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지율의 손에는 폭죽, 요술봉, 선녀봉... 없는 것 없이 전부 들려 있었다.마술봉 하나를 남초윤의 손에 쥐여 주며 말했다.“들고 있어요.”그리고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남초윤이 폭죽을 잡은 채 멍을 때리고 있을 때 어느새 불꽃이 일더니 하늘로 치솟기 시작했다.육지율은 양미간을 찌푸리더니 그녀의 뒤로 가서 그녀의 손을 잡고는 얼어붙은 강가에 폭죽을 갖다 댔다.“내가 아무리 미워도 내 얼굴에 폭죽을 갖다 대면 안 되지 않을까요?”옅은 농담이 담겨 있는 목소리에 남초윤도 얼른 대꾸했다.“더 좋지 않아요? 괜히 밖에 나가 딴짓할 걱정도 없고.”육지율은 고개를 내려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내가 바람날까 봐 그렇게 두려워요?”남초윤은 차가운 얼굴로 진지하게 말했다.“원래 바람둥이니까.”육지율은 더 이상 뭐라고 하지 않고 대신 고개를 그녀 옆으로 떨구며 말했다.“내가 왜 바람둥이예요. 솔직히 얘기해 봐요. 내가 잘해주지 않아요?”그녀에게 준 블랙카드는 한도가 무제한이다.들고 있는 가방은 희귀 가죽 플래티넘 가방이고 옷도 최고급이다. 어디로 여행을 가고 싶은지 말만 하면 전용기를 준비해 맞춤형 여행을 준비했다.다른 사람이 1년 동안 예약하지 못한 미슐랭 식당을 그는 바로 해결해 주었다.남재원이 사준 차 색깔이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다시 차 한 대를 사주겠다고 했지만 남초윤이 거절햇다.남편으로서 의식주에 있어서 그녀를 홀대한 적이 없었다.전에 육지율 앞에서 그녀는 김성혁과 눈앞에서 입을 맞추었다. 하지만 육지율이 성깔이라도 부렸었던가?남초윤은 육씨 집안 사모님으로서 육지율의 눈에 합격이라고 말할 수 없을뿐더러 심지어 별로 어울리지 않았다.하지만 어떻게 하겠는가? 결혼도 다 했는데 이혼은 정말 번거롭고 육씨 집안에 미치는 영향은 정말 크다.그녀와 김성혁이 결혼 존속 기간 동안 진짜로 원칙적인 잘못을 저질렀다면 더 이상 그녀를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남초윤은 입꼬리를 올리며 대꾸했다.“바람둥이도 아닌데 전 여자친구의 번호를 저장하
여태껏 그는 무엇을 자제해야 하는지 몰랐다.키스도 잘해 남초윤은 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저 허리춤에 있는 옷을 움켜쥐고 리듬을 타며 호흡을 맞춰야 했다.육지율은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으며 달래듯 물었다.“불꽃놀이 더 할 거예요? 안 할 거면 차에 가요.”남초윤은 머리가 멍해진 채 차 안으로 들어갔다.그다음의 프로세스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이어졌다.강가에 정박해 있는 검은색 쿨리넌도 가볍게 흔들렸다.남초윤은 혼란스러웠다.분명 그와 이혼하기로 결정했고 나가서 살기로 마음먹었지만 계속 실패했다.육지율은 마치 사탕수수처럼 너무 달콤해 한 번, 두 번 더 맛보고 싶게 한다. 마지막에 입안에 쓰레기가 남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저항하기 어려웠다....성남, 그믐날 밤 새벽.멀리 시골 마을에서 은은한 폭죽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아래층도 식사를 끝내 북적거리던 거실이 조용해졌다.조유진은 배를 끌어안고 생리통을 겪고 있었다.어젯밤 찬물에 몸을 한 시간 담근 탓에 이번 생리는 더욱 견디기 어려웠다.보다 못한 배현수가 그녀를 끌어안으며 물었다.“가서 차라도 끓여올까?”조유진은 그나마 남아있는 이성을 부여잡고 말했다.“인기척을 들으면 밤에 취한 척한 거 들키잖아요.”순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배현수는 피식 웃더니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먈했다.“이렇게 아픈데 그게 신경이 쓰여?”“들키면 내일 밤에도 3대 1로 싸워야 해요.”그의 팔을 꼭 감싸고 있는 조유진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한 얼굴로 아파하고 있었다.그런 모습에 배현수는 가슴이 아파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좀 자. 내가 아래층에 가서 진통제 찾아올게.”오늘 밤 술을 많이 마셔 위도 아프고 몸도 반응이 있었지만 지금은 고통을 참고 그녀를 돌봐야 했다. 하지만 조금의 불평도 없었다.조유진은 배현수를 끌어당기며 말했다.“됐어요. 너무 늦었어요. 조금만 참으면 돼요. 잠들면 통증도 사라질 거예요.”배현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이렇게 아픈데 잘 수 있
