 돈으로 내 아이의 죽음을 사겠다는 거죠.” 진윤의 시선이 천천히 송혜선을 꿰뚫었다. “송 여사님의 눈엔... 돈이면 뭐든 다 해결돼요?” 송혜선은 대답하지 않았다. 진윤은 고개를 들었다. 쭉 뻗은 어깨, 흐트러지지 않은 눈빛으로 조용히 말했다. “근데, 저에게 그딴 건... 아무 의미 없어요.” 테이블 위의 수표는 그녀 눈엔 그저 휴짓조각에 불과한 쓰레기였다. ‘내 아이 이름 위에 적힌 숫자가 많을수록, 그 애는 더 억울해지는 거야.’ 그런 진윤의 단호함에, 송혜선도 이내 표정을 굳혔다. “정말 고집 세시네요, 여사님.” 그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조용히 진윤 쪽으로 다가섰다. 10센티미터도 채 되지 않는 거리에서, 송혜선은 하찮다는 듯이 고개를 숙여 내려다보며 진윤에게 시선을 내리꽂았다. “그 자존심,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지 볼까요?” 그 말투엔 이젠 더 이상 숨길 필요 없는 위협이 담겨 있었다. “당신에게는 지금, 아무것도 없어요. 남편은 감옥, 딸은... 하늘에 있어. 그런데도 이렇게 버티겠다고? 부씨 가문이 마음만 먹으면, 당신 같은 사람 하나쯤 사라지게 만드는 건 일도 아니에요.” 진윤은 순간 움찔했지만, 눈동자는 미동도 없이 그대로 송혜선을 바라봤다. 송혜선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마지막 일격을 날렸다. “참, 고경수 씨 말인데요. 그 사람, 아직 당신한테 마음 있더라. 감방에서 계속 당신 얘기만 했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