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지은이 실종된 지 거의 일주일이 지났다. 이제 와서 단서가 발견된 것은 좋은 일이었다.하지만 조유진은 배현수의 이번 출국이 어딘가 걱정되었다.“만약 드래곤 파가 현수 씨를 협박하기 위해서 어머님을 납치한 거라면요? 그렇다면 그 사람들도 분명 현수 씨가 올 걸 예상하고 함정을 파놨을 거예요.”배현수는 그런 조유진의 마음을 이해했다.“내가 안 갔으면 좋겠어?”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인 법이다. 예지은이라면 조유진에게 엄청 중요한 존재가 아니었다. 하지만 배현수는 조유진의 인생에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존재나 마찬가지였다.조유진은 그런 배현수의 말을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현수 씨 친어머니니까, 현수 씨가 그렇게 몸을 사리지 않는 걸 이해할 수는 있어요. 저도 현수 씨를 막을 자격은 없죠. 그냥 제가 걱정되는 건…”배현수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까 봐 두려웠다.배현수가 조유진의 손을 잡으며 다정한 목소리로 약속했다.“무사히 돌아올게.”하지만 조유진은 배현수를 바라보며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조유진을 너무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던 배현수가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안 돌아오면 내가 너랑 결혼을 어떻게 하겠어?”“…”조유진은 눈을 살짝 내리깔며 애써 달아오르는 눈시울을 숨겼다.그녀는 배현수의 셔츠 단추를 만지작거리며 아쉬운 듯 말했다.“선유가 방학에 엄마 아빠랑 여행 가고 싶다고 했었는데, 또 계획 틀어지게 생겼네요. 현수 씨가 나중에 직접 가서 설명할래요?”일전, 배현수와 조유진은 이미 선유에게 같이 놀러 갈 거라는 약속을 한 상태였다. 이번에 또 약속을 어긴다면 아이가 화를 낼 게 뻔했다.배현수는 조유진의 손을 잡아 가볍게 몇 번 쥐더니 깊은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응, 내가 가서 다 얘기할게. 주명은 일은…”“주명은 일은 내가 알아서 다 처리할게요. 현수 씨는 신경 쓰지 말아요.”배현수는 조유진을 꼭 끌어안더니 자신의 턱을 그녀의 머리 위에 가볍게 괴고는 옅은 한숨을 쉬었다.“유진아, 이번이 마지막이야. 널 이렇게 걱
배현수는 팔을 벌려 선유를 꼭 끌어안아 주었다.아빠가 자리를 뜨고… 아이의 방문이 닫혔다.선유는 곧장 영어사전을 저 멀리 던져 버리고는 다시 태블릿을 쥔 채 침대에서 춤을 추며 노래를 불렀다.“랄랄라! 랄랄라! 나는 꼬마 신문 배달부… 아빠 출장 따위는 기다리지 않지…”“찰칵.”아이의 방문이 다시 열렸다.선유는 민첩하게 침대에 엎드려 이불 속에 고개를 묻고는 서럽게 소리를 내며 울기 시작했다.아이의 울음소리에 놀라 달려온 조유진이 물었다.“선유야, 왜 그래? 아빠한테 혼났어?”엄마의 목소리에 선유는 곧바로 이불 속에서 기어 나왔다.“아, 엄마였구나! 깜짝 놀랐잖아요! 엄마, 내일 아빠 출장 가시면 우린 어디 놀러 가요?”“…”대단한 녀석이다.조유진은 혹시라도 딸이 슬퍼할까 봐 걱정했건만, 배현수와 자신만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던 셈이었다.…서재.계약서를 작성하던 배현수가 조유진을 보며 물었다.“선유는 아직도 기분 안 좋대?”이걸… 뭐라고 대답해줘야 할까?조유진은 무의식적으로 대답했다.“조금요.”하지만 아주 조금.아이는 이미 혼자 파티를 벌이고 있었다.그 말에 배현수의 마음이 갑자기 약해지더니 어딘가 모를 죄책감이 들면서도 또 약간의 안도감을 느꼈다.“이제 선유가 정말 사랑스러운 내 딸이 됐네. 내가 돌아오면 같이 디즈니랜드 가자고 전해줘.”선유는 사랑스러운 딸이 맞았다. 어딘가 나사 빠진 딸이어도 사랑스러운 딸이었다.조유진이 가까스로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그 말 들으면 선유 진짜 좋아하겠어요.”배현수는 손에 들고 있던 계약서를 조유진에게 건네며 말했다.“이거 좀 봐봐.”“이게 뭔데요?”계약서를 건네받아 확인한 조유진의 표정이 묘해졌다.배현수가 펜을 꺼내며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말했다.“추가할 거 없으면 여기에 사인하면 돼. 그럼 내가 변호사한테 보내서 공증까지 끝낼게.”배현수가 내민 것은 재산 양도 계약서였다.배현수는 자신이 소유한 모든 개인 자산을 조유진에게 양도하며 자발적으로 증여한다는 내용