평생.조유진의 입에서 나온 이 두 글자는 너무 듣기 좋았는지 이틀 동안 우울했던 기분이 갑자기 맑아졌다.배현수는 이마를 짚으며 깊은 눈빛으로 말했다.“평생으로는 부족해.”조유진은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잡았다. 배현수에게 안겨 있어 그를 살짝 아래로 내려봤다.고개를 숙이더니 그의 얇은 입술에 대고 부드럽게 뒤척이며 사랑스럽게 키스했다.키스를 하면 할수록 더욱 부드럽고 따뜻했다.냄비 안의 흑설탕 계란찜이 벌렁벌렁 끓고 있는 것을 느낀 배현수는 손을 들고 불을 껐지만 키스는 멈추지 않았다.조유진은 배현수를 보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나 지금 생리 중이에요.”배현수는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그래, 끝나면 오늘 못한 것까지 다 할게.”순간 조유진은 다리에 힘이 풀렸다....정월 초하루의 새벽.배현수는 서정호에게서 걸려 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배 대표님, 술자리에서 조유진 씨에게 약을 먹인 사람을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그날 밤 컨벤션센터 옥상 CCTV가 모두 꺼져있었어요. 이상한 것은 강 사장님도 술자리에 참석했고 조유진 씨와 함께 옥상에 갇혔어요. 강이찬 씨가 대표님에게 복수하려는 것은 아닐까요?”배현수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강이찬을 주시해. 움직임이 있다는 것은 드래곤 파가 뒤에서 부추긴다는 것을 설명하니까.”“알겠습니다.”배현수가 또 물었다.“더안의 창업자는 찾았어?”더안의 창업자가 아마 당시 사람을 보내 조유진을 바꾸려 했던 사람일 것이다. 엄준의 원수이다.더안의 창업자를 찾아야 조유진이 바뀌었던 상세 사항을 물어볼 수 있다.“아직이요. 자취를 감춘 것 같아요.”배현수는 은근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만약 더안의 창업자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다면 그때 조유진이 바뀌어 예지은에게 어떻게 넘어갔는지는 영원한 미스터리로 남을 수 있다.하지만 그는 조유진과 부담 없이 결혼해 정정당당하게 아내를 맞기를 원했다.잠깐 정신이 팔린 사이 작은 손이 그의 양복바지를 움켜쥐고 힘껏 흔들었다.“아빠! 여기 숨어서 뭐 하는
마스티프는 이내 조용해졌다.배현수가 눈을 부라리며 다시 위협하자 마스티프는 낑낑 소리를 냈다.고개를 숙여 선유를 보며 말했다.“강아지 줄 잡아.”선유는 미친 듯이 고개를 흔들며 온몸으로 거부했다.“싫어요. 아빠. 무서워요!”마스티프 개들의 외무는 흡사 사자와 같아 아주 사나워 보였다.5, 6개월밖에 안 되었지만 체형이 남산만 했고 선유의 두 배는 되었다.배현수는 개 줄을 선유에게 건네며 말했다.“네가 이름 지어줘. 이제부터 네가 주인이야.”선유는 눈을 희번덕거리며 말했다.“난 주인이 되고 싶지 않아요. 잡아 먹히면 어떻게 해요! 너무 무섭단 말이에요!”고양이와 강아지를 좋아하는 선유는 예전에 아빠에게 강아지를 기르고 싶다고 말했었다.하지만... 기르고 싶은 것은 작은 강아지였다. 아빠가 이렇게 큰 강아지를 데리고 올 줄 어떻게 알았겠는가?배현수가 설명했다.“이런 마스티프는 훈련을 받은 개들이라 너를 주인으로 생각하면 이후부터 너의 말만 들을 것이고 너를 보호해 줄 거야.”“진짜요?”배현수는 선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네가 한번 해보면 알잖아.”선유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마스티프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였다.“개야, 아빠를 물어!”마스티프는 어리둥절해 했고 배현수는 어이가 없었다.선유는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거짓말, 움직이지도 않잖아요.”정말 효성이 참으로 지극한 아이로구나...배현수의 교육하에 마스티프는 선유를 ‘주인’으로 섬기게 되었고 선유도 마지못해 강아지의 줄을 잡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작은 꼬맹이가 사자 같은 개를 끌고 오자 엄준과 도 집사는 깜짝 놀랐다.때마침 위층에서 내려오던 조유진도 깜짝 놀랐다.“선유야, 이렇게 큰 개는 어디서 난 거야?”“아빠가 준 생일선물이에요.” 선유는 개 줄을 잡고 말했다.“우리 엄마야, 짖으면 안 돼! 그러다가 아빠에게 혀가 뽑힐 거야!”그러자 마스티프는 바로 말을 듣고 조용해졌다.조유진은 걱정된 듯 물었다.“선유를 안 무는 거 확실해요?”배현수가 대답했
