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기름진 느낌이 마치 위에서부터 목구멍까지 차오르듯이 끔찍했다. 남초윤은 입을 막고 빠르게 식탁을 벗어나 후원 화단 쪽으로 달려가서 참을 수 없는 구역질을 해댔다. 실제로 토한 건 없었지만 몸이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바로 그때 한 잔의 물이 눈앞으로 내밀어졌다. “헹궈요.” 남초윤은 멍하니 물을 받아들며 말했다. “고마워요.” 유설영은 그녀를 살피며 경계하는 눈빛을 보냈다. “혹시 임신한 건 아니겠죠?” 남초윤은 얼굴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당신들 말을 듣고 역겨워서 그런 거예요.” 유설영은 화내기는커녕 오히려 웃으며 말했다. “자신이 원하는 걸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게 뭐가 나쁜가요? 당신은 어때요? 지율이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왜 곁에 남아 있죠? 당신의 그 첫사랑이 돌아왔잖아요. 지율이랑 이혼하고 김성혁에게 돌아가요. 그렇게 하면 각자 제자리를 찾는 셈이죠.” ‘각자 제자리?’ 이미 엇나간 인생인데 억지로 돌려놓는다고 제대로 굴러갈 수 있을까? “설영 씨, 만약 지율 씨가 정말로 당신을 사랑한다면 당신이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지율 씨가 결국 당신에게 돌아올 거예요. 설령 그 길이 아무리 험난하더라도요. 하지만 지율 씨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내가 이혼하더라도 그 사람은 당신 것이 아니에요.” 유설영은 남초윤과 싸우고 있지만 싸울 상대를 잘못 잡았다. 육지율은 원래부터 유설영의 것이 아니었고 남초윤은 육지율을 넘겨줄 자격조차 없었다. 육지율은 육지율일 뿐, 그는 언제나 자기 자신이었고 남초윤은 그를 통제할 수 없었다. 그를 누구에게 양보하느냐는 애초에 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유설영은 숨을 깊이 들이쉬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혼 후 지율이가 내 사람이 되든 말든 그건 당신이 상관할 일이 아니에요. 지율이 같은 남자는 원래 누구의 것도 아니에요. 나는 지율이가 내 곁에 자발적으로 머무는 것만 원해요. 한 가지만 묻겠어요. 당신, 이혼하고 싶어요?
이 내기에서 이제 남초윤과 육성일만 남았고 사실 육지율은 아무 상관도 없다. 굳이 관련이 있다고 한다면, 육지율의 역할은 단지 ‘작은 올챙이’를 제공하는 정도일 뿐이다. 남초윤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가 무엇을 얻게 될지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제가 지율 씨를 사랑하든 말든, 그건 당신과 상관없는 일이죠. 어쨌든, 저와 지율 씨는 아직 이혼하지 않았어요. 유설영 씨가 계속 지율 씨를 붙잡고 있으면 남의 남자를 빼앗는 ‘진정한’ 제3자가 될 텐데, 지율 씨와 육씨 집안이 정말 당신을 위해 체면을 버릴까요?” “하지만 당신은 결국 지율이와 이혼하게 될 거잖아요. 그러니 저를 위해서도, 당신 자신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빨리 이혼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당신은 김성혁을 좋아한다면서요. 김성혁이 돌아온 건 당신 때문일지도 모르는데, 그 사람을 기다리게 할 수 있겠어요?” 유설영은 뉴욕에서 돌아온 이유가 바로 육지율과 다시 잘해보려는 것이었다. 남초윤은 첫사랑과 다시 이어지고 싶은 마음이 없을까? 남초윤은 말했다. “맞아요, 제가 육씨 집안 같은 명문가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건 사실이에요. 이혼은 아마도 시간 문제겠죠. 하지만 적어도 지금 전 지율 씨 아내에요. 유설영 씨, 당신과 저는 달라요. 저는 명예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파파라치라서 잃을 것도 없어요. 그런데 유설영 씨는요? 당신의 명예가 산산조각 나는 게 과연 가치 있는 일일까요?” 유설영은 잠시 망설였다. 곧 그녀는 남초윤의 손을 놓고 차갑게 눈빛을 돌렸다. 남초윤은 원래 가던 길을 따라 걷다가 육지율과 마주쳤다. 남초윤은 뒤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유설영 씨가 저쪽에 있어요.” 육지율은 웃으며 말했다. “내가 그 여자를 왜 찾아요? 난 당신을 찾으러 왔어요.” 남초윤은 잠시 멍하니 서서 물었다. “저를요? 저를 왜요?” 육지율은 손에 든 생수병을 따서 건넸다. “아까 토할 뻔했잖아요.” “아, 그냥 위가 좀 안 좋아