결국, 조유진은 결혼 전 증여 계약서에 서명하지 않았다.배현수는 금고에서 호신용 전기충격기를 꺼내 조유진의 손에 쥐여주며 말했다.“내가 없는 동안 항상 이거 갖고 다녀. 충전은 이미 해뒀고. 지난번에 이거 쓰는 법 가르쳐줬는데, 기억하지?”조유진은 생각보다 무거운 전기충격기를 받아 들고는 고개를 끄덕였다.“기억하죠.”배현수가 다시 당부했다.“위급 상황에도 절대 마음 약해져선 안 돼. 일이 너무 커졌다 싶으면 바로 육지율 변호사 부르고.”“알겠어요, 꼭 명심할게요.”“전기충격기는 잘 숨겨둬. 내가 호신술 몇 개 더 가르쳐줄게.”“네, 좋아요.”하지만 지금 조유진이 누구보다 걱정하는 사람은 배현수였다. 지금 위험한 상황에 뛰어드는 사람은 결국 그였으니까.조유진은 배현수의 셔츠 깃을 정리해주며 그의 목젖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말했다.“현수 씨, 돌아오면 꼭 나랑 결혼해줘요.”깊은 눈으로 조유진을 바라본 배현수가 그녀를 단단히 끌어안았다. 조유진은 배현수의 품속에서 숨이 막힐 지경이었지만 밀어내지 않았다.조유진은 밀어내는 대신 두 팔로 배현수의 넓은 등을 꼭 끌어안았다. 그리고 배현수는 조유진의 이마, 콧등, 입술에 차례대로 입을 맞췄다.조유진은 고개를 살짝 들어 점점 진해지는 키스를 받아들였다.…배현수가 떠난 후에도 주명은은 여전히 인터넷에서 소란을 피웠다.조유진은 그런 주명은을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었다. 그녀 홀로 궁지에 몰리면 그때 확실하게 끝장을 볼 생각이었다.조유진은 선유를 데리고 대제주시 근처에서 이틀 동안 놀았다.하지만 배현수가 없는 동안 혹시라도 드래곤 파의 사람들이 그녀와 선유의 주변에 잠복해 있을까 봐 두려웠다. 결국, 조유진은 선유와 루루를 성남에 있는 엄씨 본가에 보내기로 했다.오랜만에 내려간 엄씨 본가에서 조유진은 엄준에게서 새로운 임무를 맡게 되었다.“곧 대제주 쪽에서 경매가 열릴 예정입니다. 그 경매에 저와 성행 그룹을 대표해 나가줬으면 합니다. 그 경매에 내가 관심 있는 도자기가 있거든요. 사진은
조유진은 주저 없이 바로 타투 가게에 들어갔다.가게에서 일하는 쿨한 스타일의 여자 타투이스트는 뛰어난 그림 실력을 지닌 사람이었다. 조유진은 가게 안에 걸려있는 타투를 쭉 둘러보았지만 마음에 드는 디자인이 보이지 않았다. 결국, 타투이스트는 종이와 펜을 꺼내 조유진이 원하는 도안을 즉석에서 그려주었다.그렇게 탄생한 타투 도안은 연한 분홍색 불꽃 비 아래로 S가 부드럽고 밝은 분위기로 이어지는 도안이었다.그 독특하고도 로맨틱한 분위기는 조유진과도 아주 잘 어울렸다.남초윤도 그 도안을 보자마자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이 도안 진짜 예쁘다. 난 타투라고 하면 다 무슨 용 문신 같은 거인 줄 알았어!”타투이스트가 물었다.“어디에 하실 거예요?”“왼쪽 가슴에 할게요.”“네, 그럼 이쪽으로 와서 누워주세요. 간단히 마취 크림부터 바르고 타투 시작하겠습니다.”타투이스트에게는 이미 익숙한 일이었다. 왼쪽 가슴에 타투를 새기는 것쯤은 흔하디흔한 일이었고 더 은밀한 부위에 타투를 해본 적도 있었다.하지만 조유진의 말에 남초윤은 묘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현수 씨가 이거 보면 어떡해? 완전 짐승 되는 거 아니야?”“…”한 시간가량이 지나자 타투가 완성되었다.출중한 실력의 타투이스트 덕에 완성된 타투는 조금 전 종이에 그렸던 타투 도안과 일치했다.조유진도 자신의 타투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배현수가 돌아오면 깜짝 선물로 보여줄 계획이었다.…3일 후, 박람회 센터.그곳에서는 국제 경매가 진행되고 있었다.남초윤은 조유진의 팔짱을 낀 채 안으로 들어섰다. 경매장에는 다양한 골동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경매 시작 전, 남초윤은 휴대폰을 들고 골동품들을 찍으며 말했다.“부자 친구 두니까 이런 것도 보고 좋네. 유진아, 이 부채 조개로 만들어진 거래! 정말 대단하지 않아?”행사장을 둘러보던 조유진은 엄준이 찾던 그 도자기를 보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하지만 고개를 든 조유진의 눈에 익숙한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정확히 말하자면 성가신 사람이었다.