조유진이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 초윤아, 새해 복 많이 받아.”남초윤이 말했다.“선유 생일이 내일모레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지금 선물 사러 쇼핑몰에 가는 길이야. 선유가 특별히 갖고 싶어 하는 게 있을까?”조유진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너 요즘 이사한다고 하지 않았어? 귀한 건 필요 없어. 생일은 매년 쇠는 건데 뭐. 나중에 십 년 더 지났을 때 큰 거로 선물해줘.”남초윤은 블랙카드를 육지율에게 돌려줬고 이사도 나와야 하기에 돈이 빠듯할 것이다.남초윤이 미처 말하기도 전에 전화기 너머로 육지율의 목소리가 들렸다.“이 공주 스타일 신발이 녀석에게 어울릴 것 같아요.”조유진이 물었다.“육지율 씨와 쇼핑 중이야?”남초윤은 쑥스러운 듯 응이라고 했지만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당당하게 말했다.“응, 선유에게 양아빠가 필요하잖아. 그래서 같이 선물 사러 왔어.”무슨 상황인지 대충 짐작한 조유진은 야유하듯 말했다.“계속 이사 나올 거야?”남초윤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중에 얘기해.”아마 육지율이 옆에 있어 ‘민감’한 주제에 대해 언급하기 어려운 것 같다.전화를 끊은 후, 남초윤이 메시지를 보내왔다.[어젯밤에 이 사람이 유설영과의 관계에 대해 해명했어. 유설영의 전화번호도 삭제하고. 앞으로 유설영과 연락하지 않겠대.]조유진은 의아한 느낌이 들었다.인상을 살짝 찌푸리고 있는 조유진을 본 배현수가 물었다.“무슨 일이야?”조유진이 되물었다.“지난번에 육변팀과 유설영 엔터테인먼트가 협력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이제 협력이 끝난 거예요?”“이제 막 계약서 체결했어. 엔터테인먼트와 법률사무소는 기본 일 년, 길면 3년 계약이야. 이제 계약한 지 얼마 되었다고 벌써 계약이 끝나.”조유진도 의아했다.“방금 초윤이가 그러는데 육 변호사가 앞으로 유설영과 연락 안 하겠다고 했대요.”조유진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그런데 아까 초윤이 말로는 육변이 유설영과 다시 연락하지 않겠다고 했대요.”배현수는 바로 그 말을 부인했다.“엔터테인먼트
조유진은 남초윤의 기분이 좋은 걸 보고 차마 찬물을 끼얹을 수 없었다. 하여 말해야 할지 말지 한참 동안 망설였다.배현수가 직설적으로 말했다.“초윤 씨 기분 망가뜨리고 싶지 않으면 말하지 마.”“근데 언젠가는 알게 될 거잖아요.”“그래도 그건 나중의 일이잖아. 사실 사람은 가끔 핑계 하나가 필요하기도 해. 누구나 다 진실을 알고 싶어 하는 게 아니야.”조유진이 말했다.“육 변호사님은 사랑 고수라서 초윤이는 절대 상대가 아니에요.”그러자 배현수가 말했다.“만약 지율이가 앞으로 다시는 사적으로 유설영 씨와 연락하지 않겠다고 한다면 초윤 씨도 아마 저도 모르게 그러길 바랄 거야. 사적으로든 공적으로든. 지율이한테 소유욕이 그렇게 강한데 언젠가는 알게 될 진실을 알려줘봤자 며칠 미리 속상한 것 말고는 아무것도 달라지는 게 없어. 초윤 씨가 두 사람이 일적으로 연락한다는 거 알게 되더라도 마음을 접거나 이혼할 것 같아? 이혼 소리를 3년이나 했는데 이혼했어?”진짜 떠나고 싶은 사람은 아무 말 없이 떠나지, 절대 상대에게 떠난다고 말하면서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때 조유진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하기 전에 이상하리만큼 조용했던 것처럼 말이다.“...”배현수의 말에 조유진은 말을 잇지 못했다. 배현수의 말이 다 맞았고 심지어 정곡을 찔렀다.조유진이 생각하다가 말했다.“적어도 너무 깊게 빠지진 않잖아요. 그럼 진짜 이혼할 때도 너무 힘들지 않을 거고.”“지금 말해줘봤자 며칠 더 고통스러울 뿐이야. 그것 말고는 진짜 달라지는 게 하나도 없어.”배현수가 생각하는 게 역시 일반 사람과 조금 달랐다. 조유진이 웃으면서 말했다.“그럼 이게 환상 속에서 사는 거랑 뭐가 달라요?”배현수는 조유진을 빤히 쳐다보았다.“감정은 원래 그래. 진실이 아니라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믿거든.”조유진은 결국 참지 못하고 남초윤에게 귀띔 문자를 보냈다.[남자가 하는 말을 믿어선 안 돼.]한참이 지난 후 남초윤이 답장을 보냈다.[배현수가 너한테 거짓말했어? 나쁜 놈
뉴스가 계속 이어졌다.“시신 목 부분에 목 졸린 흔적이 명확하게 있었다고 합니다. 끈에 목을 졸려서 죽은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조유진은 옆에 있던 조선유를 품에 안고 눈을 가렸다. 그런데 호기심 많은 조선유가 눈을 가린 그녀의 손을 잡아당겼다.“엄마, 누가 죽었어? 나쁜 사람이야?”뉴스가 끝나고 나서야 조유진은 조선유를 풀어주었다.“일단 올라가 있어. 엄마가 할아버지랑 할 말이 있어.”그러자 조선유가 고분고분 말을 들었다.“알았어. 루루야, 나랑 올라가서 레고하자.”루루는 폴짝폴짝 뛰어서 조선유의 옆으로 달려갔다. 조선유의 방에 가는 걸 루루는 가장 좋아했다. 안에 온통 장난감이니까. 그 장난감들은 사람도 놀 수 있고 강아지도 놀 수 있었다.조선유가 레고를 하면 루루는 옆에서 망가뜨리느라 여념이 없었다.조선유와 루루가 위층으로 올라간 후 조유진이 말했다.“아빠, 그때 사람 시켜서 날 성남에서 데려간 게 진짜 더안의 장동원이에요?”엄준은 조유진을 빤히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그때 더안과 성행 그룹이 건축 자재의 공급 시장을 점령하려고 경쟁하고 있었어. 내 밑에서 일하던 애들이 나 몰래 언론사를 매수했는데 더안에 품질 불량의 건축 자재가 있다고 터트린 거야. 근데 언론사에서는 더안의 건축 자재에 방사성 물질이 있어서 암을 유발한다고 사실을 왜곡했어.”“20여 년 전의 언론사는 대중들한테 엄청 권위가 있는 존재라서 언론에서 뭐라고 하면 사람들은 곧이곧대로 다 믿었거든. 여론 때문에 더안은 시장을 잃었고 나중에 부실 경영 때문에 자금도 부족해졌어. 성행 그룹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성남의 각 은행과 금융회사와 손을 잡고 더안의 대출까지 싹 다 끊어버린 거야. 결국 3개월도 안 돼서 회사는 완전히 부도났어.”자본 시장은 참으로 잔인했고 피바람도 자주 불었다.조유진은 갑자기 마음이 복잡해졌다.“그러니까 사실 그때 더안의 건축 자재가 암을 유발하는 건 아니었네요? 더안도 결국에는 모함당한 피해자고?”엄준의 두 눈에 미안함이 스쳤다