육지율과 남초윤이 막 자리에 앉자 유설영이 급히 돌아왔다. 그녀는 다소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제 브로치를 본 사람 있나요? 방금 화장실에 다녀왔는데 그 사이에 브로치가 사라졌어요.” 어떤 손님이 물었다. “그 80억짜리 에메랄드 브로치 말인가요?” “맞아요, 혹시 본 사람 없나요? 사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그 브로치는 저에게 너무나 특별한 의미가 있어요. 잃어버리면 너무 안타까워요.” 조안미는 과하게 웃으며 의도적으로 말했다. “브로치를 옷에 단 거면 잘 떨어질 리 없을 텐데, 어떻게 갑자기 없어졌을까요? 설영 씨, 혹시 앤티크 브로치를 탐낸 누군가가 일부러 훔쳐간 게 아닐까요?” 그 말을 하면서 그녀는 남초윤을 곁눈질로 슬쩍 쳐다보았다. 남초윤도 그 눈빛을 알아차리고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조유진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너무 섣불리 나서지 마. 일단 저 여자가 뭘 하려는지 지켜봐.” 이건 분명한 함정이었다. 유설영이 명백하게 함정을 파놓고 남초윤이 실수를 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변명하는 순간 남초윤은 자신이 도둑임을 증명하는 셈이 될 테니. 유설영은 결국 입을 열었다. “아까 화장실과 정원을 다 뒤져봤는데 못 찾았어요. 초윤 씨, 아까 초윤 씨도 정원에 있었잖아요. 혹시 본 적 있어요?” “본 적 없어요. 잘 챙기지 그랬어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어요?” 유설영은 조유진을 잠깐 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그래요? 지난번 초윤 씨 친구 유진 씨가 이 브로치 때문에 경매장에서 나랑 치열하게 입찰 경쟁을 했잖아요. 160억까지 부르면서 말이에요. 유진 씨가 이 브로치를 그렇게 좋아했던 거 아니에요?” 그 말이 떨어지자 주변의 손님들은 일제히 남초윤과 조유진을 ‘용의자’로 지목하는 눈빛을 보냈다. 경매장에서 160억까지 부를 만큼 이 브로치를 좋아했다면 어쩌면 욕심이 생겼을 수도 있다는 합리적인 추측이었다. 조안미는 남초윤과 조유진이 못마땅했는지 재빨리 말했다. “그렇게 비싼 물
조안미가 틈을 노려 남초윤을 자극했다. “너희들이 안 훔쳤다면 왜 몸수색을 두려워해? 몸수색을 하면 브로치가 너희들 몸에 없다는 걸 증명할 수 있잖아?” 조유진이 나서서 말했다. “아주머니, 그 말씀은 잘못됐어요. 몸수색은 사람에 대한 심각한 모욕이에요. 설령 귀중한 물건을 잃어버렸다고 해도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용의자가 될 수 있으니, 그건 경찰이 와서 해야 할 일이지 당신이 누구 몸을 수색할지 결정할 문제가 아니에요.” 육지율 역시 몸수색에 동의하지 않았다. “여긴 육씨 집안이고, 초윤 씨는 육씨 집안의 며느리에요. 초윤 씨의 몸을 수색하는 건 육씨 집안의 명예를 깎아내리는 일이기도 하고요.” 남초윤은 잠시 멍해졌다. 이 개 같은 남자가 유설영과 자신 사이에서 자기 편을 들게 될 줄 몰랐던 것이다. 육지율은 경호원들에게 모든 구석구석을 찾아보라고 지시했다. 경호원들이 한참을 찾다가 거실로 돌아와 보고했다. “육 변호사님, 잔디밭까지 샅샅이 뒤졌지만 브로치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자 조안미가 즉시 말했다. “땅에서 못 찾았다면 사람 몸에 있을 가능성이 크겠죠! 조유진이 여기 있는 모두가 용의자라 했으니 저야 떳떳하니까 몸수색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어요. 지율아, 경호원들에게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을 수색하게 하는 게 공정하지 않겠어?” 그 말에 일부 손님들은 찬성했고 일부는 반대했다. 조안미는 먼저 자신의 가방과 주머니를 뒤집으며 결백을 증명하려 했다. 그 브로치는 가격이 매우 비싸서 경찰에 신고할 만한 상황이긴 했다. 하지만 여긴 육씨 집안이었다. 육씨 집안에서 귀중한 물건을 잃어버렸다는 소문이 나면 그 누구에게도 좋을 리 없었다. 육지율이 말했다. “여기 있는 분들은 모두 귀한 손님이십니다. 몸수색은 적절하지 않아요. 유설영 씨가 브로치를 육씨 집안에서 잃어버린 것이니 삼일 내로 찾지 못하면 육씨 집안에서 보상해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유설영은 불만스러워하며 말했다. “지율아, 그건