“속였는데 그래서 뭐? 넌 속이려고 해도 현수 씨가 봐주든?”“…”조유진의 말에 화가 치밀어오른 주명은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주현성은 곁에서 두 사람을 제지하는 척 나서며 입을 열었다.“두 사람 왜 이렇게 싸우는 거야? 명은아, 너랑 유진이 같은 학교 동창이잖아. 나도 이제 방송국장 됐는데 유진이 네가 없는 게 조금 아쉽구나. 유진이 네가 방송국으로 돌아오고 싶다면…”주현성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주명은은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큰소리로 외쳤다.“아빠! 몇 년 동안 놀고먹던 온실 속 화초가 뭘 알겠어요, 지금 아마 대사 한 줄도 제대로 못 외울걸요? 그런 애를 왜 다시 데려가요? 그냥 월급만 받으면서 놀고먹으라고요?”아빠라고?주명은이 주현성 같은 늙은 변태를 의붓아버지로 삼았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주명은은 무의식적으로 주현성의 팔짱을 끼더니 남자의 팔을 좌우로 흔들었다.지나칠 정도로 애교 섞인 주명은의 동작은 두 사람이 정말 부녀 사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친밀해 보였다.스물여섯이나 먹은 여자가 마흔 넘은 중년 남자를 의붓아버지로 삼는다니, 이게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그냥 슈가 대디겠지.두 사람을 바라보는 조유진의 눈빛이 지나치게 예리해 보였던 모양이다.그녀의 시선에 주명은은 급히 주현성에게서 팔을 빼며 남자와 거리를 두었다.만약 배현수가 여기 있다면 다른 남자와 이렇게 다정하게 붙어있는 모습을 들켜선 안 되니까 말이다.그리고 조유진이 배현수에게 이 사실을 얘기할까 봐 신경 쓰였다.조유진은 알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아, 두 사람, 부녀 사이였구나. 그래서 둘이 성씨가 똑같았던 거네. 국장님, 밖에 이렇게 큰 딸이 있다는 걸 사모님께서도 아세요?”그 말에 주명은이 분노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조유진! 너 지금 무슨 헛소릴 하는 거야?”주명은의 호통에 조유진은 미간을 약하게 좁히며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네가 먼저 아빠라고 부르지 않았어? 네가 국장님한테 아빠라고 했으니까, 둘이 부녀 사이인 거 아
본격적인 경매가 시작되기 전, 입구에서는 작은 소동이 있었다.화려하게 차려입은 유설영이 현장에 등장했다.남초윤이 공중에서 손을 휘휘 저으며 냄새를 쫓으려는 듯한 모션을 취했다.“오늘 운세가 좀 안 좋나, 왜 갑자기 여우 냄새가 나지?”음흉하고 비열한 주명은과는 달리 유설영의 교활함은 더욱 대담했다.그녀는 남초윤을 발견하자마자 매니저와 함께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어머, 초윤 씨. 여긴 어쩐 일이에요? 가십거리라도 있나 캐러 왔어요?”남초윤은 가식적인 웃음을 지으며 유설영의 질문에 대답했다.“그럼 유설영 씨는 여기서 나한테 가십거리 제공하러 와주신 건가요?”“그런 건 아니고, 오늘 이 경매에 ‘준마’ 작품이 나온다고 해서요. 할아버님께서 그림을 아주 좋아하시거든요. 곧 할아버님 80번째 생신이시기도 하고 그래서 선물이나 사드릴 겸 온 거예요.”“어머, 효녀 납시셨네요. 누가 들으면 무슨 육씨 가문 손주며느리라도 된 줄 알겠어요.”그 말에 유설영이 입꼬리를 끌어올려 미소를 지어 보였다.“아직은 아니지만 앞으로도 아닐 거라는 법은 없죠. 초윤 씨, 여기서 구매하실 거 없으시면 그냥 돌아가시는 게 어때요? 여긴 초윤 씨랑 좀 안 어울리는 것 같은데요.”남초윤이 어이없다는 듯 눈알을 굴리며 말했다.“내가 여기랑 어울리든 말든, 가십 거리를 캐러 왔든, 황금을 캐러 왔든 그쪽이랑 무슨 상관이죠?”유설영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초윤 씨도 언젠간 지율이랑 초윤 씨가 전혀 다른 세상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겠죠.”“나랑 지율 씨가 다른 세상 사람이라니요? 그럼 지율 씨는 무슨 외계인인가요?”“…”유설영은 고개를 빳빳이 쳐든 채 남초윤의 곁을 지나가며 가볍게 한 마디 던졌다.“사실 오늘 그 그림뿐만 아니라 에메랄드 브로치도 경매에 올라왔더라고요. 그 브로치, 예전에 지율이가 나한테 선물로 준 거거든요. 그리고 헤어지자마자 뉴욕으로 갔는데, 뭔가 그 물건 볼 때마다 그리워질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팔았어요. 그래도 난 원하면 언제든 다시