조유진이 갑자기 흠칫하더니 눈빛이 마구 흔들렸다.“아빠, 나랑 현수 씨 결혼 허락하신 거예요?”엄준의 말투는 여전히 교만했다.“네가 그렇게 좋다는데 난들 어쩌겠어. 허락하는 수밖에. 선유 봐서 겨우 허락한 거야.”조유진이 피식 웃었다.“우리 선유 대단한데요?”“그나저나 선유를 나한테 맡기기로 한 약속 잊지 않았지? 절대 한 입으로 두말해선 안 돼. 나이 먹으니까 집에서 애나 보면서 개도 키우고 심심하면 바둑이나 한판 두고 이렇게 살고 싶어.”조유진이 대답했다.“알았어요. 선유도 그걸 바랄걸요? 걔는 대제주로 돌아갈 생각이 아예 없는 것 같아요.”엄준에게 있어서 조선유는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손녀였다....조유진이 방으로 들어와 보니 배현수가 노트북을 켜고 일하고 있었다.남자든 여자든 업무에 집중할 때면 왠지 모르게 평소보다 더 지적이고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특히 배현수가 은테 안경까지 끼고 있어서 깔끔하고 단정하기도 했다.이 안경은 독이 채 빠져나가지 않아 시력이 나빠졌을 때 조유진이 사준 안경이었다.조유진은 안방 문을 닫고 그에게 다가가 물었다.“시력이 예전보다 더 안 좋아졌어요?”예전에 노트북을 볼 땐 안경을 끼지 않던 그였다.조유진이 다가오자 배현수도 일을 멈추고 의자에 기대더니 조유진을 다리 위에 앉혔다. 그러고는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고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손가락을 어루만졌다.“안경 쓰지 않고 컴퓨터를 계속 들여다보면 눈이 피곤하더라고. 근데 도수는 아주 낮아.”조유진이 농담을 건넸다.“현수 씨도 이젠 나이 먹었잖아요.”배현수는 눈살을 살짝 찌푸리더니 길고 힘 있는 손으로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힘껏 잡아당겨 품에 끌어안았다. 말투가 진지하면서도 위압감이 넘쳤다.“나이 먹었다니? 그럼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귀여운 어린놈이 좋다는 거야?”그때 남자의 예민한 부분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그것도 아주 심하게... 남자의 그곳이 조유진에게 닿고 말았다.사실 31살은 남자든 여자든 한창 젊고 유망하며 기세
육성일의 압도적인 기운은 전화 너머에서도 남초윤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말을 하지 않아도 그 묵직한 압박감은 느껴졌다. 그때 어떻게 그런 용기를 냈는지, 어떻게 육씨 집안에 시집갔는지 스스로도 의아했다. 만약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차라리 구걸을 하더라도 절대 육씨 집안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남초윤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할아버지, 부탁드려요. 저희가 약속했던 건 두 달 전이었잖아요. 아직 두 달이 채 안 지났고, 제가 지금 아기를 가졌다고 해도 확인이 안 될 수도 있어요.” 그 말에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기에 육성일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할아버지의 전화를 겨우 넘겼지만 전화를 끊자마자 다시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이번엔 ‘개자식’ 육지율이었다. “...” 할아버지와 손자는 통화 시간까지 맞춘 것처럼 기가 막히게 연달아 전화를 걸어온다. 그녀는 냉랭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왜요?” 육지율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무슨 폭탄이라도 먹었어요?” 육지율이 자신의 책을 내리게 만들고, 지난달과 이번 달 원고료도 다 날려버린 상황에서 그녀가 전화를 받아준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하지만 결혼 생활은 아직 유지 중이었고 필요한 것도 있으니 남초윤은 결국 목소리를 가다듬고 좀 더 부드럽게 말했다. “지율 오빠, 무슨 일이에요?” “... 뭐라고 불렀어요?” “지~율~오~빠~” 그녀는 유설영의 말투를 흉내 내며, 아니, 오히려 더 능숙하게 말했다. 육지율은 순간 닭살이 돋았다. “제발 평소처럼 말해요. 저녁에 내 친구가 귀국하는데 같이 식사해요. 6시에 잡지사로 데리러 갈게요.” 남초윤은 단번에 거절했다. “난 안 갈래요.” “저녁에 뭐 다른 약속 있어요?” 남초윤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결혼한 지 3년 됐지만 당신은 나한테 친구 한 명도 소개해 준 적 없잖아요.” 그리고 이제 곧 이혼할 텐데 친구를 만날 필요는 더 없었다.이혼하고 나서 친구들이