조유진의 말이 떨어지자 손님들은 모두 상황을 눈치챘다. 실제로 도둑이 있는 게 아니라 누군가 일부러 일을 꾸미고 있다는 것을. 자신의 혐의를 벗으려면 먼저 이 혼란을 키워야 한다는 계산이었다. 그때 이성적인 손님 한 명이 나서서 공정하게 말했다. “오늘은 어르신의 생신잔치인데 이런 일로 분위기를 망치는 건 좀 무례하지 않나요? 주인집의 체면도 생각해야 하니까 오늘은 일단 이쯤에서 끝내고 진짜 잃어버린 물건이 있으면 나중에 따로 해결하는 게 어떨까요? 만약 찾지 못하면 육씨 집안에서 책임지고 보상해 줄 겁니다!” 조유진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 다이아몬드 귀걸이는 천천히 찾아도 되니 괜찮아요. 근데 설영 씨는 아까부터 경찰에 신고해야 한다고 하니 아마 어르신의 체면이나 기분은 고려하지 않는 모양이네요.” 이 말은 상황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태도로 보였다. 유설영이 계속 이 문제를 물고 늘어진다면 그녀가 눈치 없는 사람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이 모임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규칙을 정하는 사람들이지만 정작 자신들은 그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서도 남이 규칙을 어기는 것은 싫어한다. 여기 있는 모두가 육씨 집안의 손님인 만큼, 주인집과 사이가 나빠지는 건 아무도 원치 않았다. 육씨 집안과 조금이라도 연이 닿아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눈치가 빠르고 상황을 잘 파악하는 사람들이었다. “어르신의 80번째 생신인데, 경찰에 신고한다니 참 불길하네요!” “생신잔치에서 도둑 이야기가 나오면 소문나서 웃음거리가 될 테니 이건 그만둬야죠!” “잔치 끝나고 나서 알아서 해결해요!” “어르신께서 연극 무대까지 준비하셨으니 저흰 공연이나 보러 가자고요. 이 소란스러운 연극은 그만 봐요!” 구경하던 손님들은 하나둘씩 뒤뜰로 가서 진짜 연극을 보기 시작했고, 더 이상 이 시시한 소동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유설영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는데 조유진을 바라보는 눈빛이 달라졌다. 이 다정해 보이는 조유진이 이렇게 교활하고 치밀하다니
[뭐야? 무슨 상황이야?] 남초윤이 메시지로 물었다. [그냥 네 불효자식이 바치는 효도금이라고 생각해.] [근데 이건 너 귀걸이 값으로 받은 거잖아?] [내 귀걸이는 잃어버린 적 없어. 그냥 편히 받아.] 남초윤은 놀라서 조유진에게 엄지를 올리며 말했다. [헐! 대박이야. 너 진짜 돈 세탁의 달인이구나!] 결과만 놓고 보면 남초윤이 육지율에게서 2억 원을 받은 셈이지만 과정에서 보면 육지율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돈이었다. 조유진은 화장대 앞에 앉아 다이아몬드 귀걸이를 보석함에 넣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남자의 목소리가 위에서 들려왔다. “남초윤 때문에 당신 남편까지 속였어?” 그녀가 ‘여보’라고 부른 게 남초윤 때문이라는 생각에 배현수의 가슴속에 묘한 질투가 일었다. 조유진은 잠시 멍했다. 사실 속이려던 게 아니라고 해명하려 했지만 그의 눈을 마주치는 순간 이유 없이 마음이 불안해졌다. 드래곤 파 사건 이후로 그녀는 배현수를 제대로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그가 예지은의 죽음에 대해 물어볼까 봐, 그리고 자신이 그에게 상처를 줄까 봐 두려웠다. 그녀는 강한 최면을 받았었다. 특히 배현수와의 기억들에 관해. 조유진이 배현수를 계속 기억하고 있었던 이유는 최면 중에도 끊임없이 그를 사랑한다고 스스로에게 되뇌었기 때문이다. 그 실험실에서 최면을 받던 날들을 어떻게 버텼는지 자신도 모르겠다. 최면사는 그녀와 배현수 사이의 행복했던 기억을 의도적으로 흐릿하게 만들고 고통스럽고 나쁜 기억들을 깊이 각인시키려 했다. 최면이 끝날 때마다 조유진은 배현수가 아이보리 산에서 자신에게 청혼했던 장면을 하나씩 맞춰가며 기억하려 애썼다. 아마도 그 분홍빛 폭죽비가 그녀의 마음속 깊이 내려앉았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기억들이 희미해져도 그 순간만은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사랑이 이렇게 강력할 줄이야. 심지어 최면을 받아도 그의 손가락 사이에 손을 끼워 넣으면서 함께 손을 맞잡았던 그 감각을 잊을 수 없었다.
