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지율이 돌아서려는 순간 남초윤은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그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그는 살짝 눈썹을 들며 남초윤의 상처 난 발을 보았다.‘정말로 발이 아팠던 거야?’ 육지율은 다시 침대에 앉아 그녀의 발을 살피기 위해 손으로 조심스럽게 잡았다. 남초윤은 무의식적으로 발을 움츠리며 물었다. “뭐 하는 거예요?” 육지율의 긴 손가락이 그녀의 상처 부위를 누르자 남초윤은 아픈 듯 ‘윽’ 소리를 냈다. “어떻게 된 거예요?” “하이힐 때문에 생긴 상처예요.” 그녀는 원래 출퇴근할 때 차를 타고 다녀서 하이힐을 신어도 별로 불편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은 잡지사에서 지하철역까지 거의 천 미터를 걸었고, 중간에 발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육지율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발이 아픈데도 하이힐을 신었어요?” “저희 편집장이 깐깐한 사람이잖아요. 회사에 큰 고객이 올지도 모른다면서 옷차림에 신경 쓰라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하이힐을 신으면 예쁘잖아요. 예뻐지려면 고생은 감수해야죠.” 운동화가 편하긴 했지만 남초윤은 그게 싫었다. 마치 이 엉망진창인 결혼 생활처럼. 분명히 미련을 둘 게 없는 관계인데도 육지율의 얼굴만 보면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육체적으로 끌리는 감정은 가장 치명적이면서도 제어하기 어려운 감정이었다. 그녀가 편집장에 대해 처음으로 불만을 털어놓는 걸 듣고는, 육지율은 그녀가 그만두고 싶어 하는 줄 알았다. “그렇게 상사가 싫으면 그만둬요. 내가 초윤 씨를 못 먹여 살릴까 봐? 그 일도 별 발전 가능성 없어 보이는데.” 남초윤은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당신이 날 먹여 살릴 수 있는 것과, 내가 나 스스로를 먹여 살릴 수 있는 건 별개의 문제예요.” 게다가 그가 평생 자신을 먹여 살릴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설사 그가 평생을 책임지겠다고 약속한다 해도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가 평생 동안 오직 자신만을 책임질 수 있다는 보장은 없는 걸. 육지율
“...” 남초윤의 얼굴이 새빨개지며 화난 듯이 소리쳤다. “누가, 누가 참지 못한다고! 육지율 씨가 더 급한 거 아니에요?”육지율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정말로 욕실에 안 갈 거예요?” “안 가, 안 가, 안 가요! 당신이나 가버려!” 남초윤은 베개를 들어 그에게 던졌다. 육지율은 여유롭게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하러 갔는데 정말 얄밉기 짝이 없었다. 남초윤은 침대에 기대어 누워 휴대폰을 잠시 만지며 방금 어지러웠던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때, 육지율의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원래는 받지 않으려 했지만 전화가 꺼지자마자 다시 울렸다. 뭔가 중요한 고객의 전화일 것이라 생각한 남초윤은 휴대폰을 집어 들었고, 화면에는 ‘유설영’이라는 이름이 뜨고 있었다. 누가 전화했는지 뻔했다. 남초윤은 왠지 모르게 전화를 받았다. 아직 말을 꺼내기도 전에 유설영의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지율아, 왜 병원에 가서 검사를 했어? 어디 아픈 거야? 혹시 너 초윤 씨에게 아무 끌림도 없는 거야?” 남초윤은 기가 막혀 답했다. “지율 씨가 나한테 끌림이 있든 없든, 그쪽이랑 무슨 상관인데요?” 남초윤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유설영은 마치 태세 전환이라도 한 듯, 목소리가 차갑게 변했다. “초윤 씨였어요? 왜 남의 휴대폰을 몰래 훔쳐서 고객 전화를 받는 건데요?” 남초윤은 비웃으며 말했다. “첫째, 전 육지율 씨 아내에요. 몰래 보는 게 아니라고요. 둘째, 대체 어떤 ‘고객’이 한밤중에 유부남에게 전화 걸어서 아내에게 끌림이 있느냐고 물어보는 건데요?” 유설영은 남초윤의 비꼬는 말을 전혀 개의치 않고 오히려 미소를 띠며 말했다. “맞아요. 전 엄밀히 말해 정식 고객은 아니죠. 사실 저랑 지율이는 2년간 사귀었던 사이였고, 고등학교 동창에다 같은 반 친구였거든요. 만약 지율이 할아버지가 반대하지 않았더라면 고등학교 졸업 후 지율이는 나랑 영국 유학을 갔을 거예요. 그러니까 남초윤 씨, 우리 사이는 아주