조유진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학교에서 누가 너 괴롭히진 않았어?” 배선유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응, 나 괴롭히는 사람 없어. 할아버지가 우리 학교에 엄청난 돈을 기부하셔서 선생님들도 항상 나한테 잘해주시고 많이 관심 해주셨어. 그래서 나도 함부로 장난칠 수가 없어. 혹시 선생님이 할아버지한테 이르실까 봐.” 배현수는 이 말에 전혀 놀라지 않았다. 배선유는 작은 악동처럼 말이 많았고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는 아이였다. 배현수의 말에도 자주 대꾸를 하니, 만약 동급생에게 괴롭힘을 당했다면 벌써부터 떠벌렸을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남을 괴롭히는 쪽에 더 가까웠다. 성남에서 엄준은 배선유를 엄청나게 아끼며 키웠고, 그래서인지 아이는 주눅이 들지 않고 활발하게 자랐다.조유진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다행이네. 우리 선유가 공부를 게을리할 걱정은 없겠어.” 배현수는 딸을 겁주듯 말했다. “너 공부 안 하고 일찍 연애라도 시작하면, 널 대제주에 데려와서 24시간 동안 지켜볼 거야.” 배선유는 입술을 내밀며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이건 너무 심해요! 나 혹시 쓰레기통에서 주워 온 거 아니에요?” 배현수는 코웃음을 치며 엄격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말했다. “공부 안 하면 좋은 날은 없을 거야.” 잠시 후, 학교 종이 울릴 시간이 가까워졌다. 배선유는 전화를 끊으려다가 친구가 그린 결혼사진 두 장을 영상 속으로 건네받았다. “선유야! 너랑 지우의 결혼사진 내가 그려놨어! 한 번 봐봐!” 배선유가 물었다. “한 장에 얼마야?” “너니까 공짜로 해줄게! 대신 다음번엔 나랑 결혼해 줄 수 있어?” “생각해볼게!” “...” 이 속도로라면 그들 부부는 도대체 몇 명의 사위를 맞이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한편, 스타라이트 매거진에서.남초윤이 사이트 편집자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그녀의 책은 예상대로 플랫폼에서 삭제되었고 이달 원고료는 한 푼도 들어오지 않
[합법적 부부] 함께 올라온 사진엔 결혼반지를 낀 두 손이 하트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이 게시글이 올라가자마자 마치 깊은 바다에 떨어진 폭탄처럼 큰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몰려들어 반응했다. 육지율: [8년의 여정 끝에 드디어 자랑할 수 있네!] 송하진: [어! 전 두 사람 목숨 구해준 은인이에요. 제가 아니었으면 두 사람이 어떻게 혼인신고까지 했겠어요? 당장 절 주빈으로 식사 대접해요!] 남초윤: [아아아아! 유진이를 결혼이라는 무덤 속으로 끌어들이다니! 대표님 너무하세요!] 엄창민: [내 여동생한테 잘해요. 혹시라도 괴롭히면 내 주먹이 용서 못 해요!] 엄명월: [형부! 이렇게 좋은 일에 저희한테 뭐라도 사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강이찬: [축하해, 결국 원하는 대로 됐네.] 심미경: [백년해로하세요. 행복하길 기원합니다!] 서정호: [대표님, 일 다 끝냈으면 빨리 돌아오세요. 의사 선생님이 여기서 엄청 화내고 있어요. 저 더는 못 버틸 것 같아요!] 학교 가기 싫어: [와! 아빠랑 엄마가 드디어 결혼했네요! 헤헷, 아빠, 나도 오늘 결혼했어요!] 배현수는 배선유의 댓글을 보고 순간 검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조유진이 운전하며 그의 미세한 변화를 눈치채고 물었다. “왜 그래요?” “선유가 결혼했다는데.” “뭐라고요?” 조유진은 깜짝 놀라 차를 도로 옆에 세우고 급히 배선유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다. 저쪽에서 배선유는 학교에 있었는데 마침 쉬는 시간이었다. 외국어 학교라 분위기가 자유로워 아이들은 평소에도 부모님과 연락을 하기 위해 휴대폰을 가지고 다녔다. 배선유는 전화를 받자마자 얼굴을 카메라 앞으로 들이밀었다. “엄마, 아빠! 나 사진 보고 싶어!” 조유진은 그녀에게 사진을 보여주고 나서 물었다. “선유야, 아까 결혼했다고 했잖아. 누구랑 결혼한 거야?” “우리 반 한지우랑! 엄마, 나 오늘 엄청 많은 축의금을 받았어! 내가 다 적어 놨어!”