“100억!”남초윤을 손을 꽉 잡은 조유진이 침착하게 가격을 외쳤다.진행자가 말했다.“우와, 저분께서 지금 100억을 외치셨는데요. 더 올리실 분 계실까요?”유설영이 외쳤다.“102억!”“102억 나왔습니다!”조유진은 침착하게 가격을 올렸다.“120억!”그 순간, 경매 현장이 술렁거렸다.지금 조유진은 마치 경매 현장을 접수하러 온 사람 같았다.그 누가 감히 경매가의 중간 숫자부터 바꿀 생각을 할 수 있을까?남들은 2억씩 추가할 때 조유진은 100억씩 가격을 늘렸다.유설영이 이를 꽉 깨물었다.그녀도 지금 조유진이 일부러 가격을 미친 듯이 올리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하지만 이 에메랄드 브로치는 유설영에게 아주 특별한 의미가 있는 브로치였다.무대 위의 경매 진행자는 이미 잔뜩 신난 목소리로 외치고 있었다.“120억 나왔습니다!”“또 있으신가요?”유설영은 결심한 듯 번호표를 들었다.“122억!”하지만 조유진은 여전히 여유롭게 가격을 외쳤다.“140억!”그 말에 현장 분위기가 들끓기 시작했다. 모두의 시선이 조유진에게 집중됐다.“저분 누구셔? 가격 진짜 시원시원하게 부르네!”“어느 집안 딸이야? 처음 보는 얼굴인데!”뒷좌석에 앉은 주현성이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조우진을 바라보았다.“조유진 저 녀석, 언제 저런 부자랑 엮인 거야? 한순간에 저 정도 큰 손이 됐다니!”주명은은 경멸 어린 시선으로 비웃었다.“남자 돈이나 쓰면서 잘난 척이야. 나중에 현수 씨한테 버림받으면 이 경매장에는 발도 못 들일 거면서!”주명은은 조유진에게 배현수의 돈으로 저런 비싼 브로치를 살 용기가 없으리라 생각했다.그녀의 눈에 조유진은 그저 주목받고 싶어 일부러 눈에 띄게 행동하는 사람으로만 보였다.무대 위에서 가격 중계를 해주던 진행자가 말했다.“오늘 경쟁 꽤 치열한데요! 이야, 이 에메랄드 브로치가 어느새 140억까지 올랐는데요. 더 부르실 분 계실까요?”“140억 나왔습니다!”“142억!”“네, 142억 나왔습니다!”상상도
조유진은 그 후로도 가끔 허위로 가격을 외쳐 분위기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그러다가 엄준이 지정한 도자기가 나타나자 조유진은 처음으로 가격을 외치지 않았다.색깔도 선명하고 조화로운 그 도자기는 청나라 말기에 해외로 수출된 작품이었다.그리고 지금, 그 도자기는 경매장에 나와 있다.엄준은 조유진에게 그 도자기를 입찰해 성남의 박물관에 기증하라고 지시했다.시작가는 무려 12억이었다.경매장의 누군가가 외쳤다.“13억!”조유진도 뒤따라 번호표를 들었다.“13억 2천!”유설영은 아까 조유진이 자신에게 했던 것처럼 가격을 계속 올려 복수하고 싶었지만 조유진은 매번 가격을 외치고도 결국 입찰은 하지 않았다.마치 그저 경매장의 분위기를 흐리기 위해 온 사람 같았다.만약 유설영이 정말 여기서 가격을 올려버린다면 조유진이 그 가격을 계속해서 받아칠지 확신할 수 없었다.뒷자리에 앉아 가만히 지켜보던 주명은은 조유진을 노려보며 말했다.“저 얍삽한 년! 주목받을 건 다 받아놓고 정작 사는 건 하나도 없잖아!”주현성도 함께 혀를 차며 말했다.“조유진 쟤, 예전부터 방송국에서 잔머리 잘 쓰기로 유명했지! 보통 가슴 크고 예쁜 애들은 멍청하다고 하던데…”그 말에 주명은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쟤 가슴이 크다고요? 만져봤어요?”저렇게 마른 조유진인데 기껏 해봤자 B컵일 게 분명했다.주현성이 멋쩍게 대꾸했다.“그냥 눈대중으로 본 거야.”말이 끝나기 무섭게 주현성의 아내가 그의 뺨을 손바닥으로 힘껏 내리쳤다.“다 늙어놓고 아직도 정신 똑바로 못 차리네!”주현성이 겁먹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냥 보는 거야, 보기만 하는 것도 안 돼?”방송국에 갓 인턴으로 들어온 조유진은 고작 20대 초반이었다. 그 시절 조유진은 정말 싱그러운 꽃 같았다. 타이트한 스커트를 입으면 골반이 부각돼 순수하고 요염한 뒷모습이 보는 이의 침샘을 자극했다.하지만 그 쓸데없는 계집애는 조금의 여지도 주지 않았다.주현성이 매번 손을 뻗어 만지려고 하면 조유진은 항상 그와 1미터
육성일의 압도적인 기운은 전화 너머에서도 남초윤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말을 하지 않아도 그 묵직한 압박감은 느껴졌다. 그때 어떻게 그런 용기를 냈는지, 어떻게 육씨 집안에 시집갔는지 스스로도 의아했다. 만약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차라리 구걸을 하더라도 절대 육씨 집안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남초윤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할아버지, 부탁드려요. 저희가 약속했던 건 두 달 전이었잖아요. 아직 두 달이 채 안 지났고, 제가 지금 아기를 가졌다고 해도 확인이 안 될 수도 있어요.” 그 말에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기에 육성일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할아버지의 전화를 겨우 넘겼지만 전화를 끊자마자 다시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이번엔 ‘개자식’ 육지율이었다. “...” 할아버지와 손자는 통화 시간까지 맞춘 것처럼 기가 막히게 연달아 전화를 걸어온다. 그녀는 냉랭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왜요?” 육지율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무슨 폭탄이라도 먹었어요?” 육지율이 자신의 책을 내리게 만들고, 지난달과 이번 달 원고료도 다 날려버린 상황에서 그녀가 전화를 받아준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하지만 결혼 생활은 아직 유지 중이었고 필요한 것도 있으니 남초윤은 결국 목소리를 가다듬고 좀 더 부드럽게 말했다. “지율 오빠, 무슨 일이에요?” “... 뭐라고 불렀어요?” “지~율~오~빠~” 그녀는 유설영의 말투를 흉내 내며, 아니, 오히려 더 능숙하게 말했다. 육지율은 순간 닭살이 돋았다. “제발 평소처럼 말해요. 저녁에 내 친구가 귀국하는데 같이 식사해요. 6시에 잡지사로 데리러 갈게요.” 남초윤은 단번에 거절했다. “난 안 갈래요.” “저녁에 뭐 다른 약속 있어요?” 남초윤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결혼한 지 3년 됐지만 당신은 나한테 친구 한 명도 소개해 준 적 없잖아요.” 그리고 이제 곧 이혼할 텐데 친구를 만날 필요는 더 없었다.이혼하고 나서 친구들이