다른 일에선 항상 조유진에게 순응하던 배현수는 유독 감정 문제에 있어서만은 조유진이 자신을 회피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막 그녀의 옷을 벗기려던 찰나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화면에 뜬 이름은 송지연. 아마도 조유진의 최면과 관련된 이야기일 터였다.배현수는 조유진을 침대에 눕히고 이마에 입을 맞춘 후 말했다. “잠깐, 전화 하나 받고 올게. 금방 와서 같이 놀아줄게.” “???” 놀다니? 진주 속옷을 입은 그녀를 말인가? 조유진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개졌다.‘누가 그런 걸 하겠대?’배현수가 전화를 받으러 방을 나가자마자 조유진은 그 진주 속옷을 서랍 구석에 대충 처박아 넣었다.배현수는 송지연과 꽤 오랫동안 통화하며 조유진의 상태에 관해 이야기했다. 다시 방으로 돌아왔을 때 조유진은 이미 잠이 들었다. 침대 옆에 앉아 그녀를 바라보던 배현수의 눈빛에 잠시 안타까움이 스쳤다.송지연은 이렇게 말했다. 조유진은 깊은 최면을 받은 상태였고, 그녀가 그를 너무나도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동안 쌓아 올린 기억들을 하나하나 다시 짜 맞추는 과정이 없었다면, 조유진은 이미 레비아단의 손에 넘어가 배현수를 해칠 도구로 전락했을 거라고. 조유진이 레비아단에게 잡혀 있을 때 그녀는 큰 충격을 받았고, 그로 인해 무의식적으로 그 어두운 진실들을 마주하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그녀는 배현수에게 그 모든 걸 고백하는 것조차 두려워하고 있었다. 조유진이 완전히 기억을 되찾고 예지은의 죽음을 직시할 수 있게 하려면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한편, 남초윤과 육지율은 어르신의 생신 잔치를 마치고 소정 별장으로 돌아왔다. 남초윤의 머릿속엔 내내 육성일이 했던 말이 맴돌았다. “너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구나.” 두 달의 시간 중 벌써 한 달이 지나가고 있었다. 남초윤은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별장에 도착하자마자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자는 문명희였다.남초윤은 핸드폰을 들고 화장실로 가서 문을 닫고, 물을 틀어둔 뒤 전화를 받았다.
남초윤은 욕실에서 꽤 오랫동안 망설였다. 샤워를 끝내고 검은색 레이스 속옷을 입은 채 거울을 보니 코피가 터질 것만 같았다. 이 옷, 생각보다 너무 자극적이었다. 아무것도 안 입은 것보다 더 자극적인 느낌이랄까.남초윤은 황급히 흰색 가운을 잡아챈 후 몸에 감싸고 적어도 욕실 밖으로 나갈 용기를 얻었다. 세면대에 있는 향수도 꺼내어 손목과 귀 뒤에 뿌렸다. 향기는 신선하고 독특한 복숭아 향이었다. 모든 준비를 마친 그녀는 거울을 보며 몇 번이나 깊은 숨을 내쉬었다. 만약 이러고도 육지율이 눈치 못 챈다면 아마 그 부위에 문제가 있을 것이다!그 시각, 육지율은 법무법인의 동료들과 화상 회의를 진행하며 대규모 인수 사건 몇 건을 논의하고 있었다. 그가 침실 문을 열고 들어오자 남초윤은 한쪽 다리를 침대에 살짝 올리고 앉아 ‘과장된 동작’으로 바디 로션을 바르고 있었다.남초윤은 그가 다가오자 약한 버드나무처럼 그의 품에 기대며 몸을 맡겼다. 육지율은 고개를 숙여 그녀를 보며 말했다. “무슨 바람이 불었길래 이러는 거예요?” “...” 남초윤은 입꼬리를 살짝 떨며 눈을 굴리려는 것을 겨우 참았다. 그리고 마치 유설영처럼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그를 부르며 말했다. “지율 씨, 등은 내가 혼자 못 바르니까 도와줄래요?” 육지율은 천천히 눈썹을 치켜올리며 묻듯이 바라봤다. “뭐라고 불렀어요?” “지율 씨라고... 그렇게 부르면 안 돼요?” 유설영도 늘 그런 말투로 그를 불렀는데 왜 자신은 안 된다는 거지? 솔직히 방금 부르는 게 너무 어색하긴 했다.육지율은 그녀의 팔을 붙잡고 장난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부를 수는 있는데 익숙하진 않네요.” 사실, 남초윤 자신도 너무 어색해서 곧 토할 것만 같았다. 육지율은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말투 좀 똑바로 해요. 여우처럼 굴지 말고.” 남초윤은 작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유설영도 그렇게 여우처럼 굴면서 맨날 ‘지율아~’ 라고 하던데, 그땐 꽤 좋아 보이던데요?”