조유진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갈게요.” 그가 환자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이번 한 번은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 다음 날 이른 아침. 서정호가 산성 별장에서 두 벌의 정장과 결혼 서류를 준비해왔다. 조유진은 오랜만에 풀 메이크업을 하고 머리도 고데기로 말았다. 그녀는 하얀 오프숄더 드레스를 입고 사진에 잘 나올 수 있도록 최대한 신경 썼다. 그녀는 한동안 이렇게까지 꾸미지 않았는데 하이힐을 신고 배현수 앞에 서니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조금 어색해졌다. 그래서 물었다. “나 어때요?” “아름다워. 넌 언제나 아름다워.” 배현수는 전혀 망설임 없이 그녀를 칭찬했다. 조유진은 웃음을 참으며 옆에 있던 넥타이를 집어 들고 배현수에게 매어주었다. 배현수는 그녀의 손길에 고개를 숙이며 협조했다. 조유진은 평소와 다르게 더 복잡하고 정중한 ‘엘드리지 매듭’으로 넥타이를 맸는데 배현수는 평소에 간단한 윈저 매듭만 했었다. “이 매듭은 좀 생소하네.” 조유진은 넥타이를 다 매고 나서 그의 셔츠와 정장 재킷의 깃을 정리해 주었다. “이게 엘드리지 매듭이라고 해요. 중요한 자리에서 어울리는 방식이죠. 어때요, 괜찮아요?” “멋져. 하지만 여보, 우리 서둘러야 해. 조금 있으면 의사가 올 거야.” 웃으며 농담하듯 이야기하던 배현수는 조유진의 외투를 챙겨 그녀의 어깨에 걸쳐 주고, 그녀를 한 손으로 감싸 병실을 몰래 빠져나갔다. 두 사람은 마치 도망치듯 병원을 빠져나와 차에 올랐다. ... 그들이 빠져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의사가 병실에 회진을 왔다. 하지만 환자와 보호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그곳에는 ‘무관한 사람’만 남아 있었다. 의사는 엄숙한 표정으로 서정호를 보며 물었다. “환자는 어디 갔죠? 튜브까지 다 뽑다니, 누가 뽑았습니까?” 서정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환자 본인이 뽑았습니다.” “도대체 어디 간 겁니까? 팔을 정말 망가지게 할 작정인가요
배현수의 가슴이 떨렸다. 그는 조유진과 이마를 맞대며 낮게 속삭였다. “그때 난 네 옆에 있진 않았지만 네 뒤에서 계속 지켜보고 있었어. 그런데 왜 울었어?” “현수 씨 생각이 났어요.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게 너무 슬펐거든요. 내가 이렇게 좋은 남자를 잃어버린 것 같아서, 그게 너무 아쉽고 후회스러웠죠. 그래서 울었어요.” 지금 이렇게 그를 바라보고 있으니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은 느낌이었다. 조유진의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었다. 하지만 이번 눈물은 슬픔이나 후회 때문이 아니었다. 감동과 감사함 때문이었다. 운명이 그들을 온갖 고난 속에서도 끝끝내 묶어 놓았고, 그들 사이에선 이제 더 이상 헤어질 수 없는 깊은 연대가 생겼기 때문이다. 배현수는 긴 손가락을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천천히 끼워 넣으며 손을 꼭 맞잡았다. 순간 그들의 손바닥에서 따뜻함이 퍼져나갔다. 그는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진아, 넌 한 번도 날 잃은 적 없어. 우리가 몇 번을 떨어져도, 얼마나 오랫동안 떨어져 있더라도 난 결국 널 찾아내서 꼭 안고 말해줄 거야. 사랑한다고. 오직 너만 사랑한다고.” 처음부터 끝까지, 조유진은 배현수의 유일한 선택이었고 그 선택은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조유진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현수 씨, 우리 영원히 함께할 수 있을까요?” “그럼.” 그의 대답은 8년 전과 똑같았다. 짧지만 확고했으며 1초의 망설임도 없었다. 조유진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손목에 걸린 달콤한 연녹색 비취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상처가 나으면 우리 같이 아주머니를 위한 좋은 묘지를 고르러 가요. 그분을 위한 의관묘라도 만들어 드리는 게 어때요?” “아직도 ‘아주머니’라고 불러?” 조유진은 순간 얼굴이 뜨거워지며 말투를 바꿨다. 배현수는 그녀의 팔찌를 손가락으로 살며시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풍수 좋은 곳을 따로 고를 필요는 없어. 어머니께