결혼이라는 무덤에 발을 들이기 전에 육지율은 연애를 몇 번 했었고 이는 변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젊고 혈기왕성할 때는 심지어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밤 비행기를 타고 5,000마일이 넘는 거리를 날아가 한 사람을 만나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는 한가했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일도 없고, 돈은 넘쳐나서 전 세계를 누비던 시절이었다. 스무 살도 되기 전에 세상을 다 둘러보고 온갖 사람들을 다 만나봤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그런 식으로 시간을 들여 밤 비행기를 타고 연애를 하러 간다는 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조건이 나쁘지 않은 사람들과 몇 번 사귀었고 결혼까지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그때는 서로 나이가 어렸다. 그를 포함한 그의 친구들은 대부분 이성적이고 가정의 결정에 순응하는 편이었다. 물론 그의 조건으로 다른 사람들이 그를 선택하는 게 아니라, 그가 상대를 선택하는 편이었다.유설영과 연애하던 시절이 바로 결혼을 가장 진지하게 생각하던 때였다. 유설영이라는 존재 때문에 결혼을 원해서가 아니라 그저 결혼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유설영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이제는 기억도 희미하지만 그때는 어느 정도는 좋아했던 것 같다. 육지율은 거짓말을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남초윤을 무릎 위에 앉히며 솔직하게 말했다. “좋아하긴 했지만 그건 다 과거일 뿐이에요.” 그는 결코 과거에 집착하지 않았다. 그는 현재와 미래를 중요시하는 사람이었다. 남초윤은 잠시 어두운 표정을 지었지만 곧 궁금해졌다. “그렇다면 왜 유설영 씨랑 결혼하기 위해 할아버지와 끝까지 맞서지 않았어요?” 그가 홧김에 자신과 결혼한 결과를 보면 육지율이 결심만 한다면 할아버지가 아무리 강경해도 결국은 그를 이길 수 없었을 것이다. “유설영은 뉴욕으로 가서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리고 싶어했어요. 나와 어깨를 나란히 하겠다고 말이에요. 나는 현실적인 사람이에요. 눈앞에 보이는 것만 믿지, 미래를 약속하는 말에 흔들리지 않아요. 내가 원하는 건 늘 당장의 모
남초윤이 중얼거렸다. “못 데려가면 뭐 어때.” 육지율은 눈을 내리깐 채 은은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래요? 안 무서우면 왜 과일칼을 들고 내 사무실에 와서 날 죽이려 했는데요? 내가 빨리 피하지 않았으면 지금쯤 침대에서 초윤 씨를 만족시키지도 못했을 걸요?” 그때 남초윤은 겁도 없이 과일칼을 숨겨 들고 그의 사무실로 달려갔다. 그를 보자마자 바로 그의 하반신을 노렸다. 육지율은 그때 놀라 얼어붙었다. 겨우 잠깐 같이 잔 거 가지고 이렇게 화낼 일인가? “...” 과거를 들킨 남초윤은 얼굴이 붉어졌고, 부끄럽고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하반신을 제대로 못 관리하고 아무하고나 자대서 그런 거잖아요! 날 안 건드렸으면 우리 아빠도 당신이랑 결혼시키려고 안 했을 텐데, 왜 날 건드린 거예요?” 육지율은 짓궂은 표정으로 진지하게 대답했다. “그냥 자는 맛이 있어서.” “뭐라고요?”‘이 개같은 남자! 정말 진지할 때가 없어요!’남초윤은 화가 나서 손을 들어 그의 뺨을 때리려 했지만 육지율이 그녀의 손목을 잡아챘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 그녀 위에 몸을 얹었다. 어두운 조명 속에서 그는 잘생긴 얼굴에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남초윤 씨, 가정 폭력은 안 돼요. 결혼하고 싶다면 그냥 이쁘게 말로 부탁하면 되잖아요. 그렇게까지 흥분할 필요는 없지 않나?” 