육성일의 압도적인 기운은 전화 너머에서도 남초윤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말을 하지 않아도 그 묵직한 압박감은 느껴졌다. 그때 어떻게 그런 용기를 냈는지, 어떻게 육씨 집안에 시집갔는지 스스로도 의아했다. 만약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차라리 구걸을 하더라도 절대 육씨 집안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남초윤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할아버지, 부탁드려요. 저희가 약속했던 건 두 달 전이었잖아요. 아직 두 달이 채 안 지났고, 제가 지금 아기를 가졌다고 해도 확인이 안 될 수도 있어요.” 그 말에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기에 육성일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할아버지의 전화를 겨우 넘겼지만 전화를 끊자마자 다시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이번엔 ‘개자식’ 육지율이었다. “...” 할아버지와 손자는 통화 시간까지 맞춘 것처럼 기가 막히게 연달아 전화를 걸어온다. 그녀는 냉랭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왜요?” 육지율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무슨 폭탄이라도 먹었어요?” 육지율이 자신의 책을 내리게 만들고, 지난달과 이번 달 원고료도 다 날려버린 상황에서 그녀가 전화를 받아준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하지만 결혼 생활은 아직 유지 중이었고 필요한 것도 있으니 남초윤은 결국 목소리를 가다듬고 좀 더 부드럽게 말했다. “지율 오빠, 무슨 일이에요?” “... 뭐라고 불렀어요?” “지~율~오~빠~” 그녀는 유설영의 말투를 흉내 내며, 아니, 오히려 더 능숙하게 말했다. 육지율은 순간 닭살이 돋았다. “제발 평소처럼 말해요. 저녁에 내 친구가 귀국하는데 같이 식사해요. 6시에 잡지사로 데리러 갈게요.” 남초윤은 단번에 거절했다. “난 안 갈래요.” “저녁에 뭐 다른 약속 있어요?” 남초윤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결혼한 지 3년 됐지만 당신은 나한테 친구 한 명도 소개해 준 적 없잖아요.” 그리고 이제 곧 이혼할 텐데 친구를 만날 필요는 더 없었다.이혼하고 나서 친구들이
조유진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학교에서 누가 너 괴롭히진 않았어?” 배선유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응, 나 괴롭히는 사람 없어. 할아버지가 우리 학교에 엄청난 돈을 기부하셔서 선생님들도 항상 나한테 잘해주시고 많이 관심 해주셨어. 그래서 나도 함부로 장난칠 수가 없어. 혹시 선생님이 할아버지한테 이르실까 봐.” 배현수는 이 말에 전혀 놀라지 않았다. 배선유는 작은 악동처럼 말이 많았고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는 아이였다. 배현수의 말에도 자주 대꾸를 하니, 만약 동급생에게 괴롭힘을 당했다면 벌써부터 떠벌렸을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남을 괴롭히는 쪽에 더 가까웠다. 성남에서 엄준은 배선유를 엄청나게 아끼며 키웠고, 그래서인지 아이는 주눅이 들지 않고 활발하게 자랐다.조유진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다행이네. 우리 선유가 공부를 게을리할 걱정은 없겠어.” 배현수는 딸을 겁주듯 말했다. “너 공부 안 하고 일찍 연애라도 시작하면, 널 대제주에 데려와서 24시간 동안 지켜볼 거야.” 배선유는 입술을 내밀며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이건 너무 심해요! 나 혹시 쓰레기통에서 주워 온 거 아니에요?” 배현수는 코웃음을 치며 엄격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말했다. “공부 안 하면 좋은 날은 없을 거야.” 잠시 후, 학교 종이 울릴 시간이 가까워졌다. 배선유는 전화를 끊으려다가 친구가 그린 결혼사진 두 장을 영상 속으로 건네받았다. “선유야! 너랑 지우의 결혼사진 내가 그려놨어! 한 번 봐봐!” 배선유가 물었다. “한 장에 얼마야?” “너니까 공짜로 해줄게! 대신 다음번엔 나랑 결혼해 줄 수 있어?” “생각해볼게!” “...” 이 속도로라면 그들 부부는 도대체 몇 명의 사위를 맞이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한편, 스타라이트 매거진에서.남초윤이 사이트 편집자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그녀의 책은 예상대로 플랫폼에서 삭제되었고 이달 원고료는 한 푼도 들어오지 않
[합법적 부부] 함께 올라온 사진엔 결혼반지를 낀 두 손이 하트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이 게시글이 올라가자마자 마치 깊은 바다에 떨어진 폭탄처럼 큰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몰려들어 반응했다. 육지율: [8년의 여정 끝에 드디어 자랑할 수 있네!] 송하진: [어! 전 두 사람 목숨 구해준 은인이에요. 제가 아니었으면 두 사람이 어떻게 혼인신고까지 했겠어요? 당장 절 주빈으로 식사 대접해요!] 남초윤: [아아아아! 유진이를 결혼이라는 무덤 속으로 끌어들이다니! 대표님 너무하세요!] 엄창민: [내 여동생한테 잘해요. 혹시라도 괴롭히면 내 주먹이 용서 못 해요!] 엄명월: [형부! 이렇게 좋은 일에 저희한테 뭐라도 사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강이찬: [축하해, 결국 원하는 대로 됐네.] 심미경: [백년해로하세요. 행복하길 기원합니다!] 서정호: [대표님, 일 다 끝냈으면 빨리 돌아오세요. 의사 선생님이 여기서 엄청 화내고 있어요. 저 더는 못 버틸 것 같아요!] 학교 가기 싫어: [와! 아빠랑 엄마가 드디어 결혼했네요! 헤헷, 아빠, 나도 오늘 결혼했어요!] 배현수는 배선유의 댓글을 보고 순간 검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조유진이 운전하며 그의 미세한 변화를 눈치채고 물었다. “왜 그래요?” “선유가 결혼했다는데.” “뭐라고요?” 조유진은 깜짝 놀라 차를 도로 옆에 세우고 급히 배선유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다. 저쪽에서 배선유는 학교에 있었는데 마침 쉬는 시간이었다. 외국어 학교라 분위기가 자유로워 아이들은 평소에도 부모님과 연락을 하기 위해 휴대폰을 가지고 다녔다. 배선유는 전화를 받자마자 얼굴을 카메라 앞으로 들이밀었다. “엄마, 아빠! 나 사진 보고 싶어!” 조유진은 그녀에게 사진을 보여주고 나서 물었다. “선유야, 아까 결혼했다고 했잖아. 누구랑 결혼한 거야?” “우리 반 한지우랑! 엄마, 나 오늘 엄청 많은 축의금을 받았어! 내가 다 적어 놨어!”