조유진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학교에서 누가 너 괴롭히진 않았어?” 배선유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응, 나 괴롭히는 사람 없어. 할아버지가 우리 학교에 엄청난 돈을 기부하셔서 선생님들도 항상 나한테 잘해주시고 많이 관심 해주셨어. 그래서 나도 함부로 장난칠 수가 없어. 혹시 선생님이 할아버지한테 이르실까 봐.” 배현수는 이 말에 전혀 놀라지 않았다. 배선유는 작은 악동처럼 말이 많았고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는 아이였다. 배현수의 말에도 자주 대꾸를 하니, 만약 동급생에게 괴롭힘을 당했다면 벌써부터 떠벌렸을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남을 괴롭히는 쪽에 더 가까웠다. 성남에서 엄준은 배선유를 엄청나게 아끼며 키웠고, 그래서인지 아이는 주눅이 들지 않고 활발하게 자랐다.조유진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다행이네. 우리 선유가 공부를 게을리할 걱정은 없겠어.” 배현수는 딸을 겁주듯 말했다. “너 공부 안 하고 일찍 연애라도 시작하면, 널 대제주에 데려와서 24시간 동안 지켜볼 거야.” 배선유는 입술을 내밀며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이건 너무 심해요! 나 혹시 쓰레기통에서 주워 온 거 아니에요?” 배현수는 코웃음을 치며 엄격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말했다. “공부 안 하면 좋은 날은 없을 거야.” 잠시 후, 학교 종이 울릴 시간이 가까워졌다. 배선유는 전화를 끊으려다가 친구가 그린 결혼사진 두 장을 영상 속으로 건네받았다. “선유야! 너랑 지우의 결혼사진 내가 그려놨어! 한 번 봐봐!” 배선유가 물었다. “한 장에 얼마야?” “너니까 공짜로 해줄게! 대신 다음번엔 나랑 결혼해 줄 수 있어?” “생각해볼게!” “...” 이 속도로라면 그들 부부는 도대체 몇 명의 사위를 맞이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한편, 스타라이트 매거진에서.남초윤이 사이트 편집자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그녀의 책은 예상대로 플랫폼에서 삭제되었고 이달 원고료는 한 푼도 들어오지 않
[합법적 부부] 함께 올라온 사진엔 결혼반지를 낀 두 손이 하트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이 게시글이 올라가자마자 마치 깊은 바다에 떨어진 폭탄처럼 큰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몰려들어 반응했다. 육지율: [8년의 여정 끝에 드디어 자랑할 수 있네!] 송하진: [어! 전 두 사람 목숨 구해준 은인이에요. 제가 아니었으면 두 사람이 어떻게 혼인신고까지 했겠어요? 당장 절 주빈으로 식사 대접해요!] 남초윤: [아아아아! 유진이를 결혼이라는 무덤 속으로 끌어들이다니! 대표님 너무하세요!] 엄창민: [내 여동생한테 잘해요. 혹시라도 괴롭히면 내 주먹이 용서 못 해요!] 엄명월: [형부! 이렇게 좋은 일에 저희한테 뭐라도 사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강이찬: [축하해, 결국 원하는 대로 됐네.] 심미경: [백년해로하세요. 행복하길 기원합니다!] 서정호: [대표님, 일 다 끝냈으면 빨리 돌아오세요. 의사 선생님이 여기서 엄청 화내고 있어요. 저 더는 못 버틸 것 같아요!] 학교 가기 싫어: [와! 아빠랑 엄마가 드디어 결혼했네요! 헤헷, 아빠, 나도 오늘 결혼했어요!] 배현수는 배선유의 댓글을 보고 순간 검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조유진이 운전하며 그의 미세한 변화를 눈치채고 물었다. “왜 그래요?” “선유가 결혼했다는데.” “뭐라고요?” 조유진은 깜짝 놀라 차를 도로 옆에 세우고 급히 배선유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다. 저쪽에서 배선유는 학교에 있었는데 마침 쉬는 시간이었다. 외국어 학교라 분위기가 자유로워 아이들은 평소에도 부모님과 연락을 하기 위해 휴대폰을 가지고 다녔다. 배선유는 전화를 받자마자 얼굴을 카메라 앞으로 들이밀었다. “엄마, 아빠! 나 사진 보고 싶어!” 조유진은 그녀에게 사진을 보여주고 나서 물었다. “선유야, 아까 결혼했다고 했잖아. 누구랑 결혼한 거야?” “우리 반 한지우랑! 엄마, 나 오늘 엄청 많은 축의금을 받았어! 내가 다 적어 놨어!”