육지율의 나른한 목소리는 낮고 자극적인 톤으로 그녀의 귓가를 스쳤다. 남초윤은 순간 몸이 저릿해졌다. “누, 누가 당신한테 결혼하자고 했어... 으!” 깊게 파고드는 그의 키스에 그녀는 몸을 떨며 저항하려 했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 아련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육지율...” 그는 단단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꽉 잡고 점점 더 강하게 끌어당겼다. 그의 눈이 반짝였다. “이걸 원하던 거 아니였나?” “...” 그렇다. 그녀는 이걸 원했다.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열심일 필요는 없었지만... 육지율은 침대 머리
육지율은 먼저 아침 식사를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무언가 떠오른 듯 멈춰서 물었다. “어제 왜 지하철 입구에서 나 기다렸어요? 요즘 차 안 타는 것 같은데, 차는 어디 있어요?” 그는 마당을 한 번 훑어보았지만, 남초윤의 보기 흉한 색의 카이엔은 보이지 않았다. 남초윤은 그가 이걸 눈치챘다는 게 의외였는지 잠시 멍하니 있다가 대답했다. “전에 그 차 색깔이 너무 못생겼다고 불평한 적 있잖아요. 그래서 팔았어요.” “그럼 그게 초윤 씨가 빨간 하이힐을 신고 지하철에 끼어 들어가다가 발이 까진 이유였어요?” “...” 육지율은 다시 돌아와서 식탁 의자를 끌어당기고 그녀 맞은편에 앉았다. 남초윤은 여전히 샌드위치를 먹고 있었다. “왜 아직도 안 가요?” 육지율은 무심하게 말했다. “얼른 먹어요. 내가 잡지사까지 태워줄게요.” 남초윤은 별 생각 없이 대답했다. “지율 씨 로펌이랑 우리 잡지사는 같은 길이 아니잖아요.” 서로 몇 블록은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육지율은 조용히 그녀를 보며 말했다. “정말 그 다리로 출근 시간대 지하철에 탈 수 있을 것 같아요?” “...” 사실이었다. 남초윤은 빠르게 아침을 마치고 현관으로 가서 신발을 갈아 신었다. 평소처럼 빨간 하이힐을 신으려던 그녀는 잠시 생각했다. 아침에는 좋은 차로 가더라도 저녁에는 다시 지하철을 타야 할 텐데. 결국 이 하이힐은 부드러운 카펫 위를 걷는 부잣집 사모님에게나 어울리는 거지, 오래 걷기 힘들 것 같았다. 그녀는 하이힐 대신 평소에 신는 편안한 플랫슈즈를 꺼내 신으려 했다. 그때 육지율이 그녀의 마음을 꿰뚫은 듯 말했다. “좋아하는 신발이면 그냥 신어요. 저녁에 데리러 갈게요.” 남초윤의 눈이 반짝였다. “저녁에 약속 없어요?” 그는 보통 밤 9시나 10시가 돼야 집에 돌아오곤 했다고 때로는 새벽까지 바쁘기도 했다. 육지율은 특별한 설명 없이 덤덤하게 말했다. “요즘은 안 바빠요.” 그렇
배현수는 어깨에서 느껴지는 찢어질 듯한 고통 속에서도 조유진을 단단히 끌어안았다. 손바닥으로 그녀의 머리카락과 떨리는 등을 어루만지며 검은 눈동자는 그녀의 두려움에 찬 눈동자를 깊숙이 응시했다. “유진아, 잘 봐. 내가 누구인지. 두려워하지 마. 내가 있잖아. 레비아단은 더 이상 널 최면에 걸 수 없어.” “걱정 마, 유진아. 난 여기 있어.” 따뜻한 피가 칼날을 타고 흘러내리며 조유진의 손을 적셨고 그 선명한 붉은색이 그녀의 눈을 강하게 자극했다. 조유진은 흐릿한 시선을 들어 그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는데 몸은 떨리고 있었다. 이건 배현수의 피였다... 그는... 그는 배현수였다. 그녀의 배현수였다. 조유진은 몸이 크게 흔들리며 급히 칼자루를 놓았지만 손은 더 심하게 떨렸고 억눌려 있던 감정이 터져 나오며 눈물과 함께 그녀를 삼켜버렸다. “현수 씨... 어머님이 돌아가셨어요... 내가 죽였어요... 두 마리의 늑대가 어머님을 물어뜯는 걸 내가 눈으로 봤어요... 내가 구하려 했는데... 그 사람들이 날 붙잡았어요...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배현수는 그녀를 놓지 않고 계속해서 이마에 키스를 하며 조용히 말했다. “괜찮아, 다 지나간 일이야.” “유진아, 난 여기 있어. 걱정 마.” ... 조유진이 눈을 떴을 때 눈앞에는 눈부시게 하얀 병실이 펼쳐져 있었다. 그녀는 놀란 듯 벌떡 깨어났다. “사모님, 드디어 깨어나셨네요.” 서정호의 목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조유진은 몇 초간 멍하니 있다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예지은을 죽인 것뿐만 아니라 배현수의 피도 많이 묻혔던 기억이 생생했다. 조유진의 얼굴은 한순간 창백해졌고 그녀는 급히 물었다. “현수 씨는요? 지금 어디 있어요?” “대표님은 피를 많이 흘렸습니다. 방금 수술을 마쳤고 바로 옆 병실에 계십니다.” 조유진은 이불을 걷어내고 침대에서 내려가 그를 보러 가려 했다. 하지만 최면 치료 후