조유진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갈게요.” 그가 환자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이번 한 번은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 다음 날 이른 아침. 서정호가 산성 별장에서 두 벌의 정장과 결혼 서류를 준비해왔다. 조유진은 오랜만에 풀 메이크업을 하고 머리도 고데기로 말았다. 그녀는 하얀 오프숄더 드레스를 입고 사진에 잘 나올 수 있도록 최대한 신경 썼다. 그녀는 한동안 이렇게까지 꾸미지 않았는데 하이힐을 신고 배현수 앞에 서니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조금 어색해졌다. 그래서 물었다. “나 어때요?” “아름다워. 넌 언제나 아름다워.” 배현수는 전혀 망설임 없이 그녀를 칭찬했다. 조유진은 웃음을 참으며 옆에 있던 넥타이를 집어 들고 배현수에게 매어주었다. 배현수는 그녀의 손길에 고개를 숙이며 협조했다. 조유진은 평소와 다르게 더 복잡하고 정중한 ‘엘드리지 매듭’으로 넥타이를 맸는데 배현수는 평소에 간단한 윈저 매듭만 했었다. “이 매듭은 좀 생소하네.” 조유진은 넥타이를 다 매고 나서 그의 셔츠와 정장 재킷의 깃을 정리해 주었다. “이게 엘드리지 매듭이라고 해요. 중요한 자리에서 어울리는 방식이죠. 어때요, 괜찮아요?” “멋져. 하지만 여보, 우리 서둘러야 해. 조금 있으면 의사가 올 거야.” 웃으며 농담하듯 이야기하던 배현수는 조유진의 외투를 챙겨 그녀의 어깨에 걸쳐 주고, 그녀를 한 손으로 감싸 병실을 몰래 빠져나갔다. 두 사람은 마치 도망치듯 병원을 빠져나와 차에 올랐다. ... 그들이 빠져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의사가 병실에 회진을 왔다. 하지만 환자와 보호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그곳에는 ‘무관한 사람’만 남아 있었다. 의사는 엄숙한 표정으로 서정호를 보며 물었다. “환자는 어디 갔죠? 튜브까지 다 뽑다니, 누가 뽑았습니까?” 서정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환자 본인이 뽑았습니다.” “도대체 어디 간 겁니까? 팔을 정말 망가지게 할 작정인가요
배현수의 가슴이 떨렸다. 그는 조유진과 이마를 맞대며 낮게 속삭였다. “그때 난 네 옆에 있진 않았지만 네 뒤에서 계속 지켜보고 있었어. 그런데 왜 울었어?” “현수 씨 생각이 났어요.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게 너무 슬펐거든요. 내가 이렇게 좋은 남자를 잃어버린 것 같아서, 그게 너무 아쉽고 후회스러웠죠. 그래서 울었어요.” 지금 이렇게 그를 바라보고 있으니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은 느낌이었다. 조유진의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었다. 하지만 이번 눈물은 슬픔이나 후회 때문이 아니었다. 감동과 감사함 때문이었다. 운명이 그들을 온갖 고난 속에서도 끝끝내 묶어 놓았고, 그들 사이에선 이제 더 이상 헤어질 수 없는 깊은 연대가 생겼기 때문이다. 배현수는 긴 손가락을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천천히 끼워 넣으며 손을 꼭 맞잡았다. 순간 그들의 손바닥에서 따뜻함이 퍼져나갔다. 그는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진아, 넌 한 번도 날 잃은 적 없어. 우리가 몇 번을 떨어져도, 얼마나 오랫동안 떨어져 있더라도 난 결국 널 찾아내서 꼭 안고 말해줄 거야. 사랑한다고. 오직 너만 사랑한다고.” 처음부터 끝까지, 조유진은 배현수의 유일한 선택이었고 그 선택은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조유진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현수 씨, 우리 영원히 함께할 수 있을까요?” “그럼.” 그의 대답은 8년 전과 똑같았다. 짧지만 확고했으며 1초의 망설임도 없었다. 조유진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손목에 걸린 달콤한 연녹색 비취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상처가 나으면 우리 같이 아주머니를 위한 좋은 묘지를 고르러 가요. 그분을 위한 의관묘라도 만들어 드리는 게 어때요?” “아직도 ‘아주머니’라고 불러?” 조유진은 순간 얼굴이 뜨거워지며 말투를 바꿨다. 배현수는 그녀의 팔찌를 손가락으로 살며시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풍수 좋은 곳을 따로 고를 필요는 없어. 어머니께