조유진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갈게요.” 그가 환자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이번 한 번은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 다음 날 이른 아침. 서정호가 산성 별장에서 두 벌의 정장과 결혼 서류를 준비해왔다. 조유진은 오랜만에 풀 메이크업을 하고 머리도 고데기로 말았다. 그녀는 하얀 오프숄더 드레스를 입고 사진에 잘 나올 수 있도록 최대한 신경 썼다. 그녀는 한동안 이렇게까지 꾸미지 않았는데 하이힐을 신고 배현수 앞에 서니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조금 어색해졌다. 그래서 물었다. “나 어때요?” “아름다워. 넌 언제나 아름다워.” 배현수는 전혀 망설임 없이 그녀를 칭찬했다. 조유진은 웃음을 참으며 옆에 있던 넥타이를 집어 들고 배현수에게 매어주었다. 배현수는 그녀의 손길에 고개를 숙이며 협조했다. 조유진은 평소와 다르게 더 복잡하고 정중한 ‘엘드리지 매듭’으로 넥타이를 맸는데 배현수는 평소에 간단한 윈저 매듭만 했었다. “이 매듭은 좀 생소하네.” 조유진은 넥타이를 다 매고 나서 그의 셔츠와 정장 재킷의 깃을 정리해 주었다. “이게 엘드리지 매듭이라고 해요. 중요한 자리에서 어울리는 방식이죠. 어때요, 괜찮아요?” “멋져. 하지만 여보, 우리 서둘러야 해. 조금 있으면 의사가 올 거야.” 웃으며 농담하듯 이야기하던 배현수는 조유진의 외투를 챙겨 그녀의 어깨에 걸쳐 주고, 그녀를 한 손으로 감싸 병실을 몰래 빠져나갔다. 두 사람은 마치 도망치듯 병원을 빠져나와 차에 올랐다. ... 그들이 빠져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의사가 병실에 회진을 왔다. 하지만 환자와 보호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그곳에는 ‘무관한 사람’만 남아 있었다. 의사는 엄숙한 표정으로 서정호를 보며 물었다. “환자는 어디 갔죠? 튜브까지 다 뽑다니, 누가 뽑았습니까?” 서정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환자 본인이 뽑았습니다.” “도대체 어디 간 겁니까? 팔을 정말 망가지게 할 작정인가요
배현수의 가슴이 떨렸다. 그는 조유진과 이마를 맞대며 낮게 속삭였다. “그때 난 네 옆에 있진 않았지만 네 뒤에서 계속 지켜보고 있었어. 그런데 왜 울었어?” “현수 씨 생각이 났어요.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게 너무 슬펐거든요. 내가 이렇게 좋은 남자를 잃어버린 것 같아서, 그게 너무 아쉽고 후회스러웠죠. 그래서 울었어요.” 지금 이렇게 그를 바라보고 있으니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은 느낌이었다. 조유진의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었다. 하지만 이번 눈물은 슬픔이나 후회 때문이 아니었다. 감동과 감사함 때문이었다. 운명이 그들을 온갖 고난 속에서도 끝끝내 묶어 놓았고, 그들 사이에선 이제 더 이상 헤어질 수 없는 깊은 연대가 생겼기 때문이다. 배현수는 긴 손가락을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천천히 끼워 넣으며 손을 꼭 맞잡았다. 순간 그들의 손바닥에서 따뜻함이 퍼져나갔다. 그는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진아, 넌 한 번도 날 잃은 적 없어. 우리가 몇 번을 떨어져도, 얼마나 오랫동안 떨어져 있더라도 난 결국 널 찾아내서 꼭 안고 말해줄 거야. 사랑한다고. 오직 너만 사랑한다고.” 처음부터 끝까지, 조유진은 배현수의 유일한 선택이었고 그 선택은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조유진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현수 씨, 우리 영원히 함께할 수 있을까요?” “그럼.” 그의 대답은 8년 전과 똑같았다. 짧지만 확고했으며 1초의 망설임도 없었다. 조유진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손목에 걸린 달콤한 연녹색 비취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상처가 나으면 우리 같이 아주머니를 위한 좋은 묘지를 고르러 가요. 그분을 위한 의관묘라도 만들어 드리는 게 어때요?” “아직도 ‘아주머니’라고 불러?” 조유진은 순간 얼굴이 뜨거워지며 말투를 바꿨다. 배현수는 그녀의 팔찌를 손가락으로 살며시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풍수 좋은 곳을 따로 고를 필요는 없어. 어머니께