육지율은 그 필명이 어딘가 익숙하다고 느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문득 기억해 냈다. “이 자식! 기억났어! 이 녀석이 책에서 날 모욕하지 않았나? 내 명성을 망가뜨렸잖아?” 남초윤은 급하게 말했다. “잘못 본 거 아니에요? 비엘 작가가 주인공을 모욕할 리가 없어요! 그러면 밥숟가락 들고 욕하는 것과 뭐가 다르겠어요?” “나를 ‘수’로 묘사한 게 모욕이 아니고 뭐예요? 왜 항상 배현수가 공이냐고?” 남초윤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는 그 부분을 신경 쓰고 있었던 거였다.남초윤은 그가 진짜 작가를 고소할까 봐 걱정되었다. 그래서 변명하듯 말했다. “다음번엔 지율 씨가 공이고, 배 대표님이 수가 될 수도 있잖아요. 원래 BL 소설에서는 공수 구분이 모호해요. 겉보기에 수 같아도 사실은 공일 수도 있다고요!” 조유진은 살짝 의문을 제기했다. “난 현수 씨가 수 같지는 않았는데. 만약 현수 씨가 진짜 수라면 캐릭터 붕괴지. 차라리 육 변호사님이 수인 게 더 어울려. 자유롭고, 매력적이고, 다정하잖아.”“?”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육지율은 얼굴이 시커멓게 변하며 조유진에게 따졌다. “아니, 조유진. 내가 약해 보이는 수 같은 느낌을 준다고?” “...” 배현수는 차갑게 말했다. “유진이가 쓴 것도 아닌데 왜 화내? 그럴 시간 있으면 작가나 고소해.” 남초윤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그냥 재미로 쓴 거지 무슨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니잖아요? 작가를 고소하면 너무 쪼잔해 보일 거예요!” 하지만 육지율은 이성을 잃고 이를 악물었다. “쪼잔해 보이든 말든, 그 책을 하차할 거예요!” 자신이 소설 속에서 수 역할로 묘사되었고, 그것도 많은 사람에게 읽히고 있다는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조유진은 객관적으로 말했다. “사실 책 내용은 나쁘지 않아요. 꽤 재미있고 독자도 많아요.” “독자가 몇 명인데?”“몇만 명 정도?” “뭐?”‘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날 수로 상상했
병실에서 조유진은 그가 누워있는 침대 옆에 앉아 있다가 잠들었다. 잠에 들어서도 손가락이 배현수의 손에 살짝 얽혀 있었는데 다정하고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이 사진은 완전히 남자 친구 시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입원 생활이 지루하다고 하다니.육지율이 댓글을 남겼다. “뭐야, 입원했어? 혹시 가정 폭력이라도 당한 거야?” 댓글을 남기고 나서 육지율은 차에 시동을 걸며 남초윤에게 말했다. “과일 바구니 좀 사서 병문안이나 가요. 친구가 입원했어요.” “친구? 설마 배 대표님이세요? 어디 아파요?” 육지율은 웃으며 말했다. “글쎄요. 진짜 아플 수도 있고 그냥 꾀병일 수도 있고.” 혹시 모른다. 꾀병일지도....병원에서는 조금 전 장은숙이 산성 별장에서 저녁 식사를 가져왔다. 수술 후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 밤은 죽 같은 유동식만 먹어야 했다. 배현수는 오른손을 쓸 수 없었기에 조유진이 죽 그릇을 들고 숟가락으로 그에게 먹여주고 있었다. 첫 숟가락을 그의 입 앞에 가져가자 배현수는 뜨겁다고 투덜댔다. 조유진이 후후 불어 온도를 맞춘 후 말했다. “이제 적당히 식었어요.” 배현수는 그제야 죽을 한 입 삼켰다. 그 순간 병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장난스러운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며칠 못 본 사이에 아기로 됐네? 밥도 혼자 못 먹고, 조유진이 널 너무 오냐오냐한 거 아냐?” 조유진이 놀라서 뒤돌아보니, 육지율과 남초윤이 병실에 들어와 있었다. 그녀는 웃으며 설명했다. “오른쪽 어깨에 부상을 입었어요. 의사 선생님이 며칠 동안 오른손은 쓰지 말라고 하셨어요. 상처가 더 심해질 수 있거든요.” 그러자 육지율은 다짜고짜 그의 오른쪽 어깨를 툭 쳤다. “진짜야?” 배현수는 고통에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욕설을 퍼부었다. “이 미친놈아!” 조유진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변호사님, 진짜로 다쳤다니까요! 어깨에 구멍이 났다고요, 함부로 건드리지 마세요!