육지율은 그 필명이 어딘가 익숙하다고 느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문득 기억해 냈다. “이 자식! 기억났어! 이 녀석이 책에서 날 모욕하지 않았나? 내 명성을 망가뜨렸잖아?” 남초윤은 급하게 말했다. “잘못 본 거 아니에요? 비엘 작가가 주인공을 모욕할 리가 없어요! 그러면 밥숟가락 들고 욕하는 것과 뭐가 다르겠어요?” “나를 ‘수’로 묘사한 게 모욕이 아니고 뭐예요? 왜 항상 배현수가 공이냐고?” 남초윤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는 그 부분을 신경 쓰고 있었던 거였다.남초윤은 그가 진짜 작가를 고소할까 봐 걱정되었다. 그래서 변명하듯 말했다. “다음번엔 지율 씨가 공이고, 배 대표님이 수가 될 수도 있잖아요. 원래 BL 소설에서는 공수 구분이 모호해요. 겉보기에 수 같아도 사실은 공일 수도 있다고요!” 조유진은 살짝 의문을 제기했다. “난 현수 씨가 수 같지는 않았는데. 만약 현수 씨가 진짜 수라면 캐릭터 붕괴지. 차라리 육 변호사님이 수인 게 더 어울려. 자유롭고, 매력적이고, 다정하잖아.”“?”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육지율은 얼굴이 시커멓게 변하며 조유진에게 따졌다. “아니, 조유진. 내가 약해 보이는 수 같은 느낌을 준다고?” “...” 배현수는 차갑게 말했다. “유진이가 쓴 것도 아닌데 왜 화내? 그럴 시간 있으면 작가나 고소해.” 남초윤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그냥 재미로 쓴 거지 무슨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니잖아요? 작가를 고소하면 너무 쪼잔해 보일 거예요!” 하지만 육지율은 이성을 잃고 이를 악물었다. “쪼잔해 보이든 말든, 그 책을 하차할 거예요!” 자신이 소설 속에서 수 역할로 묘사되었고, 그것도 많은 사람에게 읽히고 있다는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조유진은 객관적으로 말했다. “사실 책 내용은 나쁘지 않아요. 꽤 재미있고 독자도 많아요.” “독자가 몇 명인데?”“몇만 명 정도?” “뭐?”‘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날 수로 상상했
병실에서 조유진은 그가 누워있는 침대 옆에 앉아 있다가 잠들었다. 잠에 들어서도 손가락이 배현수의 손에 살짝 얽혀 있었는데 다정하고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이 사진은 완전히 남자 친구 시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입원 생활이 지루하다고 하다니.육지율이 댓글을 남겼다. “뭐야, 입원했어? 혹시 가정 폭력이라도 당한 거야?” 댓글을 남기고 나서 육지율은 차에 시동을 걸며 남초윤에게 말했다. “과일 바구니 좀 사서 병문안이나 가요. 친구가 입원했어요.” “친구? 설마 배 대표님이세요? 어디 아파요?” 육지율은 웃으며 말했다. “글쎄요. 진짜 아플 수도 있고 그냥 꾀병일 수도 있고.” 혹시 모른다. 꾀병일지도....병원에서는 조금 전 장은숙이 산성 별장에서 저녁 식사를 가져왔다. 수술 후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 밤은 죽 같은 유동식만 먹어야 했다. 배현수는 오른손을 쓸 수 없었기에 조유진이 죽 그릇을 들고 숟가락으로 그에게 먹여주고 있었다. 첫 숟가락을 그의 입 앞에 가져가자 배현수는 뜨겁다고 투덜댔다. 조유진이 후후 불어 온도를 맞춘 후 말했다. “이제 적당히 식었어요.” 배현수는 그제야 죽을 한 입 삼켰다. 그 순간 병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장난스러운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며칠 못 본 사이에 아기로 됐네? 밥도 혼자 못 먹고, 조유진이 널 너무 오냐오냐한 거 아냐?” 조유진이 놀라서 뒤돌아보니, 육지율과 남초윤이 병실에 들어와 있었다. 그녀는 웃으며 설명했다. “오른쪽 어깨에 부상을 입었어요. 의사 선생님이 며칠 동안 오른손은 쓰지 말라고 하셨어요. 상처가 더 심해질 수 있거든요.” 그러자 육지율은 다짜고짜 그의 오른쪽 어깨를 툭 쳤다. “진짜야?” 배현수는 고통에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욕설을 퍼부었다. “이 미친놈아!” 조유진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변호사님, 진짜로 다쳤다니까요! 어깨에 구멍이 났다고요, 함부로 건드리지 마세요!