육지율은 그 필명이 어딘가 익숙하다고 느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문득 기억해 냈다. “이 자식! 기억났어! 이 녀석이 책에서 날 모욕하지 않았나? 내 명성을 망가뜨렸잖아?” 남초윤은 급하게 말했다. “잘못 본 거 아니에요? 비엘 작가가 주인공을 모욕할 리가 없어요! 그러면 밥숟가락 들고 욕하는 것과 뭐가 다르겠어요?” “나를 ‘수’로 묘사한 게 모욕이 아니고 뭐예요? 왜 항상 배현수가 공이냐고?” 남초윤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는 그 부분을 신경 쓰고 있었던 거였다.남초윤은 그가 진짜 작가를 고소할까 봐 걱정되었다. 그래서 변명하듯 말했다. “다음번엔 지율 씨가 공이고, 배 대표님이 수가 될 수도 있잖아요. 원래 BL 소설에서는 공수 구분이 모호해요. 겉보기에 수 같아도 사실은 공일 수도 있다고요!” 조유진은 살짝 의문을 제기했다. “난 현수 씨가 수 같지는 않았는데. 만약 현수 씨가 진짜 수라면 캐릭터 붕괴지. 차라리 육 변호사님이 수인 게 더 어울려. 자유롭고, 매력적이고, 다정하잖아.”“?”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육지율은 얼굴이 시커멓게 변하며 조유진에게 따졌다. “아니, 조유진. 내가 약해 보이는 수 같은 느낌을 준다고?” “...” 배현수는 차갑게 말했다. “유진이가 쓴 것도 아닌데 왜 화내? 그럴 시간 있으면 작가나 고소해.” 남초윤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그냥 재미로 쓴 거지 무슨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니잖아요? 작가를 고소하면 너무 쪼잔해 보일 거예요!” 하지만 육지율은 이성을 잃고 이를 악물었다. “쪼잔해 보이든 말든, 그 책을 하차할 거예요!” 자신이 소설 속에서 수 역할로 묘사되었고, 그것도 많은 사람에게 읽히고 있다는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조유진은 객관적으로 말했다. “사실 책 내용은 나쁘지 않아요. 꽤 재미있고 독자도 많아요.” “독자가 몇 명인데?”“몇만 명 정도?” “뭐?”‘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날 수로 상상했
병실에서 조유진은 그가 누워있는 침대 옆에 앉아 있다가 잠들었다. 잠에 들어서도 손가락이 배현수의 손에 살짝 얽혀 있었는데 다정하고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이 사진은 완전히 남자 친구 시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입원 생활이 지루하다고 하다니.육지율이 댓글을 남겼다. “뭐야, 입원했어? 혹시 가정 폭력이라도 당한 거야?” 댓글을 남기고 나서 육지율은 차에 시동을 걸며 남초윤에게 말했다. “과일 바구니 좀 사서 병문안이나 가요. 친구가 입원했어요.” “친구? 설마 배 대표님이세요? 어디 아파요?” 육지율은 웃으며 말했다. “글쎄요. 진짜 아플 수도 있고 그냥 꾀병일 수도 있고.” 혹시 모른다. 꾀병일지도....병원에서는 조금 전 장은숙이 산성 별장에서 저녁 식사를 가져왔다. 수술 후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 밤은 죽 같은 유동식만 먹어야 했다. 배현수는 오른손을 쓸 수 없었기에 조유진이 죽 그릇을 들고 숟가락으로 그에게 먹여주고 있었다. 첫 숟가락을 그의 입 앞에 가져가자 배현수는 뜨겁다고 투덜댔다. 조유진이 후후 불어 온도를 맞춘 후 말했다. “이제 적당히 식었어요.” 배현수는 그제야 죽을 한 입 삼켰다. 그 순간 병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장난스러운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며칠 못 본 사이에 아기로 됐네? 밥도 혼자 못 먹고, 조유진이 널 너무 오냐오냐한 거 아냐?” 조유진이 놀라서 뒤돌아보니, 육지율과 남초윤이 병실에 들어와 있었다. 그녀는 웃으며 설명했다. “오른쪽 어깨에 부상을 입었어요. 의사 선생님이 며칠 동안 오른손은 쓰지 말라고 하셨어요. 상처가 더 심해질 수 있거든요.” 그러자 육지율은 다짜고짜 그의 오른쪽 어깨를 툭 쳤다. “진짜야?” 배현수는 고통에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욕설을 퍼부었다. “이 미친놈아!” 조유진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변호사님, 진짜로 다쳤다니까요! 어깨에 구멍이 났다고요, 함부로 건드리지 마세요!