그녀를 겨우 한 번 데리러 온 김에 출퇴근길의 불편함을 느끼고는 아예 차를 사서 해결하려고 하다니, 정말 육지율 다운 방식이었다.이 4S 매장에서 파는 차들은 모두 포르쉐였고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가장 저렴한 모델도 수천억 원대였다. 남초윤은 이미 남씨 집안이 육지율에게 너무 많은 빚을 지고 있었기에, 그가 차를 선물해 주겠다고 해도 받을 수 없었다.남초윤은 차분히 말했다. “앞으로는 출퇴근 길에 당신을 귀찮게 하지 않을 테니, 굳이 차를 선물할 필요는 없어요.”육지율은 순간 멈칫했다가 살짝 비웃으며 말했다. “차 한 대 선물한다고 귀찮다는 딱지가 붙어요? 이런 확산적 사고방식은 참 대단하네.”“....”정말 그런 게 아니란 말인가?평소에도 성격이 불 같았던 육지율은 차를 주겠다고 하면서도 그녀를 달래는 상황이 우스웠는지 어이없어 웃었다. 둘 중 누가 더 성격이 나쁜지 모를 일이었다.영업 직원은 남초윤을 육지율이 외부 애인으로 오해했고, 이 큰 거래가 깨질까 봐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가씨, 변호사님께서 차를 사주시는 건 출퇴근 시간을 줄여서 그 시간 동안 조금이라도 더 쉴 수 있게 해주려는 마음이 아닐까요?”남초윤은 더 이상 그의 돈을 쓰고 싶지 않았다. 이미 갚을 수 없는 빚이 너무 많았고 계속해서 더 쓴다면 두 아이를 낳아야 겨우 그 빚을 다 갚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러나 육지율은 그 여느 때처럼 행동했다. 그는 VIP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빨리 골라요. 차 안 사면 집에 못 돌아가요.”남초윤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여자 영업 직원이 다가와 다양한 모델을 소개할 때, 그저 듣기만 했다. 그 직원은 미소를 띠며 말도 아주 달콤하게 했다. “변호사님은 저희 매장의 단골이세요. 그런데 여자를 데리고 온 건 이번이 처음이네요. 변호사님이 정말로 많이 아끼시는 것 같아요. 비싼 차를 고르시면 아마 더 기뻐하실 거예요.”역시, 판매왕이었다.감정적 가치를 제공하는 법을 너무나 잘 아는 직원이었다. 하지만 남초윤은 그저 외부의
남초윤은 결혼 상태를 한 번도 업데이트한 적이 없었다. 동료들 눈에는 여전히 미혼으로 보였다.처음 그녀와 육지율의 스캔들이 터졌을 때 온 세상이 떠들썩했지만 사실 모두 육지율의 매력적인 외모 때문이었다. 아무도 남초윤처럼 작고 평범한 존재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육지율이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들의 침대 사진이 언론이나 남재원에게 유출되지 않은 것도 기적이었다. 사람들은 그저 육지율이라는 유명한 바람둥이가 ‘함정'에 빠져 순진한 여자와 관계를 맺은 후, 마지못해 결혼했다는 소문만 믿고 있었다.육지율이 연예계 인물이 아닌 만큼 동료들 중에서도 아무도 그 사건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육지율이 ‘좋은 집안의 아들’ 이라는 사실만 기억하고 그의 결혼 상대가 누군지에는 무관심했다. 그녀는 어디에도 크게 드러나지 않았고 언론에서도 그의 곁에 서는 일이 거의 없었다. 남초윤은 그렇게 세상 사람들의 눈에 숨겨져 있었다.동료들은 그저 그녀가 조금 집안 배경이 있는 부유한 여자인 줄로만 알았고 육지율의 아내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어쨌든 육지율의 아내라면 아무리 상황이 나빠도 그들과 같이 일하며 고생할 일은 없을 테니까. 설령 과거에 파파라치 일을 했더라도 그렇게 높은 곳에 시집갔다면 육씨 집안이 그녀를 계속 그 일을 하도록 놔두지 않았을 거라고 여겼다.비록 세상은 모두 직업의 평등을 외치고 있지만 상류 사회에는 여전히 그들만의 규칙이 있었다. 체면과 명예가 그들의 신분과 존엄을 상징했다. 파파라치라는 직업은 육씨 집안에게 있어 절대 자랑스러울 수 없는 일이었으니, 육지율과 강란희가 그녀에게 좀 더 체면 있고 유망한 직업들을 제안했지만 남초윤은 그들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그렇게 시간을 보낸 끝에 동료들은 하나둘씩 퇴근하고 남초윤만 남았다. 한 시간이 흐른 뒤 남초윤은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 저녁 7시가 되었다. 그녀는 통화 기록을 훑어보고 다시 한 번 메시지를 확인했지만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아마도