그녀를 겨우 한 번 데리러 온 김에 출퇴근길의 불편함을 느끼고는 아예 차를 사서 해결하려고 하다니, 정말 육지율 다운 방식이었다.이 4S 매장에서 파는 차들은 모두 포르쉐였고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가장 저렴한 모델도 수천억 원대였다. 남초윤은 이미 남씨 집안이 육지율에게 너무 많은 빚을 지고 있었기에, 그가 차를 선물해 주겠다고 해도 받을 수 없었다.남초윤은 차분히 말했다. “앞으로는 출퇴근 길에 당신을 귀찮게 하지 않을 테니, 굳이 차를 선물할 필요는 없어요.”육지율은 순간 멈칫했다가 살짝 비웃으며 말했다. “차 한 대 선물한다고 귀찮다는 딱지가 붙어요? 이런 확산적 사고방식은 참 대단하네.”“....”정말 그런 게 아니란 말인가?평소에도 성격이 불 같았던 육지율은 차를 주겠다고 하면서도 그녀를 달래는 상황이 우스웠는지 어이없어 웃었다. 둘 중 누가 더 성격이 나쁜지 모를 일이었다.영업 직원은 남초윤을 육지율이 외부 애인으로 오해했고, 이 큰 거래가 깨질까 봐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가씨, 변호사님께서 차를 사주시는 건 출퇴근 시간을 줄여서 그 시간 동안 조금이라도 더 쉴 수 있게 해주려는 마음이 아닐까요?”남초윤은 더 이상 그의 돈을 쓰고 싶지 않았다. 이미 갚을 수 없는 빚이 너무 많았고 계속해서 더 쓴다면 두 아이를 낳아야 겨우 그 빚을 다 갚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러나 육지율은 그 여느 때처럼 행동했다. 그는 VIP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빨리 골라요. 차 안 사면 집에 못 돌아가요.”남초윤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여자 영업 직원이 다가와 다양한 모델을 소개할 때, 그저 듣기만 했다. 그 직원은 미소를 띠며 말도 아주 달콤하게 했다. “변호사님은 저희 매장의 단골이세요. 그런데 여자를 데리고 온 건 이번이 처음이네요. 변호사님이 정말로 많이 아끼시는 것 같아요. 비싼 차를 고르시면 아마 더 기뻐하실 거예요.”역시, 판매왕이었다.감정적 가치를 제공하는 법을 너무나 잘 아는 직원이었다. 하지만 남초윤은 그저 외부의
남초윤은 결혼 상태를 한 번도 업데이트한 적이 없었다. 동료들 눈에는 여전히 미혼으로 보였다.처음 그녀와 육지율의 스캔들이 터졌을 때 온 세상이 떠들썩했지만 사실 모두 육지율의 매력적인 외모 때문이었다. 아무도 남초윤처럼 작고 평범한 존재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육지율이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들의 침대 사진이 언론이나 남재원에게 유출되지 않은 것도 기적이었다. 사람들은 그저 육지율이라는 유명한 바람둥이가 ‘함정'에 빠져 순진한 여자와 관계를 맺은 후, 마지못해 결혼했다는 소문만 믿고 있었다.육지율이 연예계 인물이 아닌 만큼 동료들 중에서도 아무도 그 사건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육지율이 ‘좋은 집안의 아들’ 이라는 사실만 기억하고 그의 결혼 상대가 누군지에는 무관심했다. 그녀는 어디에도 크게 드러나지 않았고 언론에서도 그의 곁에 서는 일이 거의 없었다. 남초윤은 그렇게 세상 사람들의 눈에 숨겨져 있었다.동료들은 그저 그녀가 조금 집안 배경이 있는 부유한 여자인 줄로만 알았고 육지율의 아내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어쨌든 육지율의 아내라면 아무리 상황이 나빠도 그들과 같이 일하며 고생할 일은 없을 테니까. 설령 과거에 파파라치 일을 했더라도 그렇게 높은 곳에 시집갔다면 육씨 집안이 그녀를 계속 그 일을 하도록 놔두지 않았을 거라고 여겼다.비록 세상은 모두 직업의 평등을 외치고 있지만 상류 사회에는 여전히 그들만의 규칙이 있었다. 체면과 명예가 그들의 신분과 존엄을 상징했다. 파파라치라는 직업은 육씨 집안에게 있어 절대 자랑스러울 수 없는 일이었으니, 육지율과 강란희가 그녀에게 좀 더 체면 있고 유망한 직업들을 제안했지만 남초윤은 그들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그렇게 시간을 보낸 끝에 동료들은 하나둘씩 퇴근하고 남초윤만 남았다. 한 시간이 흐른 뒤 남초윤은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 저녁 7시가 되었다. 그녀는 통화 기록을 훑어보고 다시 한 번 메시지를 확인했지만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