그녀를 겨우 한 번 데리러 온 김에 출퇴근길의 불편함을 느끼고는 아예 차를 사서 해결하려고 하다니, 정말 육지율 다운 방식이었다.이 4S 매장에서 파는 차들은 모두 포르쉐였고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가장 저렴한 모델도 수천억 원대였다. 남초윤은 이미 남씨 집안이 육지율에게 너무 많은 빚을 지고 있었기에, 그가 차를 선물해 주겠다고 해도 받을 수 없었다.남초윤은 차분히 말했다. “앞으로는 출퇴근 길에 당신을 귀찮게 하지 않을 테니, 굳이 차를 선물할 필요는 없어요.”육지율은 순간 멈칫했다가 살짝 비웃으며 말했다. “차 한 대 선물한다고 귀찮다는 딱지가 붙어요? 이런 확산적 사고방식은 참 대단하네.”“....”정말 그런 게 아니란 말인가?평소에도 성격이 불 같았던 육지율은 차를 주겠다고 하면서도 그녀를 달래는 상황이 우스웠는지 어이없어 웃었다. 둘 중 누가 더 성격이 나쁜지 모를 일이었다.영업 직원은 남초윤을 육지율이 외부 애인으로 오해했고, 이 큰 거래가 깨질까 봐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가씨, 변호사님께서 차를 사주시는 건 출퇴근 시간을 줄여서 그 시간 동안 조금이라도 더 쉴 수 있게 해주려는 마음이 아닐까요?”남초윤은 더 이상 그의 돈을 쓰고 싶지 않았다. 이미 갚을 수 없는 빚이 너무 많았고 계속해서 더 쓴다면 두 아이를 낳아야 겨우 그 빚을 다 갚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러나 육지율은 그 여느 때처럼 행동했다. 그는 VIP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빨리 골라요. 차 안 사면 집에 못 돌아가요.”남초윤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여자 영업 직원이 다가와 다양한 모델을 소개할 때, 그저 듣기만 했다. 그 직원은 미소를 띠며 말도 아주 달콤하게 했다. “변호사님은 저희 매장의 단골이세요. 그런데 여자를 데리고 온 건 이번이 처음이네요. 변호사님이 정말로 많이 아끼시는 것 같아요. 비싼 차를 고르시면 아마 더 기뻐하실 거예요.”역시, 판매왕이었다.감정적 가치를 제공하는 법을 너무나 잘 아는 직원이었다. 하지만 남초윤은 그저 외부의
남초윤은 결혼 상태를 한 번도 업데이트한 적이 없었다. 동료들 눈에는 여전히 미혼으로 보였다.처음 그녀와 육지율의 스캔들이 터졌을 때 온 세상이 떠들썩했지만 사실 모두 육지율의 매력적인 외모 때문이었다. 아무도 남초윤처럼 작고 평범한 존재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육지율이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들의 침대 사진이 언론이나 남재원에게 유출되지 않은 것도 기적이었다. 사람들은 그저 육지율이라는 유명한 바람둥이가 ‘함정'에 빠져 순진한 여자와 관계를 맺은 후, 마지못해 결혼했다는 소문만 믿고 있었다.육지율이 연예계 인물이 아닌 만큼 동료들 중에서도 아무도 그 사건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육지율이 ‘좋은 집안의 아들’ 이라는 사실만 기억하고 그의 결혼 상대가 누군지에는 무관심했다. 그녀는 어디에도 크게 드러나지 않았고 언론에서도 그의 곁에 서는 일이 거의 없었다. 남초윤은 그렇게 세상 사람들의 눈에 숨겨져 있었다.동료들은 그저 그녀가 조금 집안 배경이 있는 부유한 여자인 줄로만 알았고 육지율의 아내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어쨌든 육지율의 아내라면 아무리 상황이 나빠도 그들과 같이 일하며 고생할 일은 없을 테니까. 설령 과거에 파파라치 일을 했더라도 그렇게 높은 곳에 시집갔다면 육씨 집안이 그녀를 계속 그 일을 하도록 놔두지 않았을 거라고 여겼다.비록 세상은 모두 직업의 평등을 외치고 있지만 상류 사회에는 여전히 그들만의 규칙이 있었다. 체면과 명예가 그들의 신분과 존엄을 상징했다. 파파라치라는 직업은 육씨 집안에게 있어 절대 자랑스러울 수 없는 일이었으니, 육지율과 강란희가 그녀에게 좀 더 체면 있고 유망한 직업들을 제안했지만 남초윤은 그들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그렇게 시간을 보낸 끝에 동료들은 하나둘씩 퇴근하고 남초윤만 남았다. 한 시간이 흐른 뒤 남초윤은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 저녁 7시가 되었다. 그녀는 통화 기록을 훑어보고 다시 한 번 메시지를 확인했지만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