조유진은 감정의 기복 속에서 혼란스러운 얼굴로 배현수를 쳐다보았는데 자신이 환각을 보는 게 아닐까 싶었다. “어, 언제 깨어난 거예요?” 배현수는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며, 무력하게 웃으며 말했다. “네가 울면서 나더러 얼른 깨라고 했잖아. 나랑 혼인 신고하러 가자고. 유진아, 사람은 한 번 한 말은 꼭 지켜야 해.” “...” 조유진의 얼굴에는 아직 눈물이 마르지 않았지만 당혹감에 그 눈물을 억지로 삼켜냈다. 그녀는 배현수의 다친 오른쪽 어깨를 보고 다급히 물었다. “상처는 아프지 않아요?” 배현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원래는 안 아팠는데 지금은 좀 아프네.” “왜요?” 조유진은 여전히 멍한 상태로 반응이 늦었다. 배현수는 손을 뻗으며 웃음기 어린 얼굴로 말했다. “일단 일어나서 이야기하자. 무릎 안 아파?”‘모르는 사람이 보면 내가 죽은 줄 알겠어.’“...” 조유진은 당황하며 병상에 손을 짚고 천천히 일어났지만 오랜 시간 무릎을 꿇고 있었던 탓에 다리가 저려 앞으로 쓰러질 뻔했다. 배현수는 본능적으로 그녀를 안아줬지만 그 과정에서 그녀가 그의 어깨 상처에 부딪히는 바람에 숨을 들이쉬고 말았다.“괜찮아요?” 조유진은 급히 그의 몸에서 떨어져 상처를 확인하려 했지만 남자는 팔을 감아 그녀를 꽉 껴안으며 말했다. “아파. 그러니까움직이지 마.” 조유진은 꼼짝도 못하고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의사 불러올까요?” 배현수는 그녀를 계속 안고 놓지 않으며 느닷없이 물었다. “유진아, 방금 네가 한 말, 아직 유효한 거지?” 조유진은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머리가 뒤엉켜 있었다. “무슨 말이요?” 옆에 있던 서정호가 그 상황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조유진의 목소리를 흉내 내며 말했다. “아, 사모님. 방금 ‘현수 씨, 일어나요... 혼인 신고하러 가야죠’라고 하셨잖아요.” 서정호의 과장된 목소리와 애교 섞인 말투에 배현수도 몸이 오싹해
배현수는 어깨에 큰 상처를 입어 병원에 반달간 입원해야 했다. 평소 오른손을 주로 쓰던 그는 이제 오른쪽 어깨를 전혀 움직일 수 없어 일상생활도 혼자 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래서 누군가의 보살핌이 절실히 필요했다.하지만 체력이 좋은 사람조차도 병원에서 일주일 남짓 그를 돌보다 보면 녹초가 될 판이었다. 하물며 조유진의 몸으로 반달 동안 그를 돌보면 퇴원할 때가 되었을 때 먼저 쓰러질 게 뻔했다.이에 배현수는 비서인 서정호를 불러 지시했다.“간병인을 좀 알아봐.”서정호는 물었다.“남자 간병인을 찾을까요, 여자 간병인을 찾을까요?” 배현수는 남자 간병인을 부르려 했지만 조유진이 갑자기 말했다. “왜 간병인이 필요해요? 두 명이서 당신을 돌봐야 해요?” “네가 낮에는 여기 있어도 밤에는 집으로 가서 쉬어야지. 여기서는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을 테니까.” 병실이 아무리 호화롭더라도 보호자가 쉴 만한 침대가 따로 없었고, 병원은 24시간 운영되며 병실 밖 복도는 늘 소란스러웠다.조유진은 옆에 있는 소파를 힐끗 보며 일부러 빈정댔다. “저 소파도 꽤 푹신한데 나 거기서 자면 돼요. 아니면 여자 간병인을 부르고 싶어요?”서정호가 말을 덧붙였다. “남자 간병인은 구하기 어렵습니다. 거의 여자 간병인들인데 대표님이 불편하시지 않으시다면...”간병인은 밤에는 주로 환자가 화장실 갈 때 부축하거나 옷을 벗겨주는 일을 맡는다. 만약 여자 간병인을 부르면 배현수의 체면이 상할 수도 있었다.배현수는 서정호를 차갑게 노려보며 경고했다. “헛소리 마. 계속 그러면 서 비서가 여기서 간병해.”서정호는 코를 만지며 어색하게 웃었다. “대표님, 제 아내가 감시할 텐데 제가 여기 밤새 있으면 유리가 저희 사이를 의심할 겁니다.”배현수는 황당해하며 가까이 있던 오렌지를 집어 들어 서정호에게 던지려 했지만, 서정호가 재빠르게 말렸다. “오른손은 못 쓰십니다! 대표님, 왼손으로 던지세요!”배현수는 오렌지를 쥔 오른손을 주물렀다가 어깨에 찌릿한 통증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